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둥팡 인터뷰 | 노동권 강화는 강력한 노동운동 창출에 달려있다
2024년 2월 28일
이 글은 2005년 여름 <New Left Review>에 실린 한둥팡(韓東方) 인터뷰 "CHINESE LABOUR STRUGGLES"를 번역한 것이다. 19년 전에 진행한 인터뷰이기 때문에 현재 중국이나 홍콩의 사회운동 조건은 크게 달라졌다는 점을 유의해야 한다. 다만, 198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중반까지 한둥팡 개인의 여정과 톈안먼 항쟁 시기 노동자운동의 성격을 이해하기에는 도움이 된다. 참고로 이 글의 번역자는 한자 어휘의 중국어 발음 표기를 따르지 않고, 한국어 한자 발음으로 하였다. 편집진은 플랫폼c가 소개한 몇 편의 글에서 이미 소개된 바 있는 '한둥팡(한동방, 韩东方)'의 이름은 중국어 발음대로 표기했고, 경우에 따라 중국어 발음 표기를 병행했다.
가정환경이 어떠했는지 설명해 달라.
나는 북경(北京, 베이징)에서 태어났지만, 가족 일가는 산서성(山西省, 산시) 출신이다. 부모님은 태행산맥(太行山脉, 타이항) 일대의 극빈한 지역에서 농민으로 살았다. 그러다 1950년대 초엽에 큰이모부가 북경에서 관리가 되어서, 어머니가 이모네를 따라가 집안일을 해 주고 사촌들을 키웠다. 나도 1963년에 거기서 태어났다. 내가 태어나고 얼마 안 되어 부모님이 이혼했다. 내가 세 살 때 문화대혁명이 터져서 우리는 고향으로 하방당했고, 농촌에서 5년을 지냈다. 모두가 굶주렸다. 그때 가장 고생한 것이 농민들일 거라고 다들 생각하겠지만, 우리 가족처럼 도시에서 농촌으로 내려온 사람들은 농촌 인구로 등록된 사람들과 달리 배급을 받지 못했다. 친척들의 도움으로 겨우 살아남았고, 나는 거기서 소학〔초등학교〕에 다니기 시작했다. 1971년에 북경으로 돌아왔고, 어머니는 건설노동자로 취업했다. 우리는 찢어지게 가난했고, 일은 극도로 힘들었다. 북경 온 천지가 공사판이었는데, 어머니는 돈을 아끼느라 버스도 타지 못했다. 매일 아침마다 6시 정각에 집을 나서셨고, 밤 9시 또는 10시가 되어야 돌아오셨다. 그것이 1970년 대 건설노동자의 삶이었다.
시골에서 올라온 나는 소학 1년을 꿇어야 했고, 학업을 따라가기 너무 힘들었다. 촌놈이라 보통화[표준중국어]를 제대로 구사할 수 없었고, 보통화를 배우기도 고집스럽게 싫어했다. 그래도 나는 북경에서 소학·중고등학교까지 다녔다. 1980년에 열일곱 살로 학교를 졸업한 나는 군에 입대했다. 군대야 다 가는 것 아니냐 싶겠지만, 실제로는 그렇지가 않다[중국은 명목상으로는 징병제지만, 인구가 많아 사실상 모병제다]. 나는 자원입대했다. 왜냐? 나는 꿈이 있었다. 나는 학교에서의 경험과, 공산주의 치하에서 모두가 조화롭게 산다는 관념을 조화시킬 수 없었다. 내 세대의 많은 젊은이들처럼, 나는 1960년대에 헌신성을 공식적으로 인정받은 모범병사 뇌봉(雷锋)을 동경했다. 나는 뇌봉처럼 되고 싶다는 생각으로 군에 입대했다.
군 복무는 얼마나 했는가?
북경 일대에서 3년을 복무했다. 그 일대의 감옥들을 경비하는 공안병(公安兵) 분견대에서 근무했다. 나는 6개월만에 모범병사가 되었다. 내가 체포되었을 때 간수들 중 한 명이 나를 바로 알아보던데, 아마 같은 부대에서 근무한 전우가 아니었을까 싶다. 나는 반장[분대장]이 되었고, 명령에 따르기만 하면 군경력을 쌓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장교들의 부정부패에 환멸했고, 내가 받는 명령들에 대해 의문이 쌓여갔다. 그래서 나는 진급이 유예되었고, 입당 지원서도 여러 번 썼지만 모두 떨어졌다. 군에서 전역한 뒤, 나는 북경사범대학 도서관에서 잠시 일하다가, 1984년에 철도 일을 받았다. 나는 육류·청과·야채를 지역간에 수송하는 냉장차의 온도를 조절하는 전기공으로 훈련을 받았다. 그래도 덕분에 나는 온 나라 방방곡곡을 여행할 수 있게 되어서 어린 시절의 한 가지 꿈은 이루었다.
1989년 운동에는 어떻게 관여하게 되었나?
1987년 춘절 연휴에, 『북경일보』에서 일하는 한 친구가 내게 천안문광장에서 학생 시위가 있다는 말을 해 주었다. 나는 광장에서 동쪽으로 몇 가곽 떨어진 신문사 맞은 편 골목길에 살고 있었다. 그래서 나하고 친구는 시위 구경을 갔다. 그날 저녁이 정말 추웠고, 학생 이삼백 명이 “우리는 공산당을 지지한다”, “반부패 투쟁”, “개혁정책 지지” 따위 구호들이 쓰인 현수막을 들고 있었다. 외신 기자들이 그 현장을 촬영했고, 경찰차와 카메라도 있었다. 학생들은 텅 빈 광장에 서북쪽에서 들어와서 광장을 가로질러 동북쪽 모퉁이로 향했다. 그때 경찰이 TV 카메라들을 밀어내더니, 쉰에서 백 명 정도의 경찰원들이 학생들을 덮쳐서 때리고 걷어차고 질질 끌고 가서 경찰차에 태우는 것을 보았다. 아마 이 때 인내심의 한계에 달했던 것 같다. 모든 환상이 무너졌다.
내가 1989에 관여하게 된 것은 정말 우연이었다. 나는 철도공이었기 때문에 한 달 이상 북경 밖을 돌아다니다가 돌아와서 3주 정도 휴가를 보내곤 했다. 바로 이 휴가 때, 나는 아내와 함께 버스를 타고 천안문광장을 지났다. 승객 중 누가 광장에 사람들이 모여든다고 했고, 호기심 많은 아내가 구경 가 보자고 졸랐다. 이 때가 4월 16일, 운동 첫째 날이었다. 그리고 가 보니 다소 적은, 이삼백 명 정도의 학생들이 모여서 호요방(후야오방, 胡耀邦; 중국 정치인.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제4~5대 위원장으로 1989년 사망했다)이 왜 죽었는지, 얼마나 내부민주주의가 없는지, 민주주의란 애초에 무엇인지, 등등에 관해 토론을 하고 있었다. 나는 그 학생들에게 말을 걸었고, 이 때 나는 민주주의라는 것이 ‘무산자독재 민주주의’처럼 무언가 다른 개념과 결합되지 않고 독립적으로 의미를 가질 수 있다는 진지한 논의를 생전 처음 들었다. 물론 나도 그 말뜻은 알았다. 중국어로 민주(民主)라 함은 ‘인민이 주인’이라는 뜻이다. [참고: 대학 캠퍼스 민주벽에서의 저항]
나는 토론 자리에 합류했고, 토론에서 오가는 이야기를 내 나름대로 이해하고자 노력했다. 이 민주주의의 일반적 개념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전혀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것을 내 삶에 적용해 보려고 했다. 나는 작업장 민주주의를 생각해야 한다고, 경영과 이윤에 대한 통제를 생각해야 한다고 말했다. 내 집이 천안문광장 근처였기 때문에, 나는 거기 모이는 사람들의 토론에 자주 참여했고, 결국 시위대의 일부가 되었다. 나는 그곳에서 인민들과 집단적으로 소통하고 교육받았다. 무언가 축제 같은 느낌이었다.
독립노조를 만들자는 생각은 어떻게 하게 되었는가?
