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키나와 | 동아시아평화연대활동과 함께한 값진 휴가
2023년 7월 16일
여름 휴가를 오키나와에서 보내기로 했다. 이전에 <슈리성으로 가는 언덕길>을 읽으면서 언젠가 한 번은 가보고 싶다고 생각했고, 내가 좋아하는 가수 카네코 아야노의 일본 투어 공연이 마침 7월에 오키나와에서도 있기 때문이었다. 오키나와에 간다고 하자 플랫폼C 동아시아뉴스레터 동동 편집팀에서 오키나와에 사는 평화활동가 카미야 미유키 씨와의 만남도 주선해 주었다. 그렇게 오키나와 헤노코 미군 기지에 가게 되었다. 동동 편집팀에서는 헤노코 기지 건설 반대 투쟁에 연대하면서, 그곳에 계신 분들이 정전 70년 한반도 평화행동에도 연대할 수 있도록 플랜카드를도 만들어주었다.
오키나와에서는 미유키 씨를 통해 현재 헤노코 기지 건설 반대 투쟁을 이끌고 있는 야마시로 히로지 씨와도 만나게 되었다. 인터뷰는 헤노코 기지 근처에 있는 한 게스트하우스에서 이루어졌다. 한국전쟁종전과 헤노코기지반대를 담은 플래카드를 보여드리며 연대인사를 나누면서 인터뷰가 시작되었다. 히로지 씨와 미유키 씨 외에도 <오키나와타임스> 기자 히나코 씨와 독립잡지 <우미카지>를 만들고 있는 우미 씨도 함께했다. 휴대폰 연결로 원거리 통역을 해주신 동동 편집팀의 박근영씨에게 감사 인사를 전한다.
헤노코 기지 반대 시위는 보통 시위를 보통 몇시에 하시나요?
히로지: 네, 헤노코 게이트 앞에서 대략 아침 9시, 낮 12시, 3시에 트럭이 들어오는 시간에 맞춰서 농성(앉아서 시위)을 하는 일상입니다. 토요일엔 공사를 하지 않아서 이 날만 빼고 날마다해요.
하루에 세 번이나 하시는 거네요?
히로지: 네
이게 쉽지 않은 일인 것 같은데 오면서 이 투쟁이 3 천일이 넘었다는 플랜카드를 봤거든요. 지금까지 시위를 이어가시면서 혹시 조금 지치지는 않았는지, 그리고 시위를 시작하고 나서 그동안에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요?
히로지: 오늘이 7월7일인데요, 9년 전 7월 7일에 시작했어요. 우연이지만. 그 날을 기점으로 날짜를 세어왔죠. 그래서 오늘 9년을 다 채우고 딱 10년째가 되는 날이네요. 저는 6월에 시작한 것 같은데 왜 7월 7일부터 세었는지는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요. 실제 공사가 7월에 시작되긴 했어요. (기지) 공사가 시작된다는 말을 듣고 제가 처음에는 바다에 들어갈까 했어요. 어쨌든 제가 보트 운전면허도 있고 해서 바다에 나가서 항의를 할까, 바다에 뛰어들까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실제 공사는 트럭으로 흙을 실어나르는 것이라고 해서 그럼 육지 게이트 앞에서 트럭이 들어갈 때 항의하는 게 더 낫겠다 싶어서 계획을 바꿨어요. 그래서 2014년 7월에 농성을 시작하게 된 거죠. 당시 게이트 앞은 전혀 사람이 다니지 않는 곳이었고, 농성을 하려고 하면 경찰들이 못하게 하는 무서운 곳이었어요. 기지는 어디나 그래요. 가데나에서도, 후텐마에서도, 여기 슈와브 캠프 앞도 9년전엔 그랬습니다. 하지만 경찰들이 나가라고 해서 우리가 나갈 순 없잖아요. 우리는 항의하러 간 것이니까요. 끈질기게 날마다 게이트 앞에서 항의하니까 어느샌가 조금씩 사람들이 모여든 거죠. 그동안 많은 일이 있었어요. 제가 병으로 넉 달 동안 병원에 입원하기도 하고, 복귀하자마자 이틀 후에 또 다섯 달을 다른 병원에 입원하고, 여기 농성에 참가했다 못했다 하면서도 그래도 계속 9년을 버텨왔다는 게 신기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앞으로도 공사가 멈출때까지 계속 싸울 생각입니다.
9년 전에 모인 사람은 몇 명 정도였나요?
히로지: 처음엔 이삼십 명 정도였어요.
지금은요? 오늘은?
