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 돌봐주는 ‘규모의 운동’

‘활동가를 만나다’시리즈 네번째 인터뷰 대상은 공성식 활동가다. 공 활동가는 2013년부터 공공운수노조에서 활동하고 있으며 현재 정책기획실장을 맡고 있다. 그에게 공공운수사회서비스 노동운동의 쟁점과 함께, 활동가로서의 고민을 물어보았다. 지난 인터뷰는 여기서 읽을 수 있다.

공공운수노조의 정식명칭은 민주노총 공공운수사회서비스노동조합이다. 2014년 공공운수노조와 공공운수연맹이 통합했으며, 공공부문·운수부문·사회서비스부문의 노동자 25만명이 가입해 있는 한국 최대 산별노조이기도 하다. 2021년에는 ‘동네방네 공공성, 구석구석 노동권’을 중심으로 투쟁을 해 왔으며, 11월 27일에는 ‘판을 뒤집자! 세상을 바꾸자!’를 구호로 공공운수노조 총궐기가 열렸다.

지난 인터뷰
김윤영 (상) 12년차 반빈곤 활동가에게 워라밸을 물었다
김윤영 (하) 내가 사회복지사가 아니라, 반빈곤 운동가가 된 이유
박장준 (상) 지역사회운동노조를 표방하는 희망연대노조에서 배운 것
박장준 (하) “노학연대 경험이 내 활동의 견인추”
신지영 (상) 운동이 나를 잡아먹으면 안 된다, 즐거워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신지영 (하) 내가 나를 ‘활동가’라고 부르게 됐을 때

그의 가방에는 노조 조끼가 있다

총파업과 촛불 사이

플씨 : “나의 첫 집회사회” “나의 첫 발언” “나의 첫 성명” “나의 첫 활동비”, “나의 첫 휴가” 등 키워드 중 하나를 뽑아서 이야기해주세요.

성식 : 학생 시절엔 집회 사회를 본 적이 없는 것 같아요. 사회단체에 와서 빈곤사회연대 주최 집회의 사회를 본 게 처음이었던 것 같아요. 예전 거 찾아보려고 검색해 보니까 지금은 사진이 안 뜨더라고요. 아마 2005년에 기초생활보장법 농성하면서 했던 게 첫 집회 사회가 아니었나 싶어요. 지금도 계속 싸우고 있지만 기초법(국민기초생활보장법) 관련해서 대상자를 넓히는 싸움이었을 거에요. 노무현 정권 시기였고, 당시 정부가 “생산적 복지”를 얘기하면서 노동 능력이 있는 사람을 수급대상에서 제외할 때였거든요. 그래서 그 지표였던 것 같아요.

플씨 : 대학 입학 후 벌어진 1996-97년 총파업을 계기로 학생운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했죠? ‘총파업 투쟁속보’ 같은 영상 자료를 보면 혁명전야 같은 분위기가 있었던 것 같은데 당시 경험이 활동가의 길로 이끄는데 영향을 줬나요?

성식 : 대학 입학 당시 저는 ‘운동’에 대해 대단히 회의적인 사람이었어요. 이미 현실 사회주의가 망한 때였고 북한의 실체도 다 드러난 상태였거든요. 선배들도 제가 활동할 거라고 전혀 생각하지 않았고요.

최근에 노태우가 죽으면서 당시 어떤 분위기였는지 떠올릴 기회가 있었어요. 1995년에 전두환 노태우가 재판을 받으면서 그들에 대한 처벌을 요구하는 투쟁이 엄청나게 컸죠.

그 당시는 90년대 초반 운동이 가라앉았다가 1995년을 거치면서 분위기가 다시 달아오른 시점이었어요. ‘사회주의’나 ‘반자본주의’ 이런 게 아니라, ‘민주주의’ 투쟁이었던 거죠. 그럼에도 운동의 열기가 뜨거워서 1996년에 제가 다니는 학교에서 9년 만에 학생총회가 성사됐어요. 통일 관련 집회를 학교에서 한다고 하니까 경찰들이 학교와 도서관을 폐쇄하고 전경이 들어왔죠. 학생들은 민주주의라는 키워드로 총회를 개최하면서 광장에 한 3~4000명이 모였어요.

대학생 시절 노래패 활동을 하던 공성식 활동가

성식 : 그런 분위기에서 1997년 총파업이 빵 터진거죠. 그 전에 회의적으로 ‘세상이 바뀌겠어’ 혹은 ‘과연 우리한테 반자본주의적인 전망 같은 게 있을 수 있어? 다 망했는데’ 같은생각을 했다면 그 뒤에는 운동이라고 하는 것이 ‘완성된 모델을 향해가는 것’이 아니고, 모델이 없어도 현실에서 발생하는 여러 가지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고, 그 해결 과정에서 성장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특히 96-97년 총파업이 ‘운동을 통해서 세상을 바꿀 수 있다’라는 걸 보여주는 중요한 계기였고요.

