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의 동북아, 오키나와-한국 반전평화연대의 길을 묻다

위기의 동북아, 오키나와-한국 반전평화연대의 길을 묻다

지난 3월 6일 플랫폼c에서 오키나와에서 온 반전평화 활동가 카미야 미유키와의 간담회가 열렸다.

2023년 3월 28일

[활동]동아시아 공부모임[동아시아]일본반전평화, 오키나와, 동아시아, 일본, 대만해협

서울에 온 오키나와 활동가 카미야 미유키

30대 초반의 카미야 미유키는 오키나와 나하 출신으로 4년 전부터 사회운동에 대한 관심을 갖고 오키나와에서 다양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그가 사회운동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대학시절 미국으로 다녀온 단기어학연수이다. 미국에서 경험한 왕성한 사회운동의 분위기가 오히려 그를 사회운동으로 이끈 것이다. 이후 현대사와 사회운동에 더 많은 관심을 갖게 되었고, 2018년부터 ‘올오키나와(All Okinawa)’가 지지하는 야당연합 후보와 함께 지사, 시장, 그밖에 지방선거 운동에 참여해왔다. 또 2022년부터는 일본 정부가 ‘대만유사사태’를 조장하며 오키나와가 전쟁에 휘말릴 가능성이 높아지면서, 대만 시민사회와 함께 하는 ‘대화프로젝트’를 진행했다. 지난 2월 열린 심포지엄은 800여 명이 참가한 가운데 매우 성공적으로 개최되기도 했다. 이 프로젝트는 예상보다 많은 호응을 받았고, 앞으로도 2개월에 한 번씩 개최할 예정이다. 또, 지난 2월 26일에는 나하 시내에서 집회를 열기도 했다. 목표치였던 1천명을 훨씬 넘는 1,600명이 참가한 이 집회에서 그는 선언문을 낭독하고 구호를 외치며 거리를 행진했다.

지난 3월 6일, 서울 망원동에 위치한 플랫폼C에서 오키나와에서 온 청년 활동가들과 한국인 청년들 간의 간담회가 열렸다. 20여 명이 참여한 이번 간담회는 최근 한국에서의 사드 배치 반대 투쟁, 그리고 베트남전쟁 시기 일본 사회운동의 반전평화운동 사례들에 대한 짧은 발제들로 시작됐다. 그리고 이어서 메인 순서로 오키나와 활동가 카미야 미유키로부터 최근 일본 정부의 난세이제도 군비증강 문제 및 오키나와에서의 반전평화운동에 대해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다음은 카미야 미유키의 발제를 요약 정리한 것이다.

행사 웹포스터
행사 웹포스터

오키나와의 역사와 오늘

널리 알려져 있다시피 오키나와는 일본 본섬과는 별도의 역사와 전통을 지닌 사회를 구성해왔다. 근대 이전에는 ‘류큐왕국’(1429년~1879년)이라는 정치체가 존재했고, 명·청이나 조선과 평화적인 관계를 맺고 무역을 해왔다.

에도시대인 1609년, 규슈섬 남부를 지배하고 있던 사쓰마번이 류큐를 침공하면서 류큐왕국은 주권 일체를 빼앗겼다. 1872년 일본제국의 속령으로 편입됐고, 7년 후 완전히 병합되면서 450년 역사를 끝맺는다. 20세기를 뒤흔든 태평양전쟁의 후반기였던 1945년 3월 말부터 6월말까지 미국과 일본은 오키나와에서 전쟁을 벌였는데, 다분히 일본 군부가 본토의 육지전을 회피하고 시간을 벌기 위한 목적에서 강요한 전투였다. 이로 인해 당시 오키나와 주민의 4분의1에 해당하는 20만 명의 민간인들이 전투 과정에서, 혹은 일본군의 학살과 집단자살 강요 속에서 희생됐다. 그 후 1952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서 일본이 주권을 되찾았을 때에도 오키나와는 버려졌고, 본섬이 독립한 이후에도 오키나와에선 미군통치가 이어졌다. 이 때문에 오키나와 주민들은 강화 조약이 발효된 ‘4월 28일’을 “굴욕의 날”이라 부른다.

