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사회운동 논쟁 | ② 전후 일본공산당의 오류

일본 사회운동 논쟁 | ② 전후 일본공산당의 오류

전후 일본공산당의 역사는 운동의 주체가 언제나 스스로를 혁신의 대상으로도 바라볼 수 있어야 함을, 스스로를 변화시키면서 만들어나가는 해방의 동력이 운동의 근간이어야 함을 보여준다.

2022년 12월 31일

[동아시아]일본동아시아, 일본, 진보정당, 일본 사회운동 논쟁, 일본공산당

고야마 히로타케 저, 최종길 역, 『전후 일본의 공산당사 : 당내 투쟁의 역사』 서평

도덕적 권위에서 정당성을 찾아온 정치

지난 “일본 사회운동 논쟁사” 시리즈 1편에서는 고야마 히로타케(小山弘健)의 『일본 자본주의 논쟁사』를 통해 각각 전후 일본공산당과 사회당 좌파로 이어지는 강좌파와 노농파의 입장을 살펴보았다. 당시 강좌파와 노농파의 자본주의 논쟁은 급속한 자본주의적 근대화와 반봉건 유제(봉건 유제란, 근대 사회에 남아 있는 봉건적 사상, 감정, 관습, 제도를 가리킨다)가 동시에 나타나던 비서구에서 국가와 사회 및 경제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지를 중심으로 벌어졌다. 이러한 논쟁은 필연적으로 운동 전략에 대한 논의로 이어졌다. 반봉건성과 천황제를 강조하던 강좌파와 공산당 계열은 민족해방 토지혁명과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을 우선적 과제로 바라보는 2단계 혁명론을 채택했고, 독점자본주의와 제국주의의 고도화를 중시하던 노농파와 사회당 좌파는 노동자계급 중심의 사회주의 혁명을 당면 과제로 삼았다.

그렇다면 1945년 패전과 해방 이후, 이러한 변혁 전략을 채택하였던 일본 좌파의 사회운동은 어떻게 전개되었을까? 강좌파와 공산당의 입장에서 자본주의 논쟁사를 정리했던 고야마는 전후 일본 사회운동이 마주한 난점들을 고찰하며 점차 새로운 정치적 입장으로 이행하게 된다.

1958년에 쓰인 『전후 일본의 공산당사 : 당내 투쟁의 역사』는 고야마 히로타케가 전후의 정치적 격변을 경험하며 공산당에서 정치적으로 소외된 이후 내놓은 노작이다. 사실상 일본공산당내 영향력을 잃은 고야마는 당의 지도와는 독립적으로 활동하던 마르크스주의 연구자들과 함께 사회경제노동연구소를 꾸리고 일본 사회운동사에 대한 문헌 편찬 작업을 정력적으로 진행하고 있었다. 불과 5년 전 “일본 자본주의 논쟁사”에서 일본공산당의 ‘정통성’에 대한 천착과 스탈린주의적 편향을 보였던 고야마는 이 시기에 당에 대한 격렬한 성토와 비판으로 돌아선다.

몇 년 전만 해도 코민테른 중심의 공산당 노선에 깊이 공감했던 고야마가 비판적 입장으로 돌아서면서 어떠한 오류들을 ‘스탈린주의’로 정의했는지 이 책에 분명하게 나타나 있지는 않다. 다만 이 책에서 드러난 일본공산당의 비극적인 역사를 살펴본 이후, 그 오류와 한계를 통해 나타난 스탈린주의의 요소들을 경험적으로 추출해 보는 것은 분명 유의미할 것이다.

벼이삭과 톱니바퀴는 각각 혁명 주체 계급으로서 농민과 노동자를, 4개의 적기는 각각 민주주의 혁명·민주 통일 전선·국제 통일 전선·일본공산당 건설을 상징한다.
벼이삭과 톱니바퀴는 각각 혁명 주체 계급으로서 농민과 노동자를, 4개의 적기는 각각 민주주의 혁명·민주 통일 전선·국제 통일 전선·일본공산당 건설을 상징한다.

당시 고야마와 사회경제노동연구소의 이론가들은 전쟁 전후의 일본 노동자운동사, 사회당과 공산당의 당사를 비판적으로 정리하고 총괄하는 작업에 매진했다. 이들이 기술한 민중운동사는 불굴의 의지로 억압을 극복하는 민중의 역사이거나 도덕적인 우위 속에 운동의 정통성을 지켜온 혁명가들의 서사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들의 작업은 주체의 의지에 대한 낭만화된 신화와 운동의 도덕화가 드리운 장막을 걷어내고 정세에 맞지 않는 온갖 편향과 각종 교조(사고방식이나 태도가 한 가지 신념이나 원칙에 사로잡혀 경직되어 있는 것)를 있는 그대로 드러내고자 했다. 당시 일본공산당에서 이루어진 논쟁과 당내 투쟁, 그리고 그러한 논쟁이 일본 사회운동 전반에 미친 영향에 대해 살펴보는 일은 일본 사회운동이 처한 난관의 기원을 살펴본다는 점에서 유의미할 것이다.