공자련은 5월 19일 결성되었다. 이붕 총리가 계엄령을 발령한 직후였다. 한 무리의 교사들과 국영기업 노동자들이 광장에 모여 자기들끼리 간사를 임명하려 하고 있었다. 그때가 아마 20일 이른 아침이었다. 나는 광장의 서북쪽 귀퉁이로 들어왔다가 그들의 현수막을 보았고, 그냥 그리로 걸어 들어갔다.
나는 다양한 사람들과, 특히 북경대학 법대에서 헌법학 박사과정을 하던 이진진(李进进)이라는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는 이 독립노조라는 것을 정말 확고한 법적 근거가 있는 것으로 만들고 싶었는데, 교육을 잘 받지 못했기 때문에, 그 사람에게 질문을 정말 많이 했다. 이진진은 내게 우리는 중화인민공화국헌법에 따라 집회와 표현의 자유가 있다고 말했다. 그 말을 듣고 나도 끼고 싶다고 했다. 하지만 아직 구체적인 조직구조가 없었다. 이때까지는 그저 학생들을 지켜 주자고 모여든 사람들에 불과했던 것이다. 우리는 이미 존재하던 ‘북경공인자치연합회’ 현수막을 우리 기치로 삼기로 하고, 이 노동자 조직을 어떻게 실체 있는 구조로 만들어낼 것인지 토론했다. 우리는 준비위원회를 꾸리고 선거를 했다. 출마자들은 그 자리에 모인 쉰에서 백여명 되는 사람들에게 연설을 했고, 투표는 거수로 진행되었다. 위원으로 총 다섯 명이 선출되었는데 나도 그중에 하나였고, 이후 위원회 대변인으로 임명되었다.
북경의 대공장 노동자들과는 접촉이 되었는가?
5월 하반기 들어서 17일, 23일, 28일에 대규모 대중집회가 여러 번 있었다. 매번 많은 노동자들이 서로 다른 공장에서 각자의 트럭에 현수막을 달고 와서 시위에 합류했다. 하지만 그들에게 다가가서 우리 공자련에 함께하자고 하면, 자기들은 그런 복잡한 거 모르겠고 학생들을 응원하러 왔을 뿐이라고 물러서는 것이었다. 이것은 문화대혁명으로 새겨진 공포의 잔재였다. 반혁명조직의 구성원으로 찍히는 것은 그냥 반혁명적인 개인으로 찍히는 것보다 훨씬 더 심각한 문제였다. 그래서 사람들은 책임지지 않는 개인으로서만 시위에 참여하려고 했다. 6월 1일이었나 2일이었나, 왕초화(王超华)를 비롯한 학생 여러 명이 우리 공자련 천막에 와서 논의했다. 그들이 말하기를, 학생 동원이 동력을 잃고 있어서, 노동자들은 어떻게 조직화되는지 보고 싶다고 했다. 이 때가 학생들이 우리에게 이런 문제로 처음 말을 걸어준 순간이었고, 나는 아주 고무되었다. 하지만 공자련은 이제 막 만들어져 힘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거리에서 노동자들을 붙잡고 이야기하기보다, 이미 조직화된 학생들이 여럿이 공장마다 가서 노동자들과 대화하고 어떻게 스스로 조직화할지 논의해야 할 것이라고 제안했다. 우리도 그들과 동행하겠다고 했다. 학생들 없이 우리들만으로는 이 일을 할 여력이 없었다. 그날 저녁, 우리는 북경대학에 가서 학생들과 모임을 가지고, 밤새 거기 머물렀다. 다음날 아침 광장에 돌아와 보니, 밤사이 군용차 한 대가 사람을 치었다는 소식이 들려왔고, 곧이어 참사가 일어났다.
문화대혁명에 뿌리내린 공포 이야기를 했는데, 노동자들은 중화인민공화국헌법의 조문대로 스스로가 이 나라의 주인이라는 의식이 없었는가?
바로 그게 문제였다. 나도 절대적으로 동의한다. 노동자들이 거리로 나온 이유는 학생들에게, 마치 큰형처럼, 정신적 지지를 보내주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딱히 노동자들 스스로 원하는 것은 없었다. 공장 노동자들에게 무엇을 원하냐고 물어보면, 그들은 정부가 학생들한테 좀 잘 해 줬으면 좋겠고, 그게 다라고 했다. 우리 공자련이 발족해서 헌장 초안을 쓸 때도, 굉장히 일반적인 글을 썼다. 내 기억이 맞다면 말이지만, 공장 민주주의 같은 것을 언급했을 뿐, 이익·급료·노동시간·집단교섭 같은 구체적인 사안은 하나도 없었다. 우리는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우리 스스로가 될 기회가 없었다. 개인으로서는 물론이고, 노동계급 인민으로서도 우리 자신이었던 적이 없었다. 우리는 우리가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그 생각의 근거를 만들 능력이 없었다. 우리는 도약하고자 애쓰고 있었지만, 이것이 첫 번째 도약이었고, 도약이라는 것을 어떻게 하는 것인지 알지 못했다.
이 기간동안 직장 동료들과는 연락을 유지했는가?
그러지 못했다. 동료들과 나 눈 연락은 딱 한 번, 동료들 몇몇이 천안문광장에 나를 찾아와서 철도회사에서 날더러 복귀하라 한다고 경고하러 왔을 때 뿐이었다. 동료들은 함정이니까 복귀하면 안 된다고 했다. 그러자 철도회사 보안과 사람들이 나를 찾아와서, 열차에 태워서 6개월 동안 북경 밖으로 내보내 신변을 지켜주겠다고 했다. 나는 이 자들이 나를 어린애 취급을 하는구나 싶었지만, 공손하게 감사하지만 내게는 해내야 할 의무가 있다고 말했다. 나는 공자련 위원으로 선출되었고 심지어 대변인이었다. 나는 공자련을 대변해서 계속 말해야 했다. 아마 감옥에 가겠지만, 감수할 만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회사 사람들이 감옥이 아니라 사형을 당할 수도 있다고 말하자, 솔직히 나는 오히려 신났다. 이런 이유로 죽는다면 좋은 죽음이다,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의심할 여지 없이, 많은 학생들도 나와 같이 생각했을 것이다. 공기 중에 영웅주의의 꿈이 만연해 있었다.
6월 4일 탄압 당시에 당신은 어디에 있었나?
6월 3일 오후에 천안문광장으로 돌아왔다. 대중교통이 끊겼기 때문에 걸어서 가야 했다. 며칠 전부터 군대가 투입될 것이라는 소문이 무성했고, 나는 애써 사람들을 진정시켰다. 내가 군에 있어봐서 아는데, 인민을 위해 봉사하는 것이 군대라고 정훈교육을 단단히 받은 병사들이 동포 인민들에게 총을 쏠 리가 없다. 나 자신도 진심으로 그렇게 믿었다. 만에 하나 공격한다 하더라도, 고무탄·최루탄·물대포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군에 그런 장비가 있는지 여부는 확실하지 않았지만. 나중에 군내 인권문제인지를 담당하는 관료 주목지(朱穆 之)가 변명하기로, 군대에 고무탄이 없었기 때문에 실탄을 쓰는 것 외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고 주장했다. 나는 그냥 단순하게, 나와 같은 훈련을 받은 병사들이 인민에게 실탄을 쏘라는 명령을 수행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건 원칙의 문제였다.
저녁이 되자 너무 피곤해졌다. 며칠 내내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해서 천막에 들어가 자는데, 시위를 관찰하러 온 국제사면위원회의 로빈 먼로(Robin Munro)가 나를 깨웠다. 먼로는 굉장히 불안해하면서, 날더러 몸조심하라고 했다. 우리는 두시간쯤 대화를 나누다가, 내가 너무 피곤해하자 먼로가 떠났다. 그러다 또 다른 사람이 나를 깨워서 총을 쏘기 시작했다고, 실탄을 쏜다면서. 나는 믿을 수 없었다. 나는 천막에서 기어나와 하늘에 분홍색 선들이 그어지는 것을 보았다. 고무탄은 그런 색이 나지 않는다. 한 순간, 병사들이 인민에게 총을 쏘느니 허공에 총을 쏘는 것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곧바로 순진한 척 그만 하자고 스스로를 다그쳤다. 다른 사람들이 내게 어째야 좋냐고 물어왔다. 경찰이 광장으로 쳐들어오고 있었다. 나는 뭐라 말해야 할지 몰랐다. 정신이 나가서 완전히 백지 상태였다. 나는 말없이 천막으로 돌아갔다. 육체적으로도 탈진했고, 생각을 할 수 없었다. 다른 사람들이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문서를 소각하는 것을 구경만 했다. 나는 완전히 넋이 나가 있었다.
