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 전쟁 시기 일본의 반전평화운동에서 무엇을 배울 것인가
2023년 4월 10일
베트남전쟁 당시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
지난 2023년 2월 7일, 베트남 전쟁 시기 한국군 민간인 학살의 피해자이자 생존자인 응우옌티탄이 제기한 국가배상소송에서 1심 승소 판결이 나왔다. 퐁니·퐁넛 학살 사건 등 베트남 전쟁에 참전한 한국군이 자행한 민간인 학살은 그동안 수많은 증언을 통해 공론화되어 왔지만, 한국의 정부는 이에 대해 무책임한 태도로 일관해왔다. 한국 사회 일각에서도 이러한 학살을 부정하는 태도가 만연했음은 물론이다. 한국 국가의 책임을 처음으로 적시한 이번 판결은 민간인 학살과 전시 성폭력 등 한국군이 연루된 베트남 전쟁 시기의 가해에 대한 진상규명과 피해 회복을 향한, 늦었지만 그만큼 중요한 한 걸음이다.
1964년부터 70년대 중반까지 박정희 정권은 미국의 지원을 더욱 적극적으로 요구해내기 위한 목적하에 30만 명 이상의 육해공군을 베트남에 파병했다. 반식민주의 투쟁에 대한 억압 등의 문제로 유럽으로부터 소극적 지원 이상을 바라기 어려웠던 미군에게 남한의 대규모 참전은 중요하게 여겨졌다.
미군과 한국군의 직접적인 전쟁 수행은 한국전쟁 특수로 급속한 경제부흥을 이룩한 일본의 후방지원을 통해 가능했다. 미군과 한국군의 베트남 주둔과 작전 수행은 군수품 수요 및 기지경제를 통해 일본 독점자본의 부활과 고도화를 위한 시장을 열어주었다. 뿐만 아니라, 일본 본토 및 미군 점령하 오키나와의 항구와 공군기지는 전쟁 수행을 위한 항공모함 등의 기착과 인도차이나반도를 향한 폭격기 출격의 거점으로 기능했다.
베트남전 당시 발생한 광범위한 민간인 학살 및 네이팜 폭격과 고엽제 살포 등의 파괴행위가 폭로되면서 유럽은 물론이거니와 전쟁의 가해 당사국인 미국과 일본에서는 격렬한 규탄 운동이 분출했다. 반면 남한에서는 엄혹한 반공주의 치하에 놓였던 당시 전쟁에 대한 대중적 반대 행동을 찾아보기 어려웠으며, 반세기가 흐른 지금에서야 한국군의 가해 행위 인정이 제도화로의 행로를 밟아나가고 있다.
오늘날 일본의 사회운동은 어려운 조건을 돌파해야 하는 상황에 놓여 있으며, 동아시아에서는 다시금 전쟁 위기와 군비 증강 열풍이 고조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베트남 전쟁에 깊이 연루된 한국의 가해를 성찰하게 하는 이번 판결은 단순히 과거사 청산에 국한되지 않는다. 반전평화운동을 절박하게 요청하고 있는 현 정세에 대한 성찰 또한 요구한다. 한국과 일본, 오키나와에서 반전평화운동을 건설해나가고 서로의 전망을 엮어나가야 한다.
이 글에서는 1960-70년대 베트남전 당시 일본에서 벌어진 반전평화운동의 역사적 경험을 간략하게 짚어보고자 한다.
일본 반전평화운동의 계보
일본 반전운동의 역사는 2차 대전 패전 이전, 심지어 근대화의 초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일본은 1894~5년 청일전쟁과 1904~5년 러일전쟁 등 대외 전쟁을 통해 근대적 의미의 국가 수립과 경제 성장, 그리고 패권의 팽창을 이루었다. 서구 사회사상이 일본으로 수입되던 메이지 시대에 사회주의와 아나키즘 진영, 종교적·비종교적 사회운동에서 러일전쟁 찬반 여부는 뜨거운 감자였다. 맹아기 일본 민중운동 일부에서도 초기에는 전쟁 배상금에 열광하는 모 습을 보였고, 러일전쟁 직후 배상금을 받지 못했다는 사실에 대한 분노가 부자들과 권력자들에 대한 자생적 봉기에 겹쳐지기도 했다.
