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약한 사람에게도 좋은 환경이 모두한테 좋은 환경

‘활동가를 만나다’시리즈 다섯번째 인터뷰 대상은 밍갱 활동가다. 밍갱 활동가는 2021년부터 한국여성노동자회 선전홍보 활동가로 활동하고 있다. 신입 활동가로서 여성-노동 운동에 대한 생각과 함께, 2000년대 후반 학생운동 시절부터 여러 운동을 거쳐왔다는 그가 가진 활동관을 물어보았다.

한국여성노동자회는 1987년 창립되어 한국 사회에서 여성노동의 취약함을 바꾸기 위해 활동해 왔다. 전국여성노동조합과 가까운 관계를 맺고 있다. 여성노동상담소 ‘평등의 전화’를 운영하고, ‘페미노동아카데미’, ‘페미워커클럽’ 등을 통해 더 많은 여성노동자들에게 다가가고자 한다. YH노조의 김경숙 열사를 기념하는 올해의 여성노동운동상 ‘김경숙상’을 매년 시상한다. 👉홈페이지

지난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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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성식 (하) 서로 돌봐주는 ‘규모의 운동’

플씨 : 누구신지?

밍갱 : 한국여성노동자회(여노)에서 활동하고 있는 밍갱이에요. 플랫폼C 회원이기도 합니다.

플씨 : 먼저 한국여노의 몇 가지 현안에 대해 여쭤볼까 하는데요. 지금 맡고 있는 역할이 뭐에요? 그리고 그 일에 대해 어떤 책임감을 갖고 하세요?

밍갱 : 제가 맡고 있는 역할은 선전홍보 활동가에요. 어느 단체나 그렇듯 그것만 하고 있지는 않지만요. 기본적으로 홍보물 제작, SNS와 홈페이지 관리, 뉴스레터나 보도자료 발송과 같은 외부 홍보를 주로 맡고 있고, 회원 모임을 담당하고 있기도 합니다.

플씨 : 여성노동자회의 회원 모임은 어떻게 이뤄지나요? 지역별로 활성화되어 있나요?

밍갱 : 회원 모임의 내용이나 형식은 지역여노별로 다 달라요. 제가 있는 한국여성노동자회는 전국에 있는 지역여노들의 중앙사무처인데요. 한국여노도 별도의 회원 모임이 있죠. 한국여노의 회원 모임을 ‘페미워커클럽’이라고 부르는데요. 그 해에 회원 모임에서 어떤 활동을 하는지는 멤버들이 하고 싶은 걸 중심으로 바뀌어요. 올해는 공부하고 싶다는 멤버들이 많아 책을 주로 읽었지만 이전에는 타로 모임이나 그림 그리기나 클래식음악 감상 같은 걸 한 적도 있죠. 지금은 코로나19로 인해 온라인 모임을 주로 하고 있지만, 예전에는 회원들끼리 행사를 기획하고 함께 진행하면서 모임을 하기도 했어요. 저도 상근 활동 전 1년 동안 여노 회원모임 멤버이기도 했고요.

2019년 페미워커클럽에서 진행한 B급 페미니스트 콘서트 ⓒ한국여성노동자회

‘쌤’과 ‘동지’ 사이에서

플씨 : 어떻게 해서 여노에서 일하게 된 거에요?

밍갱 : 여기서 일하기 전엔 다른 평범한 직장에 다녔어요. 근데 계속 상근활동가로서 일을 하고 싶었죠. 어디서 할지 오랫동안 고민하고 있었거든요. 여노 회원모임을 한 것도 고민하는 와중이었죠. 그런데 막상 회원모임을 하면서 보니까 ‘여기 괜찮겠는데?’ 싶은 거예요. 굉장히 마음에 들었어요. 

