
동의 없는 성관계는 강간이다 | ‘비동의강간죄’를 지지해야 하는 이유
이제 질문을 바꿀 때가 됐다. 왜 피해자는 더 강하게 저항하지 않았는가가 아니라, 왜 상대방이 동의하지 않았는데 성적 행위를 했는가.
2026년 09월 08일누군가 성관계를 원하지 않는다고 했는데도 강제로 성관계를 했다면 그것은 강간일까. 아마 대부분의 사람은 그렇다고 대답할 것이다. 그런데 지금 한국의 강간죄는 이 당연해 보이는 질문에 반드시 그렇다고 답하지 않는다.
현행 형법 제297조는 “폭행 또는 협박으로 사람을 강간한 자”를 처벌하도록 규정한다(국가법령정보센터, 형법 제297조). 강간죄에서 법이 우선적으로 묻는 것은 상대방이 성관계에 동의했는지가 아니라, 가해자가 폭행이나 협박을 했는지다.
물론 법원의 해석이 과거와 똑같은 것은 아니고, 폭행·협박이 없더라도 준강간이나 위력에 의한 간음 등 다른 범죄가 성립할 수 있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이 역시 현실의 성폭력을 충분히 포괄하지 못한다. 준강간은 피해자가 ‘심신상실 또는 항거불능’ 상태였는지가 핵심 요건이 되는데, 사건 중간의 기억이 남아 있으면 항거불능 상태가 아니었다고 판단하고, 반대로 기억이 없으면 피해를 입증할 증거가 부족하다고 보는 식의 문제가 반복되어 왔다. 위력에 의한 간음 역시 적용 대상과 요건이 제한적이어서, 모든 비동의 성관계를 포괄할 수 있는 규정은 아니다.
결국 형법 제297조의 강간죄에서 ‘동의가 없었다’는 사실 자체는 여전히 구성요건이 아니다. 상대방이 원하지 않았다는 것만으로는 부족하고, 여기에 더해 법이 요구하는 수준의 폭행이나 협박이 있었다는 점까지 입증해야 한다. 바로 이 강간죄의 구성요건이 바뀌어야 한다.
2019년 전국성폭력상담소협의회가 전국 66개 성폭력상담소에 접수된 강간·유사강간 상담 사례 1,030건을 분석한 결과, 직접적인 폭행이나 협박이 있었던 사례는 28.6%였다. 반대로 직접적인 폭행·협박 없이 발생한 피해는 71.4%에 달했다. 특히 미성년자의 경우 76.4%, 장애인의 경우 73.9%가 직접적인 폭행·협박이 없는 사례였다(한국성폭력상담소, 「직접적인 ‘폭행·협박’ 없이 발생하는 강간 전체 71.4%」).
몇 년 뒤에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전국성폭력상담소협의회가 119개 상담소에서 2022년 한 해 동안 상담한 강간·유사강간·강간미수·준강간 피해 4,765건을 분석했을 때도 직접적인 폭행·협박이 없는 피해가 2,979건, 62.5%에 달했다(한국성폭력상담소, 「‘동의’를 의제화하기 - 현재와 고민」).
생각해 보면 그다지 놀라운 결과도 아니다. 성폭력은 낯선 사람이 골목에서 흉기를 들이대는 방식으로만 일어나지 않는다. 아는 사람 사이에서, 연인이나 배우자 사이에서, 직장과 학교에서, 돌봄과 의료의 관계에서,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의존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도 일어난다.
저항
한국성폭력상담소의 상담과 연구 자료에는 상습적으로 폭력을 행사해 온 남자친구가 두려워 적극적으로 저항하지 못한 경우, 입원 중인 환자와 의료인의 관계에서 일어난 성폭력, 낯선 여행지에서 가이드에게 의존해야 하는 상황에서 벌어진 성폭력 등이 등장한다. 잠들어 있거나 술·약물로 몸을 제대로 가누기 어려운 상태를 이용하거나, 분명히 거부했는데도 기습적으로 성적 행위를 하는 경우도 있다(‘강간죄’개정을위한연대회의, 《강간죄 개정을 위한 동의 안내서》).
