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란파병 거부한다 | 그들의 힘의 논리를 넘어, 우리의 힘의 논리로
파병과 군비 증강은 ‘안보’라는 이름으로 우리 삶에서 무엇을 빼앗아가는가.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어떻게 멈추고 다른 세상을 만들어갈 수 있는가.
2026년 10월 05일몇 주 전, 친한 대학 동기와 ‘카공’을 하다가 군대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중, 나는 “역사적으로 군대는 국민을 보호하기보다는 지배 계급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 작동해 왔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도 군대가 그렇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없다”고 말했다. 군대를 다녀온 동기에게는 내 말이 도발적으로 들렸던 모양이다. 하려던 공부는 하지 못했고, 열띤 토론이 시작되었다. (이상하게 보이겠지만 원래 친구들과 이러고 논다.)
동기가 했던 말 중 “전 세계가 다 같이 군대를 없앨 수 있다면 좋겠지만,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세상인데 그래도 군대가 강해야 나라를 지키지 않겠냐”는 말이 기억에 남는다. 슬프게도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세상’이라는 말 자체는 일부 사실이기 때문이다. 동기와 비슷한 생각을 우리나라의 꽤 많은 사람들이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2024년 11월 한국갤럽 조사에서 국민의 66%가 자체 핵무장에 찬성했는데, 2017년(60%)보다 6%p 늘어난 수치다. 같은 해 KBS 조사에서는 여성 징병제 찬성이 54%로 과반을 넘었다. 물론 여성 징병제 찬성이 모두 군사력 강화를 지지한다는 뜻은 아닐 것이다. 다만 핵무장과 징병 확대를 둘러싼 여론은, 군대를 줄이거나 없애기보다 더 강하고 더 넓게 유지해야 한다는 생각이 우리 사회에서 여전히 강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런 ‘힘의 논리’에서 나와 같은 청년들도 자유롭지 않다. 이라크전 당시 20대가 파병 반대와 반전운동의 선봉에 섰던 것에 비하면, 지금 청년들의 반대 목소리는 다소 약하다. 9월 초 한국갤럽 조사에서 호르무즈 해협 파병에 대해 전체 응답자는 찬성 32%, 반대 55%였지만, 18~29세는 찬성 34%, 반대 50%로 반대가 평균보다 조금 낮았다.

그럼에도 여론조사가 보여주는 것은 여전히 더 많은 사람들이 중동의 전쟁에 한국 군대를 보내는 데 반대한다는 사실이다. 청와대가 ‘전쟁 개입 파병은 없다’며 사람들을 안심시키려 하는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청해부대의 작전 범위를 넓혀 홍해와 호르무즈에 사실상의 파병을 하려 하고 있다.
지난 9월 21일, 이재명 정부의 이러한 우회적이고 기만적인 파병 입장에 항의해 40여 개 청소년·청년학생 단위가 청와대 분수대 앞에서 호르무즈 우회파병 반대 기자회견을 열었다. 청해부대의 작전 범위를 넓혀 사실상의 파병을 추진하려는 정부에 맞서, 그 결정의 대가를 떠안게 될 세대가 직접 반대의 목소리를 낸 자리였다.
봄에는 유학생 친구들과 함께 영화관에 가서 <힌드의 목소리>라는 다큐드라마를 보았다. 영화는 여섯 살 소녀 힌드가 가족과 함께 차를 타고 가던 중 이스라엘군의 총격을 받아 홀로 살아남아 구호단체가 연락을 받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그러나 구호단체는 이스라엘군의 허가가 나기 전까지 구급차를 출발시킬 수 없어 반나절을 기다려야 했다. 이후 구급차가 현장으로 향했지만, 결국 구급차와 힌드 모두 총격을 당했고, 이스라엘군이 철수한 뒤 힌드는 어머니의 품에 주검으로 안겼다. 이처럼 우리가 사는 세상을 지배하는 군사력의 논리는, 군사력을 가진 자들이 총대를 들이밀면 아무 죄 없는 사람들이 죽음을 감당해야 한다는 논리다. 그 대상이 자국민이든 외국인이든 가장 약한 사람들을 향한다. 1947년 제주에서, 1980년 광주에서 그랬고, 바다 건너서는 1945년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서, 1968년 베트남 미라이에서, 2003년 이라크에서, 지금은 가자에서 같은 일이 반복되고 있다.
그런데 이런 군사력은 그저 추상적인 국가의 힘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전쟁이 벌어지고 군비가 늘어날 때, 그 과정에서 막대한 이익을 얻는 이들도 분명히 존재한다. 그리고 이 위계의 가장 위에는 자본이 있다. 가자지구에서 매일같이 사람들이 피를 흘리는 동안, 미국은 2023년 10월 이후 최소 217억 달러의 군사원조를 이스라엘에 제공했고,
개전이 시작된 2023년 10월 7일 단 하루 만에 록히드마틴 주가는 8% 넘게, 노스롭 그루먼 주가는 11% 넘게 뛰어올랐다. 미국이 이란을 향해 침략 전쟁의 명분을 쌓아가는 동안에도, 국내 방위산업을 대표하는 한화에어로스페이스의 주가는 최근 3년 사이 20배 넘게 치솟았다.