저는 학생운동으로 운동을 시작해 정파조직 활동을 했었고, 그 다음엔 정당 운동을 했어요. 보통 노동자들의 투쟁에 연대를 많이 했죠. 그러다가 페미니즘 활동은 2012년 경부터 했는데요. 이후로는 여성단체에 들어가서 활동하고 싶어졌어요. 그런데 제가 이전까지 해 왔던 운동들과 여성운동은 굉장히 다르다는 것을 느꼈죠. 제가 활동하면서 경험했던 것들과는 문화적으로도 많이 달랐고요. 예를 들어, 여성단체들에서는 서로를 ‘쌤’이라고 부르는 문화가 있어요. 서로 닉네임으로 부르는 곳들도 있고요. 그런데 제가 이전에 있던 활동 공간들은 보통 서로를 ‘동지’라고 부르는 문화였죠. 저는 ‘쌤’이라고 부르는 문화도 이해하고, ‘동지’라고 부르는 문화도 이해하는 단체에 들어가고 싶었어요. 그래서 여기를 선택하게 됐어요.

플씨: 눈에 갑자기 불이 켜지는, “아! 여기서 일해야겠다”는 순간이 있었나요? ‘서로를 쌤으로 부르는 문화와 동지라고 부르는 문화를 다 이해하는 공간’을 찾고 있었다는 건 원래 의식적으로 탐색했던 기준인가요? 아니면 무언가에 대한 갈증이 있었는데 들어와보니 스스로 원하는 게 뭔지 알게 돼서 그런 건가요?

밍갱 : 사실 순서를 말하자면 후자였어요. 처음 여성운동단체에 들어가고 싶다고 생각했을 때는 그냥 가서 적응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학생운동을 하다가 진보정당에 들어갔을 때도 사실 제 생각과 다른 부분이 많았지만, 처음부터 그냥 익숙해지고 적응하면서 정당 활동을 시작했거든요. 그래서 여성단체에 들어가 활동하는 것도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로 들어가서 처음부터 적응을 해야 된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페미워커클럽을 하다 보니 여노가 제가 경험한 두 가지 운동영역을 모두 이해하는 곳이라는 걸 알게 됐고, 그래서 저에게 맞는 곳이라고 생각했죠.

플씨 : 한국여성노동자회는 어떻게 처음 알게 됐어요?

밍갱 : 처음 알게 된 건 2014년 3.8 여성의 날 집회였을 거에요. 그 해엔 3.8 여성의 날 행사를 두 곳에서 했거든요. 종로 보신각에서 민주노총이 열고, 청계광장에서 여성운동단체들이 열었죠. 그 해에 저는 청계광장에서 부스를 차렸거든요. 근데 민주노총이 연 집회도 있으니까 깃발 들고 왔다갔다 했죠. 양쪽에 다 참여할 수는 있었는데 두 곳 모두에서 공통적으로 보이는 단체는 별로 없었죠. 근데 한국여노 깃발하고 전국여성노조 깃발이 두 곳에서 모두 보였어요. 그 점을 기억하고, 이후로 소식을 팔로우해왔죠.

그렇게 기억하고 있다가, 한국여노로부터 “페미워커클럽에 함께 해보면 어떠냐”는 제안을 받았어요. ‘그래 볼까?’ 하고 들어간 거죠. 실제 회원활동을 하면서는 ‘나한테 잘 맞는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페미워커클럽을 하면서 느낀 문화적인 부분도 영향이 컸죠. 자유롭고, 권위적이거나 위계적이지 않은 문화, 페미니즘적인 가치들, 꼭 페미니즘으로 포괄되지 않더라도 다양한 의제에 관심을 갖고 있는 점도 좋았고요. 이러한 관점들을 사람들이 어느 정도 이미 지니고 실천하고 있어서 자유롭게 얘기를 꺼낼 수 있는 분위기가 있었어요.