그러나 1917~22년 러시아 내전 당시 일본군이 볼셰비키 혁명의 확산을 봉쇄하고 연해주에서 이권을 확립하기 위해 서방의 여러 자본주의 국가들과 함께 출병하자, '전쟁반대' 정서가 고취됐다. 사회주의 신사상의 확산과 함께 소비에트 혁명에 대한 기대가 커졌고, 출병했던 많은 병사들은 왜 머나먼 시베리아에서 파르티잔*과 전투를 벌이며 피를 흘려야 하는지 의문을 품기 시작했다.
- 📑파르티잔 : 프랑스어의 '파르티(parti)'에서 비롯된 말이며, 당원·동지·당파 등을 뜻하는 말이나, 현재는 유격대원·편의대원(便衣隊員)을 가리킨다. 한국에서 ‘빨치산’으로 불린다.
이후 1920년대에서 30년대에 이르는 시기 반식민주의운동과 반전운동은 일본공산당과 노농파 등 사회주의 운동 세력에 의해 주도됐다. 그러나 만주 침략과 중일전쟁 개전을 거치면서 급진적 사회운동에 대한 군부 탄압이 극심해졌고, 제도권 영역의 무산정당 또한 전쟁 자체에 대한 반대보다는 출병 병사와 가족에 대한 복지 정책에 매진하는 등 체제 내화하는 모습을 보이기 시작한다. 결국 반전평화운동은 군국주의 총동원 체제의 탄압과 국가에 대한 대대적 투항으로 귀결되는 전향 흐름에 질식되고 말았다.
이후 일본은 제국주의 전쟁에서의 패전 후 미국에 정치·경제적으로 강하게 종속됐다. 그런 일본이 미국과 의 강한 유착 속에서 부흥하는 계기가 된 한국전쟁 시기, 패전 이전부터 존재해온 반전운동의 물결이 일본의 전쟁 연루에 반대해 다시 분출했다. 일본공산당과 재일조선인 활동가들은 미일 군사동맹 및 일본의 전후 지원에 반대해 군수공장이나 군용물자 운반 철도를 타격하는 등 격렬하게 투쟁했지만, 당시의 반전운동이 대중운동으로까지 광범위하게 확산되진 못했다.
일본에서 반전평화운동이 시민사회 전체에 걸쳐 폭발적인 고양을 맞이한 것은 이른바 1960년의 ‘안보투쟁’ 시기다. 미국에의 종속을 넘어 점차 자립화하고 고도화된 일본 독점자본과 그 정치적 대변자들은 1960년에 이르면 아시아에서의 미일 관계 재조정을 위해 적극적으로 미일상호방위조약의 체결을 미국에 요구했다. 그러자 미국의 군사정책에 더 깊이 연루됐고, 그 과정에서 아시아의 ‘맹주’로 부활하고자 했던 미일상호방위조약 체결은 이에 대한 대중 저항을 초래했다.
대중들의 인식은 미국에 의해 일본이 다시 전쟁에 끌려들어가서는 안 된다는 정서에서 일본이 점차 적극적으로 전쟁에 가담하고 있는 현실을 반대하는 운동으로 전환됐다. 연일 국회 앞 광장과 거리를 군중의 물결로 채웠던 1959~60년 ‘안보투쟁’은 당시 기시 노부스케(岸信介) 정권 퇴진이라는 성과를 이루었다. 하지만 본래 목적했던 미일상호방위조약 저지에는 실패했다. 그럼에도 이후 베트남 전쟁 반대운동이 대중적 반전평화운동으로 지속되면서, 70년대 초까지 “정치의 계절”를 거치게 된다.
시민운동과 학생운동 양날개
사실 반전평화운동은 안보투쟁 이전부터 '반기지운동' 형태로 꾸준히 이어지고 있었다. 미군은 점령지가 된 오키나와에서는 물론이거니와, 형식상 독립국가가 된 일본 본토에서도 지속적으로 기지를 확보하고자 노력했고, 이에 맞서 대학생들과 주민들의 저항이 이어졌던 것이다. 1950년대 중후반 전일본학생자치회총연합(이하 전학련)을 중심으로 결집한 신좌익 학생운동 진영은 우치나다와 스나가와 등에서 주일미군 기지 확장에 반대하는 투쟁에 적극적으로 결합했다.