최근에는 이 문제를 너무 선명하게 보여주는 사건도 있었다. 2026년 ‘동의없는 성폭력 재판소원 공동대책위원회’가 재판소원을 청구한 사건에서 피해자는 성관계 요구를 75차례 거부했다. 거부 의사는 객관적인 자료를 통해서도 확인됐다. 그런데 1심과 2심 법원은 피해자의 거부 의사는 인정하면서도 법이 요구하는 수준의 폭행 또는 협박에는 이르지 않았다고 보아 무죄를 선고했다. 피해자의 요청에도 검찰이 상고하지 않아 판결은 확정됐다(한국성폭력상담소, 「75차례 거부해도 성폭력 무죄, 동의없는 성폭력 재판소원」).
75차례의 ‘싫다’가 확인되어도 그것만으로 강간죄가 되지 않는다면, 우리는 무엇을 더 물어야 하는가. 피해자가 필사적으로 저항했는가. 가해자가 주먹으로 때렸는가. 죽이겠다고 협박했는가. 그보다 먼저 물어야 하는 질문이 있다. “상대방은 이 성적 행위를 원했는가. 동의했는가.” ‘비동의강간죄’가 요구하는 변화의 핵심은 바로 여기에 있다.
강간을 폭행·협박 중심으로 판단하면 피해자의 저항은 자연스럽게 수사와 재판의 주된 쟁점이 된다. 얼마나 강하게 거부했는지, 왜 도망치지 않았는지, 왜 소리를 지르지 않았는지, 사건 이후 왜 가해자를 다시 만났는지 같은 질문들이 따라붙는다.
하지만 사람은 위험 앞에서 언제나 싸우거나 도망치는 방식으로만 행동하지 않는다. 두려움 때문에 몸이 굳을 수도 있고, 더 큰 폭력을 피하기 위해 저항을 포기할 수도 있다. 친밀한 관계에서 오랜 시간 폭력과 통제를 겪어온 사람에게는 상대방의 요구를 거부하는 것 자체가 두려운 일이 될 수 있다.
권력관계도 중요하다. 자신의 고용과 승진을 좌우할 수 있는 상사, 평가권을 가진 교수나 교사, 치료를 담당하는 의료인, 활동지원과 돌봄을 제공하는 사람, 체류 자격이나 생계를 사실상 좌우할 수 있는 고용주를 상대로는 물리적 폭력이 없어도 ‘싫다’고 말하는 것이 대단히 어려울 수 있다.
‘강간죄’개정을위한연대회의가 2025년 발간한 《강간죄 개정을 위한 동의 안내서》는 준강간뿐 아니라 위력을 이용한 성폭력, 성매매 상황에서의 성폭력, 청소년·장애여성·이주여성에 대한 성폭력, 부부 사이의 성폭력 등 다양한 사례를 함께 살핀다. 여기에는 하나의 공통점이 있다. 사람들 사이의 힘은 언제나 평등하지 않으며, 따라서 자신의 의사를 표현하고 관철할 수 있는 조건도 누구에게나 똑같이 주어져 있지 않다는 것이다.
고용주에게 체류권을 의존하는 이주여성에게, 일상생활에서 타인의 지원이 필요한 장애여성에게, 성인과 불평등한 권력관계에 놓여 있는 청소년에게 “싫으면 싫다고 하면 되지 않았느냐”, “왜 도망가지 않았느냐”고 묻는 것은 쉽다. 그러나 바로 그런 질문이 성폭력이 발생한 현실의 권력관계를 지워버린다.
강간죄의 판단 기준을 동의 여부로 바꾸자는 것은 단지 처벌되는 범죄의 숫자를 늘리자는 요구가 아니다. 성폭력을 바라보는 질문 자체를 바꾸자는 것이다. 피해자가 얼마나 열심히 저항했는지를 심문하는 대신, 성적 행위를 한 사람이 상대방의 의사를 어떻게 확인하고 존중했는지를 묻자는 것이다.
싫다고 하지 않았다?
‘비동의강간죄’에 반대할 때 자주 등장하는 이야기가 있다. 동의를 기준으로 하면 성관계를 할 때마다 계약서라도 써야 하느냐는 것이다. 나중에 한 사람이 마음을 바꿔 “동의하지 않았다”고 말하면 다른 한 사람이 하루아침에 성범죄자가 되는 것 아니냐는 주장도 반복된다.