가장 취약한 이에게 좋은 노동조건이 모두한테 좋은 노동조건

플씨 : 평소에 SNS상으로나, 직접 만났을 때 항상 여노의 워라밸이나 조직문화에 대한 자랑하던데요. 활동가복지 측면에서 좀 더 일하기 편한 부분도 있겠지만 운동적 측면이나 노동에서의 의미도 있을 것 같은데, 어떤 게 있나요?

밍갱 : 여노에 들어와서 처음 몇 달 간, 여성노동 문제에 대해서 가장 많이 생각하게 했던 건 여노의 조직문화와 상근활동가의 노동조건이었어요. 여노는 퇴근 시간이 5시인데요. 평소에도 다들 거의 칼퇴를 하는 편이고, 휴가 제도 같은 것도 연 25일 연차를 줘요. 반려동물 사망휴가 같은 건 최근에는 다른 시민단체도 많이 적용하고 있지만 여노에도 있고요. 그 외에도 여러 휴가 제도들이 있죠.

가장 특징적인 걸 이야기하자면 퇴근 이후나 주말과 휴일, 이럴 때 텔레그램방이 조용하다는 거죠. 한국여노 사무처 텔방 뿐만 아니라 전국의 여성노동자회 활동가 전체 텔방이 있거든요. 그 텔방도 조용해요. 굉장히 급한 일이 있지 않은 이상은 말이죠. 

‘이렇게 하자’고 의식적으로 노력하지 않으면 일반적으로 시민단체들이 이렇게 되기가 어렵잖아요. 그런 노력을 들이고 있다는 게 보이니까 ‘그럼 이 노력은 왜 하는 걸까’를 자연스럽게 생각하게 되는 거죠. 

같이 일하고 있는 사람들 중 어떤 여성 노동자는 5시에 눈치 보지 않고 퇴근해서 집에 가야할 수 있는 거잖아요? 말이 ‘일-가정 양립’이지, 퇴근 이후에도 ‘집으로 출근’해서 돌봄노동을 해야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퇴근 이후 시간에도 텔방에 새로운 게 올라오고 일을 계속 생각해야 되면, 그런 조건의 여성 노동자들은 일을 하기가 굉장히 힘든 거예요. 

가령 5시 퇴근을 정해놔도 아무도 지키지 않고 해질때까지 일하는 게 일상화되어 있다면, 5시에 퇴근해야 하는 여성 노동자가 있을 경우, 그는 일을 못하게 되거나 최소한 눈치를 보면서 퇴근해야 돼요. 그러니까 다 같이 칼퇴근 문화를 지키려는 노력이 있어야 그 제도가 유지되겠죠. 그런 노동환경이 만들어지면 다른 사람한테도 좋은 거고요. 가장 취약한 조건에 있는 노동자에게 맞춰져 있는 노동조건이 모두한테 좋은 노동 조건인 거예요. 

플씨 : 하루 8시간 노동이 동일하다고 할 때, 5시 퇴근과 6시 퇴근의 차이가 뭐죠?

밍갱 : 굉장한 차이가 있죠. 보통은 퇴근이 6시에 맞춰져 있어서 6시에 퇴근하면 퇴근에 걸리는 시간이 더 길어지기도 하고요. 육아를 동시에 하는 여성은 아이를 어린이집에서 데리고 나오는 시간에도 문제가 생길 수 있죠. 또 6시에 퇴근하면 저녁을 먹고 들어가는 경우도 많아요. 5시 퇴근은 이런 문제를 해결해주기 때문에 단순히 1시간 일찍 퇴근하는 것 이상으로 실질적인 퇴근 시간이 줄죠. 지금의 현실에서 5시 퇴근이라는 것은 어떤 사람한테는 사내 복지가 아니라, 일을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조건일 수 있거든요.

