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부채 위기로 벼랑 끝에 내몰린 필리핀 여성들과 이에 맞선 투쟁
이 위기는 저항 또한 낳았습니다. 수십 년간 필리핀 여성들은 노동자, 농민, 원주민, 그리고 다른 소외 계층과 함께 이러한 신자유주의 정책과 이를 뒷받침하는 체제에 저항해왔습니다.
2026년 08월 31일이 글은 아시아태평양 여성, 법률 및 개발 포럼(Asia Pacific Forum on Women, Law and Development, APWLD)가 진행한 국가 채무가 여성인권에 미치는 영향에 관한 국가별 보고서의 결과 공유 모임에서 발표된 발언문이다. 해당 보고서 전문은 CWR_Living on the Edge Impacts of the Debt Crisis to Filipino Women_April 2024.pdf 를 통해 읽을 수 있다.
1992년, 여성자원센터(CWR)는 부채 주도 개발과 구조조정 정책의 폐해를 기록한 보고서를 발표했습니다. 30여 년이 지나 이번 새로운 조사를 진행하며 우리가 놀랐던 것은 얼마나 많이 변했는가가 아니라, 얼마나 많은 것이 그대로 남아있는가였습니다. 그리고 여러 면에서 상황은 오히려 더 나빠졌습니다.
필리핀은 1957년부터 국제통화기금(IMF) 및 세계은행과 오랜 관계를 맺어왔습니다. 이 기관들은 수십 년에 걸쳐 차관과 정책 조건을 통해 우리나라의 경제 방향을 좌우해 왔습니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막대한 공공부채가 쌓였고, 자동예산배정법(Automatic Appropriations Law)에 따라 부채 상환은 계속해서 필수 공공서비스보다 우선순위를 차지해왔습니다.
- 필리핀의 자동예산배정법은 마르코스 정권 시절인 1977년 대통령령으로 도입됐다. 이 법은 국가 예산 편성 시 국가부채의 이자와 원금 상환을 위한 자금이 먼저 책정되도록 하고 있는데, 이는 국회의 별도 심의나 승인을 거치지 않고 자동으로 집행된다
우리 조사는 이러한 정책 처방들을 분석했고, 수십 년간의 차관과 정책 조건부 지원으로 인해 신자유주의 정책이 필리핀에 깊이 뿌리내렸다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러나 자유화, 민영화, 규제완화, 긴축, 역진세, 수출 지향 개발이 수십 년간 이어졌음에도 불구하고, 필리핀은 여전히 반식민지·반봉건 상태이며 만성적인 위기 속에 있습니다.
현재 필리핀의 미상환 국가부채는 18조 페소를 넘어섰고, 올해도 계속 늘어날 전망입니다. 이는 필리핀 국민 1인당 약 161,900페소에 해당하며, 가장 빈곤한 지역의 최저임금 노동자 기준으로는 1년 반치 소득에 맞먹는 금액입니다.
하지만 이처럼 증가하는 부채 부담과 이 정책들의 해악을 보여주는 수십 년간의 증거에도 불구하고 현 마르코스 정부는 계속해서 새로운 차관을 들여오고 있습니다. 특히 세계은행으로부터 말입니다. 여기에는 사상 최대 규모인 10억 달러의 농업 차관, 8억 달러 규모의 "일자리 의제(Jobs Agenda)" 차관, 그리고 인프라, 에너지, 수자원, 사회보장 및 기후 회복력을 위한 수십억 달러의 자금이 추가로 포함됩니다.
이 프로젝트들은 지속 가능한 개발, 고용, 현대화, 기후 행동을 위한 투자로 홍보됩니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동일한 신자유주의 개발 모델을 재생산하고 있습니다. 즉, 민간 부문 참여를 확대하고, 상업화와 수출 지향적 생산을 촉진하며, 민간 투자를 유치하고 최근에는 미국 주도의 팍스 실리카(Pax Silica)가 들어설 루손 경제회랑(Luzon Economic Corridor)과 같은 경제·안보 중심지의 인프라 구축에까지 활용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체제를 지탱하는 것은 국제금융기구(IFI)와 이를 지배하는 미국을 비롯한 여러 글로벌 노스 국가들만이 아닙니다. 우리가 ‘관료자본가’라고 부르는 현지 정치인과 정부 관료들, 즉 국가권력을 이용해 자신의 이익과 외국 독점자본 및 국내 지배 엘리트의 이익을 함께 추구하는 이들 역시 이 체제를 떠받치고 있습니다. 이들은 진정한 국가 자립 산업화, 토지개혁, 농촌 발전을 추구하는 대신 IMF와 세계은행 같은 기관의 이해관계에 부합하는 정책을 설계하고, 실행하는 주요 주체가 됩니다.
