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사회운동 논쟁 | ① 비서구의 자본주의 발전을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

일본 사회운동 논쟁 | ① 비서구의 자본주의 발전을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

고야마 히로타케의 『일본 자본주의 논쟁사』는 전전과 전후의 논쟁사를 매우 소상하게 정리한다. 하지만 1953년 당시 저자는 일본공산당의 스탈린주의적 전통에 천착해 있을 시기이기 때문에 독서에 주의가 필요하다.

2022년 12월 5일

[동아시아]일본, 동아시아, 일본, 자본주의, 일본 사회운동 논쟁

왜 지금 일본 자본주의 논쟁을 돌아보는가

1980년대 한국 사회구성체 논쟁에서 일본과 라틴아메리카의 자본주의 논쟁은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특히 일본은 한국과 같은 비서구-동아시아 국가다. 반봉건성과 급속한 자본주의 발전을 동시에 경험했기 때문에, 일본 내 논쟁은 한국 활동가나 연구자들의 관심을 끌 수밖에 없었다. 요컨대 고야마 히로타케가 1958년에 집필한 『전후 일본의 공산당사 – 당내 투쟁의 역사』는 21세기 한국 좌파 정치운동이 경험한 난관을 반추하게 한다. 1967년 출간되어 1991년 한국에 소개된 『일본 마르크스주의사 개설』 역시 소련 붕괴로 혼란에 빠진 사회운동에 마르크스주의 혁신에 관한 참조점을 제공했다.

하지만 오늘날 사회구성체 논쟁에서 사용된 개념과 범주들은 그리 유효하지 않다. 따라서 이보다 훨씬 오래된 일본 자본주의 논쟁사를 살피는 것 역시 우리 시대와는 다소 동떨어져 있다. 더구나 『일본 자본주의 논쟁사』는 고야마가 마르크스주의 혁신을 위해 감행한 사상적 전환 이전에 쓰인 저작이라는 점에서 한계가 있다. 그럼에도 지나간 논쟁들을 돌아보는 이유는, 이를 통해 우리가 역사적으로 일본 좌파가 봉착해온 한계와 오류가 무엇이었는지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동아시아 국제연대에 있어서 중요한 주체가 되어야 함에도 침잠해 있는 일본 사회운동을 이해하는데 일정한 참조점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고야마는 1912년생으로 군사기술사학자에서 출발해 마르크스주의 사회경제사 연구자로 성장했다. 일찍이 ‘강좌파’(“일본 자본주의 발달사 강좌” 편찬을 계기로 결집한 좌파 연구자 그룹)로 지칭되는 일본공산당 계열 학자로 활동한 바 있다. 패전-해방 이후 일본공산당에 대한 그의 헌신은 1950~60년대에 이르러 크게 흔들린다. 종전 이전부터 당내에 잠재했던 다양한 조직적·이론적 병폐들이 극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당시 도쿠다 규이치(일본 혁명가이자, 일본공산당 공동창립자)로 대표되는 당권파의 패권적 운영, 경직된 이론, 실천의 한계 속에서 고야마는 1954년 가미야마 시게오(활동) 제명 사태를 마주한다. 이 당시 그는 당의 주변부로 밀려나는 아픔을 겪었고, 1964년에는 중소 분쟁이나 국제 공산주의운동의 분열 상황에서 제명되기에 이른다.

일본공산당의 오류(코민테른 지침에 당노선이 지나치게 종속되는 의사결정체계와 반대 의견을 배제하는 조직문화)에 대한 고야마의 성찰은 전후 정치적 전환 속에서 이뤄졌다. 일본 마르크스주의 전통의 전개를 비판적으로 총괄해 1960년 안보 투쟁 이후 급성장한 신좌익 운동에 이론적 기반을 제공하고자 한 시도 역시 마찬가지다.

1950년 일본공산당 당사 앞
1950년 일본공산당 당사 앞

논쟁이 전개된 양상

일본 자본주의 논쟁사는 흔히 자본주의 발전단계에 있어 반봉건성을 강조한 ‘강좌파’, 자본주의 확립을 강조하는 ‘노농파’간 대결로 요약할 수 있다. 당시 강좌파는 코민테른 지도하에 전위정당으로서의 공산당을 건설하고 이를 통해 사회운동에 개입하고자 했다. 한편 노농파는 공산당 건설 시도에서 이탈한 후 대중적인 무산자 정당을 합법적으로 건설하고자 했다. 1920년대에 두 경향은 일본의 변혁 전략을 둘러싸고 ‘일본 민주혁명 논쟁’을 펼쳤다. 이는 1930년대에는 혁명 전략의 이론적 기반을 풍부하게 쌓기 위한 자본주의 논쟁으로 이어졌다.

