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대만의 탐사저널리즘 매체 「보도자」에 게재된 當年輕人不再記得太陽花:後318世代的公共參與、社運能量如何變化?를 번역한 것이다. 글의 전체 논지에서 불필요하다고 여겨지는 일부 단락은 옮기지 않았다.
10여 년 전, 2014년‘해바라기운동(太陽花學運)’으로 정점을 찍은 학생운동과 사회운동의 물결은 대만 전역에서 수많은 학생들을 공공 문제나 정치 참여의 물결로 이끌었다. 10년이 지난 지금, ‘포스트 318세대’ 학생들의 사회적 관심과 저항력은 어디로 향하고 있을까?
「보도자(報導者)」가 다수의 대학 총학생회 간부, 사회비판적 동아리 간부, 청년 NGO 활동가, 학자 및 전문가를 인터뷰한 결과, 최근의 학생 자치와 사회운동 참여율의 하락과 빈번하게 공동체가 붕괴하는 침체에 빠졌다. 많은 대학생들은 수업을 마치자마자 캠퍼스를 떠나기 때문에 추상적인 가치이념을 강조했던 과거의 학생운동에 비교했을 때 사회변혁을 향한 공감대를 키우는 것이 불가능하다. 이제 대학생들은 즉각적인 변화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으며, 이는 또한 NGO 활동 규범의 관심 주제를 조정하게 만들기도 한다.
시대마다 청년들은 서로 다른 시대의 환경에 직면해왔다. 그렇다면 ‘포스트 318세대’에게 있어서 그들에게 속해 있는 도전과 과제는 무엇인가?
역사학과를 막 졸업한 리치엔(李芊)과 그의 동지 천친셴((陳沁賢))은 토요일 오후에 청공대학(成功大學)의 동아리방으로 돌아와 물건을 정리했다. 이제 얼마 후면 이 공간을 반환하기로 결정했다. 그들이 5년 동안 다녔던 청공대학 동아리 링얼사(零貳社)는 현재 해산 절차를 밟고 있다.
학생회관 건물 전체는 동아리방들로 채워져 있다. 하지만 위치가 외지고 활용도가 낮아 대다수 학생들은 창고로만 쓰고 있다. 리치엔과 천친셴 두 사람은 동아리방을 정리하다가 오래된 유물을 발견해 경이로움을 느끼기도 했다. 2013년 청공대학 난롱광장(南榕廣場) 명칭을 둘러싼 논쟁[역주: 광장 명칭을 결정하는 것을 두고 학내에서 정치적 논쟁이 촉발된 바 있다], 2014년 해바라기 학생운동의 무역협정 반대, 반핵 입장을 담은 플래카드, 그리고 매년 다른 의제를 다룬 NGO와 동아리의 선전물들이 있었다.
청공대학 링얼사는 2008년에 설립됐다. 설립자 중 한 명은 해바라기운동의 리더 중 한 명이었던 린페이판(林飛帆)이다. ‘링얼’의 대만어(민난어) 발음이 ‘항의(抗議)’의 대만어 발음과 유사하기 때문에 이런 이름이 붙여졌다. 해바라기운동 당시 대학가의 비판적 동아리들은 2019년 타이난 철도 철거 및 지하화 논란에서 철거반대운동[역주: 철도 공사 과정에서 이 지역에 살던 주민들의 집이 철거될 위기에 처하자 학생들이 적극 연대했었다]의 주역으로 주목받았다. 리치엔(李芊)과 천친셴(陳沁賢)은 당시 학생운동가로서 투쟁 일선에 나서던 이들 중 하나다.
