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자 설명] 이 글은 중화권 매체 <단전매>에 ‘지한(吉汉)’이라는 이름의 필자가 기고한 글 《边缘化的六四论述:八九春夏,其实发生的是“两场运动”》을 번역한 것이다. 분량상 이 글을 상/하로 나누어 소개하고자 한다. 필자는 중화권의 노동운동 과 사회운동에 관심을 갖고 분석하고 있다.
6·4운동에 대한 깊은 이해에 있어서, 우리는 두 종류의 서사를 도출할 필요가 있다. ‘지식인중심론’과 고별하고 노동자·시민의 참여를 중시해 살펴보면, ‘민주’를 승인하는 것이 확실히 노동자와 시민 참여운동의 핵심 요구였다는 점이다. 무엇보다 중요했던 것은 노동자와 시민 전반이 이해했던 ‘민주’와 학생 및 지식인들이 받아들였던 민주에 대한 관념은 매우 달랐다는 사실이다.
6·4운동의 역사 서사에 있어서, 비교적 자주 볼 수 있는 2개의 판본이 있다. 그중 가장 주류적인 해석은 당연히 운동을 ‘민주 대 독재’의 대립이라는 프레임 속에 놓는 이해이다. 이러한 서사에서의 ‘민주’가 가리키는 것은 자유주의적 의미의 민주일 것이다. 1980년대 중국공산당은 점차적으로 ‘계급투쟁’의 전통적 언어들과 고별하고 있었고, 일종의 경제발전 실리적 노선을 중시하기 시작했다. 시장화 개혁은 사상과 언론 영역의 이완을 따랐고, 서방자유주의 사조가 대륙 청년과 지식인들 사이에서 유행하기 시작했다. 지식인들이 유럽과 미국 자유주의 민주제도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면서, 자유·민주의 가치를 실현하는 것 역시 지식인과 청년학생들의 소망이 되었다.
하지만 지식인과 학생들을 실망케 한 것은 1980년대 중국공산당 정치개혁과 정치자유화의 진전이 시장화 경제개혁의 한참 뒤에 놓여있고, 게다가 몇 번이고 뒷걸음질 쳤다는 것이었다. 그중 가장 분명한 것은 1983년 ‘청제정신오염(清除精神污染)’운동과 1987년에 있었던 ‘민주선거 제한 해제’에 대해 주요하게 요구했던 한 학생운동을 진압한 것이었다. 이 탄압은 당시 중국공산당 총서기의 개명파(정치제도 개혁) 지도자인 후야오방의 하야를 직접적으로 야기했다. 이런 서사들에는 이것들이 서구 자유주의의 영향을 받은 청년학생과 지식인들에게 점차적으로 쌓인 불만이 마침내 1989년 후야오방의 서거 후 폭발했으며, 그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와, 당국이 어서 빨리 그간 번번이 가로막혔던 정치자유화를 진전시키길 희망했다. 이리하여 정치개혁과 경제개혁을 일제히 병진하게 하고자 했다는 것이다.
반대로 6.4운동에 대한 또 다른 진술은 오히려 운동을 ‘사회주의 대 자본주의’의 프레임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이 서사는 담론장에 있어서 영향력이 비록 첫 번째 것에는 훨씬 못 미치지만, 일련의 특정 좌익 그룹들―예컨대 중국대륙의 일부 마오주의좌파, 서방의 일부 반스탈린주의 좌파―에서는 상당히 유행하기도 한다. 이러한 서사는 1980년대의 일련의 시장화 개혁이 중국을 사회주의 계획경제에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대입함으로써 이 변혁 과정이 엄중한 통화 팽창과 빈부격차의 급격한 심화를 낳았다고 보며, 무수한 부패 문제와 도시인구의 생활 수준 저하를 낳았다고 본다. ‘민주 대 독재’ 서사와 달리, ‘사회 주의 대 자본주의’의 서사는 학생과 노동자·시민들의 불만의 진정한 원인은 시장화 개혁이 조성한 일련의 경제 혼란상이라고 보며, 이런 불만들이 부패관료들에 대한 분노로 집중되었다고 여긴다.
