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입·후원
사회운동단체 플랫폼C는 회원들의 활동과 후원으로 운영됩니다. 플랫폼C가 계속해서 왕성한 활동을 이어갈 수 있도록, 활동회원 또는 후원회원으로 함께해 주세요!
팔레스타인의 파괴는 미얀마의 파괴다

팔레스타인의 파괴는 미얀마의 파괴다

미얀마의 경우, 석유 인프라가 실질적으로 영국에 의해서만 파괴되었다는 점은 역사적 아이러니다. 미얀마의 반식민 무장 저항군이나 군부에 맞서 싸우는 현재의 저항군에 의해서가 아니라 말이다.

2026년 10월 31일

이 글은 ‘Historical Materialism’ 웹사이트에 게재된 정치·경제 인류학자 조프리 아웅의 글 「The Destruction of Plaestine is the Destruction of Myanmar」을 번역한 것이다. 이 글에서 “미얀마”라는 단어는 동시대와 식민지기 이후의 국가를 지칭할 때 사용하고, “버마”라는 단어를 식민지기와 그 이전 시기의 국가를 지칭하는 것으로 사용한다. 참고로 영어권에서는 여전히 ‘미얀마’ 대신 ‘버마’라는 명명이 흔하다. 국내에서는 ‘미얀마’가 올바른 명명으로 잘못 알려져 있지만, 사실 두 단어는 같은 언어적 뿌리에서 파생됐다. ‘버마’는 구어 '바마(ဗမာ)'에서 유래했고, ‘미얀마’는 격식을 갖춘 고문서에서 사용되던 '먀마(မြန်မာ)'에서 유래했다. 1988년 '8888 민주항쟁'을 유혈 진압하고 집권한 군부정권은 1989년 국명을 '미얀마(Union of Myanmar)'로 공식 개칭했다. 이후 미얀마 민주화운동 디아스포라 활동가들은 ‘버마’ 사용을 고집하다가 2015년 전후로는 ‘미얀마’ 명명을 받아들였다. 단, 미얀마 국가의 다수 민족인 버마족(Bamar)을 지칭하는 것이기 때문에, 독립적인 소수민족들은 이 명명을 선호하지 않기도 한다.

지난 12월 10일, 미얀마 군부의 공습이 반군 점령 지역에 있던 한 병원을 파괴했다. 두 발의 폭탄으로 34명이 사망하고 80여 명을 부상을 입었다. 서부 미얀마에 위치한 이곳은 아라칸 반군(Arakan Army, AA)이 통제하는 곳이다. 아라칸 반군은 현재 군사 정부에 맞서 싸우는 가장 거대하고 강력한 무장 세력 중 하나다. 2021년 군사 쿠데타 이후, 아라칸 반군 같은 주요 반정부 단체뿐만 아니라 인민방위군(People’s Defence Forces, PDFs)을 비롯한 소규모의 지역 단체들은 미얀마 국토의 절반 이상을 장악했다. 하지만, 2024년 그 정점에 이른 이후, 군부는 잃었던 영토의 상당 부분을 되찾았다. 군정에 대한 지원을 재개한 중국, 대규모로 추진된 징병, 그리고 잔인한 공습 작전이 이러한 반격을 지원했다. 12월 28일에 시작될 선거를 앞두고, 군부는 최대한 많은 지역에서 선거를 실시하기 위해서 공격을 더욱 강화했다. 군정이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하기 위해 수단으로 삼았다는 비판을 숱하게 받은 선거였다.

폐허로 가라앉은 건물, 훼손된 공공시설, 무너진 파편 틈으로 끌어낸 시신, 공습의 참화로 잔해 속에 스러진 일가족. 어떤 이들에게는, 여기에서 다른 어떤 한 곳을 떠올리기가 어렵지 않을 것이다. 그곳의 징후, 상징, 물질적 흔적까지도 전부. 이스라엘 언론사 하레츠(Haaretz)에 따르면, 이스라엘 군수회사들은 2021년 쿠데타 이후에도 계속 미얀마 군부에 무기를 팔았다. [국제법을 위반할 우려가 있는 국가와의 무기 거래를 금지하는] 무기 수출 금지 조치가 명목상으로라도 존재하는데 불구하고 말이다. 이 거래에는 반군 진압 전략에서 공중전이 핵심으로 자리 잡자 미얀마 공군을 위해 특수하게 판매된 첨단 무기 시스템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미얀마의 많은 이들에게는 팔레스타인과 미얀마의 연결고리가 좀처럼 인지되지 않는다. 그리고 그런 연관성이 인식될 때에는 종교가 크게 개입해버린다. 미얀마의 무슬림은 무슬림 탄압의 경험을 공유하는 팔레스타인인에게 연대감을 표출해왔다. 미얀마의 기독교인은 자주 이스라엘에 이입하곤 했다. “성서 속의 이스라엘”에 대한 감각과 지지가 미얀마 고지대 지역의 선교 역사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기 때문이다. 미얀마의 불교도는 이스라엘을 자신들의 친척쯤 된다고 여겨, [이 모든 일을] 내란에 의해 위협 받고 있는 주권 국가 건설 작업으로 바라봐왔다. 인종 청소와 집단학살을 포함한 극단적인 폭력 위에 세워진 민족국가에 미얀마 불교도가 이입한다는 건 그다지 놀랄 일은 아니다. 반무슬림 폭력은 미얀마 불교의 근대사 내내 끊임없이 이어져왔다. 1930년대의 반무슬림 폭동부터 2010년대에 시작되어 가장 동시대적이며 끔찍한 형태로 현재진행중인 로힝야 집단학살에 이르기까지. [참고: 집단학살에서 살아남기 | 로힝야족의 저항과 연대의 역사]

요컨대, 미얀마에서 팔레스타인의 문제는 종교적 이해관계와 집단적 소속감이라는 관점 아래에서 과도하게 규정되어 왔다. 그러나, 반드시 그럴 필요는 없다. 역사적이고 유물론적인 관계를 따라 형성된 분명한 연결고리를 통해, 좀처럼 함께 논의되지 않는 이 두 장소를 잇는 또 다른 방식의 연관성, 접점, 유사성, 그리고 무엇보다 연대를 그려낼 수 있으며, 또 그렇게 해야 한다.