당시 제가 속해있던 운동 그룹에서는 ‘역사적 좌파’라는 말을 많이 썼어요. 그게 사실 프랑스 혁명부터 시작한 민주주의 운동, 사회주의 운동과 같은 운동의 흐름들을 자신의 역사로 인정하는 것에서 시작해요. ‘좌파’라는 게 몇몇 급진적인 활동가들이 자임해서 좌파인 게 아니라, 해당 정세에서 중요한 문제들을 급진적으로 제기하며, 대중운동의 과정에서 만들어진다는 의미였죠. 당시 다른 좌파들은 저희를 ‘민중주의’, ‘민주주의적이거나 개량적’이라고 봤을 수도 있겠지만요.

그런 면에서 최근의 촛불 시위하고 느낌이 좀 다른 것 같아요. 촛불 시위는 불을 밝혔으니 이제 누군가 해결해 주기를 기다리는 분위기에 가까웠던 것 같아요. ‘우리 이렇게 많이 모였으니까 정부가 알아서 무언가를 해라’ 이런 느낌이었다면, 당시에는 훨씬 자신감도 있었고 ‘우리가 뭔가를 바꾸겠다’, ‘우리가 대중 운동의 힘으로 세상을 바꾸겠다’ 하는 느낌이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생각해보면 2008년 광우병 쇠고기 수입 반대 시위 때까지만 해도 안 그랬잖아요. 물론 과거라서 미화하는 것도 있겠지만요.

97년 총파업에서 가장 강렬했던 기억 중 하나는 종로 종묘공원에서 집회할 때였는데요. 그때 누군가 “이제 거리로 나갑시다!”라고 외치고, 투쟁가가 나오는 상황에서 사람들이 하나둘씩 일어서고 있었는데, 그때 갑자기 멀리서 파란 깃발(금속노조 대오)이 쫙 거리에 쏟아졌어요. ‘이게 대중운동의 힘이구나’를 느낀 순간이었죠. 언어화하기 힘들지만 ‘활력’이라고 해야 하나? 자신감 같은 게 느껴졌었던 거 같아요.

노동조합으로

플씨 : 거의 20년 전업 활동가로 활동하면서 활동을 지속하는 것에 대한 고민이 있었을 것 같아요. 활동을 그만두고 싶다고 생각했던 때 이야기를 해주실 수 있을까요? 아니면 거꾸로, ‘나 이제 운동해도 되겠다’라고 확신하게 된 시점이 있었는지 궁금합니다.

성식 : 그런 건 너무 많아서… 아직까지 하고 있으니까 ‘그냥 해도 되겠는데’라는 생각을 ‘그만두고 싶다’고 생각한 만큼 반복한 거죠. 제 주변에서는 다들 1~3학년 때 학생운동을 많이 하다가 중간에 그만두는 분위기였는데요. 저도 그때 한 번 고비가 있었어요. 당시 총학생회 선거에서 비운동권 학생들한테 졌거든요. 차라리 이겼으면 ‘이만큼 했으니까 됐다’ 이랬을 수도 있는데 너무 억울했어요. 우리가 분명히 옳고, 저쪽에서 정말 말도 안 되는 얘기를 했는데 더 많은 사람들이 저 쪽을 선택한 거죠. 그렇다고 이대로 멈출 수도 없고… 그런 오기로 지속했던 것 같아요.

노동조합에 오고나선 활동을 관두고 싶었던 적은 없었던 것 같아요. 물론 약간 ‘직장인이 된 것일 수도 있고, 활동에 대한 고민보다 일단 지금 당장의 일을 해야한다는 점 때문에 계속 하게 된 경향이 있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조 와서 좀 좋아졌다고 할 수 있는 것 같아요. 노조에는 구체적으로 현장이나 조합원들이 있으니까요.

운동에 노력을 쏟기 때문에 조금 바뀌는 게 있기도 하고, 조합원들에게 경제적인 이익도 있지만 정책이나 제도에도 영향을 미치는 것도 보이다보니까 운동을 계속 해왔던 것 같아요. 그게 쌓인다고 우리 사회가 확 변하는 건 아닐 수 있다는 함정은 있지만요. 