히로지: 지금도 비슷해요. 이삼십 명 정도예요. 3년 전 코로나가 시작되면서 사람들이 많이 모이지 못하게 되었고, 저를 아예 못 오게 하기도 하고*, 감염자 수가 많았을 때는 공사가 중단됐으니 오지 말라고 하기도 했죠. 지금은 예전에 참가자가 많았을 때에 비하면 적지만 그래도 날마다 이삼십 명은 모여요. 목요일엔 좀 사람이 많아서 사오십 명 모이기도 하구요. 코로나 전에 제가 구류되었을 때는 사람들이 항의하러 하루에 이백 명, 삼백 명씩 모였어요. 2016년, 2017년이 제일 많이 모였을 시기죠. 그때는 기동대도 이백 명이나 와서 대단했습니다. 힘 겨루기 같은 거였죠.
* 히로지 씨는 외부 출장이 많았기 때문에 코로나를 퍼트린다는 이유로 정부에서 헤노코에 못 오게 막기도 했다
그러면 이 투쟁에서 히로지상이 어떤 역할을 맡아서 하고 계신지요.
미유키: 이 투쟁의 대표세요.
이렇게 오래 지속되는 투쟁의 대표를 맡는 게 쉬운 일은 아니잖아요. 그래서 어떻게 이렇게 히로지상이 이 투쟁에 이렇게까지 깊게 연루되어서 활동하시는지 그 개인적인 동기, 이유 이런게 좀 궁금합니다.
히로지: 헤노코 투쟁을 하게 된 계기부터 말하자면요. 정부가 2014년 7월부터 공사를 시작한다고 해서 다른 활동가들에게 헤노코에 가자고 한 거죠. 저는 헤노코에 가기 전에는 2007년부터 다카에의 산에 들어가서 활동하고 있었습니다. 히가시촌 다카에라는 곳에 오스프레이 이착륙장, 즉 헬기 이착륙장을 만들려는 움직임이 있어서 그것을 감시하고 항의하기 위해 계속 다카에의 산에 들어가 있었어요. 차에서 자고 텐트에서 취사생활을 하는 식으로 자급자족하면서 7년 동안 산속에서 농성을 했어요. 그런데 헤노코에서 큰 공사가 시작된다고 하니까 더 이상 다카에의 헬기장에서만 있어서는 안 되겠다는 얘기가 나왔어요. 그래서 다카에의 일은 함께 활동했던 동료들에게 부탁했어요. 전 헤노코로 가야 하니까 동료들에게 다카에를 맡기고 헤노코로 활동 장소를 옮겼죠. 이게 2014년 여름, 7월 6월쯤이었어요. 다카에에 가기 전에는 저는 2004년부터 오키나와 평화운동센터라는, 오키나와에서 가장 큰 반전단체의 사무국장을 맡아서 거기서 일했어요. 그 전에는 오키나와 현청에서 일하면서 노동조합 할동을 했죠. 오키나와 현청의 지방공무원으로 노동운동을 하면서 반전운동도 함께 하고 있었어요. 그러다가 열심히 하니까 사람들이 평화센터에서 일하는 게 낫지 않겠냐고 해서 평화운동센터에 온 게 2004년입니다. 그러니까 그때부터 말하자면 2004년부터 벌써 20년 정도 반전평화운동을 한 셈이 되는 거죠. (평화운동을 한 경위을 말씀드리면) 2004년에 평화센터에 갔다가 2007년부터 산에 들어가서 2014년부터 헤노코에 와서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고 할 수 있죠.
사회운동을 노조에서 시작하셨고 평화에 관심이 있어서 지금까지 이렇게 활동하고 계신데, 그렇다면 지금 지난 시간을 돌아보았을 때 히로지씨가 생각하시기에 노동조합운동과 평화운동이 맞닿아 있는 지점이 있는 것 같은지, 있다면 어떤 것인지가 궁금합니다.