사실, 양국의 무기 거래 그리고 서로 닮아 있는 각국의 군사주의는 이미 더 심원한 연결고리를 가리키고 있다. 두 국가가 식민지화되고 천연 자원을 수탈 당했던 역사 속에 같은 뿌리를 내리고 있다는 사실은 서로 다른 시공간에 있다고 여겨지는 장소들을 단순히 경험적으로 연결하는 데에 그치지 않는다. 둘은 공통적으로 안드레아스 말름(Andreas Malm)이 화석 제국이라 부르는 것에 종속된 경험이 있다.(안드레아스 말름, <팔레스타인의 파괴는 지구의 파괴다>, 추선영 옮김, 두번째테제, 2025.) 이러한 역사적 연결성은 정치적 가능성을 품은 공동 투쟁의 지도를 그려낼 수도 있다. 이것이 미얀마 민중에게 던지는 메시지는 분명하다. 팔레스타인의 해방은 곧 당신의 투쟁이라는 것. 그건 종교적인 이유 때문도, 도덕적인 이유 때문도, 연대라는 추상적인 약속 때문도 아니다. 역사적이고 유물론적인 근거 때문이다. 즉 1970년대에 어느 팔레스타인 투쟁 조직이 “베트남에서 팔레스타인까지: 하나의 투쟁, 수많은 전선을!”이라며, 팔레스타인과 상이한 시간 속에 있던 동남아시아를 연결해냈던 것처럼.

증기 기관의 제국

스웨덴 출신의 저널리스트 겸 인문지리학 연구자 말름은 가자에서 자행되는 집단학살이 19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지중해 동쪽의 식민화와 자원 수탈을 비추고 있다고 주장해왔다. 팔레스타인의 파괴는 기후 재난의 기원과 상당 부분 포개진다는 점에서 결국 지구의 파괴임이 밝혀지고 있다. 맘은 1840년을 그 기원으로 삼는다. 그 해 영국군이 팔레스타인 연안에 가한 포격은 영국 제국이 “주요 전쟁”에서 증기선을 활용한 최초의 사례였다. “증기력이”, 말름은 이렇게 썼다. “도입된 이후 화석연료에 대한 의존이 시작되었다. 영국의 산업을 통해 확산된 증기력은 영국을 최초의 탄소 경제(fossil economy)로 탈바꿈시켰다.” 그러나 증기력이 영국 안에만 머물러 있었다면 기후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게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것은 전세계로 수출되어, “전인류를 막대한 화석 연료가 타오르는 내연기관의 소용돌이 속으로 끌어넣었다.” 그렇게 영국이 “이 행성의 운명을 바꾸어 놓았다. 증기력의 전지구화는 피할 수 없는 불길이었다.” 그리고 그 “점화 버튼”은 “전쟁에 증기 함정을 투입한 것이었다. 영국은 폭력의 투사를 통해, 말하자면 화석 자본을 화석 제국으로 탈바꿈시킴으로써 자신이 창조한 낯선 종류의 경제에 나머지 국가들을 통합했다.” 제국주의 전쟁을 벌이려고 증기선을 도입했다는 점에서, 팔레스타인의 파괴는 말름에게 화석 자본을 화석 제국으로 전환시킨 일이었다. [안드레아스 말름, <팔레스타인의 파괴는 지구의 파괴다>, 추선영 옮김, 두번째테제, 2024, 43~44쪽. 저자의 발췌 인용으로 인하여 문장이 변화했기에, 옮긴이가 조금 수정함.]

하지만, 1840년의 포격이 영국이 전쟁에서 증기선을 최초로 활용한 게 아니라면 어떨까? 실제로, 1820년대에 벌어졌던 제1차 영국-버마(미얀마) 전쟁은 화석 제국성의 역사지리학을 새롭게 바라볼 관점을 제공한다. 이 전쟁은 우리를 지난달 병원 폭격 사태가 벌어진 그 미얀마 서부 지역으로 다시 데려간다. 다만 그 시점은 거의 딱 200년을 거슬러 올라간다.

3차례에 걸친 영국-버마 전쟁의 결과로 점점 줄어든 버마의 영토를 보여주는 지도. 출처: 브리태니카 백과사전
3차례에 걸친 영국-버마 전쟁의 결과로 점점 줄어든 버마의 영토를 보여주는 지도. 출처: 브리태니카 백과사전

샬푸리(Shalpur) 섬은 오늘날 미얀마와 방글라데시의 국경을 가르는 나프(Naaf) 강 하구에 있다. 1823년, 영국의 식민지와 팽창하던 버마 왕국 사이에서 누가 섬을 차지할 것인가를 두고 영토 분쟁이 일었고, 이는 제1차 영국-버마 전쟁으로 이어졌다. [주목할 점은, 이 국경 분쟁이 동남아시아에서 영국과 프랑스 사이에 벌어진 제국주의적 경쟁—특히 목재와 같은 원자재 확보 및 잠재적 수출 시장을 둘러싼 경쟁—을 배경으로 격화되었다는 사실이다.] 버마의 왕은 치타공(Chittagong)까지 진군할 계획으로 서부 국경지대에 수만 명의 병력을 보냈다. 하지만 영국은 이 험준한 지형에서 전면전을 치르기보다는 버마의 중심부를 직접 칠 기회를 얻었다. 영국군은 “안다만(Andaman) 제도에서 집결했다가 남부 버마에 상륙하는 대규모 해상 침략 작전을 감행했다.” 이로써 1만 명 규모의 해군 병력이 버마의 수도 랑군 항구에 침입해 온 왕국을 놀라게 했다(Hall, D. G. E. 1960. Burma. Hutchinson University Library). 영국군은 함선에서 로켓포를 쏘아 퍼부으면서 도시를 점령 및 봉쇄했고, 1824년 말에는 이라와디 강을 따라 상류로 진격했다. 버마군은 버마 중부의 도시 프로메(Prome)에서 재집결해 영국군에 대한 반격에 나섰다. 한 역사가는 당시의 해전에 대해 이렇게 썼다. “버마인들이 수륙 모두에서 공격함에도 불구하고 영국인들은 굳건히 전진했다. [버마 군대의] 자랑이었던 티크 나무로 만든 거대한 전함에 맞서기 위해, 인도 북동부의 캘커타(Calcutta)에서 막 도착한 다이애나호가 증기선 최초로 전쟁에 투입됐다. … 버마가 결국 1826년 초에 협상을 하자고 요구하게 만들었던 것은 … 바로 이 강가에서의 패배였다.” (탄 민 우는 ‘다이애나’호를 “전시에 투입된 최초의 증기선”이라고 언급한다. Thant Myint-U 2004, pp. 19-20, p. 124.)