이런 과정에서 강좌파는 20세기 초 일본의 생산양식이 기본적으로 기생적 지주의 농촌 지배에 기반하고 있으며, 일본 내에서 발달한 자본주의 체제 역시 철저하게 지주의 헤게모니와 전근대적 군주제로서의 천황제 하에 육성되고 있음을 강조한다. 강좌파와 일본공산당의 당면 과제가 천황제와 지주제에 맞선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이었던 것은 그 때문이다. 반면, 당시 급속하게 이뤄지던 독점자본의 축적 등 조건은 어느 정도 간과된다.

한편 노농파(동인지 『노농労農』을 중심으로 모인 활동가 그룹)는 메이지 유신이 민주주의를 결핍하고 있긴 하지만 '일종의 부르주아 혁명'이라고 봤다. 일본의 생산양식이 봉건적 잔재에 의해 제약되고 있으나, 이미 독점자본의 발달과 부르주아의 헤게모니가 확립되고 있다고 봤던 것이다. 이러한 노농파에게 '천황제'는 부르주아 군주제로서 성격을 지니는 것으로 여겨졌다. 따라서 독점자본과 직접 대결하는 사회주의 혁명은 노농파에게 당면 과제였으며, 이 과정에서 일본 정치를 지배한 천황제에 대한 비판은 부차적으로 여겨졌다.

1928년 1월에 발간된 『노농』
1928년 1월에 발간된 『노농』

자본주의 논쟁은 막부 시대 말부터 메이지 유신 시기까지 이어진 농촌 경제와 매뉴팩처 발전, 20세기의 농업과 자본주의 발전의 역사를 둘러싸고 다양한 자료들을 토대로 벌어진다. 이는 이른바 ‘다이쇼 데모크라시’(1911년~25년 일본에서 정치·사회·문화 방면에서 일어난 민주주의 운동) 이후 만개한 다양한 사회운동 조직과 출판·언론 공간을 배경으로 치열하게 벌어졌고, 당대 동아시아의 봉건성과 자본제 발달을 배경으로 한 중국 대륙과 조선의 사회주의 운동 내 논쟁에도 영향을 미쳤다. 또, 천황제 체제 아래 관료와 군부가 주도하는 제국주의적 침략이 본격화되면서, 극동아시아 제국주의를 파악해야겠다고 여긴 소련과 서구의 좌파들과도 영향을 주고받았다.

1930년대 말 전시 체제에서 사회운동에 대한 탄압은 극심해지고, 좌파의 전향 역시 대대적으로 이뤄진다. 자본주의 논쟁 역시 심각한 타격을 입는다. 1945년 패전과 해방에 이르러 ‘일본 인민혁명 논쟁’이라는 혁명 전략 논쟁의 연장선상에서 이전의 논쟁사가 지닌 한계를 극복하려는 새로운 논쟁이 싹튼다. 특히 천황제나 파시즘 등을 둘러싼 국가론의 결함을 돌파하기 위해 논쟁이 펼쳐진다.

이후 자본주의 논쟁은 1960년을 기점으로 전혀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간다. 강좌파의 전통을 이은 일본공산당(이론과 실천의 한계에 봉착)은 지속적으로 반봉건성만을 강조하면서 천황제에 대항하는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을 주창했다. 그러면서 패전 이후 자국을 미국에 종속된 사실상의 식민지로 보며, "민족해방과 독립을 위한 투쟁"을 외쳤다.

그러나 노농파의 재구성으로 나타난 사회당 좌파는 일본 내 독점자본의 급속한 성장과 제국주의의 부활을 주된 모순으로 인식했다. 이에 따라 1960년 안보투쟁 이후 사회주의적 계급운동과 국제주의적 실천을 결합하고자 했다. 이후 공산-사회 혁신 양당에 답답함을 느낀 여러 ‘신좌익’ 경향은 강좌파적 전통과 일본공산당 노선에 대한 격렬한 비판을 통해 급진적 이론과 투쟁을 전개했다.

