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릭스 확대는 대안적 세계질서의 마중물이 될 수 없다
2024년 1월 13일
지난 2023년 8월22일부터 24일 남아프리카공화국 요하네스버그에서 열린 브릭스(BRICS) 정상회의에서 사우디아라비아, 이란, 아랍에미리트, 이집트, 에티오피아, 아르헨티나 등 6개국의 신규가입이 결정됐다. 중국에 의해 제안된 회원국 확대가 현실화된 것이다. 이중 아르헨티나는 11월 대통령에 당선된 극우 정치인 하비에르 말레이가 가입 취소를 밝혀 제외됐다. 하지만 인도네시아와 알제리, 카자흐스탄, 베 네수엘라 등 다른 개발도상국들도 가입 의사를 보이고 있어 브릭스는 전환점을 맞게 됐다.
본래 브릭스는 2000년대 초 미국 월스트리트 금융계가 자신들의 유망한 투자 대상으로 인식한 신흥 시장 브라질(Brazil), 러시아(Russia), 인도(India), 중국(China)을 지칭하는 것이었다. 처음부터 이런 국제기구 성격을 띠는 것은 아니었다. 냉전 해체 이후 4개국이 빠르게 성장하면서 자본 증식의 잠재성을 갖고 있다고 본 것이다. 이런 기대(?)에 호응해 4개국과 남아프리카공화국은 2009년 정상회의를 개최했고, 이듬해 정식으로 브릭스(BRICS)를 결성했다.
이처럼 최초의 동기는 시장 확대에 있었지만, 일단 출범하게 되자 브릭스는 국제질서의 다극화를 통해 서방이 지배하는 국제질서와 거버넌스를 개혁한다는 목표를 천명하면서 자신의 정치적 존재감을 키워나갔다. 하지만 지난 14년 동안 브릭스는 별다른 성과를 달성한 적이 없다. 그 때문에 이번에 브릭스 확장이 놀랄만한 뉴스로 보이는 것은 사실이다. 일단 그것이 미국-서방의 패권에 대항하는 연합의 확장을 지칭하는 것처럼 비춰졌고, 중국-러시아 연합 대 미국-서방 연합의 진영화가 가속화되는 것 아니냐는 전망이 제기됐기 때문이다.
브릭스 회원국들은 미국-서방 중심의 국제 질서의 다른 목소리를 내온 것이 사실이다. 2011년 미국의 리비 아 군사 개입에 반대했고, 미국이 총장직을 독식해온 세계은행과 IMF의 역할을 비판했으며,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개혁을 요구했다. 미국과 서방 동맹국들이 주도하는 국제 질서에 견제 역할을 해온 셈이다. 여기에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본격적으로 대두되기 시작한 ‘신냉전’ 질서에서 아시아와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 등 비서구권 남반구(global south) 개발도상국들의 역할이 주목받으면서, 브릭스 국가들의 활동에 대한 관심도 더욱 커지고 있다. 가령 브릭스 회원국들은 우크라이나에 대한 군사지원 지지로 일관했던 서구의 노선에 반대하며 휴전협상을 적극적으로 요구한 바 있다.
나아가 브릭스 회원국들은 자국 간 교역에서 달러가 아닌 위안화나 자국통화, 혹은 아예 새로운 자체 기축통화로 대금을 지불하는 ‘탈(脱)달러’ 프로젝트 등 미국 주도 세계 경제에서 자신들의 세력과 협상력을 늘려나갈 수 있는 다양한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이에 대해 서방 국가들은 다소 엇갈린 반응을 보이고 있다. 제이크 설리번 미국 국가안보보좌관은 “우리는 브릭스가 미국에 대한 지정학적 경쟁자 같은 것으로 진화할 것으로 보지 않는다”며 평가절하한데 반해,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브릭스 확대는 현재 너무 서방적으로 보이는 세계 질서를 대체하는 대안적 질서를 수립하려는 열망이 있음을 보여준다”고 인정한 바 있다.