소형 보트에 장착한 콩그리브 로켓을 보여주는 William Congreve의 그림. 1827년작
소형 보트에 장착한 콩그리브 로켓을 보여주는 William Congreve의 그림. 1827년작

다이애나 호가 정확히 언제쯤 캘커타에서 버마로 왔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예컨대, 이 증기선은 1824년 랑군 포격 작전에도 이미 참전했던 것으로 보인다. 사실, 다이애나 호는 동인도회사를 위해 1823년에 조선된 무역선이었다. 이 무역선은 런던 램베스(Lambath)에서 헨리 모즐리가(Henry Moaudslay)가 제작한 16마력 사이드 레버 엔진(19세기 초 증기선 도입 초기에 널리 사용된 대표적인 해양용 증기기관 방식 중 하나)을 두 대 달고 있었다. [모즐리는 영국 해군이 함정 추진용으로 충분히 작고 효율적인 엔진을 제작해 달라고 특별히 요청했던 두 계약업체 중 하나였다.] 그런데 1824년에 벵갈의 영국 식민 정부가 이 증기선을 매입했고, 이를 해군역사 연구자들이 전쟁에 쓰인 최초의 증기선으로 기록하고 있다(Lyon and Winfield, 2003). 다이애나 호는 콩그리브 로켓(Congreve rocket, 19세기 초 군용 고체연료 로켓 무기)이라 이름 붙여진 화포로 무장되어 있었다. 이 화포의 역사를 조금만 훑어보아도 이것이 영국 제국주의에서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했는지 알 수 있다. 1820년대 제1차 앵글로-버마 전쟁에서만 영국 해군이 콩그리브 로켓을 사용해 버마 왕조를 제압했던 것이 아니다. 영국 해군이 알제리를 침공했던 1816년에도, 아편전쟁 중 청나라 광저우의 항구를 처음으로 포격했던 1841년에도, 뉴질랜드 마우리족의 요새를 공격했던 1840년대에도, 인도 세포이 항쟁의 반란군을 진압했던 1857년에도 콩그리브 로켓이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1840년, 말름이 영국의 가자 지구 “분쇄”라고 부른 작전에서도 이 무기가 사용되었을 공산이 크다. 하지만, 이 화포가 무언가를 파괴할 수 있도록 어떤 장소들에 데려다놓는 것은 바로 증기력이었다.

다이애나 호가 보여주는 그 권력, 나아가 권위는 더 살펴볼 가치가 있다. 이 증기선은 “경이와 공포를 동시에 안겨주어 적을” 압도했다고 묘사되었다(Wilson 1852). 큰 위용을 떨친 버마의 전투선이었지만, “다이애나 호는 증기기관 덕분에 그들 사이를 너무나 빨리 움직일 수 있었기 때문에, 노를 젓는 [버마의] 병사들은 그 힘과 노련함에도 불구하고 달아날 수가 없었다. 다이애나 호가 그 압도적인 위력을 휘둘러 전복시키고, 파괴하고, 침몰시키고, 무장해제하고, 나포해간 선박이 최소 32척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식민본국의 영국 하원 의원들은 다이애나 호와 그 새롭고도 걷잡을 수 없는 힘을 찬양했다. 1827년, 한 의원은 제 1차 영국-버마 전쟁을 두고 이렇게 썼다. “지상군의 용맹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강둑에서 펼쳤던 작전은 함대의 적극적이고 중대한 필사적 노력이 보조되지 않았다면 성공하지 못했을 것이다. 여기에서도 마찬가지로, 전쟁에 처음으로 증기라는 힘을 도입했던 것이 큰 도움이 되었다. 그 증기선은 매우 유용했다. 단순히 긴급 보고를 전달해 소통하는 데에서뿐만 아니라, 어마어마한 저항력을 극복한다는 점에서 말이다.” 1841년, 한 영국군 대위도 이 전쟁을 되돌아보았다. 석탄으로 움직이는 다이애나 호의 기동력을 넘어, 그것이 불러일으키는 경외감과 확실한 공포감이 적군에 미친 영향에 대해서 말이다. 그는 이렇게 주장했다.

“버마 군사 작전을 성공시킨 상당한 몫은 이리와디[이라와디를 잘못 적은 원문의 오탈자임] 강에서 증기선이 가졌던 권위에 있다. 버마의 전투선은 아마도, 현존하는 가장 뛰어난 선박일 것이다. 그들은 100대의 쌍좌선을 몰았으니, 증기선을 어느 정도는 몰아붙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인간의 근육과 힘줄은 끈질기게 끓어오르는 증기 기관 앞에서 버틸 수 없었다. 그들은 이 지치지 않는 움직임이 어떻게 가능한지를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절망 속에서 싸움을 포기했다.”

이처럼 다이애나 호는 제국주의 전쟁에 기계적.심리적 차원, 그리고 이동성 자체의 차원에서 압도적인, 새로운 형태의 권력을 도입했다. 이 힘은 영국의 팽창을 가속화했으며, 영국의 화석 경제를 전지구화했다. 그러니 증기력이 전쟁에 도입된 기원은 1840년에 영국이 폭격한 팔레스타인이 아니라, 그에 앞서 1820년대 버마에 실전 배치되었던 다이애나 호에 있다. 제1.2차 영국-버마 전쟁이 연속되면서, 영국은 극도로 약해진 버마 왕정을 완전히 제압했다. 이로써 증기, 즉 석탄에 기반한 영국 해군의 우위는 1820년대 이후의 식민지배를 더욱 강화했다. 그리고, 그 화석 경제를 지탱하기 위한 자원 착취를 한 세기 넘게 이어갈 수 있게 했다. 요컨대, 버마 왕국의 파괴는 화석 자본을 화석 제국으로 이행시켰다.

  • 말름(Malm, 2024)은 1840년 팔레스타인 해안에 대한 포격이 ‘주요 전쟁’에서 증기 동력이 사용된 최초의 사례였으며, 이를 통해 ‘화석 자본’이 ‘화석 제국’으로 전환되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그는 버마에서의 증기선 다이애나호 사례를 통해, 그보다 앞서 제국주의 전쟁에서 증기 동력이 사용된 경우에 관해서도 이미 서술한 바 있다. 다만 이는 미발표 원고에 담긴 내용이었는데, 2025년 런던에서 열린 ‘역사유물론(Historical Materialism)’ 학회에서 내가 내 주장의 초기 버전을 발표했을 때, 그는 동료적인 호의를 담아 이 원고를 내게 보내주었다. 말름의 원고에 인용된 내용을 바탕으로, 다이애나호가 지닌 동력과 위상에 관한 구절들을 이곳에 소개할 수 있게 되어 기쁘게 생각한다.

