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사회운동 논쟁 | ② 전후 일본공산당의 오류
2022년 12월 31일
고야마 히로타케 저, 최종길 역, 『전후 일본의 공산당사 : 당내 투쟁의 역사』 서평
도덕적 권위에서 정당성을 찾아온 정치
지난 “일본 사회운동 논쟁사” 시리즈 1편에서는 고야마 히로타케(小山弘健)의 『일본 자본주의 논쟁사』를 통해 각각 전후 일본공산당과 사회당 좌파로 이어지는 강좌파와 노농파의 입장을 살펴보았다. 당시 강좌파와 노농파의 자본주의 논쟁은 급속한 자본주의적 근대화와 반봉건 유제(봉건 유제란, 근대 사회에 남아 있는 봉건적 사상, 감정, 관습, 제도를 가리킨다)가 동시에 나타나던 비서구에서 국가와 사회 및 경제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지를 중심으로 벌어졌다. 이러한 논쟁은 필연적으로 운동 전략에 대한 논의로 이어졌다. 반봉건성과 천황제를 강조하던 강좌파와 공산당 계열은 민족해방 토지혁명과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을 우선적 과제로 바라보는 2단계 혁명론을 채택했고, 독점자본주의와 제국주의의 고도화를 중시하던 노농파와 사회당 좌파는 노동자계급 중심의 사회주의 혁명을 당면 과제로 삼았다.
그렇다면 1945년 패전과 해방 이후, 이러한 변혁 전략을 채택하였던 일본 좌파의 사회운동은 어떻게 전개되었을까? 강좌파와 공산당의 입장에서 자본주의 논쟁사를 정리했던 고야마는 전후 일본 사회운동이 마주한 난점들을 고찰하며 점차 새로운 정치적 입장으로 이행하게 된다.
1958년에 쓰인 『전후 일본의 공산당사 : 당내 투쟁의 역사』는 고야마 히로타케가 전후의 정치적 격변을 경험하며 공산당에서 정치적으로 소외된 이후 내놓은 노작이다. 사실상 일본공산당내 영향력을 잃은 고야마는 당의 지도와는 독립적으로 활동하던 마르크스주의 연구자들과 함께 사회경제노동연구소를 꾸리고 일본 사회운동사에 대한 문헌 편 찬 작업을 정력적으로 진행하고 있었다. 불과 5년 전 “일본 자본주의 논쟁사”에서 일본공산당의 ‘정통성’에 대한 천착과 스탈린주의적 편향을 보였던 고야마는 이 시기에 당에 대한 격렬한 성토와 비판으로 돌아선다.
몇 년 전만 해도 코민테른 중심의 공산당 노선에 깊이 공감했던 고야마가 비판적 입장으로 돌아서면서 어떠한 오류들을 ‘스탈린주의’로 정의했는지 이 책에 분명하게 나타나 있지는 않다. 다만 이 책에서 드러난 일본공산당의 비극적인 역사를 살펴본 이후, 그 오류와 한계를 통해 나타난 스탈린주의의 요소들을 경험적으로 추출해 보는 것은 분명 유의미할 것이다.
당시 고야마와 사회경제노동연구소의 이론가들은 전쟁 전후의 일본 노동자운동사, 사회당과 공산당의 당사를 비판적으로 정리하고 총괄하는 작업에 매진했다. 이들이 기술한 민중운동사는 불굴의 의지로 억압을 극복하는 민중의 역사이거나 도덕적인 우위 속에 운동의 정통성을 지켜온 혁명가들의 서사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들의 작 업은 주체의 의지에 대한 낭만화된 신화와 운동의 도덕화가 드리운 장막을 걷어내고 정세에 맞지 않는 온갖 편향과 각종 교조(사고방식이나 태도가 한 가지 신념이나 원칙에 사로잡혀 경직되어 있는 것)를 있는 그대로 드러내고자 했다. 당시 일본공산당에서 이루어진 논쟁과 당내 투쟁, 그리고 그러한 논쟁이 일본 사회운동 전반에 미친 영향에 대해 살펴보는 일은 일본 사회운동이 처한 난관의 기원을 살펴본다는 점에서 유의미할 것이다.
지금도 일본공산당의 공식 당사는 전쟁 전후의 운동사를 숭고한 의지의 도덕적 전진이라는 서사로 그려내고 있다. 그 과정에서 코민테른의 지도에 강력하게 장악되었던 일본공산당의 오류는 잘 드러나지 않게 되었고, 분파투쟁 속에 발생한 많은 희생자들은 망각되었으며, 재일조선인 투사들은 그 누구보다 투쟁에 앞장섰지만 결국 당으로부터 배제되어버렸다. 또한 손바닥 뒤집듯 노선과 전략을 바꾸면서도 정세에 조응한 실천을 조직하지 못했던 치명적인 한계들은 가려졌다.