이와 같은 서사를 봤을 때, 6.4운동은 경제적 요구에서 기인한 반시장화 개혁, 반자본주의 운동이 된다. 그것의 핵심 요구는 민주만이 아니라, 시장화 개혁과 자본주의 전환에 뒤따른 일련의 폐단에 반대하는 것이었다. “부패를 척결하자!”, “썩은 관료를 척결하자!”, “인플레이션을 규제하라!” 같은 구호들은 1989년 봄‧여름에 이뤄진 행진과 집회 중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것이었다. 허나 학생대표들이 정부 관료와 대화할 때 제출한 핵심 요구는 “학생, 노동자, 시민들은 단지 당국이 부패와 부패관료들(정치권력을 시장에서의 불법적 투기를 통한 이익 편취에 활용하는), 빈부격차의 확대, 인플레이션 통제불능의 문제를 해결하기를 희망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희망이 운동에 참여했던 사람들이 하나같이 ‘민주’를 핵심으로 하는 정치개혁을 지지한다는 걸 의미하진 않는다. 이 서사의 배경이 은연 중에 포함하는 가설은 설령 운동 항의의 대상이 덩샤오핑 시대 경제개혁이 수반한 일련의 난맥상이라 하더라도, 그러한 운동 참여자들의 분노 속에는 필연적으로 경제개혁 이전의 시대(즉, 마오쩌둥 시대)에 대한 조금의 그리움이 있었다는 것이다.
이 두 서사는 매우 큰 문제가 있다. ‘민주 대 권위주의’의 서사 속에는 운동의 주된 역할을 거의 항상 학생과 지식인들로 보며, 항쟁에서 함께 활약했고, 운동 속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았던 노동자와 시민들을 심각하게 생략한다. 사실 6월 3일 저녁부터 4일 새벽까지 이뤄진 진압의 사상자 정황에서 보든, 투쟁이 지난 후 당국의 탄압 강도에서 보든, 노동자와 시민들이 치룬 대가는 하나같이 지식인과 학생들보다 상당히 컸다. 이런 국면은 1980년 한국 광주 항쟁과도 유사하다. 나아가 ‘민주 대 독재’라는 서사 속에는 노동자와 시민들의 자리는 거의 완전히 사라졌다.
‘사회주의 대 자본주의’라는 서사는 비록 운동 내에서의 노동자와 시민의 역할을 언급하지만, 이 운동의 가장 기본적인 사실에 관해서는 완전히 해석하지 못한다. ‘민주’에 대한 요구는 분명히도 이 운동의 핵심 주제였으며, ‘반자본주의’나 ‘반시장화 개혁’이 아니었다는 것은 개괄할 수 있다. 하물며 비록 시장화 개혁에 대한 불만이 확실히 노동자와 시민들이 운동에 참여케 한 중요한 요소라고 할지라도, 운동 과정에서는 마오쩌둥 시대나 마오쩌둥 본인에 대한 어떠한 그리움도 거의 출현하지 않았다. 다시 말해, 이 운동에 참여한 수많은 사람들은 물론 시장화 개혁이 수반한 결과에 대해 불만을 느꼈지만, 그들이 희망한 것이 반드시 시장화 개혁 이전 시대로 후퇴시키는 것이었다고 말할 순 없다. 또한 단지 당국이 구체적인 경제 문제를 해결해달라고 희망하는 것만도 아니었다. 오히려 일종의 완전히 새로운, 시스템의 정치적 상상을 통해 사회주의 계획경제나 시장화 개혁 모두를 배제한 대체 방안을 제출했던 것이다.
6‧4 운동에 대해 깊이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두 가지 서사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지식인 중심론’에서 벗어나 노동자와 시민의 참여를 주목해야 하며, 동시에 운동에 참여한 노동자‧시민의 핵심 요구였던 ‘민주’를 승인해야 한다. 관건은 노동자와 시민들이 이해했던 ‘민주’와, 학생이나 지식인들이 품었던 민주 관념에 매우 큰 차이가 있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노동자계급 주체성이 돌출시킨 사회주의민주이다. (이 글 뒤에서 이와 같은 사회주의민주의 상상에 대해 자세히 소개할 것이다) 노동자계급이 사회주의민주를 쟁취하고자 했다는 점이 6‧4운동의 가장 중요한 지점이나, 생략되기가 매우 쉽다.
