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안문항쟁 ② | 분할통치가 계급동맹을 가로막았다
2024년 7월 24일
[역자 설명] 이 글은 중화권 매체 <단전매>에 ‘지한(吉汉)’이라는 이름의 필자가 기고한 글 《边缘化的六四论述:八九春夏,其实发生的是“两场运动”》을 번역한 것이다. 분량상 이 글을 상/하로 나누어 소개하고자 한다. 필자는 중화권의 노동운동과 사회운동에 관심을 갖고 분석하고 있다.
형성될 수 없었던 계급동맹
“우리는 1989년에 일어난 것은 하나의 운동이 아니라 두 개의 운동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학생들의 운동과 노동자들의 운동은 겹치는 시간과 공간에서 일어나고, 서로 교차하고 상호작용하기도 했지만, 결코 하나로 합쳐지지는 않았다.”
노동자들과 학생들의 6·4운동(1989년 4월부터 6월 4일까지 베이징 천안문광장과 도시 곳곳, 그밖에 중국의 여러 도시에서 지속된 대중시위. 이 글에서는 '천안문항쟁'으로 통일) 참여 궤적은 다르고, ‘민주’에 대한 인식도 크게 다르다. 따라서 이 투쟁 전반에 걸쳐 노동자와 학생 사이에 큰 격차가 존재하는 이유를 이해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이러한 격차는 노동운동에 대한 학생들의 거부감으로 먼저 나타났다. 학생들은 천안문항쟁이 온전히 학생만의 것이어야 한다며 운동의 ‘순수성’을 지키려고 애썼다. 월더와 공사샤는 학생들이 5월 말까지 천안문광장에서 노동자 조직들을 배척했다고 지적했다. 학생들은 노동자 단체, 특히 건설 노동자 조직(당시 건설 노동자들은 주로 베이징 교외의 농민들이었음)과 소통하기를 꺼렸다. 모리스 마이스너의 연구에서도 학생들이 조직한 몇 차례의 대행진에서 학생들이 팔짱을 끼고 도로 양쪽에 인간띠를 두른 것은 시민들이 행렬에 끼어들지 않게 하기 위한 목적이 컸다고 밝혔다. 한 천안문항쟁 경험자의 증언에 따르면, 당시 학생들은 홍콩이나 해외에서 기부한 보급품들을 조달할 때, 그것이 노동자들의 손에 넘어가지 않도록 각별히 신경썼다.
바로 여기에 천안문항쟁의 아이러니가 담겨 있다. 투쟁 과정에서 학생운동 리더들은 자신의 실천으로 인민들을 ‘일깨우겠다(唤醒)’고 수차례 다짐했다. 하지만 앞서 언급한 것들을 보노라면, 그들은 전혀 잠들어 있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깨어나 있었고, 심지어 투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려 했던 민중들을 외면했다. 학생운동 리더들의 이 엘리트주의적인 우월의식은 한편으로는 ‘하늘이 낳은 아이(天之骄子)’라는 심리 상태에서 기인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고전적인 중국 사대부(양반)의 심사를 드러내는 것이었다. 그것은 즉, 자신이 사회의 도덕적인 책임감으로써 나라 전체의 양심이 되어 인민을 위해 목숨을 바쳐야 한다는 막중한 임무같은 것이라 할 수 있겠다. 일찍이 연구자 자오딩신(赵鼎新)은 항쟁 과정에서 학생들이 사용하는 말 속에 서구 자유주의적인 언어와 중국 전통의 도덕주의 언어가 뒤섞여 있다는 관건적인 사실을 지적한 바 있다.