미군정 시기 오키나와 민중의 삶은 심각한 폭력에 노출됐다. 미군기지가 섬의 이곳저곳에 분포한 상황에서 어린이와 여성들에 대한 미군의 폭력, 소음 공해 등이 발생해 사람들의 일상을 파괴했다. 당시 오키나와에선 인권이 제도적으로 보장되기 어려웠으며, 농민들은 미군의 총검과 불도저 앞에 농토마저 빼앗겼다. 이 때문에 오키나와에서는 오랜 시간 동안 “섬 전체 투쟁(島ぐるみ闘争)”이라 불리는 광범위한 저항운동이 벌어졌다.

당시 미군은 영구적으로 기지를 사용하기 위해 ‘군용지료 일괄 납부 방침’을 세우고 토지를 값싸게 사들이려 했으며, 이에 대한 주민들의 반발도 고조되었다. 그 과정에서 우선 오키나와를 일본 국가 내로 복귀시키는 것이 중요하다는 판단하에 “복귀운동(復帰運動)”이 벌어졌다. 미군정보다는 일본의 평화헌법 하에서 인권과 민주주의를 제도적으로 수호할 수 있는 여지가 마련될 것이라 보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1972년 미국이 오키나와를 일본에 반환한 이후에도 오키나와의 미군기지는 사라지지 않고 오히려 늘어났다.

1956년 6월 25일, 군용지 사용료 일괄 지불을 규탄하는 '주민대회'가 약 15만 명이 집결한 가운데 열렸다.
1956년 6월 25일, 군용지 사용료 일괄 지불을 규탄하는 '주민대회'가 약 15만 명이 집결한 가운데 열렸다.

난세이제도에서의 군비 증강

난세이제도(南西諸島)는 일본 열도 최남단 태평양 동중국해의 규슈 남쪽부터 타이완 동쪽까지 뻗어있는 군도를 가리킨다. 마게시마섬에서 요나구니섬까지 200여 개 섬들이 약 1200km에 걸쳐 이어져 있으며, 4,647제곱킬로미터의 땅에 약 160만 명의 사람들이 살고 있다.

한데 카미야 미유키는 현재 난세이제도가 매우 위험한 상태로 접어들고 있다고 말한다. 일본 정부와 본토(오키나와를 제외한 일본 본토) 주류언론들은 대만유사사태(전쟁)가 머지않아 일어날 것이라며 위기감을 조장해왔다. 아울러 일본 정부는 몇 년 전부터 난세이제도의 요새화를 준비해왔다. 2010년 일본 내각부 산하 안전보장자문회의는 집단적 자위권에 대한 헌법(제2항 9조) 해석을 재검토하면서, 일본 열도의 안보 위협에 대응해 해상 자위대의 전략 배치를 재검토하는 방위전략 수정안을 도출했다. 수정안은 1976년 제정된 자위대의 균형배치 방위구상을 폐지하고 오키나와와 난세이(남서)제도에 해상 자위대를 집중 배치하겠다고 밝히고 있다. 이에 주요 언론도 '대중국 강경 대응론'에 무게를 실어주고 있다.

카미야 미유키는 난세이제도에서의 군비 증강은 미국의 대중 억지 전략의 일환으로 이뤄지고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미국의 새로운 인도·태평양 전략 중 동북아시아에 대한 최우선 목표는 이른바 ‘제1열도선’ 바깥으로 중국이 진출하지 못하도록 봉쇄하는 것에 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미 정부는 일본 자위대와 미야코섬을 활용하고자 한다. 미야코섬은 오키나와 나하시와 대만 타이베이시 사이 중간에 위치해 있는데, 이곳을 전략적인 요충지로 간주하고, 이 섬을 무대로 국지전과 외딴섬(離島)들에 대한 탈환 작전을 유지한다는 군사전략을 세우고 있다.

난세이제도에 대한 자위대 배치 및 군비 증강 계획은 매우 구체적인 수준으로 확인되고 있다. 우선 2016년 3월 요나구니섬에 이미 육상자위대 주둔지를 개설해 약 160명의 병력을 배치했다. 2019~20년에는 미야코섬과 이시가키섬, 아마미오섬에도 각각 600~800여 명의 미사일부대들을 배치했다. 올해에도 이런 추세는 계속될 예정이다. 일본 우익언론 <산케이신문>의 2022년 12월 4일 보도에 따르면, 일본 방위성은 나하시에 사령부를 둔 육상자위대 제15여단을 “사단에 준하는 ‘방위집단’으로 증강”할 계획이다.

