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 이 글은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자인 에릭 홉스봄이 소련과 동구권 ‘사회주의’가 몰락한 직후인 1991년에 쓴 것으로, 로빈 블랙번의 『몰락 이후』라는 저서에서 원문을 볼 수 있다. 현실‘사회주의’가 몰락하고 많은 사회주의자들이 갈 길을 잃고 좌절하거나 현실부정에 빠져 있을 때, 홉 스봄은 당시 ‘사회주의’의 문제점에 대해서 날카롭게 분석하며 "당연한 붕괴"라고 언급한다. 동시에, 많은 것들이 바뀌었더라도 사회주의는 여전히 강력한 대안이라고 주장하며, 21세기 사회주의의 과제를 제시한다. 30여년 전에 쓰인 글이지만, 2023년 새로운 대안을 찾는 우리에게도 여전히 시사하는 바가 있어 번역 소개한다.
사회주의의 미래는 무엇인가? 역사가로서 나는 본능적으로 – 나의 직업병이라고 할 수도 있는데 – 다음과 같은 질문부터 던지게 된다. 사회주의의 과거는 무엇이며, 그것은 현재의 상황과 미래의 가능성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가? 이것은 합리적인 접근이기도 하다. 사회주의라는 단어, 개념, 기획, 실현, 사회주의 정책 등은 런던이 유럽 북해 연안 국가들 맞은 편 위쪽 템즈강변에 자리잡고 있다는 것과 같은 단순한 객관적 자료가 아니라 정신적 구성물들이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우리가 18세기 후반과 19세기 초반의 혁명의 시대부터 인류가 처해있는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 사용하고, 사회를 개선하거나 변혁하기 위한 사람들의 특정 시도들에 붙이는 이름들, 패턴들, 꼬리표들이다.
본래 ‘사회주의’라는 단어는 정치적이지도 않았고 사회를 조직하는 특정 방식을 함의하지도 않았다. 처음부터 명백히 사적소유 대신 공적소유에 기반하는, 그리고 그에 따라서 운영되는 사회를 의미했던 ‘공산주의’라는 더 오래된 단어와는 다르게 말이다. 그리고 공산주의는 바뵈프 이후로 그러한 사회를 실현하기 위한 정치 운동도 지칭하게 되었다. ‘사회주의’와 ‘사회주의적’이라는 말은 단지 ‘사회적’이라는 단어에서 파생된 것에 불과했 으며, 인간이 본성적으로 사회적이며 사교적인 존재라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갖지는 않았다. 사회주의가 우리가 현재 사용하는 바와 같은 의미를 갖기 시작한 것은 1830년대에 그것이 영국과 프랑스에서 바깥으로 퍼져나가 사회정치적 어휘의 일부가 되었을 때부터이다. 물론 사회주의라는 단어가 지칭하는 대상은 아주 오랫동안은 아니지만 예전부터 이미 다른 이름들을 갖고 존재해왔다. 그것은 영국에서는 ‘협동’ 또는 ‘협동체’로, 프랑스에서는 ‘집단’ 또는 ‘집단주의’로 불렸는데, 이는 나중에 ‘집산주의’ 되었고 ‘상호주의’와 같은 이름으로도 알려지게 되었다. 이에 대해서 두 가지 주목할 점이 있다.
첫째, ‘사회주의’의 반대말은 아직 ‘자본주의’가 아니라 ‘개인주의’였다. ‘사회주의’가 반자본주의적인 의미를 갖게 된 것은 단지 19세기 초반에는 개인주의 사회의 핵심이 경쟁, 즉 시장이므로 사회(주의)적 사회의 기반은 협력 또는 연대이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 충분히 논리적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이는 아주 넓은 가능성의 범위를 열어놓았다. 사회보장의 증진을 위해 자유방임에 사소한 수정을 가하는 것부터 사적 소유나 돈이 아예 없는 공산주의 공동체들까지 ‘사회주의’에 포함될 수 있었다. 영국에서는 19세기 이후 사회주의 노동운동이 등장하기 전까지 사회주의의 이러한 초기의 의미가 중심위치를 차지하였다. 페이비언주의자들이 스스로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게 자유당을 사회주의로 전환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이었다.
둘째, 원래 사회주의는 아무런 정치적 함의를 갖지 않았다. (이점에서도 공산주의와 구별되었다.) 사회주의는 국가나 다른 종류의 실효적 권위에 의해서 수립될 수도 있는 것이었지만, 대부분의 경우 자발적 공동체들에 의해서 설립될 수 있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버나드 쇼가 ‘민간사업에 의한 사회주의’라고 부른 것이 그 예이다. 1840년대 미국에 사회주의 혹은 사회주의 공동체들이 전 세계 어느 곳보다 많이 존재할 수 있었던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일 것이다. 사실 1880년대까지 사람들은 노동계급 사회주의라고 하면 자발적 결사체, 협동조합, 그리고 여타의 자발적인 상호적이고 집단적인 형태의 행동을 통한 사회주의를 떠올렸다. 노동운동이 자코뱅적 민주주의 전통과 마르크스주의자들을 둘 다 따르면서 집단적 정치행위의 길을 걷기 시작한 후에야 사회주의는 국가권력의 장악과 결부되었다. 자연스럽게 그때부터 국가는 사회주의 건설의 핵심적인 요소가 되었다.