6월 3일 오후 11시 30분경, 열댓 명 내지 스무 명의 젊은이들이 나를 찾았다며 나타났다. 공자련 동지들이 밀어내려 했으나 그들은 뚫고 들어와서, 날더러 자기들과 함께 가야 한다고, 곧 여기는 피 바다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자기들이 누구인지 밝히지도 않고, 내가 여기 있으면 안 된다고 계속 강권했다. 그러면서 그들은 폴란드 연대노조를 거론하며 나를 레흐 바웬사에 견주었다. 나를 그렇게 중요한 사람처럼 말해주니 솔직히 기꺼웠지만, 내 목숨이 다른 사람들 목숨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되지 않았다. 게다가 도망치면 수치스러워질 것이다. 나는 머무르겠다고 말했다. 결국 젊은이들은 떠났다가, 5분 뒤 다시 돌아와서 이렇게 말했다. “송구하지만 역시 우리와 함께 가셔야겠습니다. 그것이 우리의 의무이고, 당신의 운명입니다.” 아주 힘세 보이는 친구가 다른 젊은이들에게 손짓하자 다같이 몰려들어 나를 들어올려 천막 밖으로 끌어냈다. 그들은 나를 데리고 광장 동쪽으로 가면서――군대는 서쪽에서 진입하고 있었다――내가 총에 맞을까봐 사방에서 나를 둘러쌌다. 정말 감동적인 순간이었다. 광장 서북쪽 귀퉁이에 탱크 한 대가 불타고 있었다. 우리는 공안부 청사를 지나고, 북경반점을 지났다. 북경반점 앞에서, 한쪽 팔이 피범벅이 된 남자가 다른 한쪽 팔로만 자전거를 타고 동쪽으로 가는 것을 보았다. 이 때 시각이 새벽 1시경이었다. 내가 살던 장안가(長安街) 동단(东单)교차로에 이르자 젊은이들이 말했다. “됐습니다. 이제 북경을 뜨십시오. 우리는 광장으로 돌아가 다른 사람들을 지켜야 합니다.” 그리고 홀연히 사라져 버렸다. 그 젊은이들이 어찌 되었는지 지금도 알지 못한다. 광장에서 죽었는지, 다쳤는지, 감옥에 갔는지.
그 다음에는 무엇을 했는가?
내 자전거를 타고 북경을 빠져나가 하북성(河北省)으로 갔다. 내 계획은――내가 한 모든 계획이 다 그렇듯이, 순진한 것이었다. 나는 그때 스물다섯 살에 불과했다――자전거로 최대한 남쪽으로 도망가면서, 가다가 마주치는 농민이나 노동자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한 1, 2년 잠적해 있자는 것이었다. 돈이 한 푼도 없었지만, 지나가는 도시의 학생 지도자들을 만나서――그때 나는 어디에나 학생 조직이 있으리라 생각했기 때문에――도움을 요청할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 나는 사회에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제대로 공부해서, 공장과 농촌의 인민들의 생활을 제대로 알아서, 공산당에 제대로 도전을 제기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도록 제대로 준비를 갖추고 싶었다. 왜냐하면 노동자 스스로도 인식하지 못하는 노동자 조직의 대변인 행세가 부끄러웠기 때문이었다. 광장에서 기자들이 내게 “당신의 조직에 얼마나 가맹되어 있는가? 조합원 수는 얼마나 되는가?” 물을 때마다 악몽 같았다. 대중시위 와중에 우리 공자련이 노동자들에게 다가가자 그들이 공자련은 자기들을 대표하는 어떤 종류의 조직도 아니라고 거부했음을 나는 잘 알고 있었다. 아무도 우리를 따르지 않았고, 아무도 우리를 지지하지 않았다.
이후 며칠간 나는 시골지역을 돌아다니며 밭에서 노숙했다. 어느 수박 농부와 대화를 나누었는데, 나는 그에게 생활·수입, 그리고 진정으로 원하는 게 무엇인지 물으면서, 그에게 민주주의와 정당하게 선출된 정부의 필요성――내가 지난 한 달간 배웠던 것들――에 관해서 말을 붙여 보려고 했다. 하지만 그 결과 이 농부는 공산당에 별 불만이 없다는 것만 깨달았다. 그러다 어느 마을에서 텔레비전을 보고 있는데, 최우선 수배자라고 학생지도자 21명의 사진이 속속 방영되었다. 그들 중 상당수를 알아볼 수 있었다. 그리고 나서 내 사진도 나왔다.
갑자기 내 주변의 우주가 무너져내리는 것 같았다. 물론 내 상황이 심각하다는 것은 알았지만, 이렇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전국을 돌아다니며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정주나 남경의 학생들과 토론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으나, 그것이 불가능함을 깨달았다. 사람들이 모두 나를 쳐다보는 것 같아서 밀짚모자를 눌러썼다. 자전거에 타서 아무데로나 달렸다. 여름 날씨가 너무 덥고 졸려서, 그늘진 강둑이 보이자 거기 가서 누웠다. 누워서 무엇을 할 것인가 생각하기 시작했다. 계속 도망갈까? 그때 천안문광장에서 공자련 선거에 출마했을 때 했던 연설이 기억났다. 나는 먼저 사람들이 모두 내가 누군지 알고 나를 신뢰할 수 있도록 이름과 신상정보를 밝혔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우리가 지금 하는 일은 법적 근거가 있다고, 재판에 회부되어도 방어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럼에도 우리가 감옥에 가게 된다면, 내가 가장 먼저 감옥에 될 것이라고, 그리고 누가 나를 체포하기도 전에 내 발로 감옥에 가겠노라고 말했다. 그런 내용의 연설을 하고 환호를 받았었다. 이제 나는 양자택일에 직면했다. 그 사람들 앞에서 했던 말을 식언하고 거짓말쟁이의 낙인을 받고 정치생명이 끝날 것인가. 아니면 약속을 지킬 것인가.
그래서 나는 북경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서둘러 사람들에게 방향을 물어서――내가 지금 어디 있는지도 몰랐다――북경 으로 돌아가는 길을 달렸다. 이 때 내가 가장 두려웠던 것은, 북경에 도착하기 전에 체포되는 것이었다. 어느 강 위로 놓인 다리를 건너는데, 다리 양쪽에 초소가 있었고 제복경찰들이 초소 밖에 앉아 있었다. 나는 천천히 그들을 지나가면서 휘파람을 불었다. 약 30 미터쯤 지나오자 경찰들이 나를 멈춰세웠다. 출신이 어디냐고 물었고, 북경이라고 대답하자 재미있어했다. 나는 북경의 혼란 때문에 일을 할 수 없어서 몇 주간 고향에 내려가려는 길이라고 말했다. 나는 길을 잃은 척 하고, 산서성 가는 길을 물었다. 열차나 버스가 아닌 자전거로 고향에 가겠다니 수상히 여긴 경찰들은 나를 북경에서 달아난 학생이 아니냐고 을러대며 신분증을 요구했다. 내 신분증은 신발 속에 숨겨져 있었고, 나는 신분증이 없다고 말했다. 이름을 묻자 가명을 지어 댔다. 경찰들이 나를 초소 마당으로 데려가서 가방을 비우라고 요구하고 몸을 수색했다. 그 다음에는 옷을 벗겨서 구석에 세우고 나를 걷어찼다. 이 시점에서 나는 내 존엄을 지키기로 결심했고, 경찰들에게 나를 정중히 대하라고 말했다. 나는 평범한 양민이다. 아무 잘못도 한 것이 없다. 그들이 내 신발 밑창까지 뒤지고 싶었을까――아니면 그냥 나를 쏴죽이고 싶었을까?