일본공산당은 사실 1945년 패전과 해방 이후 재건의 과정을 거치면서부터 이미 주체의 도덕적 의지를 강조하면서 ‘정통성’을 확립해왔다. 전쟁 전에 왜 그토록 많은 공산당원이 세계사적으로도 이례적인 대규모 전향을 경험했는지에 대해서는 제대로 질문하지 않은 채, 오랜 기간 감옥에서 비전향을 유지한 출옥 지도자들의 도덕적 무결함만을 정치의 정당성으로 삼았던 셈이다.
수많은 사회주의자들이 군국주의의 광풍속에 전향해온 조건에서, 전후 초기에는 분명 그러한 도덕적 정당성이 가장 강력한 대중적 조직의 기제가 되 었다. 그러나 오랜 혼란과 이에 대한 권위적인 처분으로 당에서 소외된 다수의 활동가층은 1960년 안보 투쟁을 기점으로 공산주의자동맹(1958년경 전일본학생자치회총연합에서 활동하던 일본공산당 학생운동가들이 당에서 제명된 이후 결성한 신좌익 정파)과 혁명적공산주의자동맹(일본 트로츠키주의자 연맹의 후신으로 1957년에 결성된 트로츠키주의 계열의 신좌익 정파)으로 양분되는 신좌파 섹트(Sect, 분파) 운동으로 이탈했다.
68혁명의 시기 기성정당으로서의 공산당과 새로이 부상한 신좌익 운동이 긴장과 갈등을 빚었던 것은 프랑스나 이탈리아 등에서도 나타났던 보편적 현상이었다. 그러나 공산당의 일본민주청년동맹(1923년 설립된 일본공산청년동맹의 후신으로서 전후 설립된 일본공산당 관련 청년조직)이 경찰에 앞장서 신좌파와 전학공투회의(1960년대 후반기에 학내의 여러 신좌파 학생들이 여타 학생들과 함께 학교 전체에서 공동투쟁을 하기 위해 꾸린 연합체)의 대학 투쟁을 진압하는 용역 역할을 해온 모습은 일본이 아니라면 찾아보기도 어렵고 쉽게 그 맥락을 이해하기도 어렵다. 오늘날 사회당도 신좌파도 몰락한 일본의 현실에서 일본공산당이 일정한 정치적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특히 일본 내 민주주의적 제도를 지키고 동아시아의 반전 평화 운동을 책임지는 데 있어서 일본공산당은 유의미한 주체로 활동하고 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볼 때 일본의 사회운동이 이토록 급속하고도 철저하게 쇠퇴한 현상에 있어서 공산당의 책임은 이루 말할 수 없이 크다.
그러한 책임의 직접적인 근원은 45년부터 60년경 사이 전후 일본의 정치적 체제가 자리 잡던 시기 일본공산당이 드러낸 경로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고야마의 이 노작은 주로 당내 투쟁에 많은 분량을 할애하고 있기는 하나, 패전/해방에서 안보투쟁 전야에 이르는 시기 공산당을 중심으로 한 일본 노동자운동의 흥망성쇠에 대해 중요한 교훈을 제공하고 있다. 본 서평에서는 “전후 일본의 공산당사”에 나타난 일본 공산당의 흥망성쇠를 먼저 살펴보고, 여기에서 얻을 수 있는 마르크스주의 혁신의 과제를 살펴 보고자 한다. 먼저 고야마의 설명에 따라 일본공산당이 전후 걸어간 길과 그 과정에서 나타난 문제점들을 살펴보자.
대중운동의 자율성을 인정하지 않는 조직론
45년 패전/해방 이후 도쿠다 규이치, 시가 요시오, 미야모토 겐지 등을 비롯한 출옥 공산주의자들은 막중한 대중적 신뢰와 이에 수반되는 책임을 안고 오랫동안 중앙이 해체되었던 당의 재건에 앞장서야 했다. 여기에 노사카 산조 등 중국 옌안 지역에서 탈영하거나 포로가 된 일본 병사들과 반제국주의 및 반전 운동을 이끌던 활동가들이 귀국하여 합류했다.
일본공산당 지도부는 노선에 있어서 재건 초기부터 매우 혼란스러운 모습을 보였다. 당은 전략적으로는 미군을 해방군으로 인정하고 군정에 협조하고자 하였으며, 미군 점령하에서도 의회를 통해 평화적으로 혁명을 이룩할 수 있다는 ‘점령하 평화혁명’ 노선을 ‘노사카 이론’으로 정립했다.
