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구 세입자 파업 운동의 역사와 전략

서구 세입자 파업 운동의 역사와 전략

하루하루 쌓여가는 수많은 세입자의 걱정과 불안은 코로나가 불어닥친 세계의 다른 나라들에서도 이어지고 있다.

2020년 5월 25일

[읽을거리]국제국제, 반빈곤운동, 스페인, 코로나19, 주거권

[역주] 코로나 바이러스19가 수개월째 지속되고 있다. 언제 다시 마스크를 벗을 수 있을지 불투명한 지금 한국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고용 불안을 겪고 있거나, 이미 일자리를 잃었다. ‘K-방역’으로 자화자찬하지만, 우리나라 정부가 코로나가 불러온 경제적 위기와 민중의 삶을 파괴하는 것을 막기 위해 만든 조치는 극히 미미하다. 재난지원금 제도에도 실질적으로 도움이 절실한 1인 가구들은 포함되지 않고 있다. 특히 월셋집에 사는 대다수 1인 가구, 일용직 노동자, 이주노동자들은 코로나가 불러온 경제위기의 가장 큰 피해자들이다. 이들의 가장 큰 고민은 바로 월세를 내지 못해 집에서 쫓겨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정부의 조처는 매우 미온적이다. 그나마 내놓은 대책 역시 천정부지로 솟은 임대료를 제한하는 것이 아닌, 그저 임대료를 낼 수 있도록 조금의 보조를 하는 것 뿐이다. 유난히도 한국 정부는 임차인이 아닌 임대인의 권리를 보장하는 데 온갖 신경을 쓴다. “착한 건물주 운동”을 내세워 임대료를 조금만 깎아줘도 선인(善人)으로 추앙할 뿐, 그 임대료가 정당한 것이었는지, 어째서 새 세입자가 들어오기 어려운 요즘에도 따박따박 임대료를 받아야 하는지 문제의식이 없다. 또 임대료 체납자에 대한 강제퇴거 조치는 방역 체제에서도 잘만 작동된다. 수십명의 용역들과 경찰들이 몰려와 철거민들의 생존을 무너뜨리고 있는 현장을 우리는 계속 목격하고 있다. 이 정부가 ‘건물주의 대리인’이 아닌지 의심스럽다.

하루하루 쌓여가는 수많은 세입자들의 걱정과 불안. 이는 코로나가 불어닥친 세계의 다른 나라들에서도 별반 다를 바 없다. 이에 맞서 서구 사회에서는 지난 3월부터 “세입자 파업(Rent Strike)” 운동이 일고 있다. 이 운동은 세입자들이 자신의 상황을 타개하고, 경제적 책임을 약자들에게 지우는 현 체제에 근본적 질문을 던지는 걸 목표로 한다. 아래 글은 카탈루냐 세가도레스 출판과 바우마 콜렉티브가 세입자 파업의 역사적 사례들과 세입자 파업에 필요한 전략에 대해 쓴 글을 발췌/번역한 것이다. 이 글은 1세기가 넘는 기간 동안의 세계 각지의 세입자 파업을 성공 혹은 실패 요인이 무엇이었는지 분석하고, 현재의 코로나 위기가 전 세계적 세입자 파업을 위한 절호의 시기인지 가늠하고 있다. 아무쪼록 한국에도 ‘세입자 파업 운동’에 대한 논의들이 활성화되길 바란다.

지금이 세입자 파업을 할 수 있는 기회인가?

“기존 조직이나 운동에 대한 아무런 경험이 없는데 #세입자파업에 갑자기 관심을 가지는 꽤 많은 사람들이 있다는 건 자발적 조직이나 극좌 이념, 혹은 기존 조직에서 나타난 어떤 류의 도덕적 실패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다. 이는 주어진 물질적 조건이 ㄱ.생존과 ㄴ.새로이 증가한 교섭력을 합친 전략으로서 세입자 파업을 들여다보게 만들었다는 사실을 나타내는 것이다. 새로운 조건은 우뚝 서서 기존의 것을 고집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조직 방법을 의미한다.”
–조슈아 클로버
“근데 한번에 얘넬 다 쫓아낼 수는 없어!”
 자기건물의 32명의 세입자 각각에게서 세입자 파업 선언을 받고서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조언을 구하는 한 건물주. 2020년 3월 25일, 텍사스 휴스턴

샌프란시스코의 한 주거협동조합 Station 40의 사진이다. 우리가 이 기사를 올릴 때 이미 이들은 세입자 파업에 돌입했다.
샌프란시스코의 한 주거협동조합 Station 40의 사진이다. 우리가 이 기사를 올릴 때 이미 이들은 세입자 파업에 돌입했다.

참으로 이상한 시대다. 이번 봄은 바이러스 하나가 일으킨 판데믹과 함께 찾아왔다. 이 바이러스는 무서운 속도로 전파되어 국가의 전체주의적 대응을 불러왔고, 우리를 새로운 상황에 위치시켰다.

경찰이 새로이 얻은 권력을 즐기는 동안, 많은 이들은 직업을 잃었고 더 많은 이들은 어떻게 당장 이번 달을 살아가야할 지 막막하다. 이런 상황에서 불복종의 목소리가 서서히 떠오르고 세입자 파업이라는 아이디어가 관심을 끌기 시작했다. 우리, 세가도레스 출판과 바우마 콜렉티브는 이 세입자 파업에 대해 이전의 유명한 사례들을 살펴보고 코로나 시대의 세입자 파업이 어떤 모습일 지 상상하며 조사해보기로 했다. 이 고찰이 전략을 짜고 행동하려는 모든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격리 상황에서도 우리는 비판적으로 사고하고, 행동해야 한다.

세입자 파업이란 무엇이고, 어떻게 성공하는가

세입자 파업은 어떤 세입자의 모임이 집단적으로 임차료 지불을 중단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 모임의 세입자들은 같은 건물주에게 속해있거나 같은 동네 사람들일 수도 있다. 세입자 파업은 다른 캠페인과 함께, 혹은 더 큰 투쟁의 일환으로, 아니면 반 젠트리피케이션 투쟁의 중심축으로서 견디기 어려운 생계 환경, 전반적인 가난, 자본주의 그 자체에 반대하는 투쟁 방법으로서 실현되기도 한다.

세입자 파업이 승리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3가지 요소가 필요하다.

  • 공통의 불만 : 세입자들이 공동의 요구사항을 만들지 않은 상황이더라도 초기에는 세입자 대부분이 대략적으로 비슷한 방식으로 상황을 인식하는 게 중요하다. 즉, 현재 상황이 매우 분노스럽거나 용납할 수 없고, 주거권을 박탈당할 위기에 처해있고, 기존 제도가 정의를 실현시킬 거라고 믿지 않는 인식을 갖는 것이다.
  • 손 뻗기 : 대부분의 세입자 파업은 상대적으로 소규모의 집단에서 시작하고, 그것에서 퍼져 나간다. 그러므로 세입자 파업에 동참하는 이들은 동참의 메시지를 전파하고, 불만 사항을 이야기하고, 지지와 연대를 호소할 수단이 필요하다. 많은 경우에 한 부동산의 1/3 정도의 세입자만 파업에 동참해도 승리를 얻을 수 있다. 그렇지만, 충분한 커뮤니케이션은 이 정도의 숫자에 도달하고 파업이 널리 퍼질 거라는 위협이 실질적으로 보이게 하기 위해서 꼭 필요하다.
  • 지원 : 파업에 참여하는 이들에게는 지원(연대)이 필요하다. 법정 공방을 위한 법적 지원, 집을 잃은 이들에 대한 주거 지원, 강제 집행에 맞서기 위한 물리적 지원, 대규모 탄압에 맞서기 위한 전략적 지원이 필요하다. 많은 경우에, 특히 대규모 파업에서 파업에 동참하는 세입자들은 같은 동지들에게서 서로 도우며 생존을 위해 필요한 조직들을 만들면서 그런 지원을 받거나 기존의 운동 조직들에 지원을 요청했다. 그러나 파업을 촉발시키는 동력은 언제나 용기 있게 첫 걸음을 내딛은 세입자들로부터 왔다.

역사 속의 세입자 파업

이제 역사 속의 주요 세입자 파업들에서 이 세가지 필수 요소가 어떻게 실현되었는지 살펴보자.

