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우루무치 화재 참사와 백지 시위

중국 우루무치 화재 참사와 백지 시위

2022년 12월 2일

[동아시아]중국대륙광저우, 대중시위, 동아시아, 베이징, 상하이, 우루무치, 중국, 학생운동

중국 정부는 우한에서 코로나바이러스가 발생해 전 세계적인 팬데믹으로 이어지는 과정에서 크게 두 번의 실수를 했다. 첫 번째는 우한에서 처음 이 바이러스가 발견됐을 때 일선 의사들의 경고를 무시했던 것이고, 두 번째는 강력한 제로코로나 정책에 따른 도시 봉쇄 방역을 지나치게 긴 시간 동안 이어간 것이다.

첫 번째 오판에서 중국 정부는 시민들의 ‘말할 권리’를 존중하지 않고 오히려 강박적으로 통제에 집착했다. 코로나바이러스가 전 세계에서 유행한 이후 중국은 강력하게 시민들을 통제하며 확진자 증가를 억누르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공공의료를 강화하고 병상 수 확보에 집중하는 대신 통제와 봉쇄에만 집중한 것이 문제였다. 제로 코로나 정책은 해제할 수도, 지속할 수도 없는 자승자박의 결과를 초래했다. 그 결과 피해는 고스란히 도시 빈민과 평범한 노동자들에게 돌아갔다. 팬데믹 시기 베이징의 배달 노동자들 [상]팬데믹 시기 베이징의 배달 노동자들 [하]은 팬데믹 시기 베이징의 음식배달 플랫폼 노동자들에게 끼친 피해 실상을 자세히 소개하고 있다.

지난 4월 상하이 전역이 제로 코로나 정책에 따라 봉쇄되고, 봉쇄가 몇 개월에 걸쳐 지속되면서 상하이 시민들의 분노는 커질 수밖에 없었다. 봉쇄와 그에 따른 불만은 상하이에 국한되지 않았다. 5월 중순부터는 베이징의 대학 캠퍼스마다 항의 시위가 일어나기도 했다. 4~5월 상하이와 베이징 대학가의 시위는 플랫폼C의 지난 기사제로 코로나와 캠퍼스 봉쇄에 맞선 중국 대학생들의 저항에서 소개한 바 있다.

11월 초, 중국 정부는 이른바 '최적화 방역 정책’에 따른 20개 조를 발표했다. 이 중에서 4조는 기존 방역지침이 위험구역 구분을 고-중-저 세 가지로 나눈 것에서 ‘중위험 구역’ 구분을 없앤 결정이었다. 밀접 접촉자에 대한 관리 기간도 기존 7+3일에서 5+3일로 줄였다. 어떻게 보면 중앙정부 차원에서는 전반적인 통제 수위를 낮추는 것에 초점을 맞추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문제는 중국이라는 나라가 너무 크고, 지방정부는 심각하게 관료화되어 있으며, 중앙의 눈 밖에 나지 않기 위해 지침을 과도하게 집행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는 점이다.

이 조치는 지방정부로 내려가면서 역효과를 낳았다. 가령 상하이시와 후난성에서는 밀접 접촉 후 5일 미만일 경우 공공장소 출입이 불가능하도록 바뀌었다. 베이징 차오양구에서는 수많은 주거단지를 ‘임시 관리 통제 구역’으로 지정해버렸다. ‘20개 조’를 정확히 따르는 것보다 지나친 방침이었다. 인구 3천만 명에 달하는 충칭시도 도시 봉쇄 상태에 들어갔다. 더구나 신장위구르자치구의 경우 이미 8월부터 봉쇄가 지속되었고, 현지 주민의 경우 중간에 하루 이틀을 제외하고는 100일이 넘도록 집 밖으로 나가지 못했다. 등교, 출근 등 모든 외출이 불가능했기에 불만은 매우 컸다.

우루무치 화재 참사

앞서 일어난 시위들은 ‘백지운동’(혹은 ‘백지혁명’)의 전초전에 불과했던 듯하다. 시위의 도화선은 11월 24일 중국 대륙의 북서쪽 변두리에 있는 신장위구르자치구 우루무치에서 벌어졌다. 24일 저녁 7시 49분, 우루무치시 톈산구(天山区) 한복판의 아파트 건물에서 화재가 발생했다. 건물 15층에서 발생한 불길은 금세 17층까지 번져 올라갔고, 연기는 21층까지 찼다. 100일 넘게 봉쇄되어 주거단지 밖으로 나가지도 못했던 주민들이 탈출하지 못한 채 목숨을 잃었다. 화재는 밤 10시 35분경이 되어서야 진압됐지만 적어도 10명이 사망하고, 9명이 연기 흡입으로 인한 폐 손상을 입은 것으로 알려졌다.