학생들의 외면으로 인해 적지 않은 노동자들은 학생들에 대한 신뢰를 더 이상 갖지 않기 시작했다. 노동자들의 눈에 학생들은 스스로를 지나치게 우월하다고 느끼고 있었으며, 노동자들을 존중하지 않았고, 실제 문제 해결에 나서기 보다는 말만 늘어놓는 것처럼 보였다. 노동자들이 가장 경계했던 것은 그들이 그토록 증오했던 관료제 엘리트들의 행태가 학생들에게 나타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학생들의 조직에는 ‘주석’이나 ‘총지휘’ 같은 명패들이 즐비했고, 조직 내부의 권력 투쟁도 끊이지 않고 있었다. 반면 ‘공자련(베이징노동자자치연합회)’으로 대표되는 노동자 조직들은 조직 내부 구조가 평등했고, 개인의 리더십이 두드러지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노동자들이 더더욱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은 투쟁 과정에서 학생운동 리더들이 누리는 특권이었다. 당시 노동자들 사이에서는 차이링(柴玲)과 펑충더(封从德)의 천막 안에 시몬스침대 매트리스가 깔여 있다는 소문이 돌았다. 이 소문의 진상 여부는 확인할 수 없지만, 이를 통해 등급제나 관료화와 관련된 어떠한 징수들이 노동자들의 통점을 찌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동시에 투쟁 전략의 측면에서 학생들과 노동자들의 차이도 있었다. 학생들은 천안문항쟁 초기부터 당국에 간청하고 청원하는 모습을 띠었으며, 당국을 감화시키고 양보를 얻어내 개혁을 실현하길 바랐다. 학생들은 당국의 신뢰를 얻기 위해 시위 도중 “공산당을 옹호한다”는 표어를 내걸기도 했다. 이에 비해 노동자들은 격식을 차리지 않았고, 공자련의 유인물은 줄곧 인민들을 향해 “압제를 무너뜨리기 위해 일어나라!”고 호소하는 말들로 채워졌다.
[1989년] 5월에 접어들면서 중국공산당 최고지도부가 이 항쟁에 어떻게 대응할 것이냐를 두고 내부적인 이견을 보이자, 일부 학생들은 자오쯔양을 비롯한 온건파와 협력해 당 지도부 간 파벌 갈등을 활용해 자신들의 (정치적) 공간을 확보하고자 노력했다. 이것이 바로 학생운동 리더들이 (노동자들의) 총파업 주장에 대해 “훼방꾼”이라며 완강히 반대했던 이유다. 노동자들의 관점에서 볼 때 학생들의 전략은 어처구니가 없는 것이었다. (노동자들의 시각에서) 자오쯔양은 시장주의적인 개혁을 통해 이익을 얻어내려는 전제 관료의 전형적인 대표였으며, 온건파와 강경파는 본질적으로 다르게 느껴지지 않았다. 공자련은 당내 고위관료들과 협력한 역사적 결과를 상기하면서, 결국 그것이 관료들의 이익 실현을 위한 도구가 된다고 여겼다. 1976년 덩샤오핑은 4·5운동(四五运动; 1976년 천안문사건)을 계기삼아 집권했었다. 공자련이 볼 때 항쟁을 성공시킬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은 이 항쟁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끊임없이 자기 조직화하고 무장(사상적·조직적으로)함으로써 자신의 역량을 축적해 관료체제를 무너뜨리는 것에 있었다. 이것이 당시 공자련이 유인물에서 “프랑스 혁명을 배워 20세기판 바스티유 감옥을 함락하자”고 호소했던 이유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1989년에 일어난 것이 하나의 운동이 아니라, 두 개의 운동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학생들의 운동과 노동자들의 운동은 서로 겹치는 시공간에서 벌어졌으며, 때로는 교차하고 상호작용하기도 했지만(5월 중순부터 시작된 노동자들의 대규모 시위 참가 역시 처음에는 학생들을 지원하 고 보호하기 위한 목적에서 시작됐다), 두 운동은 좀처럼 통합되지 않았다. 학생들과 노동자들은 서로에 대한 신뢰도, 충분한 의사소통도, 전략적인 조정도, 함께 싸워야 한다는 단결의 감각도 없었다.