히로지: 말씀드리자면 길지만 저는 직장에 들어가기 전, 노동운동을 하기 전부터, 그러니까 어렸을 때부터라고 해야 하나... 사실 제 아버지가 오키나와 전투의 남부전선에서 살아남은 전투원이에요. 소년병으로 모집되어서 (전쟁에 나갔다가) 살아남은 거죠. 그래서 아버지나 아버지 쪽 친척 아저씨, 아주머니들이 모일 때마다 전쟁 이야기를 했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전쟁 얘기를 들으며 자랐고, 아버지의 가족 중에는 남미나 하와이에 이민 가셨던 분들도 많았는데 전쟁 후에 그분들이 오키나와에 오신 적이 있어요. 그때가 유치원생일 때던가. 가족들이 다 같이 전쟁터를 둘러보러 갔는데 오키나와 곳곳에서 전쟁의 흔적을 보았어요. 여기저기 폭격 맞은 자리와 무서웠던 그때 풍경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이후에 초등학교, 중고등학교 시절에도 전쟁이라는 것이 계속 머리에 남아 있었어요. 전쟁을 해서는 안 되고 전쟁과 관련 있는 미군기지는 없어져야 된다고 생각해서 중학교 때 B-29 폭격기 철거운동에 참가하기도 했어요. 그리고 오키나와 복귀 운동, 평화운동도 하고. 고등학생때는 도쿄에서 학생운동이 한창일 때라 학원민주화라든지 기지반대라든지 이런 운동에도 참가했고. 그래서 고등학교를 마치고, 마치고라고 해야 하나, 운동을 너무 열심히 해서 퇴학을 당했죠. 도쿄로 상경해서 재수를 하고 대학을 들어가서 졸업한 다음 오키나와 현청에서 일했습니다. 특별한 계기라기보다는 그때는 그런 시절이었다고 생각해요. 어떤 구체적인 일이 있어서가 아니라 태어나면서부터 전쟁에 관한 이야기를 주변에서 들었고 미군기지로 인해 (오키나와 땅이) 망가지는 걸 보고 알게 되면서부터 중학생 때부터 미군기지 철거를 외치고 오키나와 복귀를 외치고 그런 날들이었죠.
그런데 예를 들어 노동운동을 하는 사람과 평화운동을 하는 사람이 나뉘어져 있는 경우가 많은데 히로지 씨는 함께 하셨으니까 그 연결지점이 뭐였는지 궁금합니다.
히로지: 아, 그런 의미로요? 그런 경우들이 있죠. 노동운동 하는 사람은 노동운동만 한다든지, 어떤 사람은 왜 임금투쟁을 하는 노동자가 평화운동을 하냐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어요. 저는 노동자가 평화운동을 함께 해야 진정한 평화운동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어서 직장에서 노조활동을 할 때도 반전평화를 많이 외쳤죠. 다행히 오키나와의 노동조합은 이런 것에 대해 이해를 잘 하는 편이어서요. 활동하면서 특별히 위화감 같은 건 없었고 자연스럽게 (둘 다) 이야기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군요. 저희가 연대하러 온 것이기도 하고 저희 단체에서는 동아시아 국제연대가 중요한 주제여서 또 여쭤보고 싶은데, 이런 투쟁을 하면서 국제연대의 필요성을 느끼셨을 수도 있고 실제로 누군가가 와서 국제연대를 했던 그런 경험들도 있을 텐데, 기억에 남았던 연대의 기억이 있다면 이야기해주시면 좋을 것 같아요. 그리고 우리가 어떻게 연대하면 좋을지도 궁금해요.
히로지: 크게 보면 말이죠, 동아시아 평화의 과제는 하나예요. 냉전시대, 동서대립이라고 불리던 시기를 배경으로 한반도의 남북이 갈라지고 오키나와가 미군에게 점령되고, 중국과 소련이 적대하는 역사가 있었죠. 그런 의미에서 보면 냉전을 넘어 평화를 만드는, 그러니까 동아시아가 함께 전쟁 없는 시대를 만 들어 간다는 것은 예전부터 있는 과제이고 지금도 여전히 그런 것 같아요. 특히 최근에는 또다시 미국과 일본이 함께 중국과 대립하는 군사적 동맹을 만들려는 그런 움직임도 있고요, 음, 한국도 그 선상에 있는 거죠. 한국은 좀 더 구체적으로 대만보다는 북한과 격렬하게 대립하고 있기 때문에 오키나와보다 더심각하다고 생각하지만, 역시 비슷하게 공통된 과제가 있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당연히 연대해야 하고 우리도 연대를 원하고 있습니다.
