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콩 청년들의 농민 연대 | 2009년 채원촌 철거 반대운동

홍콩 청년들의 농민 연대 | 2009년 채원촌 철거 반대운동

이 ‘밧링호우’ 세대가 적극적으로 사회운동에 뛰어들고 지금까지 이어져 단체들을 조직하게 된 것은 2008년부터 벌어진 채원촌(菜園村) 철거반대운동이 주된 계기였다.

2024년 1월 15일

[동아시아]홍콩동아시아, 홍콩, 대중시위, 사회운동, 농촌, 홍콩항쟁

홍콩의 사회운동은 2014년 우산운동2019-2020년 범죄인 송환조례 반대운동(홍콩항쟁)이 크게 주목받았지만, 그 이전에도 홍콩 사회의 모순을 극복하려는 저항의 움직임들이 있었으며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현재 홍콩 시민사회는 감시와 탄압 속에 쉽지 않은 상황에 놓여 있다. 2019-2020년 운동 과정을 주도했던 청년 활동가들은 해외로 떠나기도 했고, 강한 반중 정서로 인해 ‘홍콩 민족주의’를 지향하는 부류도 있다. 하지만 그 전부터 운동을 이어왔고, 지금도 사람들을 만나며 어려운 상황에서 활동하는 좌파 활동가들은 80년대에 태어난 이른바 '밧링호우(八零後)' 세대가 많다. 그들은 2014년 우산운동 이전부터 사회에 목소리를 내왔다. 이 ‘밧링호우’ 세대가 적극적으로 사회운동에 뛰어들고 지금까지 이어져 단체들을 조직하게 된 것은 2008년부터 벌어진 채원촌(菜園村) 철거반대운동이 주된 계기였다.

채원촌 사건의 전말

홍콩은 크게 남쪽의 홍콩섬, 홍콩섬과의 사이에 바다를 마주한 있는 구룡반도, 그리고 북쪽 가장 외곽인 신계(新界, New Territories)로 이루어져 있다. 구룡반도 남쪽과 홍콩섬을 할양받아 통치하던 영국은 1898년 2차 북경조약으로 신계지역을 99년간 조차했다. 신계 지역은 영국 식민 지배에 대한 무장 항거가 활발했던 곳으로 영국과 중국 간의 군사 ˑ 정치 완충지대로서의 역할을 하여 영국은 신계 지역에 대해 기존 홍콩과는 다른 특수한 통치를 시행했다.

신계지역 주민들은 토지와 전통관습 문제에 대해 중국ˑ영국ˑ홍콩 정부와 교섭을 진행했다. 이 과정에서 ‘원주민(原居民)’ 개념과 정옥권(丁屋權) 제도가 등장했다. ‘원주민’은 ‘그 지역에 본디부터 살고 있는 사람들’이라는 사전적 의미보다는 특정 조건을 충족할 때 생기는 ‘신분’에 가까웠다. 영국 식민정부는 신계 지역에 1898년 이전부터 살던 주민에게만 집을 지을 수 있게 허용하는 특수한 권리인 정옥권 제도를 1972년 시행했는데, 그 권리의 주체로 규정된 것이 ‘원주민’이었다. 정옥권을 부여받은 ‘원주민’들은 청나라 시기에 보장받았던 토지가 영국 식민정부의 조차지로 바뀌어버린 데 대한 배상이라고 주장했다. 이런 합의가 이뤄진 것은 식민정부가 1967년 반영 폭동 이후 대대적인 신계 개발을 추진함에 있어서 신계지역 주민들의 지지를 얻기 위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 규정에서 원주민은 1898년 7월 1일 신계지역 촌락에 살던 조상의 부계 자손으로 한정된다. 토착 전통과 관습을 보호받는다는 명분이었지만, 철저히 남성 위주의 관습에 국한되었고, 토지는 부동산 개발에 따른 이윤을 위한 수단으로 전락했다. 원주민들은 실제로 주거할 집을 짓는데 권리를 활용하는 것이 아니라, 재개발로 이윤을 얻고자 하는 부동산 개발업자들에게 자신들의 권리를 팔았다. 또한 직접 농사짓는 것이 아니라 타인에게 땅을 임대해주어 임대료로 수익을 얻고자 했다. 농지를 임대해 농사를 짓다가 부동산 개발상에 팔려면 번거롭기 때문에 아예 토지를 방치했고, 이는 신계지역의 환경 파괴 문제로 이어지기도 했다.