1901년 아일랜드 러스커몬 카운티 디프레인 영지에 일어난 소작농 파업

1901년 아일랜드 러스커몬 카운티의 대지주 디프레인 남작의 농장들에서 세입자 파업이 일어났다. 그 이전 수십 년간 세입자들은(소작인) 영국 식민주의와 아일랜드 대기근의 영향에 맞서 저항하고, 그와 관련된 운동을 통해 대영지 지주들에 대항할 수 있는 조직력을 길러왔다. 러스커몬 카운티에서 이들 운동이 자리잡진 않았었지만, 그곳에 거주하는 이들은 그 실천에 관해 알고 있었고, 또 소작농들 사이에서 항상 있어왔던 비합법적인 저항에 이미 참여하고 있었다. (가령, 대중 집회와 물리적 퇴거 저항, 사보타지, 방화 등)

20세기 초, 러스커몬 카운티의 거주자들은 농업과 경제 문제를 다루는 민족주의 조직인 통합 아일랜드인 연맹(United Irish League, UIL)에 의해 조직됐다. 거주자들이 자율적 파업을 시작했을 때, 이들은 파업 지원을 위해 결합했던 다른 그룹과 함께 빠르게 UIL지부와 결합했다. 그러면서도 UIL의 고위 간부들은 모호하게 행동했다. 언제는 지원을 해주고, 다른 때에는 파업을 소작과 사유재산의 개념을 대놓고 거부하지 않는 독립적인 시도로 프레이밍하려 했다. 왜냐하면 UIL 지도부는 계속해서 지배계급의 일부가 자신들의 조직에 동참하도록 설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United Irish League의 창립자 윌리엄 오브라이언
United Irish League의 창립자 윌리엄 오브라이언

파업의 직접적인 원인은 여러가지가 있었다. 폭우가 내려 그해 수확의 대부분이 파괴당해 생계비가 올라갔음에도 디프레인 남작은 임대료(소작료) 인하를 거부했으며, 빚은 쌓여만 가고 많은 가족들이 퇴거당했다. 또, 토지 소유권과 관련해 기나긴 부정의의 역사가 있었다. 인근 영지의 거주인들은 토지를 구매할 수 있었던 데 비해, 디프레인 남작의 세입자들은 농노처럼 생활하도록 강제됐던 일로 인해 더욱 부각됐던 것이다.

파업은 1901년 11월에 시작됐다. 투쟁 초기 통합 아일랜드인 연맹이 그들을 지원하긴 했어도 파업 시도를 하진 않았기 때문에, 많은 소작인들이 비공식적이고 비밀스럽게 파업을 조직했다. 이 파업은 다른 영지들로까지 퍼져나가 1년 넘게 지속됐다. 디프레인 남작 영지의 90퍼센트 이상의 임차인들이 파업에 참여했다. 이들은 바리케이드를 세우고, 경찰에게 돌을 던지고, 무허가 거주지를 지으면서 강제 집행에 저항했다. 이 일은 전국적인 이슈가 되었다. 1903년 영국 의회는 대대적인 농업 개혁으로 소작을 끝낼 수 밖에 없었다.

1907년 부에노스 아이레스와 로사리오의 브룸스 파업

1907년 8월, 부에노스 아이레스 시는 다음 년도 증세안을 가결했다. 그러자마자 건물주들은 임대료를 올리기 시작했다. 빈민 주거 지역의 상황은 그 전에도 이미 비참했는데도 말이다. 그 다음 해에 아르헨티나 지역 노동자 연맹(Federación Obrera Regional Argentina, FORA)은 임대료 인하 캠페인을 시작했다.

9월 13일, 한 블록 내의 137개 아파트에 살던 여성들이 동시다발적인 파업을 시작했다. 이 여성들은 퇴거를 시도하던 변호사, 공무원, 판사, 경찰을 모두 몰아냈다. 9월 말이 되자, 100,000명 이상의 세입자가 이 파업에 동참했다. 이 파업은 위원회 형식으로 조직되었으며, FOR A의 동원 및 조직 구조의 도움을 받았다. 이들은 임대료의 30% 인하를 요구했다. 경찰이 세입자 하나를 퇴거 시키려고 오면, 이들은 온갖 걸 던지고 손으로 드잡이하며 싸웠다.

이 파업은 로사리오, 바이아 블랑카 등 다른 도시들로 퍼져 나갔다. 또 FOR A를 위시로 한 사회주의 및 아나키스트, 노동 조직들의 지지를 얻었다. 경찰의 탄압은 강렬했다. 한 젊은 아나키스트가 경찰에게 살해당하는 일도 있었다. 투쟁의 끝에는, 파업에 동참한 이들이 많은 퇴거 시도를 격퇴했지만, 건물주들이 임대료를 내리도록 하지는 못했다. 3개월 간의 격렬한 전투와 비르히니아 볼텐 같은 많은 조직가들의 추방 끝에 주거법 하에서 투쟁은 동력을 상실했다.

1907년 맨해튼 세입자 파업

1905년과 1907년 사이에 뉴욕 시의 임대료는 33%나 올랐다. 항만, 건설업, 공장에서 일하러 찾아오는 이민자들과 함께 뉴욕은 끊임없이 커져갔다. 그 와중에 아나키스트 및 사회주의자들의 활동도 크게 일어났다. 1907년 가을, 건물주들은 다시 한 번 임대료 인상을 발표했다. 이에 대한 대응으로 20세의 사회주의자이자 유대인 이주노동자인 폴린 뉴먼이 총대를 매었다. 400명의 다른 여성 노동자들을 설득한 끝에 세입자 파업을 시작한 것이다. 12월 말이 되자 수 천여 가구가 동참했고, 새해에는 1만여 가구가 임대료 지불을 중단, 18-20% 임대료 인하를 요구했다. 몇 주 만에 2천여 개 가구가 임대료 인하를 이루어냈다. 이 파업은 향후 몇 년간의 지역 투쟁과 결과적인 임대료 국가 통제의 발단이 되었다.

1915년 글래스고시에 있었던 바부르 부인의 군대

1915년 이전 몇 년간, 스코틀랜드 글래스고 시는 전시 산업화와 이촌향도로 인해 급격히 성장했다. 자산가 계급은 부동산업에 기대를 걸고 11%의 집을 비워 놓은 채 새로운 건축에 투자하지 않았다. 그 와중에 노동자계급은 더 붐비고 낡아가는 집에 살아야 했다. 스코틀랜드 주거회의(Scottish Housing Council)같은 단체와 여러 노동조합들은 주거와 임대법 개혁을 위해 몇 년간 노력했다. 이들은 몇 개의 새로운 법 제정을 이뤄냈지만 전반적은 상황은 계속해서 나빠졌다. 게다가 1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인해 식료품 가격이 한없이 올랐고, 대부분의 청년은 해외로 나가있었다.

건물주들은 이것이 기회라고 여겼다. 남성이 없는 상태의 가난한 가구들을 착취하는 게 더 쉬울 것이라고 생각했다. 1913년 8월부터 9월까지, 글래스고에서는 484번의 퇴거가 일어났고, 1915년 1월부터 3월까지에는 6441번이나 일어났다.

노동자계급을 고통스럽게 하던 비참과 착취, 대학살 속에서 글래스고 건물주들은 좋은 기회를 엿봤다. 1915년 2월, 이들은 모든 임대에 관해 25퍼센트 인상을 발표했다. 즉각적으로 2월 16일, 고반 지역의 남부에 사는 모든 빈민 여성들은 대중 집회를 가졌다. 집회에는 1914년 결성되었으나 아직 인지도가 적었던 글래스고 여성 주거 연합(Glasgow Women’s Housing Association, GWHA)이 참석했다. 집회에서 여성들은 GWHA에 소속된 남(南) 고반 여성 주거 연합(South Govan Women’s Housing Association)을 결성했다. 이들은 기존 임대료는 지불하되 인상분의 미지불을 결의했고, 이는 지역에서 빠르게 퍼져나갔다.

GWHA는 5월 1일 집회를 주최하여 2만명 이상의 참가자를 끌어모았다. 6월에는 고반 여성들이 임대료 인상 취소를 이끌어냈다. 운동은 거기서 시작되었다. 글래스고 전체에서 3만명 이상의 사람들이 세입자 파업에 참여했다. 이들은 고반 지역의 노동자였던 메리 바부르(Mary Barbour)의 이름을 따 바부르 부인의 군대라고 알려졌다. 파업을 퍼뜨리고 대오를 유지하는 과정에서 이들은 집회와 시위를 조직하고 경찰과 직접 싸우며 퇴거로부터 세입자들을 보호했다. 노조들은 군수 공장에서 파업을 하겠다고 위협했다. 1915년 말, 이들은 파업에 동참한 이들에 대한 모든 징벌적 조치의 중단과 전쟁 이전 임대료를 유지하는 임대료 동결, 영국 최초의 임대료 제한법(얼마 가지 않아 도입되게 되는 공공 주택으로의 중요한 한 발자국)을 이뤄냈다.

