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사회운동 논쟁 | ① 비서구의 자본주의 발전을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
2022년 12월 5일
왜 지금 일본 자본주의 논쟁을 돌아보는가
1980년대 한국 사회구성체 논쟁에서 일본과 라틴아메리카의 자본주의 논쟁은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특히 일본은 한국과 같은 비서구-동아시아 국가다. 반봉건성과 급속한 자본주의 발전을 동시에 경험했기 때문에, 일본 내 논쟁은 한국 활동가나 연구자들의 관심을 끌 수밖에 없었다. 요컨대 고야마 히로타케가 1958년에 집필한 『전후 일본의 공산당사 – 당내 투쟁의 역사』는 21세기 한국 좌파 정치운동이 경험한 난관을 반추하게 한다. 1967년 출간되어 1991년 한국에 소개된 『일본 마르크스주의사 개설』 역시 소련 붕괴로 혼란에 빠진 사회운동에 마르크스주의 혁신에 관한 참조점을 제공했다.
하지만 오늘날 사회구성체 논쟁에서 사용된 개념과 범주들은 그리 유효하지 않다. 따라서 이보다 훨씬 오래된 일본 자본주의 논쟁사를 살피는 것 역시 우리 시대와는 다소 동떨어져 있다. 더구나 『일본 자본주의 논쟁사』는 고야마가 마르크스주의 혁신을 위해 감행한 사상적 전환 이전에 쓰인 저작이라는 점에서 한계가 있다. 그럼에도 지나간 논쟁들을 돌아보는 이유는, 이를 통해 우리가 역사적으로 일본 좌파가 봉착해온 한계와 오류가 무엇이었는지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동아시아 국제연대에 있어서 중요한 주체가 되어야 함에도 침잠해 있는 일본 사회운동을 이해하는데 일정한 참조점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고야마는 1912년생으로 군사기술사학자에서 출발해 마르크스주의 사회경제사 연구자로 성장했다. 일찍이 ‘강좌파’(“일본 자본주의 발달사 강좌” 편찬을 계기로 결집한 좌파 연구자 그룹)로 지칭되는 일본공산당 계열 학자로 활동한 바 있다. 패전-해방 이후 일본공산당에 대한 그의 헌신은 1950~60년대에 이르러 크게 흔들린다. 종전 이전부터 당내에 잠재했던 다양한 조직적·이론적 병폐들이 극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당시 도쿠다 규이치(일본 혁명가이자, 일본공산당 공동창립자)로 대표되는 당권파의 패권적 운영, 경직된 이론, 실천의 한계 속에서 고야마는 1954년 가미야마 시게오(활동가) 제명 사태를 마주한다. 이 당시 그는 당의 주변부로 밀려나는 아픔을 겪었고, 1964년에는 중소 분쟁이나 국제 공산주의운동의 분열 상황에서 제명되기에 이른다.
일본공산당의 오류(코민테른 지침에 당노선이 지나치게 종속되는 의사결정체계와 반대 의견을 배제하는 조직문화)에 대한 고야마의 성찰은 전후 정치적 전환 속에서 이뤄졌다. 일본 마르크스주의 전통의 전개를 비판적으로 총괄해 1960년 안보 투쟁 이후 급성장한 신좌익 운동에 이론적 기반을 제공하고자 한 시도 역시 마찬가지다.
논쟁이 전개된 양상
일본 자본주의 논쟁사는 흔히 자본주의 발전단계에 있어 반봉건성을 강조한 ‘강좌파’, 자본주의 확립을 강조하는 ‘노농파’간 대결로 요약할 수 있다. 당시 강좌파는 코민테른 지도하에 전위정당으로서의 공산당을 건설하고 이를 통해 사회운동에 개입하고자 했다. 한편 노농파는 공산당 건설 시도에서 이탈한 후 대중적인 무산자 정당을 합법적으로 건설하고자 했다. 1920년대에 두 경향은 일본의 변혁 전략을 둘러싸고 ‘일본 민주혁명 논쟁’을 펼쳤다. 이는 1930년대에는 혁명 전략의 이론적 기반을 풍부하게 쌓기 위한 자본주의 논쟁으로 이어졌다.
이런 과정에서 강좌파는 20세기 초 일본의 생산양식이 기본적으로 기생적 지주의 농촌 지배에 기반하고 있으며, 일본 내에서 발달한 자본주의 체제 역시 철저하게 지주의 헤게모니와 전근대적 군주제로서의 천황제 하에 육성되고 있음을 강조한다. 강좌파와 일본공산당의 당면 과제가 천황제와 지주제에 맞선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이었던 것은 그 때문이다. 반면, 당시 급속하게 이뤄지던 독점자본의 축적 등 조건은 어느 정도 간과된다.
한편 노농파(동인지 『노농労農』을 중심으로 모인 활동가 그룹)는 메이지 유신이 민주주의를 결핍하고 있긴 하지만 '일종의 부르주아 혁명'이라고 봤다. 일본의 생산양식이 봉건적 잔재에 의해 제약되고 있으나, 이미 독점자본의 발달과 부르주아의 헤게모니가 확립되고 있다고 봤던 것이다. 이러한 노농파에게 '천황제'는 부르주아 군주제로서 성격을 지니는 것으로 여겨졌다. 따라서 독점자본과 직접 대결하는 사회주의 혁명은 노농파에게 당면 과제였으며, 이 과정에서 일본 정치를 지배한 천황제에 대한 비판은 부차적으로 여겨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