지금도 일본공산당의 공식 당사는 전쟁 전후의 운동사를 숭고한 의지의 도덕적 전진이라는 서사로 그려내고 있다. 그 과정에서 코민테른의 지도에 강력하게 장악되었던 일본공산당의 오류는 잘 드러나지 않게 되었고, 분파투쟁 속에 발생한 많은 희생자들은 망각되었으며, 재일조선인 투사들은 그 누구보다 투쟁에 앞장섰지만 결국 당으로부터 배제되어버렸다. 또한 손바닥 뒤집듯 노선과 전략을 바꾸면서도 정세에 조응한 실천을 조직하지 못했던 치명적인 한계들은 가려졌다.

일본공산당은 사실 1945년 패전과 해방 이후 재건의 과정을 거치면서부터 이미 주체의 도덕적 의지를 강조하면서 ‘정통성’을 확립해왔다. 전쟁 전에 왜 그토록 많은 공산당원이 세계사적으로도 이례적인 대규모 전향을 경험했는지에 대해서는 제대로 질문하지 않은 채, 오랜 기간 감옥에서 비전향을 유지한 출옥 지도자들의 도덕적 무결함만을 정치의 정당성으로 삼았던 셈이다.

수많은 사회주의자들이 군국주의의 광풍속에 전향해온 조건에서, 전후 초기에는 분명 그러한 도덕적 정당성이 가장 강력한 대중적 조직의 기제가 되었다. 그러나 오랜 혼란과 이에 대한 권위적인 처분으로 당에서 소외된 다수의 활동가층은 1960년 안보 투쟁을 기점으로 공산주의자동맹(1958년경 전일본학생자치회총연합에서 활동하던 일본공산당 학생운동가들이 당에서 제명된 이후 결성한 신좌익 정파)과 혁명적공산주의자동맹(일본 트로츠키주의자 연맹의 후신으로 1957년에 결성된 트로츠키주의 계열의 신좌익 정파)으로 양분되는 신좌파 섹트(Sect, 분파) 운동으로 이탈했다.

68혁명의 시기 기성정당으로서의 공산당과 새로이 부상한 신좌익 운동이 긴장과 갈등을 빚었던 것은 프랑스나 이탈리아 등에서도 나타났던 보편적 현상이었다. 그러나 공산당의 일본민주청년동맹(1923년 설립된 일본공산청년동맹의 후신으로서 전후 설립된 일본공산당 관련 청년조직)이 경찰에 앞장서 신좌파와 전학공투회의(1960년대 후반기에 학내의 여러 신좌파 학생들이 여타 학생들과 함께 학교 전체에서 공동투쟁을 하기 위해 꾸린 연합체)의 대학 투쟁을 진압하는 용역 역할을 해온 모습은 일본이 아니라면 찾아보기도 어렵고 쉽게 그 맥락을 이해하기도 어렵다. 오늘날 사회당도 신좌파도 몰락한 일본의 현실에서 일본공산당이 일정한 정치적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특히 일본 내 민주주의적 제도를 지키고 동아시아의 반전 평화 운동을 책임지는 데 있어서 일본공산당은 유의미한 주체로 활동하고 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볼 때 일본의 사회운동이 이토록 급속하고도 철저하게 쇠퇴한 현상에 있어서 공산당의 책임은 이루 말할 수 없이 크다.

그러한 책임의 직접적인 근원은 45년부터 60년경 사이 전후 일본의 정치적 체제가 자리 잡던 시기 일본공산당이 드러낸 경로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고야마의 이 노작은 주로 당내 투쟁에 많은 분량을 할애하고 있기는 하나, 패전/해방에서 안보투쟁 전야에 이르는 시기 공산당을 중심으로 한 일본 노동자운동의 흥망성쇠에 대해 중요한 교훈을 제공하고 있다. 본 서평에서는 “전후 일본의 공산당사”에 나타난 일본 공산당의 흥망성쇠를 먼저 살펴보고, 여기에서 얻을 수 있는 마르크스주의 혁신의 과제를 살펴 보고자 한다. 먼저 고야마의 설명에 따라 일본공산당이 전후 걸어간 길과 그 과정에서 나타난 문제점들을 살펴보자.

1945년 패전/해방 이후 출옥하는 도쿠다 규이치 등의 일본 공산당 간부진, 그리고 이를 환영하는 대중의 모습
1945년 패전/해방 이후 출옥하는 도쿠다 규이치 등의 일본 공산당 간부진, 그리고 이를 환영하는 대중의 모습

대중운동의 자율성을 인정하지 않는 조직론

45년 패전/해방 이후 도쿠다 규이치, 시가 요시오, 미야모토 겐지 등을 비롯한 출옥 공산주의자들은 막중한 대중적 신뢰와 이에 수반되는 책임을 안고 오랫동안 중앙이 해체되었던 당의 재건에 앞장서야 했다. 여기에 노사카 산조 등 중국 옌안 지역에서 탈영하거나 포로가 된 일본 병사들과 반제국주의 및 반전 운동을 이끌던 활동가들이 귀국하여 합류했다.

일본공산당 지도부는 노선에 있어서 재건 초기부터 매우 혼란스러운 모습을 보였다. 당은 전략적으로는 미군을 해방군으로 인정하고 군정에 협조하고자 하였으며, 미군 점령하에서도 의회를 통해 평화적으로 혁명을 이룩할 수 있다는 ‘점령하 평화혁명’ 노선을 ‘노사카 이론’으로 정립했다.

