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와 일상을 지키는 오키나와 평화행진, 2천300여 명 참가
2024년 6월 4일
플랫폼c 활동가는 다른 한국인 참가자들과 함께 [2024년] 5월 17~20일 3박4일 간 오키나와에 다녀왔다. 이 중 오키나와 평화행진 참가기를 공유하고자 한다.
오키나와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오키나와에 대해 아는 것이라고는 그곳이 에메랄드빛 산호바다와 야자수가 가득한 아름다운 휴양지라는 사실, 그리고 거대한 미군 기지 가 있다는 점 정도였다. 일찍이 1970년, 일본의 소설가 오에 겐자부로는 <오키나와 노트>라 이름붙여진 르포르타주를 통해 오키나와 민중의 분노와 그곳의 사회운동에 대해 진지한 성찰을 보여준 바 있다.
하지만 책이나 유튜브 클립만으로 어떤 사회에 대해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몇 번의 역사기행과 직접적인 교류의 기회들, 그리고 무엇보다 투쟁의 현장들에 드나들며 알게 된 가장 중요한 점이 하나 있다면, 두 발이 그 땅을 밟을 때, 그리고 사람과 사람이 만날 때 진정한 이해의 시야가 열리고, 진짜 연대가 시작된다는 사실이다.
이번 오키나와행은 기지평화네트워크(군산미군기지우리땅찾기시민모임, 열린군대를위한시민연대, 평택평화센터, 강정친구들 등)의 오키나와 방문 소식을 접하면서 시작됐다. 한국에서의 군사 기지 반대 행동을 펼쳐온 이 활동가들은 오키나와의 반기지 평화운동과 오랜 시간 교류해왔다. 매년 5월 오키나와 평화행진에 참가하기 위해 적지 않은 활동가들이 오키나와로 향했고, 반대로 오키나와 활동가들도 평택이나 군산, 제주 등을 찾아왔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인해 몇 년간 끊겼던 이 교류가 수년만에 재개된다는 소식에 뒷꽁무니라도 잘 쫓아다니고 싶어 사비를 탈탈 털어 합류하게 된 것이다.
5월 17일, 오키나와에 도착하자 곧바로 나하 시내에 위치한 류큐신보(琉球新報) 건물로 향했다. 이번 오키나와행에 동행하기로 한 두 활동가(각각 국제전략센터, 건설노조 소속)와 해후해 오키나와식 소바를 먹는 것으로 일정을 시작했다.
첫 일정은 류큐신보홀에서 열린 오키나와 평화행진 결단식(結団式, 행진’단’을 ‘결’성하는 자리)이었다. 이 자리에는 이튿날 있을 평화행진에 참가할 인원 중 약 670명이 함께 했는데, 오키나와와 일본 각지의 노동조합과 평화운동단체에 소속된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그간 오키나와 미군기지 반대운동이 경과해온 역사와 이번 행진의 정당성을 발제하고, 이어서 후반부에는 이 행진을 기획하고 조직해온 다양한 사람들이 결의와 포부를 밝혔다.
한국에서 온 참가자들의 연대 인사도 있었다. 기지평화네트워크 소속 활동가들을 비롯한 참가자들은 한국어와 일본어로 “동아시아에서 미군기지는 필요없다”, “바다를 넘어 평화의 손을 잡자”고 적힌 현수막을 들고, 결단식에 모인 수백 명의 사람들에게 연대의 인사를 건넸다.
결단식이 끝나기 무섭게 우리는 기지평화네트워크 활동가들을 따라 기노완시(宜野湾)에 위치한 카카즈고대공원(嘉数高台公園)으로 향했다. 카카즈고대는 해발고도 90미터 남짓의 작은 동산 위에 있는 전망대다. 이곳에 오르면 북쪽으로 펼쳐진 미군 후텐마(普天間) 공군기지를 한 눈에 볼 수 있다. 게다가 이곳은 1945년 4월 1일 오키나와에 본격 상륙한 미군과 일본군 사이에 대규모 격전이 벌어진 전투지이기도 하다. 이곳에서 보름이 넘게 지속된 공방전 끝에 일본군 6만4천 명, 미군 1만2천여 명이 죽거나 다쳤다고 한다.