그런데, 화석 제국의 역사적 지도를 정확히 그리는 것, 그러니까 무엇이 어디서 가장 먼저 일어났는지에 관한 논쟁이 가장 시급한 정치적 문제는 아니다. 그러한 역사기록학의 문제도 그만의 중요성을 지니지만, 여기에서 다른 관점으로 이어나가보는 것에도 충분한 의미가 있을 것이다. 오늘날의 재앙을 직면한다는 것은 곧 이렇게 복잡하게 뒤얽힌 파괴의 지리학을 따라가보는 것이라는 관점으로 말이다. 가자에서 미얀마로, 그리고 제노사이드에서 기후 붕괴로. 그렇게 하지 않으면, 실제로 연결되어 있는 투쟁들을 별도로 분리된 하나의 사건, 단일한 장소, 한 군데의 지역으로 떼어놓고 완전히 대화와 변증법적 연관성을 배제한 채 고립시킬 위험이 있다. 그러니, 이건 1840년 팔레스타인 폭격과 1824~26년 영국-버마 전쟁 중 어느 쪽이 더 중한지를 비교하는 문제가 아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오히려, 이 두 사건이 화석 제국이라는 더 넓은 역사 속에 위치해 있다는 것이다. 그 역사는 서로 다른 시공간 속에서 서로를 잃어버리게 될 위험에 처한 두 군데의 지역과 두 번의 투쟁을 함께 엮어낸다.

한편, 화석 제국은 영국이 버마를 통치하는 과정에서 계속 그림자를 드리웠다. 사실, 식민지화되기 이전의 버마에서는 이미 18세기부터 석유 채굴업을 세습해오던 생산자들이 큰 수익을 창출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버마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석유 산업의 발상지로 자리 잡고 있었다. [1795년 무렵, 약 70개의 우물에서 연간 총 25,000배럴(1배럴당 40갤런 기준)가량이 생산되고 있었다.] 하지만, 영국이 버마 남부 전역을 합병하는 것으로 귀결되었던 1852~1853년의 제2차 영국-버마전쟁 때문에, 석유는 버마 왕정에게 전략적인 자원으로 자리매김했다. 버마의 지도자였던 민돈(Mindon) 왕은 영국이 차지한 영토에서 거두던 왕실 수입을 잃어버렸다. 그 결과, 여전히 왕이 통치하는 지역에서 창출되는 석유 수익 한층 더 중요해졌다. 아미타브 고쉬(Amitave Ghosh)는 이렇게 지적했다. 1854년에 “그[민돈 왕]가 한 일은 앞으로 다가올 세기의 여러 근대 산유국이 행하게 될 일이었다. 그는 예난자웅(Yenangyaung) 지역의 유전을 직접적인 통제 아래 두었는데, 이는 석유 산업을 사실상 국유화하는 것이었다.” 석유 생산자들은 오직 왕실에게만 석유를 판매할 수 있었고, 국왕이 가격을 조정했다. 그는 또한 영국의 파라핀 양초를 제조하는 회사를 통해 석유를 수출하기 시작했는데, 그래서 버마 왕조 사상 처음으로 원유를 수출한 시기가 1850년대 중반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다. 예난자웅의 연간 석유 추출량의 절반 이상이 프라이스 페이턴트 캔들 유한회사(Price’s Patent Candle Company Ltd.)에 팔렸는데, 그 거래량은 월평균 약 2,000 배럴에 육박했다.

하지만, 1885년의 제3차 영국-버마 전쟁으로 영국은 버마의 남은 땅까지 전부 정복했다. 영국은 버마의 모든 영토를 합병하고 왕정제를 폐기했다. 그러자마자, 영국은 버마의 석유 생산에 눈독을 들였다. 자기네들 말로는 “유전을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코얼리(Corley)가 집필한 역사는 의뢰를 받아 작성된 역사, 즉 기업이 직접 의뢰한 역사라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영국이 버마를 영국령 인도[영국이 식민지화했던 인도의 17개 주, 1947년 독립]로 합병시킨 지 한 달 만인 1886년 중반에, 버마석유회사(Burmah Oil Company)가 에든버러에 설립되었다. 이후 수십년간, 이 회사는 버마의 사막에서 생산된 석유를 주로 버마 자국이 포함된 영국령 인도의 전기, 난방, 주유 시장에 공급했다. 이러한 주요 거래처가 바뀐 것은 버마석유회사가 영국 해군과 계약을 맺은 1905년으로, 석탄에서 석유로 연료를 전환한 영국 해군의 전투선에 석유를 공급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버마의 산유지는 전기의 원천에서 권력의 원천으로 변화했다. 추후 페르시아만의 걸프지대가 개발되기 전까지, 이곳은 영국 제국의 가장 크고 생산력 있는 산유지였다. 버마석유회사는 심지어 탄소 개척지까지도 뛰어들었다. 영국의 전투선을 띄우기 위한 석유를 제공하기로 동의한 지 4년 뒤, 버마석유회사는 앵글로-페르시아 석유회사(Anglo-Persian Oil Company)를 설립했다. 1909년, 버마석유회사는 앵글로-페르시아 석유회사를 “완전히 소유된 자회사”라고 표명했다. 그 버마석유회사의 자회사는, 물론 앵글로-이란 석유회사(Anglo-Iranian Oil Company)로 이름을 바꾸었고, 지금 BP(British Petroleum)라는 이름을 달고 있다.

군사주의 친척들

1948년 독립 이후, 미얀마의 신흥 지배층은 석유 생산업을 국유화했다. 그리고, 페르시아만에서 산유량이 늘자, 미얀마의 석유 산업은 존재감이 희미해져버렸다. 1950년대에 이 새로운 지배 계급은 팔레스타인 파괴의 가장 직접적인 원인을 강화했다. 그건 엄연한 화석 제국이라기보다는 이스라엘 국가 그 자체였다. 식민해방 초기부터 미얀마의 유력 정치가였던 우 누(U Nu, 1907~1995)는 이스라엘을 미얀마와 유사하게 각종 분쟁으로 흔들리고 있는 사회주의 국가 건설 프로젝트로 바라보았다.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인을 인종청소하겠다는 목표로 벌였던 1948년의 아랍-이스라엘 전쟁(중동전쟁) 때문에, 우 누의 정부는 독립하자마자 그 해에 곧바로 국경지대의 소수 민족들로부터 저항의 물결을 맞닥뜨려야만 했다. 미얀마는 아시아에서 가장 먼저 이스라엘과 외교적 유대를 맺은 국가가 되었다. 우 누는 또한 1955년, 이스라엘에 방문한 최초의 타국 지도자로서 벤-구리온(David Ben-Gurion, 1886~1973)과 함께 16일간의 여행을 즐겼다. 우 누는 이스라엘에 무척이나 호의적이었는데, 비동맹국의 회의에 이스라엘을 참여시키려 했고, 네루(Nehru)에 따르면 반둥 회의(Bandung Conference)에 이스라엘을 초대했을 정도였다. 심지어 벤-구리온은 우 누와 그의 정부가 “세상 그 어떤 국가보다도 강한 공감력과 충성심을 지니고 있다”고 말할 지경이었다.