제도의 가장 북쪽에 위치한 마게시마섬도 군비 증강의 극적인 변화를 보여주는 섬 중 하나다. 큐슈섬의 남서쪽에 위치한 이 섬은 여의도 3개 정도 크기의 무인도였다. 수백년 동안 목장으로 이용되던 이 섬의 군사기지화는 미군의 적극적인 요구에 의해 이뤄졌다. 10여 년에 걸친 우여곡절 끝에 이 섬이 160억엔(1600억원)에 매입됐고, 이에 따라 올해 1월부터 항만과 전투기 활주로 건설이 이뤄지고 있다. 미국은 이 섬을 미 해군을 위한 항공모함 이착륙 훈련지로 활용할 계획이다.

헤노코 신기지 반대 운동

오키나와 본섬은 오키나와 시민사회가 주도하는 미군기지 반대운동의 중심이다. 일본 내 미군기지 면적의 75%를 오키나와섬이 차지하는데다, 오키나와섬 전체 면적의 20% 이상을 미군이 점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미군은 종전 이래 1972년까지 오키나와 전체를 통치했고, 1972년부터는 상당한 땅을 점유해 군사기지로 활용하고 있다. 이에 따라 오키나와 민중들은 50년 넘도록 미군기지 반대운동을 펼쳐오고 있다.

지속적인 운동의 결과, 1996년 4월 당시 하시모토 류타로 일본 총리는 미국과의 협상을 통해 5~7년 내 후텐마기지를 반환한다고 발표했다. 이에 따라 헤노코 매립지로의 기지 이전이 결정됐지만, 오키나와 주민들 사이에선 헤노코 신기지도 용납할 수 없다는 입장이 지배적이다. 헤노코 신기지 문제는 오키나와 정치의 판도 역시 결정짓는 이슈이기도 하다.

헤노코 신기지에 대한 오키나와현 정부의 입장은 비교적 명확하다. ① 오키나와에는 이미 기지가 너무 많아 주민들이 큰 부담을 떠안고 있다는 점, ② 실제 많은 주민들이 반대한다는 점, ③ 자연환경의 파괴, ④ 기지 이전으로 후텐마 비행장의 위험을 없앨 수 없다는 점 등 주민들의 입장을 대변하고 있다. 이는 미군기지 문제를 둘러싼 운동과 정치지형이 오키나와의 선거정치와 지방정부 논리에 반영되고 있기 때문이다.

오키나와 시민사회와 대안정치세력들은 미군기지 반대 입장을 중심으로 공동후보를 내세워 선거에 대응해왔고 2014년과 2018년, 2022년에 연이어 승리했다. 카미야 미유키 활동가가 참여하고 있는 ‘올오키나와’는 이런 흐름 위에 있다. 그러나 오키나와를 제외한 일본의 정치지형은 자민당 1당의 오랜 독점으로 이어지고 있고, 이는 오키나와 미군기지 문제의 해결을 어렵게 만들고 있다. 오키나와 시민사회는 지난해 9월부터 일본 전 지역을 순회하면서 ‘오키나와 난세이 제도는 지금 : 미사일 요새화 진행중’ 사진전을 펼치고 있는데, 이는 오키나와의 투쟁이 고립되지 않도록 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다.

전국 순회 사진전 [사진: 고니시(小西誠), 오카마(奥間政則)]
전국 순회 사진전 [사진: 고니시(小西誠), 오카마(奥間政則)]
전국 순회 사진전 [사진: 고니시(小西誠), 오카마(奥間政則)]
전국 순회 사진전 [사진: 고니시(小西誠), 오카마(奥間政則)]

오키나와에서 활동 계획과 바람

카미야 미유키는 끝으로 이후 활동 계획과 자신의 바람에 대해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하면서 발표를 마쳤다. 그가 이야기한 것은 크게 세 가지였다. 우선, 오키나와를 중심으로 동아시아 평화 연대를 구축하되, 시민이 중심이 되는 연대로 구축하고 싶다는 점이다. 평화학 연구자 갈퉁은 아세안처럼 동북아시아연합을 구성해 동아시아공동체를 만들고, 그 중심을 오키나와에 두자고 주장한 바 있다. 카미야 미유키와 플랫폼c를 연결해준 하바 구미코 교수도 2022년 오키나와를 허브로 삼아 동아시아 평화체제를 구축하자는 포럼을 개최한 바 있다. 오키나와가 이웃나라와 전쟁 없이 평화롭게 지내왔던 역사를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이를 바탕으로 앞으로 동아시아의 평화를 견인해낼 수 있는 역할을 하고 싶다는 게 그의 소망이다. 이를 위해 그는 각국의 시민이 중심이 되어 교류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본다. 2022년에 이어 올해도 이러한 포럼이 많이 열릴 것으로 보이는데, 국가 주도가 아닌 시민이 주도하는 포럼에 활발하게 참석하고, 많은 이들을 만나 평화를 이야기하는 과정을 통해 그런 흐름을 만들어갈 계획이다.