1960년 6월 4일 도쿄 우에노역 앞에 모인 학생들과 노동자들
1960년 6월 4일 도쿄 우에노역 앞에 모인 학생들과 노동자들

비서구성과 전근대성

이와 같은 논쟁의 전개를 볼 때, 고야마 히로타케가 소개한 일본 강좌파의 이론적 전통은 자국의 반봉건성을 강조하면서 자본주의의 빠른 성장을 포착하지 못했다고 볼 수 있으며, 실제 그러한 한계를 안고 있었다. 이를테면 전쟁 이전 강좌파 연구자들은 때로는 기생 지주제의 지배성을 지나치게 강조하느라 향후 군국주의의 주된 지지층이 되는 자작 소농의 성장 경향을 애써 무시했고, 농민운동에 잘못된 신호를 주기도 했다. 아울러 소련에서 이뤄진 코민테른과 코민포름(국제공산당 정보국) 결정을 정당성의 근거로 삼아 논쟁을 진행하는 강좌파와 일본공산당의 교조적인 스탈린주의는 많은 비판 지점을 남겼다.

다만 강좌파의 이론적 전통을 모조리 부정할 필요는 없다. 자본주의가 비서구성과 전근대성의 요소들과 어떠한 관계를 맺는지에 대해 중요한 통찰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노농파 학자들은 쌀의 상품화 등을 들어 막부 말기부터 일본 농업의 자본주의화가 진행됐다고 증명하려 했으나, 이와 상반되게 강좌파 학자들은 쌀 상품화가 오히려 봉건적 소작제의 확산 속에서 이루어졌음을 지적했다. 이는 자본주의 이행 논쟁 이래 농업의 자본주의화를 둘러싸고 진행된 경제사 논쟁의 연장선에 있다. 이를테면 근대 초기 영국의 농업 자본주의에서 농민의 계급 분화가 나타난 것과는 상반되게, 프랑스에서는 자작 소농 중심의 농촌 사회가 확고해졌다. 독일 동부에서도 융커(Junker; 프로이센의 보수적인 지주귀족)에 의해 지배되는 농노제가 재확장되고, 예속농에 의해 생산되는 곡물이 상품화되면서 자본주의 중심부로 수출되는 형태가 자리잡았다. 이처럼 영국식 농업 자본주의 및 계급 분화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농촌 경제가 재편되는 경향은 비서구 지역이 자본주의 세계체제 내로 포섭되는 과정에서 일관되게 나타났다.

강좌파와 일본공산당은 스탈린주의에 의해 확립된 단선론적 역사발전 단계론에 의존하고 있었다. 이에 따라 일본 사회를 반봉건적 상태로 파악한 코민테른 노선에 강한 영향을 받았다. 따라서 일본 농업에 있어 영국식 자본 축적과 계급 분화가 나타나지 않는 현상을 봉건 잔재의 우월성으로 이해할 수밖에 없었다. 지주제에서 관습적으로 고수된 ‘경제외적 강제’는 자본주의 내 근대적 법리와 시장 법칙의 지배와는 상반되는 봉건성의 증거로 간주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강좌파 농업이론이 지닌 여러 근본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농업 생산물의 상품화가 반드시 농업의 자본주의적 분해로 이어지지 않았음을 지적한 점은 중요하다. 덧붙여, 봉건적 형태의 농업이 고도의 자본축적과 병존할 수 있음을 지적한 점은 중요한 통찰을 제공한다. 오늘날 스탈린주의적 단선론과 단계론에서 벗어나 자본주의의 발전과정을 고찰할 기회를 확보한 우리는 자본주의적 근대성이 비서구성 및 전근대성의 요소들을 주요한 기반이자 전제로 하여 작동하는 것이 아닌지 되물을 수 있다.