엄격한 건물 봉쇄에 따른 화재 참사의 위험은 이미 여러 차례 경고된 바 있다. 4월 상하이 봉쇄 시기에도 몇 차례 화재 사건이 일어났고 이때마다 시민들은 위험에 처했다. 게다가 우루무치시는 지난 8월 10일부터 제로 코로나 정책에 따른 도시 봉쇄를 경험했다. 봉쇄에 대한 불만이 치솟던 10월 말, 허난성 정저우에 위치한 폭스콘 공장에서 노동자들의 대규모 파업 및 폭력 투쟁이 발생하자, 적지 않은 시민들이 이에 영향을 받았다.

화재 참사 다음 날인 25일(금) 저녁 8시경, 분노한 우루무치 시민들은 봉쇄망을 부수고 거리로 나섰다. 약 100여 주거단지에서 모여든 시민들은 거리를 행진하면서 정부의 도시 봉쇄를 해제할 것을 요구했다. 완타이선샤인시티(万泰阳光城), 청베이센터 무역시장, 시청 인근의 롱하이 다이아몬드 광장 등 곳곳에서 대규모 시위대가 제각각 항의 시위를 벌였다. 사람들은 공안국 청사와 주거단지의 서비스센터 등 정부 건물로 행진하면서 곳곳에서 경찰과 충돌했다.

거리에 나선 시민들은 “인민을 위해 복무하라!(为人民服务)”, “봉쇄 해제!(解封)” 등 구호를 외치고, <의용군진행곡>을 부르며 행진했다. 가장 충격적인 장면은 신장생산건설병단(新疆生产建设兵团) 12사 청사에서 벌어졌다. 수백 명의 시민이 경찰의 저지선을 뚫고 건물 안으로 진입했다.

🚧신장생산건설병단 : 신장 지역의 개척과 개발, 변방 방어, 행정과 사법 등을 아우르는 조직으로, 당·정부·군대·기업 등을 통일시킨 조직이다. 국공내전 시기 삼구민족군(三区民族军)으로 분류되던 군부대를 민간인으로 전업시키는 과정에서 ‘생산건설병단’으로 전환한 것이 모태다. 당시 병력 20만 명 중 17만5천 명이 생산부대로 편입됐다.

누얼이라는 익명의 한 시민은 각 주거단지의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이웃들을 조직하고 있으며, 참가한 시민이 매우 많다고 밝혔다. 당국은 휴대전화 신호를 차단하는 등 시민 간 통신을 어렵게 만들고 있다. 심지어 일부 지역에서는 인터넷을 차단한 것으로 보인다.

오래된 봉쇄와 고립

사실 신장자치구 민중들은 이미 오래전부터 신장의 장기 봉쇄를 알리는데 애써왔다. 가령 정부 기자회견을 전하는 뉴스 댓글 창을 통해 신장위구르자치구 봉쇄에 관심을 요청하는 댓글들이 자주 달리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당국은 이를 위험 행위로 인식하고 이내 지워버리곤 했다. 지난 11월 12일 한 우루무치 시민은 국무원의 기자회견 라이브 도중 “우루무치”라고 적은 피켓을 들어 보였는데, 그는 곧 공안기관으로부터 ‘공공 질서 교란’ 혐의로 지목되어 기소됐다.

화재 참사 이후 당국은 책임을 떠넘기는 데 급급했다. 건물의 구조가 거주자가 아래위로 탈출하는 것이 가능한 구조라면서 “죽은 이들이 도망치지 않은 것”이라는 억견을 펼쳤다. 25일 저녁 열린 기자회견에서도 정부 인사는 "시민들이 문제를 컨트롤할 능력이 약했기 때문에” 화재가 참사로 이어진 것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 건물에 살던 주민들의 증언은 달랐다. 저위험 구역으로 지정된 곳에서조차 건물 내 이동은 불가능했다는 것이다. 정부 당국의 책임 떠넘기기식 발언과 시민들의 현실에 대한 폭로가 이어지자 중국 전역의 민중은 크게 분노했다. 사람들은 당국의 불합리하고 몰지각한 강제 봉쇄 정책이 이웃의 죽음을 낳았다고 인식했다. 25일 대규모 시위는 이를 배경으로 벌어진 것이다.