이러한 “밀월”은 두 나라를 끈끈하게 묶어놓았다. 우 누가 이스라엘을 방문하기도 전인 1952년, 이스라엘에 보내진 사절단은 식민해방기의 미얀마에서 유력 지도자였던 쿄 녜인(Kyaw Nyein, 1913~1986)이 이끌었고, 그는 이스라엘에 매우 감명 받아했다. 대표단의 방문은 미얀마 정부가 이후 무기 개발, 농업 협력, 그리고 사회기반시설 개발과 같은 분야에서 이스라엘과의 동맹을 모색하는 결과를 이끌어냈다. 이후 우 누는 이스라엘의 키부츠에서 감명을 받았다고 묘사했다. 불교적인 교리에 기반한 사회주의적이고 공동체적인 영혼이 그 안에 있다는 것이다. 1950년대와 60년대에는 두 국가 사이에서 인력 교환이 이루어져 수백 명의 미얀마 학생, 정책입안자, 군 관계자가 훈련을 받으러 이스라엘에 보내졌다. 남상 프로젝트(Namsang project)가 형태를 갖춘 것 또한 이 시기였다. 유대인기구(Jewish Agency) 토지정착부서에 속한 도시계획가들의 지원을 받아, 미얀마 정부는 국토 북동쪽에 있는 남상 지역에 수십 개의 협력마을을 조성하고자 했다. 이 마을은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을 점령한 영토에 세운 이스라엘인 정착지를 모델로 삼았다. 특히 모샤브[이스라엘의 독특한 농업 협동조합 마을] 형태에 기반해 노동 시오니스트[노동운동의 이념과 시오니즘을 결합]가 이끌었던 협동 농업 정착지를 참조했다. 버마인이 권력을 쥐고 있던 중앙정부는 제대군인들을 이 마을에 재배치하려고 했다. [소수민족의] 반란으로 분열하고 있는 지역을 사실상 예비군 형태로 재편해 버마인의 지배력을 확립한 것이다.

남상 프로젝트는 미얀마 군부가 계속해서 반란이 일어나고 있었던 소수자화된 주변부에 침투하고, 정착하고, 그곳을 통제하기 위한 더 큰 시도의 일부였다. 이것은 미얀마만의 반란 전선으로 번역된 [이스라엘의] 정착민 군사주의 그 자체였다. 벤-구리온은 심지어 여행 기간 중에 이 프로젝트에 방문하기도 했다. 하지만, 1963년 이 기획은 실패하고 만다. 누군가가 이스라엘 계획가들이 “버마의 현실에 문화적 개념을 접붙여 개척하고자 노력했지만, 큰 성과가 없었다”고 비판하는 바람에 말이다. 더 중요하게는, 1962년에 미얀마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켰다. 쿠데타의 결과로 우 누는 자리에서 물러났고, 네 윈(Ne Win) 장군이 권력을 잡았다. 이스라엘의 원조보다는 아랍 국가들과의 관계를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인물이었다. 이스라엘에서 파견되었던 계획가들은 미얀마를 떠나야 했지만, 이스라엘과 미얀마 군부의 동맹은 더 눈에 띄지 않게 되었다.

돌이켜보면, 아랍 국가들과의 외교가 추구되었음에도 이스라엘과의 관계가 군사적인 측면에서는 조용히 지속되고 있었다는 사실은 가히 놀랄 만하다. 최근에 기밀 해제된 이스라엘의 문서는, 이스라엘 변호사이자 저널리스트인 에이타이 맥(Eitay Mack)이 말하듯, “이 동맹의 중심축은 사회주의적인 결속에 있지 않았다. 이스라엘의 군사 원조에 있었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유출된 연락 기록은 이스라엘이 1950년대부터 미얀마의 군사력을 무장시키고, 훈련하고, 축적하고, 강화하는 데에 전반적인 도움을 주는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는 것을 폭로한다. 잦은 방문 뒤에는 농업, 사회기반시설, 그리고 남상 프로젝트가 있었다. 이미 1950년대 중반부터 직접적인 군사 원조가 두드러졌던 것이다.

일례로, 1955년에 체결된 “쌀 협정”이 있다. 미얀마는 주요 이스라엘제 무기를 수송 받고 군사 훈련을 받는 대가로, 이스라엘에 매년 수천 톤의 쌀을 보냈다. 그 기간 동안 미얀마 군사는 이스라엘 외무부가 당시 이미 약 3만 명의 생명을 앗아갔다고 추정했던 반란세력을 무자비하게 진압하느라 쉴 틈이 없었다. 맥은 이것이 실질적으로 상당한 규모의 군사 지원이었음을 상세히 밝힌다. 전투기 30대, 탄약 수십만 발, 네이팜탄 1,500개, 라이플 총신 3만 대, 박격포탄 수천 발, 그리고 기본적인 군사 물자부터 낙하 침투 장비에 이르기까지. 게다가 이스라엘은 미얀마에 전문가 수십 명을 파견했다. 미얀마 군 간부들이 “IDF 체계를 배우기” 위해 이스라엘의 IDF 군사기지에 방문해 공중작전, 무기 활용 체계, 공군 조종사 훈련법을 소개 받았을 때 말이다. 또한, 이스라엘은 미얀마 군부와 협력해 미얀마에 운송, 농업, 여행, 건설 회사를 세웠다. 전부 미얀마 군부가 향후 수십년간 진행할 사업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할 분야들이었다.

양곤의 한 이스라엘 외교관은 당시 이스라엘 국방부 사무총장 시몬 페레스(Shimon Peres, 1923~2016)에게 이렇게 전했다.

“버마인들은 우리에게서 받은 박대한 도움에 대해 자주 이야기합니다. … 그들이 필요로 할 때에 막 도착하는 물자들,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필요한 것들 말입니다. 그들은 아무런 주저함 없이, 아무런 트집도 잡지 않고, 군사 물품을 찬사합니다. 버마에에서 일한 IDF 인사들은 모두 존경 받습니다.”

이스라엘은 미얀마에 공중전과 지상전에 특화된 교육기관을 세우기 위해 갔다. 그러는 동안 미얀마는 이스라엘의 전문가들이 자국 군대를 다시 세우는 데에 의존했다. 그들은 상비군과 예비군에서도 기병대를 특수부대로 만드는 체계를 도입하는 식으로 IDF가 그려놓은 길을 뒤따랐다.

  • [역주] 시몬 페레스는 1953~1959년까지 국방부 사무총징직을 맡았고, 이후 총리를 비롯한 주요 보직을 거쳐 제9대 대통령(2007~2014)을 역임했다. 이스라엘의 무기 수출입 제도와 군수 산업에 깊이 관여해온 그는 1993년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과의 오슬로협정을 이끌어냈다는 ‘공로’를 인정 받아 1994년에 노벨평화상을 공동수상했다.

