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치에우 산티아고 ② | 산티아고에서 『파업전야』 상영회를 열다
2023년 9월 8일
필자는 현재 칠레 산티아고에 체류 중이다. 이곳에서 다양한 사회운동가들을 만나며, 1년여 간의 체류기를 연재할 예정이다. "마리치에우"는 마푸체어로 "백번 천번 이겨내리라"는 뜻이다. 마푸체 투쟁과 칠레 사회운동에서 널리 사용되는 구호다.
산티아고에서의 첫 집회
산티아고에 온 지 한 달이 넘어가고 신학기가 다가올 즈음, 칠레에서의 첫 번째 집회에 나갔다. 칠레 공산당 당사나 노동자연합센터(Central Unitaria de Trabajadores, 노조 연맹조직) 사무실에 연락을 취해 인터뷰를 진행하고 싶다는 생각도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내가 한국 사회운동에 대해 어떤 대표성을 갖지 못하다는 생각에 집회부터 나가보기로 한 것이다.
2019년 칠레에서 일어난 대중 봉기(공식 용어는 '사회적 위기'를 뜻하는 Estallido Social이지만, 좌파들은 '봉기'를 뜻하는 Revuelta를 선호한다) 때부터 칠레 사회운동에 관한 정보를 얻기 위해 소셜미디어에서 몇몇 계정을 팔로우했는데, 그 중 한 계정에서 이탈리아 아나키스트 알프레도 코스피토(Alfredo Cospito)의 석방을 요구하는 집회가 열린다는 공지를 봤다. 설레는 마음을 안고 거리로 나섰다.
알프레도 코스피토는 이탈리아의 정치범으로, 이탈리아 형법 41조 부칙에 반대해 126일째 단식투쟁을 벌이고 있었다. 형법 41조 부칙은 내무부 장관이 지정하는 특정 수감자에 한해서는 여타 형법의 적용을 중지하고 직권으로 처우를 결정할 수 있는 노골적인 정치범 탄압법이다. 그 때문에 이탈리아에선 아나키스트들과 공산당 계열을 막론하고 좌파들의 대대적 항의 시위가 이어졌고, 그 연대의 일환으로 칠레에서도 집회를 연 것이다.
칠레의 집회 분위기는 한국과 사뭇 달랐다. 챙겨간 노조 조끼를 가방 안에 넣고 평상복 차림으로 이탈리아 대사관 앞으로 향했는데, 이미 현장에서는 살수차와 장갑차, 순찰차 여러 대를 비롯해 다수의 경찰들이 골목마다 배치되어 있었다. 어떤 경찰은 아시안인 내게 "여기서 뭐 하냐"고 캐묻기도 할 정도로 경비가 삼엄했다.
주변을 좀 더 크게 거닐면서 시위대로 추정되는 사람들을 찾았다. 그러다가 쿠바 국기가 그려진 모자를 쓰고 있는 사람을 발견했는데, 그의 주변으로 사람들이 조금씩 모여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나 역시 그쪽으로 갔다. 내가 사람들에게 "한국에서 왔다"고 밝히고, 말을 건네자 조금씩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나는 이 집회가 아나키스트와 관련된 집회였기 때문에 아나키스트들이 대다수를 차지할 것이라 생각해 혹시 칠레에 아나키스트 조직이 있는지 물었다. 한데 그들은 자신들에겐 조직이 없고, 집회마다 마주쳐 친분을 형성한, 그러나 서로가 누군지는 모르는 사람들이라고 답했다.
얼마 후 경찰들이 접근해오자, 사람들은 조금씩 흩어져 이동했다. 다른 사람들과 연락을 한 결과, 집회의 본 대오는 다른 방향에 있었다. 이에 나는 그 현장으로 향했고, 이내 집회가 시작됐다.