1989년의 노동자운동
당국의 탄압 강도에서 보든, 노동자와 시민들이 치룬 대가는 하나같이 지식인과 학생들보다 상당히 컸다. 이 사실은 역사학자 모리스 마이스너(Maurice Meisner)의 연구와 우런화(吴仁华)의 『천안문에서의 잔혹한 진압』에 기록돼 있으며, 내가 인터뷰했던 6‧4 항쟁 경험자들이 증언하고 있다.
학자 앤드류 왈더(Andrew Walder)와 공샤오샤(龚小夏)는 1993년에 발표한 연구에서 “베이징 노동자 자치연합회‘(北京工人自治联合会, 이하 ‘공자련’)을 단서로 삼아 6.4 운동에 참여한 노동자와 시민들에 대해 깊이 다루었다. 후야오방(胡耀邦)이 1989년 4월 15일 죽고나자 각 대학의 학생들은 캠퍼스 내에서 후야오방 영정을 설치했다. 이와 동시에 일군의 노동자 ‧시민이 삼삼오오 천안문 광장의 인민영웅기념비 근처에 모여들어 시국에 대한 생각들을 나누기 시작했다. 며칠 후, 모여든 노동자‧시민의 숫자가 크게 늘어나 수십 명에 달하게 됐다.
상기한 ’신화문 사건‘(4월 20일 학생과 무장경찰들이 중난하이 신화문 앞에서 충돌한 사건) 이후 경찰이 학생들을 거칠게 다룬 것에 격노한 소수의 노동자들은 하나의 조직을 만들기로 결의한다. 이것이 ‘공자련’의 전신이다. 또한 ‘공자련’의 성립은 ’베이징 대학생 자치연합회‘(고자련)보다 며칠 빠르기도 했다.
그러나 그 당시의 ‘공자련’은 그저 수십 명의 사람들이 조성한 비공식 조직일 뿐, 아무런 공개 활동도, 조직 구조도 갖추지 못했으며, 그 성원들 역시 서로 간에 잘 알지도 못하는 사이였다. 4월, 운동의 리듬은 줄곧 학생들에 의해 장악돼 있었다. 4월 17일 천안문 광장 행진과 그에 따른 ‘신화문 사건’부터 4월 22일 후야오방 장례 당일 행진, 그리고 4월 27일 <인민일보>의 4‧26 사설에 항의하는 10만 대학생 행진, 최종적으로 5월 4일 보다 큰 규모의 5‧4운동 기념 행진에 이르기까지 일련의 시위 활동에 참여한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학생들에 의해 조직된 것이었다.
하지만 5월 4일 이후 학생운동 흐름은 수그러들었다. 대다수 학생들은 그 다음에 어떻게 해야 할지 알지 못했고, 운동이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는지에 대해 회의했다. 많은 학생들은 동맹휴업을 끝냈다. 운동이 정체되어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곤경 속에서 일부 분교의 급진적 학생들이 단식 투쟁을 계획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이 기회를 빌어 참여 열의를 지속시켜나가고, 운동을 새로운 단계로 고조시키길 바랬다. 이런 의미에서 단식에 동참한 학생들은 자신들의 목표를 확실히 실현했다. 5월 13일 수백 명의 학생들이 단식을 시작한 첫날, 천안문 광장에 모인 시위 참여자 수는 30만 명에 다다랐고, 운동이 시작된 이래 최대였다.