지금 통역을 하고 있는 카미야 미유키 씨는 지난 주에 중국에 갔고, 지금 같이 있는 우미 군은 다음 주에 한국에 갈 것 같습니다. 저도 다음 주에 중국에 갑니다. 그런 의미에서 말하자면, 오키나와는 좁은 지역이지만 그런만큼 더더욱 밖으로 나가야 해요. 일본 국내에 갇혀 있으면 이건 정말, 일본에서 다수인 사람들의 의견을 들어보면 중국이 무섭기 때문에 당연히 일본이 무장해야 한다, 무력을 가져야 한다, 맞서야 한다는 식의 정부 프로파간다에 일방적으로 휩쓸려서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압도적으로 많아요. 그것(프로파간다)을 넘어서서 전쟁이 아니라 평화로운 시대를 만들어야 한다는 의미의 국제 연대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저는 작년에 'NO MORE 오키나와 전쟁- 누치도다카라(금은보화 보다 생명이란 뜻)모임'이라는 단체를 만들었죠. 그 때가 작년 1월이었고, 지금 그 공동대표의 한 사람으로서 말씀드리지만 올해 8월에도 오키나와전쟁을 반복해서는 안 된다는 뜻을 모아 현민회(오키나와 지역모임)를 발족시키려고 해요. 그래서 그 현민회가 출범하면, 우리는 그 단체의 이름으로 한국에도 가고 중국에도 가고 대만에도 가서 오키나와는 전쟁을 원하지 않는다, 죽이고 싶지 않다, 죽임을 당하고 싶지 않다, ‘NO MORE’를, ‘NO’를 외치는 그런 단체를 만들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오늘 안내해 주시는 카미야 미유키 씨도 이런 활동 중에 만나게 된 청년입니다. 국제적인 연대는 물론이고 세대를 넘어 우리가 지금 노년층과 청년층, 시니어 세대와 젊은이들도 함께 모여서 이 오키나와를 전쟁터로 만들지 말자, 또는 아시아를 전쟁터로 만들지 말자는 생각으로 하나가 되자는 이런 이야기를 할 수 있을 때마다 정말 기쁩니다. 한국에서도 많은 분들이 오시고 지난 주에도 미유키 씨의 안내로 한국의 성공회대학교의 연구자분과 이야기를 나눴는데, 이렇게 많은 교류가 이루어지는 것을 정말 영광스럽게 생각합니다. 앞으로도 대만 사람, 중국 사람, 한국 사람과 연대를 하면서 교류를 하면서, 우리들의 동아시아라는 곳의 평화라는 것을 생각해 보고 싶어요.
헤노코 집회에는 외국에서, 제주도에서 오는 사람이 많나요?
히로지: 꼭 제주에서만 많이 오시는 건 아니에요. 지난주에는 제주에서 많이 오시긴 했지만요. 저도 2018년에 제주도에 초청받아 간 적이 있어요. 거기서 많은 분들을 알게 되었죠. 제주도도 한국 안에서 오키나와처럼 군사기지가 만들어지고 대립이 있고, 이렇게 비슷한 부분들이 있어서 연대가 잘 된 측면이 있다고 생각해요. 물론 다른 지역의 한국인도 많이 오세요. 해마다 평화센터에서 주최하는 5.15평화대행진에 많은 한국인들이 와서 함께 행진합니다.
히로지 씨가 지금 헤노코 투쟁의 대표이신데, 다른 책임자 분들은 몇 분이나 되시나요?
히로지: 헤노코 투쟁에 속한 단체가 몇 개 있어요. 그중 가장 오래된 단체로는 헬리콥터 기지반대협회인데요. 이 단체가 1996년 7월에 생겼으니까 30년 가까이 되었네요. 제가 속한 평화운동센터도 있고 평화시민연합도 있어요. 이 밖에 일본 공산당 소속 단체도 있고 이들 단체가 함께 헤노코현지투쟁부를 이루고 있어요.
젊은이들이 집회등에 더 많이 참가할 수 있도록 고민하는 방안들이 있으신가요?
히로지: 오늘 미유키 씨가 오셨는데요. 제가 미유키 씨를 알게 된 것은 얼마 전입니다. 오키나와 전쟁을 하지 말자는 운동을 시작하려고 (여러 시민단체가 모여) 논의를 시작한 작년 12월부터 만났는데, 제가 느끼는 것은 역시 서로 토론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헤노코 운동은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벌써 10년 가까이 하고 있는데, 거기에는 그동안 좀처럼 오지 않았던 청년들이 지금 새로운 형태의 집회를 하자고 하니까 많이 오지는 않지만 일단은 어느 정도 와주고 있고, 2월 집회, 5월 집회 때도 청년들이 와주었습니다. 조금씩 청년들과의 연대가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이것(집회에 청년이 얼마나 오는지에 대한 문제)은 청년들의 행동, 주장, 생각을 끌어낼 수 있느냐 없느냐와 관련이 있는 것 같아요.
예를 들어 제가 하는 헤노코 게이트 앞처럼 격렬하게 기동대와 부딪히는 운동은 무섭고 힘들어서 안 하지만, 다른 장소에서 덜 과격하면서도 평화를 바라는, 또는 전쟁을 반대하는 시민 집회라든가 젊은이들도 참여할 수 있는 대중적인 운동을 할 수 있으면 좋겠죠. 또 이러한 운동을 만들어가면서 다른 한편으로 조금은 격렬한 헤노코 운동도 지속해가면서, 더 넓게, 방금 말씀드린 청년들과 함께 할 수 있는 운동, 시민운동, 소프트하지만 더 확산적인 구호들, 평화를 원한다, 전쟁을 원하지 않는다, 아이들의 생명을 살리고 싶다, 젊은이들의 미래를 만들고 싶다, 그런 바람을 담은 폭넓은 운동이라는 것을 만들고 싶어요. 이러한 운동에 젊은이들이 동참해줄 거라는 바람을 가지고 있어요.