건설 현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에게 안전모를 지급하는 것을 보통 사내복지라고 얘기하지는 않잖아요. 그 일을 하기 위한 필수적인 조건이니까요. 같은 이유에서, 특정한 상황에 놓인 여성 노동자들이 일을 할 때 필수 조건들, 예를 들어 5시에 퇴근을 한다거나, 퇴근 이후 시간에 업무에 쫓기지 않아야 한다거나 하는 것들을 단순히 ‘사내복지’라고 이야기를 하면 안 되겠죠. 일을 할 수 있느냐를 결정하는 노동 조건을 플러스 알파로 이야기하면 안 된다고 생각해요. 흔히 보편적인 노동 조건도 실은 특정 조건을 갖춘 사람들을 위해서만 맞춰져 있거든요. 꼭 여성 노동자들에게만 적용되는 게 아니라, 저마다 다른 취약한 조건에 놓인 노동자들이 일할 수 있게끔 만드는 조건이 단순히 ‘복지’가 아니라, 보편적인 노동조건이 돼야 해요.

디자인 컨텐츠 과잉의 시대

플씨: 이제 선전 업무에 대해 이야기해볼까 하는데요. 지금 시대에 온갖 이미지와 영상 콘텐츠가 쏟아져 나오는데, 종종 ‘과잉’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같은 내용이라도 이미지가 더 꾸며져 있어야 선택받고, 홍보를 위해서는 뭘 하든 영상을 재밌게 찍어 올려야 하는 등 경쟁이 붙잖아요. 사회운동도 무수한 이미지들에서 살아남기 위해 가독성도 챙기고 쉽게 눈에 뜨이기 위해 나름의 센스 있는 디자인, 혹은 영상 편집 같은 것들이 있어야 하고요. 여성노동자회의 홍보물들이 잘 돋보이게 하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 고민을 하는 게 있다면, 이야기해주세요.

밍갱 : ‘콘텐츠 과잉 시대’라는 말에 공감해요. 디자인 작업을 편리하게 하는 툴들이 많이 생겨나고 있잖아요. 그래서 실제로 저도 여노 내부에서 전국의 활동가들을 대상으로 디자인툴 활용 교육을 하기도 했고요. 하지만 저는 그게 실제로는 일을 줄여주고 있지 않다고 생각해요. 물론 물리적으로 손대야 하는 과정들이 줄어들어 만드는 게 편리해지긴 했지만, 오히려 그로 인해 더 많은 생산물을 만들고 있죠. 옛날에는 기사만 써서 내면 됐던 걸 이제는 기사도 내고 카드뉴스도 내야 되잖아요?

밍갱이 디자인한 토론회 포스터

플씨 : 그게 바로 생각나네요. 지난 한 세기 가전제품들이 늘어나 좋아졌는데 정작 여성들이 가사노동에 들여야 하는 시간은 줄지 않았다는 점이요.

※ ‘왜 가전제품은 여성을 가사노동에서 해방시키지 못했는가’라는 부제를 가진 책 『세탁기의 배신』(뿌리와이파리 펴냄)에 따르면, 가사기술의 비약적 발전에도 불구하고 20세기 대다수 여성들은 가사노동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했다. 이 책에 따르면, 1920년대 후반 미국의 웬만한 중산층 가정에선 주요 가전제품이 널리 보급되었음에도 도시 주부의 가사노동 시간은 농촌 주부보다도 길었다. 1968년 시애틀 주부들의 경우, 실제 세탁기와 진공청소기 등 가전제품들을 사용하는데도 가사노동 시간은 줄지 않았거나 오히려 증가(‘코완의 역설’)했다.

밍갱 : 맞아요. 기술 발전이 실제 삶에 차이를 만드는 것에는 별로 도움이 안 될 수도 있다는 방증이죠. 이 생각을 최근에 더 많이 하게 됐는데요. 저 같은 경우 첫 대학 전공이 시각디자인이거든요. 학생운동을 시작할 때부터 선전 홍보물을 만들었어요. 그때에 비해 지금은 디자인 프로그램도 정말 많이 발전해서 이젠 홍보물 만드는 게 훨씬 쉽거든요. 근데 십몇 년 전에 비해 지금이 더 편한 것 같지는 않아요. 오히려 만들어야 될 건 더 늘었죠. 지금은 영상이나 이미지 중심으로 홍보를 하니까, 반대로 장애 접근성은 점점 안 좋아지는 거죠. 콘텐츠 과잉의 시대인데, 나이가 들어 작은 글씨를 읽기 힘들거나, 장애가 있어 이미지로 내용을 전달받기 어려운 사람들에게는 오히려 접근이 더 복잡하고 어려워지는 측면도 있어요.