1949년 일본공산당 기관지에 실린 스탈린 70세 생일 축하 기사
1949년 일본공산당 기관지에 실린 스탈린 70세 생일 축하 기사

강좌파의 방법론은 공업자본의 발달에 있어서도 비서구성과 전근대성이 자본주의 및 근대성의 발달과 맺는 관계에 대해 새로운 시사점을 제공한다. 일본 자본축적의 미숙함과 군수 자본에의 지나친 집중이라는 문제를 통해 봉건 잔재의 우위를 증명하고자 한 강좌파는 반봉건적 농촌과 자본화된 도시공업 사이의 상호의존성을 드러낸다. 일본 노동자의 열악한 저임금 문제를 고찰함에 있어서 강좌파 학자들은 일본 내에서의 근대적 노동시장에서 임금이 결정됐다는 노농파를 반박한다. 농촌의 기생적 지주제 및 소작제 속에서 도시로 유입되는 극빈농층과 이들에게 익숙했던 봉건적 노동 통제 등이 일본 내에 ‘근대적’ 임금노동이 제대로 자리잡지 못하게 만드는 요인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런데 주변부에 대한 전근대적 형태의 착취, 봉건적 형태의 관습과 규율 역시 자본주의와 상충하는 외부적 요소가 아니라, 자본주의 작동에서 매우 중요하게 동원되는 내재적 요소로 간주되어야 하는 것은 아닐까?

『일본 자본주의 논쟁사』에서 저자는 전전 강좌파의 전통을 총괄하면서, 반봉건성과 자본축적 사이의 의존성을 중시해온 방법론을 비판한다. 일본 내 전근대성을 증명하는 과정에서 그 요소가 고도로 발전하는 자본주의 부문과 상호의존적 관계에 있음을 보여주는 방법론을 취했기 때문에, 일본의 체제가 양자간 모순이 아닌 상호의존을 통해 통합적이고 유기적으로 유지되고 있다는 ‘재상산론’의 함정에 빠졌다는 것이다. 물론 전전 강좌파의 전통이 이러한 상호의존성 내에 내재한 모순이나 변혁-이행의 계기를 제대로 포착해내지 못했다는 저자의 지적은 타당하다. 그러나 여기에서 지금의 우리는 오히려 자본주의가 비서구성과 전근대성에 강하게 의존하고 있다는 점을 포착하고, 그렇게 확장된 의미에서 자본주의의 모순에 대항하는 투쟁을 개념화할 수 있다는 점을 읽어내야 하지 않을까?

전후 국가론 논쟁

전후 국가론을 둘러싸고 벌어진 논쟁에서도 우리는 유사한 시사점을 포착할 수 있다. 패전 이전 강좌파는 천황제 문제를 다소 소거한 노농파에 맞서, 천황제에 대한 투쟁을 가장 주요한 과제로 삼았다. 이로 인해 극심한 탄압을 받았던 강좌파는, 전후에는 국가론을 정교화하기 위한 논쟁에 본격적으로 돌입한다. 특히 그동안 일본 제국주의를 포착해온 레닌의 ‘군사적·봉건적 제국주의’ 개념을 바탕으로, 군사·봉건 제국주의가 근대적 제국주의와 어떤 관계를 맺는지를 둘러싼 논쟁이 벌어진다. 이는 이후 군벌·관료 주도 제국주의의 정점이었던 천황제를 전근대적 형태의 군주제인 절대주의로 볼 것인지, 근대국가에서 나타나는 보나파르티즘의 형태로 볼 것인지, 혹은 독점자본과 제국주의의 위기 속에 나타나는 근대적 파시즘으로 볼 것인지에 대한 논쟁으로도 이어진다.

이러한 치열한 논쟁 속에서 우리는 이른바 군사·봉건 제국주의와 근대적 제국주의라는 양대 범주의 관계에 대해 새로운 질문을 제기할 수 있다. 전근대적 지주의 헤게모니에 지배되는 군부·관료의 국가와 독점자본의 헤게모니에 지배되는 근대적 국가는 과연 엄밀하게 다른가? 군사적 부문이 주도하는 봉건적 제국주의와 금융자본이 주도하는 근대적 제국주의는 과연 이분법적으로 구분될 수 있는가? 일본을 비롯해 비서구 지역에서 군주제 지배의 다양한 양태에 대해 이것이 봉건적 단계에 속하는지 혹은 근대적 단계에 속하는지에 일도양단으로 구분하는 것이 가능한가?

지배계급으로부터 상대적 자율성을 지니는 국가기구가 통치 확립을 위해 동원하는 전근대적 요소들, 자본의 식민주의적 팽창 과정에서 동반되는 군사적인 확장과 전근대적 지배 방식은 어쩌면 고도로 발전하는 자본축적과 병존할 수 있고, 더 나아가 서로가 서로를 지탱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오늘날 우리는 비서구권에서 첨단의 금융자본과 봉건적 외양을 지배에 동원하는 국가기구가 공존하는 모습을, 극도로 전근대적인 양태로 조직화된 농업 생산과 노동 통제가 오히려 근대적인 자본의 축적을 지탱하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지 않은가?