하지만 이것은 성관계에서의 동의를 지나치게 기괴한 것으로 만들어 놓고 반박하는 방식이다.
우리는 이미 일상의 수많은 관계에서 상대방의 의사를 확인하며 살아간다. 무엇을 먹을지, 어디에 갈지, 손을 잡아도 되는지, 집에 들어가도 되는지를 말과 행동, 표정, 관계의 맥락을 통해 서로 확인한다. 성적 행위만 갑자기 상대방의 의사를 확인할 수 없는 신비로운 영역이 될 이유는 없다.
동의는 한 번 받아두면 이후의 모든 성적 행위에 적용되는 이용권도 아니다. 연애한다고 해서 언제 어디서든 성관계에 동의한 것이 아니다. 집에 함께 들어갔다고 성관계에 동의한 것도 아니다. 과거에 성관계를 했다고 오늘의 성관계에 동의한 것도 아니며, 한 종류의 성적 접촉에 동의했다고 다른 모든 행위에 동의한 것도 아니다. 처음에는 원했더라도 중간에 마음이 바뀌면 멈출 수 있어야 한다.
동의란 결국 한 번의 ‘YES’를 확보하는 일이 아니라, 관계와 상황이 달라지는 동안 서로의 의사를 계속 살피고 조정하는 일에 가깝다.
한국성폭력상담소가 2021년 실시한 인식조사 결과는 그래서 흥미롭다. 응답자의 96.7%는 ‘동의 없이 이루어진 성관계는 성폭력’이라고 답했다. 동시에 60.5%는 성폭력을 동의 여부로 판단하면 성범죄 해당 여부를 판단하기 모호해질 수 있다고 답했다. 동의를 항상 또는 상황에 따라 묻는다는 응답은 98.8%였지만, 42.9%는 상대의 동의를 암시나 느낌으로 파악한다고 했다(한국성폭력상담소, 「적극적 합의를 시작할 때를 소개합니다」.
이 간극은 꽤 중요하다. 우리는 이미 동의 없는 성관계가 잘못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런데 법과 실제 관계의 문제로 들어가면 갑자기 “그 동의를 어떻게 확인하느냐”며 주저한다. 사회의 상식은 이미 상당히 앞으로 나아갔는데, 법과 성문화가 그만큼 따라가지 못하고 있는 셈이다.
무고
또 하나 반복되는 반론은 ‘비동의강간죄’가 도입되면 피해자의 말만으로 유죄가 선고되고 피고인이 자신의 무죄를 입증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그렇지 않다.
강간죄의 구성요건을 동의 여부를 중심으로 바꾼다고 해서 형사재판의 기본원칙까지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범죄사실을 입증할 책임은 여전히 검사에게 있고, 유죄는 합리적인 의심이 없을 정도로 입증되어야 한다.
법원 역시 피해자의 한 문장만 떼어놓고 판단하지 않는다. 당사자의 진술, 두 사람의 관계, 사건이 일어난 경위와 당시 상황, 사건 전후의 행동, 문자메시지와 통화 내용, 목격자나 주변인의 진술 등 사건마다 존재하는 여러 증거를 종합해서 판단한다.
사실 성폭력 재판에서 당사자의 의사와 동의 여부는 이미 중요한 판단 대상이다. 한국성폭력상담소가 소개한 법률가들의 지적처럼, 실제 성폭력 사건에서 법원은 피해자의 의사와 사건의 맥락을 이미 폭행·협박 여부와 함께 살펴보고 있다. ‘동의’라는 개념이 어느 날 갑자기 법정에 처음 등장하게 되는 것이 아니다(한국성폭력상담소, 강간죄 개정 FAQ).
‘비동의강간죄’는 무죄추정의 원칙을 없애자는 법도 아니고, “동의하지 않았다”는 말 한마디에 자동으로 유죄를 선고하자는 법도 아니다. 무엇을 강간의 핵심적인 침해로 볼 것인가를 바꾸자는 것이다.
‘무고’ 문제 역시 마찬가지다. 합의한 성관계 뒤 한쪽이 마음을 바꿔 성폭력이라고 신고하면 어떻게 하느냐는 주장이 빠지지 않는다.