다양한 홍보채널 활용하기

플씨 : 한국여노는 SNS나 뉴스레터, 오마이뉴스 기사 등 채널을 잘 활용하는 것 같아요. ‘을들의 당나귀 귀’라는 팟캐스트도 운영해서 책으로 출판하셨죠. 이러한 채널들이 좋은 전달매체라고 평가하고 있는지, 여성노동자들에게 호응을 얻고 회원활동 등으로 이어지는지 궁금해요.

밍갱 : 말씀하신 대로 여러 SNS채널과 뉴스레터를 제가 담당하고 있고, 오마이뉴스에 실은 기사들 중 최근 글들은 제가 최종 송고를 했어요. 이런 매체들이 좋은 전달 매체라고 평가하는지에 대해 묻는다면, (효능이) 좋은 전달 매개가 되면 좋겠다고 생각하죠.

제가 주로 하는 고민은 ‘여성노동자회의 회원 특성에 어떻게 맞출 수 있느냐’에요. 여노가 역사가 긴 단체잖아요. (※ 1987년 설립됐으니 35년의 역사를 가진 셈이다) 그리고 각 지역의 노동현장에서 일하는 여성노동자들이 회원으로 있는 단체이기도 하고요. 그런데 최근에 사용하는 매체들이 주로 온라인 매체들이기 때문에, 나이가 좀 있으신 회원분들에게는 오히려 더 접근하기 어려울 수 있거든요. 그런 부분들에 꽤 신경을 많이 쓰게 돼요. 

최근에 있었던 한국여노 온라인 후원의 밤 안내 같은 경우에도 종이로 초대장을 만들어 직접 발송했어요. 온라인으로 안내하는 것보다는 직접 받아보는 편이 훨씬 편한 회원들이 많이 있거든요. 온라인 매체를 중심으로 홍보가 이뤄지다 보니까 이런 분들이 많이 소외되는 거죠.

플씨: 오프라인 행사를 온라인으로 홍보하는 것은 많이 봤습니다. 근데 온라인 행사를 위해 오프라인 홍보물을 사용했다는 게 고민이 드러나는 것 같네요. 실제로 받아보는 분들한테서 어떤 피드백이 들어오나요? 

밍갱 : 코로나 이전에는 지역 출장이 많았어요. 행사를 지역에서 다 같이 모여서 하는 경우가 많았거든요. 그런데 코로나19로 인해 많은 행사가 유투브로 옮겨가게 되었죠. 그러다 보니 지역에 계신, 나이가 있는 회원분들로부터 ‘실시간 채팅창 어떻게 쓰는지를 모르겠다’와 같은 피드백들이 있었죠. 그러다 보니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영상을 송출하고 이미지를 생산하는 것이 쉬워졌다고 하는데 진짜로 사람들에게 전달하는 것도 그만큼 효과적이었을까 고민이 있어요.

플씨 : 다시 오프라인으로 뉴스레터나 소식지를 만들어 볼 구상이 있나요?

밍갱 : 원래 여노에서 발행하는 「일하는 여성」이라는 소식지가 있었어요. 지금은 발행이 중지된 상태지만 재발행하는 걸 고민하고 있어요.