그리하여, 1962년 군부가 우 누를 축출했을 때, 그 준비 작업에서는 군사 원조와 안보 협력이 지속되게 하는 것이 핵심이었다. 네 윈 정부가 표면적으로는 이스라엘과의 관계에서는 등을 돌렸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1966년에 이르러, 이스라엘 외무부의 아시아국 국장은 이렇게 썼다. “버마로 간 이스라엘 전문가의 상당수가 버마 군대를 위해 일하고 있다(이스라엘 군수 산업에서 나온 군사 장비, 군사 식량, 화학 약품 등등).” 그는 이렇게 덧붙였다. “최근 IDF에서는 버마 군 관계자를 위한 심화 교육이 재개되고 있다.” 몇 달 후, 이스라엘의 무관은 IDF 작전사령부의 부사령관에게 미얀마 대대장을 이스라엘에서 대반란훈련을 지휘할 프로그램을 허가해달라는 서신을 보냈다. 이 프로그램을 위해 이스라엘에 방문한 대대장들은 부대에서 “이례적일 정도의” 대접을 받았다. 이후 이스라엘군 참모 총장 이츠하크 라빈(Yitznak Rabin, 1922~1995)은 같은 해, 미얀마에 직접 방문했다.

  • [역주] 이후 시몬 페레스와 노벨평화상을 공동수상했던 이츠하크 라빈은 국방부 장관직과 총리직을 각 2번씩 맡았다.

이후 수십년 동안, 이스라엘은 미얀마의 장군들을 지원할 방법을 찾아왔다. 60년대에서 80년대 동안 자행된 집단 폭력이나 인종청소 같은 사건들은 이스라엘 정부에게 외교 관계를 약화시키고 단절시키는 이유가 아니라 외려 자국 특수부대 모사드(Mossad)와 미얀마 정보기관의 유착을 특히 더 강화하는 배경이었다.

  • [역주] 모사드는 이스라엘 총리 직속 정보기관이다. 모사드에 속한 특수부대원은 암살과 대테러를 비롯한 비밀 공작, 기밀 정보 수집 등의 첩보 행위를 수행한다. 모사드는 특히 이스라엘과 미국, 팔레스타인, 이란 사이의 대외 관계에서 의도적인 암살 활동을 펼쳐왔다. 일례로, 네타냐후가 두 번째 총리직을 시작한 2010년, 모사드는 당시 팔레스타인의 하마스 지도자 마흐무드 마브후흐를 암살했다.

1960년대 후반, 버마의 양곤에서 일어난 화인 혐오 폭동은 대부분의 이스라엘 방송에서 네 윈 정부가 한 일로 묘사되었다. 주미얀마 이스라엘 대사관의 외교관 지브 샤틸(Zeev Shatil)의 표현을 따르면, “언제나 기원되었던 집단학살을 막을 수도 있었던” 일로 말이다. 이스라엘 측은 네 윈이 미얀마에서 일어나고 있는 반정부 반란을 진압하는 데에 중국의 지원을 받으려고 한다고 해석했다. 이스라엘은 이를 정보 협력을 구축할 기회로 봤다.

“우리의 지원은 버마 쪽에서 걱정하는 대상-중국인들-이 아니라 버마의 작업을 수월하게 해줄 수 있는 작전 방법과 조직화 방법을 향할 것입니다.”

이스라엘 아시아국이 송출하는 방송에서 나온 말이다. 1970년대 이래 계속, 미얀마의 로힝야 무슬림 소수민족을 향한 집단학살은 이스라엘이 안보 작전을 수행하는 것을 막지 못했다. 1977년에 미얀마의 국방부 장관과 접견한 후, 이스라엘 외교관은 이렇게 썼다.

“나는 [미얀마가] 우리로부터 조달해가는 물품의 규모를 늘릴 가능성을 올렸다.”

1982년 미얀마 외무부의 고관과 만난 한 이스라엘의 대사관 직원은 그 고관의 관점에서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버마에게 가해지는 무슬림의 위협은 현실이고, 국가는 주변국에서 이민해 와 버마 내 무슬림 인구가 늘어나는 일을 막기 위해 무엇이든 해야 한다.”

다시 한 번, 이스라엘은 로힝야족을 향한 인종 청소 사업을 전략적인 돌파구로 이용한 것이다. 곧이어, 이스라엘 아시아국장이었던 칼만 아너(Kalman Anner)는 “우린 우리나라의 모사드와 버마의 모사드를 연결하는 관계를 구축하는 데에 관심이 있습니다.”고 발표했다. 이내 모사드는 미얀마 정보기관에 전달될 서류를 양곤 주재 이스라엘 대사관에 보냈다. 그 문서의 내용은 “이란과 리비아의 자극을 받아 [활동하는] 남동부 아시아의 무슬림 지하조직”에 대한 정보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1980년대 후반에 이르기까지, 이스라엘은 미얀마 군부의 지배를 영속화하고 그와의 관계를 굳히는 데에 수십 년간 전념했다. 1988년의 반란에서 미얀마 군대가 비무장 시위자들을 대량 학사한 뒤에, 군 장관들은 새로운 군사 정권을 만들었고, 이스라엘은 이 정권을 계속해서 지원했다. 이 대학살은 나중에 미국도 합류하게 될 유럽의 무기 금수 조치를 유발했고, 이는 미얀마 군 장성들이 이스라엘에 무기를 반환하게끔 압박했다. 1989년, 이스라엘과 맺은 무기 거래는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군사를 축출하기 위해 치러졌던 제1차 레바논 전쟁 과정에서 레바논으로부터 빼앗은 중고 무기를 포함한 무기들을 미얀마로 보냈다. 그리고 미얀마 군대는 이 무기를 사용해 자국의 반란을 진압했다.

더 최근에 와서는, 남동부 아시아에서 일어나는 이스라엘 무기 거래-지역을 넘나들어 가혹한 반란진압을 위한 무기를 제공하는-는 미얀마 군대가 로힝야족을 집단학살하는 일이 지속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로힝야족 집단학살은 2010년대에 계속되었고, 2021년 쿠데타 이후에도 일어나고 있다. 2019년, UN은 이 집단학살 사태의 핵심 무기 공급자로 이스라엘을 지목했다. “이스라엘은 이 무기들이 국제법상 심각한 범죄 행위에 사용되어왔을 거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음에도, 또는 알아야 했음에도, 의도적으로 무기를 보냈다.”[United Nations Human Rights Council 2019] 그리하여 하레츠(Haaretz)는 “폭로 - 이스라엘, 2021년 군사 쿠데타 이후에도 미얀마에 무기 판매”에서 이렇게 보도했다. 집단학살로 인한 무기 금수조치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의 항공우주산업과 방위 기술 사업체 엘빗시스템즈(Elbit Systems)는 지속적으로 미얀마에 무기를 팔았다. 쿠데타가 일어난 이후인 2022년에도 미얀마 군대에 고도무기를 공급했던 것이다. 이번에도, 거래에는 반란 진압 과정에서 핵심 전술이었던 공중전에서 활동한 미얀마 공군에 판매한 무기가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미얀마 국가, 그리고 로힝야족 집단학살을 연결하는 유대와 유사점은 집단학살 기간 동안 이스라엘이 이끌어낸 주목할 만한 군수물자 제공 그 이상에 달한다. 2017년 9월 말, 미얀마 서부에서 미얀마군이 로힝야 반군을 상대로 벌인 ‘소탕 작전’(현재 로힝야 집단학살의 핵심으로 널리 간주됨)으로 인해 매일 15,000명이 넘는 난민이 방글라데시로 피난해야 했다. 같은 주, 주이스라엘 미얀마 대사는 이스라엘의 정착촌 확장 5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점령지 서안지구의 구시 에치온 정착촌에서 열린 행사에 참석한 몇 안 되는 외국 외교관 중 한 명이었다. 단순한 우연일 수도 있지만 충분히 부합하게도, 대사의 행사 참석은 로힝야 지역에서 미얀마 군의 작전과 이스라엘의 서안지구 점령 사이에 존재하는 놀라운 대칭성을 떠올리게 한다.