그러나 한 가지를 기억해야한다. 이 활동의 일차적 목적이 생산, 분배, 교환을 조직화하는 특정 방식을 실현하는 것은 아니었다. 1880년대의 명민한 반사회주의자 중 한 명인 존 래를 인용하자면 그것은 ‘근본적으로 사회정의에 대한 요구’였다. 이것이 새로운 사회주의 노동계급 정당들과 그 정당에 속한 사상가들 및 문필가들이 자발적 공동체들을 위한 유토피아의 설계자들과는 달리 막상 그들이 실제로 공직에 선출되고 권력을 잡았을 때 무엇을 할 것인지에 대해서 그들이 제1차 세계대전 말에 실제로 권력을 잡게 되기 전까지 놀라울 정도로 적은 관심을 가졌던 이유이다. 실제로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미래에 대해 생각하기를 거부하는 것을 일종의 덕목으로 여겼다. 카우츠키는 당시 사회주의 정당들 중 최대의 정당이었던 사회민주당을 대변하여 이렇게 말했다. “사회주의당은 오로지 현존하는 질서에 대해서만 적극적인 진술을 할 수 있다. 그것 넘어서는 언급은 사실을 다루지 못하며 가정에서 출발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이런 것들은 환상이며 꿈이다.” 1917~1918년경까지 사회주의의 실질적 내용은 그저 거꾸로 뒤집은 자본주의일 뿐이었다. 당시 나쁜 것이 그때가 되면 좋아질 것이었다. 세부적인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영국의 페이비언주의자들 같이 세부적인 것에 집착하는 이들마저도 사회화된 경제가 어떻게 작동할 것인지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민하지 않았다. 그것이 자본주의보다는 잘 작동하리라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다.
공교롭게도 20세기 전반의 대부분의 시기동안, 자본주의 자체가 사회주의자들이 옳았음을 증명해주는 것 같았다. 1914년에서 1950년 정도까지 자본주의에서 일어날 법한 모든 잘못된 문제들이 실제로 일어났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과 두 차례의 민족적·사회적 혁명을 거치며 거대한 식민제국들의 명맥을 끊어놓았거나 최소한 그들에게 사형선고를 내렸고, 인류의 3분의 1을 자본주의 체제에서 벗어나게 했다. 부르주아 사회의 전형적인 정치체제인 자유민주주의는 세계 곳곳에서 타도되었다. 1940-1941년 즈음에 자유민주주의는 미국, 유럽과 아메리카 대륙들의 변방, 그리고 오스트레일리아에서만 간신히 살아남았다. 무엇보다도 자본주의 경제 자체가 병들어, 사상 최악의 불황으로 자본주의가 거의 붕괴될 뻔했다. 이 불황은 실제로 자본주의 경제가 완전히 무너질 것처럼 보였던 유일한 경우였다. 그 어떤 종류의 사회주의도 자본주의보다는 틀림없이 더 잘해나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소련에서 사회주의라고 자임하던 원시적인 중앙계획적 국가경영 명령경제의 경제적 비효율성은 오늘날 매우 자명하다. 하지만 60년 전에는 공산주의자가 아닌 정치인들과 지식인들이 자신의 나라를 휩쓸고 있는 불황으로부터 소련을 지켜준 것으로 보이는 ‘계획’의 비밀을 얻기 위해 모스크바행 티켓을 사려고 줄을 섰다.
물론 사회주의자들은 사회주의가 단순히 구호의 차원을 넘어서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어느 정도는 고민할 수 밖에 없었다. 1917년에 볼셰비키가 권력을 잡았고, 1918년부터 주요 사회민주주의 정당들은 정권을 잡았거나 정부에 합류하였으므로 실제 정책들을 내놓아 야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회주의 사회가 어떤 모습을 갖추어야 하는가는 커녕 본인들이 무엇을 원하는지에 대해서도 체계적으로 사고해본 적이 없는 그들로서는 정책들을 급조해내거나 당면한 문제의 압박 속에서 정책을 실행해야 했다. 한 마디로 그들은 특정한 상황에 대응하기 바빴던 것이다. 그리고 오늘날 사회주의의 문제들 중 대부분은 대략 1914년에서 1950년까지의 자본주의 위기와 붕괴라는 상황에 맞추어 설계된 사회주의 정책들이 더이상 20세기 후반의 상황에 적합하지 않다는 사실에서 기인한다. 더 정확히는 그 정책들 중에서 어떤 것은 시효가 지난 것이며 어떤 것은 아닌 지를 우리가 제대로 판별해본 적이 없다는 사실이다.