밍갱 in 한국여성노동자회 사무실
‘댁의 김치는 안녕들 하십니까’

플씨 : 대학생 시절 학내 여성주의교지 편집장으로 일한 적이 있으시죠. ‘안녕들 하십니까’ 열풍이 불었을 때는 ‘댁의 김치는 안녕들 하십니까’ 라는 대자보를 쓰고 사람들의 모임을 만든 것으로 알고 있어요. 자신이 선 공간에서 페미니즘적인 실천을 만들어 나가는 것이 본인과 주변에 어떤 의미로 남았다고 생각하세요?

밍갱 : 저한테 있어 ‘활동’은 시기적으로 여성교지 활동 전과 후로 나뉘어져요. 그 전까지는 학생운동, 노동운동에 연대하는 정파조직운동이나 정당 운동을 주로 했어요. 그러다 보니 사실 페미니즘은 반성폭력 운동으로만 접한 게 다였죠. 페미니즘 리부트가 되기도 전이니 말이죠. 그러다가 몇 가지 계기들을 겪고 제가 페미니즘이 뭔지도 모르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두번째 대학에서는 사회학을 전공했는데요. 페미니즘 관련 수업을 일부러 찾아서 학부 수업부터 대학원 수업까지 많이 들었어요. 그렇게 배우다보니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페미니즘의 스펙트럼이 넓고 어렵다는 걸 알게 됐죠. 어려우니까 더 흥미가 생겼던 것 같아요. 관련해서 과연 무엇을 할까 고민해서 들어간 게 여성주의 교지였어요. 

그때가 2012년이었을 것이에요. 제가 원래 하던 운동을 놓은게 아니니까 그때도 당연히 외부에 있는 사회운동들이나 여러 노동자들의 투쟁에도 연대하고 있었죠. 근데 제가 페미니스트라고 오픈하자마자 ‘계급 문제에 관심이 없는 페미니스트’라는 식으로 공격이 들어오는 거예요. 제가 어떤 투쟁에 연대를 하고 있던 간에 페미니스트라는 이름이 붙는 순간 다 지워지고, 계급 관점이 없는 사람이 된 셈인데 어이가 없었죠. 그러면서 이전에 제가 페미니즘이나 페미니스트 활동가들에게 가지고 있던 관점들, 학생운동이나 정파조직, 정당운동을 하면서 주변에서 숱하게 본 페미니즘에 대한 손쉬운 비평과 편견들에 대해 돌아보게 됐어요. 

플씨 : 2013년 말부터 2014년 초에 했던 ‘댁의 김치는 안녕들하십니까’도 그런 흐름 속에 있었던 거군요.

밍갱 : 당시는 ‘안녕들하십니까’ 대자보로 인해 운동이 확산되던 시점이었는데요. 여성혐오 의제를 활용해서 ‘안녕들하십니까’ 운동을 해보고 싶더라고요.  그 전에 이미 중앙대 녹지, 고려대 석순, 성균관대 여학위 등 여러 대학에서 활동하는 페미니스트들과 네트워크를 만들 고민을 하고 있었죠. 그러다가 ‘안녕들하십니까’가 터지고, “우리 같이 뭘 해보지 않을래?”하고 제안해서 시작했죠. 

2013년 당시 저는 처음 대학에 들어간 2000년대 후반과 5년 쯤 지난 2013년의 분위기가 좀 다르다고 느꼈어요. 대학을 두 번 다녔으니 느낄 수 있는 차이였죠. 학내 페미니즘이라는 게 심한 백래쉬(backlash)로 인해 다 사라졌던 2000년대 후반과 달리, 2010년대 초반엔 자생적인 페미니스트들이 생기고 있다는 걸 느꼈죠. 그렇게 생긴 자생적 페미니스트들이 다들 자신이 겪은 여성혐오에 대한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있었고요.

그래서 여성혐오를 주제로 사람들을 모을 수 있겠다고 생각을 했어요. 제목도 ‘여성들은 안녕들 하십니까’가 아니잖아요. 생물학적 여성으로 포괄되지 않는, ‘여성으로 이름지어짐으로 인해서 혐오의 대상이 되는 현상’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이기 때문에 당시 가장 잘 쓰이던 여성혐오 표현 중 하나인 ‘김치녀’에서 따와서 ‘댁의 김치는 안녕들하십니까’라는 이름을 정해 활동했죠.