그러나 전술적으로는 통일전선을 폭넓게 구축하기보다 오직 ‘천황제 타도’에 동의하는 정치세력만을 연합의 대상으로 두겠다는 분파적 모습을 보이며 새롭게 건설된 사회당을 비롯한 여러 운동 주체들을 배격하였다. 노동조합 운동을 비롯한 대중운동에 있어서도 각 부문 운동의 전국적 통합을 촉진하기보다는 시대착오적인 이른바 ‘적색노조주의’(1920년대 코민테른이 사회민주주의적 혹은 조합주의적 노동조합을 대체할 ‘적색노조’를 기존의 노동조합과는 별도로 건설하게 했던 방침)에 입각하여 당이 직접적으로 동원할 수 있는 분파적인 조직을 건설하는 데에만 앞장섰다.

조직론적으로 볼 때 일본공산당은 노동조합 등 대중조직 내에 사실상의 당원 ‘세포조직’을 만들어 수직적으로 지도하려고 시도했다. 이러한 조직론은 대중조직이 가져야 할 자율성을 훼손하는 방식으로 작동했다. 대중운동과 넓은 공동투쟁에 나서기보다 당이 장악한 분파화된 대중조직을 동원하는 데에만 앞장선 전후 일본공산당의 오랜 문제점은 여기에서부터 비롯되었다.

대중운동에 대한 이러한 분파주의적 태도는 패전/해방 이후 운동이 급속하게 고양됨에 따라 그 병폐를 명백히 드러냈다. 1947년 초에는 당과 긴밀히 연계된 일본산업별노동조합회의(산별회의)에 주로 조직되었던 공공부문 노동자들의 2.1 총파업이 예고되었다. 그러나 당 중앙은 파업 금지 명령을 내린 맥아더 군정과의 마찰을 우려하고 있었다. 당이 무리하게 산별회의의 의사결정에 개입하여 파업투쟁을 좌초시키자 노동자운동 내에서 공산당에 대한 신뢰는 낮아졌고, ‘노동조합 운동의 자율성’이란 슬로건 아래 민주화동맹 등의 새로운 경향이 성장했다.

결국 일본공산당과 밀접한 산별회의는 후일 몰락하고 민주화동맹의 후신인 일본노동조합총평의회(미군정의 후원 아래 일본공산당과 산별회의를 견제하기 위한 반공주의적 목적으로 1950년 만들어진 조직이나 60년 안보투쟁과 호헌평화운동 전후 대표적 좌파 노동조합으로 급진화함)와 사회당 좌파에 노동자운동의 주도권을 내주게 된다.

도쿠다 규이치와 시가 요시오 등 일본공산당의 출옥 동지들이 1945년 10월에 발표한 ‘인민에게 고함’.
도쿠다 규이치와 시가 요시오 등 일본공산당의 출옥 동지들이 1945년 10월에 발표한 ‘인민에게 고함’.

손바닥 뒤집듯 바뀌는 노선

한편 서기장 도쿠다를 비롯한 당권파들은 ‘분파 배격’을 명분으로 당내 여러 경향이 지녀야 할 언론의 자유마저도 탄압하고, 급속하게 성장한 당 관료층을 배경으로 개인숭배적이고 권위적인 ‘가부장적 지배’를 공고히 해나가고 있었다. 각국 공산당에서 ‘작은 스탈린’들에 대한 개인숭배가 횡행했듯, 도쿠다를 ‘민족의 아버지’이자 ‘무오류의 지도자’로 그리는 기풍이 당내에 만연하였다. 그런 과정에서 지속적으로 고수되었던 ‘점령하 평화혁명’ 노선은 점차 현실과 멀어져 갔다. 농지개혁이나 재벌개혁을 비롯한 미군정의 일정한 민주개혁 정책은 냉전의 격화 속에서 반공주의적 ‘역코스’로 선회하였고, 연합군 최고사령부가 여러 공공부문과 언론, 대학, 사업장 에서 좌익을 강력하게 탄압하는 ‘레드 퍼지(Red Purge)’가 시행되고 있었다. 1950년 초 공산당계의 국제적 정보기구인 코민포름이 기관지 “항구적 평화와 인민민주주의를 위하여” 지에 익명으로 논문을 실어 미군정에 협조적이던 ‘노사카 이론’을 비판한 일, 이후 중국공산당이 베이징으로부터 몇 차례 일본공산당에 대한 비판을 개진한 일은 그동안 억제되어 있었던 분파투쟁의 시발점이 되었다.

냉전이 격화되는 과정에서 ‘점령하 평화혁명’노선이라는 안온한 정세 인식에 대한 비판은 당연히 제기될 만 했다. 그러나 각국 당의 자율성을 존중하지 않은 채 국제당의 역할을 자임한 모스크바 코민포름의 일방적, 권위적 비판은 오히려 문제를 심화시켰다. 더군다나 일본공산당은 1920년대부터 소련이 각국 운동을 지도해야 한다는 코민테른의 왜곡된 국제주의에 깊이 침윤되어 온 상황이었기에, 모스크바와 베이징의 지침은 당에 일대 혼란을 가져오게 된다.