이스라엘의 점령으로 인해 쫓겨나고, 빼앗기고, 탄압받는 팔레스타인인들과 마찬가지로, 미얀마 서부의 로힝야(Rohingya)족 역시 자신들의 땅에 정착촌을 건설하려는 미얀마 군부의 장기적 프로젝트는 물론, 아파르트헤이트와 유사한 통제 및 배제 시스템에 맞서 싸워야 했다. 저널리스트 프랜시스 웨이드(Francis Wade)가 보여주었듯, 서안지구(West Bank)에서 이스라엘의 자체 정착촌 프로젝트가 확장됨에 따라 미얀마 군부는 북부 라카인(Rakhine)주의 로힝야족 거주 지역에 "현장의 실체"를 구축함으로써 영토를 주권화하고 인구 지형을 바꾸려는 시도—정교함은 떨어질지언정 그 해악은 동일한—에 착수했다. 1980년대 이후 미얀마 군부는 수용한 로힝야족의 토지에 로힝야족의 노동력을 동원하여 일련의 모범 마을을 건설했으며, 주택, 가축, 월간 수당, 식량 배급, 그리고 로힝야족의 토지 자체를 제공함으로써 버마족 불교도들—이 프로젝트를 통해 미얀마 교도소에서 석방된 수감자들 포함—을 이 마을들에 정착하도록 유인했다. 유일한 기준은 정착민이 불교도이어야 한다는 것뿐이었다.

이 "나탈라(Natala)" 정착촌 프로젝트는 수십 년 전 미얀마 북동부에서 펼쳐졌던 남상 프로젝트의 후과였다. 이스라엘과 미얀마의 명시적인 협력을 통해 미얀마의 군사화된 국경 지대의 인구 구조를 바꾸고자 모샤브 형태의 정착촌을 개발하려 했던 것은, 정착민 군사주의가 일찍이 번역되어 적용된 사례였으며, 나탈라 프로젝트는 어떤 면에서 이를 또 다른 국경 지대에 가져와 적용한 셈이었다. 그러나 미얀마 서부 로힝야 지역의 정착촌 프로젝트에는 남상 프로젝트에는 없었던 엄격한 아파르트헤이트 조치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로힝야족을 보안 구역화된 마을과 수용소에 갇히게 한 것, 의료·교육·고용에 대한 접근 제한, 이동·결혼·출생증명서 발급의 제한, 미얀마 시민권 부인, 그리고 미얀마 보안군에 의한 일상적인 자의적 체포와 사법 외 처형 등이 이에 해당한다. 즉, 팔레스타인인들에게 가해진 조건과 로힝야족에게 가해진 조건 사이의 유사성은 최근 두 집단학살이 눈에 띄게 격화되기 훨씬 전인 1990년대에 이미 극명하게 드러나 있었다.

그러나 이 모든 것—긴밀한 양자 관계, 안보 협력과 군사 지원의 오랜 역사, 이스라엘의 대미얀마 무기 거래, 그리고 절멸주의적 정착민 프로젝트 간의 유사성—이 미얀마의 파괴 배후에 음모론적으로 시오니즘이나 그 로비 집단이 서 있다는 것을 뜻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해야 한다. 오히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두 지역 모두에서 제거주의적 정착민 프로젝트를 비호하는 닮은꼴 군사주의를 중심으로 수렴되는, 파괴의 공유되고 중첩되며 협력적인 힘들이다.

한편, 1980년대부터 미얀마 도처에서 화석 제국과의 유대가 다시 이어졌다. 미얀마에서 화석 연료가 계급투쟁, 무장 충돌, 정치 권력과 거의 무관했던 수십 년이 지난 후, 1980년대에는 주요 해상 가스전이 발견되었다. 이들은 주로 한국, 프랑스, 미국, 태국, 말레이시아의 가스 회사들에 의해 개발되었으며, 이는 19세기 화석 제국의 지리에 확실한 변화를 가져왔다. 그 결과 미얀마 남동부를 가로지르는 3개의 가스 파이프라인이 건설되었고, 이는 1990년대, 2000년대 그리고 쿠데타 이후 현재에 이르기까지 미얀마 군사정권의 가장 중요한 수입원이 되었다. 게다가 중국 정부가 미얀마 군부를 오랜 기간 지원한 것은 2010년대에 벵골만에서 윈난의 정유 공장까지 미얀마를 양분하는 송유관 및 가스관이 건설되면서 전략적 물적 기반을 갖추게 되었다. 중국-미얀마 경제회랑(China-Myanmar Economic Corridor)의 척추인 이 파이프라인들은 2024년과 2025년에 중국이 무장 저항 단체들을 미얀마 군부와의 협상에 억지로 참여시키기 위해 반복적으로 개입한 이유를 설명하는 데 도움을 준다. 이 협상들은 저항 세력이 미얀마 중부 저지대를 위협할 태세를 갖추자마자 무장 투쟁을 무력화하고 군사력을 지탱해 주었다.

이러한 의미에서 석유, 가스, 그리고 그것이 필요로 하는 광범위한 인프라는 지난 수십 년 동안 미얀마 군부 독재의 지속적인 물질적 기반을 형성하게 되었다. 이러한 모세혈관 같은 복합체들은 미얀마 전역에 화석 제국 을 확산시켜, 오늘날까지도 군부의 파괴적인 권력 그 자체를 가능하게 하고 있다. 따라서 미얀마 서부의 한 병원에 폭탄이 떨어졌을 때—하늘에서 불길이 쏟아져 내리고 병원이 폐허가 되었으며 가족들이 파편 더미 속에서 사랑하는 이들을 끌어내었을 때—그 공습은 화석 제국의 피비린내 나고 극심한 폭력을 다시금 각인시켰다. 그것은 말름의 말을 빌리자면, 화석 연료에만 존재하는 무한한 파괴 능력을 동원한 것이었다.