위의 정부 기자회견에 대한 중국 네티즌의 반응은 뜨거웠다. 중국에서는 인터넷상의 IP주소를 통해 어느 지역의 네티즌인지 알 수 있는데, 적지 않은 사람들이 신장위구르자치구 주민이 아닌 것으로 나타났다. 한 네티즌은 이렇게 말했다. “신장 사람들은 침묵을 선택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용감하게 나선 사람들을 비웃거나 헐뜯지 마십시오. 그들이 쟁취할 빛은 당신에게도 비칠 것입니다.” 외부인들의 반응이 많이 보이자, 한 신장자치구 주민은 “4개월이 걸려서야 신장 바깥에서 관심을 두기 시작했습니다. 왠지 모르지만 울고 싶습니다.”라고 말했다. 그간 은폐되고 외면받고 신장의 상황이 중국 전역에 알려지기 시작했다는 생각 때문일 것이다.

거리 시위는 상황이 벌어진 직후에 시작됐다. 사람들은 “인간의 존엄을 위해, 인간의 생명을 위해, 인간의 자유를 위해”라고 외쳤다. 한 중화권 언론은 이 같은 풍경이 매우 희귀한 것이었다고 분석했다. 그에 따르면, 그간 신장 사람들은 외부 세계의 동정과 관심을 얻기 어려웠고, 정부가 신장 주민에 대해 강경한 관리 통제를 고집한 점 역시 소위 “탈극단화”를 위한 합리적 수단이라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장위구르자치구 소수민족 탄압을 위해 시작된 이 감시 체제의 벽은 이번 시위로 인해 조금은 허물어졌다. 한족 시민들은 거리로 나가 “인민 경찰은 인민을 위해야 하는데, 당신들은 인민을 탄압하는가!”, “당신은 누구의 자식인가! 누구의 아버지인가! 혹시 양심에 찔리지는 않는가? 오늘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었는지 아는가?”라고 되물었다.

충칭 슈퍼맨

그 시각 우루무치에서 기차로 35시간30분 떨어진 도시 충칭(重庆)에서도 곳곳에서 거리 시위가 벌어졌다.

네티즌들에 의해 ‘충칭 슈퍼맨(重庆超人哥)’이라 불린 한 남성은 흰색 옷을 입은 방역 인원 혹은 보조 경찰에게 소리쳤다. “이 세상에는 오직 하나의 병이 있다! 바로 구속과 가난이다!”, “시 정부가 틀렸다! 그들은 틀린 걸 계속할 뿐이다! 계속하지 않으면 틀렸다는 걸 자인해야 하고, 인정하면 누군가는 책임져야 하니 말이다!”

급기야 경찰은 완강하게 항의하는 이 남성을 체포하려 했다. 하지만 주변에 있던 시민들이 달려와 체포를 저지했다. 이후 한 네티즌에 따르면, 그는 체포되지 않았다고 한다.

며칠 전부터 충칭에서 PCR 검사를 거부하는 시민들이 급증했다. 시민들은 매일 같이 반복되는 강제 검사에 이미 지쳐버렸다. 충칭에서 연이어 발생하는 거리 시위는 이와 같은 대중의 불만을 기반으로 한다.

사람들은 단지 강제 PCR 검사나 봉쇄에 분노한 것이 아니었다. 민중의 불만과 민원을 무시하고, 불만 제기에 대해 국가폭력을 강행하는 것에 대한 불만이었다. 게다가 최근 중국 경제는 내내 내리막길을 걷고 있다. 11월 1선 도시의 주택시장은 지난달보다 더 위축되었다. 주택 거래는 지난달에 비해 30% 넘게 줄었고, 전반적인 내수시장 역시 뚜렷한 수축 국면에 접어들었다. 폭스콘 정저우공장 사태와 우루무치 대중 시위는 지속된 불만과 분노의 결과인 셈이다.