한국에 묻고 싶은 것들이나 부탁하고 싶은 말이 있으시다면 해주셔요, 한국 전쟁 종전 캠페인 선전도 잘 부탁드립니다.
히로지: 한국과 일본이 바다를 사이에 두고 직접 교류가 어렵잖아요. 그래서 (바다 같은 지역적 조건이) 서로에 대한 이해를 가로막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제가 개인적으로 말씀드리면 저는 70년대에 ‘월간 세계’ 라는 잡지 속에 연재된 한국통신이라는 그 연재물을 계속 읽었습니다. 그때는 한국이 당시 군사정권하에서 민주주의가 탄압받고 있을 때였죠. 일본에 온 김대중이 납치되어 도쿄에 있다가 행방불명되는 일도 있었고, 그런 시절이었어요. 그 독재정권 시절의 광주 사건이라든지, 그 당시의 상황은 그 <택시운전사>라는 영화에 나오고, 또는 그 학생들이 고문당하고 학대당하고 한국의 시민폭동이 일어나는 <1987>이라는 영화라든지를 보고 여러 가지로 영감을 받았습니다. 제 느낌을 말씀드리면 그 몇 번의 군사정권하에서도 굴하지 않고 민주주의를 추구하며 지금까지 이어져 온 한국을 정말 진심으로 존경합니다. 일본에는 없는 힘이고, 일본에는 없는 숭고한 이념과 아래로부터의 운동이라고 보고, 한국인의 저력을 느껴요. 항상 존경하는 마음으로 지켜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반대로 묻고 싶은 것은요, 그런 그 열렬한 그 민주화, 또는 평화를 추구하는 한국인이지만, 마주보고 있는 북한, 배경에 있는 미국과의 관계에서 보면 인식의 문제가 아니라 체제 선택의 문제가 될 것 같네요. 즉 공산주의냐 자본주의냐라는 체제를 선택해야하는 무거운 과제가 있기때문에, 항상 한국의 정권이 바뀔 때마다 화해정책이 되었다가 지금과 같은 정권이 들어서면 북한과는 완전히 단절하고 일본과 미국과 협력하고 가겠다는, 뭐 이런 패턴으로 한국이 움직이는 것 같아요. 오늘 와서 말씀하신 것처럼 한국전쟁을 휴전이 아니라 종전을 시키라는 메시지, 당연히 그래야한다고는 생각하는데 그것을 구체화하기 위해 지금 한국에서 어떤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는지, 어떤 형태로 그런 운동을 지금 제기하고 있는지, 반대로 말하면 북한의 그 핵무기 문제라든가 치열한 군사적 대치관계를 생각하면 오키나와와 마찬가지로 대만 유사상태처럼 또다시 전쟁이 일어날 수 있는 상황에서 전쟁을 끝내야 한다는 과제가 얼마나 무겁고 크다는 것은 잘 알고 있기에 그 부분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려고 하는지 조금 더 알고 싶은 것이 솔직한 심정입니다.
이 서명운동, 당연히 협력하겠지만 방금 말씀드린 그 제 마음 속에 있는 큰 고민, 어떤 식으로 남한 사람들이 북한과 마주하고 화해를 하기 위해서, 지금의 휴전을 종전으로 가져가기 위해서, 뭐라고 할까요, 새로운 메시지, 전후 70년 동안 못 넘었던 벽을 넘어 정말 남북이 함께 할 수 있는 방안이라고 할까요. 그 철학 같은 것을 어떻게 한국 내에서 만들어내고 있는지, 그 부분을 우리도 조금 듣고 싶고, 그 다음에 함께 서명운동을 하고, 한국전쟁을 끝내자는 식의 운동에 시작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합니다. 그 부분을 먼저 듣고 나서, 연대를 더 깊게 해나가고 싶다는 생각이 듭니다.