플씨 : 지금 김치녀라는 용어를 떠올리면, 꽤 오래 전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밍갱 : 그렇죠. 그때는 김치녀 같은 단어들이 막 생겨나고 있던 시점이었어요. ‘더 이상은 못 참겠다’하는 여성들이 모이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죠. 그런데 당시만 해도 제가 여성혐오 의제로 뭘 해보자고 얘기했을 때 ‘근데 여성혐오 그거 일베만 하는 거 아니에요? 그걸 얘기할 필요가 있어요?’라고 하는 사람들이 많았어요. 하지만 “해야 한다”고 주장해서 하게 됐죠. 진짜 재밌게 했어요. 제가 페미니즘 활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된 계기는 이 때였던 것 같아요. 

플씨 : 어떤 점 때문에 그렇게 재미있었다고 말할 수 있나요?

밍갱 : 몸에 착 붙는 운동을 한다는 느낌을 처음 받아거든요. 그렇게도 활동할 수 있다는 걸 몰랐던 것 같아요. 그전에는 제가 정말 힘들어도 ‘이건 옳다’라는 큰 당위나 이념을 추상적으로만 쫓으면서 했던 것 같거든요. 심지어 당시 제가 속했던 운동들은 대체로 굉장히 남성중심적이었기 때문에 더더욱 제가 착 달라붙기 힘든 게 있었죠. 그래도 ‘이게 옳으니까’, 해야 한다고 생각했죠. 비유하자면 노동 현장에 연대를 간 학생들이 “저도 언젠가 노동자가 될 거니까요”라고 말하며 연대를 하는 상황과 비슷한 거였어요. 일단 옳다고 하니까 하는거고, 해야 하는 거니까 하는 건데, 스스로도 이게 왜 나의 문제인지는 잘 모르는 상태였던 것 같아요. 

그런데 (페미니즘 활동을 하면서부터) 처음으로 스스로의 관점으로 바라보고 운동 얘기를 할 수 있게 됐죠. 제 관점을 갖게 됐고, 공부도 하고 싶은 걸 같이 고민하고 해나가면서, “어떤 게 옳은 방향일까” 끊임없이 고민했어요. 그렇게 함께 만들어낸 의제로 활동하는 건 처음이었죠. 그 느낌을 저는 ‘착 달라붙었다’고 표현해요.

정말 많은 운동이 문화적인 요소는 물론이고 인식의 틀조차 남성중심적으로 움직이는 경우가 많아요. 보편적인 이야기를 하더라도 그 전제가 되는 대상은 ‘남성’이고요. ‘노동자’라고 얘기할 때에도 보통 사람들이 상상하는, 은연 중에 전제되어 있는 모습은 ‘남성 노동자’의 모습이죠. 그런 점이 저로 하여금 제가 하는 운동에 착 달라붙기 어렵게 만드는 요인이었던 것 같아요. 사람마다 자신의 중요한 정체성이나 가치를 어디에 두느냐는 다 다르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에게는 다를 수도 있지만, 제게는 페미니즘 운동이 스스로를 운동에 착 달라붙게 만드는 중요한 전환점이 됐어요.

이전까지 해왔던 활동들이 싫기만 한 건 아니에요. 페미니즘을 접하기 전에 해왔던 활동들도 저의 뿌리가 되는 가치관이자 아주 소중한 운동적 자산이죠. 저에게 지금도 아주 중요한 가치가 되어주고 있고요. 하지만 그래서 어떤 활동을 이후에 할 것이냐고 묻는다면, 이제는 제가 더 하고 싶고, 하는 것이 즐거운 운동에 집중하고 싶어요. 

밍갱 활동가의 What’s On My Desk

“실무왕이 되고 싶어요!”