집회 현장에서 사회자로 보이는 한 사람이 한국의 여느 집회들처럼 앰프와 마이크를 들고 집회 내용을 설명해나갔다. 그들은 규탄문을 낭독하고 난 뒤, 행진을 시작했다. 행진이 시작되자 사람들은 구호가 적힌 현수막들을 양 옆으로 펼쳐 들었고, 행진 대오 선두에 있던 사람들은 집회의 요구안이 담긴 작은 선전물을 뭉텅이로 뿌렸다.
행진을 계속 따라가던 중 한 사람이 다가와 말을 걸었다. 노조 조끼를 입은 나를 보고 한국에서 왔다고 안 것이다. 자신을 '안드레스'(가명)라고 소개한 그는 한국 관련 보도사진에서 이 조끼를 봤다고 했다.
안드레스에게 나는 칠레의 아나키스트 운동이 어떤 식으로 전개되고 있는 지 물었다. 그에 따르면 칠레 아나키스트 운동은 2019년 대중 봉기 이전까지 침체기였다가, 봉기 이후 다시금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다고 했다. 우루과이의 FAU(Federación Anarquista Uruguaya, 우루과이 아나키스트 연맹)에서 영향을 받은 플랫폼주의자(조직 활동을 중시하는 아나키스트들), 아나코-칼리스트, 개인 자유를 중요시하는 개인주의자들 등 세 경향으로 나뉜다고 한다. 그 중에서 플랫폼주의자가 제일 숫자가 많고, 그 다음 개인 주의자와 아나코신디칼리스트 순이라고 했다.
안드레스에 따르면, 플랫폼주의자를 포함한 좌파 전반은 가브리엘 보리치 현 대통령이 주도하는 신헌법 제정 흐름에 포섭된 경우가 많다고 한다.
이야기를 나누던 중, 행진 대오는 주칠레 이탈리아 대사관이 위치한 프로비덴시아 코무나를 지나 서울의 종로와 견줄 수 있는 알라메다(Alameda)대로로 접어들었다. 경찰이 동원한 살수차가 물을 뿌리기 시작하자 안드레스와 나는 대열에서 벗어나야 했다.
- 코무나(comuna) : 칠레의 최소 행정단위로, 도시나 농촌을 모두 포괄한다. 산티아고처러 인구 밀도가 높은 지역에선 하나의 코무나가 여러 개의 코무나로 나뉘고, 반면 인구 밀도가 낮은 지역에서는 한 코무나가 마을에서 마을 또는 도시에 이르는 여러 지역을 포함할 수 있다.
안레한드로의 초대
집회가 열린 날로부터 며칠이 지났다. 안드레스와 연락처를 교환한 후 나는 그가 참여하는 조직이나 다른 활동가들과 교류하게 됐다. 그 중에는 일본 전공투에 강한 흥미를 보이며 탐구하던 알레한드로(가명)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아시아 사회운동에 대한 높은 관심 때문인지 어느날 자신의 집으로 나를 초대했다.
안레한드로는 세입자들이 점거해 공동으로 사용하고 있는 집에서 살고 있었다. 점거 중인 주택의 특성상 공유 공간이 있었고, 그 공간에서 이웃들끼리 활발한 교류가 일어났다. 한국에서는 보기 어려운, 오래된 정경처럼 느껴졌다. 안레한드로의 방에 들어가자 그가 그린 전공투 관련 그림들, 맑스와 바쿠닌의 초상, 여러 해에 걸친 투쟁 관련 포스터들이 눈에 들어왔다.
알레한드로는 고등학교에 다니던 2015년 즈음부터 운동에 참여해왔다. 그 과정에서 안드레스를 만나게 됐고, 8년째 친구로 지내고 있다고 했다. 우리는 거의 여덞 시간동안이나 칠레 사회운동에 관해 이야기를 나눴다. 대화 도중 내가 칠레에서 『파업전야』라는 제목의 한국 독립영화 상영회를 열고 싶다고 말하자, 한국의 사회운동을 소개하는 자리를 한 번 마련해보자며 이에 흔쾌히 동의했다.
산티아고에서 한국 사회운동을 소개하다
이후 나는 알레한드로와 안드레스, 그리고 내가 참여한 정치운동 관련 회의에서 2 주 간격으로 총 3회에 걸쳐 20세기 한국의 사회운동에 대해 소개하고, 영화 『파업전야』 상영회도 갖기로 했다.