경찰들은 진정을 하더니 내게 신발을 신고 옷을 입고 앉으라고 했다. 그런데 경찰들 중 한 명이 작은 수첩을 보더니, 눈이 나를 봤다가, 수첩을 봤다가, 왔다갔다했다. “이 놈하고 닮았는데” 라며 수배자 설명을 읽어내려갔다. 다른 경찰이 “똑바로 서라”고 하더니, 내 키를 수첩의 수배자들과 비교하기 시작했다. 다행히 내 키는 수배자 명단과 잘 맞지 않았고, 그때 나는 머리카락을 짧게 자르고 있었다. 그래서 다른 경찰원이 “아닌 거 같은데” 하더니 결국 내게 물건 챙겨서 꺼지라고 했다. 나는 10 미터쯤 갔다가 다시 돌아가서 다른 초소에서 또 걸리면 통과할 수 있게 증명하는 쪽지라도 써 달라고 했다. 내가 수배자와 닮지 않았다고 말한 경찰이 대답하기를, “됐고 빨리 뛰어서 네 앞가림이나 하라”고 했다. 그 경찰은 내가 누구인지 알아보고 나를 도와준 것이 분명하다.
북경에 안전하게 돌아갔는가?
그렇다. 그 뒤로 큰 어려움 없이 자전거로 돌아왔다. 천안문광장에 돌아와 보니 총을 든 군인들이 보였다. 나는 자부심을 가지고 이제부터 무슨 일을 해야 하는지 생각했다. 나는 공안부 청사 정문에 서 있는 병사에게 다가가서 말했다. “내가 한둥팡(韩东方)이다. 공안부에서 나를 찾고 있다던데.” 병사는 두 걸음 물러서더니――아주 어린 소년이었다――말하길, “어느 부서를 찾으신다고요?” 해서 내가 “아니, 내가 어느 부서를 찾는 게 아니고, 공안부에서 나를 찾고 있다고.” 그러자 병사는 “접수처에 가서 등록을 하십시요”라고 대답하였다. 잠시동안 나는 내 결정에 후회가 되었다. 좀 유명해졌나 싶었는데, 막상 출두하러 와 보니 아무도 나를 못 알아보는 것 같고. 심지어 이름까지 댔는데. 이제라도 다시 쉽게 도망갈 수 있을 듯하였다. 그런데 그때, 내 얼굴을 확실히 아는 사람이 계단을 내려왔다. 그 자를 보자 나는 이것이 나 혼자 문제가 아니고 이 운동 전체의 문제임을 기억해냈다. 그 자는 5월 28일인가 29일인가에 나를 비롯한 공자련 사람들이 광장에서 체포된 노동자 세 명의 석방을 요구했을 때 교섭하러 나온 공안군관들 중 한 명이었다. 그 자가 말하기를, “그래, 자백하러 오셨군. 현명한 선택이야――덕분에 목숨은 구할 수 있을 거다.” 하기에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무슨 소리입니까――자백이라니요? 나는 내가 한 일에 책임을 지기 위해서 온 겁니다. 우리가 한 일이 절대적으로 옳다고 믿으니까요. 병사들한테 일러서 제가 자백한 게 아니라고 기록하게 해 주십시오.”――덕분에 목숨은 구할 수 있을 거다.” 하기에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무슨 소리입니까――자백이라니요? 나는 내가 한 일에 책임을 지기 위해서 온 겁니다. 우리가 한 일이 절대적으로 옳다고 믿으니까요. 병사들한테 일러서 제가 자백한 게 아니라고 기록하게 해 주십시오.”
내가 언성을 높이자 접수처에 구경꾼들이 생겼다. 군관은 내게 소란 피우지 말고 건물 안에서 조용히 얘기하자면서, 어느 방으로 데려가 차를 한 잔 내주었다. 30분 후, 사복조 서너 명이 들어와서 나를 뒷문으로 데리고 나가 차에 태웠다. 동단교차로를 지나 집을 지나치자, 나는 사복들에게 가족들에게 인사를 남기거나 옷을 좀 가져와도 되겠냐고 물었다. 사복들은 “여기가 어디인 줄 알고?” 라고 묵살하고는 나를 포국(炮局) 감옥으로 끌고 갔다. 젊은 무장경찰원 두 명이 나를 벗기고 수색한 뒤 끔찍한 욕을 퍼부었다. 내가 “차라리 그냥 패죽이거나 쏴죽이지 왜?” 라고 말하자 사복들이 무장경찰원들에게 그만하라고 했다. 그들은 내게 “이제 여기가 어디인 줄 알았으니 처신 잘 하라고. 여기선 네 마음대로 할 수 없다. 이제부터 우리 뜻대로 할 것이다”라고 말하고는 감방으로 데려갔다.
그러고 나서 재판받기까지 얼마나 걸렸나?
재판은 없었다. 심문만 계속되었다. 처음 열흘간 그들은 한 가지 목적에만 집중했다. 내게 자백을 받아내는 것이었다. 물론 나는 거부했다. 그들은 내게 정주(정저우)·상해(상하이)·북경에서의 사형집행이 보도된 신문들을 보여주었고, 트럭에 불을 지른 죄로 사형을 선고받은 남자 등과 나를 비교했다. 내가 유발한 피해를 생각하면 천 번은 총살을 당해야 할 것이나, 목숨을 구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있다고, 포기하고 자백하면 된다고 말했다. 그들은 내가 밤낮으로 잠을 못 자게 깨웠다. 하루에 한 시간도 못 잤다. 최악은 한밤중에 잠을 깨워 눈부시게 밝은 불이 켜진 작은 방으로 데려갈 때였다. 그들의 얼굴은 볼 수 없고 목소리만 들을 수 있었다. 방 한구석에 작은 빨간 점이 있었는데, 내 생각에 그건 확실히 카메라였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내가 틀렸음을 내 스스로 인정하고 그것을 자백하는 것이었다. 나는 매번 한 시간만이라도 잠을 자고 싶었다. 잠을 계속 재우지 않으니 수면욕이 정말 절박해졌다. 몇 분이나 지났는지 헤아리면서, 딱 한 번만 더 버티고 항복하자고 스스로 되새기기를 반복하는 것은, 정말 힘든 일이었다. 그러다 보니 어느 날 아침 그들이 말하기를, 나를 구제해 주려고 최선을 다했는데, 나는 목숨 아까운 줄을 모르는 것 같다며, “총맞을 때가 되면 우리를 기억하길 바란다”고 했다. 나는 그들에게 감사를 표하고, 이제 좀 자도 되냐고 물었다. “그래, 영원히 자 버려라”는 답이 돌아왔다. 그래서 결국 나는 한편으로 일말의 존엄을 지켜냈으나, 다른 한편으로 이제 목숨이 날아가게 생겼다. 일종의 공허함이 밀려와서 나는 두려워졌다. 나는 다시 잠을 잘 수 있었고, 푹 잔 뒤 가족들에게 더 잘 해주지 못했고, 죽기 전에 가족들에게 미안함을 표현할 기회도 없어졌다는 죄책감에 시달리며 깨어났다. 이후 한 달 동안 매일, 나는 감방 문이 열리고 그들이 나를 사형장으로 데려가는 상상을 했다. 기자 친구에게 들어서 중국에서 사형이 어떻게 집행되는지 나는 알고 있었다. 땅에 구덩이를 파 놓고, 그 앞에 무릎꿇리고 엎드리게 해서 최후의 모욕을 가한다. 그리고 뒤에서 총으로 쏴 죽이면 그대로 구덩이에 굴러떨어지는 것이다. 죽기 직전 흙바닥에 무릎꿇는 이 순간이 가장 고통스러울 것 같았다. 그러면 이 신세를 어떻게 벗어나야 할까 그것을 상상했다. 궁리 끝에 나는 호송차에서 내리자마자 뛰쳐나가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러면 달리다가 총을 맞아 죽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저들이 나를 바로 쏴죽이지 않고 끝내 나를 붙잡아서 무릎꿇려 죽이려 한다면, 끝까지 발버둥치며 발악하자. 이렇게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자 마음이 좀 편안해졌다. 죽을 준비를 하고 나니 감옥에서의 생활이 지겨워졌다. 체제의 살인기계에 맞서는 내 방식은, 나름대로 간수들의 존중을 받았다. 아무도 나를 때리기는 커녕 건드리지도 않았다. 물론 육체적 구타 이외의 방법으로 고문은 실컷 당했지만.