한때 해바라기운동은 청년학생운동의 새로운 물결을 일으켰다. 각 대학 및 고등학교에선 잇달아 학생운동 동아리들이 설립됐다. 리치엔이 타이베이제일여고 재학 시절 가입한 ‘녹각성(綠覺醒)’도 그 중 하나다. 하지만 운동 열기가 잦아들면서 재상산의 어려움을 겪는 동아리들이 늘어났고, 최근 몇 년 사이엔 더 심해졌다. 대만대학신문사, 타이베이대학의 ‘번장사(翻墙社; 담장을 넘는 모임)’, 푸런대학(輔仁大學)의 ‘흑수구사(黑水溝社)’, 둥하이 대학(東海大學)의 ‘인간공작방(人間工作坊)’, 중정대학의 ‘양치기들(牧夫們社)’, 둥화대학(東華大學)의 ‘토지공사(土地公社)’ 등 여러 학생운동 동아리들이 사라지거나 문 닫을 위기에 처해 있다. 리치엔에 따르면, 지난 몇 년 동안 이런 동아리들의 활동이 저조해졌다고 한다. 많은 동아리들이 해산까지는 아니더라도 실질적으로 이름만 남았을 뿐 운영이 어려운 상황이다.
관심도 없고, 선택할 사람도 없다? 침체 상태에 빠진 학생자치
비주류적인 사회운동 동아리뿐 아니라, ‘대학법(大學法)’이 보장하는 학생자치조직에서도 활동 의지가 있는 학생들이 줄어드는 문제가 심각하기는 마찬가지다.
수치상으로 볼 때, 대학생들의 학생회 참여율은 눈에 띄게 낮아졌다. 교육부 조사에 따르면, 전체 124개 공립·사립대학, 기능직·전문대 중 학생회장 선거 투표율이 20% 이하인 학교의 비율은 2020년도 41.9%, 2021년도 49.2%, 2022년도 55.6%로 저조한 투표율을 보이고 있다.
둥우대학(東吳大學)의 학생수는 1만5000여 명으로, 문사철 계열 학과가 많다. 동우대학 학생회는 3년 전부터 문을 닫은 상태다. 올해(2024년) 동우대학 정치학과 3학년이자 전학대회 대의원인 양쯔잉(楊姿英)은 “대학 1학년 때부터 학생회가 없었다”며, “대부분의 학생들은 이에 대해 무감각하며, 자신의 권익이 훼손되고 있다는 점도 모른다”고 말했다. 학생회가 가까스로 부활하긴 했지만, 지난해 말 크리스마스 음악회 개최와 관련한 외부 계약 논란으로 학생회 간부들이 대거 사퇴하면서 가까스로 살아난 학생회는 다 시 바닥으로 추락했다.
학생자치조직들의 저조한 상태는 푸런대학 총학생회장직을 이제 막 마친 쉬이룬도 공감하는 바다. 그는 “몇 년 전 코로나19가 확산됐을 때 많은 대학들이 자율 온라인 수업을 발표했지만 푸런대학은 교수와 학생들에게 오프라인 등교를 요구했다”며, “많은 학생들이 학생회가 학교측에 온라인 수업을 요구하지 않았다고 질타하면서 학생회장을 파면하려 했다”고 말했다. 이 일이 인터넷에 퍼지자 많은 사람들은 같은 반 친구가 바로 학생회장이라는 사실에 놀랐다. 쉬이룬은 황당하다는 듯 이렇게 말했다. “(학생회장 선거) 투표율은 10%도 안 됐지만, 어떤 일이 발생했을 때 (학생의) 90%는 ‘니가 책임져’라고 따진 거죠.”
많은 대학들에서 학생회장을 뽑지 못할 뻔한 상황을 맞고 있는데 어떡해야 할까? 쉬이룬은 당선 문턱이 2분의1에서 3분의1 수준으로 정해져 있는 대학들이 많은데, 두 팀 이상이 출마하는 경우 최소 당선에 대한 기준 없이 상대적으로 다수 득표를 하기만 해도 당선되는 경우도 흔하다고 털어놨다. 어떤 학생회는 [투표율 문턱을 낮추기 위해] 경선 상황을 만들고자 다른 후보를 내세우고, 당선 문턱도 없이 학생회장을 배출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팬데믹 시기의 원자화
318운동이 입법원을 점령했을 때 다이신(戴莘)은 초등학교 6학년 학생이었고, 그의 두 언니들은 모두 입법원으로 달려가 연대했다. 이 시기 학생운동의 주도성은 중국이 나쁜 나라라는 인상을 주었다. 고등학교 시기 다이신은 ‘민족문제’를 고민하기 시작했고, 중국과의 자유무역에 반대하는 보도와 다큐멘터리를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해바라기운동 바깥에서 조직과 저항을 갈망했다.