비서구 지역으로서 급격한 근대적 성장을 경험한 한국에게도 이는 마찬가지다. 한국이 다양하게 마주하고 있는 동아시아 지역의 복잡한 사회 양태를 살펴볼 때에도 비서구성과 전근대성, 국가가 자본과 맺는 상호의존적 관계에 대한 인식은 자본주의와 이에 맞선 운동을 보다 확장된 맥락에서 살펴볼 수 있게 해 준다.

1890년대 일본 농촌
1890년대 일본 농촌

이론과 실천의 관계

자본주의에 대한, 그리고 자본주의의 모순에 맞선 운동에 대한 확장된 관점말고도, 고야마의 논쟁사 정리는 오늘날 우리에게 ‘논쟁’이 지니는 의미 자체에 대해 새롭게 돌아보게 한다. 이른바 이론과 실천의 ‘변증법’이라는 익숙한 도식은 이론적 논쟁과 실천적 노선투쟁 간의 상호성을 강조한다. 실천에서의 차이가 이론에서의 논쟁으로 이어지고, 논쟁을 통한 이론적 성취는 이에 기반한 정치적 투쟁과 운동을 통해 적확성이 입증된다는 등의 도식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일본 자본주의 논쟁이 놓였던 역사적 현실은 양자의 관계가 그렇게 단순하지는 않다는 점을 보여준다.

연구사를 정리한 사람으로서 고야마 히로타게는 이론적 연구와 논쟁이 지니는 독자적 위상을 인정하고, 자본주의 논쟁이 변혁 전략 논쟁의 연장선상에서 진행됐음에도 결코 정치 전략으로 환원될 수 없음을 강조한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이론 논쟁이 실천과 괴리될 때 나타나는 문제점을 전전 자본주의 논쟁의 주된 한계로 지적하기도 한다. 그러면서 전후 자본주의 논쟁이 일본공산당 및 급진적 사회운동의 성장 속에서 그 한계를 극복해 나갈 수 있었다는 입장을 개진한다.

전전 자본주의 논쟁에 대한 고야마의 총괄은 일정한 타당성을 지닌다. 1920년대 후반에 민주혁명 논쟁이 정치 전략적 논쟁으로서 치열하게 제기되었던 것은 ‘다이쇼 데모크라시’ 시기 각 부문의 대중운동이 고조되고 사회주의 운동에 정치 전략이 시급하게 요구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1930년대에 전략 논쟁의 이론적 기반으로서 자본주의 논쟁이 고조된 정세는 현실에서의 계급투쟁이 퇴조하는 시기와 맞물렸다. 만주 침략 이후로 군국주의가 가속화되면서, 1930년대 초반의 급진적 사회운동은 곧 수면 아래로 가라앉고 말았던 것이다.

고야마가 적확하게 지적하듯, 자본주의 논쟁은 자본주의 현 단계 논쟁 등에 있어서는 현실 운동의 침체나 공권력의 탄압으로 풍부한 성과를 만들어내지 못했다. 주로 막부 말기와 유신기를 비롯한 역사적 논쟁에만 치중하는 경향을 보였다. 고야마가 강좌파의 전전 방법론에 대해 ‘재생산’의 측면에 집중하느라 모순의 필연성과 이행의 가능성, 계급운동의 전망을 소거해버렸다고 비판한 것 역시 사회운동과의 괴리라는 맥락에 놓여 있다.

전향한 많은 좌파 학자들은 전전 논쟁이 지닌 한계가 어떤 파국에 이를 수 있는지 스스로 보여줬다. 실천에서 이반한 채 농업과 공업의 상호의존적 재생산 분석에만 치중했던 일부 강좌파 학자들은 생산관계에 대한 고찰보다 생산력 분석에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생산력주의’ 경향은 전향한 연구자들이 ‘혁신 관료’로서 국가주의적이고 제국주의적인 일본 국가가 사회 정책을 집행하고 생산성을 높이는 데 부역하도록 만들었다. 전향한 학자들은 일본과 만주국의 국가 주도 성장모델에 기초를 놓은 ‘혁신 관료’가 되었고, 이러한 모델은 한국의 급속한 국가주도 발전주의 모델로 수입되었다. 현실의 운동과 괴리된 논쟁의 한계가 결국은 국가 주도의 관료주의적 정책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위험성은 오늘날 사회운동이 주목해야 할 쟁점이다.