1989년에 일어난 일은 그보다 70년 전에 일어난 1919년 5·4운동(1911년 청나라 타도와 근대국가 수립을 목표로 일어난 운동)과 대조적이었다. 5·4운동의 경우, 처음에는 주로 학생들이 참가하는 시위 물결로 시작됐고, 적지 않은 학생들이 시민과 노동자들 속으로 들어가 선전·조직·선동했으며, 6월에 이르러 상하이 노동자 총파업으로 이어졌었다. 이로 인해 베이징 정부가 학생들에게 타협안을 제시하게 된 것이다. 중국공산당의 공식적인 역사 서사에서 5·4운동의 의미에 따르면, 총파업 과정에서 학생들은 노동자들이 지닌 엄청난 정치적 에너지를 인식하게 됐다. 이 때문에 일군의 학생들은 노동자 조직에 투입되어 노동자와의 유대를 형성했고, 노동자 항쟁을 조직할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마르크스주의적인 전환이 이뤄진 것이다.
5·4운동이 중국공산당의 공식 서사에서 독특한 의미를 드러나게 하는 요소는 바로 천안문항쟁이 누락하고 있는 요소다.
노동자와 학생의 단결의식은 언제 사라졌나?
"1980년대 내내 학생·지식인 집단과 노동자계급의 분화 과정이 드러났다. 이러한 분화는 마오쩌둥 시대와 덩샤오핑 시대 두 차례에 걸친 사회주의민주 운동의 탄압으로 인해 결국 계급적 담론이 정치 현안에서 소외된 데서 비롯되었다."
1989년까지 중국의 학생들과 노동자들이 사회운동 과정에서 단결을 이룬 예를 찾아보자. 1919년까지 거슬러 올라갈 필요는 없다. 조엘 안드레아스(Joel Andreas)의 저서에 따르면, 문화대혁명이 시작된 1966~67년, 학생과 노동자의 연결고리가 빈번했고, 이것은 운동이 발전하는데 있어 관건적 요소였다. 당시 노동자들은 학생들의 운동 경험을 배우기 위해 여러 대학을 방문했으며, 많은 학생들은 공장에 방문해 노동자들이 공장에서 ‘조반(造反)’ 조직을 설립하고, 자신들의 요구를 표현하도록 지원했다.
1966년부터 1989년까지 불과 20여 년 만에 학생과 노동자 간 연대의식이 사라져버렸다. 왜 그렇게 됐나? 이 질문에 대한 답은 20여 년의 역사를 되돌아보며 찾을 수밖에 없다.
1966년 마오쩌둥(毛泽东)이 문화혁명을 일으킨 것은 당내 관료주의 현상이 자본주의 노선을 회복하려는 관료(이른바 주자파 관료 走资派官僚)가 적지 않을 정도로 심각해졌기 때문이었다. 이에 따라 대규모 상향식 대중운동을 통해 주자파를 당에서 제거하고, 마오쩌둥 개인의 당내 권력집중을 실현할 수밖에 없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마오쩌둥의 입장 에서 대중운동의 의미는 체제개혁이지 체제전복은 아니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문제가 된 것은 체제 자체가 아니라 체제 일부이기 때문에, 대중의 힘으로 이들을 종양 제거 수술처럼 제거하면 체제가 제대로 돌아갈 수 있다고 봤던 것이다. 이것이 마오쩌둥이 일련의 발언에서 대다수 공산당 간부들은 훌륭하고, 주자파 관료는 소수에 불과하다는 점을 거듭 강조했던 이유다.
하지만 마오쩌둥은 그가 “스스로가 스스로를 교육하고, 스스로가 스스로를 해방하라”는 대중운동의 구호를 제출한 후 대중의 ‘조반운동’의 발전이 점차 애초 그가 예상한 목표를 훨씬 초과하고 통제될 수 없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어쩌면 마오쩌둥은 단지 틈을 열고자 했던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바로 그 틈을 통해 노동자와 학생, 특히 노동자들이 독립적인 조직처럼 움직이는 급진적인 운동에너지가 분출됐던 것이다. 우이칭(吴一庆)의 연구에 따르면, 1966년 말 대중들이 자발적으로 조직을 설립하도록 독려하는 호소가 나온 후, 도시에서 일하는 임시직이나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곧 ‘전국홍색노동자조반총단(全国红色劳动者造反总团)’과 같은 조직들을 설립하기 시작했다. 이런 조직들은 마오쩌둥의 예상대로 이른바 ‘주자파 관료’에 도전하고 비판하기만 했던 것이 아니라, 차별과 불공정으로 얼룩진 이원화된 노동체제를 비판하며 ‘동일노동 동일임금 동일권리’를 요구했다. 제도적인 고용 차별에 도전하고, 평등을 추구했던 일련의 조직들과 운동들은 문화혁명 지도층에 의해 ‘경제주의’라는 꼬리표를 달고 탄압받았다.