전국 주요 도시로 확산된 시위

주말 베이징에서도 주민들의 시위가 일어났다. 한 주 전 베이징의 확진자수는 연일 1천 명을 초과했는데, 이에 따라 각 구에서는 지역별 봉쇄를 강화하고 여러 주거단지를 폐쇄했다. 그러자 시민들의 저항이 곳곳에서 일어났다. 26일(토) 베이징시 하이뎬구의 칭탕완(清棠湾) 단지에서는 주민들이 봉쇄된 문을 부수고 바깥으로 쏟아져나왔다. 격렬한 반응이 나오자 당국은 ‘고위험 구역 지정’을 해제해버렸다.

이튿날인 일요일 차오양구에 위치한 량마차오(亮马桥) 일대에서는 여러 명의 시민들이 백지를 들고 우루무치에서 목숨을 잃은 희생자들을 추모하고, 당국의 정책에 항의했다. 시위 도중 한 시민이 “이 중에 외부세력이 있다”고 말하자, 다른 시민들이 이를 격하게 반박했다. “혹시 그 외부세력이 마르크스인가요? 엥겔스인가요? 스탈린인가요? 레닌인가요?” 또 다른 한 명은 이렇게 말했다. “그럼 우루무치에서 일어난 화재는 그 외부세력이 낸 것인가요? 구이저우 버스 전복 사고도 외부세력이 일으킨 것이고요?” 이 시위는 월요일 새벽3시까지 이어졌다. 같은 시각 량마허(亮马河) 인근에서도 100여 명이 모여 시위를 벌였다. “구속된 상하이 시민들을 석방하라!” 등 구호를 외치며 상하이 시위에 연대의 뜻을 전했다.

1989년 톈안먼항쟁이 일어났던 톈안먼광장에서도 일련의 시위가 있었다. 최소 100명 정도의 시민들은 “우리는 보편적 사상과 정서를 원한다!”(普世思想、普世情绪), “우리는 자유, 평등, 민주를 원한다!”, “독재는 필요없다!”, “개인숭배를 거부한다!”와 같은 구호를 외쳤다. 이날 한 청년은 톈안먼 항쟁을 모방하기도 했다. 그는 영어로 “It's our duty”라고 답했는데, 이는 1989년 영국 BBC의 베이징특파원이 자전거를 타고 톈안먼광장으로 이동하는 시민에게 “왜 행진에 참여하느냐”고 묻자, 그 시민이 영어로 답한 말이었다.

상하이 도심에서 벌어진 일련의 시위는 전국적으로 가장 규모가 크고 격렬했다. 토요일 낮 우루무치중로(乌鲁木齐中路)란 거리에서는 한 남성이 한 손에 꽃다발을 들고 시민들을 향해 행동에 나서자고 촉구했다. (우루무치중로 인근 지역은 20세기 초 프랑스 조계지에 속했다. 당시 지명은 ‘알프레드매기길 Route Alfread Magy’이었다.)

“우리에겐 가족들이 있습니다. 그들에게 일이 없습니까? 우리는 두려워 하지 않아도 됩니다. 뭘 두려워 하십니까? 바로 우리의 일을 박탈할까봐 두려워 하는 것이겠죠. 우리의 가족들을 잃을까봐 말이죠. 맞습니까? (맞소!) 그들은 그들의 두려움을 두려워하는 겁니다. 전 달리 방법이 없습니다. 저는 합법적 시민입니다. 저에게는 정당한 권리가 있습니다. 안 그렇습니까? 말씀해보십시오 여러분! 맞나요 아닌가요? (맞습니다!) 우루무치에서 열 명이 죽었습니다. 그들은 누가 죽인 겁니까? 마음 속에서 모두 분명히 알고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맞습니까? (맞습니다!)”

그의 용기넘치는 연설이 끝나기 무섭게 사복경찰 등이 들이닥쳐 그를 폭력적으로 체포했다. 인근에 있던 많은 시민들이 체포를 저지하려고 모여들었지만, 도리가 없었다. 그날 밤, 이 현장에 다시 수백 명의 사람들이 모여들어 A4용지를 들고 희생자들을 추모했다.