만주국 국무원 앞에서 스케이트를 타는 관료들
만주국 국무원 앞에서 스케이트를 타는 관료들

고야마가 전후 자본주의 논쟁에서 걸었던 기대는 처참하게 실패했다. 전후 초기 대중운동의 고조 속에 재개된 활발한 이론 논쟁은 이론과 실천간의 긴밀한 상호의존적 발전을 보여주는 듯 하였으나, 일본공산당 분파 투쟁이 고조됨에 따라 정파적 실천을 정당화하는 데 이론논쟁이 동원되는 결과로 이어졌다. 일본공산당의 경직된 조직론과 교조주의적 경향은 당권 경쟁 속에서 풍부한 이론적 논의가 질식되는 결과로 이어졌다. 결국 자본주의 논쟁을 통해 공산당의 운동 노선이 올바르게 발달할 것이라 기대하였던 고야마 히로타게 역시 당과 독립된 마르크스주의 노선을 걸으며 일본공산당을 떠나게 된 것이다.

이 책이 쓰여진 이후 자본주의 논쟁과 고야마가 걸었던 길은 이론과 실천 간의 관계가 결코 단순하지 않음을, 양자 간의 상호작용은 쉽게 달성되기 어려운 균형임을 보여준다. 우리가 오늘날 일본 자본주의 논쟁사를 살펴볼 때 얻을 수 있는 교훈은 이론 논쟁이 현실의 정치적 투쟁이 지니는 우위성으로부터 괴리될 때 발생하는 난관과 함께, 이론 논쟁이 정파적 노선투쟁에 종속될 때 발생하는 난점도 경계해야 한다는 사실에 있다.

마치며

다양한 시대적 한계를 안고 있는 이 책의 의의를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단순히 일본 사회경제사 연구나 당시 논쟁에 대한 참고 자료, 혹은 마르크스주의 연구 사료로서의 훈고학적 의미만을 지니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면 마르크스주의가 지닌 다양한 개념과 범주들을 활용해 현실을 포착하고자 노력하고, 자료를 통해 이론을 검증하며, 나아가 이를 생동하는 운동의 토대로 삼고자 했던 노력이 현재적 의미를 지니고 있는가?

앞서 살펴보았듯, 『일본 자본주의 논쟁사』는 전전과 전후의 논쟁사를 매우 포괄적이고 소상하게 정리한다. 하지만 이 책이 쓰인 1953년은 저자가 여전히 일본공산당의 스탈린주의적 전통에 천착해 있을 시기이기 때문에 독서에 주의가 필요하다. 이를테면 일본공산당에서 '정통'으로 간주된 ‘강좌파’에 대한 찬사가 지나치며, 이들과 대립해 전후 일본 사회당 좌파의 근간이 되는 ‘노농파’에 대해선 지나치게 낮게 평가한다. 따라서 이 책은 일본 자본주의 논쟁에 대한 충실한 총괄이면서도, 저자의 당파성과 시대적 한계를 고려해 독해해야 한다.

이 책은 자본주의 논쟁이 흔히 근대 자본주의와 상충되는 것으로 여겨졌던 비서구성이나 국가 문제에 대해 다시 돌아보게 만든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이는 오늘날 한국 사회와 혹은 동아시아에서 마르크스주의의 혁신을 추구하는 이들에게 현재적 의미를 지닌다. 나아가 이 책이 담은 논쟁의 역사를 이론-실천의 종합인 운동의 의미를 고찰할 메타텍스트로 읽을 수도 있을 것이다.

사회운동은 끊임없이 이론 논쟁을 펼치고, 이에 기반해 다양한 정치적 실천을 모색한다. 100여 년 전의 논쟁사에서 사용된 개념적 틀이나 범주들, 혹은 그 정치적 결론을 그대로 지금 우리의 논쟁에 도입하는 일은 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일본 자본주의 논쟁사』는 우리가 동아시아 운동이 모색해야 할 대안, 사회운동 일반이 견지해야 할 태도에 대해 고민해보는 하나의 ‘방법’으로서 여전히 유의미하지 않을까? 🤿

글 : 이재현 (동아시아뉴스레터 편집위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