1967년 1월 상하이 인민공사(上海人民公社)가 출범하면서 기존의 상하이 당·정 기관을 대체해 마오쩌둥 등 문화혁명 지도자들로부터 ‘군중탈권’ 운동의 모범적인 모델이라는 찬사를 받았다. 그러나 '상하이 디젤엔진공장(上海柴油机厂)의 노동자혁명조반연합사령부(工人革命造反联合司令部)' 등 급진적이고 반체제적인 노동자 조직들은 마오쩌둥을 비롯한 문혁 지도부가 ‘군중탈권’이라는 명분을 빌려 실제 상하이에서 군부가 주도하는 '혁명위원회'를 만들었을 뿐, 실제 노동자와 대중이 정치권력을 장악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했다. 또한 노동자혁명조반연합사령부는 관방이 질서 회복을 위해 강력하게 조반운동을 탄압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에 따라 노동자혁명조반연합사령부는 노동자계급이 진정으로 스스로를 관리하는 파리코뮌 체제의 결성을 요구하며, ‘혁명위원회’와 수개월간 무장투쟁을 벌였다.
동시에 많은 노동자와 학생들은 ‘관료주의’나 ‘주자파’에 대한 마오쩌둥의 비판을 따라 계속해서 고민했고, 결국에는 마오쩌둥보다 더 급진적이고 심각한 결론에 도달했다. 이들 노동자와 학생들이 보기에 마오쩌둥은 관료주의 현상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지만, 그가 내린 처방은 틀린 것이었다. 관료주의의 근원은 특정 관료 개개인에게 있는 것이 아니었으며, 일당독재체제에 있었다. 이런 체제는 본질적으로 자본주의적이라 할 수 있었다. 따라서 관료주의를 완전히 타파하려면 일당독재의 폐지를 통해 노동자들이 진짜 민주적인 방식에 따라 스스로 생산수단을 통제해야 했다. 이러한 사고 방향의 가장 대표적인 논의는 후난성 무산계급혁명파 대연합위원회(湖南省无产阶级革命派大联合委员会)에서 나왔다. 이와 같은 논술에는 ‘사회주의민주’에 대한 마르크스 본인의 논술은 보다 뚜렷하게 드러난다.
이러한 ‘조반파’운동은 마오쩌둥이 설정한 어젠다를 넘어 문화혁명 지도부의 권위에 분명히 도전했으며, 체제변혁과 민주주의의 제도화를 부르짖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마오쩌둥과 문화혁명 지도부를 불안하게 만들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1968년부터 마오쩌둥은 공개적으로 군부의 개입을 허용하고, ‘조반파’를 대대적으로 진압했다. 월더의 연구에 따르면, 문화혁명으로 인한 사상자 절대다수는 1968년 이후 관방이 조반파에 가한 탄압으로부터 발생한 것이었다. 사상자 숫자를 통해 볼 때, 이는 중화인민공화국 역사상 최대 규모의 공식 탄압 사건이었다. 일부 도시에서는 진압에 나선 군대와 시가전을 벌이기도 했으나 그 결과는 참패였다. 이러한 탄압과 함께 관방은 조반파의 ‘사회주의민주’ 논술을 무정부주의이자 트로츠키주의라고 몰아붙이기 시작했다.
마오쩌둥이 시작한 대중운동은 마오쩌둥 본인조차 통제하지 못하는 궤적에 따라 발전했고, 점차 중국공산당의 권위에 도전하는 사회주의 민주운동으로 탈바꿈했다. 그리고 마침내 마오쩌둥에게 위협을 느끼게 했고, 결국 마오쩌둥은 이 대중운동을 직접 진압했다. 이 역사는 사람들을 슬프고 또 고통스럽게 한다. 우이칭은 이에 대해 “문화혁명이 자신의 아이를 삼켜버렸다”고 이야기한 바 있다.