나는 지금까지 단수로서의 ‘사회주의’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하지만 1917년 이후부터 우리는 최소한 두 가지 종류의 사회주의에 대해서 말해야 하는데, 그 중 하나는 현재 몰락 중이거나 이미 몰락했다. 바로 사회민주주의와 소련 또는 소련식 공산주의 체제들이다. 소련 체제들은 실제로 완전한 사회주의적인 경제와 사회를 수립하였다고 주장한 유일한 체제들이다. 내가 아는 한, 사회민주주의 정부나 정당은 아무리 급진적이거나 오랜 기간 지속되었다 하더라도 그런 주장을 펼친 적은 없으며, 심지어는 소련마저도 1936년 이전까지는 그들이 사회주의를 성취했다고 실제로 주장한 적이 없다는 점은 상기할 필요가 있다. 어쩌면 그들은 조금 더 기다렸어야 했다…
소련식 사회주의는 본질적으로 10월 혁명 이후 소련인들이 처해있던 조건에 의해 지배되었다. 유일한 정치적 전통이라고는 전제정치 밖에 없고, 사회주의를 위한 조건들로 알려진 모든 것이 부재하며, 완전히 소외되고, 지속적 위협에 시달리는 아주 가난하고 극도로 후진적이 나라 말이다. 급속도의 경제적·기술적 발전, 즉 급격한 산업화는 당연히 최우선의 과제였다. 볼셰비즘은 자본주의적 발전의 조건들이 존재하지 않는 나라들에서 급속도의 경제발전을 이룩하기 위한 이데올로기로 스스로를 탈바꿈하였고, 한동안 그것은 너무나 성공적이어서 인도와 같은 제3세계의 여러 나라들에게 하나의 경제적 모델을 제공하였다. 볼셰비즘의 무자비한 독재에 아무런 동경이 없는 나라들에게도 그랬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전시경제처럼 작동하였는데, 승전 등 몇몇 특정과제들을 자명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그로 인한 비용은 고려하지 않은 채, 모든 목표들을 하나의 핵심 목표에 종속시키는 경제였다.
비록 중앙집중적 명령경제는 기껏해야 임시변통적인 수단이었고 낭비도 엄청나기는 했지만, 그것은 몇 가지 아주 놀라운 성과들을 이루어내기도 했다. 자본주의가 나자빠져 있는 동안 이 성취들은 그것의 실제보다도 더 놀라워보였다. 나중에 드러났지만 일단 자본주의가 1950년대 이후 최고성능을 되찾자 소련경제는 자본주의 체제를 따라잡는 것은 불가능했다. 평범한 사람들의 삶의 차원에서 소련 경제는 의식주와 아주 낮은 수준의 여가생활 등의 기본적인 생활필수품은 제공할 수 있었지만 그 이상은 불가능했다. 다른 한편 그것은 공교육을 제공하는 것에 있어서는 자본주의보다 훌륭했고, (이 경제가 1970년대와 1980년대에 멈추기 시작하지 전까지) 의료와 복지를 제공하는 것에 있어서는 다른 제3세계 나라들보다 훨씬 우월했다.
전시경제와의 비교는 결코 우연이 아니다. 권력을 잡거나 공직에 올랐을 때 무엇을 할 것인지에 대해서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었던 사회주의자들이 가지고 있었던 실질적인 공공정책 모델은 오직 제1차 세계대전의 전시경제들에서시작된 전시경제뿐이었기 때문이다. 이는 오직 볼셰비키들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교전국의 사회민주주의자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전시경제는 계획, 경제의 상당부분에 대한 공적 관리 내지 운용, 그리고 또 그에 못지않게, 가급적이면 노동조직들과 체계적 공공복지의 몇 가지 요소들의 도움을 통한 노동력 동원을 필요로 했기 때문이다. 계획에 대한 레닌의 생각은 특히 독일의 전시경제에서 영감을 받은 것이었는데, 이러한 결과 중 하나는 중앙집중화된 국가적 조치를 옹호하는 사회주의적 편향을 강화한 것이었다. 볼셰비키들과 사회민주주의자들 모두 사회주의라고 하면 오로지 국가계획과 시장 간의 갈등만을 생각했다.