이러한 반기지운동은 반전운동이었을 뿐 아니라, 기지가 확장될 예정이었던 지역에 거주하다 토지와 생존권을 빼앗길 위기에 처한 농민들이 주체가 되는 주민운동의 성격을 지니기도 했다. 이처럼 반전평화운동에 있어서 중요했던 반기지운동의 역사는 베트남 전쟁 시기에도 중요했고, 오늘날에도 지속적으로 이어지고 있다. 60년대 산리즈카(일본 지바현 나리타시의 농촌지역)에서 수많은 농민과 학생의 결연한 저항을 압살하고 지어진 나리타 국제공항은, 2023년 초 군사적 활용을 위한 활주로 확장의 장소가 되고 있고, 이에 대해 학생들과 주민들도 다시금 저항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키나와에서의 반기지운동 또한 오늘날에도 꾸준히 이어지고 있음은 물론이다.
반기지운동은 오늘날에도 지속적으로 이어지고 있다. 나리타 국제 공항은 베트남전 시기였던 1960년대 산리즈카(지바현 나리타시의 농촌지역)에서 수많은 농민과 학생의 결연한 저항을 압살하고 건설됐는데, 최근에는 군사적 활용을 위한 활주로 확장이 이뤄지고 있다. 이에 따라 대학생들과 주민들도 다시금 반대운동을 시작한 상황이다. 오키나와에서의 반기지운동 역시 미꾸준히 이어지고 있음은 물론이다.
안보투쟁의 고조와 퇴조 국면 이후 1960년대 중반에 이르자, 인도차이나 전쟁이 더욱 격렬해졌고, 일본 정부가 군사적·경제적으로 연루되어 있다는 사실도 점차 명백하게 폭로됐다. 반전운동도 시민운동과 학생운동이라는 양날개로 전개됐다. 1965~6년 시민운동의 영역에서 ‘베트남에 평화를! 시민연합’(ベトナムに平和を!市民連合, 이하 '베평련')이 결성되며 반전평화운동이 보다 진취적 형태로 전화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신좌익 그룹들과 전학련을 중심으로 전개된 기존의 학생운동은 60년대 후반에 이르면 조직형태를 바꾼다. 전쟁 산업과 경제 부흥 속에서 대학진학률과 연구자에 대한 수요가 높아지자, 학생들은 그동안 자신이 수행해온 교육과 학문 연구의 영역이 일본 및 미국의 전쟁 산업과 긴밀히 연계되어 있었다는 점을 한층 분명하게 인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고등교육이 전쟁산업 및 국가의 경제적 총력 동원에 긴밀히 연루되어 온 역사는 메이 지 시대부터 쇼와 시대에 이르기까지 일본 근대화 그 자체의 속성이기도 했다. 이러한 자기 성찰에 따라 학생운동은 각 학교에서 학생 스스로의 주체적 각성과 스스로의 존재에 대한 ‘자기부정’을 강조하며 전학공투회의(이하 전공투)를 결성하는 새로운 형태로 전화하여 대학투쟁은 물론이거니와 반전평화운동도 더욱 격렬하게 고조시키게 되었다.
베평련은 ‘시민’을 주체로 했던 것에서도 볼 수 있듯, 기존의 조직운동이나 정당운동과는 달리 광범위한 시민층의 참여를 중시했다. 그 조직형태에 있어서도 누구나 최소한의 목표에 동의하면 지역사회에서 스스로 조직을 결성할 수 있도록 하는 등 수평적인 형태로 대중적 창발성을 극대화했으며, “죽이지 말자!”라는 직관적인 구호와 이를 형상화한 로고를 통해 자발적 참여를 이끌어냈다.
연대와 계승
베평련은 기존의 사회운동과 단절되거나 스스로를 차별화하는 형태의 ‘시민운동’을 주창하지 않았다. 베평련을 이끈 활동가들은 과거 일본공산당의 지하운동을 경험했던 ‘구조개혁파’의 중견 활동가들이었는데, 이들의 풍부한 노하우는 베평련이 기존의 ‘시민운동’ 지평을 넘어서는 데 기여했다. 특히 베평련은 내부에 자테크(JATEC)라는 비밀 지하조직을 구 성하고, 이를 기반으로 베트남 전쟁 참전에 반대하여 탈영한 주일미군들을 국외로 망명시키는 활동을 펼쳤다.