1945~46년기 일본공산당의 3대 지도자였던 도쿠다 규이치, 노사카 산조, 시가 요시오의 화목한 한 때. 대중운동의 고양과 당의 성장 속에서 모두가 고무되었던 때였으나, 이후 극렬한 분파투쟁과 반목이 이어질지 이들은 미처 알지 못했다.
1945~46년기 일본공산당의 3대 지도자였던 도쿠다 규이치, 노사카 산조, 시가 요시오의 화목한 한 때. 대중운동의 고양과 당의 성장 속에서 모두가 고무되었던 때였으나, 이후 극렬한 분파투쟁과 반목이 이어질지 이들은 미처 알지 못했다.

공산당 서기장 도쿠다 규이치, 그의 관료적 측근인 이토 리쓰(도쿠다 공산당 서기장의 측근으로 당에서 막대한 권력을 장악했던 인물)와 시다 시게오 등 당내 다수파는 해당 비판을 일정하게 수용하였다는 ‘소감’을 발표하며 ‘소감파’를 형성한다. 한편 그동안 당권파에 대해 비판의식을 키워온 시가 요시오, 미야모토 겐지 등의 소수파는 국제당의 비판을 더욱 철저하게 수용하여 미군정에 대항하는 투쟁을 조직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국제당의 권위에 비판의 정당성을 의존한 이들 소수파는 이후 ‘국제파’로 불리게 된다.

한국전쟁의 개전과 함께 미군정의 역코스 정책이 가속화하고 당 중앙이 공직추방을 당하게 되자, 도쿠다를 비롯한 주류파는 당 규약과 절차를 무시하며 비합법 지하 지도부를 구성하기에 이른다. ‘소감파’ 당 지도부는 이후 합법적 당 기구를 지하 지도부의 지침을 받는 ‘창구’로 전락시킨다. 이러한 과정에서 1951년에 이르면 사실상 ‘소감파’와 ‘국제파’는 별개로 두 개의 당 조직을 꾸리고 선거도 따로 치르게 되는 등 극단적인 분열상을 보인다.

전쟁 전의 쟁쟁한 당 이론가 후쿠모토 카즈오(전쟁 이전 마르크스주의 운동의 명사로 대중운동과 분리된 전위의 이론투쟁을 우선시하는 ‘후쿠모토주의’로 초기 일본공산당에 지대한 영향을 미침)나 노동자운동에 오랫동안 종사한 가미야마 시게오(노동조합 운동 등 대중운동의 자율성을 강조하였으며 이론적으로 강좌파의 전통적 입장 대변해온 활동가) 등 양파의 분열을 다른 방식으로 해소하고자 노력한 비판적 경향들도 존재했으나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결국 51년 후반이 되자 다시 코민포름이 수직적으로 개입하여 분파투쟁에서 주류파인 ‘소감파’의 손을 들어주고 만다. 그동안 비판의 준거를 국제당의 권위에 두어온 ‘국제파’는 코민포름의 지침에 따라 무조건적으로 당 주류파 지배체제에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비자주적으로 이루어진 갈등의 ‘봉합’ 속에서 이전에 ‘점령하 평화혁명’을 외쳐왔던 도쿠다 등은 막대를 거꾸로 구부리며 오히려 무장투쟁과 군사방침을 강하게 내세웠다. 그동안 당권파의 온건성을 비판해 온 비주류파들도 모험주의적인 군사투쟁을 맹종할 수밖에 없었다. 이제 일본공산당은 패전 이후의 일본을 일종의 식민지적 상태로 인식하고 미국의 점령에 정면으로 대항하는 민족해방 혁명을 주창하며 본격적인 폭력투쟁에 돌입하게 된다.

1952년 도쿄에서의 노동절 시위가 유혈사태로 이어진 ‘피의 메이데이’ 사건. 고양된 대중의 정서를 혁명 정세인 것으로 오인한 일본공산당은 이후 본격적으로 극좌 모험주의적인 무장투쟁 노선을 현실화하여 화염병 투쟁으로 나아가기 시작한다.
1952년 도쿄에서의 노동절 시위가 유혈사태로 이어진 ‘피의 메이데이’ 사건. 고양된 대중의 정서를 혁명 정세인 것으로 오인한 일본공산당은 이후 본격적으로 극좌 모험주의적인 무장투쟁 노선을 현실화하여 화염병 투쟁으로 나아가기 시작한다.

무장투쟁과 숙청의 비극

1952년 5월 1일 도쿄의 인민광장(황거광장)에서의 가두 투쟁이 유혈 사태로 이어진 ‘피의 메이데이’ 투쟁으로부터 극좌 모험주의의 비극은 본격화되었다. 군정 종식 이후 대중적으로 고조된 열기를 당 지도부는 혁명 전야의 정세인 것으로 착각하고 있었다. 당의 방침에 따라 각지에서 중핵 자위대가 조직되어 무력시위와 화염병 투쟁에 돌입하였고, 농촌에서는 향후 인민유격대로 전화하여 빨치산 투쟁을 벌일 목적으로 산촌공작대가 조직되었다. 그러나 당대 일본의 현실과는 동떨어진 무장 혁명 노선은 대중의 외면만을 불러왔다.