채원촌 철거 반대운동은 2011년 중국 대륙의 광저우-선전-홍콩 간 고속철도(廣深港高速鐵路)의 홍콩 구간을 건설한다는 명목으로 강제 철거 및 이전의 대상이 된 채원촌을 지키기 위한 대학생, 활동가, 지역 주민들의 투쟁이었다. 채원촌에는 40여년 간 돼지를 기르고 야채를 키우는 등 농업으로 생계유지를 해온 약 500명의 주민이 살고 있었다. 이들은 정옥권을 보장받은 원주민이 아니었기 때문에 의사결정 과정에서 배제되었다.

채원촌 철거 반대운동의 과정

2008년에 처음 채원촌 철거 이야기가 나온 후 2009년, 채원촌 철거반대를 지지하는 시민들이 모여 ‘채원촌 지원조(菜園村支援組)’를 조직하였다. 대학생 등 청년들이 대다수로 구성된 지지자들은 채원촌에 들어가 순찰수비대를 결성했고 철거를 위해 동원된 불도저를 온몸으로 막았다. 마을 주민, 정부 부처와 끊임없이 회의하고 면담했으며, 입법회 청사 앞에서 마을 주민들과 시위도 전개했다.

2009년 채원촌 주민들과 연대자들은 홍콩노총(직공맹, 職工盟)이 빅토리아 공원 축구장에서 주최한 노동절 집회에 참가하기도 했다. 이날 집회는 「금융위기 해결, 착취 반대, 생계보장(抗海嘯、反剝削、撐飯碗)」를 요구로 내걸었다. 해당 집회에는 수십 개의 사회단체와 수천여 명의 사람들이 참가했으며, 필리핀·태국·네팔 등에서 온 이주노동자들은 「우리는 노예가 아니다, 우리는 노동자다!(We are workers, not slaves)」라며 노동자로서의 권리 보장을 요구했다.

당시는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로 인해 홍콩에서도 해고의 물결이 일면서 많은 노동자들이 일자리를 잃은 시기였다. 노동자들은 정부에 일자리 창출을 요구하는 것 외에도, 풀뿌리 노동자와 가족의 기본적인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 최저시급 33홍콩달러 이상을 보장하는 최저임금 법안 상정을 요구했다. 이 해에 처음으로 남성 성노동자들이 노동자성과 생존권에 대한 사회적 관심을 얻기 위해 집회에 동참하기도 했다.

채원촌 주민들은 직접 재배한 꽃과 화분을 들고서 밀짚모자를 쓰고 지게를 진 채 행진에 참가했다. 그들은 「강제 이전 반대! 강제 철거 반대!(不遷不拆,不搬不移)」를 외쳤다. 홍콩의 독립언론 ‘Inmedia HK’에 따르면 당시 81세의 한 주민은 발언을 통해 홍콩 정부가 450억 홍콩달러를 들여 광저우-선전-홍콩 고속철도 홍콩 구간을 건설하면서 제대로 된 소통없이 채원촌의 농지를 철거하는 것에 대해 항의하고, 시민들과 끝까지 투쟁할 것을 다짐했다.