활동가들의 노력과 탈주병들의 은신을 도운 광범위한 지지층의 협조 속에서 베평련 자테크는 여권 위조나 밀항 등의 방식으로 '반전'을 걸고 탈영한 미군 병사들을 스웨덴 등 국가로 망명시켰다. 1970년대에는 미군기지의 미군들이 적극적으로 전쟁의 부당함을 인식하고, 직접 반전운동을 전개할 지원수 있도록 하는 ‘미군해체’ 운동에 주력한다. 탈영 흐름과 군기지 내 고조된 전쟁체제 해체의 정서는 미 펜타콘과 정책 결정권자들에게 위협으로 다가왔다. 일본의 사회운동적 노동조합인 일본노동조합총평의회(총평)와 기존의 혁신정당 세력인 사회당이나 공산당도 비록 활동 방식에 있어 때로는 이견을 표출했지만, 제도 영역에서 반전운동의 전개를 원조했다.
이에 반해 전공투는 보다 전투적인 방식으로 반전평화운동을 전개했다. 앞서 언급했듯, 그 핵심에는 학생과 연구자가 있었다. 반전운동을 통해 스스로를 주체화하고, 전공투 결성에 적극 뛰어든 이들은 많은 경우 이공계 대학원생과 조교들이었다. (한때 촉망받는 물리학 연구자의 길을 걷다 베트남 전쟁 반대운동을 계기로 활동을 시작해 도쿄대 전공투 의장을 역임한 야마모토 요시타카가 이런 흐름을 대표한다.) 이들은 경제발전을 통해 대학가에 고조된 ‘이공계 붐’이 전쟁 전후 모두 전쟁 산업과 연계되어 있다는 점, 그리고 일본이 동아시아 전쟁체제에 깊이 연루되어 있음을 직감한다. 학생들은 전쟁 체제에 부역하는 대가로 보장받는 안온한 일상이 기만적이라 느꼈고, 이러한 윤리는 비민주적인 대학 내 권력구조에 대한 저항과 결합되었다. 그 귀결은 학생/지식인 스스로의 ‘자기부정’과 전쟁 체제에 부역하고 있는 기성 대학의 해체, 평화의 방해가 되는 체제를 능동적으로 극복해내기 위한 세계혁명으로의 도약이었던 것이다.
전공투의 입장에서 일본의 전쟁 협조를 저지하기 위해 벌이는 반전투쟁은 미군에 맞서 베트남에서 벌어진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NLF) 및 베트남 민중의 저항 전선을 후방으로까지 확장한 것이었다. 이는 ‘베트남’이라는 상징을 전쟁에 대한 저항의 장으로 만들며 전쟁체제를 전복하고자 시도했다는 점에서 하나의 ‘세계혁명’이었다.
이들의 투쟁은 도쿄대 투쟁이나 교토대 투쟁 등 캠퍼스 투쟁에 국한되지 않았다. 오히려 캠퍼스를 봉쇄했던 전공투의 바리케이드는 1967년 사토 에이사쿠(佐藤栄作) 수상의 남베트남 방문을 저지하기 위해 공항에서 벌인 '하네다 투쟁', 1968년 초 미 항공모함 엔터프라이즈호의 기항을 저지하는 투쟁을 통해 교문 밖 거리로도 확장됐다. 국철로 미군 군수물자를 운송하는 일본의 일상을 잠시나마 멈추기 위해 전국 대학들의 전공투가 결집한 1968년 국제반전데이 신주쿠역 투쟁은 도쿄 도심을 하룻밤 동안이나마 ‘해방구’로 만들었다.
일본의 반전투쟁은 지금도 제1차 하네다 투쟁 당시 사망한 열사를 기억하는 ‘10.8 야마자키 히로아키 프로젝트’를 통해, 베트남의 전쟁증거박물관* 등과 교류 및 연대를 이어가고 있다. 역사적 전통의 끊을 놓지 않으려 매진하고 있다.
- 📑전쟁증거박물관(Bảo tàng Chứng tích chiến tranh) : 베트남 호치민시에 위치한 박물관. 원래 "중국의 전쟁 범죄과 미국의 전쟁 범죄 박물관"이었으나, 중국과 미국 관광객들의 반감 때문에 개칭했다. 베트남 전쟁 당시 사용된 무기들, 고엽제로 인해 목숨을 잃은 아기들의 모습 등 전쟁의 끔찍한 결과를 볼 수 있다. 베트남전 당시 이 건물은 미군 정보부 청사로 쓰였다.