정말 좋은 말씀을 해주셨는데, 서명운동은 뭐라도 해야겠다는 마음으로 시작된 것 같아요. 아시다시피 남북한 사람들이 서로 전혀 만나지도 못하고 연락도 할 수 없는 상황이니까요. 그래서 이런 평화, 예를 들면 평화협정 같은 것을 정부가 해주기를 바라고 의지할 수밖에 없고, 그래서 늘상 정부가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가에 따라 한반도 상황이 좀 평화롭게 느껴지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고 그런데요. 2018년 이후에 희망이 많이 사라졌고, 한국 정부가 할 수 있는 역할도 많이 준 것 같아요. 아까 말씀하신 것처럼 일본 안에 있으면 프로파간다에 억눌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처럼 한국도 지금 비슷하죠. (평화협정은 의미 없다는 프로파간다) 그래서 전 세계 여러 나라들, 특히 한국전쟁의 영향을 받고 있는 일본이나 중국, 대만 같은 곳에서 시민들과 함께 힘을 합쳐서 우리 시민들은 이런 적대적인 관계를 원하지 않고 정말 평화적인 관계를 원하고 있다는 것을 있는 그 사실 을 알려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히로지: 한국 사회도 일본 사회랑 많이 닮아 있네요. 아까 말씀드렸듯이 냉전의 배경에 강대국들이 있기 때문에 이들의 의도에 따라 일본 정치가 좌지우지되는 상황은 일본이나 한국이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해요. 시민들은 전쟁을 원하지 않으니까 연대를 하는 거고요. 먼저 일본과 한국 시민이 연대를 하면서 자국에서의 국내 여론을 일으키고 다른 한편으로는 미국과 국제 여론을 일으키는 그런 것이 필요하고, 그런 의미에서 우리의 큰 연대가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사실 저는 처음에 오키나와에 대해 잘 몰라서 오기 전에 급하게 책을 구해서 읽은 정도예요. 그런데 이렇게(잘 모르는데도 이렇게 미유키상을 통해 여기에) 오게 된 게 저는 좀 신기하고 특별한 인연이라는 생각이 들고요. 일단은, 제가 여기서 느낀 것은 지금 이 광경이 굉장히 재미있거든요. 저희가 지금 핸드폰을 가운데에 두고 (근영이 전화로 한-일 통역을 하면서)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저는 일본어를 못하는데도 되게 재밌었어요. 이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한 시간이 언어가 통하지 않지만 이해한 것 같은 느낌이 좀 들었거든요 사실. 내용은 모르지만 음악처럼 잘 들었어요. 한 시간 동안. 사실 이번에 오키나와에는 여행을 하러 왔어요. 다이빙도 하고, 좋아하는 가수 콘서트도 있고 해서 왔는데 여기 와서 새삼, 사실은 우리가 굉장히 밀접하게 연결되어있는데, 그런 느낌을 평소에는 잘 못 받잖아요. 그런데 지금 여기에서 지역적으로나 역사적으로나 연결되는 느낌이 들거든요. 활동가로서 그리고 노동조합 조합원으로서 히로지 씨와 미유키 씨에게 감사하다는 이야기를 드리고 싶고요. 오늘 늦는 바람에 집회 참여를 못 해서 아쉽고, 다음에 오키나와에 올 때는 집회시간에 맞춰서 (이 문제가 해결되어서) 그 전에 투쟁이 마무리되면 가장 좋겠지만 계속한다면 다음에는 집회시간에 꼭 맞춰서 오겠습니다. 너무너무 감사합니다.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씀이 있나요?
히로지: 오늘 현지를 못 보시고 이렇게 실내에서 인터뷰를 하게 되었는데 혹시 게이트 주변을 둘러보시겠어요? 원하신다면 안내해드릴게요.
너무 좋아요. 그리고 제가 출판사에서 편집자로 일을 하고 있는데요. 제가 작업한 책 중에 일본어 원서를 번역한 책이 있어서 선물로 두 권을 가지고 왔거든요. 히로지씨, 미유키씨에게 하나씩 드리려고 하는데 과학책이에요. 별 의미는 없지만 봐달라고요(선물한 책은 ⟪성게, 메뚜기, 불가사리가 그렇게 생긴 이유: 생김새의 생물학⟫이라는 책이다. 책 1장에는 생태계 파괴로 백화되어가는 오키나와의 산호초 이야기가 잠깐 나온다).
히로지: 아 그리고 딱 1년 전에 이 헤노코에 와서 우리와 함께 잘 지내고 있는 아주 성실하고 열성적인 청년이 오늘 여기 왔어요. 우미 씨라고 하는데요. 헤노코에서 보고 들은 것을 책자로 만들어서 사람들에게 알리고 있는 귀한 존재예요. 다음 주에 한국에 간다고 하니까 그 친구에게 서명운동을 알려줄게요. 지금은 그가 만든 팸플릿을 여러분에게 선물하고 싶다고 하네요.
우미씨는 감성이 풍부해요. 우리 세대에서는 좀처럼 느낄 수 없죠. 게이트 앞에서 일어나는 아주 소소한 일들도 부드럽게 그러나 본질을 꿰뚫어 보는 멋진 관점을 가지고 표현해서 우리가 늘 감탄해요. 그리고 오늘 취재하러 오신 오키나와 타임즈의 기자 다마키 히나코 씨를 소개할게요. 오키나와 본섬 북부 지사에서 지금 취재하고 있습니다. 어제, 오늘 이틀 연속으로 취재해주셨어요. 이런 열성적인 기자들 덕분에 우리가 운동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의 작은 싸움이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은 오키나와에 있는 두 신문, 오키나와 타임즈와 류큐신보 기자들이 자주 현장에 와서 이런 저런 상황을 시시각각 보도해주고, 그것을 현민들이 보고 현장에서 어떻게 움직이고 있구나하고 저희를 지지해 주었기 때문일 거예요. 그래서 오늘 오신 두 분께도 꼭 이 이야기를 전해 드리고 싶었고, 한국의 상황은 잘 모르지만 언론은 사회의 공기같은 존재라는 걸 꼭 전해 드리고 싶어요. 언론의 힘이 있어서 오키나와의 운동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말씀드립니다.