카카즈고대 위에는 다양한 추모비들이 세워져 있는데, 그 중에는 조선인 전몰자 위령탑도 있었다. 이곳에서 486명의 조선인들이 목숨을 잃었다. 강제부역을 위해 끌려온 노동자나 군무원들이 대부분일 것이다. 이 전투에서 목숨을 잃은 것은 대부분 민간인이었는데, 당시 일본군은 열세에 처한 전투를 극복하기 위해 오키나와의 평범한 민간인들을 총알받이로 썼다고 한다.
전망대에서 내려가면서 인근 지역에서 살아온 사람들의 소소한 역사에 대해 들을 수 있었다. 이렇게 19명의 한국인 활동가들을 가이드해주며 친절히 설명해준 이들은 오키나와에서 평생 미군기지 반대 운동을 펼쳐온 활동가들이었다. 한국 사회운동과의 교류로 통해 만들어진 ‘한-오키나와 민중연대’(이하 ‘민중연대’)는 한국의 평화운동가들이 오키나와를 찾거나, 반대로 오키나와 활동가들이 연대차 한국을 찾을 때 일정 협의와 진행을 도맡는 상근자 없는 평화운동그룹이다.
이튿날 아침 이번 방문의 주요한 목적인 평화행진에 참가했다. 이번 행진은 후텐마 기지를 한바퀴 도는 코스로 이뤄졌는데, 2300명의 대오가 주어진 시간 내에 행진을 마쳐야 하는 만큼 코스를 반으로 나누어 남쪽과 북쪽에서 각각 진행됐다. 이른 아침 출발지점에 모인 2300명의 참가자들이 행진을 시작하자 설레는 마음 으로 대열에 함께 했다. 나는 팔레스타인 깃발을 들고 행진했는데, 오키나와 평화운동과 팔레스타인 해방운동이 연결되어 있다고 여기기 때문이었다. 대열 한 가운데에 팔레스타인 깃발이 섞여 있는 것에 대해 아무도 어색하게 여기지 않는 듯했다.
일본의 항복으로 2차 세계대전이 끝나기 무섭게 오키나와는 미군정의 통치하에 들어갔었다. 수백년 동안 ‘류큐왕국’(1429~1879년)이라는 독립된 정치체제에서 살아온 류큐(오키나와) 민중은 1879년 ‘류큐 처분’에 의해 일본에 복속됐다. 이에 대해 류큐의 상층 엘리트들은 구국청원운동을 펼쳤지만 1895년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면서 좌절된다. 하지만 오키나와에서의 식민주의는 일본으로의 완전한 동화라는 역사로 귀결되지 않았다. 20세기 초부터 사회주의운동과 학생운동 등 활발한 사회운동이 펼쳐졌고, 1940년 일본 정부가 류큐어 사용을 금지하고 동화 정책을 펼치자 이에 맞선 운동이 벌어지기도 했다. 그러니 식민주의에 맞선 팔레스타인 민중의 저항은 오키나와의 역사의 투쟁과 연결될 수 있다.
행진을 지속하는 과정에서 우익 단체들의 산발적인 훼방과 ‘헤이트스피치’도 많았다. 한국의 극우단체들과 흡사한 이름을 가진 이 우익 그룹들은 ‘욱일기’가 그려진 방송차에 올라타 내내 행진 대오 를 따라다니며 온갖 헛소리를 내뱉었다. 특히 우리가 한국인들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자 “너희 나라로 돌아가” 등의 발언을 내뱉었다. 현지 참가자들은 이런 헤이트스피치가 익숙하다는 듯 전혀 반응하지 않았는데, 이에 반해 한국인 참가자들은 손가락으로 야유하는 포즈를 보이거나 ‘우~’하고 소리치는 등 대응했다. 그런 반응으로 이들이 변화할리는 만무하지만 우리는 이것이 집회 대오의 사기에 영향을 준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오키나와 평화행진은 1972년 5월 15일 오키나와가 미군의 직할지에서 일본으로 복귀한 시기에 맞추어 오키나와에 위치한 모든 미군 기지의 철거를 요구하는 취지에서 매년 개최되어왔다. 당시 오키나와 민중들은 전후 27년 동안 미군정에 복속되어 있던 오키나와가 평화헌법을 제정해둔 일본에 복귀하게 되면, 이곳에 미군기지가 남아있을 명분이 사라지기 때문에 일본으로 귀환하자는 운동을 펼쳤었다. 1960년대 일본과 오키나와에서는 미국의 베트남 침공에 항의하는 반전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됐었다. 이런 운동의 기반으로 1966년 오키나와 반환이 검토되기 시작했다. 오에 겐자부로의 오키나와 방문과 연대는 바로 이 뜨거웠던 시기에 이뤄졌었다. 오키나와 민중의 투쟁으로 1972년 복귀가 이뤄졌지만, 불행히도 평화헌법의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고, 오키나 와의 미군기지는 존속됐다.