이후 알레한드로는 자신이 참여하는 좌파 활동가 그룹인 “Vamos hacia la Vida”(삶을 향해 나아가자)의 동료들, 그리고 안드레스와 연락을 취해 칠레 교육대학의 시청각실과 자유공간 라우라 아옌데(Laura Allende, 칠레의 사회주의자 대통령이었던 살바도르 아옌데의 조카이자 하원 의원)를 대관해주었다.
첫 번째 주제인 "20세기 한국 사회운동"은 4월 6일로 정해졌다. 나는 한국에서 그랬듯, 학업과 병행하며 발표 자료를 준비했다. 20세기 초 3.1운동부터 100년에 걸친 20세기 한국 사회운동을 정리하는 작업도 벅찼지만, 더 어려운 일은 한국적 맥락과 뉘앙스를 칠레의 맥락에 대입해 설명하는 일이었다. 예를 들어, '박정희'가 한국에서 가지는 위상을 칠레의 맥락에서 어떻게 설명할까? '피노체트'만으로 충분할까?
칠레대학에서의 수업은 많은 도움이 됐다. 수강했던 강의 중에는 1973년 군부 쿠데타를 직접 경험한 노(老) 교수가 진행하는 “쿠데타 50주년 특별 강의: 인민연합(Unidad Popular, 아옌데가 속했던 당시 집권 정당)과 광역전선(Frente Amplio, 현 가브리엘 보리치 대통령이 속한 정당) 비교”와 “칠레 현대 사회변동”이라는 강의 등이 있었는데, 칠레의 굴곡 많은 현대사를 경제와 사회, 정치, 노동의 측면에서 다루었다. 일련의 공부를 통해 칠레 사회를 보다 체계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됐다. 나는 고민 끝에 1919~1945년 일제 식민지 시기의 국내외 사회운동, 1945~1953년 해방정국의 운동과 좌파 말살, 1953~1979년 소강기, 1979~1987년 반독재 투쟁의 고양기, 1987~1997년 노동운동이 성장하고 또 위기를 맞은 시기로 나눠 정리했다.
4월 6일 발표 당일, 나는 알레한드로와 안드레스, 그리고 다른 활동가들과 만나 보리치 대통령이 사는 지역인 바리오 융가이(Barrio Yungay)의 '자유공간 라우라 아옌데'로 향했다. 행사 전 안드레스는 잘해야 스무 명 정도 올 거라고 말했지만, 예상외로 마흔 명 가량의 참가자들이 왔다. 발표가 이뤄진 약 1시간30분 동안 나는 스페인어로 조선공산당, 신간회, 원산 총파업, 상하이와 이르쿠츠크의 고려공산당, 경성콤그룹, 남조선노동당, 전평, 10월 대구 민중항쟁, 여수-순천 사건, 4.3항쟁 등에 대해 이야기했다. 또, 보도연맹을 비롯한 좌파 학살과 군부의 개발주의적 독재, 서울의봄과 광주민중항쟁, 6월항쟁, 노동자 대투쟁과 전노협, 민주노총에 이르는, 피와 눈물이 서린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강연에 온 사람들은 함께 울고 웃었고, 잠시나마 그들의 삶과 우리의 삶이 연결되는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강연이 끝나고 약 30분동안 질의응답 시간을 가졌다. 여러 질문과 평가들이 나왔지만,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한국의 사회구성체론 논쟁의 내용이 페루에서의 'Sendero Luminoso(빛나는 길, 페루의 무장 투쟁 정당)'과 다른 좌파 간의 논쟁과 유사하다는 발언이었다. 현실에서 '빛나는 길'은 반식민지론을 기반으로 정부 전복과 신민주주의 구성을 위해 무장투쟁으로 나섰고, 다른 좌파들은 지난 대선에서 승리했던 자유 페루(Perú Libre) 등 민주사회주의 노선을 걸었다.