그 어떠한 비용을 치르더라도 가능한 빨리 경제적 성장을 이룩하여야 한다는 후진국들의 당위성에 의해 공산주의의 사회주의 이념이 규정되었다면, 사회민주주의 정책들은 또다른 특수한 역사적 상황, 즉 양차대전 사이의 대공황과 자본주의의 위기, 더 정확히 말하자면 대규모 실업난에 의해 지배될 수밖에 없었다. 물론 다른 고려사항들도 영향을 끼쳤다. 전시경제를 경험한 것 외에도 그들은 자신들이 대중운동의 일부가 될수 있게 해 준 것이 선거민주주의였기 때문에 선거민주주의 정치를 당연한 것으로 여겼다. 게다가 스웨덴, 벨기에, 오스트리아에서 오랜 선동과 총파업을 통해 민주주의의를 획득해내는 등, 그들이 민주주의 건설의 주축이 되기도 했었다. 사회민주주의는 1945년 이후 ‘복지국가’라고 불리게 된 것에 열정적으로 착수하였는데, 묘하게도 복지국가는 사회민주주의에서 기원한 것도 아니고 그들의 사고방식에 큰 영향을 미치지도 않았다. 복지국가를 정교화해낸 것은 영국에서는 주로 자유당, 프랑스에서는 사회 가톨릭 계열, 독일에서는 사회적 의식을 가진 관료들이었다. 복지국가의 발전에 대한 사회주의자의 기여는 (서구 공산주의자도 마찬가지인데) 중앙정부는 반좌파더라도 좌파가 권력을 잡은 경우가 많았던 지방 정부를 통해서 이루어졌다. 비엔나와 런던에서처럼 사회주의 의회들이 선도한 공공주택정책이 중요한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그리고 (볼셰비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비사회주의적인 경험이 그들에게 사회주의 경제조직화에 대한 모델들을 제공해주었다는 점 또한 지적해야 한다.
‘트러스트(독점형기업연합체)’ 라는 말도 소련에서 비슷한 상품을 생산하는 모든 공장들을 조정하는 기관을 가리켰다. 이는 독점 자본주의 기업에서 영감을 얻었음을 나타낸다.
그리고 영국의 경우 1945년 이후 노동당의 국유화 모델이 빅토리아 시대의 자본주의가 우편업무처럼 공적으로 운영될 필요가 있는 모든 경제부문에서 활용하였던 정부부처가 아니라, 공적이지만 어떤 의미에서 자율적인 기업이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규모 실업난은 전후 사회민주주의 정책, 이것과 결합한 케인즈주의적이고 뉴딜 자본주의의 정책의 주요대상이었다. 핵심 정책목표는 ‘완전고용’이었던 것이다.
사회주의적 관점에서는 어떨지 몰라도 대량소비에 기반한 개량된 사회보장 자본주의의 역학관계를 복원시킨다는 관점에서 보았을 때 사실 이 정책은 눈부시게 성공적이었다. 너무 성공적이었던 나머지 1970년대와 1980년대에는 여기서 다룰 필요는 없는 이유들로 인하여 완전고용은 곤경에 처했다. 이렇게 되자, 개량자본주의와 사회민주주의의 합의는 무너졌다. 복지국가에 대한 비판과 자유시장 신자유주의가 자리 잡기 시작했다. 비록 그 둘이 승리한 곳은 레이건의 미국과 대처의 영국 등 한 두 개의 불행한 나라들에 불과했지만 말이다. 사실 승리했다고 하기도 어렵다. 사회보장지출을 없애거나 최소한 상당히 감축시키는 것은 그 극단주의자들 아래에서도 정치적으로 불가능한 것으로 드러났다. 한편 사회민주주의자들은 확실히 1945년에서 1973년에 이르는 황금기에는 잘 먹혔지만, 이제는 그만큼 잘 작동하지는 않는 일련의 정책들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것들 외에 의지할 것이라고는 케인즈와 국유화 밖에 없었다. 1980년대 초 미테랑의 경험은 쓰라리지만 결정적인 것이었다.
따라서 공산주의자들과 사회민주주의자들 모두 1970년대와 80년대에 들어서면서 1차 세계대전 이후 깊이 고민해 본 적도 없이 다소간 즉흥적으로 만들거나 적용했던 정책으로 대충 흘러갈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역사는 그들에게 한동안 인상적인 성공을 거둘 수 있도록, 또는 적어도 잠시 동안 상대적으로 두드러지는 성공을 거둘 수 있도록 허락했다. 이제 그 성공은 바닥이 난 것이다. 사회주의자들이 처음으로 사회주의에 대해서 숙고해야 할 때가 온 것이다.
20세기의 후반부, 이 인류 역사상 가장 혁명적이었던 시기가 우리에게 가르쳐준 것은 무엇인가? 1950년에는 오늘날 가장 산업화된 국가들에 속하는 일본, 이탈리아, 스페인에서조차 국민의 대다수가 농업에 종사했다. 오늘날 그들은 유럽, 서이슬람 세계 그리고 서반구의 거의 모든 곳에서 소수이며 어떤 경우에는 극소수에 불과하다. 이처럼 극적이고 전례없는 변화가 일어난 시대는 사회주의자들로 하여금 그들의 가정과 기대를 반드시 새롭게 검토하도록 만든다. 그리고 이 중 상당수가 더 이상 유지될 수 없음은 분명하다.