“수십 년 동안 채원촌에서 살아왔고, 이곳은 나만의 향기로운 꽃밭이며, 우리는 이사하지 않을 것입니다.”
“정부는 우리의 아름다운 고향에 고속철도를 건설하려 하고 있습니다. 충분한 소통없이 강제로 이주 당하는 것입니다. 우린 부당하고 불공평한 대우를 받고 있습니다.”
2009년 홍콩 노동절 집회에 참가한 채원촌 주민들
2009년 홍콩 노동절 집회에 참가한 채원촌 주민들

채원촌 철거 반대운동은 2009년 중반부터 2010년 초까지의 고속철 반대 운동으로 이어졌다. 채원촌 지원조는 다른 단체들과 함께 ‘반고속철도 대연맹(反高鐵大聯盟)’을 결성했다. 시민들은 채원촌의 강제 이주 뿐 아니라, 비용·소음 공해·세관과 국경 통제의 복잡함, 그리고 기존 철도 연결의 반대 등 다양한 이유로 이 운동에 참여했다.

2009년 11월 29일, 고속철도 건설에 반대하는 1,000여 명의 사람들이 센트럴에 위치한 정부 청사 앞에서 연좌 시위를 벌여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12월 18일에는 입법회 재무위원회에서 자금 지원 신청에 대한 논의가 진행되었는데, 약 1~2,000명의 사람들이 입법위원회 건물 주변에서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당일 토론은 보류되었고, 자금 지원은 확정되지 않았다. 그리고 새해가 지나 2010년 1월 1일, 홍콩주재 중국 연락판공실(中聯瓣) 건물을 에워싼 시위대는 고속철도 반대와 함께 정치 개혁, 중국의 반체제 인사인 류샤오보(劉曉波) 석방 등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다. 참고로 류샤오보는 1989년 천안문 항쟁 이후 20여년 간 중국의 민주화를 위해 장기간 비폭력 투쟁을 벌인 상징적인 자유파 인사다.

채원촌 주민들과 시위자들이 포함된 한 시민 무리는 1월 5일부터 8일까지 티베트 순례자들을 모방한 고행을 진행하기도 했다. 3일간 매일 15시간씩 진행됐으며, 스물여섯 걸음마다 무릎을 꿇고 절을 하는 26보1배의 형식이었다. 이는 고속철도 홍콩구간이 26키로미터임을 상징했다. 시위대는 1월 15일부터 16일까지도 비슷한 방식으로 입법회 건물 주변을 걸었다.

이후 4주 동안 홍콩 입법회 회의실 안팎에서 일련의 논쟁들이 벌어졌다. 1월 15일에는 수백 명의 젊은 시위대가 정부 청사 정문으로 몰려들었다. 1월 16일 오전, 입법회 건물 안에서도 토론과 함께 시위가 이어졌다. 주최측에 따르면 약 10,000 명의 사람들이 함께 했고, 경찰은 1,700명으로 추산했다. 약 1,200명의 경찰이 동원됐다. 이렇게 많은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이틀 연속 입법회를 포위한 것은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18시경 예산 승인 직전에 한 그룹이 입법부 건물을 습격하려고 시도했지만 경찰에 의해 차단되었다. 그 후 경찰은 시민들에게 후추 스프레이를 뿌리고 시민들은 비닐로 얼굴을 보호하는 등 공권력의 폭력도 발생했다.

시민들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홍콩 입법회가 25시간에 걸친 마라톤 회의 끝에 16일 오후 669억홍콩달러(9조7천억원) 규모의 고속철도 예산을 찬성 31표, 반대 21표로 처리함으로써 시위대의 예산안 입법저지 투쟁은 일단 실패로 끝났다. 피해주민에 대한 정부의 20억 홍콩 달러 보상안은 범민주파 의원들이 항의하며 퇴장한 가운데 30대 0으로 승인되었다.