활동가의 자질 문제와 연결되는 문제이기도 한데요. 사람은 저마다 다르죠. 잘 할 수 있는 일이 있고, 더 좋아하는 일도 있고요. 반대로, 못하는 일이 있고 하기 싫은 일들도 있는데 큰 조직에 있으니까 제가 못하는 걸 메워줄 수 있는 사람도 많아요. 반대로, 제가 잘하는 것을 중심으로 더 할 수도 있는 것 같고요. 그런 면이 대중운동의 장점인 것 같아요. 그래서 좀 더 큰 조직, 혹은 더 넓은 공간을 들여다보면 나의 단점을 다른 누군가가 보완해 주고 장점을 더 살릴 수 있는 규모도 운동에 있어서 중요한 것 같아요. 운동이 계속 좁아질수록 서로서로 힘든 것은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아닐까 싶네요.

플씨: 방금 ‘규모’를 이야기하셨는데요. 활동가에게 필요한 자질이 따로 있을까요? 저마다 다양한 자질들이 있다면 이걸 어떻게 조화시킬 수 있을까요?

성식 : 자질은 잘 모르겠지만, 기질이 있잖아요. 기질은 진짜 안 바뀌는 것 같거든요. 그런데 확실히 활동에서 개인 역량도 중요하지만 기본적으로 대중 활동가의 자질이라고 하면 대중운동에 대한 신뢰가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그런 믿음이 있다면 지금 당장 잘 안 되는 것도 있고 좀 더 잘하는 것도 있는데 작은 일들로 일희일비 할 게 아니라 너른 대중의 바다 속에서 스스로를 그려갈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우쿠렐레

플씨 : 개인적인 질문에서도 정책기획실장의 정체성을 버릴 수가 없으시네요. (웃음) 취미생활 관련한 질문을 드리고 싶은데요. 노래패에서 학생운동을 시작했다는 글을 봤습니다. 지금도 음악에 관심을 갖고 계신지?

성식 : 작년에 우쿨렐레를 샀는데 아직 다섯 번도 안 꺼내본 것 같아요. 아이가 갖고 싶어 한다는 핑계를 댔지만, 사실 제가 원하는 걸 산 거죠. 끈기 있게 연습해야 하는데 잘 안 돼요. 코로나 이후로는 못 했지만, 가끔 저희 아이들이 다니는 어린이집에서 부모 공연을 해요. 그때 제가 아주 간단한 반주를 했었죠. 잘 못해서 그렇지, 공연하는 게 재밌어요.

기타 치는 솜씨가 예사롭지 않아 보이는 공성식 활동가

플씨 : 블랙핑크 얘기를 듣고 “한국 가수냐”고 물으신 적이 있다는 제보를 받았습니다. 그 뒤에 블랙핑크 음악 좀 들어보셨는지?

성식 : 몇 번 들어봤는데요. 아… 안 맞아요~

플씨 : 그럼 좋아하는 음악 장르가 뭔가요? 노동요가 필요할 때 어떤 플레이리스트가 있는지, 휴식을 취할 때 어떤 음악을 듣는지 궁금해요.

성식 : 업무 때는 안 들어요. 쉴 때는 종종 듣죠. CBS 음악FM에서 나오는 음악이 딱 제 나이 때 아는 노래들이라 자주 들어요. 주로 90년대 노래들이 많이 나오죠. 나이가 들어서 그런지 이제 음악 취향이 고정된 것 같아요. 새로운 음악도 아이유랑 포크 인디가수 이런 데까지는 어떻게 되겠는데, BTS 같은 아이돌 음악은 어렵네요.

플씨 : 이공계 지향을 가졌다가 문과로 대학에 들어가셨다고 들었어요. 활동하면서 또는 생활하면서 수학이 도움이 되는지 궁금합니다.

성식 : 도움이 되는지 모르겠지만 돈과 숫자를 다루는 일들을 많이 맡긴 하죠. 임금 분석이나 예산 분석 같은 일은 사실 수학이라기보단 산수지만, 친숙해요. 제가 그런 일을 좋아해요. 인문학적이고 복잡한 어떤 고차원적인 사고를 하는 것보다는 몇 개의 단순한 논리로 돌아가고 결론내는 것을 하고 있을 때 행복하더라고요.

플씨 : 말씀하신대로 “기질은 안 변하니”까요 (웃음)

성식 : 맞아요. 최근에도 하는 일이 정부 예산 분석하고, 노동자의 요구를 만드는 일을 했는데, 별거 아니에요. 그냥 숫자만 보는 거죠.