전쟁이 길어질수록, 폭탄이 더 많이 떨어질수록 배를 불리는 자본에게 힘의 논리란 사람들의 피로 얻은 이윤일 뿐이다. 결국 방아쇠를 당기는 것은 병사이고 피를 흘리는 건 평범한 사람들이지만, 그 총알과 미사일을 팔아 이윤을 챙기는 것은, 폐허가 된 땅에 건물을 지으며 통장에 돈이 쌓이는 것은 전장에서 가장 먼 안전한 사무실에 앉은 자본가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전쟁을 통해서 이윤을 보는 이들과 그들의 편을 드는 권력은 더 큰 군대와 많은 무기가 있으면 우리가 안전해질 거라고 우리에게 거짓말을 한다. 그러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군사비 지출 확대는 안보를 보장하기는커녕 군비경쟁을 부추기고 국가 간 불신을 심화시켜 오히려 안정을 해친다. 앞서 이야기했듯 가파르게 불어나는 군사비는 다른 곳에서 빠져나간다. IMF가 33개국의 1990~2023년 자료를 분석한 최근 연구에 따르면, 군사비 지출이 늘어난 나라일수록 보건과 교육 지출이 유의미하게 줄어드는 '구축효과(crowding-out effect)'가 뚜렷하게 나타났다.
한국도 예외가 아니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이 2025년에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2023년 한국의 보건 분야 공공사회복지지출은 GDP의 5.0%로 OECD 평균(6.5~7.5%)에 크게 못 미쳤고, 국민의료비 중 정부·건강보험 등 공공재원이 차지하는 비중 역시 한국은 60%로 OECD 평균 73%보다 현저히 낮았다. 반면 한국의 GDP 대비 국방비는 2.8%로 영국, 중국, 일본보다도 높은 수준이다. 아픈 사람을 치료하고 아이를 키우는 데 쓰여야 할 돈이 무기를 사고 방산기업들을 배불리는 데 쓰이고 있는 것이다. 군대를 키우겠다는 약속은 결국 우리를 지켜주기는커녕, 전쟁의 위험은 높이고 우리가 정말로 일상을 인간답게 살아가는 데 필요한 곳에 들어가는 비용은 축소하고 개인의 책임으로 떠넘긴다.이런 세상에 살다 보면, 결국 모든 것이 군사력의 논리로 결정될 뿐이고, 여기에 맞설 수 있는 것도 더 강한 군사력뿐이라는 무력감에 쉽게 빠지고 만다.

뉴스에서 보는 세상뿐만 아니라 당장 일상에서 마주하는 우리의 삶도 그렇다 직장에서 괴롭힘을 당하는 노동자들에게 너의 능력이 부족한 탓이라고, 홈리스에게 집이 없는 건 네가 노력하지 않은 탓이라고, 성폭력 피해자에게 충분히 저항하지 못한 탓이라고 하는 우리 일상 속 ‘힘의 논리’가 총을 쏘라고 명령하는 자들이 이야기하는 힘의 논리와 닮아 있기 때문일지 모른다. 그렇기에, 우리는 진짜 적이 누구인지 몸에 새겨진 경험으로 알면서도 쉽게 대항하지 못하곤 한다. 몇 주 전 이야기를 한 그 동기는 웃으며 이런 말을 하기도 했다. “사실 군인에게 주적은 간부야.” 그렇다. 간부가 주적이라는 것을, 그리고 자신이 복무하는 군대라는 조직 자체가 위계의 논리로 작동한다는 것을, 군복을 입은 청년들은 매일같이 깨닫고 있다.
그들이 우리에게 하는 거짓말이 하나 더 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고, 세상은 계속 ‘그들의 힘의 논리’에 따라서만 흘러갈 것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사회운동과 반전운동의 역사가 언제나 승리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가장 거대한 군대조차 평범한 사람들의 협조 없이는 단 하루도 움직일 수 없다는 사실을 거듭 보여주었다. 제1차 세계대전의 참호에서 죽어가던 러시아의 노동자와 병사들은 ‘빵과 평화’를 외치며 차르를 무너뜨렸고, 독일 킬의 수병들은 패배가 뻔한 출격 명령을 거부했다. 그들의 항명은 노동자 병사평의회의 봉기로 번져 제국과 전쟁을 끝으로 몰아갔다. 총을 쥔 사람에게도 명령을 거부할 힘이 있고, 공장을 돌리는 사람에게는 무기 생산을 멈출 힘이 있으며, 서로를 적으로 삼으라는 명령 대신 손을 맞잡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그들은 증명했다.