그럼 오늘 이 자리에 처음부터 함께해주신 두 분의 말씀을 듣고 싶습니다.
우미: 7월 22일에 서울에서 집회가 있잖아요. 종전 집회, 그곳에 갈 예정이니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다마키: 지난번에도 제주도 사람들이 와서 헤노코 시민들과 교류할 기회도 있고, 한국 사람들과 바다를 사이에 두고 떨어져 있지만, 기지 문제나 환경 문제 등에 대해 생각을 공유할 수 있는 기회가 많다고 생각해요. 서로 사는 곳도 다르고, 국적도 다르고, 사고방식도 다르고, 처한 배경도 다르겠지만, 역시 기지 반대나 반전, 평화에 대한 생각은 계속 같고, 그런 점이 신기해서 취재하고 있어도 마음이 따뜻해지는 장면이 오늘도 많이 있었습니다. 있었습니다. 나중에 많이 들려주세요. 이상 다마키였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지금 또 이렇게 미유키 씨를 만난 것도 뜻깊은데요. 미유키 씨도 동아시아 국제연대에 대해서 생각하신 것들이 많이 있을 것 같은데 일단 그제까지, 7월 1일부터 5일까지 중국에 다녀오셨거든요. 어떤 일로 다녀오셨는지, 그리고 최근에 어떤 활동을 하고 계신지랑 미유키상에게 동아시아 국제연대란 무엇인지 말씀해 주시겠어요?
미유키: 저는 우호 사절단으로 중국에 5일간 다녀왔습니다. 상하이, 쑤저우, 우시 등 여러 지역에 가서 중국 문화 등을 경험하고, 중국을 직접 눈으로 보고 느낄 수 있었던 것이 굉장히 컸던 것 같아요. 거기에서 오키나와의 노래를 모두 함께 부르고 중국인들과 함께 춤을 췄어요. 그 분들이 “즐거운 시간을 보냈습니다”라고 일본어로 말해주기도 하고, 서로 다른 나라 사람이지만 같은 인간으로서 함께 가볍게 관광을 즐기고, 왠지 모를 따뜻함 같은 것을 느낄 수 있었어요. 연대는 이제부터라는 생각을 했고, 지금까지 이렇게 많은 사람들과 소통할 수 없었기 때문에 이를 더 넓혀 나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히로지: 참, 한 마디 덧붙이고 싶어요. 중요한 것을 깜빡 잊고 있었어요. 지금 여기는요, 어떤 숙박시설에서 장소를 빌려서 쓰고 있어요. 이곳을 운영 하는 주인은 저와 함께 저와 함께 체포, 구금되어 함께 몇 달간 구금되었던 동료입니다. 그 분이 오늘 이 장소를 제공해 주셨어요. 시원하고 조용한 곳에서 이 인터뷰를 할 수 있게 해주셨어요. 민박 주인 이름은 이나바 히로시입니다. 앞으로 많은 분들이 오실 때 이곳을 이용해 주시면 감사해요. 이곳은 민박집이고 2층에서 숙박할 수 있습니다. 하루에 저기, 오늘 여기서 소개했으니까 반값으로 해준다고 합니다. 평소에는 2000엔인데 지금 반값인 1000엔에 숙박할 수 있어요. 그리고 아침식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사실 식사라고해야 100엔짜리 컵라면 정도의 식사지만요. 밤에는 주인이 제대로 요리한다고 하네요. 아, 그리고 숙박객들이 모두 헤노코 후원회 회원이라서 밤에는 맥주를 마시며 교류가 계속한답니다. 우리 운동의 아주 독특한 거점이에요. 이름은 쿠션이라고 합니다. 지금 이나바 씨가 오셨네요.
인터뷰가 끝날 때쯤, 멀리서 인터뷰를 듣고 계시던 이나바 히로시 씨가 자리로 오셨다.
히로시: 안녕하세요. 야마시로 히로지 씨가 소개하셨듯이 여긴 한국인, 유럽인, 미국인 모두 반값에 해드려요. 아침식사 포함해서 1,000엔입니다. 저녁은 제가 직접 만듭니다. 열심히 한국 요리도 만들어요. 지난주에는 학생들이 서른 명이나 왔어요. 한국에서 많이 와주셔서 정말 고마워요. 제가 한국말은 잘 못하지만 DVD를 만들었어요. 한국어로 되어 있고요. 짧은 17분짜리 영상입니다. 헤노코의 3년간의 활동이 들어 있어요. 3개 드릴게요. (한국에) 돌아가셔서 함께 보세요.