또한 그는 전쟁 반대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계획이다. 오키나와에서도 작년부터 전쟁 분위기가 고조되고 있다. 미군기지 반대운동을 줄곧 해온 선배세대 활동가들이 있지만, 사실 오키나와의 청년들이나 다른 부문 시민단체와의 연합이 원활하지만은 않았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올해부터는 함께 연대하려는 노력이 빛을 보고 있기도 하다. 카미야 미유키 역시 이번 2월26일 나하 집회를 위해 ‘No more okinawa 전쟁-금은보화보다 생명’ 모임과 처음으로 함께 집회를 준비하고 선언문을 낭독했다. 하토야마 유키오 전 일본 총리가 중심이 되어 발족한 ‘동아시아공동체연구소의 청년 모임YouFO-Young Friendship Okinawa’에서 올해 이시가키섬 등을 방문해 미사일 배치에 대한 상황을 취재하고 유튜브에 올리는 등 전쟁을 막기 위한 활동에 힘쓰는 움직임도 있다. 또, 두 달에 한 번 열리는 대만과의 ‘대화 프로젝트’에도 집중하고 있다. 지난 번 패널은 전문가(교수, 정치학자) 중심이었지만, 다음 모임은 활동가들이 주도적으로 함께하는 포럼이 되도록 준비하고 있다고 한다. 그러면서 언젠가 한국과도 이와 비슷한 프로젝트를 진행해 보고 싶다는 바람을 내비쳤다.

마지막으로 미군기지 환경문제 및 지위협정 개정 운동을 지속해나갈 계획이다. 일본의 미군기지 환경문제를 취재해온 미국의 저명한 저널리스트 아비 마틴(Abby Martin)은 “Earth's Greatest Enemy”(2021)를 통해 미군기지의 환경오염을 폭로했다. 오키나와 미군기지의 환경오염은 매우 심각한 수준인데, 문제를 심화시키고 있는 것은 미일지위협정이 전혀 개정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다. 미군은 지위협정을 바탕으로 기지 오염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고 있을 뿐 아니라 기지 내 환경 조사마저 불허하고 있다. 일본 시민사회에서는 이 문제도 중요한 의제로 계속 다루어나갈 예정이다.

질의 응답

발표에서 언급하신 '안보3문서'는 무엇인가요?

“국가 안전보장에 관한 문서로서 국가안전보장계획, 국가방위전략, 방위력정비계획을 말합니다. 이번 문서 개정에서 반격능력을 명시하여, 즉 공격에 대항하는 목적으로만 용인되는 일본이 상대의 미사일발사 기지를 공격할 수 있게 되었으며 2023년부터 5년간 약410억원(43조엔)의 군사비를 지출하기로 결정했습니다.”

2013년에 ‘오스프레이 철회’와 미군기지의 현내 이전 중단을 위해 오키나와의 모든 시정촌과 현의회 의장들이 서명한 의견서를 제출했다고 하셨는데요. 여기서 ‘오스프레이’란 무엇인가요?

“미국의 벨 헬리콥터사와 보잉 버톨(현 보잉 로터크래프트 시스템)사가 공동으로 개발한 항공기(수직 이착륙기)입니다. 비행기와 헬리콥터 사이의 중간 형태로 볼 수 있는데요. 사고가 매우 많이 발생해 중대한 안전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마게시마섬의 자위대 기지건설은 언제부터 진행됐고, 현재는 어떤 상황인가요?

“일본 정부가 마게시마섬이라는 무인도를 소유한 개발회사에게서 약1600억원(160억조엔)을 주고 토지를 샀습니다. 2023년 1월부터 4년에 걸쳐 기지를 건설할 예정입니다.”

군사기지 건설 중인 마게시마섬
군사기지 건설 중인 마게시마섬

헤노코 미군기지 건설은 완료되었나요? 과정을 자세히 말씀해주세요.