미군정의 강력한 탄압은 1952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의 발효와 미일안전보장조약의 체결, 군정 점령의 종식을 통해 점차 약화하던 상황이었다. 한편 형식적으로 ‘독립’된 국가가 수립되는 국면에서 점차 새롭게 대중적인 정치 공간이 열려가고 있었다. 그러나 무장투쟁의 결과로 일본공산당은 이제 총선에서 국회의원 당선자도 내지 못하는 상태로 전락하였다. 그 와중에 스이타 투쟁이나 히라카타 투쟁 등을 통해 군수공장을 공격하고 무기를 수송하는 철로를 봉쇄하는 등 한국전쟁에 대한 전투적 반전운동에 가장 앞장섰던 재일조선인 노동자와 학생 활동가들은 투쟁 일선에서 많은 희생을 경험해야 했다.

한편 이 시기 도쿠다를 비롯한 지하 지도부는 중국 베이징에 망명한 채 해외에서 모험주의적 투쟁을 지도하고 있었는데, 53년경 도쿠다가 망명지에서 사망하자 파벌 투쟁은 최고조로 치달았다. 주류파에 무조건적으로 투항했던 ‘국제파’는 여전히 무력한 가운데, 주류파 관료들 사이에서는 서로를 스파이로 몰거나 당내 문제의 책임을 개인의 부정부패로 떠넘기는 방식의 권력 다툼이 이어졌다. 그 가운데 전당적으로 벌어진 ‘총점검운동’은 당내 각 기구에서 적의 스파이를 색출하여 조직을 점검한다는 명분으로 진행되었다. 이 사태는 가장 말단의 기층 기구인 ‘세포조직’에 이르기까지 폭력적 린치와 숙청을 횡행하게 하여 운동에 깊은 상흔을 남겼다. 1930년대 군국주의적 탄압 속에 폭력 투쟁과 내부숙청으로 당을 사실상 완전히 파괴했던 당내 린치와 숙청의 비극이 다시금 반복된 것이다.

1950년대 초 일본공산당의 무장투쟁 시기 경찰에 체포되는 산촌공작대원. 산촌공작대는 빈농을 주체로 민족해방 토지혁명을 이루기 위해 농촌과 산간 지대에서 조직되었으며 이후 인민해방군으로 전화할 것을 기대받았으나, 유격대로서 제대로 활동하기 어려운 조건에서 와해되었다.
1950년대 초 일본공산당의 무장투쟁 시기 경찰에 체포되는 산촌공작대원. 산촌공작대는 빈농을 주체로 민족해방 토지혁명을 이루기 위해 농촌과 산간 지대에서 조직되었으며 이후 인민해방군으로 전화할 것을 기대받았으나, 유격대로서 제대로 활동하기 어려운 조건에서 와해되었다.

말뿐인 통합, 허울뿐인 반성

무장투쟁과 린치 속에 심각해진 비극을 수습하는 계기는 1955년의 제6차 전국협의회(6전협)가 결정적이었다. 6전협은 도쿠다 서기장의 죽음 이후 ‘소감파’와 ‘국제파’ 사이의 타협 속에 당의 통일을 이루고 화염병 투쟁, 유격투쟁 등 무장투쟁에 매몰되었던 이전의 극좌 모험주의 노선을 비판적으로 평가하는 장이 되었다. 6전협을 즈음하여 중국에서 사망한 도쿠다의 시신을 ‘소감파’의 대표자인 시가 요시오가 일본으로 가져온 일은 양대 파벌의 통합을 통한 당 통일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순간이었다. 좌파 우위의 사회당 통합, 이에 대응한 자민당의 통일, 노동조합 운동에서 산업별 춘계생활투쟁의 시작 등과 함께 6전협을 통한 일본공산당의 통일은 일본 정치와 사회를 지탱한 ‘55년 체제’에서 하나의 주요한 축이 된다.

물론 6전협과 일본공산당의 통합은 지하 지도부의 잘못된 노선과 불법적인 당 운영을 비판하는 성과를 남겼다. 그러나 이러한 비판은 아래로부터의 토론과 논쟁이 아닌, 위로부터 주요 분파 지도자들 간의 타협을 통해 이루어졌기에 철저할 수 없었다. 당내의 불법행위에 대한 규탄도 당 간부 개인의 생활 태도나 품성 등을 비판하고 책임자를 배제하는 방식으로 진행하여 책임을 개인화하고 있었다. 당권파 관료 이토 리쓰를 ‘스파이’로 낙인찍어 숙청한 사건, 이토의 숙청에 앞장섰던 시다 시게오를 이후 당권을 잡은 미야모토 겐지가 부정축재 등을 이유로 실각시킨 사건 등은 당 조직의 구조적 책임보다 개인에게 책임을 떠넘기는 방식의 문제 해결을 상징적으로 보여주었다.

‘소감파’나 ‘국제파’를 막론하고 당내 그 누구도 대중운동을 분파주의적으로 동원하려는 정치, 국제적 권위에 맹종하며 정치적 정당성을 획득해온 당의 존재 양태, 활발한 토론과 이론적 논쟁을 등한시하고 도덕적 권위에 의존해온 기풍에 대해 구조적이고 공동체적인 책임을 피할 수 없었다.