얼마 뒤 나는 다른 감방으로 이감되어 다른 수감자들 스무 명과 한 방을 쓰게 되었다. 그들 모두 폐결핵 환자였고, 개중에는 간질환이나 피부병이 있는 사람도 있었다. 정말 끔찍했다. 스무 명 모두 각혈을 해댔다. 감옥 부소장이 나를 그 감방에 집어넣기 전에, 나를 무척이나 존중하지만 나는 너무 멀리 갔다고 말했다. 내가 협조라는 말의 뜻을 제대로 몰랐던 것일까? 그때 내가 오직 두려웠던 것은, 병이 옮아서 공산당이 망하는 것을 못 보고 죽는 것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 감방에서 결핵에 걸렸고, 제대로 치료를 받지 못했다. 나는 1990년 봄까지 약 9개월을 거기서 보냈다. 그 뒤에 반보교(半步桥)에 있는 제1간수소[교도소]로 이감되었다. 그러다 그 간수소 자리에 공안부 직원들을 위한 아파트를 짓기로 결정되자 나를 비롯한 수감자 전원이 북경 북부 교외의 진성(秦城)간수소로 이감되었다. 나는 단식투쟁을 여러 번 했고, 정말로 거의 죽을 뻔 했다. 나는 혼자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고, 결국 음식을 먹이는 대로 먹는 수밖에 없었다. 어느 날, 북경의 검찰원에서 사람들이 나왔는데――진성으로 이감되었을 즈음이었다――내가 너무 허약해져서 말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다른 수감자들이 그들에게 필기구를 챙겨 오라고 말해 주었다. 나는 필담으로 그들에게 내가 죽기 전에 사건을 종결하고 싶으면 병원부터 보내 주어야 할 것이라고 써 보였다. 검찰 관리들은 놀라서 그냥 가 버렸다. 한 시간 뒤 간수들이 와서 내 머리를 깎고 감방에서 꺼내 하루동안 점적주사를 놓아 영양을 보충시켰다. 그 뒤에 큰 병원으로 보내졌고, 병원에 2주간 입원하자 좀 회복이 되었다.
1991년 봄, 내 가족들은 내가 석방되기 위해 필요한 서류에 서명할 것을 요구받았는데, 내 몸 상태에 대해서는 듣지 못했다. 가족들은 나와 함께 공원을 산책하려 했으나, 나는 너무 쇠약해져서 일어설 수도 없었고, 한 문장도 제대로 구사하지 못했다. 그때 체중이 90파운드[41㎏]였다. 군병원조차 내 상태에 진단을 내놓지 못했다. 오른쪽 폐가 너무 심하게 손상되어서 돌덩어리처럼 되었다. 오른쪽 폐에 아무 것도 드나들지 않아서, 엑스레이를 찍어도 세균이 보이지 않았다. 미국 보스턴에 소재한 NGO 인권의사회(PHR) 소속 의사 한 명이 북경으로 날아와서 내 엑스선 사진을 보더니, 결핵이 이렇게 한쪽 폐 전체로 번진 사례를 생전 처음 본다고 그랬다. 나는 이후 1년 반동안 치료를 받았고, 폐를 들어내지 않으면 심장까지 결핵이 전이될 것이라는 말을 들었다. 미국노총(AFL-CIO)에서 콜럼비아대학병원에 수술을 주선해 주었고, 1992년 가을 뉴욕행 사증을 발급받았다. 친구들은 중국을 떠나면 두 번 다시 돌아올 수 없을 것이므로 북경에서 수술을 받아야 하다고 했다. 나는 그들에게 내가 지금 무엇을 하는지 알고 있으며――나는 의료사고를 원하지 않았다――1년 안에 돌아올 것이라고 했다.
1년 뒤, 나는 정말로 돌아왔다. 아무에게도 돌아온다고 말하지 않았고, 심지어 아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나는 보스턴에서 헬싱키로 이동해서 국제공공부문노동조합 대표자회에서 연설을 하고, 거기서 홍콩행 편도 비행기표를 끊었다. 아무도 내가 오는 줄 모르는 가운데, 나는 그냥 도착했다. 홍콩행 비행기에서 내린 나는 로빈 먼로에게 전화했고, 먼로는 깜짝 놀라 나를 데려다 란두도(爛頭島)에 숨겼다. 1주일 뒤, 홍콩 관광사증이 만료되었고, 나는 한 홍콩인 친구와 함께 쪽배를 타고 작은 국경마을로 이동했다. 컴퓨터가 내 이름을 기억할 것이라는 생각에――그리고 그 생각이 맞았다――우리는 컴퓨터가 없는 검문소를 통과하기로 했다. 일이 계획대로 잘 풀려서 국경을 넘자, 우리는 버스와 택시를 타고 광주공항까지 직행했다. 하지만 북경행 비행기편이 모두 매진되어서, 친구가 내게 비싼 호텔에 묵자고 제안했다. 그런 데 가면 분명 손님들을 위해 비행기표를 마련할 방법이 있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오리엔트호텔로 갔는데, 이 호텔이 공안부에서 관리하는 곳인줄 나중에야 알았다. 다음날 새벽 4시 30분경 누가 문을 두드리더니, 한 무리의 경찰원들이 쳐들어와 나를 체포했다. 그날 오후에 나는 심천(深圳)의 라호교(罗湖桥)를 통해 홍콩으로 추방되었다.
그래서 홍콩으로 돌아온 뒤에 바로 조직화 작업을 시작한 것인가?
일단 처음 2개월 동안은 중국으로 돌아가려고 여러가지로 시도했다――어찌되었든 내가 태어나고 자라 여권까지 갖고 있는 내 조국이니까. 그때마다 나는 붙잡혀 추방당했다. 한번은 다리 가운데 지점에서 몸이 들려서 홍콩 쪽으로 내던져지기도 했다. 그러다 어느 날, 2주에 한번씩 국경을 넘으려다 붙잡혀 쫓겨나는 장면을 기자들에게 보여줌으로써 중국 정부를 나쁜 놈들로 보이게 하는 것이 내가 할 일이 아님을 깨달았다. 원래 내 목표로 돌아가야 했다. 그 목표는 바로 노동자운동을 창출하는 데 조력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1994년 3월에 중국노공통신(中国劳工通讯, CLB)을 설립했다. 우선 목표는 중국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이야기하고, 노동자들의 삶이 어떠한지 묘사하고, 그리고 노동자들을 조직화하는 노동조합이란 무엇인지 설명하는 주간지를 만드는 것이었다. 이것은 본질적으로 계몽적인 개념이었다. 홍콩에 소재했기 때문에 『노공통신』은 중국어판과 영어판을 함께 발행해야 했다. 그래서 일의 양이 많았다. 대부분이 번역 일이었다. 그러다 보니 점차 월간지로 바꾸게 되었다.
우리는 영어판을 해외 노조 조직들에게 발송하고, 중국어판은 중공 국내의 공장들에 뿌린다. 홍콩의 서점에 가면 매년 개정되는 본토 공장들의 주소록을 살 수 있다. 주소록에는 10만여 개의 주소가 실려 있다. 그 중에 여기저기를 골라서 탐색적인 방식으로 『노공통신』을 발송한다. 공장 내부의 공회 사무실에도 『노공통신』을 발송한다. 이렇게 발송한 것들이 항상은 아니더라도 종종 경찰에 압수당해서 도착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을 것이다. 하지만 개의치 않는다. 경찰원들이야말로 가장 계몽이 필요하다. 1999년인가 2000년 이후로는 인쇄판을 폐간하고 순수 온라인 신문과 e-뉴스레터로 전환했다. 이렇게 하는 편이 더 매력적이고, 더 많은 사람들에게 도달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내가 진행하는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노동자들과 나눈 대화를 받아쓴 것도 그 사안에 대한 내 논평과 함께 온라인에 올라간다. 지금 바로 중국노공통신 웹사이트에 접속해 확인할 수 있다.
당신의 라디오 방송 Labour Express에 대해 설명해 달라.