이 운동은 일찍부터 주거 문제에 집중하던 사회주의당 연관 조직 스코틀랜드 주거 연합 연맹(Scottish Federation of Housing Associations) 같은 여타 조직과 좌파 조직들의 지지를 이끌어냈다. 그러나 여성들이 기존 조직에 참가하기보다는 자율적인 조직들을 만들어냈다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GWHA의 초대 회장인 메리 번스 레어드(Mary Burns Laird) 같은 이들은 정당들과 함께(레어드의 경우에는 노동당과) 조직하기도 했지만 바부르 부인 같은 다른 이들은 어떤 정당에도 소속되지 않은 채 투쟁을 위한 자기 자신들의 길을 갔다. 어쨌든, GWHA의 활동은 전통적인 좌파 정치와는 거리가 있었다. 이들의 집회나 회의는 그들의 주방, 빨래방, 거리에서 일어났다. 대부분의 경우, 온갖 약어 뒤에 있던 힘은 바로 가난한 여성들이 평소 쌓아두었던 연대의 네트워크였다.

1931년 바르셀로나 경제보호위원회

1931년 바르셀로나는 독재로부터 해방된 지 얼마 안된 상태였다. 사람들은 민주주의가 가져올 개선들을 간절히 기다렸다. 바르셀로나는 임대료가 임금의 30-40퍼센트를 차지하는, 유럽에서 가장 비싼 도시가 됐다. (오늘날 수치는 이와 비슷하거나 더 나쁘지만 당시 유럽 도시에서의 평균은 15퍼센트 정도였다.) 삶의 조건은 최악이었다. 임대료를 부담할 수 없는 많은 이들은 공장 교대 시간 사이에 쉴 수 있는 방인 “자기 위한 집들(Casas de Dormir)”로 갔다. 이 방들은 침대조차 없었다. 단지 노동자들이 팔을 쉴 수 있는 밧줄밖에 없었다.

1931년 4월 임대료의 40% 인하를 요구하며 세입자 파업이 터져나왔다. 이 파업은 12월까지 4만 5천명에서 10만명 사이의 사람들이 도시 전체에서 참여하며 이어졌다. 경제 보호 위원회(CDE)는 CNT(Confederación Nacional del Trabajo, 전국 노동 연맹)의 건설노조에 의해 설립되어 파업의 조정과 확산에 중추를 담당했다.

여타 수많은 세입자 파업과 같이 이 세입자 파업도 같이 바리케이드를 세우고 퇴거에 저항하는 등 파업하고 있는 이웃 간의 연대가 두드러졌다. 이들이 투쟁에 성공하면, 거리에서 축하했다. 성공하지 못하면, 퇴거당한 집을 뜯고 들어가 거기서 축하했다. 아침에 수도와 전기를 끊은 그 노동자들이 저녁에 돌아와 다시 연결했다. 이들은 물론 CNT 소속이었다. 가끔은 경찰은 [이미 쫓아냈다가] 재점거된 집들로 다시 돌아와야하는 데에 지쳐서 가구를 창문 밖으로 던지거나 부수기도 했다. 다른 전술 중에는 오늘날 “escrache”라고 알려진, 건물주의 집 앞에서 시위하는 전술도 있었다.

물론 이 파업은 무(無)에서 생성된 것이 아니다. 이는 지역 사회의 자치 전통과 이웃 사이에, 지인 사이에 생겨난 다층다양한 관계와 인연의 네트워크에 기반해 있었다. 또한 1차 세계 대전부터 CNT가 길러온 래디컬 문화에도 긴밀히 연관되어 있었다.

“CDE의 조직가 산티아고 빌바오는 이 세입자 파업을 경제적 상호 부조의 주요한 실천이었고, 이를 통해서 가지지 못한 자들이 시장의 힘에 저항하고 자신들의 일상의 주도권을 쥘 수 있었다고 이야기했다. CDE가 노동자들에게 한 조언은 이것이었다. “잘 먹고 돈이 없다면 월세를 그냥 내지 마시오!” CDE는 또한 실직자는 임대료 지불에서 면제될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세입자 파업이 CDE가 조직한 대중 집회를 통해서 퍼져나갔긴 했어도 실질적인 운동은 거리에서 일어났고 이것이 그 어떤 조직보다 훨씬 필수적인 것이었다.”
– Barcelona (1931), Huelga de Inquilinos

“세입자 파업은 바르셀로나타 구역에서 시작되었다. 바르셀로네타 구역에는 어부들의 고된 삶과 마키니스타 테레스트레 이 마리티마 (육해상 기계사(社), Maquinista Terrestre y Marítima, 당시 금속 산업의 거두 중 하나) 노동자들로부터 형성된 사회적 의식이 존재했다. 여기서 [주거에 대한] 불만이 우러나온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이 지중해 옆에 위치한 전통적인 어업 구역에선 어부들의 집들이 성냥갑이라는 별칭으로 불렸다. 5-7평 남짓한 방에 가족 전체가, 가끔은 주변 마을에서 최근에 도착한 친척들 같은 식객과 같이 살았다. […] CNT의 유일건설노조(Sindicato Único de la Construcción)가 조금씩 조금씩 도시와 각 구역의 주변부로 퍼져나간 노동자 계급의 불만을 조직했고, 각 구역의 파업은 고유의 특성과 정체성, 투쟁의 방식을 가졌다.”
– Aisa Pàmpols, Manel, (2014) “La huelga de alquileres y el comité de defensa económica,” Barcelona, abril-diciembre de 1931. Sindicato de la Construcción de la CNT. Barcelona: El Lokal.

파업은 카탈루냐 주지사 오리올 앙게라 데 소호와 1934년 10월 봉기 진압에도 주 역할을 한 건물주 연합 회장 조안 피치 이 손의 지휘 하의 격렬한 탄압으로 효과적으로 진압됐다. 새로운 민주 공화국은 제 무기를 다 가져와보니 예전 독재와 별로 다를 것이 없어보였다. 경찰, 구아르디아 시빌(시민 보호대-기동경찰), 새로이 신설된 준군사경찰 구아르디아 데 아살토(공격대-경찰특공대)까지 모두 동원했다. 공화국 수호법이 발동되어 이들에게 완전한 자유를 허용했다. 파업 참여자들 일부는 “연방정부 죄수”로 감옥에 갇혔고, CDE는 범죄 조직으로 선포됐다.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시위는 계속되어 곧 오게 될 혁명을 향한 잉걸불을 때웠다.

세입자 파업에 대한 1차 문헌자료의 대부분은 스페인 내전에서 아마도 이런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저항의 한 예시에 대한 공포로 파괴되었다. 결과적으로 이 파업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했던 여성들의 목소리의 많은 부분이 사라졌다. 역사 편찬 과정에서는 비록 이번 파업에는 CNT의 중심으로서의 중요성을 의심할 수 없지만 공식적인 조직들이 비공식적 조직 공간보다 언제나 더 많은 중요성을 가진다. 그러나 각 구역에서 파업 전술이 달랐다는 것은 파업이 중앙 통제로 이루어졌다기보다는 실제로 행동한 이들의 의지에 따라 실행되었다는 것을 시사한다.

  • Barcelona (1931), Huelga de Inquilinos
  • Aisa Pàmpols, Manel, (2014) “La huelga de alquileres y el comité de defensa económica,” Barcelona, abril-diciembre de 1931. Sindicato de la Construcción de la CNT. Barcelona: El Lokal.

1959-60년, 런던 세인트 판크라스

런던의 세인트 판크라스는 약 8000천명 가량이 공공 주택에서 거주하던 노동자계급이 주로 살던 지역이었다.

1958년 [세인트 판크라스가 속한 캠든] 자치구 의회는 공공 주택의 임대료 인상안을 결의했다. 그 해 7월 말 보수당이 구의회 선거에서 승리한 후 구의회는 다시금 임대료를 인상했다. 이번에는 100%-200% 사이의 엄청난 규모의 인상이었고, 거기에 더해 (이전에는 자치구에 있는 노동자들이 의무적으로 가입해야했던) 노조들을 쫓아냈다.

그때까지는 런던에 지역 풀뿌리 조직이 별로 없었다. 하지만 8월이 시작되면서 한 지역의 세입자들이 협회를 조직했다. 8월 말이 되자 캠든에는 위와 같은 세입자 협회가 25개가 조직됐고, 새로이 창설된 세입자협회 연합(United Tenants Association, UTA) 중앙위원회에 대표자를 보냈다. UTA 위원장 돈 쿡(Don Cook)은 1959년 이전에 있었던 소규모 세입자 협의회 중 하나의 위원장이었기도 했다.