홍콩 선거제도의 모순이 드러나다

고속철도 반대운동에 함께 한 활동가들은 건설에 찬성하는 일부 의원들이 이 프로젝트에 이해관계가 있다는 걸 밝혀냈다. 예를 들어 이미 고속철도가 지나가는 역 위에 있는 부동산에 입찰할 의사를 밝힌 ‘더 워프’의 이사 중 둘은 직능 선거구 회계 분야의 첸무보와 도매 및 소매 분야의 팡강이었다. 부동산·건설업계의 섹라이힘, 재계의 람킨펑, 엔지니어링 업계의 호충타이도 고속철도 사업 입찰에 관심이 있는 두 회사의 연봉을 받는 이사들이다. 세 사람 모두 2009년 12월 8일 재무위원회에서 이뤄진 두 차례 표결에서 찬성표를 던졌다.

고속철도 예산안 찬성 31표 중에는 정부 제안이라면 하나같이 찬성해 ‘철권표’라고도 불리는 친정부 진영(건제파)과 직능 선거구 의원들이 모두 포함되어 있었다. 고속철도 반대 활동가들은 이 투표를 통해 입법위원회 직능선거구 의원과 일부 인프라 프로젝트 간의 이해 상충을 폭로했다. 개헌 논의와 맞물려 지역 사회에서 직능 선거구 유지 또는 폐지에 대한 논의가 더욱 활발해지기도 했다. 당시 선거제도 하에서 직능 선거구는 60석을 직접 선출된 의원과 똑같이 나누지만, 직능 선거구 30석 중 23석은 개인 유권자가 없고 모든 유권자가 기업 또는 법정 기관의 대표인 ‘선순위 투표’ 방식으로 선출했다. 고속철도 찬성론자들은 직능 선거구가 노동계와 산업 및 상업 부문의 전문적인 견해를 포함하고 자본주의 사회의 경쟁력을 촉진할 수 있기 때문에 ‘지역 사회의 다양한 부문의 이해 균형을 맞출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직능 선거구는 특권 계급과 같아서 여론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고 공익과 직업적 존엄성을 수호하는 데 재능을 충분히 발휘하지 못하며 이는 정치 시스템의 종양으로 인식됐다. 정부가 서구룡(West Kowloon)을 개발하기로 결정한 만큼 앞으로 서구룡에서 부동산 프로젝트가 잇따를 것이 분명했다. 서구룡을 고속철도의 종착지로 사용하는 것은 명백히 부동산 개발업자에 유리하게 편향된 것이고 정부와 기업 간의 결탁이 의심됐다. 그 때문에 당시 고속철 반대 집회에서는 ‘고속철 반대’와 ‘채원촌 보호’라는 구호 외에 ‘직능선거구제 반대’ 구호가 가장 많이 들렸다. 이는 당시 새로운 사회운동의 시작으로도 평가되었는데, 집회에 참여한 시민 1만여 명 중 상당수는 기존 정치 체제에 대한 절망과 직능 선거구제를 없애고 보편적 보통선거를 실현하겠다는 희망이 있었던 것이다. 인터넷 상에서도 ‘이제부터는 고속철도 반대가 아니라, 건제파를 타도하는 게 목표’라는 여론이 일기도 했다. 고속철도 반대 운동은 새로운 세대에게 입법회 자금 조달이 단순히 재정적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해주었고, 현행 의회 시스템의 부조리함을 깨닫게 해주었다.

투쟁은 패배했지만

많은 저항에도 결국 마을 철거는 결정되었다. 주민들은 근처에 새로운 땅을 찾아 농사지을 수 있게 해달라고 요구했다. ‘채원촌 지원조’ 청년들은 ‘채원촌 생활관’을 만들어 농사와 향촌 생활에 대해 알렸다. 또한 철거되어가는 논밭 위에서 문화예술계와 함께 대형 ‘폐허 예술제’를 열어 수천 명의 시민이 참여했다.

채원촌 주민들은 2010년 1월 말까지 정부의 특별보상을 받을 수 있었지만, 보상받은 뒤에는 1개월 이내에 전출해야 했다. 이후 주민들은 이전과 철거를 주장하지 않고, 정부가 채원촌을 새롭게 세울 것을 요구했다. 이런 과정에서 특별보상금 등록기간이 2010년 2월 28일까지 연장되었고, 모든 마을 사람들은 기간 전에 등록했다. 그러나 정부는 초기에 보였던 긍정적인 반응과는 달리 새로운 채원촌 건설에 대해 소극적이었다. 그리고 2010년 10월부터 예정대로 고속철도 건설을 시작하면서 충돌이 속출했다.