1955년 6전협과 동시에 개최된 일본공산당 건설 33주년 기념식. 6전협을 전후하여 주류파 비합법 지하 지도부의 오류가 비판되었고 주류파와 비주류파를 통합하는 당의 통일이 이루어졌지만, 고인이 된 도쿠다 규이치 서기장을 "민족의 지도자"로 칭송하여 거대한 초상화로 개인숭배하는 당의 스탈린주의적 면모는 제대로 청산되지 않았음이 드러난다.
1955년 6전협과 동시에 개최된 일본공산당 건설 33주년 기념식. 6전협을 전후하여 주류파 비합법 지하 지도부의 오류가 비판되었고 주류파와 비주류파를 통합하는 당의 통일이 이루어졌지만, 고인이 된 도쿠다 규이치 서기장을 "민족의 지도자"로 칭송하여 거대한 초상화로 개인숭배하는 당의 스탈린주의적 면모는 제대로 청산되지 않았음이 드러난다.

그러나 문제에 대한 책임은 ‘꼬리 자르기’로 이어져 당의 무장투쟁 지침을 가장 일선에서 담당했던 재일조선인 활동가와 그 외 운동가들이 오히려 6전협 전후 비판과 처분의 대상이 되었다.

한편 6전협 전후 기관지 “아카하타(赤旗)” 지를 비롯하여 당과 유관한 여러 지면에 오랜만에 언론의 자유가 보장되면서 남성 당 활동가들의 가부장적 생활에 대한 여성들의 가감 없는 비판이 제기되기도 했다. 대중의 동의에 바탕하지 않는 관료주의적 사업 집행 방식에 대한 문제 제기도 분출하였다. 그러나 언론을 통해 아래로부터 제기된 이러한 문제의식은 당내에서 제대로 수용되지 못했다.

1956년 흐루쇼프의 스탈린 격하와 소련의 헝가리 침공이 국제 공산주의 운동 전체에 큰 충격을 주면서, 기존 일본공산당의 불철저한 반성은 다시금 도마 위에 올랐다. 스탈린 비판은 겉으로는 ‘스탈린주의 청산’의 바람을 당내에 만연하게 만들었지만, 공산당 지도부는 스탈린주의를 6전협 전후에 이미 극복된 편향으로 취급하거나 혹은 일본의 운동과는 무관한 ‘외재적’인 문제로 인식하여 형식적으로 비판하고 있었다.

  • 헝가리 침공 : 1956년 소련의 지배에 대해 헝가리 민중이 항의하고 너지 임레의 헝가리 사회주의 노동자당 개혁파 지도부가 민주적이고 자주적인 사회주의 노선을 추구하자, 흐루쇼프 체제 하의 소련이 헝가리를 침공하여 민중봉기를 진압하고 친소 정권을 수립했다.

그동안 일본 공산당이 취해온 당 조직론과 운동론의 양태는 당이 결정한 지침을 전달벨트와 같이 대중조직에 하달하여 동원하는 모습이었고, 당이 대중적으로 보급해온 공산주의 노선의 상은 지도자에 대한 개인숭배로 가득했다. 국제적으로 당이 맺어온 관계들도 소련의 대국주의적인 지침을 일방적으로 맹종하는 방식이었는데, ‘스탈린주의’로 지칭될 수 있는 이러한 속성들에 대한 솔직한 반성과 비판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1958년 제7회 당대회를 전후하여 6전협의 당 통일은 점차 구 ‘국제파’ 중심으로 재편되어갔다. 과거 코민포름에 의해 ‘분파주의자’로 지목당했던 구 ‘국제파’ 중심의 지도부가 이제는 구 ‘소감파’의 비합법 지도부 운영을 불법적인 것으로 규정하고 무장투쟁 시기의 과오 등을 더 철저하게 비판해 나갔던 것이다. 그러나 대중적인 토론을 봉쇄한 채 근본적인 문제는 회피하며 진행된 위로부터의 청산은 당의 체제내화를 더욱 가속화할 뿐이었다.

화염병 투쟁과 유격대가 사라진 자리에는 ‘노래하자 마르크스 춤추자 레닌’ 같은 구호와 ‘노랫소리 운동’, ‘아카하타(赤旗) 페스티벌’이 들어섰고, 문예운동과 선거운동이 당의 유일한 실천으로 자리 잡았다. 이전의 무장투쟁 노선을 청산한 ‘6전협’ 과정에서 ‘6전협 노이로제’라 일컬어지는 충격을 받은 급진적 활동가들, 그리고 1956년 스탈린 비판과 헝가리 침공을 바라보며 공산당내 스탈린주의 청산의 불철저함에 실망한 활동가들은 점차 당을 떠나거나 혹은 당에서 제명되어갔다. 특히나 당이 이전에는 학생들을 화염병 투쟁의 선도조로 이용하다 점차 학생운동의 독자적 위상을 부정하게 되자, 전일본학생자치회총연합(1948년 일본공산당의 영향력 하에 결성된 각 대학 학생회의 전국적 연합조직으로 전투적인 무장투쟁의 조직적 주체로 활동)에서 활동하던 학생 세포들은 대거 집단적으로 제명되거나 당을 탈당하여 급진적 신좌파 학생운동으로 이행하였다. 신좌파 운동으로 이어지는 새로운 운동의 경향에 대해 당 지도부는 ‘수정주의자’나 ‘트로츠키주의자’라는 구 스탈린주의의 용어를 사용하며 비방하기에 급급했다. 열린 논쟁과 토론이 사라지는 당을 바라보며, 고야마는 당의 안팎에서 기존 당의 교조적 지도에서는 일정한 거리를 두는 ‘독립 마르크스주의’ 그룹들에 마르크스주의 혁신의 희망을 걸었다.