초기부터 이 조직의 기층은 직접 행동과 세입자 파업을 적극 지지했다. 그러나 세입자의 요구들을 보수당을 이기고 캠든 구를 다시 장악하는 데 써먹고자 했던 노동당이 이들을 저지했다.

1959년 9월 1일, 4000여 명의 사람이 행진과 집회를 열였다. 여기서 참가자들은 각 가정의 새 임대료를 책정하기 위해 요구받은 제출 서류 작성 거부, 단결 호소, 퇴거를 눈 앞에 둔 어느 가정이라도 지키겠다는 약속, 노조들을 향한 연대 요청 등을 포함한 사항들을 의결했다. 그 후 몇 달간 세입자들은 시위를 계속했고, 노조의 지원과 함께 각 블록마다 위원회를 설립했다. 각 위원회는 대변인을 뽑아 200명 혹은 그 이상의 규모로 주마다 대변인 회의를 열었다. 또 이 회의에서는 3주마다 회보를 발행해 상부에서 기층까지 정보를 제공했다. 연말이 되자 UTA에는 35개 세입자 협회가 가입되어 있었다.

여성들은 구의원들의 집 앞에서 야간 시위를 조직하였다. 구의원 각각은 주에 두번 이상은 야간 시위의 대상이 되었다. 구의원들의 수면 시간은 확 줄었다. 한 참가자(Dave Burn)가 파업에 관해서 쓴 이야기 중 하나에는 여성들이 “운동의 척추가 되었다. 여성들은 매일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서로를 지탱해줬다.”고 진술한다. 그렇지만 번의 이야기 대부분은 남성이 압도적으로 다수를 차지한 공식적 대표 조직들에 주목하고 있다. 급등한 임대료는 1960년 1월 4일부터 효력을 발휘하기로 예정되어 있었다. 초기에는 공공 주택 세입자들 중 80%는 인상분을 내지 않고 기존 분만 지불했다. 수많은 협박이 이루어지고 자치구의 퇴거 조치가 시작되자 파업 참여율은 전체 세입자의 1/4 정도로, 즉 2000명 정도로 하락했다. 2월달에는 노동당이 보수당과 협상할 수 있게 UTA에게 파업을 중지해달라고 요청했다. UTA는 거절했다. 파업이 없이는 세입자들은 완전히 국가 폭력에 그대로 노출되고 일부 가정은 이미 퇴거 조치가 진행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UTA는 역량을 집중하기 위해서 한 번에 너무 많은 강제 집행에 맞서싸우지 않도록 체납 임대료 대부분의 집단적 지불을 조직했다. 첫 재판들이 시작되었고 3번의 강제 집행이 8월 말에 예정되어 있었다. 세입자들은 수비를 조직하기 시작했다. 공공 주택에서의 단 하나의 퇴거도 허용하지 않을 참이었다. 이 과정이 한창이던 7월, UTA 지도부는 구의원들을 만났다. 하지만 보수당 의원들은 세입자들의 문제에 관해서 아무것도 듣고 싶지 않아했기 때문에 협상은 실패했다. 그 순간 이후로 UTA는 세입자 총파업에 돌입했다. 8월 중순이 되자, 250개 이상의 강제 집행 고지가 날아들었다.

8월 28일이 되자 거대한 바리케이드들이 세워졌다. 세입자들은 동네 전체에 알릴 수 잇는 피켓과 경보 시스템을 구축해 노동자들이 나와 사람들의 집들을 지키러 올 수 있도록 했다. 8월 14일에는 강제 집행 고지가 514개로 늘었다. 노동당과 공산당은 커지는 긴장 상태에 두려움을 느껴 파업 중지를 호소했지만, 때는 이미 너무 늦었다.

9월 22일, 800명의 경찰이 돌입했다. 2시간의 격전 끝에 경찰관 하나가 중상을 입고 블록 하나의 두 집의 강제 집행을 완료했다. 충돌은 정오까지 계속되었다. 300명 가량의 지역 노동자들이 파업 사수를 돕기 위해 달려왔다. 하지만 노조들은 지원을 보내지 않았다. 오후에는 14,000명 가량의 세입자들의 행진을 1000여명의 경찰이 공격했다. 대치는 계속됐다.

구의회 의장이 UTA 대표단을 만날 준비가 되었다고 선언했다. 그 다음날, 내무부 장관은 모든 시위 및 집회 금지를 선포했다.

봉기가 일으킨 정치적 논란으로 인해, 노동당은 세입자들을 버리고 이들을 “선동가” “좌경맹동주의자”라고 폄하했다. 또 노동당은 외부 세력 개입설을 주장했고 대화를 통해 이 사태를 해결해야한다고 강조했다. 지난 1년간 보수당 구의원들은 거의 항상 대화를 거절해왔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 와중에, 협상 결과로 보수당은 소규모의 임대료 인하를 승인했다.

좌우의 공격과 나날이 새로운 퇴거 협박을 받자 UTA는 더 이상의 퇴거를 피하기 위해 전략 수정을 결의했다. UTA는 가장 큰 퇴거 위험을 안고 있는 이들의 체납된 임대료를 지불하고, 다음 선거에서 보수당을 몰아내기 위해 노동당을 돕기로 결정했다. 1961년 5월, 노동당은 구의원 의석을 51대 19로 장악했다. UTA 대표자 중 몇몇이 임대료 개혁을 선거 발판으로 노동당 구의원들 사이에 껴 있었다.

세입자들은 공공 주택 임대료 개혁을 기다리고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저번에 퇴거당한 두 세입자들은 새 주거지를 찾았지만 노동당 구의원들은 임대료 개혁이 불가능하다고 선언했다. 파업은 실패했다.

1970년대 이탈리아 자체인하(Autoriduzione) 운동

이탈리아의 1960-70년대는 노동과 주거의 불안정성이 증가하던 시기이자, 사람들이 착취 없는 세상을 꿈꾸고 그를 감히 좇고자 했던 시기이기도 했다. 1974년, 공산당의 중립성을 믿고 산업 및 경제 분야의 가장 “진보적인” 테크노크라트들은 카를리 계획(Il Piano di Carli)이라는 프로젝트를 기획했다. 카를리 계획은 노동 착취 증가와 공공지출 감소를 목표로 했다.

1960년대 동안 이탈리아에서는 강력한 노동자 자주관리 운동이 일어났고, 이는 여성들이 큰 역할을 한, 자율적으로 조직된 지역 위원회에 기반한 지역자치 운동의 출현에 영향을 줬다. 실질적이고 즉각적인 생존에 집중한 이들 위원회들은 “자가 인하”를 조직했다. “자가 인하”란 세입자와 지역 주민 스스로 공공서비스 가격을 낮추기로 결정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수도세나 전기세의 절반만 [자체적으로 결정하여] 낸다는 것이다.

토리노에서는 1974년 여름에 이 운동이 꽤나 큰 모멘텀을 얻었다. 대중교통 업체들이 요금 인상을 결정하자 즉각적으로 토리노 시민들은 반응을 보였다. 자가 인하 운동의 참가자들은 여러 지점에서 버스들을 동시다발적으로 막고, 팜플렛을 뿌리고, 시 당국에 대표들을 보냈다. 거기서부터, 가장 전투적인 노조들이 대중 행동을 조직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자신들이 대중교통 이용권을 인쇄해 자원자들이 버스에서 이전 요금을 받고 나눠주는 방식의 행동을 취했다. 집단적인 힘으로 이들은 업체들이 상황을 받아들이도록 했다.

전기세에 대한 자가 인하는 빠른 속도로 퍼져나갔다. 이 자가 인하는 두 과정으로 이루어졌다. 처음으로, 공장과 지역에서 자가 인하에 참여하겠다는 서명을 모으고, 그 다음으로 우체국 바깥에서 공공 운수 노조들이 유출한 요금 통지서 배달 시각 및 장소 정보를 이용하여 피켓 라인을 형성했다. 이들은 자가 인하에 참여하는 방법을 적은 책자들을 나눠줬다. 몇 주만에 토리노와 피에몬테 주에서 약 15만 가구가 참여했다.

자가 인하 운동은 요금 인상에 대한 직접 행동을 통제하려 했던 이탈리아 공산당이 관할하는 노조 전국위원회보다는 지역위원회가 자치권을 가지고 있었던 토리노에서 세가 더 컸다. 그래서 토리노에서는 노조들이 자발적인 행동과 지역위원회들에서 취한 행동에 힘을 보태고 지원할 수 있었다. 이와는 달리 밀라노에서는 노조가 이러한 활동을 지지하지 않았고, 나폴리와 같은 곳에서는 애초에 강력한 노조가 존재하지 않았다. 팔레르모 같은 도시에서는 학생과 청년들이 불법적인 행동을 통해 자가 인하를 가능케 했다.