중정대학(中正大學) 입학 후, 다이신은 원래 가입하려 했던 학생운동 동아리가 이미 문을 닫았다는 것을 알게 됐다. 현재 스물두 살인 그는 학생회장으로서 3.18투쟁 10주년 행사를 준비하고 있다. 그러나 고등학교 때부터 연서명 등에 함께 하며 사회적 의제에 참여했던 다이신은 자신처럼 거리 시위에 참여하려는 사람이 소수라는 사실, 대다수 학생들이 자기 일상에만 관심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이에 대해선 쉬이룬도 비슷하게 느끼고 있다. 그는 전통적으로 사회운동에 참여했던 사회학과를 다녔지만 같은 과 친구들과 사회문제를 논의하기 어려웠다. 그 대신 학생회에서 소속감을 느꼈고, 그 소속감조차 연령별 단절이 있다는 걸 느꼈다. 올해 4학년인 그는 학생회 후배들이 중요한 회의 외에는 거의 참여하지 않는다는 점을 알게 됐는데, 이는 학생자치에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모든 학생활동의 공통 현상이다. “학생들은 수업이 끝나자마자 캠퍼스를 떠나 온라인으로 처리할 수 있는 일은 온라인으로 해결해요. 회의를 마치고 함께 뒷풀이 할 기회가 적다보니, 사회운동에 대한 공감대를 높이기가 어렵죠”
대만청년민주협회(臺灣青年民主協會)의 장위멍(張育萌) 이사장은 요즘 청년들을 ‘원자화’라는 키워드로 표현한다. 3년에 걸친 팬데믹 시기로 인해 상호간의 대인 관계가 소원해졌기 때문이다. 요즘 대학생들이 세상에 대해 알기 시작했을 땐 인터넷 커뮤니티 플랫폼이 활성화됐고, 고등학교 시절에는 원격수업에 익숙해졌으며, 대학 진학 후에는 물리적 조직과 동원 경험이 줄어들었다. 그는 “일상 속에서 여전히 불만이 있지만, 무력감이 커지다보니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해바라기운동의 역사적 기억이라는 사슬도 단절됐다. 장위멍은 연평고등학교(延平高中)에 다닐 때, 해바라기운동의 기운을 받아 학생회를 설립했고, 교지를 운영했다. 해바라기운동의 후발 세대로서 그는 당시 해바라기운동에 참여한 많은 활동가들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3년 어린 후배들의 입장에서 린페이판(林飛帆), 먀오보야(苗博雅)에 대한 인상은 이미 그들이 정치에 입문한 후에 기반하고 있고, ‘해바라기가 대만 정치를 바꾸었다’는 말은 그들에게 본래적인 것이라기보다는 강요된 것 같아요.”
NGO 관찰: 즉각적인 효능감만 중시, 이념적인 진보 어려워
10년 전, 대학생들이 입법회장에 난입해 24일간 점거를 지속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끈끈한 관계를 맺고 있던 사회운동단체들의 지원이 있었다. 녹색시민행동연맹(綠色公民行動聯盟)도 그해 가장 많이 활동한 단체 중 하나였다. 녹색시민행동연맹의 추이쑤신(崔愫欣) 사무총장은 10년 간 대중의 특성이 변한 것을 느껴왔다.