2011년, 철거가 시작되자 폭력적인 강제 집행도 잇따랐다. 마을에서 저항하던 주민과 연대자들에게 물을 끼얹는 사건도 있었으며, 한 여성 노인이 몸으로 짓눌리기도 했고, 철거 작업을 저지하려다 두피 화상을 입는 경우도 있었다. 경찰에 의해 밀려 허리뼈를 다치거나 대나무 가지에 부딪혀 허벅지에 찰과상을 입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

당시 홍콩노총 리척얀 사무총장은 이에 대해 경찰의 법 집행의 기준에 의문을 제기했다. 1월 24일 경찰은 20대가 넘는 경찰차와 약 250명의 기동부대를 마을로 출동시켰고, 홍콩철로유한공사(MTR)는 200명에 가까운 건설 용역들과 보안원을 보내 채원촌의 임시 사무실 밖에 펜스를 세웠다. 마을 주민과 연대자 수십여 명은 펜스를 세우는 것을 막고 작업 중단 그리고 MTR과의 대화를 요구했다. 오후 2시 MTR 관료가 현장에 도착해 마을 주민과 협상하려고 했으나 결렬됐고, 곧바로 80명에 가까운 경찰이 추가로 파견됐다. 70~80명의 주민과 연대자들이 경찰에 의해 봉쇄됐는데, 대학생들은 경찰에 의해 끌려갔으며 경찰이 추가 투입돼 돌진하자 마을 주민들은 넘어져 다쳤다.

경찰이 인간 벽을 세워 주민들과 ‘채원촌 지원조’ 활동가들을 봉쇄하고 있다.
경찰이 인간 벽을 세워 주민들과 ‘채원촌 지원조’ 활동가들을 봉쇄하고 있다.

투쟁은 패배했지만 이 운동에 함께 청년 일부는 2011년 ‘토지정의연맹(土地正義聯盟)’이라는 단체를 만들어 홍콩인들에게 토지에 대한 관심을 촉구하는 활동들을 지속했다. 토지정의연맹은 관료들과 자본, 그리고 ‘원주민’끼리의 논의로만 결정되는 신계 지역의 정치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토지 초등학교’ 여름 캠프를 개설하여 아이들을 교육했고, 지역 신문을 만들었으며, 지역의 농산물을 소비하자는 운동을 벌였다. 심지어 그들 중에는 신계 지역에 직접 거주해 뿌리를 내리고 농사지으며 살기를 선택하는 사람들도 생겨났다. 이는 신계 내 ‘비원주민’ 마을이 더 이상 정부와 부동산 개발업자들이 도살하는 양이 되어선 안되며, 스스로의 존엄을 지키기 위해 싸워야 한다는, 채원촌 철거 반대 운동을 관통한 핵심 주장을 실현하기 위한 전략이었다.

홍콩 언론 ‘HK01’의 보도에 따르면, 당시 고속철도 반대 운동에 연대했고 농촌운동을 지속하고 있는 한 활동가는 고속철도 반대운동을 이렇게 평가했다. 투쟁 과정을 거치며 더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농촌문제에 관심을 갖게 했다고. 그는 더 많은 청년들이 농촌으로 이주하여 농업에 종사하는 것은 개발로 인해 농촌 주민들이 내쫓기지 않게 하는 방법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활동가이자 정치인 에디 추(朱凱廸) 역시 신계에 정착해 주민들의 지지를 얻어 2016년 입법회 선거에서 토지정의연맹 소속으로 출마했고, 당시 최고 득표로 당선되기도 했다.