이 자가 인하 운동은 가구 소득 10% 미만 임대료 유지 목표로 임대료 자가 인하로까지 확장됐다. 작은 집단 행동들부터 더 급진적인 노조들이 지원하는 지역위원회의 행동까지 다양한 전술들이 적용됐다. 1970년대 전반, 운동 참가자들은 2만 채의 집을 임대라는 상업적 논리에서 일시적으로 해방시키며 점거했다. 로마·밀라노·토리노에서도 세입자 파업이 있었다.

더구나 자가 인하 운동에서 페미니즘 운동은 주요한 일부였다. 여성들은 이런 맥락에서 자본가-가부장-국가의 삼중 착취와 재생산 노동이론을 만들어냈고, 오늘날의 운동에서도 이 이론들은 중요한 이론적 유산으로 남아있다.

1980년대 남아프리카 공화국 소웨토 흑인 거주구

소웨토는 남아공 요하네스버그에서도 인구 밀도가 높은 도심 지역이다. 1980년대 소웨토엔 약 250만 명이 거주했다. 아파르트헤이트 정권 말기, 소웨토 주민들은 사회적 배제와 극도의 빈곤을 겪었다. 그로인해 1976년에는 격렬한 시위와 파업, 수십 명의 사망자를 초래한 경찰과의 충돌, 즉 소웨토 봉기가 촉발됐다. 지역의 물질적 조건은 나아지기 시작했지만, 이는 오로지 지역 주민들의 끊임없는 투쟁 덕분이었다.

주거 환경은 끔찍했다. 집들은 열악했고, 비위생적이었으며, 난장판이었다. 임대료와 관리비는 치솟는 실업률은 고려하지 않더라도 거주민들의 평균 임금의 1/3에 달했다. 1986년 6월 1일 임대료를 인상하겠다는 소문이 퍼졌을 때, 수 천명의 소웨토 거주민들이 소웨토 지역 의회로의 임대료와 관리비 지불을 중단했다. 지역 의회는 세입자 파업을 강제 집행으로 분쇄하려 시도했다. 8월 말, 경찰은 강제 퇴거 명령에 불응한 군중에 사격하여 20명 이상을 살상했다. 이를 규탄하는 분노가 가열되었고, 당국은 강제 집행을 중단했다.

1988년 초, 관계 당국은 전국적인 흑인들의 저항을 억압하기 위해 비상 사태를 선포하였다. 당국이 진압하지 못했던 유일한 주요 거점은 소웨토 세입자 파업이었다. 그 해 중순, 파업은 계속되었고, 관계 당국은 압박 수단으로 거의 지역 전체의 전기를 차단했다.

언론은 파업이 젊은 급진파들의 폭력으로만 지속되므로 비현실적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현실은 정 반대인 것으로 드러났다. 반 아파르트헤이트 운동을 거의 멈추었던 30개월 간의 비상 사태에도 불구하고 지역 주민 대부분이 계속해서 파업을 지지했다. 종국에는 관계 당국은 자신들이 통제권을 완전히 잃었음을 깨달았다. 1989년 12월, 당국은 모든 체납 임대료를 탕감(1억 달러 이상의 손실)하였다. 또한 강제 집행을 완전히 멈추었고, 거주민들과의 협상 기간 중 모든 임대료 수취를 중단하였으며, 적어도 5만 개의 가구에게 직접적으로 주택의 소유권을 양도했다.

이들 세입자 파업 이전에도 반 아파르트헤이트 운동 세력은 백인 정부에 반대하는 전술로 세입자 파업을 전개했기 때문에 주민 전체가 세입자 파업에 익숙했다. 반 아파르트헤이트 운동에서 일어난 조직화와 조직들은 연대의 실천을 크게 확장했다. 하지만 첫 주요 세입자 파업은 레코아(Lekoa)에서 1984년 9월 주민들 자신들의 임대료 인상에 대한 즉각적인 대응으로 일어났다. 이 파업에 가장 결합되어있던 조직은 바알 시민연맹(Vaal Civic Associaton)이었는데, 이 파업은 아프리카 전국회의(African National Congress, ANC)와 여타 조직이 활용하기 시작한 세입자 파업 전술의 시초가 됐다.

비슷하게 소웨토 세입자 파업도 당면한 상황과 생존의 압박에 대한 주민들 자신의 대응으로부터 솟아나왔다. 소웨토 세입자 파업은 비공식적인 주민 간의 네트워크가 파업 조직에 핵심이 됐고, 공식적인 조직들은 파업 개시 이후 필요에 따라 만들어진 전형적인 사례였다. 그리고 소웨토 세입자 파업 참가자들이 몇 공식 조직들로부터 배제당했을 때도 여성들은 핵심인 주민 간 네트워크의 조직 및 유지의 주역이었다.

2017년 로스앤젤레스 보일하이츠 마리아치

인종차별주의적 젠트리피케이션 시도의 일환으로, 한 건물주가 로스 앤젤레스 보일 하이츠 지역의 마리아치 광장 옆에 있는 아파트 몇 채의 임대료를 60-80% 인상했다. 세입자의 절반이 (임대료 인상에 직접 영향 받지 않은 세입자들도 포함해서) 즉각적으로 연합을 형성했다. 그리고 건물주와의 대화를 요구했다. 건물주가 이들에 각각 개별적으로 대응하려고 하자 연합은 세입자 파업을 시작했다. 그러자 로스 엔젤레스 세입자 조합(Los Angeles Tenants Union, LATU)가 파업을 지지하며 조직과 법적 자원 확보를 도왔다.

9개월이 지나자 세입자들은 14%의 임대료 인상 조건, 3년 계약(미국에선 매우 드물다), 미납 금액에 대한 어떠한 불이익 면제, 3년 후 차기 계약 집단 교섭권을 얻어냈다.

2018년 로스엔젤레스, 단결된 벌링턴

로스 엔젤레스 래팅스 지역 벌링턴 대로의 같은 건물주 하 3개 건물에서 파업이 시작되었다. 당시에는 급속한 젠트리피케이션이 진행되고 있었고, 집을 잃고 거리에 나앉은 래팅스 사람들의 숫자가 급등했었다. 건물주가 임대료를 25-50% 인상하자 192채 중 36채의 아파트에서 파업이 선언되었다. 건물들의 열악한 상태 또한 세입자들이 공유하던 불만 사항이었다. 파업 2주차에 돌입하자 총 85채, 거의 절반이 파업에 돌입했다. 주민들은 파업 선언부터 시작해서 자신들을 조직해 나갔다. 여기에 더해 지역 LATU와 인근 지역의 퇴거에 반대하는 법적 보호 활동가 조직이 파업 참여자들에게 도움을 제공했다.

사법부는 각 아파트 건물에 대해 별개의 재판을 진행하면서 저항을 찢어놓았다. 아파트의 절반은 승소했고, 나머지는 떠날 수 밖에 없었다.

2017-8년 토론토 파크데일

2017년에 토론토 파크데일에 위치한 같은 건물주 하의 여러 빌딩에 분산된 300채의 아파트에 거주하는 세입자들이 성공적인 세입자 파업을 이뤄냈다. 파크데일에서는 급속한 젠트리피케이션이 진행되고 있었고, 이에 연관된 부동산 회사는 열악한 아파트 환경과 임대료 인상을 통한 강제 추방 시도로 세입자들 사이에서 악명을 얻었다.

부동산 회사가 임대료를 올리려고 시도하자 일부 주민들이 파업을 선언했다. 그러자 다른 주민들도 빠르게 동참하여 자치회의 형식으로 자신들을 조직했다. 여기에 또 다른 주요한 요소 중 하나는 2015년 지역 투쟁에서 만들어진 같은 지역의 조직 “뭉쳐라 파크데일(Parkdale Organize)”의 활동이었다. 뭉쳐라 파크데일은 임대료 인상 통지를 받은 건물들을 돌아다니고, 자원을 제공하고, 저항 모델들을 공유하면서 파업 조직을 도왔다. 3개월 후, 주민들은 임대료 인상 저지에 성공했다.

이런 사례에 영감을 받아 그 다음 해에 파크데일의 189채짜리 다른 아파트 건물에서 세입자들이 파업에 돌입했다. 부동산 회사가 임대료의 대대적인 인상을 발표하자, 55채 아파트의 세입자들이 자치회를 구성하고 파업에 돌입했다. 파업 2개월 차에 세입자들은 자신들의 요구를 관철시켰고 건물주는 임대료 인상을 취하했다.