“2022년11월 기준으로 13%정도 진행됐습니다. 헤노코는 적어도 12년 이내에는 공사가 완료될 수 없습니다. 헤노코 매립지인 ‘오우라만’은 해저70미터 표면이 마요네즈처럼 말랑한 상태여서, 이를 굳히는 기술이 투입되어야 기지를 건설할 수 있는데요. 지금은 이 기술이 부족해서 진행이 매우 느립니다. 기지 공사비는 일본이 전액 부담해야 하고, 총 공사비는 약10조원(1조엔)가까이 될 것으로 보입니다.”

오키나와 인근의 난세이제도는 전체 길이가 약 1천2백 킬로미터로 섬간의 거리가 많이 떨어져 있는데요, 미군 기지투쟁 등에서 지역별로 관점에 차이가 있거나 서로 맞지 않는 부분은 없나요?

"실제 외딴섬들에서는 오키나와 본섬에 대해 불만이 있습니다. 과연 우리 문제에 관심이 있겠냐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래서 지난달 2월 26일 집회에서는 낙도 주민들도 함께 참여하는 집회를 만들기 위해 준비위원회에서 낙도를 찾아가서 설득하는 등 함께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오키나와에서 기후 운동을 하신다고 했는데, 발표에서 오키나와 발전 전력의 90%가 화력이라고 해서 깜짝 놀랐습니다. 재생에너지 전환 운동은 어떻게 진행하고 있나요?

"일단은 재생에너지가 필요하다는 인식을 확산시키는 것이 우선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정부에 민원(의견 전달)을 넣거나 전력회사에 민원을 넣는 방식으로 주민의 뜻을 전달하고 있습니다."

오키나와의 투쟁에 청년 참여가 적은 것이 문제라고 하셨는데요. 이를 해결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하고 있나요?

"일본 청년들은 수십년 동안 운동해온 선배들(70대 전후)을 이해하기 어려워하기도 하고, 왜 그렇게 분노하는지 이질감을 느끼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번 2월 26일 집회에는 청년들의 참가를 늘리기 위해 슬로건에도 부드러운 용어를 사용하고, 집회 선전물도 알록달록 예쁘게 꾸미는 등 이미지를 바꾸려고 노력했습니다. 앞으로도 계속 노력할 예정입니다."

오키나와가 독립을 해야 한다고 하는 목소리가 있나요? 있다면 어떻게 진행되고 있으며 미유키씨는 이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그동안 오키나와 사람들이 기지를 반대한다는 서명을 일본 국회에 제출해도 아무 소용이 없었기 때문에 독립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꽤 있습니다. 다만 독립을 말하는 사람들이 모두 한 마음인 것도 아니고 류큐 민족주의자인 것도 아니어서 하나로 뭉치기 어려운 점이 있습니다. 저도 일본정부에 실망이 크고 독립을 말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이해하지만 구체적으로 독립을 해야한다고까지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일본 활동가들이 한국의 사드 투쟁에 대해 알고 있나요? 그리고 동아시아 연대를 위해서 어떤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시는지, 이를 위해 어떤 활동을 하실 것인지 알고 싶습니다.

"부끄럽게도 아직까지 ‘사드’ 문제에 대해 들어본 적 없었습니다. 오늘 (보리 동지의 발제를 듣고) 많이 알게 됐습니다. 동아시아에서 국제연대를 위한 대중적 기반을 만들기 위해, 우선 SNS를 활용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트위터나 웹뉴스 등을 통해 일단은 서로 알아갈 수 있습니다. 최근 저는 대만 사람들과 ‘대화 프로젝트’ 포럼을 기획하고 이에 적극적으로 참가하고 있는데요. 이 포럼이 두달 간격으로 열릴 예정입니다. 이러한 형태의 교류와 모임을 갖고, 계속 만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미유키씨가 사회운동을 하면서 어려움도 많았을 텐데, 그만두고 싶었던 때는 없었나요?

"오키나와 민중의 의사가 일본 정부에 잘 전달되지 않을 때 실망스럽기도 합니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사람들 만나는 것을 좋아하고, 거기서 힘을 많이 받는 편입니다. 그런 면에서 선거운동은 즐거운 과정이죠. 지난해 다마키 데니 지사 당선을 비롯해, 오키나와 기초의원 선거에서도 크게 승리해 힘이 되었습니다."

2022년 9월 한국의 기후정의행진에 연대 메시지를 보낸 카미야 미유키
2022년 9월 한국의 기후정의행진에 연대 메시지를 보낸 카미야 미유키

발표 : 카미야 미유키

통역 : 박근영

정리 : 홍명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