1968년부터 1971년까지 이뤄진 운동에 대한 탄압은 그 영향이 매우 컸다. 한편에서 조반파 노동자들과 학생들은 그 육신 자체의 몰살을 겪었고, 이 부분에서 탄압받은 ‘조반파’는 조직적으로 가장 강력하고 전투적이며, 사상적으로도 급진적인 집단이었다. 다른 한편에서 마오쩌둥은 조반파 운동을 장려했던 것에서 그것을 진압하는데 이르기까지 180도 선회했다. 이는 수많은 노동자와 학생들을 정치적 환멸과 허무주의에 빠뜨렸으며, 정치에 참여하기를 꺼리게 만들었다. 많은 노동자들은 마오쩌둥이 그들을 배신했다고 느꼈고, 천보다(陈伯达)나 장칭(江青) 등 문화혁명의 다른 리더들의 경우에는 그저 운동을 통해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다지려는 기회주의자라고 여겼다.
1974년 비림비공운동(批林批孔運動)은 1968년부터 1971년까지 전개된 탄압에 대한 조반파의 불만을 세간에 폭로할 수 있는 뜻밖의 기회를 제공했다. 오늘날 돌아봤을 때 비림비공운동은 매우 기괴했다고 할 수 있는데, 장칭 등 문화혁명 시기 지도자들이 이처럼 기괴한 운동을 벌인 것은 이를 통해 중국공산당 내 고위급 정치에서 이단자들을 억압하고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고자 했기 때문이었다.
노동자 조반파는 확실히 린뱌오(林彪)를 증오했다. 린뱌오는 1971년 쿠데타가 실패로 돌아가기 전까지 군부로부터 권력기반을 확보해 조반파 진압에 주도적 역할을 했다. 이 때문에 1966~67년에 활동하다가 탄압받은 일부 조반파 운동 참가자들은 ‘비림비공’운동을 계기 삼아 린뱌오를 비판하고 탄압 시기에 대한 불만을 토로하며 대중적인 민주운동의 재개를 희망했다. 가장 대표적인 논술이 광저우에 등장한 ‘리이저(李一哲)’라는 필명의 대자보로, 이는 전국적으로 영향을 미쳤다.
하지만 비림비공운동의 결과는 조반파에게 실망을 안겨주었다. 리이저의 호소는 마오쩌둥의 지지를 얻지 못했고, 문화혁명의 일부 지도자들은 대자보의 유통 자체를 금지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이로 인해 문화혁명 리더들과 나아가 마오쩌둥 본인에 대한 조반파의 불만이 더더욱 격화됐고, 이는 1976년 4·5운동으로 직결됐다.
4·5운동은 1976년 청명절(清明节)을 전후해 베이징의 수많은 시민들이 천안문광장에 모여 저우언라이(周恩來) 총리의 서거를 추모하면서 발생했다. 한데 이 추모의 물결 속에서 참가자들은 실질적으로는 문화혁명 지도자들에 대한 불만을 터뜨리게 된 것이다. 천안문광장 곳곳에서는 “서태후를 타도하라!”, “인디라 간디를 타도하라!” 등 플래카드가 걸렸는데, 이는 장칭으로 대표되는 문화혁명 리더들을 비꼬는 것이었다. 심지어 운동 중에 “진시황을 타도하라!”라는 구호까지 등장했는데, 여기서 진시황이란 바로 마오쩌둥 본 인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4·5운동의 폭발은 문화혁명 지도자와 마오쩌둥 본인에 대한 여론의 반감이 최고조에 달했음을 상징한다. 이런 여론에 힘입어 중국공산당 내 일부 관료들은 마오쩌둥 사후 궁정 쿠데타를 통해 문화혁명 시기의 리더들의 숙청을 마칠 수 있었다. 거꾸로 문화혁명 리더들의 몰락은 ‘조반파’에게 희망의 불을 지폈다. 그 희망은 자신들에게 닥친 억울함과 탄압을 바로잡고, 억압적인 정치환경이 완화되기를 열망하는 것이었다. 동시에 덩샤오핑은 1976~78년 시기 중국공산당 내 권력투쟁에서 자신에 대한 여론의 지지를 확고히 하기 위해 정치적 유화 신호를 보내 조반파의 낙관적 인식을 강화했다.