단식이 시작되면서 이 운동의 방향은 의의에 있어 큰 전환점을 맞이한다. 대다수 학생들의 참여 열정은 비록 단기간 내 다시 점화되었지만, 여전히 쇠락이 계속되는 것을 피하는 건 불가능했다. 5월 13일 후, 학생들의 참여는 전반적으로 끊임없이 하락했고, 점차 패색을 띄었으며,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광장에서 빠져나갔다. 하지만 학생들의 단식 투쟁 이전에 아직 보이지 않았던 노동자와 시민들의 참여가 촉발됐다. 평범한 노동자들의 열정은 참여자 숫자에서만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그들 자신의 시위 행진을 조직하고, 자신들의 플래카드와 표어 등을 만들어내는 것에서도 드러났다. 노동자들은 점차 운동의 주력군이 됐다. 노동자들이 운동에 대규모로 참여하도록 자극한 것은 단식 학생들에 대한 소박한 동정심도 있었고, 정부가 단식 학생들의 면전에서도 꿈쩍도 하지 않는다는 도덕적인 의분도 있었다. 내가 만난 한 노동자 시위 참여자의 말을 빌리자면, 그는 그저 “정부가 이렇게 학생들을 농락하는 건 너무 심하지 않나”라고 생각했을 뿐이었다. 나아가 노동자 참여자 수의 폭증으로 ‘공자련’은 5월 중순 경 공개활동을 시작했고, 대규모로 회원들을 모집했다.
노동자들을 더욱 급진화시킨 것은 오히려 5월 20일 계엄령의 선포였다. 군대가 위풍당당하게 사면팔방에서 베이징 시내로 들어오고 있을 때 무수한 노동자와 시민들은 자발적으로 도시 외곽의 각지로 가서 군대의 도시 진입을 막으려 했다. 그들은 인벽을 세우고, 바리케이트를 쌓아 군대가 앞으로 나아가는 것을 저지했다. 그들은 사병들에게 음식과 보급품을 주었고, 사병들과 함께 우의와 신의를 구축했다. 마음을 움직이고, 이치로 설명하여 사병들에게 무기를 내려놓게 했다. 다시 말해 계엄이 시작되고 정세의 위험 정도가 매우 크게 증가하던 시기에, 감히 국가폭력장치에 가장 강력하게 맞서고 교섭했던 이들은 학생이 아니라, 노동자들이었다. 그렇게 노동자들은 확실히 잠깐 동안의 승리를 쟁취했다. 즉, 인민해방군의 도시 진입의 발걸음은 저지됐다.
역사학자 우인화는 『천안문에서의 잔혹한 진압』에서 이렇게 회고하고 있다. “1989년 민중 항쟁에서 가장 도덕적인 용기를 가졌고, 가장 참혹한 희생을 치렀던 이들은 학생도, 지식계 인사도 아니었다. 그것은 베이징시의 노동자 형제자매와 시민들이었다. 천안문 광장을 지키고, 천안문 광장에서 평화적으로 시위하던 학생들을 지키기 위해 그들은 내내 온몸을 바쳐 발톱까지 무장한 해방군 계엄부대를 막고 있었다. 피흘려 싸웠고, 목숨을 던져 앞으로 돌진했다.”
독일 공산주의 운동의 지도자 로자 룩셈부르크의 말을 빌리자면, 노동자계급의 투쟁의식은 투쟁 과정에서 끊임없이 배양된다. 6‧4운동도 이러한 점을 입증했다. 군의 도시 진입을 막는 과정에서 노동자들은 점차적으로 그들이 자발적으로 조직하고 행동한다는 것이 내포한 거대한 역량을 깨달았다. 이는 전무후무한 자아 해방이었다. ‘자기 조직화’의 물결이 일자, 파도가 몰아쳤다. 앤드류 왈더와 공샤오샤가 제공한 데이터에 따르면, 5월 중순부터 공자련의 성원수가 폭증하기 시작했고, 6월 초순에 이르러선 이미 2만 명에 다다랐다. 이와 동시에 기타 각양각색의 노동자 조직들도 우후죽순으로 나타났다.