홍콩이 중공에 반환되기 직전이었던 1997년 3월부터 자유아시아방송(RFA)에서 프로그램을 하나 맡기 시작했다. 격주로 중국의 노동문제에 대해 논평하는 시간을 받았는데, 몇 달 지나서 1997년 연말에 내가 방송국 측에, 중국인 노동자들에게 말을 걸 수도 없는 방송에서 중국의 노동문제를 떠드는 짓을 더 못 하겠다고 했다. 나는 점점 감각을 잃어가고 있었고, 아이디어도 말라가고 있었다. 그래서 내 전화번호를 공개하고, 사람들이 수신자 부담으로 전화할 수 있도록 하자고 제안했다. 아니나다를까, 사람들이 전화를 해오기 시작했다. 집에서 전화를 걸어온 사람들에게는 공중전화로 다시 전화를 해 달라고 요청한 뒤 다시 걸려오면 받는다. 업무시간 이후에 들어온 전화들은 부재중 메시지를 남기도록 해서 다음날 아침 녹음된 테이프를 받아본다. 이렇게 라디오 청취자들과 대화를 나눈 결과 내 글쓰기도 굉장히 실제적이고 구체적으로 되었다. 그러자 나는 이 대화들을 공개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발신자들이 동의하다면 방송에 내보내야겠다고 결심했다. 나는 점점 더 많은 전화를 받았고, 사람들은 매우 기꺼이 대화해 주었다. 우리는 처음부터 소프트웨어를 사용해 발신자들의 목소리를 변조했다. 그들이 곤란해지면 안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내 목소리 변조하지 마세요! 진실을 말하고 싶어요”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갔다.
이렇게 되자 우리는 시위와 파업을 사후 뉴스가 아니라 시사 뉴스로서 다룰 수 있게 되었다. 나는 노동자·관리·공회·경영진 등등의 인터뷰를 망라하는 보고 서를 만들고 있다. 예컨대 1998년에는 임금체불 문제와 퇴직·휴직 노동자의 처우 문제로 많은 쟁의가 있었다. 한번은 가두시위가 벌어졌다고, 관공서 건물 앞의 공중전화로 걸고 있다며, 한 500명 정도 모여 있다는 전화를 받았다. 나는 전화를 되걸어서 그 시위 현장에 있는 사람들과 돌아가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각자 문제가 무엇이고 생활이 어떠한지. 정말 놀라운 경험이었다――마치 그 현장에 기자가 파견되어 현장을 생중계하는 것과 같았다. 전화를 끊고 나서 나는 그 지역의 관리들에게 전화를 걸어 무엇을 할 것인지, 왜 상황이 계속 악화되는지 물었다. 그 다음에는 공회에 전화를 걸어 노동자들을 위해 무엇을 할 것이냐고 물었다. 공회 관료들은 노동자들을 진정시켜 집으로 돌려보낼 것이다, 왜냐하면 노동자들은 경영진과 정부가 어떤 어려움에 처해 있는지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운운, 그렇게 대답했다.
특별히 전화가 자주 걸려오는 지역이 있는가? 예컨대 해안선을 따라 집중되어 있다거나?
그렇지 않다. 사방에서 전화가 걸려온다. 심지어 티베트와 신강에서 걸려온 전화도 있었다. 전화 발신지의 분포는 지역보다는 국영기업의 개혁과 같은 사안에 따라 결정된다. 예컨대 1998-99년에는 흑룡강(헤이룽장)성·감 숙(간쑤)성·귀주(구이저우)성에서 휴직자들의 시위가 대거 있었고, 사천성의 탄전지대에서는 열차 운행이 중단되는 일이 있었다.
중국 전역에서 당신의 방송을 들을 수 있는가?
지역에 따라 다르다. 어떤 곳에서는 신호가 방해되어 사람들이 전화로 불평하기도 한다. 미국이 그 대단한 과학기술을 가지고도 고작 신호방해를 뚫지 못한다는 것을 믿을 수 없어한다. 이 방해전파는 라디오 지방방송국에서 군대가 관여해서 쏘아보내는 것이다. 별 대단한 건 없고 같은 주파수에서 다른 방송, 예컨대 오페라 같은 것을 쏘아서 내 방송을 덮어씌우는 것이다.
이런 보도를 시작하면서 공포가 좀 줄어든 것 같은가?
그렇다. 인민들의 공포가 사라지고 있다. 내 생각에 그 이유는 아무래도, 분노가 자라나서 공포를 가리는 것이다.
라디오 방송과 『노공통신』을 운영하면서 당신의 생각은 어떻게 발전했는가?
정말 많은 것을 배웠다. 너무나도 많고 다양한 사람들과 대화하면서 나는 점점 더 현실적으로 되었고,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점점 더 구체적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아주 어려운 일이었지만, 노동자·경영자·관리들과 통화하면서 공장의 전체 상을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이렇게 되자 내가 이런 문제들에 대해서 논평은 할 수 있지만 해결책은 제공할 수 없음을 깨달았다. 첫째로 내 가 할 수 있는 것이 없었기 때문이고, 둘째로 내가 누구에게도 선출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아무도 대표하지 못한다.
처음에는 시위를 보도하면서 여러 관리들에게 전화를 걸어 내 질문에 대답하도록 압박해서 그들의 입에서 체제의 병폐를 드러내는 멍청한 대답이 나오게 만들기도 했다. 그 짓을 하면서 솔직히 재미도 있었고 성공하는 것도 같았다. 하지만 얼마 지나서 나는 이런 류의 활동으로는 공장의 실제 문제를 해결하는 데 아무 도움도 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예컨대 임금체불 문제를 보자면 이것은 기업의 예산에 달려 있는 문제다. 돈이 없으면, 내가 그들 대신 관료 자리에 앉아 있다고 해도 딱히 어쩔 방도가 없다. 그래서 나는 노동자들이 협상을 통해 평화적이고 합리적으로 쟁의를 해결하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느끼게 되었다. 만약 임금이 9개월치 밀렸는데 정부도 3개월치밖에 줄 능력이 없다면, 아무리 거리에 계속 서 있어도 해결이 되지 않는다. 우선 3개월치를 먼저 내놓고 나머지는 9개월 안에 내놓으라고 협상을 해야 한다. 그런데 이렇게 생각을 하고 보니, 이 협상에 법적 근거가 없으면 정부가 약속을 지키도록 보증할 수단이 없다는 데까지 생각이 미쳤다.
그래서 우리는 노동자들에게 소송을 제기하도록 장려하는 투쟁형태를 발전시켰다. 법률상 노동자들의 급료를 지불해야 하는 정부의 책임은 굉장히 명확하다. 노동부는 체불임금을 지불할 의무가 있을 뿐 아니라, 체불이 발생한 것에 대하여 벌금도 내야 한다. 2년 반 전부터 『노공통신』은 그런 종류의 사안들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있다. 우리는 이제 옆에서 지켜보는 것에 머무르지 않고, 노동자들에게 법률 절차를 설명하고, 사건을 수임해 줄 변호사를 찾으라고 설득한다. 2년 전에 호북성 수주(随州)의 커다란 방직공장에서 노동자 10여명이 시위를 했다가 체포당한 일이 있었다. 이 사람들은 재판도 없이 바로 재교육수용소(再教育營)로 보내졌다. 우리는 북경에서 율사 한 명을 구했고, 그 율사와 함께 지방 공안국에 가서 이것이 위법한 행정결정이라고 주장하여 노동자들을 석방시켰다. 굉장히 효과적인 개입이었다. 이 사안 이후 우리는 “법률 개입 프로그램”을 개발했고, 지금까지 매우 생산적으로 진행되고 있다. 점점 더 많은 율사들이 우리와 협력할 의사를 밝히고 있다. 그들은 딱히 그걸 숨기려고 하지도 않는다. 일종의 전문직으로서의 돈벌이로 생각하는 것 같다.
지금까지 주로 국영기업들을 위주로 이야기했는데, 민간부문에서의 쟁의는 어떠한가?
민간부문은 국내기업과 외국기업으로 나눌 수 있다. 중국 국내기업보다 외국기업을 상대하는 게 훨씬 쉽다. 국내기업은 대부분 과거에 국유기업이었던 것이 민영화된 것인데, 그 사주들은 과거 국유기업 경영진 또는 관료이며, 지방 관리들이 회사의 이윤을 가로채고 있다. 그러므로 이런 경우에는 지방정부 구실아치들과 대결해야 하는데, 그들은 굉장히 보호받는 존재다. 외자 공장의――대만·홍콩·한국 투자자들이 소유한――공장주들도 당연히 관리들에게 뇌물을 준다. 하지만 이 경우 노동법을 들먹이며 관리들이 외세를 비호하여 중국인 노동자들을 등쳐먹고 있다 고 을러대면 이 관리들을 궁지로 몰아넣을 수 있다. 그러니 외국기업이 상대일 때는 압력을 가하기가 훨씬 쉽다.