그러나 계와 정책을 넘어, 가장 중요한 것은 부채가 일상, 특히 여성의 삶을 어떻게 재편하는가입니다.
몇 가지 사례를 들어보겠습니다.
첫 번째는 석유 규제완화입니다. 이는 1980~90년대 IMF와 세계은행이 추진한 광범위한 구조조정 의제의 산물로, 결국 1998년 석유규제완화법 제정으로 이어졌습니다.
석유 규제 완화는 경쟁과 가격 하락을 가져오는 대신, 소수의 기업이 지배하는 변동성 큰 국제 석유시장에 필리핀을 노출시켰습니다. 최근 이란을 공격한 미국의 전쟁은 필리핀 여성들에게 참담한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석유 위기가 절정이던 시기, 지프니 운전사 가정의 한 여성은 유가 급등으로 하루 가구 소득이 약 11~13달러에서 3~4달러로 줄었다고 말했습니다. 학교에 다니는 아이와 집에 있는 손주를 가진 이 가족은 쌀과 새우젓으로 연명했고, 때로는 그냥 굶주린 채 잠자리에 들기도 했습니다. 또 다른 여성은 아침 밥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도록 아이를 일부러 늦게까지 재웠다고 말했습니다.
이런 이야기는 결코 몇몇 사람에게만 벌어지고 있는 일이 아닙니다. 이는 도저히 감당하기 어려운 경제적 조건 속에서 가족이 생존을 떠맡고 있는 수백만 필리핀 여성들의 일상적인 현실을 반영합니다.
또 다른 사례는 역진적 조세제도입니다. 필리핀은 이미 동남아시아에서 가장 높은 부가가치세율(12%)을 적용받고 있습니다. 그것으로도 부족했는지, 당시 제안된 4억 5천만 달러 규모의 세계은행 대출 선행조치였던 TRAIN법은 부가가치세 적용 범위를 더욱 확대하고 유류소비세를 인상했습니다. 반면 대기업들은 계속해서 막대한 세제 혜택과 낮은 실효세율을 누리고 있습니다.
더 심각한 것은, 정어리 통조림 하나, 라면 한 봉지, 전기요금, 수도요금마다 거둬들이는 막대한 세금이 반드시 양질의 공공서비스로 이어지지는 것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공공재원은 부패로 새어나가거나, 정치·기업 엘리트에게 주로 혜택이 돌아가는 인프라 사업으로 전용되거나, 군사비 확대에 배정되거나, 보건·교육·사회보장 대신 부채 상환에 사용됩니다.
동시에 긴축과 민영화는 공공서비스를 꾸준히 약화시켜왔습니다. 의료 부문 개혁은 의료 서비스의 상업화를 심화시켰습니다. 필리핀 가정은 단 한 번의 입원만으로도 파산하거나 막대한 빚을 질 수 있다는 말을 흔히 합니다. 최근 한 연구에 따르면 필리핀 가정의 64%가 돈을 빌려 빚을 지지 않고는 단 160달러의 기본적인 병원비조차 감당할 수 없다고 합니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여성들은 얼마 되지 않는 돈이라도 벌기 위해 일을 더 떠맡아야 하고, 빠듯한 자원을 쪼개고 또 쪼개 겨우 생계를 이어가야 합니다. 또한 많은 여성들이 소액금융이나 휴대전화 앱을 이용해 급속히 확산되는 온라인 대출의 덫에 빠지게 되는데, 이런 앱들은 빠른 대출을 제공하지만 과도한 이자를 부과하며, 종종 위협적이고 부당한 채권추심을 일삼습니다. 여성들은 대개 가계 재정을 관리하는 책임을 지기 때문에 이러한 압박을 가장 먼저 떠안게 되고, 만성적 스트레스, 괴롭힘, 착취, 심지어 젠더 기반 폭력에까지 노출됩니다.
그러나 이 위기는 저항 또한 낳았습니다. 수십 년간 필리핀 여성들은 노동자, 농민, 원주민, 그리고 다른 소외 계층과 함께 이러한 신자유주의 정책과 이를 뒷받침하는 체제에 저항해왔습니다. 불평등이 심화되고 사람들이 이러한 정책에 맞서 조직됨에 따라 노동조합원, 농민단체, 원주민 공동체, 여성인권운동가들에 대한 탄압도 갈수록 심해지는 것 또한 우리는 목격해 왔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탄압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집단적 조직화를 통해 IMF와 세계은행의 정책 및 사업들을 계속해서 폭로하고 맞서 싸우고 있습니다. 우리 다수에게 이는 정의를 위한 투쟁이자 권리 실현을 위한 투쟁이며, 궁극적으로는 바로 우리 자신의 생존을 위한 투쟁이기 때문입니다.

글 : 참 페레즈 (필리핀 여성자원센터 Center for Women’s Resourc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