조반파의 낙관적 인식은 1979년 마침내 ‘민주벽 운동(民主墙运动)’으로 모아졌다. 모리스 마이스너 교수에 따르면 이 운동에 참가한 주력군은 대부분 1966~67년 활동하다 탄압받았던 노동자와 학생 조반파였으며, 지식인은 아니었다고 지적한다. 조반파 학생들은 정치 동아리를 결성해 공개 토론을 조직했으며, 자체적인 출판물을 발행하고, 대자보를 게시했다. 이 운동의 영향은 빠르게 베이징에서 다른 도시로 퍼졌다. 관료주의와 그것을 낳은 일당독재체제를 비판하는 데 주력함으로써 문화혁명 초기의 사회주의민주 논술을 부활시킨 것이다. 민주벽 운동 참가자들 입장에서 이는 1966~67년 시기 강력한 탄압을 받았던 이 운동이 다시 한 번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됐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그런 점에서 1979년 ‘민주벽 운동’은 1966~67년에 이은 제2의 사회주의민주 운동이었다.
1979년 덩샤오핑은 이미 당내 권력투쟁에서 승리하면서 실질적인 최고 통치자가 된 상황이었다. 1966~67년의 조반파 운동은 마오쩌둥을, 1979년 운동은 덩샤오핑을 두려움에 떨게 했다. 마오쩌둥처럼 덩샤오핑 역시 “무정부주의자들”이라며, 민주벽 운동 참여자들에 대해 탄압을 가했는데, 민주벽 운동에 대한 이와 같은 탄압은 1968년 이후 노동자와 시민들의 정치적 허무주의를 더욱 가중시켰다. 이후 사회주의민주에 대한 논의는 공론장에서 거의 사라지게 됐다. 사회주의민주의 핵심은 계급적인 언어 속에 ‘민주’를 넣어 이해하는 것인데, 이 논술의 실종은 곧 계급의 언어가 정치에서 점차 주변화되는 것을 의미하기도 했다. 이와 같은 변화는 덩샤오핑이 점차 “쟁론하지 말라(不争论)”는 실용주의 정책 노선을 강조하게 되면서 ‘계급투쟁’의 언어에서 멀어지는 추세와 시기적으로 일치한다. 동전의 양면인 셈이다.
‘민주벽 운동’의 탄압으로 인해 노동자계급은 공적인 공간에서 점차 목소리를 잃어갔다. 정치 토론은 날이 갈수록 지식인과 학생들의 전유물이 됐다. 사회주의민주 논술이 계급의 언어장에서 퇴장하면서, ‘민주’에 대한 논의도 자유주의화되었다. 가장 분명한 예는 1980년대 후반까지 ‘민주주의냐 권위주의냐’에 대한 지식인들의 토론이 종종 시장주의적인 개혁 자체의 정당성을 미리 설정하게 됐다는 점이다. 애니타 찬(陈佩华, Anita Chan)에 따르면, 1980년대 지식인들의 토론에서 노동자계급에 대한 언급은 거의 없었다.
오늘날의 많은 논술은 종종 1980년대 중국 대륙에 대해 자유롭고 희망찬 이상주의의 시대라는 낭만화된 상상을 갖고 있다. 하지만 사실 1980년대를 평가하려면 우리가 무엇을 봤는지뿐만 아니라, 우리가 무엇을 보지 못했는가에 대해서도 고려해야 한다. 서구적인 사상조류의 도입, 언론공간의 이완, 사회단체의 활성화 등 현상의 이면에는 노동자계급이 정치 생활에서 퇴장하고 사회주의민주 논술이 소실됐다는 사실이 존재한다. 이는 민주벽 운동의 참담한 결말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말하자면 1980년대의 자유란, 정치적 탄압의 산물이었다.