첫째, 자본주의가 우리 이전 세대가 기대했던 것 이상으로 풍부한 재화와 서비스를 생산했다는 점과 서양의 가장 평범한 사람들도 50년 전에 상상할 수 있었던 것보다 훨씬 더 나은 생활수준을 누리고 있다는 점은 명백하다. 그리고 복지국가 덕분에 가난한 사람들에게도 불운의 풍파를 피할 수 있는 피난처가 더 많아졌다. 굶주림과 빈곤을 철폐하기 위해 사회주의가 필요하다는 주장은 더 이상 신빙성이 없다. 내가 젊었을 때 아주 신빙성 있게 들렸던, 오직 사회주의만이 대규모 실업난을 종식시킬 수 있다는 주장조차도 더 이상 설득력이 없다. 서양세계는 자본주의 하에서 한 세대에 걸친 완전고용을 경험하였고, 비록 우리가 지금 다시 유럽에서 대규모 실업난의 시기를 겪고 있기는 하지만, 이 사태가 사실 1930년대에 그랬던 만큼 견딜 수 없을 정도로 느껴지는 것도 아니고, 완전히 다른 경제체제를 통해서만 이 사태를 근절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도 거의 없다. 간단히 말해 사회주의를 주장할 물질적 근거는 약화되었다.
둘째, 사회주의 경제에 있어서 전형적인 것으로 간주되었던 것들 대부분이 1930년대 이래로 비사회주의 체제들에 의해서 접수되거나 흡수되었다. 특히 계획경제와 산업·
용역 서비스의 국가소유 또는 공적소유가 그랬다. 대략 지난 10년 간의 논의가 대부분 자유시장의 승리와 국가의 해체, 그리고 경제적 신자유주의의 이데올로기적 승리에 관한 것들이었으므로 이것이 놀랍게 들릴 수도 있다. 하지만 대처의 이데올로그들과 그들의 동료들이 시계바늘을 거꾸로 돌릴 필요가 있다고 굳게 믿었다는 점은 실제로 전후 대부분 자본주의 국가에서 그것이 얼마나 앞으로 나갔는지 보여준다. 그리고 구조적으로도 이를 전부 되돌리기란 불가능했다. 세계은행의 추산에 따르면, 1980년에서 1987년 사이에 전세계를 통틀어 발생한 사기업화는 고작 400여 건에 그쳤으며, 그 중 절반은 브라질, 대처의 영국, 칠레, 이탈리아, 스페인 등 다섯 나라에서 였다. 미국, 일본, 독일이라는 세 거대경제권에서 일어난 사기업화는 모두 합해야 겨우 14건에 불과했다. 간단히 말해 제2차 세계대전 속에서 형성되었고 역사상 최고로 폭발적인 경제성장을 주관한 자본주의 경제는 순수시장경제가 아니라 공적 부문이 매우 큰 비중을 차지했고 아주 상당한 공적 계획을 수반하는 혼합경제였다. 그렇다고 당시를 사회주의 경제라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사회주의 경제가 무엇이고 그것이 비사회주의 경제와 구조적으로 어떻게 다른지를 정확히 말하기는 훨씬 어려워졌다.
예를 들어, 하나는 사회주의를 자처하고 다른 하나는 그렇지 않는 두 인접 국가, 가령 동구권 위기 이전의 1970년대 헝가리와 오스트리아에 주목해보자. 우연히도 두 나라 모두 각 체제의 기준에 따르면 매우 성공적이었다. 자본주의국가인 오스트리아에서는 모든 대규모 은행들, 중공업과 에너지 생산의 거의 전부, 그리고 상당부분의 공학, 전기, 전자, 무기 산업이 역사적인 이유들로 국유화되었다. 즉, 소위 말하는 경제의 ‘사령탑’들이 국유화되었던 것이다. 알다시피, 사회주의 헝가리에서는 소규모 비국유기업들에게 상당한 여지를 남겨줄 정도로 경제가 대폭 자유화된 상태였다. 이 두 경우를 놓고 볼 때, 자본주의 체제와 사회주의 체제 사이의 구분선은 어디에 그어져야 하는가? 한 마디로 해서 사회주의의 구조적 기준은 약화되었다.
소련식 100% 국가주도 중앙계획경제는 예외이다. 그리고 이것이 나의 세 번째 논점이다. 그러나 1960년대 이래로 이러한 유형의 사회주의 경제는 제대로 작동하고 있지 않으며, 점점 더 큰 곤경에 빠져들고 있다는 것이 특히 해당국들의 정부를 중심으로 점점 더 명확해지기 시작했다. 이는 이 경제에, 소비자가 자신의 기호를 나타낼 방법은 물론 경제적 합리성, 즉 비교비용의 기준조차 없었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시장요소가 없었던 것이다. 이 체제들을 개혁하려는 모든 시도들은 시장 요소를 도입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었다. 따라서 전쟁 이전에는 사회주의 특징으로 여겨지던 요소들을 전후 자본주의 경제가 도입하기 시작하였다면, 사회주의 경제는 특별히 자본주의의 특징으로 간주되던 요소들을 도입하려고 노력하였다. 서방은 이 부분에 있어서 동방보다 더 성공적이었지만 ‘이것이냐 저것이냐’ 식의 단순한 체제구분은 점점 더 흐려져갔다.