조직의 발전은 행동의 급진화를 가져왔다. 노동자들은 군부의 움직임을 적시에 관찰하고 전달하기 위해, 동시에 도시의 법과 질서를 유지하고 군부에 탄압의 구실을 주지 않기 위해 ‘규찰대(纠察队)’, ‘결사대(敢死队)’ 등 자생적 민병대와 유사한 조직들을 조직하기 시작했다. 앤드류 G. 월더(Andrew G. Walder)와 공사샤(龚小夏, Sasha Gong)의 논문에서도 이 점을 지적하고 있다. 내가 인터뷰한 한 6.4운동 경험자는 노동자들이 군 차량을 막기 시작한 지 일주일 후, 장안거리(长安街)[베이징 도심을 동서로 관통하는 대로] 서향선 북측(무시디木樨地, 군사박물관 북측)의 위탄(月坛)과 간자커우(甘家口) 일대에서만 10여 개의 노동자 규찰대가 활동했다고 회상했다. 이들 규찰대는 3교대 또는 4교대로 근무하며 사구(社区)와 골목(街道)의 상황을 관찰하고 질서유지를 지원했다. 내가 인터뷰한 또 다른 6.4운동 경험자는 시위 당시 베이징은 거의 노동자와 시민이 자치하는 도시였다고 말했다. 이는 1917년 2월과 10월 혁명이 한창이던 시기 러시아 노동자계급이 스스로 무장조직을 설립했던 것을 연상시킨다.
동시에 노동자들은 더 많은 거리에서 토치카(堡垒)와 바리케이드를 쌓기 시작했다. 적지 않은 공장 노동자들이 조직적으로 파업이나 태업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바오푸(鮑彤)가 정리한 <리펑의 6.4일기>에 따르면, 5월 말 수도제철소(首都钢铁厂) 노동자 10만 명이 파업을 준비하고 있다는 소문이 나돌자 중국공산당 수뇌부는 혼돈에 빠졌다. 당시 수도제철소는 베이징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상징적인 공업기업 중 하나로, 이곳 노동자들이 파업에 돌입하면 도시 전체에서 대규모 파업이 일어날 가능성이 컸다. 공자련은 이미 “총파업을 주비하라(筹备发起总罢工)”라는 구호를 내걸고, 공장 간 연계를 통한 총파업을 준비하고 있었다.
자발적 무장과 자기조직화(自我组织), 파업 등 행동들은 시위, 행진, 점거와 의미가 다르다. 후자의 의의는 주로 ‘자기 표현’이지만, 전자의 행동들은 본질적으로 ‘스스로에게 권리를 부여하는 것’, 즉 일상생활에서의 생산을 통제하고, 사회를 관리할 수 있는 권력을 쟁취하는 것이다. 그 자체가 시위·퍼레이드·점거보다 훨씬 급진적인 셈이다. 6·4운동이 5월 말과 6월 초로 발전하면서 학생운동은 한계에 부딪혀 규모가 줄어들었고, 내분이 끊이지 않았다. 이에 반해 노동자운동은 고도화된 자기조직과 동원 속에서 급진적으로 발전했으며, 나날이 그 규모가 증가하고 있었다.
당국이 6월 초에 왜 최종 결심(항쟁 무력진압)을 굳히게 됐는가에 대해서는 확인할 길이 없다. 이미 퇴조와 패색이 짙게 드러난 학생운동이 아니라, 빠르게 확대되고 급진화하는 노동운동의 자기조직화나 총파업 조직화야말로 당국을 두렵게 하는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추측이 있을 뿐이다. 시위 진압 당일(6월 4일) 혹은 그 직후에 당국이 보인 여러 행위들은 노동자 탄압이 학생 탄압보다 훨씬 강력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이는 역사학자 모리스 마이스너(Maurice Meisner)의 연구나 우런화(吳仁華)의『톈안먼, 피비린내 나는 진압의 내막(天安门血腥清场内幕)』에 기록돼 있고, 내가 인터뷰한 6.4운동 참여자들에 의해서도 확인된다.
지식인과 노동자들은 ‘민주’를 다르게 상상했다
‘민주’에 대한 노동자들의 표현은 독특했다. 분명 학생들이 ‘민주’에 대해 지닌 관념과는 달랐다.