공통점

이 파업들의 대부분은 여성들이 시작했다. 여성들은 위에 언급된 모든 사례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파업은 항상 많은 세입자들이 비슷한 조건에 처하게 됐을 때 일어났다. 임대료가 임금의 큰 부분을 차지하고, 집을 잃을 위기에 처하고, 매우 건강에 해로운 환경이나 러스커몬 파업에서의 영국 식민주의 같은 맥락적 문제, 일부에게 혜택을 주고 나머지에게 불이익을 주는 불공정한 개악 등의 추가적으로 분노를 불러일으키는 원인이 있었다. 그리고 거의 항상 처음 불꽃이 튀는 순간이 있었다. 가장 흔한 것은 임대료 인상이나 세입자들의 경제적 상황 악화였다.

파업은 자주 자발적,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났다. 하지만 파업은 무(無)에서 생성되지 않았다. 파업은 자치 회의 또는 지역 네트워크에서 형성된 주민들의 구체적인 의지에서 (긍정적인 맥락에서) 표출되어 나온 것이다. 거기서부터 파업 참여자들은 자체 조직을 만들거나 기존 조직들의 지원을 끌고 왔다. 그 외의 경우에서는 어떤 공식적 조직이 파업의 시초부터 존재했다. 그렇지만 이 조직은 거대 노총이나 정당이 아니라 세입자 자신들이 자신들을 위해 만든 보다 소규모의 조직이었다. 우린 세입자 파업이 대규모 조직에 의해 개시된 사례는 단 한 개, 1931년 바르셀로나밖에 찾지 못했다.

승리 가능성을 고려했을 때, 파업이 가능한 한 널리 퍼지는 것이 중요하다. 다만 다수가 참여하고 있을 때는 필수적이지는 않다. 같은 건물주 아래의 세입자 중 1/4, 1/3만 참여했을 때도 파업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 특정 건물주가 타겟이 아닌, 일정 지역에서 일어난 파업들의 경우에는, 도시 전체의 거주민의 터무니 없이 작은 부분만을 차지하더라도 정상성을 위협하고, 정부 안에 위기를 촉발시키고, 사법 시스템에 과부하가 걸리게 할 수 있다. 개인적 해결책을 찾기보다는 높은 사기와 연대를 유지하려는 의지가 파업 참여자의 수보다 더 중요하다.

또다른 요건, 가장 중요할 수도 있는 이 요건은 맥락에 따라 좌지우지된다. 국가가 어느 정도까지 탄압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가? 국가에게 있어서 불복종을 분쇄하는 것이, 아니면 갈등을 중재하고 자신들의 이미지를 회복하는 것이 더 중요한가?

지금은 세입자 파업의 적기

우리가 지금껏 보았듯이 사람들 사이에서 세입자 파업이 퍼져나가기 위해서는 특정 조건들이 필요하다. 즉, 가면 갈수록 더 많은 사람들이 집을 가지기 불가능하게 하는 불안정성과 상황이 최악으로 흘러간다는 공통된 자각이 필요하다. 현재 이 조건들이 존재하고 있을까?

거대 국제 투자 펀드들은 점점 더 세계 곳곳의 부동산을 사들이고 기록적인 고(高) 임대료를 받고 있다. 이들이 주거 시장을 포식하면서 사람들이 집에서 살기 위해 지불해야하는 비용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고 있다.

예를 들어서 스페인에서는 (이 글을 쓸 당시에 데이터가 있는 가장 최근인) 2020년 2월에 임대료가 1평방미터(1/3평)당 11.1유로(한화 약 14,803원)으로 2019년 2월로부터 5.6% 인상을 기록하며 역사적으로 최고점을 찍었다. 최고가의 지역들은 마드리드 주(15유로), 카탈루냐 주(14.5유로)였다. 마드리드 시에서는 3.5%의 인상률을 기록하며 1평방미터당 16.3유로, 바르셀로나 시에서는 3.7%, 1평당미터당 16.8유로였다. 그러나 유명 관광 도시들 모두는 비슷한 수준의 인상을 겪었다. 2014년에서 2019년 사이에 스페인의 평균 임대료는 50% 상승하여 2008년 경제 위기 이전 최고점을 훨씬 넘겼다.

동일한 기간 동안 스페인 평균 임금은 3퍼센트만큼도 오르지 않았다. 그렇다. 집세는 50%가 오르고 임금은 3% 오른 것이다. 그러나 평균 임금은 노동자들과 백만장자를 포함하고, 후자는 임대료를 낼 필요도 없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받는 임금(즉, 민중 사이에서 가장 흔한 임금 수준)을 보면 그동안 훨씬 적게 상승하거나 심지어 감소한 것을 볼 수 있다. 요약하자면 이젠 그 어느 때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집에서 살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우리는 코로나 바이러스 훨씬 이전부터 지난 5년간 이런 상황이 나타날 징조를 계속 보아 왔다.

이 주거권 접근의 부재는 통계로도 확인할 수 있다. 2018년에는 스페인에서 59,000 건 이상의 강제 퇴거가 있었다. 이 중 임대료 체납의 사유가 차지하는 비중은 이전보다 늘어났다. 2019년에는 54,000건 이상이 있었고, 이 중 70%는 도시주거임대법 개정안(Ley de Arrendamientos Urbanos, LAU, 단기 임대 유연화, 장기 임대 보호를 골자로 한 개정안)에 기인했다. 두 해 모두 카탈루냐와 안달루시아 주가 퇴거 건수 최상위를 차지했다. 2018년보다 2019년의 강제 퇴거 건수가 감소한 것은 도처에서 나타난 강제 집행에 대한 저항과, 더 적은 수의 사람들이 주택담보대출을 받을 수 있게 되고 지난 12년 간의 저항의 폭발로 인해 은행들이 좀 더 협상하고자 하여 매년 더 적은 압류가 일어나게 되는 경향으로 설명할 수 있다.

2017년과 2019년 사이 마드리드의 집 없는 이들의 수는 25%가 늘어 공식 통계에 따르면 2583명, 다른 전문가들에 따르면 실제로는 3000명 정도가 되었다. 스페인 전체에는 4만명 이상의 집 없는 이들이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Crimethic 주: 미국에서는 로스 엔젤레스 시에서의 집 없는 이들의 수만 해도 이 숫자를 넘는다.] 코로나 판데믹은 이 상황을 더 악화시키기만 했다. 많은 이들이 일자리를 잃었다. 정부의 비상 조치가 경찰과 계엄 세력의 힘을 증강시키고, 금융 기관, 사장, 부동산이 있는 이들을 지키면서 가장 불안한 이들, 즉 세입자들, 미등록인들, 집 없는 이들을 보호하지 않는 것은 크게 놀랄 일이 아니다. 한편, 코로나는 빛의 속도로 연대의 증상들이 퍼져나간 때이기도 하다. 사람들은 발코니에서 caceroladas(cacerola(손잡이 달린 냄비)로 시끄럽게 소리를 내는 시위 형태)를 행했고, 빠르게, 정부가 부과한 포위 상태에도 불구하고 사회적 요구의 목소리가 퍼져나갔다.

요약하자면 지금은 세입자 파업을 위한 적기가 아니지만, 지금 당장 그런 행동을 조직해야 할 필요가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하다. 만약 지금이 때가 아니라면-주거 불안정성이 그 어느 때보다 높고, 전세계적 전염병에, 사회적인 행동들이 빠르게 퍼져나가는 이 때-, 아마도 세입자 파업을 하기 위한 적합한 때라고는 결코 없지 않을까?

세입자들의 걱정

세입자 파업을 지지할 만한 세입자들이 몇 가지 의구점을 가지게 되는 건 이해할 만한 일이다.

우선 법적 문제가 있다.

처음에는 단순히 세입자 파업과 연관된 경험의 완전한 부재로 인해 의구심이 싹트게 된다. [스페인의 경우] 우리가 아는 한 스페인에서는 1931년 이후 세입자 파업이 존재하지 않았다. 이런 질문들이 떠오를 수 있다. 이게 어떻게 된다는 거지? 내가 가진 권리는 뭐고 임대료 지불을 중단하면 내가 받을 만한 불이익은 뭐지?

요약하자면, 세입자 파업을 하기 위해선 단순히 두가지만 하면 된다. 집세를 그만 내고, 다른 사람들과 소통하기. 건물주한테 미지급 통보를 할 수 도 있고 안할 수도 있다. 통보하는 게 파업을 더 강력하게 할 수도 있지만 같은 건물주 하의 다른 세입자들이 파업에 동참한다면 이것 또한 메시지를 전달할 것이다. 그란 카나리아(Gran Canaria)의 세입자 조합은 건물주에게 보낼 수 있는 양식 예시를 제공한다.