하지만 한 가지 바뀌지 않은 것이 있다. 이것은 실로 그 어느 때보다도 더 명백하다. 이것이 나의 네 번째 논점이다. 시장을 경제적 효율성과 효력을 향한 길잡이로 보는 것과 그것을, 레이건주의와 대처주의의 광신도들이나 경제문제연구소및 여타 골수자본주의 씽크탱크들이 보듯이, 한 경제의 자원을 배분하기 위한 유일한 기제로 보는 것은 전혀 별개의 문제이다.
후자는 화석연료가 대기오염을 생산하는 것만큼 자연스럽게 불평등을 생산해낸다. 그리고 오래 전에 아담 스미스가 지적한 것처럼, 본질적으로 공공재인 것들도 존재한다. 그것을 통해 아무런 수익창출도 가능하지 않거나 다른 방법으로 벌 수 있을 정도의 수익이 나오지 않기 때문에 시장이 전혀 생산하지 않는 것들이다. 이윤을 추구하는 기업은 실제로 손해를 보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 어떤 현대적 전국교통체계나 대도시교통체계에는 충분한 재원을 조달할 수 없다. 독일식 ‘사회적 시장경제’나 케인즈주의적이고 사회민주당의 영향을 받은 서방의 경제들에서는 공공 정책과 관리로 이런 경향을 어느 정도 억제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주택건설을 완전히 시장에 맡기면 어떻게 되는지 레이건의 미국이나 대처의 영국에서 볼 수 있다. 집을 구매할 수 있는 이들을 위해서만 집이 만들어지고, 오늘날 뉴욕에는 비바람을 막을 지붕조차 없는 사람들이 7만명에 이른다. 게다가 그런 조건 속에서 부유한 자들은 더 부유해지고 빈부격차는 꾸준히 벌어진다. 이는 영국과 미국에서도 눈에 띄게 발생했다. 부유한 선진국의 사람들은 그 사회의 하수구로 빨려들어간 사람들이 결국 기껏해야 전체 인구의 1/3 밖에 안 되는 소수에 불과하다는 생각으로 위안을 삼는다. 그리고 그들마저도 TV는 가지고 있고, 굶지도 않으며, 나머지 2/3은 괜찮게 지내고 있다고 생각한다. ‘지하계층’이라는 끔찍한 단어는 시장의 피해자들을 지칭하는 말로 1980년대에 등장했다. 이들은 준수한 사회의 바닥 밑에서 살며, 이들을 보기 위해서는 바닥 밑을 들여다보아야 한다. 그들이 뉴욕에서 처럼 공공연하게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한 그렇다. 뉴욕에서는 집 없는 이들이 떼지어 쓰레기통을 뒤지고 있는 모습과 지구상 가장 거대하고 화려한 도시 특유의 냄새, 길바닥 말고는 살 곳이 없는 자들의 찌든 오줌냄새를 피할 도리가 없다.
당신은 이 모든 것들이 사회주의를 주장할 근거가 아니라, 약간의 사회기독교적 요소가 가미된 자본주의인 사회적 시장에서 사회주의적 요소가 조금 더 강하게 가미된 자본주의인 스칸디나비아의 나라들과 오스트리아와 같은 사회민주주의 국가들에 이르는 인간화된 혼합경제 를 주장할 근거라고 말할 수도 있다. 나는 이를 부정하지는 않겠다. 나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우리의 과제는 시장 동기와 사회적 동기가 가장 잘 결합된 시스템을 모색하고 찾아내는 것'이라는 존 케네스 갤브레이스의 말에 매우 실제적인 의미에서 동의한다. 또한 나는 특정 산업이나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이 공기업인지 사기업인지는 딱히 근본적인 원칙의 문제는 아니라는 점도 그의 말에 동의한다. 예를 들어, 현재 미국의 대기업들은 영국의 국민의료보험과 같은 제도를 강하게 요구하고 있는데, 이는 단지 미국의 민간의료보험제도가 어이 없을 만큼 관료적이고 어처구니 없이 비싸기 때문이다. 하지만 프랑스와 같은 다른 몇몇 유럽 국가들에서는 정부가 지원하는 의료보험이 아주 잘 작동하는 것으로 보인다. 핵심 문제는 세부적인 제도에 관한 것이 아니라, 한 나라가 자신의 모든 시민들에게 적당한 보건⋅의료적 돌봄을 제공해야 한다는 의무를 받아들이고, 그 서비스를 잘 이용할 수 있도록 보장하느냐에 관한 것이다.
그러나 시장의 해악들이 어느 정도는 통제될 수 있고, 실제로도 노동당과 사회민주주의 정당이 집권한 바 있는 오스트리아나 스칸디나비아와 같은 나라들에서 점점 더 성공적으로 통제되어왔음에도 불구하고, 세계 자본주의 발전에는 우리의 통제를 벗어난 적어도 세 가지 결과들이 따른다는 점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이것은 우리가 21세기 사회주의의 과제를 정의하는 데 도움을 준다.
