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콩 역사상 가장 긴 노동 파업, 콰이칭 컨테이너 터미널 부두 노동자 파업과 이후
2023년 6월 12일
아시아 최대 재벌 리카싱에 맞선 노동자들
지금으로부터 10년 전인 2013년 3월, 홍콩의 주요 컨테이너 항구에서 홍콩 역사상 가장 긴 노동 파업이 있었다. 1996년보다 낮은 당시의 임금에 불만을 품은 콰이칭 컨테이너 터미널(Kwai Tsing Container Terminals)의 비정규직 노동자 수백 명이 지난 17년 동안의 인플레이션에 해당하는 20%의 임금 인상과 더 나 은 노동 조건을 위해 파업에 돌입했다. 임금 인상 뿐만 아니라 점심 식사 시간, 휴식 시간 보장 및 화장실 시설 개선 등을 요구했다. 40일의 연속 파업과 시위 끝에 부두 노동자들은 9.8%의 임금 인상안을 타결하는 데 성공했다. 그 다음 해에는 10%의 임금 인상을 쟁취해, 궁극적으로 초기에 요구했던, 1997년부터 2013년까지의 인플레이션을 반영한 20%의 임금인상 요구를 거의 충족시켰다.
2013년 3월 이전에도 몇 년 동안 부두 노동자들은 여러 차례 파업 등 투쟁을 벌였지만 이틀 이상 지속되지는 못했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현장 노동자들을 조직하기 위해 노력했다. 노동자들을 조직하는데 도움을 준 학생 활동가들도 있었다. 2013년 3월 투쟁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자, 파업에 앞서 부두 노동자들은 원청인 항만 운영사 홍콩국제터미널유한공사(HIT)와 이를 소유한 재벌 리카싱의 대표 기업 허치슨 왐포아(홍콩에 위치한 신탁지주회사, 홍콩 증권거래소에 등재된 최대 기업들 중 한 곳) 앞에서 두 차례 시위를 벌였다. 3월 28일 오전 8시, 약 200명의 부두 노동자들이 콰이칭 컨테이너 터미널에 모여 고용주에게 만나달라고 요구했다. 하지만 한 시간 반을 기다렸는데도 고용주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들의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노동자들은 터미널로 진입하여 40일 간의 긴 파업을 시작했다.
40일 간의 파업 동안 이를 지지하는 학생들과 활동가들, 리카싱 소유의 사업체를 보이콧하는 시민들, 연대 행동을 벌이는 해외 노동조합들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야와 장소의 사람들이 투쟁에 연대했다. 기업 독점에 대한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홍콩인들은 총 890만 홍콩 달러의 후원금과 수많은 물자를 파업하는 노동자들을 지원하기 위해 기부했다. 일부 시민들은 자발적으로 당시 세계 8위 부자였던 리카싱이 소유한 사업에 대해 보이콧을 선언하기도 했다. 해외에서도 한국, 네덜란드, 미국에 이르기까지 전 세계의 노동자들이 홍콩 부두노동자들의 파업에 연대했다. 한국에서도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 고 김주중씨 추모 분향소 앞에 연대를 위한 가판대를 마련했다.
한국 부두 노동자 파업
한국에도 부두 노동자 파업의 오랜 역사가 있다. 19세기 말 조선의 개항과 함께 급격히 증가한 물자의 수송과 하역산업의 발달은 부두의 임금노동자를 급증시켰다. 하역업이 객주업에서 독립적 하역기업으로 전환된 때부터 부두노동자가 근대적 임금노동자로 등장하기 시작했다. 조선 말인 1898년에 결성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는 성 진부두노동조합은 우리나라 최초의 노동조합으로 인정되고 있다. 1920년대 일본 자본에 의한 노동의 절대적 종속이 강요되고 식민지적 착취가 강화되는 가운데, 제1차세계대전 이후 전후불황의 영향으로 임금이 인하되는 등 노동조건이 열악해지자 각지에서 노동쟁의가 활발하게 일어났다. 이러한 상황에서 1921년 9월 부산부두노동자쟁의, 1929년 원산부두노동자파업, 그리고 1932년 2월 청진부두노동쟁의 등이 발생했다.