오랫동안 미국을 위시한 서방 국가들이 주도하는 제국주의적, 패권주의적, 시장중심적 국제질서에 대해 비판해 온 좌파들도 위와 같은 중국 주도 브릭스 확대가 과연 미국 주도 세계질서에 균열을 내고 새로운 대안적 세계질서의 마 중물이 될 수 있을지 관심을 보이고 있다. 일부 좌파들은 브릭스 확대를 1965년 반둥회의로 대표되는 제3세계 비동맹운동과 견주며 적극적으로 환영하기도 한다. 여기에는 2008년 세계 금융위기 이후 일부 좌파 지식인과 운동 일각에서 보인 중국에 대한 호의적인 평가가 어느 정도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예컨대 조반니 아리기는 본인의 세계체제 분석에 애덤 스미스에 대한 독자적인 해석을 더해, 미국 헤게모니의 쇠퇴 이후 중국이 주도하는 시장경제 질서가 신자유주의 지구화 체제에 대한 대안이 될 수 있다고 분석한 바 있다. 존 벨라미 포스터 역시 본인이 편집장으로 있는 『먼슬리 리뷰』의 여러 특집기사들을 통해 시진핑 집권기 중국의 발전모델을 옹호한 바 있다. 이 외에도 비자이 프라샤드나 중국계로서 서구 사회에서 활동하는 일부 좌파 인사들이 결성한 치아오 콜렉티브(Qiao Collective), 미국의 저명한 평화운동 단체 코드핑크 등이 시진핑 이후 중국의 노선에 대해 사실상의 지지를 보여왔다.
그러나 이런 섣부른 기대에도 불구하고, 브릭스가 지금의 국제 질서에 유의미한 대안을 창출해 내기는 힘들 것으로 보인다. 우선 가장 큰 문제는 회원국들간의 광범위한 이해관계 충돌 문제가 있다. 비교적 단일한 이해관계를 구축하고 있는 G7 등 미국이 주도하는 서방 국가들과는 다르게, 브릭스 국가들은 서로 간 입장 차이가 크다. 예컨대 중국과 러시아는 미국이라는 공동 적국을 맞대고 경제 협력과 안보 협력을 모두 강화하고 있지만, 미국이 안보와 경제 분야에서 중국을 고립시키기 위해 출범시킨 쿼드(QUAD)나 인도-태평양 경제 프레임워크(Indo-Pacific Economic Framework) 창립회원국인 인도와 2019년 미국의 비(非)나토 동맹국 브라질은 이것과는 한참 벗어나 있다. 특히 인도는 근래 중국과 여러 차례 국경 분쟁을 경험하고 있고, 제조업 분야에서 중국을 제치고 새로운 ‘세계의 공장’ 이 되기 위해 만만의 준비를 갖추는 중이다. 이는 새롭게 추가 가입하게 된 중동과 아프리카 지역 5개국도 크게 다르지 않다. 사우디아라비아와 이란, 아랍에미리트는 수니파-시아파 패권 경쟁과 이스라엘과의 관계개선 문제로, 이집트와 에티오피아는 수자원 분배와 관련한 갈등으로 대립한 경험이 있거나 현재도 대립 중이다.
보다 본질적인 문제는 이들에게 과연 미국 주도 세계질서에 대한 대안을 자처할 자격이 있느냐는 것이다, 실제 브릭스 기존 회원국 5개국과 신흥 가입국 5개국은 모두 미국 주도 글로벌 자본주의 질서에 깊게 연결되어 있다. 당장 브릭스 회원국들 중 가장 큰 경제 규모를 자랑하는 중국만 하더라도, 1990년대 이후 미국과의 협력관계 없이는 현재와 같은 높은 수준의 경제성장을 이룰 수 없었다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이와 관련해 홍콩 출신 정치경제학자 훙호펑은 미중 간 신냉전은 서로 다른 경제체제 간 경쟁이 아닌 체제 내에서의 경쟁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역설한 바 있다. 중국은 미국과 큰 규모의 교역을 유지하고 있으며, 미국의 재무부 채권을 다수 소유한 채 미국의 신용등급을 유지시켜주고 있다. 이들이 국내적으로 추진하는 경제적 개발주의, 정치적 권위주의 프로젝트는 월스트리트 금융자본과 실리콘벨리 빅테크 기업들의 파트너십에 크게 빚지고 있다. 위에 명시된 모든 근거들을 미뤄 짐작해볼 때, 브릭스 회원국들의 목표는 세계 질서의 교체가 아닌 현상유지 속에서 더 많은 파이를 챙기는 것이라고 보는 게 타당하다. 좌파가 중국 정부의 이데올로기 전략에 조응하는 것은 ‘활용’이 아니라, 순진한 망상에 가깝다.