물론 어떤 범죄든 허위 신고는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폭행죄에 거짓 신고가 있을 수 있다는 이유로 폭행을 범죄에서 빼자고 하지 않고, 절도나 사기에 무고가 가능하다는 이유로 그 범죄를 없애자고 하지 않는다. 신고가 접수되면 수사와 재판을 통해 사실관계를 판단하고, 실제 무고가 입증된다면 그것 역시 현행법에 따라 다루면 된다.
성폭력에 대해서만 ‘피해를 말하는 사람이 거짓말할 가능성’을 특별히 크게 상정해 범죄의 구성요건까지 제한해야 한다는 주장은 오랫동안 성폭력 피해자의 말을 유독 의심해 온 통념과 맞닿아 있다.
오히려 지금 더 물어야 하는 것은 다른 문제다. 성폭력을 당했지만 법이 요구하는 수준의 폭행·협박을 입증하기 어려워 신고를 포기한 사람들, 수사와 재판 과정에서 왜 더 강하게 저항하지 않았는지를 반복해 증명해야 했던 피해자들은 어떻게 할 것인가.
존재할 가능성이 있는 허위 신고는 그토록 걱정하면서, 이미 존재하는 법의 공백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일 이유가 없다.
형벌
‘비동의강간죄’에 대한 반론 가운데는 이와 조금 다른 차원의 문제 제기도 있다. 성폭력의 원인은 가부장제와 불평등한 사회구조에 있는데 형법을 확대하고 국가의 처벌 권한을 강화하는 것이 정말 해결책이냐는 것이다. 여성운동이 형벌에 지나치게 기대는 것 아니냐는 비판도 있다.
이 문제 제기는 ‘남성이 억울하게 무고당한다’는 식의 주장과는 구분해서 생각할 필요가 있다. 한국의 형사사법제도가 사회적 약자에게 늘 공정하게 작동해온 것이 아니며, 모든 사회문제를 형량을 높이고 감옥을 늘리는 방식으로 해결하려는 엄벌주의가 국가의 억압적 권력을 강화할 수 있다는 우려는 중요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형벌만으로 성폭력을 없앨 수는 없다.
직장의 위계와 불안정노동, 여성에게 집중되는 경제적 의존, 장애인의 시설 수용과 돌봄 의존, 이주노동자의 사업장 변경 제한과 체류권의 종속, 성차별적 문화와 성별화된 권력관계가 유지되는 한 성폭력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도 남는다. 성폭력 예방교육과 피해자 지원, 안전한 주거와 노동권, 이주민의 안정적인 체류권, 장애인의 탈시설과 자립생활, 여성의 경제적 독립 같은 조건을 함께 만들어야 한다.
하지만 형벌만능주의에 반대한다고 해서 동의 없는 성관계를 강간으로 규정해서는 안 된다는 결론이 나오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산업재해를 막기 위해 기업 처벌만으로 충분하지 않다고 말한다. 원청의 책임을 강화하고 하청구조를 바꾸고, 충분한 인력을 확보하고, 노동자에게 위험작업을 거부하고 중지할 권리를 보장해야 한다고 요구한다. 그렇다고 기업이 안전조치를 하지 않아 노동자를 죽게 한 행위를 처벌하지 말자고 하지는 않는다.
가정폭력도 마찬가지다. 가정폭력의 뿌리에 성별분업과 여성의 경제적 종속, 가족주의가 있다고 해서 폭행을 범죄에서 제외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법은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없지만, 적어도 무엇을 타인의 권리를 침해하는 폭력으로 볼 것인지에 대한 사회의 최소한의 기준을 제시한다.
그리고 지금의 강간죄 역시 결코 국가가 개입하지 않는 ‘중립적인 상태’가 아니다. 국가는 이미 어떤 성폭력을 강간이라고 인정하고 어떤 피해를 그 바깥에 둘 것인지 결정하고 있다. 다만 그 기준이 ‘동의의 부재’가 아니라 ‘폭행과 협박’일 뿐이다.
따라서 논쟁의 핵심은 국가가 개입할 것이냐 말 것이냐가 아니다. 어떤 침해를 강간이라고 부를 것이며, 누구의 성적 자기결정권을 법이 보호할 것인가다.
성폭력을 개인의 일탈이 아니라 불평등한 권력관계 속에서 발생하는 문제라고 본다면 오히려 이 질문은 더욱 중요하다. 구조 속에서 가장 거절하기 어려운 사람들이 경험하는 성폭력을 법 바깥에 남겨둔 채 구조적 성폭력을 말하는 것은 모순이기 때문이다.