한국 전쟁 중 급격히 오르기 시작한 물가가 임금 상승을 훨씬 상회하던 1952년, 부산부두노동자 총파업이 진행되었다. 주한미군과의 작업 계약 갱신 입찰을 앞둔 때였다. 대한노총자유연맹과 산하의 부산부두노동조합은 노동자들의 임금 인상 요구에 무반응으로 일관하며 강경 대응을 예고하는 하역 회사, 정부 그리고 미군에 저항하며 파업을 벌였다. 부산항 제2·3·4 부두 및 중앙 부두 하역 작업 종사자 1,600여 명이 아침 7~8시 사이 교대 시간에 파업을 벌인 것에 이어 미군 당국과의 협상이 지지부진하자 무기한으로 제2차 파업에 돌입했다. 노사 당사자, 정부, 미군이 합석한 회담에서 타협안이 도출되었고 이에 따라 파업은 3일 만에 승리로 종료되었다. 부산 부두노동자 총파업은 노동자들의 적극적인 참여와 투쟁을 동력삼아 성공했다는 의의가 있다.
파업 10년 후, 지금의 홍콩
부두노동자들의 파업 이후 10년 지난 지금, 당시 파업에 연대했던 많은 단체들이 해산했다. 2020년 6월 국가보안법이 시행된 후 노동조합을 비롯한 시민사회가 대대적인 탄압에 직면하고 있기 때문이다. 부두노동자들이 소속된 홍콩에서 두 번째로 큰 노동조합, 홍콩직공회연맹(香港職工會聯盟; HKCTU)도 2년 전 탄압이 거세져 해산했다. 2013년 파업의 주역 중 한 사람이었던 리척얀 전 직공맹 사무총장 역시 2019년 항쟁에서 직공맹 측이 집회신고, 무대설치 등의 지원 역할을 하고 조합원들의 참여를 독려했다는 이유로, 불법집회 주최와 선동, 방역지침 위반 등 여러 건의 혐의로 기소되어 징역 1년8개월을 선고 받고 복역했다. 지금은 국가보안법에 따라 최고 징역 10년의 또다른 전복 혐의로 재판을 기다리고 있다.
* 관련기사 읽기 : 홍콩 | 직공맹에 대한 전방위적인 탄압으로 해산 절차 돌입
현재도 홍콩의 노동환경은 열악하다. 지난해 9월에는 안전 점검이 제대로 진행되지 않아 발생한 치명적인 크레인 붕괴 사고도 있었다. 또한 당국의 탄압으로 많은 노동조합 간부들과 핵심 조합원들이 해외로 망명하거나 감옥에 갇혔다. 하지만 탄압에도 불구하고 홍콩 시민사회의 저항은 하루아침에 말살되지 않았다. 홍콩에서는 현재 새로운 형태의 저항이 나타나고 있다. 초국적 플랫폼기업 딜리버리 히어로가 대주주로 있는 음식배달 플랫폼기업 푸드판다에서는 2021년 9월 이후 세 번이나 성공적으로 파업이 진행되었다. 노동조합이 해산되어 발생한 공백에도 불구하고 플랫폼 노동자들은 여전히 일부 노동운동가들의 도움으로 소셜 미디어를 통해 성공적으로 파업을 조직할 수 있었다.