감사합니다. 다음에 무조건 꼭 여기에 와서 머물 거고요. 진짜 마지막으로 이나바 히로시님께 평화는 네모다, 이나바 히로시님이 생각하는 평화는 이것이다를 듣고 끝내겠습니다.
히로시: 평화가 뭐냐구요?… 어렵네요. 평화는… 뭐라고 해야 하지. “영원히 추구해야 할 테마다” 세계 곳곳 어딘가에서나 꼭 전쟁이 일어나고 있으니까요. 지구 전체에 전쟁이 사라지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영원한 테마’라고 할 수 있겠네요.
정말 감사합니다. 인터뷰의 마지막을 장식할 만한 답변이었어요.
히로지: 이나바 히로시씨는요, 세계 곳곳을 걸어다녔어요. 인도, 파키스탄, 동남아시아, 중국, 그리고 유럽을 돌고 돌아 오키나와에 왔는데 9년 전인가 저한테 붙잡혀서 투쟁에 합류했고 결국엔 저랑 구류까지 같이 살고 그런데도 안 떠나고 계속 여기 붙어있는게 참 신기한데 말이죠… 정말 좋은 사람이에요. 꼭 여기 민박집 이용해주세요. 이상으로 마치겠습니다. 오늘 정말 감사했습니다. 고생하셨습니다. 오늘 현지를 못 보시고 이렇게 실내에서 인터뷰를 하게 되었는데 혹시 게이트 주변을 둘러보시겠어요? 원하신다면 안내해드릴게요.
인터뷰를 마치고 우리는 함께 매일 집회가 이루어지는 헤노코 기지 앞을 둘러보았다. 나는 다음날부터 콘서트도 가고 다이빙도 하고 슈리성도 다녀왔다. 한국으로 돌아온 지 나흘이 지나 이제 조금씩 다시 일상이 짙어지고 있지만 오키나와에서의 기억은 여전히 생생하다. 특별히 그날의 인터뷰는 누군가와 말은 통하지 않아도 만 나고자 하는 마음만 있다면 어떻게든 통할 수 있음을 새삼스럽게 다시 느꼈던 시간으로 남아있다. (물론 일본어를 잘하는 친구가 있다면 더욱 좋지만 말이다) 생활은 이렇게 이어지고 나는 다음 만남을 기다리고 있다.
함께 인터뷰에 참여했던 미유키 활동가는 아래와 같은 내용으로 한국전쟁종전서명 운동을 독려하고 있다.
【한국전쟁을 끝냅시다! 연대 서명 모집】
지금 한국전쟁을 끝내자는 서명을 받고 있습니다. 한국전쟁은 70년전에 휴전했을 뿐 아직도 끝나지 않았습니다. 가족조차 만나지 못하고 연락도 못하는 상황이 지속되고 있습니다. 이 서명은 남한, 북한, 미국, 중국을 포함한 한국전쟁과 관련된국가의 정부에 제출할 예정입니다. 저는 미국 유학시절,이산가족들이 서로를 얼싸안고 몇 시간이나 눈물을 흘렸다는 이야기를 한국인 친구에게 들었습니다. 그 때 친구와 이야기를 나눈 것이 제가 정치에 관심을 갖게 된 큰 계기가 되었습니다. 한국의 친구들에게 오키나와의 이야기를 하면 모두 연대하겠다고 합니다. 저도 한국의 친구들과 연대하고 싶습니다! 또 한국전쟁이 완전히 끝나면 오키나와 기지의 부담도 크게 줄어듭니다. 젊은 사회운동가 단체인 플랫폼씨의 활동가가 헤노코와 와서 야마시로 히로지씨와 이야기를 했습니다. 헤노코 방문을 위해 깃발을 만들어 와 주셨습니다. 깃발에 헤노코 반대도 적혀있어서 정말 기뻤습니다. 활동가는 히로지씨가 오랫동안 활동해 온 것에 대해 존경하고 감동했다고 했습니다. 자필서명을 모아서 7월 20일에 한국에 보낼 예정입니다. 22일에 한국에서 큰 집회가 있어서 19일에 일단 자필서명모집을 마감하지만, 이 종전서명은 그 이후에도 계속 받습니다. 서명을 모아보겠다! 나도 서명하겠다! 는 분들은 제게 연락주세요. 이름과 주소와 나라명만 쓰면 됩니다! 온라인 서명도 가능합니다
인터뷰 : 임솜이, 박근영
통역, 교열 : 박근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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