투쟁이 전개된 한 달여의 시간 동안 이 운동의 발언권과 언론의 관심은 주로 대학생들과 지식인들에게 쏠려 있었다. 대학생과 지식인의 표현력이나 외국어 능력, 언론과의 상호작용 능력이 더 강하기 때문이다. 반면 대학생들에 비해 노동자들은 자기 언어를 잃는 처지에 있었다. 앞서 논의했듯, 노동자들의 민주 권력 추구는 그들의 말이 아니라 행동에서부터 나타난다. 행동으로 권력을 쟁취하는 과정 자체가 노동자들의 주체성을 드러내는 것이며, 그 자체로 급진적인 민주주의 상상이기 때문이다.
투쟁 참여 과정에서 노동자들이 남긴 말과 문자는 학생들에 비해 적다. 하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민주’에 대한 노동자들의 표현은 나름의 독특성이 있고, 학생들의 그것과는 달랐다.
사회학자 앤드류 G. 월더(Andrew G. Walder)와 공샤오샤(龚小夏)의 공자련 전단지 분석에 따르면, 노동자들은 무엇보다 생계와 관련된 경제 문제인 인플레이션이나 빈부격차에 주목한다. 시장주의 개혁 과정에서 나타나는 이와 같은 모순들은 도시 노동자들이 시장주의 개혁에 대해 갖는 태도를 매우 부정적으로 만든다. 하지만 노동자들은 경제 그 자체에 대해 논하지 않고, 경제 관련 의제들에 대해 정치화된 해석을 제시하며, 이를 바탕으로 민주주의에 대한 담론을 세워나간다. 노동자들의 입장에서는 인플레이션이나 빈부격차 등 모순들의 근본 원인은 관료 시스템에 있다. 노동자조직 공자련 전단지에서 “스탈린주의식”의 “전제관료”와 같은 단어들이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이유는 이 때문이다.
공자련 입장에서 볼 때 인플레이션은 생산가격 결정과 수입을 통제하는 관료들이 제품의 가격을 고의적으로 높게 책정해 중간에서 마진을 챙기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인플레이션과 빈부격차 문제의 근본적인 해법은 관료제를 무너뜨리고 제품 생산 및 유통과정을 노동자들의 손에 맡기는 것에 있었다. 이와 같은 반관료제와 민주를 주창하는 담론은 1966~67년 문화혁명 초기의 노동자 조반파(工人造反派)를 떠올리게 한다.
관료제의 해악에 대한 노동자들의 문제의식은 일상에서 정치적 표현의 자유나 선거에 대한 권리가 결여되어 있기 때문에 생긴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일터에서 발언권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에 생긴 것이다. ‘전제적 통치’의 가장 철저한 구현은 일터에서 공장장 관리제일 것이다. 월더와 공샤오샤가 인터뷰한 한 공자련 회원 노동자는 이렇게 말했다. “작업장 안에서 노동자들의 말이 효력이 있을까요, 아니면 관리자들이 하는 말이 효력이 있을까요?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해 얘기했었습니다. 공장에서부터 이 나라의 상황을 살펴본다면, 사실 이 나라가 ‘일인 전제’라는 걸 알 수 있게 될 겁니다. 우리의 목표는 그렇게 높지 않아요. 바로 노동자들이 자신의 독립적인 조직(노동조합)을 만드는 것입니다.”
투쟁에 참여한 노동자들은 의심할 여지 없이 민주주의를 위해 분투하고 있었다. 하지만 노동자들의 눈에 비친 민주주의는 일터의 민주주의, 노동권의 민주주의라는 점에서 지식인들과 달랐다. ‘민주’에 대한 공자련의 주장은 시종일관 비민주적인 관방 공회(노동조합) 시스템(중화전국총공회, 中华全国总工会)에 대한 비판이었다. 공자련은 관방 공회가 노동자들을 진정으로 대표할 방도가 없다고 여겼으며, 노동자들이 자신의 독립적인 공회를 갖게 되고, 기업 내 관리자들을 감독하며, 단체교섭의 권리를 갖게 되길 바랐다. 공자련의 관점에서 이와 같은 “노동자자치연합회’라는 조직형식은 더 많은 노동자들이 자신의 일터에 자치조직을 설립하도록 독려함으로써 노동자들을 결집시키고 관료들과 맞서 싸우게 할 계기를 마련하는 것이라고 봤다. 시장주의 개혁 자체에 대한 반발을 넘어, 시장주의 개혁의 정치적 기반인 ‘관료 독재’에 직접적인 화살을 겨눈 것이다.