* 관련기사 읽기 : 푸드판다 라이더들은 어떻게 저항을 조직했을까? ①
결코 불은 꺼지지 않을 것이다
2013년 홍콩 부두 노동자 파업의 주역이자 2016년 은퇴한 부두 노동자 찬염와는 HKFP와의 인터뷰에서 시민들이 부당함을 마주할 때 목소리를 낼 것이라고 말했다. 2013년의 파업도 몇 년의 시간을 걸쳐 쌓아온 토대를 바탕으로 성공할 수 있었다. 찬염와는 노동운동의 전제조건이 노동자들의 신뢰를 얻는 것이라고 말한다. 홍콩 부두노동자들에게 노동조합이 없었던 1996년, 한 사람의 노동자가 해고되었을 때 회사는 오히려 고용 인원을 감축하고 노동자들에게 더 적은 임금을 지불했다. 이후 찬염와와 그의 동료들은 산업재해로 고통받는 부두노동자들을 직접 찾아갔고, 가족 행사와 장례식 등에 참석하며 관계를 쌓아갔다. 그의 목적은 부두노동자들에게 그들을 위해 싸우고 있다는 것을 알리는 것이었다.
그렇게 2006년 설립된 홍콩부두노동자연합(香港碼頭業職工會; UHKD)은 2013년의 파업을 성공시켜 임금 인상을 쟁취했을 뿐만 아니라 비인간적인 노동환경을 현저히 개선시켰다. 정부의 탄압으로 직공맹이 해산하고 조합원 수가 줄어들고 있는 지금, 찬염와는 낙담하지 말라고 전하며 이렇게 말했다. “만약 당신이 가진 것이 불꽃뿐이라면, 그것을 서서히 점화해나 가라. 결코 불은 꺼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If all you’ve got is a spark, then let it slowly ignite. After all, the fire will not go out.)”
현 부두노동조합 위원장인 라이마는 같은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오늘날 노동 문제는 누군가가 죽지 않는 한 주목받지 못한다”고 말했다. 작년 홍콩의 크레인 사고로 노동자가 사망하자 정부는 그제야 안전 점검 규정을 강화했다. 언론이 노동 문제에 대해 보도하지 않을 것이 우려되는 현실에서, 그는 노조가 존속되도록 운영하는 것에 대한 중요성을 강조했다. 먼저 조직하고, 그런 다음 노동자들이 직면한 불합리한 해고, 안전하지 않은 일터, 단체 교섭과 파업에 대한 권리 부족 등의 문제를 알려야 한다는 것이다. 라이마는 여전히 노조에서 활동하며 부두노동자들의 임금 인상과 안전한 노동 환경을 위해 싸우고 있다.
한국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일터에서 목숨을 잃었다. 제주도 현장실습생 이민호, 태안화력발전소 김용균, 평택항의 이선호, 구의역 김군 그리고 알려졌거나 알려지지 않은 수많은 사람들. 노동절에는 건설노조 강원지부 간부 양회동 열사가 분신했다. 그러나 정부는 열사가 스스로 목숨을 끊으면서까지 전하려고 했던 문제에 주목하기는커녕 탄압을 강화하고 있으며 일부 언론은 왜곡과 음해를 일삼고 있다. 홍콩과 한국의 노동자들이 처한 열악한 상황은 분명 유사한 측면이 있다. 하지만 홍콩과 한국의 민중들에겐 동시에 저항의 역사도 있다. 찬염와가 말한 것처럼, 우리 노동자 민중이 가진 불꽃을 노동자계급의 단결과 국제적인 연대로 점화한다면 결코 불은 꺼지지 않을 것이다.
글: 이경희
교열: 이재현
참고자료
https://thediplomat.com/2023/03/the-10th-anniversary-of-the-hong-kong-dockers-strike/
https://hklabourrights.org/hkdockers10/timeline/
https://hklabourrights.org/news/interview-with-ex-union-of-hk-dockers-general-secretary-stanley-ho/
https://hongkongfp.com/2023/03/18/10-years-after-one-of-hong-kongs-longest-strikes-dockers-union-struggles-to-uphold-labour-rights/
『한국부두노동운동백년사』(전국부두노동조합, 1979)
송종래 외, 『한국 노동 운동사』4(지식마당, 2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