자성과 상호연결
일본의 반전평화운동이 일정한 퇴조기를 맞이한 1970년대 중반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 등의 그룹들이 등장했다. 이들은 한국 및 베트남 전쟁에 연루된 일본의 독점자본, 그리고 아이누와 오키나와의 식민화에 연계된 기념물 폭파 등을 직접적으로 타격하는 투쟁을 벌였다. 이는 일본 근대국가의 형성 과정에서 훗카이도(아이누모시리)나 오키나와(류큐)를 식민화하고, 국민국가 내부로 폭력적으로 편입시켜온 역사가 이후 군국주의적인 확장 및 현대적 전쟁 체제에의 연루로 이어졌다는 성찰의 발로였다.
전반적인 대중운동의 퇴조기에 소수 그룹을 바탕으로 무장을 동반한 선도투쟁 노선을 채택한 이들의 활동방식에 대해선 이견이 있을 수밖에 없다. 당시 일본 학생운동의 ‘폭력성’이 각 분파들이 서로를 공격하는 ‘우치게바’ 등 소모적인 내부 투쟁으로 흘러가 몰락을 자초하고 있을 때, 전쟁에 연루된 자본과 국가권력, 그리고 일본의 역사 자체를 겨냥하고자 했던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의 지향은 되짚어볼 부분이 있다.
한국 사회는 여전히 자국의 ‘방산 수출’이 세계에 얼마나 극심한 가해를 가하고 있는지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더는 종속적인 위치가 아니라 오히려 종속시키는 위치로 변모한 한국의 독점자본이 동남아시아 등에서 벌이는 착취를 대중적으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전쟁 가담을 거부한 군인을 탈출시키고, 전쟁에 연루된 자본과 대학을 타격하고자 했던, 나아가 스스로의 역사에 각인된 소수민족에 대한 폭력을 전쟁의 근원으로서 성찰하고자 했던 일본 반전평화운동의 역사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는 적지 않다.
한국 사회운동이 일본의 반전평화운동 을 응원하고 원조하는 것은 중요하다. 그러나 베트남 전쟁 당시 민간인 학살에 대한 책임을 법원 1심 판결 이후에도 부정하려는 우리 정부의 모습은 한국 사회가 아직 성찰하지 못하고 있음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정권과 자본은 억압적 국가에 비인도적 살상 무기를 판매하는 등 동아시아 전반의 폭력과 군비증강을 고조시키는데 일조하고 있다. 한국과 일본, 오키나와 등에서 벌어지는 반전운동이 국제연대 시각을 키우고 서로를 엮어나갈 때에만, 한국의 가해 사실까지 함께 성찰하고, 앞으로 능동적으로 전쟁에 맞선 평화운동을 만들어나갈 수 있지 않을까?
참고 자료
- 권혁태, 「‘국경’ 안에서 ‘탈/국경’을 상상하는 법: 일본의 베트남 반전운동과 탈영병사」, 『동방학지』 157호, 2021.
- 남기정, 「베트남전쟁의 현실과 일본의 평화담론: 베평련과 전공투를 중심으로」, 『통일과 평화』 6권 2호, 2014.
- 남기정, 「일본의 베트남전쟁-‘기지국가’의 ‘평화운동’과 ‘평화외교’」, 『사회와 역사』 105호, 2015.
- 이명실, 「일본 전공투운동과 ‘자기부정’의 논리-도쿄대학 투쟁을 중심으로」, 『한국일본교육학연구』 23권 2호, 2018.
- 조정민, 「전후일본사회와 베트남 전쟁, 『동북아 문화연구』 1권 21호, 2009.
- 다이도지 마사시, 강문희·이정민 역, 『최종 옥중 통신』, 에디투스, 2022.
- 시게노부 후사코, 최순육 역, 『사과나무 아래서 너를 낳으려 했다』, 지원북클럽(하얀풍차), 2001.
- 야마마토 요시타카, 임경화 역, 『나의 1960년대 – 도쿄대 전공투 운동의 나날과 근대 일본 과학기술사의 민낯』, 돌베개, 2017.
글 : 이재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