수동적 존재
일각에서는 동의 여부를 법으로 보호하는 것이 여성을 스스로 거절조차 하지 못하는 수동적인 존재로 보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한국 정부도 2023년 유엔 여성차별철폐위원회에 ‘비동의강간죄’에 반대하는 의견을 내면서 제도 도입이 ‘여성의 의지나 능력을 폄하할 여지가 있다’는 논리를 제시한 바 있다.
그러나 이것은 현실의 권력관계를 개인의 의지 문제로 바꾸어놓는 주장이다.
사용자가 해고할 권한을 쥐고 있는 직장에서 노동자에게 “싫으면 그냥 거부하면 되지 않았느냐”고 말한다면, 우리는 그것을 노동자의 자율성을 존중하는 주장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사용자가 가진 힘을 지워버린 주장이라고 한다.
성적 관계도 마찬가지다. 경제적으로 의존하는 배우자나 연인, 자신의 체류 여부를 좌우할 수 있는 고용주, 생활지원과 돌봄을 제공하는 사람, 자신의 평가권을 가진 교수나 상사를 상대로 “싫으면 싫다고 분명히 말하면 된다”고 주장하는 것은 자율성을 존중하는 것이 아니다. 자율성을 실제로 행사할 수 있는 조건을 지워버리는 것이다.
‘비동의강간죄’는 여성을 무력한 존재라고 전제하는 법이 아니다. 오히려 모든 사람이 자신의 몸에 대해 결정할 능력과 권리가 있다는 데서 출발한다.
침묵했다고 동의한 것이 아니다. 관계를 계속 유지했다고 동의한 것이 아니다. 상대보다 약한 위치에 있어 적극적으로 저항하지 못했다고 해서 동의한 것도 아니다.
여성의 선택과 능력을 존중한다면 여성이 성관계를 원하지 않는다는 선택 역시 똑같이 존중해야 한다.
이 요구는 한국 여성운동만의 독특하거나 과도한 주장도 아니다.
유엔 여성차별철폐위원회(CEDAW)는 2024년 한국 정부에 형법상 강간죄를 ‘적극적이고 자유롭고 자발적인 동의의 부재’를 중심으로 정의하도록 개정하라고 다시 권고했다(CEDAW 제9차 대한민국 국가보고서 최종견해).
유엔 자유권위원회 역시 2023년 한국의 강간죄가 여전히 폭력 또는 협박을 중심으로 규정되어 있다는 점을 우려하면서, 모든 형태의 강간을 폭력·협박이 아니라 동의의 부재를 기준으로 정의하라고 권고했다(UN 자유권위원회 대한민국 제5차 국가보고서 최종견해).
이미 여러 나라의 법도 움직였다. 독일 형법은 상대방의 ‘인식 가능한 의사에 반하여’ 이루어진 성적 행위를 처벌한다(독일 형법 제177조). 스웨덴은 성적 행위에 자발적으로 참여했는지를 중심으로 강간을 판단하도록 법을 바꾸었다(스웨덴 형법 제6장 제1조). 영국의 성범죄법 역시 상대방의 동의가 없고 행위자가 상대방이 동의한다고 합리적으로 믿지 않은 경우를 강간죄의 핵심 요건으로 둔다(영국 Sexual Offences Act 2003 제1조).
프랑스도 2025년 11월 형법을 개정했다. 새 법은 성적 행위의 동의가 자유롭고 충분히 인식된 상태에서, 구체적으로, 사전에 이루어져야 하며 언제든 철회할 수 있다고 규정한다. 피해자의 침묵이나 무반응만으로 동의를 추정해서도 안 된다(프랑스 형법 제222-22조).
한국에서도 변화는 계속되어 왔다. 2013년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혼인관계가 실질적으로 유지되고 있는 배우자도 강간죄의 피해자가 될 수 있다고 판단했다. 결혼했다고 해서 개인의 성적 자기결정권을 포기한 것이 아니며, 배우자에게 폭행이나 협박으로 성관계를 강요할 권리가 생기는 것은 아니라는 판단이었다(대법원 2013. 5. 16. 선고 2012도14788 전원합의체 판결). 이것 역시 중요한 변화를 보여준다. 연인이나 배우자라는 이유로, 돈을 받았다는 이유로, 이전에 성관계를 했다는 이유로 지금의 성적 행위까지 자동으로 동의한 것이 될 수는 없다. 관계나 과거의 행동이 지금 이 순간의 몸에 대한 포괄적인 권리를 다른 사람에게 주는 것은 아니다.