시위에 참가한 시민들은 “신장 봉쇄를 해제하라!”, “자유를 달라!”, “공산당은 물러나라!”, “시진핑은 퇴진하라!” 등 과격한 구호를 외쳤다. 한두 명의 사람이 온라인상에서 외치는 게 아니라, 도시 한복판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이런 구호를 외치는 것은 매우 희귀한 일이다. 이에 대해 어떤 사람들은 1989년 톈안먼항쟁 이후 33년에 다가온 역사적 순간이라고 평가했고, 또 누군가는 일부 급진주의자들이 그런 구호를 외쳤지만 대중적으로 퍼지기엔 한계가 있다고 말했다. 이날 저녁 이 거리에서 체포된 시민만 경찰버스 2대를 가득 채웠다.

하지만 밤 10시가 되자 시민들은 다시 자발적으로 이곳으로 모여들었다. 누군가는 “11월 24일 우루무치에서 죽은 이들에게 안식을”이라고 적힌 피켓을 들고 있었고, 또 누군가는 촛불과 꽃송이를 들고 앞으로 나아갔다. 시위대 규모가 점차 늘어났고, 새벽 4시까지 사람들은 흩어지지 않았다.

월요일이 되자 상하이 지하철 안에서는 시민들을 대상으로 한 휴대폰 불심검문이 자행됐다. 해외의 전문가들은 앞으로 중국 정부가 시민들을 분리해 일부는 강하게 억압하고, 방역 정책은 느슨하게 풀어나가면서 운동을 와해시키려 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간의 패턴을 볼 때 이는 타당성이 있는 예측이다. 하지만 전문가들 누구도 이번에 발생한 전국적 규모의 시위를 예상하지는 못했다.

11월 26~27일 주말 사이 시위가 발생한 주요 도시 [端传媒]
11월 26~27일 주말 사이 시위가 발생한 주요 도시 [端传媒]

91개 대학에서 시위

베이징의 칭화대학과 베이징대학 등에서 학생들은 백지를 들고 곳곳에서 침묵 시위를 벌이거나 구호를 외쳤다. 칭화대학 캠퍼스에는 수백 명의 학생들이 모여들어 “민주법치”, “표현의 자유” 등 구호를 외치고, <인터내셔널가>를 불렀다. 학생들은 저마다 짧은 문구를 적은 백지를 들고 있었다. 한 학생은 “광대가 섹스했다는 사실은 천하가 알지만, 인간의 고통은 아무도 모른다(戏子嫖娼天下知,人间疾苦无人晓)”고 적었고, 또 다른 학생은 “11월 24일 우루무치 화재 참사를 깊이 통감하고, 희생자들을 추모합니다”고 적었다. “일어나라, 노예이고 싶지 않은 사람들이여!”라는 구호도 있었다.

광저우에 위치한 화난농업대학에서는 기숙사 건물 안에 있는 대학생들이 일제히 광둥어로 《海阔天空》(해괄천공)이라는 노래를 부르며 시위하기도 했다. 이 노래는 1993년 홍콩의 록밴드 비욘드(Beyond)가 부른 유행가다. 2014년 홍콩 우산운동 시위 때나 2019-20년 범죄인 송환조례 반대운동 시기에도 시위대들이 즐겨 불렀다. 이는 베이징보다는 홍콩과 더 가까운 광저우 청년들의 정서를 반영한다.

칭화대학 시위
칭화대학 시위
난징미��디어학원 시위
난징미디어학원 시위

난징전매학원(南京传媒学院)에서도 대규모 학생 시위가 일었다. 26일 밤 수백 명의 학생들이 캠퍼스 종루 앞에 모여들었다. 이들은 백지를 들고 스마트폰 라이트를 켜고 흔들면서, “인민 만세! 희생자들에게 안식을!”이라고 외쳤다. 학생 시위가 일자 이 학교 총장이 나타나 해산을 시도했다. 총장은 “너희들이 지금 당장 해산할 경우 아무 책임을 묻지 않겠다”고 협박했다. 그러자 학생들은 “머리를 들어 석자이면 천지신명이 있습니다!(举头三尺有神明)”라고 외쳤다. 그러나 총장은 “지금 너희들의 행동은 나중에 대가를 치르게 될 거라고!”라며 소리쳤다. 이내 한 학생이 반박했다. “중국은 이 모든 것들에 대해 대가를 치르게 될 겁니다!”