첫 발표의 반응이 좋았던 만큼, 주최자였던 나와 알레한드로, 안드레스는 더욱 탄력을 얻게 됐다. 다음 차례인 『파업전야』 상영회를 위해 내가 번역해두었던 이 영화의 스페인어 자막을 알레한드로에게 넘겨 검수받았다.
두번째 발표는 2주 뒤인 4월 20일이었는데, 칠레 당국에서 학생 비자 처리를 늦게 하면서, 관광비자가 종료되고 말았다. 결국 나는 출국과 칠레로의 재입국이라는 번거로운 여정이 필요하게 됐고, 아르헨티나로 위치를 옮겨 원격으로 질의응답에만 참여하게 됐다.
우리의 삶, 저들의 삶
두번째 발표에서는 그 전보다 많은 60명 정도가 참여했다. 현재 칠레는 캠퍼스를 벗어난 공간에서의 노동운동이 침체기이다. 그런 만큼 1987년 노동자 대투쟁 이후 우후죽순 노동운동이 퍼져가던 시기를 다룬 『파업전야』의 내용이 큰 울림을 주진 못한 것 같았다. 그 대신, 영화 속 노동자 간의 관계에서 나타나는 당시 끈끈했던 공동체 문화가 현재의 극단적 개인주의 문화로 어떻게 바뀌게 됐는가에 대한 문제의식들이 여럿 나왔다.
솔직히 나는 이에 대해 제대로 답변하기 어려웠다. 그 때문에 이에 대한 고민을 염두에 두고 다음 차례를 준비할 수밖에 없었다. 세번째 발표는 '현재의 한국 사회운동'을 다루는 만큼, 역사적 흐름보다는 신자유주의라는 새 배경조건만 설명한 뒤, 사회 운동의 여러 부분을 조명하고자 했다. 노동운동, 학생운동, 진보정당운동, 페미니즘으로 나누어 정리했고, 마지막에는 현재 한국 사회운동의 과제를 넣어 한국 사회의 분열과 그 영향을 설명하려 했다.
또 다시 2주가 지난 5월 4일, 우리는 다시 '자유공간 라우라 아옌데'에서 모였다. 이번에는 50명 정도가 참가자들이 왔고, 이렇게 해서 (규모면에서) 성황리에 세 차례의 연속 발표를 진행하게 됐다. 사회운동 각 영역을 설명하면서 1997년부터 시작된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의 영향에 대해 설명했다. 신자유주의 정책들은 사회안전망의 확충을 봉쇄했고, 과거에 존재했던 공동체 문화나 이데올로기를 붕괴시키고 도시에서 출생한 새로운 세대가 공동체적 대안이 없는 사회를 맞닥뜨리게 했다. 또, 사회의 유동성이 지속적으로 줄어들며 각 운동의 쇠퇴가 지속됐다는 서사를 덧붙였다. 아쉽게도 질의응답 과정에서는 이전과 같이 주목할 만한 질문이나 평가가 나오지 않았다 석연치 않은 느낌을 남기며 3회에 걸친 한국 사회운동 소개를 막을 내렸다.
결국 세 번에 걸친 한국 사회운동 소개는 석연치 않은 느낌을 남기며 마치게 됐다. 하지만 지 구 반대편 칠레와 한국에서 살아가고 투쟁하는 사람들의 삶이 연결되어 있고, 서로의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자리가 됐다는 점에서는 충분한 의의가 있었다. 상호참조는 어렵고 복잡한 논의들을 필요로 하지만, 이를 위해선 앞으로 더 많은 기회가 필요할 것이다. 지난 4~5월 한국 사회운동을 소개한 세 번의 기회는 앞으로의 여정을 위한 작은 출발이었다고 생각한다. 안드레스와 알레한드로, 그들과 연결된 사람들을 만나고, 한국 사회운동 소개를 통해 더 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된 일련의 과정이 한국과 칠레 사회운동의 접촉면을 늘리는 작은 계기가 되었길 희망한다.
글 : 이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