두번째 단계가 매우 중요하다. 다른 사람들에게 당신이 파업에 동참했다고 알려라. 더 많은 사람들이 참여할수록 각각의 위험이 줄어든다. 이웃들과 이야기하는 게 그들이 파업에 참여하도록 독려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또 지역에서 연대를 제공할 수 있는 네트워크들에 파업에 관해서 이야기하는 것도 매우 중요하다. 지역 협의회나 주거권 혹은 세입자 조합, 아니면 CNT와 같은 연대에 기반한 노조들이 있을 수 있다. 이들이 파업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참여하고 있는 지 대략 알게 되면 이들이 정보와 자원을 분배하고 강제 집행에 맞서서 집단적 방어를 조직할 수 있도록 도울 것이다. 함께하면 우린 훨씬 강하다는 것을 기억해라.

법적인 결과에 관해서는, 임대료 지불을 중단하면 건물주는 당신을 쫓아내기 위한 강제 퇴거 조치를 시작할 수도 있다. 하지만 많은 경우에 같은 건물주 하의 복수의 세입자들이 임대료 지불을 중단하면 건물주는 (임대료 인하 포함도 가능한) 합의에 도달할 수 밖에 없게 된다. 지금과 같은 보편적인 위기 상황에서는 많은 이들이 파업에 참여하면 국가가 개입하여 강제 퇴거 중지를 선언할 가능성이 높다.

정서적인 걱정도 있다. 

세입자 파업에 있어서 정서적인 측면은 매우 중요하다. 불안정한 주거 상태는 어디에나 언제나 존재한다. 세입자 파업을 불러일으키는 근본적인 요소는 “더 이상은 못 참아!”라고 말하는 이들의 용기이다. 이들은 위험을 감수하고, 주도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세입자 파업은 일종의 모순이 있다. 만약 모두가 용기를 낸다면, 승리는 거의 보장되고 리스크도 매우 낮다. 하지만 모두가 머뭇거려 집단으로서의 안전성이 없다면 용기를 낸 소수는 자신들의 집을 잃을 수 있다.

그렇지만 지금 우리는 확실히 이점을 가지고 있다. 서민 지역의 수백만이 같은 상황 아래에 놓여있고, 우리는 이미 우리가 이런 상황에 놓여 있다는 것을 안다. 리스크를 떠안는 “소수”란 없다. 왜냐하면 수십만이 일자리를 잃었고 이들이 집세를 낼 수 없게 될 것이고, 이 숫자는 늘어나기만 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침묵 속에서 고통받는다면 우린 아무런 위험도 감수하지 않겠지만, 종국에는 우리의 집을 잃게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가 목소리를 높이고 투쟁을 집단화한다면, 우리가 얻을 것은 모든 것이요 잃을 것은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아주 조금 더 많은 특권을 가진 이들, 즉 수입 없이 한 달, 두 달, 세 달을 버틸 수 있는 이들이나 일자리를 다시 찾은 이들 또한 더 이상 다른 길이 없는 수천의 사람들과 함께한다면 얻을 것이 많을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 중 그 누구도 격리가 얼마나 오래 이어질 지, 또 이에 따른 경제 위기가 얼마나 갈 지 모르기 때문이다. 판데믹과 관계 없이 스페인의 대부분의 도시에선 우린 이미 집에서 살 권리를 잃고 있었다. 만약 “정상”이 돌아온다면… 관광은 에어비앤비, 젠트리피케이션, 무한상승 임대료의 버틸 수 없는 압박과 함께 돌아올 것이다.

우린 다른 이점이 하나 더 있다. 비상 상황에서는 사법부도 마비된다. 일부 도시는 모든 퇴거 조치를 연기했고, 다른 지방들에선 아예 퇴거를 처리할 수 없거나 매우 느리게 할 수 밖에 없게 됐다.

세입자 파업을 시작하기 위해서 이보다 더 좋은 시기는 없을 것이다. 지금 필요한 건 우리의 목소리를 높이고 우리 모두가 겪고 있는 상황을 집단화하는 것이다.

주거권 투쟁 조직들

사회운동 조직들은 세입자 파업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파업을 불러일으키고 지지할 수도 있고, 피해를 줄 수도 있다. 주거권 운동과 조직들 간의 강력하고 효과적인 관계의 특징들은 무엇일까?

첫째로, 주거권 운동의 현실을 인식해야 한다. 이 운동은 열악한 주거 환경에 시달리는 이들이나 집을 잃을 위기에 처한 이들 모두로 이루어져 있다. 이들, 불안정한 이들은 모든 것을 얻을 수도, 잃을 수도 있다. 이들이 처음에 세입자 파업이나 다른 저항 행동을 선포하는 주체이다.

세입자 파업에 있어서 조직은 가장 전략적으로 중요한 문제이다. 하지만 필수적인 특정 조직이라는 것은 없다. 1931년 바르셀로나처럼 이미 매우 강력한 조직이 파업을 시작할 수도 있다. 하지만 주민들 자체가 파업을 해야한다면, 이들은 그 자신들이 파업을 선언하고 자신들의 행동을 조정하고 지원을 받기 위해 필요한 조직을 만들 것이다. 주거권 투쟁에 특화된 조직들이 이미 존재하더라도 거주민들의 즉각적 필요에 응답하지 않는다면 거주민들은 이 조직들을 무시하고 자체 조직들을 만들 것이다. 그리고 매우 운이 없는 경우에는 한 조직이 자신을 운동의 주인인 양 여기고 거주민의 필요보다는 자신의 정치적 필요에 따라 운동을 이끌려고 할 수도 있다. 1960년 런던 세인트 판크라스 파업에서 일어난 것처럼 이런 경우는 파업은 사보타주하고 세입자들에게 피해를 주게 된다.

대다수의 세입자 파업이 여성에 의해 조직되었다는 사실은 이런 점을 시사한다. 공식적인 조직들은 대개 가장 고통받는 이들의 인간적 필요보다는 “당파적 이해관계”를 앞에 놓는 가부장적 논리를 따라 만들어지기 일쑤다. 이런 이유로 여성들은 자주 기존의 거대 조직들에 참여하기보다는 자신들의 고유한 네트워크와 방식으로 고유한 조직 구조를 만들어낸다.

주거권 운동과 사회 조직들 간의 강력하고 효과적인 관계는 다음과 같은 원칙들에 기반한다고 할 수 있다.

  • 사회 조직들은 거주민들의 필요에 응답해야 한다. 조직들은 전략 구상을 도울 수 있지만 거주민들의 현실과 의향에 눈을 감아서는 안된다.
  • 조직들은 거주민들을 이끄는 게 아니라 돕기 위해서 존재해야 한다. 만일 조직들이 자신들이 거주민들을 이끄는 것이 필수적이라고 여긴다면, 거주민들은 행동이 필요할 때 자체 조직을 만들어야만 할 것이다.
  • 조직들이 제공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구조 지원은 심리적인 구조와 방어적인 구조 지원이다. 전자에 관해선, 조직의 존재는 거주민들이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인식하게, 즉 함께이기에 자신들은 강하고, 이길 수 있다고 인식하게 된다. 이런 맥락에서 중요한 것은 바로 사람들을 북돋는 것이다. 폄하하거나 두려움, 쓸데 없는 신중함을 심는 것이 아니라. 방어에서의 역할에 대해서는, 사회 조직은 강제 집행에 대한 물리적 저항을 조장하고 재판에 대비한 법적 자원을 모을 수 있다. 이것 없이는 파업 참여자들은 개별화되어 패배할 것이다.

그렇다면 사회 조직들과 주거권 운동 간 역효과를 낳는 관계의 특성은 무엇일까?

활동가 중심의 행동주의. 

인간 존엄성과 자유를 위한 연대 투쟁에 사람들이 자신들의 삶을 헌신하는 것은 존경할 만하다. 그러나 이런 헌신이 전문가와 “일반인” 간의 거리를 만들어 내는 접근에서 나온다면 문제가 된다. 주거권 투쟁의 경우, 활동가들은 다른 “조직된” 활동가들과 조직원들의 시각을 다른 거주민들과 불안정한 사람들에게 일어나는 일보다 더 잘 알게 되어버릴 수도 있다. 따라서 이들은 언제나 우선해야 할 거주민들의 이해관계(괜찮고 안정적인 집에서 살 수 있는 것)보다 조직의 이해관계(더 많은 사람들이 있고, 언론에 끗발 있어 보이고, 당국과의 협상을 통해 지위를 얻는 것)를 우선하게 된다. 이 활동가들과 주민들 사이의 소외는 쓸 데 없는 신중함을 낳을 수 있다.