또한 노동자들의 측면에서 보아도 외국기업의 노동자들이 행동을 개시하기 용이하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들은 대개 농촌에서 올라온 농민공들이다. [참고: 중국 신노동자의 절망과 희망] 이들은 평생 어떠한 보살핌도 받아본 적이 없다. 한편 민영화된 국유기업의 노동자들은 민영화 이전부터 그 기업에서 일해왔다. 민영화가 되면서 임금이 대폭 줄어들기는 했지만, 그래도 어떻게든 국가가 자기들을 보살펴 준다는 감각이 남아 있다. 이 믿음은 찌꺼기 같은 것이지만, 그래도 그들의 자주성을 저해하기에는 충분하다――그들은 뭔가 과감한 일을 벌여서 돌아갈 다리가 끊기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예를 들자면, 몇 년 전에 정부에서 한 공장을 폐쇄하려 한 적이 있었다. 우리는 노동자들에게 소송을 제기하고 조직화하라고 선동했다. 하지만 그 공장의 노동자들은 그러고 싶어하지 않았다. 그들은 겁에 질려 있었고, 기존에 비해 훨씬 불리한 조건들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그 결과 그들 중 대부분이 모든 것을 잃었고, 일자리를 보존한 소수도 엄청나게 열악해진 조건에서 일하고 있다. 이제 와서 싸우고 싶어하지만, 이미 때가 늦었다. 5000 명이 일하던 곳에 이제 300명 밖에 남지 않았으니, 연대를 구축할 수 있는 기반이 사라져 버렸다. 이러다 보니 민영화된 국유기업의 노동자들을 조직하는 것은 실망스러운 경험이 된다. 우리는 외국공장의 농민공들이 중국 노동운동 조직화의 주요 목표가 되 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일단 이 농민공들을 조직화하면, 그들이 민영화된 국유기업들에도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다.
임금체불을 언급했는데, 그 밖에 주로 불거지는 쟁점은 어떤 것이 있는가? 노동조건? 임금? 실업문제는 어떠한가?
애석한 일이나 실업자들을 조직화하는 일은 가망이 없다. 종종 내게 연락해서 부당해고를 불평하는 노동자들이 있다. 그때마다 나는 소송을 제기하라고 권하지만, 그들은 그러지 않고 당국에 탄원하기를 선호한다. 탄원만 하고 또 하다가 결국 완전히 직업을 잃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이미 너무 늦었다. 왜냐하면 그들이 해고에 동의하지 않았다는 법적 기록이 없기 때문이다. 이런 종류의 사안들이 특히 속상한데, 왜냐하면 이들이야말로 가장 가난하고 가장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운동을 건설하기 위해서는, 우리도 어쩔 수 없이 특정한 침투지점을 선별할 수밖에 없다. 물론 우리가 도와줄 수 있는 개별 사안들은 도와줄 것이지만, 『노공통신』은 서비스센터가 아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노동운동을 창출하는 고안자라고 생각하고, 미래의 노동자 보호는 우리가 얼마나 강력한 노동운동을 창출해내느냐에 달려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 우리는 한 사안을 포기하고 다른 사안으로 이행하는 고통스러운 선택을 해야 한다. 두 번째 사안이 보다 집단적 쟁점으로 발전할 가망, 즉 노동자들이 노조 지도자로 성장할 수 있는 대표자를 선출할 가망이 있는 사안이라면, 그렇게 할 수밖에 없다. 법률투쟁은 노동자들에게 자기 공장에서 노조를 형성할 수 있는 용기를 불어넣어주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노조가 만들어지고 대표자가 선출되면 우리는 공회 개혁을 향해 중요한 한 걸음을 내딛게 된다. 우리는 공회를 없애버릴 생각은 없다. 유용한 껍데기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노동자들의 참여를 늘려가며 공회를 내부에서 변혁시켜야 한다. 일단 공장 수준에서 노동자들이 선거를 밀어붙이면, 무책임한 공회 관료들을 탄핵하고, 소송을 제기하고, 많은 것들이 가능해진다. 우리는 노동자들에게 법률 교육을 제공하고, 노조를 조직하는 방법을 알려주고, 선거 절차 준비·조합원증 제작·인민들과의 연락 유지를 도와준다.
동시에 우리는 확고한 법적 근거 위에서 모든 활동을 하기 때문에, 지역 공안경찰도 이 노동자들을 함부로 할 수 없다. 우리는 노동자들에게 당신들의 쟁의를 돕고자 하며, 당신들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모두를 위한 것이기에 그것을 해결하고자 한다고 설명한다. 그래서 경찰이 우리에게 무슨 숨은 꿍꿍이가 있는지 노동자들에게 아무리 캐물어도 우리에게 불리할 것이 없다. 최근에 섬서성 함양(咸阳)에서 49일간 방직공장 파업이 있었다. 대부분의 노동자들이 여성이었다. 나는 노동조합과 노동법을 강조하며 그들을 위해 선거절차를 짜 주었고, 북경에서 변호사를 찾아 주선해 주었다. 그런데 파업 지도자들이 체포당했다. 한편으로 나는 그들이 요양(辽阳)의 노동자들과 같은 대우를 받지는 않을 것이라고 확신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생각되기를, 맙소사, 사실상 내가 이 사람들을 감옥에 보냈구나, 싶었던 것이었다. 그들은 3개월 뒤 석방되었다. 이 사건 이후로 우리는 가장 실제적인 노동쟁의와 구체적인 쟁점에 집중해야 한다는 교훈을 얻었다. 함양의 공장은 홍콩의 화윤그룹(华润集团)이라는 지주회사가 사들였는데, 이 회사는 국가를 뒷배로 가졌다. 그들은 노동자들에게 아무 것도 변함이 없을 것이고, 모두들 장기간 근로계약을 할 것이라고 약속했다. 그러나 구매 계약이 끝나자마자 노동자들은 최장 근로계약 기간은 3년이고, 6개월 견습기간을 거쳐야 한다는 통보를 받았다. 이미 20년을 근속하며 더 숙련될 것도 없는 숙련공들이 견습 신세가 되어 기존 급료의 60%만 받게 된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항의하기 시작했고, 이에 사측이 공장 문을 잠가걸고 생산을 완전히 멈추었던 것이다. 지금 그들은 계속 일하고 있다. 해고되지 않았다.
얼마 전에 길림성의 한 탄광촌의 소학 교사가 내게 수천 명의 광부들을 대신해서 전자우편을 보내왔다. 그는 인터넷에서 내 글을 읽었고, 노동자들을 조직해야 한다는 것에 전적으로 동의한다고 했다. 그래서 내 글을 다운받아 인쇄해서 광부들 사이에 유포했다. 광부들은 합법적으로 조직화될 수 있다는 생각에 흥분하였으나 구체적인 절차를 몰라서 내 도움을 받고 싶어했다. 이런 것들이 바로 내가 집중하고자 하는 사안들이며, 나는 이 사안들을 지극히 신중하게 다루어야 할 것이다. 중국의 인민들은 문화대혁명과 6.4 천안문을 경험했다. 그리고 6월 4일 이후 중국은 암흑에 잠겼다. 인민들은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으나, 왜 자신이 두려워하고 있는지 설명하지 못하고 있는 상태다. 나는 이해할 수 없거나 이유를 찾을 수 없는 공포가 최악의 공포라고 생각한다. 일단 이유를 알게 되면 그 공포에 맞설 수 있다. 노동자들에게 법률지원을 제공함으로써, 우리는 두려워할 이유가 없으며 그들이 추구하는 모든 것에 희망이 있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
각급 공회들이 모두 노동자가 아니라 사측을 위해 활동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정확한 것인가?
그렇다. 그것이 어디에서나 적용되는 절대적 진실이다. 대부분의 경우 공회의 구실아치들은 경영진의 일부다.
당신의 전략은, 노동자들이 충분한 자신감을 갖고 그 자들을 쫓아내고 진정한 대표자를 가져야 한다는 것인가?