그밖에도 이들 국가들은 미국이 주도하는 ‘테러와의 전쟁’에 협력해왔다. 중국은 신장 위구르 자치구의 감시체계 설립을 위해 미국과 중국 정보기관들로부터 ‘대테러 작전’과 관련된 노하우들을 전수받았으며, 이라크 전쟁에서의 여러 전쟁 범죄들로 논란이 된 민간군사기업 블랙워터와 손을 잡고 자국 용병산업 확대에 나서고 있다. 러시아는 체첸과 시리아에서의 군사개입을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에 대항하는 대테러 작전으로 정당화했다. 인도 역시 카슈미르에서의 무슬림 탄압을 비슷한 언어를 사용해 정당화한 바 있다. 사우디아라비아, 아랍에미리트, 이집트, 에티오피아 역시 부시 행정부 때 진행된 CIA의 불법 고문 프로그램과 협력관계를 유지했다. 결국 이들이 원하는 것은 ‘미국 주도’ 글로벌 자본주의-제국주의 해게모니를 변화시키는 것이지, 글로벌 자본주의-제국주의 헤게모니의 작동원리에 도전하는 것이 아니다.
때로 이들은 미국 주도 글로벌 자본주의 체제에서 자신들의 이익을 수호하는 걸 넘어, 보다 적극적으로 제국주의적인 방향으로 이를 개척해 나가기도 한다. 예컨대 시진핑 치하 중국의 일대일로로 대표되는 확장적 경제 프로젝트의 경우, 남아시아와 아프리카 국가들의 부채위기를 가속화하고 원자재 공급자로서의 역할에 종속시킨다는 지전이 예전부터 지속돼 왔다. 실제 일대일로를 통해 중국 기업들이 진출한 해외 사업장에서는 산업 재해와 임금 체불, 환경파괴가 만연하다. 훙호펑에 따르면 이러한 현상은 “해당 진출 국가의 장기적인 발전 전망보다는 자신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경향”을 보이는 중국 기업들 때문에 더욱 가속화된다.
‘국익’을 위한 패권주의적 경향을 위해 인권과 평화 원칙을 훼손하는 일은 중국 외 다른 브릭스 회원국들도 예외는 아니다. 러시아의 경우 우크라이나 침공은 물론이고 벨라루스 독재정권의 부정선거 옹호, 카자흐스탄의 민주화 시위 이후 군사개입 등 다양한 방식으로 주변 지역에서 패권 확대를 이어나가고 있다. 이외에도 친정부 용병그룹인 바그너 그룹을 활용해 말리와 부르니카파소의 군사쿠데타에 개입하는 등 아프리카의 불안정화와 민주주의 후퇴에도 기여하고 있다. 인도 역시 미얀마 군부를 친인도 성향으로 포섭하고 국내 반무슬림 여론에 불을 비피기 위해 무슬림이 대부분인 로힝야 난민들을 미얀마로 강제 추방한 바 있다. 룰라와 노동자당의 재집권 이후 기후위기 해결을 위한 열대우림 보호를 위해 콩고, 인도네시아와 손을 잡고 '열대우림연합'을 만들 계획을 천명하는 등 남반구 국가들간 정치연대 실험을 이어나가고 있는 브라질, 반아파르트헤이트 투쟁 당시 아프리카민족회의와 팔레스타인해방기구 간 연대의 경험을 바탕으로 팔레스타인에 대한 연대를 이어나가고 있는 남아프리카공화국의 경우에는 조금 다르다고 이야기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들의 경우에도 국내 극우세력의 발흥으로 인한 정권교체의 가능성이나 부정부패로 인한 정치적 혼란 등 변수로 인해 해당 프로젝트의 지속가능성이 분명하지 않다는 한계가 존재한다.
현재 브릭스 합류가 예정되어 있는 중동과 아프리카 국가들의 사정도 크게 다르지 않다. 사우디아라비아와 이란, 아랍에미리트는 2015년 이후 중동에서 격화되고 있는 수니파 대 시아파 패권경쟁을 위해 시리아와 예멘, 이라크 등지에 군사적으로 개입해 민간인 학살과 대규모 난민 발생 등 인도주의적 위기에 기여한 바 있다. 이집트 역시 리비아와 수단의 내전에 자신들에게 우호적인 성향의 군벌들을 지원하는 방식으로 개입한 바 있다. 에티오피아의 경우에는 2020년 이후 진행되고 있는 북부 티그라이인과의 내전에서 80만 명의 사망자와 200만 명의 난민, 각종 전쟁범죄를 낳은 바 있다. 이들이 보다 수평적이고 평화적인 국제질서 구축에 도움이 될 수 없는 이유이다.