세입자 파업이 매우 힘든 싸움이라는 건 사실이다. 가볍게 제안할 만한 것이 아니다. 하지만 현재 상황에서 보수적인 입장을 지니는 것은 많은 이들이 이미 겪고 있는 현실을 부정하는 것으로 보인다. 세입자 파업은 위험하다. 하지만 현재 위기에서는 위험이 이미 와 있다는 것이 부정 불가능하다. 이번 달(3월)에만 해도 수만 명이 집세를 내지 못할 것이다. 완전한 불안 속에서 거리 위에서 살아가는 수만 명의 사람들을 차치하고서라도 말이다.

활동가 중심 행동주의의 위험성은 경제적 특권층의 경우 더더욱 두드러진다. 유복한 가정 출신의 사람들이 불안정한 사람들 곁에서 싸우겠다고 결정하는 것은 존경할 만하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이 불안정한 이들의 우선 순위나 투쟁의 속도를 결정하는 것은 절대로 용납할 수 없는 것이다. 특권의 모든 경우에서 그렇듯이, 이들은 동지들에게 투명하고 자신들에게 정직하며 불안정한 이들의 투쟁을 이끌려고 하는 대신에 도와야 한다.

제한된 규모 혹은 파편화된 시각.

주거권 투쟁을 오랫동안 해온 이들이 세입자 파업에 대한 대대적인 호소에 관해서 어쩔 줄 몰라 하거나 의심을 가지는 것은 완전히 이해할 만하다. 이 사람들이 그렇게 느끼지 않았다면 뭔가 문제가 있는 것일 테다. 이 정도 규모의 세입자 파업을 목도한 지 거의 1세기가 되었다. 그러나 우린 자본주의가 지금 만들어지고 것과 같이 커다란 위기를 겪은 지 또한 1세기가 되었다는 것을, 또 세입자 파업이 계속해서 효과적인 무기였음을 인식해야 한다. 지난 3년 간 토론토와 로스 앤젤레스에서 세입자 파업에 참여한 세입자들과 조직들이 현재 국제적 호소를 지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 조금은 위안이 될 것이다.

투쟁 분열의 위험성에 관해선, 우리는 집 없는 이들과 미등록인들의 필요를 고려하지 않는 그 어떤 호소도 완전히 용납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많이 조직들이 좀 더 구체적인 분야나 주제의 단기적 변화를 목표로 하는 것은 이해할 수 있어도, 이것이 연대의 가능성을 깎아 먹으며 투쟁의 파편화로 이어져서는 안될 것이다. 주택담보대출로 집을 가진 이들에게는 해결책을 제공하고 세입자들에게는 아무것도 주지 않는 것은 국가의 책략 중 하나이다. 우린 아무리 좋은 의도를 가지고 있더라도 이런 식의 접근을 재생산해서는 안된다. 따라서, 모든 호소는 퇴거에 대한 중지와 빈 집들의 점거의 합법화를 지지하거나, 적어도 지지하는 호소와 연대하여야 한다.

개량-혁명 이분법.

쉽게 말해 하루 아침에 혁명을 완수하고 모든 억압 구조를 부수는 것이 가능하다고 믿는 것은 환상이다. 혁명은 기나긴 투쟁의 연속으로 이루어져 있다. 국가 권력을 위협하는 세력을 만들지 않고 실질적인 개선을 이룰 수 있다고 믿는 것 또한 오류다. 국가는 사회적 통제와 경제의 번영을 유지하려고 하고 여기에 불필요한 것들은 보호치 않는다. 거의 모든 제대로 된 혜택을 주는 개혁들은 개량 운동이 아니라 혁명 운동에 의해 쟁취됐다.

국가와 정치운동 간의 적절한 관계와 전술, 전략에 대해서 많은 중요한 논쟁이 오가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함께 할 때 더 강하다. 작지만 급박한 목표에 헌신하는 이들이 착취의 근본적 원인에 맞서고 착취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지평선을 바라보는 이들과 연결될 때 말이다. 종국에 우리의 투쟁은 한 생태계를 구성할 것이다. 우린 세계의 모든 사람들이 우리처럼 생각하도록 설득하거나, 모든 운동을 지배할 수 없다. (누구라도 이를 시도하는 사람은 해당 운동을 약화시킬 뿐이다.) 우리는 같은 투쟁의 다른 부분들 사이에서 연대에 기반한 건강한 관계를 구축해 나가야 한다. 가능할 때면 [서로의 정보와 힘을] 공유하고, 가능하지 않을 때는 평행선 위에서 각자의 길을 걷는 것을 인정하면서 말이다. 이런 연대가 기능하기 위해선 일부가 집중하는 즉각적인 과업을 존중하고, 어떤 그룹의 언론, 혹은 경찰에 대한 “급진주의(좌경 맹동주의)”를 비난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자신의 소득의 반을 임대료로 쓰는 사람은 임대료 상한법을 쉽게 환영할 것이다. 사보험을 부담할 수 없는 사람은 공공 의료 서비스를 환영할 것이다. 점거된 아파트에서 사는 사람은 강제 퇴거 중지를 환영할 것이다. 이민자는 강제 추방으로부터의 법적 보호를 환영할 것이다. 개인적으로 이런 상황 중 아무것도 겪지 않는 사람들은 정치적 이념을 확고히 하기 이전에 이를 겪는 이들과 공감해야 할 것이다.

동시에, 불안정함을 겪는 우리 중 많은 이들은 거기에 기반한 정체성을 만들지 않으려고 한다. 우리는 문제의 근본 원인을 보아야 한다. 공공 의료 서비스와 임대료 제한은 좋지만 법 개정과 “공공”선은 우리가 마음대로 할 수 없다. 국가가 그 통제권을 쥐고 있고 국가가 우리에게 준 것을 유지하는 게 편리하지 않다고 결정하면 결코 좋은 것이 못된다. 어째서 코로나가 이렇게 심각한 위기를 불러왔을까? 국가가 지속적으로 공공 의료 서비스의 질을 깎아먹었기 때문이다. 어째서 임대료가 이렇게 많이 올랐을까? 국가가 이전 세대가 쟁취한 보호를 찢어버리고 도시주거임대법을 통과시켰기 때문이다.

단기적 조치는 필요하다. 그러나 혁명적인 시각도 필요하다. 적어도 자신의 전 인생을 빵 부스러기를 쟁취하기 위해 싸우며 살고 싶지 않은 이들에게라도, 단순히 생존을 위해서라도.

결론

자본주의는 세계적이다. 국가들은 세계적인 레벨에서 서로를 지탱한다. 어느 한 곳에서의 혁명은 적어도 장기적으로는 불가능하다. 판데믹, 제노포비아, 국경, 초국가기업의 이 시대에는 국제주의적인 시각이 필수적이다. 스페인에서는 최근 국제주의가 상당히 약했다. 라틴 아메리카에서 무료 대중교통을 위한 파업과 봉기가, 우익 쿠데타가, 수 개월의 투쟁과 수많은 죽음이 있었다. 하지만 스페인에서는 힐끔 쳐다보지도 않았다. 홍콩에서는 거의 통째로 1년 동안 새로운 권위주의적 조지에 반대하는 시위가 있었다. 스페인에서는 침묵만이 있었다. 2019년 내내, 피레네 산맥의 바로 반대편에는 궁핍에 맞서 노란 조끼가 모든 걸 내던지며 싸웠다. 스페인에서는 얼마나 많은 연대의 대오가 있었는가?

착취에 맞서고 자유와 인간 존엄성을 향한 운동은 세계적이 되어야만 한다. 지금 당장 우린 세계적 판데믹을 겪고 있다. 그리고 미국부터 중국에 이르기까지 강대국들은 무관심과 치명적인 무능이나 전체주의적 감시(드론, 실시간 개인위치 감시, 모든 공공장소 안면인식 CCTV 설치)로 대응하고 있다. 스페인에서는 무능과 경찰 권위주의의 합일을 보고 있다.

세입자 파업은 수많은 사람들이 집을 잃을 위기에 처한 여러 신자유주의 국가들 사이에서 이미 퍼져 나가고 있다. 이 상황에 여기 스페인에도 닥쳤다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지금 우리의 투쟁을 국제화시키지 못한다면, 영원히 못하는 것 아닐까?

연대와 인간 존엄성을 위해, 불안정에 맞서서. 

#지금당장세입자파업 #RentStrikeNow

#HuelgadeAlquileresYa

“그 누구도 우리의 고혈을 빨아먹고 우리가 살 권리를 부정하며 우리를 짓밟으며 살아가지 못해야 한다.”
–비르히니아 볼텐(Virginia Bolten)

번역 : Montagn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