첫 번째는 생태계 문제다. 인류는 자신이 실제로 생태계, 즉 지구 상의 식물, 동물, 인간 거주지를 파괴하거나 아니면 적어도 예측불허의 극단적인 방식으 로 악화시킬 수 있는 지점에 도달하였다. ‘온실효과’는 우리 모두 감수할 대상이 되었다. 이것은 점점 더 가속하는 무제한적 경제성장의 결과이다. 사회주의 이론 또한 이를 옹호한 적이 있었고, 특히 동유럽에서 사회주의 실천이 대규모 오염을 일으켰다. 그러나 자본주의가 그것의 본성상 무제한적 성장을 추구하도록 설계되어 있는 반면, 사회주의는 그렇지 않다. 그리고 성장은 어떤 방식으로든 제어되어야만 한다. ‘지속가능한 발전’은 시장을 통해서는 이루어질 수 없고, 시장에 반해서 이루어져야만 한다. 그것은 소비자의 자유로운 선택이 아니라 계획에 의해, 그리고 필요한 경우, 자유로운 선택에 반해서 이루어질 수 있다. 바로 지금 이 순간 유럽위원회는 북해에서 어류의 씨가 마르는 것을 막기 위해 매달 일주일 동안은 북해에 들어가는 모든 어부들의 조업을 중단하기로 결정했다.
두 번째는 한두 개의 ‘신흥공업국’과 한줌의 백만장자 오펙(OPEC) 국가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부유한 선진국의 국민들과 가난한 후진국의 국민들 사이의 격차가 끔찍하게 벌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1900년에는 인류의 1/3을 차지했던 ‘선진국’은 오늘날 15~20%로, 1750년과 거의 비슷하다. 그리고 1900년에는 선진국의 1인당 GNP가 나머지 인류의 약 3배였지만, 1950년에는 5배, 1970년에는 7배, 1980년대 중반에는 12.5배로 증가했다. 세계 10대 부국을 놓고 보면 그들의 1인당 GNP는 최빈국 10개국의 그것의 58배에 달한다. 세계가 더 부유해진다고 해서 ‘낙수 효과’ 따위는 없다. 오히려 체계적인 조치가 없다면 이 폭발적인 상황은 갈수록 더 폭발적이 될 것이다.
세 번째는 자본주의가 인류를 경제에 종속시킴으로써 사회를 구성하는 인간관계를 파괴하고 부패시키며, 개인이 지금 여기서 원하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다는 도덕적 진공상태를 만들어낸다는 점이다. 제너럴 모터스가 공장을 폐쇄하자 플린트(Flint)라는 소도시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다루는 영화 <로저와 나>가 보여주는 것처럼 ‘최고위층’ 사람들은 이윤을 위해 도시 전체를 희생시킨다. ‘최말단’에서는 뉴욕에서 매일 일어나듯이 십대 청소년들이 양가죽 재킷이나 최신 유행 운동화를 얻기 위해 남을 죽인다. 알다시피, 인간은 자본주의에 적합하지 않다. 자본주의는 생산성의 무한한 성장을 요구한다. 항상 더 효율적이고 더 저렴해지는 기계나 생산물과는 달리 인간은 여지없이 인간으로 남아있다.
기껏해야 자동차산업에서 그러했던 것처럼 로봇들로 대체할 수 있을 뿐이다. 병원이나 보통의 사회적 서비스같이 인간이 기계로 대체될 수 없는 곳들에서도 그들은 해고될 수 밖에 없다. 기계와는 달리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그들의 임금도 오르게 마련인데, 우리 모두 경영학자들한테서 배웠듯이 임금이 생산성보다 빠르게 오르면 안 되기 때문이다. 우리가 아예 이들 없이 운영할 수 있다면 전반적으로 훨씬 간단해질 것이다. 이들 없이도 실제로 경제는 놀라운 수준까지 잘 돌아갈 수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들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이들은 여전히 이곳에 존재한다. 그렇다면 이들은 어떻게 되는가?
이들이 어떻게 되는지 보여주는 한 가지 예로 미국 자동차산업을 살펴보자. 한때 이 산업은 사람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해주었다. 윌로우 런이나 리버 루지에 있는 헨리 포드 공장의 조립라인에서 일하는 것은 별로 즐겁지는 않았지만, 괜찮은 임금을 주었고 미국 남부에서 온 흑인들과 가난한 백인들에게 끊임없이 일자리를 제공해주었다. 이들은 기술도 교육도 갖추지 못했고, 보통 머리도 그다지 좋지 않았지만, 일할 준비가 되어 있었으며, 조립라인노동은 그들에게 시민이자 전미자동차노동조합의 일원으로서 어느 정도의 자존감과 약간의 위엄을 갖고 그럭저럭 가정을 꾸려나갈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 그러나 오늘날 자동차산업은 이들을 더 이상 필요로 하지 않는다. 오늘날 가난한 미국 흑인에게 이런 종류의 자부할 만한 일자리를 제공해주는 유일한 단체는 군대이며, 이것이 걸프전에 참전한 병사들 중 1/3이 흑인이었던 이유이다. 그렇다면 그들의 노동이 더이상 필요없다는 결정으로 인해 고립되어버린 지역사회들은 어떻게 되었는가? 사람들은 두려움, 마약, 총기로 만연되고 원한과 무정부상태로 점철된 게토로 변해 그것의 사람들은 복지나 범죄에 의존하며 살아간다.
