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수동 ‘갑부청년’의 지역운동에 대한 복잡한 고민
2022년 1월 31일
지난 인터뷰
- 김윤영 (상) 12년차 반빈곤 활동가에게 워라밸을 물었다
- 김윤영 (하) 내가 사회복지사가 아니라, 반빈곤 운동가가 된 이유
- 박장준 (상) 지역사회운동노조를 표방하는 희망연대노조에서 배운 것
- 박장준 (하) “노학연대 경험이 내 활동의 견인추”
- 신지영 (상) 운동이 나를 잡아먹으면 안 된다, 즐거워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 신지영 (하) 내가 나를 ‘활동가’라고 부르게 됐을 때
- 공성식 (상) 포스트-코로나 시대, 반자본주의적 공공부문 노동자운동의 역할 찾아야
- 공성식 (하) 서로 돌봐주는 ‘규모의 운동’
- 임민경 (상) 취약한 사람에게도 좋은 환경이 모두한테 좋은 환경
- 임민경 (하) 오래 활동하려면 내 고유한 삶의 영역도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활동가 인터뷰의 이번 만남은 광주지역에서 청년유니온 등 다양한 활동을 해온 김설 활동가다. 광주 오월의집에서 그를 만나 광주 지역에서 청년 활동가로 살아간다는 것의 의미를 물었다.
- ❓청년유니 온 : 2010년 창립한 세대별 노동조합. 만 15세에서 39세의 청년이라면 고용형태에 상관없이 누구나 가입할 수 있다. 단체교섭 등 노동조합의 역할과 더불어 청년세대 노동자들을 연결하고, 청년들의 노동이 겪는 문제점을 드러내고 사회적 이슈로 알려내는 역할도 활발히 수행하고 있다. 광주청년유니온은 청년유니온의 광주지역지부다.
플씨 : 광주 부심이 넘치신다고 들었는데요.
김설 : 다른 지역에서 오신 분들에게 전형적으로 하는 소개가 있어요. 첫번째는 “저는 광주에서 태어났고, 광주에서 살아가고 있으며, 광주를 사랑하는 사람입니다”인데요. 이렇게 소개하는 이유가 광주 지역이 특수하다고 생각해서는 아니에요. 제가 활동을 시작하고, 다양한 사회와의 만남을 시작하게 된 계기가 광주라는 지역의 역사에 크게 얽혀있기 때문이에요. 80년 당시 계엄군의 총을 맞았던 국가폭력의 피해자였고 이를 계기로 노동조합과 진보정당 등을 통해 사회 변혁에 헌신해온 부모의 역사를 공유하는 개인사, 또 제가 발딛고 있는 도시의 역사가 제 활동에 지대한 역할과 영향을 주었기 때문이죠.
또 하나는 “이름이 예쁜 설입니다.”라고 말씀을 드려요. 저희 할아버지가 교장 선생님이셨어요. 첫 손주가 저여서 세상에 없는 이름을 지어주고 싶다는 생각을 하셨다고 해요. 그래서 학교 선생님들께 공모를 했고, ‘설’(사람이름 설卨)이라고 하는 이름이 결정이 됐대요.
제가 소속되어 있는 단체는 정말 많아요. 플랫폼씨 회원이기도 하지만, 가장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있는 단체는 광주청년유니온이에요. 유니온은 청년들을 둘러싼 노동, 사회, 경제, 문화적 권리를 지켜내기 위해 2010년 만들어진 노동조합이자 커뮤니티 단체에요. 저는 광주지부에서 2018년부터 위원장으로 활동하고 있어요.
“내가 추운데 왜 서있어야 하냐”
플씨 : 사회운동과 관련해서 지금까지 인상깊었던 순간이 언젠가요? 키워드(첫 성명서, 나의 첫 휴가 등) 중 하나를 뽑아서 이야기해주세요.
김설 : 저의 ‘첫 발언’이 기억나네요. 2008년 광우병 반대 촛불 집회 때 광주에서 3만 명이 모였어요. 당시 초등학교 6학년 또는 중학교 1학년이었고, 가족하고 다 같이 갔던 집회였어요. 무슨 생각이었는지 모르겠는데 그냥 무대 앞으로 가서 손을 번쩍 들고 “저 발언 시켜주세요! 발언하고 싶어요!” 그런 거예요. 실은 전날 밤에 발언 준비를 했죠. ‘내일 집회를 간다. 만약에 내게 발언할 수 있는 기회가 있다면 이런 얘기를 해야지’ 하면서 메모장에 무언가를 적었어요.
정작 올라가니까 눈 앞의 3만 명이 보이더라고요. 끝 없는 인파 앞에 갑자기 아득해졌어요. ‘이 말을 해야지’ 속으로 생각하고 올라가서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아요. 짧게 뭔가 말했죠. 나름 웃기겠다고 뭔가를 준비한 것만 기억나요. “여러분 이렇게 추운데 나와서 아스팔트 위에서 앉아 계시는 것, 이거 다 누구 때문이죠? 다 이명박 때문인 것 아시죠 여러분?”라고 두 번인가 했어요. 근데 너무 당황해서 벌벌벌 떨면서 발언 한 거예요. 사회자도 웃겼나 봐요. 귀엽게 봐주시고 농담을 하셨던 것 같아요. 저는 그 순간이 잊혀지지가 않아요.
제게는 큰 경험이기도 한 거죠. ‘내가 그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얘기를 해봤다!’라는. 끝나고나선 현수막 하나 들고 1인 시위도 했어요.
플씨 : 처음부터 3만 명이라니, 데뷔전이 아주 큰 무대였네요. 돌아보면 활동하기 싫었을 때도 있을 것이고, 재개할 때도 있었을 것 같아요. 활동을 지속해야겠다고 결심한 계기가 뭐였나 궁금합니다. 아니면 거꾸로 ‘나 활동해도 되겠다.’ 생각이 들었던 계기가 있었는지?
김설 : 특별한 계기는 없었어요. 다만 ‘난 평생 이러고 살겠구나’라고 생각한 적은 있어요, 고등학교 때인데요. 1학년 때 아침 7시20분까지 등교하고 밤 10시까지 자율학습을 했어요. 너무 하기 싫었어요. 항상 ‘왜 내가 이래야 되지?’ 생각했어요. 그리고 공부를 되게 못 했죠. 반에 30명 있으면 반에서 28등 29등 했어요. 고등학교 1학년 때까지 공부를 왜 해야 되는지 이유를 모르겠더라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