플씨 : 여성노동자회 상근 활동에서 더 해보고 싶거나, 이루고 싶은 게 뭔가요?

밍갱 : 여노는 기본적으로 현장 의제가 많아요. 지역별 부설기관으로 평등의전화가 있고, 자매조직으로 전국여성노동조합이 있죠. 지역에 여성자활센터, 인력개발센터가 있는 곳도 있고요. 정부에 정책 제안을 하기도 하고, 피해자 지원이나 상담 등 많은 걸 할 수 있는 단체이기 때문에 단체 안에서 할 수 있는 걸 찾고 싶어요. 

저는 직장 내 성폭력을 산업재해로 인식하는 문제에 대해서도 관심이 많아요. 직장 내 성폭력이나 성희롱 같은 의제들은 지금도 산업재해로 인정을 받고 있는데요. 그걸 알고 있는 사람은 많지 않죠. 보통 사람들은 직장내 성폭력 사건이 일어나면 ‘직장 내’가 지워진 채로 그저 성희롱 성폭력 사건으로만 인식해요. 이전까지는 그런 문제가 그저 성폭력에 맞춰져 이야기됐다면, 앞으론 노동환경 자체의 문제로 이야기되고, 노동 환경을 보다 안전하게 변화시킬 수 있는 방향을 고민해야 해요. 👉관련기사: 정치권 비서 성폭력을 ‘산업재해’로 조명해보자 – <페미니스트 저널 일다>

플씨 : 활동가 개인으로서는 어떤 꿈을 갖고 있으신지?

밍갱 : 실무왕이 되고 싶어요. (웃음) 사무처 식구들도 다 알아요. 

플씨 : 지금까지 이야기 들으면서 느꼈어요. (웃음) 어디를 가든 ‘나는 배우러 들어왔다’, ‘흡수하러 왔다’라는 자세가 뿜어져 나와요.

밍갱 : 저는 운동에 있어서 눈에 보이지 않지만 꾸준하게 활동의 뿌리를 만들어가고 있는 사람들이 진짜 멋진 활동가들이라는 생각을 어느 시점부터 하게 된 것 같아요.

이건 제가 생각하는 활동가 상이 예전에 비해서 많이 바뀐 건데요. 예전에는 이론을 잘 알고, 사람 조직을 열심히 하고, 의제들에 대해 나서서 발화를 하고, 모두가 그런 활동가가 돼야 된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단체를 운영하는 데에는 정말 많은 실무가 필요하잖아요? 꼭 단체가 아니더라도 어떤 운동이든 운동을 물밑에서 만드는 작업을 하는 사람들이 있고, 거기에는 수많은 실무들이 필요하죠. 그래서 어느 시점부터는 그런 작업을 하는 사람들이 멋있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저도 그런 사람 중 하나가 되고 싶어요.

플씨 : 멋진 꿈이네요. 그렇다면 ‘관료’라고 부르게 되는, 사회운동에 대한 관점을 잊고 활동을 하게 되는 상태에 빠지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 지에 대한 고민도 있을까요?

밍갱 : 그렇게 되기 쉽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모두가 조직활동가가 되어야 된다는 말에도 동의해요. 그런데 엄밀히 구분해서 말하자면, 예전에는 ‘활동가는 모두 조직가가 되어야지’라고 생각을 했다면, 지금은 그보다는 ‘활동가라면 기층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에 가까워요. 사람마다 잘하는 것과 못하는 것이 있고, 거기에 맞게 역할들을 줄 수 있는 게 좋은 활동의 모델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한 가지 전제해야 하는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어떤 사람들을 대상으로 얘기할 건지, 어떤 사람들을 대상으로 설득하고 싶은지, 어떤 사람들과 함께하고 싶은지’… 이런 질문들에 대한 각자의 대답은 있어야 한다는 거에요. 그게 관료가 되지 않고 운동할 수 있는 방법이 아닐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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