노동자들은 직장 내 ‘공장 독재’(민주주의 없는 일터)에 대한 경험이나 국가 정책 전반의 경제 모델 변경에 대한 무력감이 ‘관료 독재’ 문제의 뿌리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필자가 인터뷰했던 6.4운동 참여 노동자들 역시 그렇게 인식했다. 그들이 보기에 1980년대 말 경제 정책은 변덕스럽고 모순적이었다. 때로는 너무 느슨해서 대규모 인플레이션을 일으켰고, 때로는 너무 심한 긴축으 로 인해 기업들이 도산했다. 그렇게 되면 노동자들은 일자리를 잃고, 그 피해는 항상 노동자들의 몫이었다는 것이다. 이처럼 모순된 정책들은 한편으로는 국가권력을 쥐고 있는 관료들이 멍청하고 무능하다는 걸 보여주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관료들이 기회주의적으로 개혁개방을 자기 이익에 활용하기만 할 뿐, 노동자들의 생사는 전혀 돌보지 않았다는 걸 보여줬다. 월더와 공샤오샤가 만났던 여러 노동자들도 유사한 뜻을 밝혔다.
따라서 노동자가 정의하는 ‘민주’란 관료제를 전복하고 노동자계급의 자기 통치로 대체하는 것을 가리킨다. 이를 실현하는 첫 번째 단계는 일터에서 민주주의를 쟁취하고 노동자들의 자기조직을 구축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민주 구상은 뚜렷한 계급성을 띠고 있었다. 그것은 노동자계급의 주체성을 기반으로 하며, 이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사회주의민주’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민주’ 구상은 ‘민주’에 대한 학생들이나 지식인들의 인식과는 매우 달랐다. 후자의 언술에서 ‘민주’는 보편적 자유의 가치로 구성된다. 학생들은 비록 부정부패 척결이나 관료 부패 척결을 요구했지만, 추상적 민주 권리와 자유를 지향했던 것이라 할 수 있다. 즉, 노동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일터와 노동 생산과정에 대한 민주주의가 우선적으로 필요하다는 주장은 아니었다.
노동자들의 시선에서 민주주의와 시장주의 개혁은 극명하게 대립된 것이었다. 시장주의 개혁은 가뜩이나 거대한 권력을 쥐고 있는 관료들이 더욱 거리낌 없이 제멋대로 행동하게 했다. 따라서 시장주의 개혁과 관료독재라는 두 요소는 서로 맞물 려 있기 때문에 동시에 전복되어야 했다. 이에 반해 대학생들의 시선에서 ‘민주’와 ‘시장주의 개혁’은 동반되어야 할 것이었고, 시장주의 개혁에서 나타나는 부패, 관피아 등 문제는 시장주의 개혁이 부족했기에 발생하는 결과라고 봤다. 다시 말해, 민주화 개혁이 시장화 개혁을 따라가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인식되고 있었다. 이 때문에 당시 대학생들이 내놓은 대안은 경제개혁과 정치개혁을 병행하자는 것이었다. 사실 ‘6·4운동의 예행연습(六四运动预演)’이라 불리는 1986~87년 학생운동의 물결에서 ‘경제자유화 지속’이라는 구호는 대학생 시위의 핵심 구호 중 하나로 꼽히기도 했다.
요약하자면 노동자들은 계급적 담론에 기초한 민주주의, 학생들은 탈계급화된 민주주의를 원했다. 전자는 우선적으로 일터의 민주주의를 지향하고, 후자는 추상적인 개인의 자유에 기초한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것이었다. 전자는 시장주의 개혁을 배격하는 민주주의를 지향했고, 후자는 시장주의 개혁을 포용하는 민주주의를 지향했다. 이러한 의미에서 우리는 (6·4운동 당시) 노동자들은 ‘사회주의민주’를 추구했고, 대학생들은 자유민주주의를 추구했다고 볼 수 있다.
글 : 吉汉
번역 : 김모두 | 동아시아 사회운동 뉴스레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