예를 들어 지난 인터뷰에서 서울대병원 예시를 들었잖아요. 정규직화와 처우개선을 요구하는데 사측이 돈이 없다고 주장하죠. 그래서 전환을 안 시켰을 때 드는 비용과 전환시켰을 때 드는 비용, 여러 가지 변수를 돌렸죠. 예를 들어 현재 비정규직 조합원들 연령이 높으니까 몇 년 후에 정년을 맞을 것이라는 변수를 넣고 계산해보면 돈이 오히려 남더라고요. 왜냐하면 정년에 퇴직하시니까. 새로운 사람이 충원이 되고 호봉이 없는거죠. 호봉제를 도입하면 임금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날 것 같은데 실제로 돌려보면 안 그런 걸 보여냈죠. 그렇게 만든 예산안을 갖고 교섭에 들어가고, 밀어붙여서 요구 중 일부를 따냈어요. 그런 지점에서 숫자와 친한 게 유용하게 느껴졌죠.

두 딸 서연, 하연과 함께

친구 같은 아빠 되기

플씨 : 평상시 격무에 시달리시잖아요. 가족들과 시간을 어떻게 보내시는지 궁금합니다.

성식 : 완전 욕 먹고 있어요. 쫓겨나기 직전이에요. 그래도 제작년까지는 최대한 반반 나눠서 가사를 부담했는데, 요즘엔 제가 밖에서 보내는 절대적인 시간이 늘어서 진재연 동지와 같이 사는 두 딸에게 다 미안하죠. 노조에서 정책실장을 맡으면서 3년만 좀 봐달라고 하긴 했지만, 아직 1년도 안 지났는데 앞으로 유지가 될 수 있을지 잘 모르겠어요. 현재로서는 정말 힘듭니다.

딸들하고 얘기를 많이 하고 싶어요. 그나마 아침에 큰 애하고 매일 집을 같이 나서서 학교까지 가는 시간이 거의 유일한 대화 시간이에요. 가끔 저녁에 일찍 들어오면 보기도 하지만 평소엔 학교 가느라 바빠요. 학교에서 뭐 하는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얘기도 하고 싶어요. 아직 아이가 원하는 대화도 못한다는 생각이 들어요. 같이 여행도 많이 다니고 해야 되는데 못하고 있죠. 집에 있어도 TV 보는 시간만 점점 늘어나네요.

제일 큰 걱정 중 하나는 “우리 아빠는 맨날 밖에 나가서는 세상을 구할 것처럼 그렇게 살고 정작 우리들에 대해서는…” 라는 느낌으로 사회운동 자체에 대한 반감이 생길 우려에요. 아빠가 부족해서 시간을 못 내는 탓이 크죠. 한 선배는 자식과 정치적으로 너무 갈라졌다고 이야기를 하는데, 그렇게 되고 싶진 않아요. 그러려면 아이들의 생활도 같이 고민해야 된다고 생각을 하는데… 잘 하고 싶어요. 목표는 ‘친구 같은 아빠’가 되는 거에요.

공동체의 돌봄노동, 사회의 돌봄노동

플씨 : 동반자가 모두 활동가인 경우 두 분이 함께 참여하려면 두 딸을 혼자 둘 수 없을텐데요. 사회운동(단체)이 더 바꿔나가야 할 부분이 있을까요?

성식 : 공동체 안에서만 해결하는 건 어려울 것 같아요. 돌봄 선생님을 부르는 사회적 해결책이 필요한 것 같아요. 저희도 그동안 어떻게든 둘이서 역할 분담해서 해보려고 했고, 가끔씩 옆에 친구네 집에 보내기도 했는데요. 이제 더 이상 그렇게 안 될 것 같아요. 그래서 최근에는 돌봐주시는 선생님들 불러서 해결해야 해요. 이게 조직이나 공동체에서 해결하는 것은 쉽지 않죠.

플씨 : 미국의 경우를 보면, 자녀가 있는 활동가들이 돌봄 담당자를 따로 정하는 등 환경을 조성하더라고요. 카메라 앞뒤로 애들이 뛰어놀면서 소리 지르는 와중에 꿋꿋하게 강의를 하는 영상을 본 적도 있고요.

성식 : 플랫폼c도 총회 같은 중요한 행사를 할 경우엔 아이들 놀이방을 준비했죠. 그런 고민을 해왔던 것 같아요. 단체뿐만 아니라 노조에서도 행사 할 때 이런 준비를 해야한다고 생각해요. 지난 6월, 플랫폼c 상반기 평가모임 때처럼 다같이 모여야 하는 행사 때 하면 좋을 것 같아요. 애들이 많으면 다양한 방법이 있겠지만 그렇지 않은 상태이다보니 아무래도 좀 미안하기도 해요. 여러 해결책을 모색해야겠고, 사회적으로 부담할 수 있다면 제일 좋겠죠. 더 공공적인 체계를 찾아볼 수도 있고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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