베트남전쟁 때에도 전쟁을 멈춘 것은 더 강한 폭탄이 아니었다. 징집을 거부한 청년들, 거리로 나온 학생과 노동자들, 제국주의 전쟁과 인종차별이 이어져 있음을 폭로한 흑인해방운동, 그리고 군대 안에서 명령을 거부하고 반전신문을 만든 병사들이 전쟁 수행 능력을 안에서부터 무너뜨렸다. 2003년 2월에는 침공을 막아내지는 못했지만 대한민국을 포함한 세계 곳곳에서 수백만 명이 같은 날 거리로 나와 이라크전쟁에 반대했다. 패배처럼 보이는 순간에도 저항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것은 전쟁의 거짓말을 기록하고, 다음 저항이 딛고 설 언어와 조직과 기억을 남겼다.
우리의 역사도 다르지 않다. 광주를 짓밟은 군홧발은 오래도록 승리한 듯 보였지만, 그 기억을 품은 학생과 노동자와 시민들은 1987년 거리에서 군부독재를 물러서게 했다. 그리고 6월의 항쟁이 열어젖힌 틈으로 노동자들이 쏟아져 나왔다. 7·8·9 노동자대투쟁에는 122만 명이 넘는 노동자가 참여했고, 그해 말 노동조합 수는 전년의 2,675개에서 4,103개로 늘었다. 아래에서 모인 사람들의 힘은 대통령을 직접 뽑을 권리를 쟁취하는 데서 멈추지 않고, 공장과 병원과 거리에서 인간답게 살 권리를 넓혀갔다.
그리고 그런 역사는 언제나 아주 작아 보이는 시작에서 출발했다. 지난 9월 21일의 기자회견도 그런 시작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대학생과 청소년, 기후정의 활동가, 간호학생, 노학연대와 팔레스타인 연대 모임의 학생들이 차례로 마이크를 잡았다. 서로 다른 자리에서 온 사람들이었지만, 이어지는 발언은 어느새 같은 곳을 가리키고 있었다. 정부가 보내겠다는 군함에 결국 타게 되는 것은 우리 또래의 청년들이라고, 주거와 교육과 존엄한 삶에 쓰여야 할 공공의 재정이 방산기업의 이윤으로 흘러가는 것을 용납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리고 “이재명 정부는 청소년·청년학생을 방패 삼아 숨지 마라”고 같은 시간에 같은 목소리로 외쳤다.
수십 명이 모인 기자회견이 전쟁을 당장 멈출 수 없을지 모른다. 그러나 앞서 이야기한 저항의 역사도 모두 이런 자리에서 시작했다. 파병이 어쩔 수 없는 일이 아니라 우리가 반대할 수 있는 일이라고 말하는 목소리가 생겨나는 순간, 다른 선택이 없다는 거짓말에 금이 가기 시작할 것이다. 청와대 앞에서 같은 구호를 외치며 서로를 확인한 그 하루는, 계속될 저항이 딛고 설 언어와 관계를 하나 더 남겼다.

그렇다면 힘의 논리를 벗어나는 길은 더욱 강한 ‘우리의’ 힘의 논리, ‘함께 저항하는’ 힘의 논리를 조직하는 것이다. 그들의 힘이 명령과 복종, 총과 자본, 경쟁과 각자도생의 힘이라면, 우리의 힘은 서로의 삶을 지키기 위해 함께 멈추고 함께 움직이는 힘이다. 한 사람에게는 해고와 징집과 가난을 감당하라고 할 수 있어도, 수많은 사람이 동시에 더 이상 이렇게 살 수 없다고 말할 때 세상은 더 이상 이전과 같이 굴러갈 수 없다.
그러므로 세상이 아무 일도 없는 듯 조용해 보이더라도 낙담하지 말자. 전쟁이 벌어지고 파병이 추진되는데도 분노하지 않는 사람들이 미워지려 할 때면, 우리의 분노가 향해야 할 곳을 다시 생각하자. 사람들을 무관심하게 만들고, 전쟁을 어쩔 수 없는 일로 여기게 하고, 다른 선택은 없다고 믿게 만드는 것 역시 권력이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바라는 평화는 강한 군대가 잠시 총을 내려놓은 상태가 아니다. 누구도 타인의 삶을 희생시켜 이윤을 얻을 수 없고, 누구도 먹고살기 위해 다른 사람에게 총을 겨눌 필요가 없는 세상이다. 그런 평화는 위에서 선물처럼 내려오지 않는다. 학교에서 일터에서 거리에서 한 사람을 만나고, 다시 한 사람을 만나고, 질문하고, 토론하고, 설득하며 흩어진 불안과 분노를 서로를 지키는 힘으로 바꾸어가자. ‘힘의 논리’가 세상을 지배한다면,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힘보다 오래가고 더 많은 사람을 살리는 우리의 힘을 조직하자.
글 : 최준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