그러나 전술적으로는 통일전선을 폭넓게 구축하기보다 오직 ‘천황제 타도’에 동의하는 정치세력만을 연합의 대상으로 두겠다는 분파적 모습을 보이며 새롭게 건설된 사회당을 비롯한 여러 운동 주체들을 배격하였다. 노동조합 운동을 비롯한 대중운동에 있어서도 각 부문 운동의 전국적 통합을 촉진하기보다는 시대착오적인 이른바 ‘적색노조주의’(1920년대 코민테른이 사회민주주의적 혹은 조합주의적 노동조합을 대체할 ‘적색노조’를 기존의 노동조합과는 별도로 건설하게 했던 방침)에 입각하여 당이 직접적으로 동원할 수 있는 분파적인 조직을 건설하는 데에만 앞장섰다.
조직론적으로 볼 때 일본공산당은 노동조합 등 대중조직 내에 사실상의 당원 ‘세포조직’을 만들어 수직적으로 지도하려고 시도했다. 이러한 조직론은 대중조직이 가져야 할 자율성을 훼손하는 방식으로 작동했다. 대중운동과 넓은 공동투쟁에 나서기보다 당이 장악한 분파화된 대중조직을 동원하는 데에만 앞장선 전후 일본공산당의 오랜 문제점은 여기에서부터 비롯되었다.
대중운동에 대한 이러한 분파주의적 태도는 패전/해방 이후 운동이 급속하게 고양됨에 따라 그 병폐를 명백히 드러냈다. 1947년 초에는 당과 긴밀히 연계된 일본산업별노동조합회의(산별회의)에 주로 조직되었던 공공부문 노동자들의 2.1 총파업이 예고되었다. 그러나 당 중앙은 파업 금지 명령을 내린 맥아더 군정과의 마찰을 우려하고 있었다. 당이 무리하게 산별회의의 의사결정에 개입하여 파업투쟁을 좌초시키자 노동자운동 내에서 공산당에 대한 신뢰는 낮아졌고, ‘노동조합 운동의 자율성’이란 슬로건 아래 민주화동맹 등의 새로운 경향이 성장했다.
결국 일본공산당과 밀접한 산별회의는 후일 몰락하고 민주화동맹의 후신인 일본노동조합총평의회(미군정의 후원 아래 일본공산당과 산별회의를 견제하기 위한 반공주의적 목적으로 1950년 만들어진 조직이나 60년 안보투쟁과 호헌평화운동 전후 대표적 좌파 노동조합으로 급진화함)와 사회당 좌파에 노동자운동의 주도권을 내주게 된다.
손바닥 뒤집듯 바뀌는 노선
한편 서기장 도쿠다를 비롯한 당권파들은 ‘분파 배격’을 명분으로 당내 여러 경향이 지녀야 할 언론의 자유마저도 탄압하고, 급속하게 성장한 당 관료층을 배경으로 개인숭배적이고 권위적인 ‘가부장적 지배’를 공고히 해나가고 있었다. 각국 공산당에서 ‘ 작은 스탈린’들에 대한 개인숭배가 횡행했듯, 도쿠다를 ‘민족의 아버지’이자 ‘무오류의 지도자’로 그리는 기풍이 당내에 만연하였다. 그런 과정에서 지속적으로 고수되었던 ‘점령하 평화혁명’ 노선은 점차 현실과 멀어져 갔다. 농지개혁이나 재벌개혁을 비롯한 미군정의 일정한 민주개혁 정책은 냉전의 격화 속에서 반공주의적 ‘역코스’로 선회하였고, 연합군 최고사령부가 여러 공공부문과 언론, 대학, 사업장 에서 좌익을 강력하게 탄압하는 ‘레드 퍼지(Red Purge)’가 시행되고 있었다. 1950년 초 공산당계의 국제적 정보기구인 코민포름이 기관지 “항구적 평화와 인민민주주의를 위하여” 지에 익명으로 논문을 실어 미군정에 협조적이던 ‘노사카 이론’을 비판한 일, 이후 중국공산당이 베이징으로부터 몇 차례 일본공산당에 대한 비판을 개진한 일은 그동안 억제되어 있었던 분파투쟁의 시발점이 되었다.
냉전이 격화되는 과정에서 ‘점령하 평화혁명’노선이라는 안온한 정세 인식에 대한 비판은 당연히 제기될 만 했다. 그러나 각국 당의 자율성을 존중하지 않은 채 국제당의 역할을 자임한 모스크바 코민포름의 일방적, 권위적 비판은 오히려 문제를 심화시켰다. 더군다나 일본공산당은 1920년대부터 소련이 각국 운동을 지도해야 한다는 코민테른의 왜곡된 국제주의에 깊이 침윤되어 온 상황이었기에, 모스크바와 베이징의 지침은 당에 일대 혼란을 가져오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