존중
‘비동의강간죄’를 지지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어쩌면 아주 단순하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단지 더 많은 사람을 감옥에 보내는 사회가 아니다. 성폭력이 일어난 뒤 피해자가 얼마나 필사적으로 저항했는지를 심문하는 사회에서, 애초에 성적 관계를 맺는 사람들이 서로의 의사를 확인하는 사회로 이동하자는 것이다.
‘싫다고 말하지 않았으니 괜찮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 한 번 동의했다고 끝까지 괜찮다고 여기지 않는 것. 연인이나 배우자라는 관계가 상대방의 몸에 대한 권리를 주지 않는다는 것. 술에 취했거나 두려워하거나 경제적으로 의존해 거부하기 어려운 상황을 이용하지 않는 것. 상대가 마음을 바꾸면 멈추는 것.
이것들은 급진적인 요구처럼 취급되어 왔지만, 사실 너무나 평범한 원칙이다. 사람의 몸은 그 사람의 것이고, 성적인 관계는 그 관계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모두 원할 때 이루어져야 한다. 그런데 지금의 강간죄는 여전히 그 간단한 원칙보다 ‘얼마나 강한 폭행과 협박이 있었는가’를 먼저 묻는다.
2019년의 71.4%, 2022년의 62.5%라는 숫자가 보여주는 것도 단순한 법률 기술상의 허점이 아니다. 현실에서 성폭력 피해로 상담소를 찾는 사람들이 경험한 일과 현행 강간죄가 상정하고 있는 범죄의 모습 사이에 상당한 간극이 있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 간극 속에서 피해자들은 오랫동안 “왜 더 강하게 저항하지 않았느냐”, “정말 싫었다면 왜 도망가지 않았느냐”는 질문을 받아왔다. 성폭력을 가능하게 만드는 사회구조를 바꾸는 일과 성폭력의 법적 기준을 바꾸는 일 중 하나만 선택해야 할 이유는 없다.
직장의 위계와 불안정노동을 바꾸는 것, 여성의 경제적 독립을 보장하는 것, 장애인과 이주민이 누군가에게 종속되지 않고 살아갈 조건을 만드는 것, 성별화된 권력관계를 변화시키는 것, 성폭력 피해자가 생계와 주거 걱정 없이 가해자에게서 벗어날 수 있도록 사회적 기반을 만드는 것. 이런 변화는 반드시 필요하다.
동시에 누군가의 몸에 대한 결정권을 무시하고 행한 성적 행위를 우리 사회가 폭력이라고 분명하게 말하는 것 역시 필요하다. 둘은 서로 대립하지 않는다. 오히려 같은 방향을 향하고 있다.
이제 질문을 바꿀 때가 됐다. 왜 피해자는 더 강하게 저항하지 않았는가가 아니라, 왜 상대방이 동의하지 않았는데 성적 행위를 했는가. 성폭력 판단의 중심을 폭행과 협박에서 동의 여부로 옮기는 것은 피해자에게 더 필사적인 저항을 요구하지 않는 법을 만드는 일이다. 동시에 성적 관계에서 상대방의 의사를 확인하고 존중하는 것을 특별한 배려가 아니라 당연한 책임으로 만드는 일이기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 ‘비동의강간죄’는 성폭력 ‘처벌’에 관한 법인 동시에 우리가 어떤 관계를 정상적인 관계라고 부를 것인지에 관한 법이다. 폭력과 위협이 없었다는 것만으로 충분하다고 여기는 관계가 아니라, 서로가 원하는지를 묻고 확인할 수 있는 관계. 한 사람의 침묵이나 체념을 다른 사람의 권리로 바꾸지 않는 관계. 동의 없는 성관계는 강간이어야 한다. 그것이 강간죄의 기준을 ‘폭행·협박’에서 ‘동의’로 바꾸어야 하는 이유다.

글 | 민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