전 세계 80개국에 약 750개의 기지를 두고 있는 미군은 일본에만 5만3973명의 군인을 배치하고 있으며, 그 중 4분의3은 일본 영토의 0.6%에 불과한 오키나와현에 있다. 지난 4월 10일 열린 미·일 정상회담에서 미국은 오커스(AUKUS, 미·영·호주) 협력, 미·영·일 3자 군사 훈련, 미·일·필리핀 안보 협력 강화 등 역내 동맹·우방국들을 규합해 중국을 해상에서 에워싸는 구상을 발표했다. 이에 따라 주일미군 사령부를 한·미 연합사령부와 유사한 지위로 개편할 것이라는 예측이 대두되고 있다. 이 자리에서 미국은 일본 자위대의 적 기지 공격 능력 확보와 통합작전사령부(J-JOC) 연내 창설에 대한 지지 역시 재차 밝혔다. 일련의 조치는 오키나와는 물론이고 동아시아 전체를 보다 극심한 군사적 긴장으로 몰아넣을 수밖에 없다.
후텐마 기지의 즉각적인 폐쇄와 반환을 촉구한 평화행진이 끝나고 전체 대오가 기노완 시립 그라운드에 모여 ‘평화와 생활을 지키는 현민대회’를 진행했다. 이 자리에는 한나절 동안 행진에 함께 한 2300여 명의 사람들이 참가한 가운데, 다마키 데니(玉城デニー ) 오키나와현 지사 등 오키나와에서 모든 미군기지를 철거해야 한다는 입장에 서 있는 정치인들도 함께 했다.
이날 집회에서 참가자들은 “지난 몇 년 난세이제도를 중심으로 진행되고 있는 군비 증강 추세를 저지하고, 현민의 생활과 평화를 지키기 위해 기지가 없는 오키나와, 전쟁이 없는 세계의 실현”을 다짐했다. 주최측인 평화행진 실행위원회의 코오치 하지메(幸地一) 공동대표는 하루 전인 5월 17일 주일미국대사가 요나쿠니쵸 등을 방문한 것을 비판하며, “일본이 현재 전쟁의 위기에 처해있으니 우리는 경종을 울려야 한다”고 말했다. 다마키 데니 지사도 발언을 통해 “광대한 미군 기지의 존재가 오키나와의 진흥의 장해가 되고 있다”며, 최근 군사적 긴장이 심화되고 있는 동아시아 정세를 근거로 “오키나와전에서 얻은 교훈을 차세대에 전해 평화를 희구하는 오키나와의 마음·간심을 세계에 발신하자”고 호소했다. 대회 막바지에는 한국에서 온 27명의 참가자들이 무대 앞으로 나가 연대의 인사를 했는데, 기지평화네트워크를 대표해 열린군대를위한시민연대의 신재욱 활동가가 발언했다. 발언에서 신재욱 활동가는 “역사를 계승하고 함께 평화의 길을 걸어가자”고 호소했다. 현민대회 마지막 선언문에서 참가자들은 일본 정부가 우루마시 이시카와에서 계획한 군사 훈련장 정비를 주민의 반대 운동으로 저지시킨 바 있는 경험을 상기하면서, 일본을 ‘전쟁국가’로 변모시키려는 기시다 정권의 폭주를 중단시키고, 개헌을 저지하기 위 해 평화헌법을 지키자고 결의했다.