55년 6전협 전후로 도쿠다 서기장을 추도하는 당 지도부의 모습. ‘소감파’와 ‘국제파’의 통합된 당 지도부의 모습을 보여주지만, 6전협을 통한 통합과 반성은 허울뿐인 것이었다.
55년 6전협 전후로 도쿠다 서기장을 추도하는 당 지도부의 모습. ‘소감파’와 ‘국제파’의 통합된 당 지도부의 모습을 보여주지만, 6전협을 통한 통합과 반성은 허울뿐인 것이었다.

스탈린주의에 대한 스탈린주의적 청산

지금까지 저자가 서술한 약 15년 간의 당사를 통해, 패전/해방과 냉전 격화, 그리고 스탈린 격하를 거치는 기간 동안 나타났던 일본공산당의 다양한 문제점들을 살펴보았다. 그렇다면 이러한 문제에 대한 대응으로서 제기되었지만 근본적인 위기의 극복으로는 이어지지 못한 미봉책, 즉 ‘스탈린주의에 대한 스탈린주의적 청산’이 오늘날 우리에게 어떠한 교훈을 남기고 있는지 살펴보자.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스탈린 비판과 헝가리 침공은 마르크스주의의 위기가 지닌 심각성을 명백하게 드러냈다. 스탈린 개인숭배 아래에서 자라난 다양한 역사적 병폐들이 폭로되고, 타국에 대한 군사적 개입을 통해 소련의 대국주의적 태도와 각국 공산당들의 비자주적 외교 실상이 노골적으로 드러나면서 대중적인 충격이 무척 컸다. 기성 공산당 운동에 대한 신뢰가 무너지면서 그동안 대중적으로 보급되어온 형태의 마르크스주의가 더는 보편적 해방의 이론으로 인정받지 못하게 되었고, 이러한 모순을 쇄신할 수 있는 마르크스주의의 혁신이 심각하게 요구되었다. 그러나 일본공산당은 근본적 문제를 방기하는 허울뿐인 쇄신에만 몰두하며 이러한 혁신의 요청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데 실패했다.

일본공산당의 비극적 역사에 대한 서술 속에서 고야마는 어떠한 경향들을 ‘스탈린주의’로 지칭하고 비판했던 것일까? 고야마에게 ‘스탈린주의’는 단순히 흐루쇼프의 제20차 소련 당대회 스탈린 격하 연설을 통해 비판된 개인숭배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었다. 경직된 조직 속에서 당을 전달벨트처럼 이용하며 위로부터 관료적으로 수립된 지침을 권위적으로 하달하는 의사결정 방식, 그러한 정치적 지침에 따라 대중의 동의 정도와 무관하게 대중조직을 동원하는 대중운동의 분파화와 종속화, 일체의 독립적인 이론적 연구도 아래로부터의 창의적인 실천도 봉쇄하는 교조주의, 그리고 혁명 중심지로 상정된 소련의 대국주의적 노선과 지침을 맹종하고 당내 논쟁의 정당성마저도 그러한 국제적 권위에서 찾는 비주체적 타성이 고야마가 바라본 일본공산당 내 ‘스탈린주의’의 실체였다. 일본공산당의 지도에서 독립적인 ‘독립 마르크스주의’ 운동의 이론과 실천에 스탈린주의 극복과 마르크스주의 혁신의 기대를 걸었던 고야마의 희망은 과연 이루어졌는가?

고야마가 주축이 되어 결성한 ‘전기의 마르크스’파를 비롯하여 당내에서 독립적 운동을 이어나가던 세력들은 60년대 초에 이르러 대부분 당에서 제명되기에 이른다. 한편 당 밖에서 새로운 마르크스주의 운동을 이어나가려던 공산주의자동맹계열과 혁명적공산주의자동맹 계열의 신좌파 분파들도 60~70년대 활발한 대중투쟁의 고양기를 이끌었지만 결국 자기 안에 내재된 한계를 극복하지 못했다. 운동을 이끌던 조직적 주체들은 운동의 주체 자신도 스스로 변화되어야 한다는 점을 잊고 지도자로서의 자신을 무오류로 상정하는 왜곡된 모습을 보였다. 이러한 태도는 대중운동이 쇠퇴하는 시기에 누가 ‘정통성’을 갖고 대중을 지도하는 당을 건설할 것인가를 두고 각 정파들이 항쟁하게 만들었다. 여러 분파들 간의 유혈적 린치로 얼룩진 ‘우치게바’(내부라는 뜻의 일본어 ‘우치(うち)’와 폭력을 뜻하는 독일어 ‘게발트(Gewalt)의 합성어로, 사회운동 내 여러 정파들의 폭력적 항쟁을 의미)의 비극은 그런 교조적인 조직적 태도에서 비롯된 것이다. 게다가 스탈린주의 청산과 비판을 외쳐온 주체들도 가부장적이고 권위적인 조직 운영 속에 벌어지는 운동의 쇠퇴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한편 일본 공산당은 중소분쟁을 통한 국제 공산주의 운동의 분열 국면에서 중소 모두에 거리를 두는 위치로 스스로를 자리매김하지만, 기존의 스탈린주의적 노선과 조직 운영 행태에는 큰 변함이 없었다. 오히려 당 관료를 중심으로 하는 조직 지배와 다양한 경향의 열린 토론을 허락하지 않는 기풍은 더욱 강화되고 경직되어 갔다. 중소 모두에서 거리를 두는 자주 노선은 국제주의의 회복이 아닌 민족주의의 강화로만 나타났으며, 이견을 가진 주체들을 제명하는 형태의 당내정치가 횡행했다. 문예운동을 강조하던 당의 운동은 60~70년대의 활발한 투쟁에서 거리를 두었고, 오히려 운동을 주도하던 신좌익을 ‘수정주의자’나 ‘트로츠키주의자’라고 매도하며 각목을 들고 진압하기에 이르렀다.