예전에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사람들이 겁에 질려 있는 한 그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또한 나는 기술적 절차를 알지 못한다. 뿐만 아니라 내가 노동자들과 대화하면서 노동법이 이러쿵 공회법이 저러쿵 이야기를 해도, 노동자들은 노조 선거를 하기보다 특정한 사안에만 집중하고 싶어한다. 나는 그들에게 노조 선거가 그 사안과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는 것임을, 당신들의 투쟁을 보다 합법적으로 만들어주는 것임을 설득부터 해야 한다. 하지만 우리는 더 많은 노동자들이 공장 조직화 선거에 참여하면 공회 체제에 실제적 압력이 가해질 것이라고 믿는다. 노동자들을 대표하지 못하는 공회 주석[위원장]은 쫓겨날 수도 있게 되는 것이다. 노동자들의 운명을 진심으로 동정하는, 현 체제 내에서 가장 선량한 사람들조차도 무언가를 조직하는 훈련을 받아본 적이 없다. 노동자들을 어떻게 대변해야 할지 알지 못하는 것이다. 한편, 법률투쟁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감을 길러주는 것이다. 집단적 자신감이 생긴다면, 절차상 실수를 좀 해도 괜찮다. 교훈을 얻고 교정하고 나아가면 된다. 하지만 자신감이 없으면 시작조차 할 수 없다. 그래서 이 노동자들에게 법률지원과 율사들을 제공하는 것이 굉장히 유용하다. 마침내 단단한 땅 위에서 걸어갈 수 있게 된 것이다.
당신이 말하는 것을 듣자니, 노동자들이 법원에 대한 신뢰를 가질 수 있다는 함의가 있다.
충분히 많은 노동자들이 모일수록, 법원이 법률에 반하는 결정을 내리기는 더 어려워질 것이다. 물론 그들은 충분히 법률에 반하는 결정을 내릴 수 있다.
노동자들이 임금 인상을 위해 파업하는 경우도 있는가? 다른 나라에서 그것은 정상적인 일이다.
요즘 들어 점점 더 많이 일어나고 있다. 심천 일대에서는 사실상 매일 여기저기서 파업이 일어나고 있다. 노동시간 단축, 임금 인상, 노동조건 개선 등을 요구하는 파업들이다. 이것이 바로 노동계급의 본성이며, 『노공통신』이 있든 없든 그들은 결국 깨어날 것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집단적 자신감을 획득하는 여정을 단축하여, 노동자들이 더 적은 대가로 그것을 얻을 수 있도록, 패배할 수밖에 없는 절망적인 싸움은 피랄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전화를 걸어오는 사람들은 늙은이가 많은가, 젊은이가 많은가?
섞여 있다. 어디서 일하는지에 따라 다르다. 민영화된 국유기업의 노동자들은 아직 은퇴하지 않은, 40-50대 중장년층이다. 그들은 아직 일자리가 필요하고, 그래서 투쟁하고 싶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른다. 지금 우리가 집중하고 있는 사안은 심천(선전)·광동(광둥) 일대의 외국기업 공장들에서의 직업병 문제다. 임금을 위해 투쟁하는 것은 마치 기본보다 더 많은 것을 요구하는 것처럼 들릴 수도 있지만, 노동조건이 열악해서 사람들이 병에 걸리는 곳에서는 기본보다 못한 상태를 개선하라고 요구하는 것이 된다. 그래서 우리가 이 문제로 지방 노동국에 책임을 요구하면, 기자·변호사·판사, 심지어 다른 지역의 정부 관리들에게도 많은 동정을 살 수 있다. 이런 사안들을 통해서 우리는 모든 것을――결사의 자유・단체교섭・노동법・공회법・기본적 인권 등등을――설명할 수 있다. 모든 것을 구체적 술어로 분석할 수 있다. 우리는 법체계를 이용하기 때문에, 누구도 이 노동자들을 반대할 수 없다. 우리가 버티는 한, 우리는 파괴될 수 없다.
당신의 전략은 집단적 자신감을 구축하기 위한 방어적 성격의 준법투쟁에만 모든 것을 걸고 있다. 하지만 중국의 보통 사람들이, 노동자건 농민이건, 취직자건 실직자건, 그들이 법적 정의의 문제만큼 사회 정의의 문제를 열정적으로 감지하고 있지는 않은가? 경제적 불평등이 엄청나게 증가하고, 농민들은 토지를 압류당하고, 부패한 관료·사업가·여피족들이 배를 불리고 있다. 어떻게 이로 인한 분노가 억압적인 국법의 테두리 밖으로 대중적으로 폭발하여, 그 법 자체를 반대하는 투쟁으로 이어지지 않으리라 기대할 수 있겠는가? 만약 인민들의 의분이 끓어넘치면, 당신은 그들에게 현상유지를 해야 하니까 조용히 있으라고 할 것인가?
현재 중국의 인민들이 법적 정의 못지않게 사회 정의에 대한 관심이 강해진 것은 맞다. 하지만, 우리가 지금 이런 접근법을 취하고 있다고 해서, 우리가 한가지 이해만 하고 다른 것은 이해하지 않도록 배제하고 그런 것이 아니다. 중국 근현대사에서 사회적 문제들을 사회 적 수단으로 해결하고자 하는 시도들은 순환적인 패턴으로 거듭해서 일어났다. 단순히 과거에 그랬다는 것이 아니라, 현재도 그 패턴 위에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그것이 일어나기 위해 누군가 사람들을 밀어붙이거나 동원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특별한 동원 없이 때가 되면 일어나게 되어 있다. 우리가 『중국노공통신』을 통해 기여할 수 있는 것은, 전통적인 봉기무장투쟁・혁명과는 다른, 그것과는 다른 사유의 노선을 제시하는 것이다.
우리의 접근법은 폭발적 사회문제가 터졌을 때 중국 인민들에게 더 많은 선택지가 있을 수 있도록 그것을 제공하는 것이다. 수만 명을 길거리에 모으는 집회를 믿을 것인가, 변호사의 법률상담을 믿을 것인가? 대부분의 중국 인민들은 후자보다 전자를 믿을 것이다. 이건 단순히 근현대사의 일부분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피에 새겨진 것으로서 오늘날의 우리 현실을 지배하며, 어쩌면 내일의 현실마저도 지배할 것이다. 그러니 전자의 방법론에 있어서는 우리가 굳이 나서서 뭘 할 것도 없다. 중국의 역사에 부재했던 것은 민중봉기가 아니라 공정한 법제도와 법치주의였다. 이것들을 창출하려는 시도가 지금까지 성공했던 적이 없다. 그리고 우리가 지금 시도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현존하는 사회 문제들을 현존하는 법체계를 통해서 해결하고자 시도하는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인민들이 평화적 협상에 대한 신뢰를 가질 수 있도록 장려하는 문화적 기획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장래에 조국이 보다 건전하게 발전하기 위해서도 이런 류의 자신감은 필요한 것이다. 인민들이 “지속가능한 발전”을 이야기할 때, 그 말뜻에는 정부가 법률에 의해 규제되는 사회, 권력을 남용한 정부가 처벌을 피할 수 없는 사회가 포함되어야 한다. 또한 인민들은 자신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협상하는 기술을 학습해야 한다. 그 기술은 인민이 자기 공민권을 위해 투쟁할 때도 법적 지렛대로 사용될 수 있을 것이다.
이 모든 것이 근현대 “구(舊)”중국의 사회혁명 개념에는 없는 수단들이었다. 불행하게도 그것들은 오늘날의 중국에 아직 뿌리를 내리지 못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들을 발전시키고자 노력해야 한다. 비관적으로 말하자면, 이것은 거의 불가능할 줄 알면서도 해야 하는 그런 것이다. 노력을 위한 노력이다. 물론, 나는 중국의 보통 사람들이 사회적 부정의에 항의하기 위해 거리로 나설 때 그들을 비판하거나 말리지 않을 것이다. 나는 대중시위에 반대하지 않을 뿐 아니라, 중국공산당이 말하는 “사회안정”을 보위할 의무도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인민들에게 거리로 나오라고 선동하지도 않을 것이다. 나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그밖에 다른 선택지도 있음을 보여주고자 노력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