이처럼 이번 ‘백지운동’에서 대학생들이 운동의 주체로 나서고 있다. 언론들의 보도에 따르면, 베이징 시내 17개 대학, 산둥성 11개 대학, 광둥성 10개 대학 등 전국 91개 대학에서 항의 행동이 있었다. 베이징에는 명문대학들이 몰려있고, 산둥은 교육의 고장으로 유명하다. 광둥성은 중국에서 전체 인구수와 청년층 비율이 가장 높은 지역이다. 대학가 시위가 확산되자 당국은 조기 방학이나 강제 귀향 조치를 서두르고 있다. 대학생 대부분이 학내 기숙사에서 생활하기 때문에 귀가 후 학교로 오지 않아도 될 경우 대학가 시위가 느슨해질 것이란 생각 때문이다. 칭화대학을 비롯한 베이징 시내 여러 대학들이 30일 오전을 기해 귀향 통보를 내렸다.

중국 대륙 대학 시위 현황도 [端传媒]
중국 대륙 대학 시위 현황도 [端传媒]

백지운동이 계속될 수 있을까?

정치활동이나 표현의 자유 문제에 있어 자유롭지 않은 중국 사회에서 백지를 들고 시위한다는 행위는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구호가 적힌 플래카드를 들고 있을 경우에는 쉽게 체포되기 때문에 사람들은 백지를 들고 침묵하는 시위 방식을 택했다. 중국의 한 논평가는 이를 두고, “마침내 중국인들이 저항의 표상을 찾아냈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즉, ‘백지’가 해바라기운동의 해바라기, 우산운동의 우산과 같은 상징물이 됐다는 것이다. 물론 지금 중국에서 일고 있는 시위에 ‘색깔혁명’ 성격이 있다고 단정짓기는 어렵다.

11월 28일과 29일 이틀 동안에도 국소적인 시위들이 이어졌다. 29일 밤 광저우 하이주(海珠)구 허우자오촌(后滘村)에서는 경찰과 시민들 간 강경 대치가 이어졌다. 경찰은 최루탄을 투척했고, 시민들은 맥주병을 던지며 맞섰다. 선전 도심과 베이징 쓰통차오에서도 다시 시위가 시도됐지만, 경찰의 완강한 진압으로 무산됐다.

30일에 이르자 거리는 훨씬 소강된 모습이다. 중앙정부는 내내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다. 반면 베이징시와 우한시 내의 여러 지역에서는 일요일과 월요일을 거치면서 봉쇄 완화에 접어들었다. 불만이 강한 지역들에 대해 봉쇄 조치를 조금씩 완화하면서, 동시에 시위는 엄격하게 진압한다는 방침으로 보인다. 심지어 경찰은 최근 시위 과정에서 각종 정보가 공유되고 있는 텔레그램방들에 침투하는가 하면, 도심 현장에서는 시민들의 스마트폰을 임의로 불심검문하고 있다. 그간 집회들에서 수집된 많은 얼굴정보가 앞으로 개별적인 조사 작업에 활용될 것으로 보인다.

중앙정법위원회는 11월 28일 전체회의를 열고, “갈등과 분규를 적시에 완화하고, 인민 대중의 실질적인 어려움을 해결하도록 돕겠다”며, “적대세력 침투 파괴 활동과 사회질서를 교란하는 위법 범죄행위를 단속하고 국가안전과 사회안정을 단호히 수호하겠다”고 강조했다.

중화권의 여러 평론가들은 저마다 다른 해석을 내놓고 있다. 일부는 전국적인 시위에도 불구하고 제로코로나 정책을 바로 취소해버리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이것이 대중의 요구를 받아들이고 후퇴하는 것으로 여겨질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전국 곳곳의 제로코로나 봉쇄는 하나둘씩 풀리고 있다. 결국 제로코로나 봉쇄는 풀고, 적극적인 시위 가담자들에겐 탄압 강도를 높이는 방식으로 대중 행동을 분리해나갈 것으로 보인다.

당국의 이러한 조치는 당장의 시위 동력을 약화시킬 수 있다. 하지만 중국 민중은 최소한 한 가지 사실을 확인했다. 많은 사람들이 분노와 슬픔을 갖고 있고, 현재의 정치·경제 상황에 대해 큰 불만을 갖고 있다는 것. 그간 강한 통제 앞에서 용기를 내는 것을 어려워했지만, 특별한 계기가 생기고, 모두가 함께 그 선을 넘어설 때 거리로 나가 무엇이든 외칠 수 있다는 것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