대회 막바지에는 한국에서 온 27명의 참가자들이 무대 앞으로 나가 연대의 인사를 했는데, 기지평화네트워크를 대표해 열린군대를위한시민연대의 신재욱 활동가가 발언했다. 발언에서 신재욱 활동가는 “역사를 계승하고 함께 평화의 길을 걸어가자”고 호소했다. 현민대회 마지막 선언문에서 참가자들은 일본 정부가 우루마시 이시카와에서 계획한 군사 훈련장 정비를 주민의 반대 운동으로 저지시킨 바 있는 경험을 상기하면서, 일본을 ‘전쟁국가’로 변모시키려는 기시다 정권의 폭주를 중단시키고, 개헌을 저지하기 위해 평화헌법을 지키자고 결의했다.
집회가 끝나고 한 중년 여성이 팔레스타인에 연대하는 피켓을 들고 다가왔다. 팔레스타인 깃발을 들고 있는 나를 보고 함께 사진을 찍자는 제안이었다. 내가 한국에서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식민 점령과 제노사이드에 맞선 연대에 함께 하고 있다고 말하자, 영어로 화답하며 각자의 자리에서 연대를 이어가자고 말했다. 지난해까지 영어 교사로 일한 그는 은퇴 후 팔레스타인에 연대하는 활동을 펼치고 있다고 한다.
집회가 끝나고 오후에는 한국인 참가자들의 숙소이기도 했던 기노완 세미나 하우스에서 한-오키나와 민중연대 심포지엄이 열렸다. 약 60여 명의 참가자들이 행사장을 가득 채운 이날 심포지움에서는 이시가키섬을 비롯해 난세이제도 일대에서 벌어지고 있는 미사일 기지 건설 흐름과 이것에 맞선 주민들의 투쟁에 대한 발표, 평택 미군기지 확장이전 반대 투쟁의 결과로 탄생한 평택평화센터의 지난 활동들에 대한 소개, 한국전쟁 시기 미군의 병참 역할을 했던 오키나와의 역사, 유엔사 재활성화가 동아시아 지역에 가져올 위험에 관한 신재욱 활동가의 발표가 이어졌다. 오키나와 활동가들은 평택평화센터가 추진하는 ‘평택시 주한미군기지 및 공여구역 환경사고 예방 및 관리 조례’ 제정에 대해 매우 놀라워 하며 질문을 던졌다. 긴 시간의 행진과 집회 이후 3시간 넘게 토론이 이어져 매우 피곤했지만, 참가자들 모두 열의있게 오키나와와 한국의 현 상황에 대해 이야기하고, 앞으로 오키나와-한국의 민중연대가 왜 지속·강화되어야 하는지에 대해 토론할 수 있는 뜻깊은 시간이었다.
3일차인 19일에는 오키나와 활동가의 가이드로 곳곳에 위치한 전쟁과 학살의 흔적, 나아가 평화의 가치를 기억할 수 있는 장소들을 돌 수 있었다. 가데나 공군기지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가데나초 전망대, 오키나와 전투 당시 많은 민간인이 목숨을 잃은 치비치리 동굴과 시무쿠 동굴, 그리고 강제동원된 조선인 노동자들의 넋을 기리는 ‘한의비’, 최남단 오키나와평화공원 등을 차례로 돌았다. 오키나와평화공원에는 큰 규모의 추모비가 세워져 있는데, 이곳에는 각 국가별로 오키나와 땅에서 목숨을 잃은 이들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오키나와 전투에서 죽은 24만여 명의 넋을 기리기 위한 것이었다. 이곳에 새겨진 조선인들의 이름은 남과 북을 합쳐 500여 명 정도였는데, 실제로는 1만여 명이 오키나와에서 목숨을 잃은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고향에서 남쪽으로 멀리 떨어진 섬에서 그들은 어떤 날들을 보냈을까? 이름을 기억할 수 없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떻게 기억되어야 할까? 최근 동아시아 각국은 군비 경쟁에 열을 올리고 있다. 무기 확산은 평화뿐만이 아니라 기후위기에도 심각한 도전이 될 수밖에 없다. 이를 저지하기 위한 행동에는 국경이 있을 수 없다. 동아시아 공동의 평화 실천이 절실히 요구되는 이유는 이 때문이다. 더 많은 발길이 이어나가는 것, 그리고 한국과 오키나와의 평화운동이 서로 더 많은 연결을 구축하고, 함께 연대하는 것만이 잊혀진 이들을 기억하고, 우리의 평화를 지킬 수 있는 중요한 방법임을 기억해야 한다.
글 : 홍명교 (플랫폼c 활동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