추이쑤신에 따르면, 해바라기운동 이전 사회운동 활동은 '만인이 반응하면 한 사람이 현장에 가는 것'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해바라기운동 시기에는 페이스북과 모바일 생방송이 활성화되면 서 '만인이 반응하고 만인이 현장으로 가는' 모습이 됐다. 허니문 기간이 지난 후 다시 해바라기운동 이전의 상태로 돌아가면서 실제 활동 인원수는 감소했다. 그러나 유일한 차이점은 온라인 참여 인원수가 훨씬 많아지면서 오프라인 강좌의 2~3배가 되기도 한다는 점이다.
지난 2년, 교통안전에 대한 인식이 높아졌고, 교통 권리 단체들이 잇따라 물리적 집회를 개최했다. 2023년 카이다거란 대로(凱達格蘭大道)에서 열린 시민행진에서 폭우를 무릅쓰고 참여한 인원은 1만 명이 넘었다. 추이쑤신은 이런 현상을 전통적인 NGO들이 매우 부러워한다는 걸 인정했다. 교통권리 운동의 경우 유튜버들이 함께 주도하고 있고, 이들 인플루언서들이 많은 청년들이 집회에 참여하도록 이끌었다. “인플루언서는 이미 신세대 사회운동의 힘이지만, 우리 같은 전통적 NGO에 참여하는 나이든 이들에게 인플루언서처럼 얼굴을 내밀어 활동해야 한다는 것은 큰 걸림돌 로 다가옵니다.”
장위멍은 청년세대가 가볍고 짧은 영상에 더 익숙하고 즉각적인 ‘효능감’을 중시하기 때문에 사회운동단체들이 사안 공유 문제에서 분명한 차이를 느낀다고 생각한다. 2015년 교육부의 교과과정 미세조정에 따른 교육부 청사 점거 사건 당시 고교생들의 경우, 결과적으로 교과과정의 진정한 변화를 이끌어내진 못했고, 이 때문에 운동에 뛰어든 것이 자신에게 실질적인 도움이 되지 않았다. 당시 학생들은 추상적인 이념과 가치관을 위해 실질적 행동을 했고, 이는 박애적인 행동이었다. 하지만 얼마 전 대만청년민주협회가 고급중등교육법(高級中等教育法) 개정안을 통해 고교생들의 교무회의 참가 의석수를 높이자고 제안했을 때, 청년들의 반응은 냉담했다. 장위멍 연구원은 이를 “이에 대해 반대할 학생도 없지만, 지지할 동기도 없다”며, “(학생들은) 실제 대표석을 늘린다고 뭐가 달라질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에 비해 2022년 대만청년민주협회가 ‘고등학생의 조기자율학습 강제 등교’에 대해 반대했을 때에는 서명운동 첫날 5,000명이 넘는 고등학생들이 연서에 참여했다.
해바라기운동 청년들의 정치 참여는 끝났는가?
최근 몇 년간 대만 사회운동 열기의 기복은 극심했다. 대만대학 사회학과 허밍슈(何明修) 교수가 장기간 강의한 ‘사회운동’ 수업의 이수자 숫자를 보면, 2012년 129명, 2016년 50명이었던 수강자는 2023년 23명에 그쳤다. 허밍슈 교수는 “과거 수업시간에 사회운동 사례를 자유롭게 얘기했고, 모든 학생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했 으며, 수업 시간에서의 상호작용도 직접적이었다”며, 반면 “현재 수업시간에 강의한 의제는 학생들이 들은 적도 없고, 학생들이 강단에 올라 보고하는 사례도 들은 적이 없다”고 말했다.
허밍슈는 2014년 해바라기운동이 수년간 대만 사회운동 에너지의 누적된 성과라고 분석한다. 그보다 몇 년 전에 있었던 사림원(文林苑) 왕씨 자택 철거 사건, 다푸장 약방(大埔張藥房) 철거 사건, 언론독점 반대 행진 등을 통해 사회운동단체들이 매번 운동을 조직하지 않았다면, 해바라기운동은 없었을 것이라는 것이다.