우리가 자유에 대해 토론하려면 반드시 그것이 누구의 자유인지 물어야 한다. 1980년대 상여금의 자유화, 여론 개방이나 사상의 다원화, 생활양식의 다양화를 막론하고, 기본적으로 거의 모든 것을 지식인들과 학생들이 향유할 수 있게 됐다. 덩샤오핑은 자신에 대한 여론의 지지를 공고히 하고 시장주의 개혁의 합법성을 얻기 위해 지식인에 대한 경제적 대우와 사회적 지위를 대폭 높여주었고, 고등교육의 엘리트주의적 색채를 크게 강화 했다. 이는 지식인과 학생이 정치에 참여하고 토론하는 과정, 그리고 엘리트로서의 정체성을 지속적으로 강화하는 과정이었다. 1980년대 말 인기를 끌었던 다큐멘터리 『하상(河殇)』는 이러한 엘리트 자유주의의 대표적인 전형이라 할 수 있다.
이와 동시에, 도시 노동자계급은 어떤 ‘자유’를 누렸는가? 1980년대 노동자의 삶에 가장 큰 영향을 미쳤던 개혁은 가격 개혁이 아니라 공기업 경영권의 이양과 공장장 책임제의 시행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일련의 개혁은 국유기업 경영진의 경영권과 생산수단에 대한 통제력을 크게 강화했다. 일상이 된 공장장 전단제도(厂长专断制度)는 사실상 공장장 사유제와 거의 같았다. 직공대표대회(职工代表大会)가 점차 유명무실해지면서 공장의 제한된 민주적 의사결정 통로도 휴지조각이 됐고, 노동의 과정에서 노동자들은 점점 더 직관적으로 ‘관료 독재’를 경험하게 됐다. 노동자들이 공장에서 ‘억압당한다’, ‘괴롭힘당한다’, ‘존엄을 잃었다’, ‘불평등해지고 있다’고 느끼면서, 국유기업의 관리층은 물질적인 인센티브를 통해 노동자들의 근로의욕을 북돋울 수밖에 없게 됐다. 즉, 노동자의 물질적 처우의 증가는 노동 현장에서 그들의 민주적 권리가 크게 약화된 사실에서 기인한다. 1980년대 후반 노동자들의 물질적 처우는 인플레이션과 함께 지지부진하거나 오르지 않았고, 오히려 떨어졌다. 그러면서 노동자들의 불만은 더욱 커졌다.
이에 따라 1980년대 내내 학생·지식인 집단과 노동자계급의 분화 과정을 지켜볼 수 있게 됐다. 이러한 분화는 마오쩌둥 시대와 덩샤오핑 시대 두 차례에 걸친 사회주의민주 운동의 탄압으로 인해 결국 계급적 담론이 정치에서 소외된 데서 비롯된 것이었다. 1989년에 이르러 불만이 누적된 노동자들이 폭발했고, 1966년과 1979년 등장했던 사회주의민주를 위한 논술은 다시 노동자들의 무기가 됐다. 불행하게도, 오랜 분화 과정 후에 학생들과 지식인들은 노동자계급의 사회주의민주 요구를 이해하지 못하거나 무관심한 상태가 됐다.
권력 유지의 열쇠는 분열 통치?
“20세기 후반 민주화운동 연구는 지식인과 노동자, 농민 등 육체노동자 간의 연결과 협력이 정치운동 성공의 관건임을 강조했다. 그러나 오늘날 중국에서는 지식인·중산층·노동자계급 간의 연대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으며, 더 나아가 조직적 기반과 담론 능력을 갖춘 광범위하고 지속적인 항쟁 운동이 일어날 가능성은 거의 없다.”
1990년대에 이르러 지식인 집단과 노동자계급의 분화는 더욱 심화되었다. 천안문항쟁에 참여한 학생들과 노동자들에 대한 당국의 달라진 태도도 1990년대 전반을 관철하는 주제가 됐다.