우리는 ‘구냉전’ 기의 신흥 독립국들이 주도한 탈식민주의 운동은 단순 지정학적 진영논리의 대립 속에서 특정 세력의 편을 들고 그들의 패권을 수호하는 걸 넘어, 인민해방과 민족자결의 원칙을 중심으로 한 대안적 세계질서의 창출을 목표로 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현실적으로 소련과 중국을 포함한 사회주의 국가들의 원조를 받을 수밖에 없었던 것과 별개로, 비동맹운동 소속 국가들이 중국의 베트남과 캄보디아에 대한 군사개입을 반대하고, 부르니카파소 혁명가 토마스 상카라가 1984년 유엔총회 연설에서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을 비판했던 이유이다. 현재의 브릭스+ 회원국들에게서 이러한 역할을 기대하기는 쉽지 않다.
물론 그렇다고 국제사회에서 중국을 위시한 브릭스 회원국들의 활동이 모두 남반구 개발도상국들에 대한 신식민주의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2000년대 이후 이들 국가들이 성장하며 세계 불평등이 줄어들고 국제사회에서 신흥발전 개발도상국들의 목소리를 높이는 데 어느 정도 도움을 준 것 역시 사실이기 때문이다. 중국 시장으로의 원자재 수출로 인한 이익을 국내 불평등 해소를 위한 각종 복지정책에 투입하여 효과를 본 라틴아메리카 1기 ‘핑크 타이드’ 정부들과 같이, 브릭스 국가들의 경제활동 확대로 인한 이익을 자국 내 진보적 개혁정책의 마중물로 활용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이러한 성과는 단순 특정 국가나 정부의 자선으로 인한 것이 아닌, 해당 국가 민중들의 수년간의 아래로부터의 대중적 투쟁을 통해 얻어낸 것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1965년 아프리카-아시아 인민연대기구회의에 참석한 체 게바라는 연설을 통해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선진국과 개발도상국이라는 두 국가 집단 사이의 불평등한 관계를 만들어내는 것이라면, 설령 그것이 사회주의국가라고 해도 제국주의자의 착취 공범이라고 보지 않을 수 없다”
당시 제3세계운동의 후견인을 자처하던 소련의 패권주의적 진의에 대해 의심을 표명한 이 말은 60년 가까운 시간이 지난 지금도 유효하다. 보다 평등하고 정의로우며 민주주의적인 세계 질서는 특정 강대국의 자선이 아닌, 오로지 세계 민중의 국제연대 정신에 기반한 아래로부터의 대중운동을 통해서만 쟁취될 수 있다.
참고 자료
- 정의길, 「몸집 불린 브릭스, 미국 주도 국제질서 대항마 될 가능성은?」, 한겨레, 2023.09.02.
- Vijay Prashad, 「The BRICS Have Changed the Balance of Forces, but They Will Not by Themselves Change the World: The Thirty-Third Newsletter (2023)」, Tricontinental, 2023 08.17
- Branko Marcetic, 「The BRICS Expansion Isn’t the End of the World Order — or the End of the World」, Jacobin, 2023.08.31
- Anjali Bhatt, 「No One Knows What BRICS Expansion Means」, The Diplomat, 2023.10.04.
- Patrick Bond, 「The Johannesburg BRICS Summit’s Unrealistic Hype」, Rosa Luxemburg Stiftung, 2023.08.17.
- Nils Adler, 「Can BRICS create a new world order?」, Al Jazeera, 2023.08.22.
- Tithi Bhattacharya & Gareth Dale, 「Is BRICS+ an Anti-Colonial Formation Worth Cheering From the Left? Far From It.」, Truthout, 2023.09.13.
- Thomas Sankara, 「Speech before the General Assembly of the United Nations」
- Che Guevara, 「At the Afro-Asian Conference in Algeria」
- 훙호펑, 『차이나 붐』, 하남석 옮김, 글항아리, 2021
- 훙호펑, 『제국의 충돌』, 하남석 옮김, 글항아리, 2022
글 : 김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