그밖에도 국민당이 집권하던 시기에는 사회운동이 여기저기서 일어나지만, 2016년 민진당이 집권하게 된 후에는 민진당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해 온 사회운동단체의 운동에너지가 현저히 감소하는 모습을 보였다. 지난 5년 동안 대만의 대규모 사회운동으로서는 2018년 동성결혼 합법화 국민투표, 2019년 각 대학 레논 월(Lennon Wall)을 통한 홍콩 항쟁 연대, 2021년 국민투표 쟁점[역주: 원전 재가동 등 4개 안건] 등이 큰 주목을 받았고, 2022년 18세 시민권 개헌운동은 파문을 일으키지 않았다. 이 는 2013~2014년 사회운동의 분위기와는 크게 달라진 모습이었다.
해바라기운동으로 시작된 청년들의 정치 참여 열풍도 최근 몇 년 새 잠잠해졌다. 3.18투쟁 이후 출범한 사회민주당(社會民主黨), 시대역량(時代力量), 대만기진(臺灣基進) 등은 모두 위축돼 이번 입법회에서는 한 석도 차지하지 못했다. 해바라기운동의 주요 인물인 린페이판, 라이핀수(賴品妤), 먀오보야, 쩡포위(曾柏瑜), 우쩡(吳崢) 등도 정치에 뛰어들었다가 올해 초 선거에서 낙마했다.
- [참고] 2019년 민진당에 입당한 린페이판은 2024년 타이베이(臺北)시 제3선거구 입법위원에 출마하기 위해 민진당의 제안을 수락했다가 당직자의 과거 성추행 사건을 부실하게 처리했다는 혐의로 2023년 6월 후보직에서 물러났다. 라이핀수, 쩡포위, 우쩡, 먀오보야 등 다른 청년들은 입후보까지는 했지만 모두 낙선하거나 연임하지 못했다. 우페이이(吳沛憶), 황지에(黃捷)만이 민진당 소속으로 제11대 입법위원에 당선됐다. 또 해바라기운동 당시 중앙연구원 법학연구소(中央研究院法律學研究所) 부연구원이었던 황궈창(黃國昌)은 2024년 민중당 소속의 입법위원이 됐다.
민주화 2세대는 위기인가? 성장 공간 줘야
2022년 입법원이 대학법을 개정해 대학생들의 교무회의 대표 비율을 현행 10%에서 20%로 높이려 하자, 각 대학 총장들은 곧바로 교무회의 대표를 맡으려는 사람이 없는데도 학생들에게 참가해달라고 부탁하는 실정이라며, 비율을 늘리게 되면 학사행정이 어려워진다고 법 개정을 반대하면서 지금까지 지연되고 있다.
학생자치조직의 약화부터 교무회의 대표의 부재까지, 포스트 318세대가 민주적 성과는 누리면서도 이를 소중히 여기지 않는다는 의미일까? 올해 18세인 웡지엔중(翁建中)은 고교 시절 학생대표를 역임했고, 지금은 동화대학(東華大學) 역사학과 1학년 대표다. 고교 시절 학교 측이 졸업여행을 취소하려 했을 때 갖은 노력 끝에 졸업여행을 성사시켰지만, 후배들은 그 역사를 모른다. 그는 자신이 직접 노력하면서 지금의 권익이 선배들이 힘들게 쟁취한 것임을 깨닫게 됐다.
“10년 전에는 (학생들이 교무회의에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는데, 10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시스템 안의 통로에 있어요…. 다들 ‘민주화 2세대’로만 지내면 이건 위기로 이어질 겁니다.”
학생자치 전문가인 푸런대학 법학전문대학원의 우뤼더(吳律德) 박사후연구원은 “청년들을 지나치게 비난할 게 아니라, 청년들에게 적절한 성장 공간을 부여하고 있는가가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동아리 대표들은 학생들이 학교 자치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는다고 불평하지만, 참여한다고 해도 학생들의 힘이 상당히 제한돼 있어 당연히 참여 의사가 높기 어렵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