토지정의와 먹거리

또한 채원촌 강제철거 반대 운동은 홍콩인들이 ‘토지’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시작하게 했다는 의의가 있다. 대륙의 개혁개방으로 싼 농산물이 수입되면서 신계 지역의 농지는 원래의 쓰임보다 개발과 투기를 위한 도구로서 방치되었다. 하지만 채원촌 운동을 통해 토지가 자본의 이익을 위한 것이 아닌, 삶의 존엄을 위한 자원으로 재인식될 수 있었다. 새로 등장한 토지정의 운동은 부동산 패권 타도, 시민의 주거권 수호, 홍콩 농업의 회복을 통한 도시와 향촌의 공존, 모든 층위에서의 민주 실현을 목표로 내세웠다.

토지정의운동은 홍콩의 식량 자급률 문제와도 연결된다. 홍콩 정부의 쌀 저축분은 15일분에 불과하다. 홍콩 식품안전부(食物安全中心)에 따르면 식량 자급률은 2000년대에 급속도로 낮아져 2016년 기준 7%였다. 야채 자급률은 2019년 기준 1.6% 밖에 되지 않는다. 게다가 현재는 유휴 농지의 대부분이 신계지역 원주민과 부동산 개발업자들의 소유가 됐다. 이 유휴 농지들은 자본의 수단이 아니라, 홍콩의 식량자급률을 높일 수 있는 실제 ‘농지’로 활용되어야 할 것이다.

이 운동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필자가 자주 방문해 야채를 사곤 하는 ‘궈빈(gwobean, 果邊)’에서는 매주 일요일 3~7시 신계 지역에서 생산된 홍콩 농산물들을 받아 팔고 있다. ‘궈빈’은 홍콩에 기반을 둔 “크리에이티브, 아티스트, 작가, 농부, 강사 그리고 꿈꾸는 사람들의 그룹”이다. 일반 마트에서 판매하는 중국산 야채들보다는 값이 더 나가지만, 지역 농산물을 구매함으로서 계속되는 신계 지역 개발로 퇴거 위기인 농부들과 연대할 수 있다. 그리고 유기농이라 건강에 도움이 되며, 경험상 도심의 마트에서 파는 야채보다 훨씬 맛있다.

'궈빈' 스튜디오에서 야채들을 펼쳐두고 판매하고 있다
'궈빈' 스튜디오에서 야채들을 펼쳐두고 판매하고 있다

채원촌 철거 반대 운동과 고속철 반대 운동을 지나며 1980년대 이후 태어난 ‘밧링호우’세대 청년들은 적극적으로 사회운동에 뛰어들었고, 여러 사회운동단체들도 생겨났다. 중국에서 ‘빠링허우’는 덩샤오핑이 주도한 개혁개방 시대 ‘1가구 1자녀 정책’의 영향 아래 태어난 세대를 뜻한다. 보통 외동 딸, 외동 아들로 귀하게 자라 과거 세대와 달리 물질적인 풍요를 누리며 성장한 탓에 소비지향적이며 개인주의적인 성향이 강하다고 여겨진다.

홍콩의 ‘밧링호우(80後)’는 중국과 조금 다르다. 홍콩의 집값 문제는 지금도 심각하지만, 2010년 당시 홍콩의 집값은 전년도보다 평균 30%가량 폭등한데다 청년 실업도 늘어났다. 일부 연구자들은 ‘밧링호우’로 지칭되는 청년 세대들의 불안과 고통이 그들을 거리로 나오게 하는 또다른 주된 이유였으며, 그들에겐 집단 의식을 형성하고 이를 행동에 옮기는 특성이 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또한 당시 시위에서는 홍콩의 이후 운동에서도 주목받았던 모바일 기기의 활용도 두드러졌다. 청년층이 이끌었던 운동답게, 트위터 등 소셜미디어를 활용하여 입법회 빌딩 주변 거리의 전략적 위치로 빠르게 이동할 수 있었고, 모든 출구를 차단했다.