화석 제국은 이제 거의 정확히 200년이 되었으며, 그 기원은 식민지화 이전 버마의 파괴에 정확히 위치해 있다. 그러나 미얀마 민중이 화석 제국의 힘에 복속되었던 원초적 역사가 현재의 폐허 속에서 그들이 겪는 탄압이나 이어가는 저항을 별도로 분리하거나, 높이거나, 우선시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화석 제국과 근대 군사주의 속의 그 후예들은 복속의 유산을 공유하며, 이는 반제국주의적 연대의 잠재적 윤곽을 시사한다. 깊이 뒤얽혀 있는 팔레스타인과 미얀마는 이러한 반제국주의 내에서 커다란 비중을 차지해야 하며, 그 역사적 과업은 이 세계의 삶 가능성을 되찾는 일이어야 한다. 이제 우리는 팔레스타인의 파괴가 미얀마의 파괴이며, 결국 지구의 파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코다(Coda): 파괴하는 것을 파괴하기 위하여

화석 제국에 뿌리를 둔 시오니스트 군사주의의 기원은 말름이 제안한 것보다 어떤 면에서는 훨씬 더 가깝다. 영국의 팔레스타인 식민화가 해안에 대한 증기선 포격으로 시작되어 점령된 팔레스타인에 이스라엘 국가를 만들어낸 잔혹한 역사적 과정을 열어젖혔을 뿐만 아니라, 보다 직접적으로는 이스라엘 국방군(IDF)이 파이프라인 방어를 주요 목적으로 삼았던 시오니스트 민병대로부터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이는 가산 카나파니(Ghassan Kanafani)가 1936년 대혁명에 대한 성찰에서 기술한 바와 같다. 특히 조슈아 클로버가 파이프라인 봉쇄에 관한 저서를 준비할 때 매우 중요하게 여겼던 구절이기도 하다.

“시오니스트 군사 기구의 기틀은 영국의 감독 아래 마련되었다”고 카나파니는 쓴다. “시오니스트 무력”은 처음에는 하이파-리다(Haifa-Lydda) 철도를 보호하는 책임을 졌으나, 이후 “바샨(Bashan) 평원의 송유관 방어를 맡게 되었다. 키르쿠크(Kirkuk)에서 하이파로 석유를 운송하기 위해 최근 건설된 이 송유관은 팔레스타인 반군에 의해 여러 차례 폭파되었다.” 카나파니는 파이프라인 공격에 큰 의미를 부여했다.

“이것은 엄청난 상징적 가치를 지녔다. 영국 수탈자들에게 석유가 갖는 가치를 알고 있던 아랍 반군들은 1936년 7월 15일 이르비드(Irbid) 인근에서 처음으로 송유관을 폭파했다. 이후에도 수차례 폭파가 이어졌다… 영국은 이 중요한 송유관을 방어할 수 없었음을 인정했으며, 팔레스타인 아랍 농민들이 ‘파이프’라 부르던 이것은 민중적 영웅주의 행위를 찬양하는 민담 속에 아로새겨졌다.”

미얀마의 경우, 석유 인프라가 실질적으로 영국에 의해서만 파괴되었다는 점은 역사적 아이러니다. 미얀마의 반식민 무장 저항군이나 군부에 맞서 싸우는 현재의 저항군에 의해서가 아니라 말이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군이 버마로 진격하자, 후퇴하던 영국군은 양곤의 항구와 석유 터미널뿐만 아니라,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석유 산업의 요람이었던 예난자웅(Yenangyaung)의 유전과 정유소를 파괴하는 길을 택했다. 영국은 일본의 석유 접근을 제한하고자 했으며, 일본의 버마 침공 역시 주로 군사 작전에 필요한 원자재, 특히 석유를 확보하기 위해 감행된 것이었다. 독립 후 국유화된 미얀마의 석유 산업은 전쟁 중 폐허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후 수십 년 동안 국내 시장에서 소박한 역할을 하며 회복되었다.

그러나 1990년대와 2010년대에 건설된 파이프라인들은 적어도 성공적으로 표적이 된 적이 없다. 오늘날 무장 투쟁에 참여하는 전투원들 사이에서는 가끔 질문이 오간다. 왜 파이프라인을 공격하지 않는가? 팔레스타인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왜 ‘파이프’를 민중적 영웅주의의 민담 속에 아로새기지 않는가? 결국 파이프라인은 군사정부의 가장 중요한 수입원으로 남아있지 않은가?

2022년 쿠데타 후 1년 이내에 만달레이(Mandalay) 인근에서 중국-미얀마 파이프라인을 노린 시도가 있었으나, 비교적 소규모였던 해당 단체에 프락치가 침투하여 체포가 이루어진 것으로 밝혀졌다. 더 중요하게는, 해당 파이프라인 통로를 따라 작전하는 대규모 무장 단체들이 중국과 복잡한 관계를 맺고 있다는 점이다. 일부는 중국의 후원에 의존하고 있으며, 이것이 군부와의 회담을 강요하는 중국의 개입이 저항 단체들의 영토 확장을 저지하는 데 효과적이었던 이유다. 다른 단체들은 군부에 대한 중국 정부의 더 강력한 지원으로 이어질 수 있는 중국의 분노를 사지 않으려 한다. 남동부에서 태국과 말레이시아로 공급되는 파이프라인의 경우, 해당 통로의 가장 큰 무장 저항 단체인 카렌민족연합(KNU)은 독립 직후부터 미얀마 국가에 맞서 반란을 이어왔다. 그러나 수십 년 동안 놀랍게도 태국 국경을 따라 및 국경 넘어의 기지, 작전, 물자 접근을 유지하기 위해서, 그들은 주요 에너지원 중 하나의 파괴를 달가워하지 않을 태국 정부 및 안보 부처와의 관계를 신중하게 관리해야만 한다. 한편, 더 작고 독립적인 저항 전투원 그룹들도 실질적으로는 대규모 단체들의 지휘 체계 아래에서 작전하는 경우가 많다. 가까운 미래에 파이프라인에 대한 공격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파이프라인은 손상되지 않은 채 남아 있다. 병원은 여전히 폐허로 남아 있다. 그리고 이 세계의 뒤얽힌 재앙 속에서, 다른 시대의 구호였던 "하나의 투쟁, 수많은 전(one struggle, many fronts)"은 아득한 메아리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그렇기에 그것은 더욱 절박하고 필요한 것이 되었다.

글 : 조프리 아웅(Geoffrey Ranthgeb Aung)

번역 : 김선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