사회주의자들은 생산이 아니라 사람이 먼저라는 것을 세상에 알리기 위해 존재한다. 사람을 희생시켜서는 안된다는 것. 특별한 이들, 똑똑한 이들, 강한 이들, 야망이 있는 이들, 아름다운 이들, 언젠가 위대한 일을 할 이들 뿐만 아니라 자신의 개인적 이익이 이 사회에서 충분히 받아들여지지 않는다고 느끼는 이들까지. 특히 별로 흥미롭지도 않고, 내 친구의 어머니가 말하듯 ‘그저 머릿수를 채우기 위해 있는’ 평범한 사람들. 아서 밀러의 <세일즈맨의 죽음>에서 가장 감동적인 대사를 남긴 한 인물의 말처럼 , 바로 그런 별 볼일 없고 쓸모 없는 사람에 대해서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그런 사람한 테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사회주의는 그들을 위한 것이고, 그들에 관한 것이다.
사회주의의 미래는, 그것을 옹호하기 위한 근거가 어떤 측면에서 이전과는 다를지라도, 지금 그것의 필요성이 어느 때 못지않게 크다는 사실에 기초한다. 그것은 자본주의가 여전히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모순들과 문제들을 일으킨다는 사실과 자본주의가 온건한 개혁으로 완화될 수 있는 불평등과 그런 식으로 완화될 수 없는 비인간성을 둘 다 생산한다는 사실에 놓여있다. 1989년과 1990년에 소련식 사회주의 체제의 비참하고 당연한 붕괴가 헤드라인을 장식하지 않았다면, 오늘날 자본주의가 얼마나 환상적으로 작동하고 있는지에 대한 자극적인 광고도 더 적었을 것이다. 이러한 광고는 사실이 아니다. 자본주의는 다시 굶주림과 전쟁의 세계로 돌아갔다. 라틴아메리카나 아프리카의 일부 지역처럼 눈에 보이는 폐허를 만들지 않는 곳에서도 자본주의가 잘 작동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갤브레이스가 말했듯이, 동유럽이 아직 명목상 사회주의를 유지하고 있을 때 “어느 누구도 더 나은 삶을 위해 동베를린에서 뉴욕의 사우스 브롱스로 이주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은 암울하지만 어김없는 사실이다”
이 세계의 문제들은 자유시장으로는 해결될 수 없다. 내가 보기에 그것들은 사회민주주의 – 최소한 아직 이름값은 하는 스웨덴이나 오스트리아의 그런 종류의 사회민주주의로도, ‘사회적 시장경제’로도 해결될 수 없다. 사회적 시장경제는 도덕적이고 사회의식적인 유형의 기업들로, 감히 예측하건데 올해 교황회칙을 통해 로마가톨릭교회가 추천할 것으로 보인다. 여러분은 잊었을 수 있지만, 교황은 1991년이 교회 최초의 사회 회칙인 「레룸 노바룸」이 발표된지 100주년 되는 해라는 점을 잊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두 가지 것들은 레이건주의나 대처리즘보다 낫고 사회민주주의의 경우 훨씬 더 나은 편이며, 현실적으로 아마도 현재 사회주의자 경마꾼이 돈을 걸 만한 최선의 말일 것이다. 즉, 현존하는 최고의 정부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걸프전이 보여준 기술적 파괴력은 말할 것도 없이, 오늘날 생산과 오염의 기하급수적 증가로 인해 사람이 살 수 없게 된 지구의 문제, 절대다수의 굶주린 사람들과 소수의 압도적으로 부유한 국가로 나누어진 세계의 문제들은 그런 식으로 해결될 수 없다. 조만간 이 문제들은 국가적이고 국제적인 차원의 체계적이고 계획적인 조치와 소비자 시장경제를 지탱하는 중추들에 대한 공격을 필요로 할 것이다. 그 문제들은 단순히 과거의 사회보다 더 낫기만 할 뿐 아니라, 사회주의자들이 항상 견지하였듯이 다른 종류의 사회를 요구할 것이다. 통제를 벗어난 생산시스템으로부터 인류를 구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사람들이 편안하게, 함께, 존엄하게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는 사회가 필요하다.
이것이 바로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선언이 나온 지 150년이 지난 지금도 사회주의가 여전히 해결할 과제를 가지고 있는 이유이며, 이것이 바로 여전히 사회주의가 과제인 이유이다.
번역 : 양진석
교열 : 류민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