1990년대 시장주의 개혁의 가속화는 1980년대 말과 1990년대 초에 엘리트 교육을 받은 대학 졸업생들에게 더 많은 경제적 기회를 제공했다. 일찍이 관찰자들은 천안문항쟁에 참여했던 많은 자유주의적 엘리트 지식인들이 시장화의 물결 속에서 신흥 도시 중산층으로 탈바꿈하고 현재의 중국공산당 체제를 옹호하는 기득권자로 변모했다고 지적해 왔다. 시장화 개혁은 어느 정도 중국공산당 당국이 그 세대의 천안문항쟁 학생 참가자들을 포섭하고 매수한 것이라 볼 수 있다. 나는 1980년대 말 베이징의 명문대학에 다녔던 대학생들을 많이 접한 적 있다. 당시 이들은 거의 모두 1989년 시위에 참여했지만 지금 현재에는 ‘안정지상주의’를 믿는다. 그들은 돌이켜보니 당시 항쟁에 참여한 것은 유치하고 미숙한 행동이었고, ‘누군가에 의해 조종된’ 행동이었다고 여긴다.
1990년대의 시장화 개혁은 학생과 지식인 집단을 ‘매수’하는 동시에, 도시 노동자계급에 치명적인 타격을 주었다. 많은 국유기업들이 구조조정, 인원 감축, 사유화를 겪었고, 이로 인해 수많은 도시 노동자들이 일자리를 잃거나 근속 연수를 단절하도록 강요받았다. 취업 기회와 기본적인 일자리 보장의 기회도 모두 상실했다. 분석가들은 항상 당국이 국유기업 개혁을 시작할 수 있는 주요 요인은 경제적 고려 사항이라고 주장해 왔다. 하지만 천안문항쟁의 궤적을 돌아보면, 비록 그러한 추측이 충분한 증거가 없더라도, 우리가 생각하고 토론할 수 있는 정치적 동기가 당국의 의사 결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추측할 수 있다. 당국은 도시 노동자계급이 운동에서 보여준 조직력과 급진성을 두려워했기 때문에 이 계급을 전체적으로 무너뜨려야 한다는 결심을 했을 것이다.
1990년대 지식인 집단과 도시 노동자계급의 서로 다른 운명은 천안문항쟁 이후 시대의 단절된 사회 구조를 형성했고, 이는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이런 계급별 분할통치(分而治之)의 전략은 중국공산당의 권력체제를 유지하는 데 핵심 요인이 됐다. 이는 천안문항쟁이 오늘날 남긴 가장 중요한 유산 중 하나다.
마르크스주의의 고전적 혁명이론, 식민주의적 맥락에서의 민족혁명이론, 스페인·한국·폴란드 등의 20세기 후반 민주화운동에 대한 연구는 지식인과 노동자·농민 등 노동자민중 간의 연결과 연대가 정치운동 승리의 관건임을 강조한다. 그러나 오늘날 중국에서는 지식인과 고등교육을 받은 도시 중산층이 현 체제가 제공하는 경제적 기회의 혜택을 받아 대부분 정치운동에 관심이 없다. 중국공산당에 의한 권위주의적 통치를 수용해 노동자계급과의 단결의식이 사라진 것이다.
2000년대 초반 일부 연구자, 기자, 변호사, NGO 종사자 등 소수 중산층 직업군이 주축이 된 시민사회운동과 권리보호운동 역시 노동의제에 대해서는 거의 무관심했었다. 이는 지식인·중산층·노동자계급 간의 연대가 형성될 수 없다는 의미이며, 더 나아가 조직적 기반과 담론 능력을 갖춘 광범위하고 지속적인 항쟁운동이 등장할 가능성이 거의 없음을 의미한다. 최근 몇 년(2010년 이후부터 현재) 일부 청년들이 노동운동에 개입하고자 했던 시도는 가치가 있지만 여전히 갈 길이 멀다. 계급이 서로 단절되고 분열된 사회구조는 여전히 중국에서 비교적 오랫동안 지속될 것이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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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李鹏六四日记》,鲍朴整理。
- 《天安门血腥清场内幕》,吴仁华著。
글 : 지한(吉汉)
번역 : 김모두 | 동아시아 사회운동 뉴스레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