1969년 11월 야스다 강당 투쟁으로 유명한 도쿄대 투쟁에서 좌측의 일본공산당계 민청이 우측의 전공투 학생들을 진압하고자 공격하고 있다.
1969년 11월 야스다 강당 투쟁으로 유명한 도쿄대 투쟁에서 좌측의 일본공산당계 민청이 우측의 전공투 학생들을 진압하고자 공격하고 있다.

이러한 경직된 노선이 심각한 이견이나 치열한 당내 투쟁도 없이 전당에 걸쳐 관철되었다는 사실과 당이 휘하 대중조직들을 손쉽게 동원할 수 있었다는 점은 공산당이 지녔던 병폐가 해결되기는커녕 더욱 고착화되었음을 보여주는 증거였다.

스탈린주의에 대한 ‘스탈린주의적’ 청산이 지닐 수밖에 없었던 모순과 한계는 마르크스주의 운동이 역사적으로 거쳐온 경험 속에 스탈린주의의 문제가 얼마나 깊숙이 침윤되어 있는지를 드러낸다. 이는 전위정당으로서의 역할을 자임하는 운동이든 혹은 전위정당의 조직 양태를 부정하는 운동이든, 정치조직과 대중조직의 이분법을 넘어 사회운동 전반이 고민해야 할 마르크스주의의 위기를 보여준다. 대중자치로서의 공산주의를 지향하는 마르크스주의 정치에 있어서 운동 조직과 대중의 관계, 그리고 운동 조직 내 다양한 경향 간의 관계는 쉽게 풀기 어려운 문제다. 마르크스주의 운동에서 주된 조직 형태가 되어온 ‘당’이라는 양태가 근본적으로 문제라고 단언하기도, 혹은 역으로 ‘당’이라는 형태 자체에는 문제가 없다고 단언하기도 어렵다.

다만 전후 일본공산당의 역사는, 그것이 전위당이든 그렇지 않든, 운동의 주체가 되어야 할 조직은 언제나 스스로를 혁신의 대상으로도 바라볼 수 있어야 함을, 스스로를 변화시키면서 만들어나가는 해방의 동력이 운동의 근간이어야 함을 보여준다. 폐쇄적인 당과 정치조직이 지침을 전달벨트를 통해 운동에 관철하는 형태를 극복하고, 정치적 조직 주체가 스스로를 대중운동 및 이와 연계된 논쟁에 개방시키고 운동과 토론 속에서 스스로를 변화시켜나갈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한 인식 없이 몇 가지 정책을 변경한다거나 몇 가지 외재적 관계를 변화시킨다고 해서 운동에 내재된 스탈린주의의 문제를 해소해 냈다고 이야기할 수는 없다. 프롤레타리아 독재론을 서둘러 폐기하고 유로코뮤니즘으로의 전환을 주창했던 서구 유럽 공산당들이 끝내 자기 내부의 스탈린주의적 조직 지배는 청산하지 못한 채 한계를 내보였던 역사를 우리는 세기 말에 보아왔던 것이다.

아울러 확실한 것은 대중운동의 자율성을 인정하지 않고 분파주의적으로 동원하려는 정치, 운동에서 무오류의 도덕적 ‘정통성’을 찾고 그 권위에 맹종하려는 비주체적 태도는 운동 주체의 자기-혁신을 불가능하게 한다는 점이다. 운동과 운동 사이, 운동과 대중 사이, 그리고 운동 내의 주체들 사이에서 나타나는 모순을 어떻게 자율적인 토론을 통해 해결해 나갈지에 대한 지난한 고민을 통해서만 운동 주체의 자기-혁신이 가능할 것이다.

고야마는 스탈린주의 비판을 외재적인 문제가 아닌, “공산주의자로서 자기 자신의 존재형태”에 대한 내재적인 문제로 보아야 한다고 외쳤다. 왕년에 스탈린주의적 노선에 공명했던 이론가의 외침은 자기 자신을 포함한 일본 공산당 운동가 모두가 운동 주체로서 자기 자신과 자신의 조직을 되돌아보고 책임을 통감해야 한다는 촉구였다. 이제는 식상할 정도로 오랫동안 이야기되어온 ‘마르크스주의의 위기’ 속에서 다양한 독립적 이론과 실천으로 운동의 부흥을 도모하는 모두에게, 스스로를 운동과 논쟁에 개방하는 열린 토론으로 자기-혁신을 이루자는 고야마의 촉구는 여전히 유의미하게 다가올 것이다. 🥴

글 : 이재현
교열 : 김지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