‘궈빈’은 그 당시 설립되지는 않았지만 연대한 경험이 있는 사람들도 활동하고 있는 단체다. 야채를 파는 것 외에도 국제 연대와 풀뿌리 공동체 운동 등 탄압이 심한 상황에도 홍콩에 뿌리를 두고 새로운 시도들로 사회운동을 이어가고 있다.

다시 채원촌으로 돌아가보자. 채원촌이 철거된 후 정부는 제대로 된 이주대책을 마련해줬을까? 안타깝지만 그렇지 않다. 당시 채원촌 주민들이 강제로 퇴거당한 후, 국토해양부는 공공 농지로 지정되어 있는 새로운 마을을 마련하기로 했다. 하지만 고속철 사업을 서둘러 추진하다보니 새 마을 양쪽에 임시주택을 지어 주민들이 살다가 새 마을이 완공되어 입주하면 땅을 원래 농지로 돌려주는 ‘선 철거 후 건축’을 제안했다. 일부 주민들은 채원촌 근처에 토지를 구입하여 임시 주택 단지에 살며 새 마을 프로젝트가 완공되기를 기다렸다. 2011년 4월 말부터 주민들이 임시 주택 단지에 입주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Inmedia HK의 2017년 10월 보도에 따르면, 공공 농지로 보급하기로 했던 땅에 임시 주택 단지가 철거되며 땅 곳곳에 유리가 남았고, 주민들은 농지 파괴를 우려하고 있다고 한다.

깨진 유리와 쓰레기들로 덮인 땅
깨진 유리와 쓰레기들로 덮인 땅

고속철도 건설을 추진했던 MTR측은 마을 주민들이 이주한 후 임시 주택을 철거하고 그 땅을 경작지로 돌려주기로 약속했었다. 한 주민은 MTR이 감독을 제대로 하지 않았고, 계약업체가 경작지를 파괴하도록 방치해 주민들과의 약속을 어겨다고 비판했다. 강제 퇴거가 아니었다면 임시 주택도 없었을 것이고 경작지가 훼손되지도 않았을 것이다. 89세의 한 주민은 현재 농지를 갈고 있지만, 맨 손으로 잡초를 뽑아야 하기에 콘크리트와 유리에 다치기 쉽다고 말한다. MTR은 계약이 끝날 때까지 농지를 복구하지 못하면 마을 주민들이 직접 치우라며 후안무치한 태도로 일관했다.

채원촌 철거 반대운동 그 이후

'채원촌 지원조'로 모여 주민들과 연대하고 투쟁했던 청년들은 지금 어디 있을까? 채원촌이 철거된 이후에도 '신계동북 신(新)발전구규획'은 계속 추진되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채원촌 지원조' 청년들 대부분은 학업을 계속하거나 직접 농업에 종사하기도 하고, 신계동북 지역 농민들과의 연대, 우산운동과 범죄인 송환조례 반대운동 참여 등 다양한 의제에서 활동을 지속하고 있다.

국가보안법 통과 이후, 홍콩에서 모순에 대한 저항은 엄청난 위험을 동반한다. 엄혹한 감시와 탄압은 이전의 투쟁들을 지워버리려는 듯하다. 하지만 여전히 각자의 자리에서 각자의 방법으로 투쟁하고 연대하고 있는 활동가들이 있다. 잠잠한 물 위에서 조용히 움직이지만 물 밑에서는 발을 바쁘게 움직이는 오리처럼, 강고히 쌓아온 투쟁들은 언젠가 다른 미래를 만들 것이다. 우리는 그때까지 운동의 역사와 역사를 쓴 사람들의 이야기를 기억하고 국제연대를 지속해나가야 한다. 🪴

2010년, '채원촌 지원조' 청년들이 회의를 위해 모여 있다.
2010년, '채원촌 지원조' 청년들이 회의를 위해 모여 있다.


참고 자료

글 : 이경희

교열 : 홍명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