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여성의날 맞이 ② “여성, 삶, 자유!” 이란 민중의 외침이 멈추지 않는 이유

세계 여성의날 맞이 ② “여성, 삶, 자유!” 이란 민중의 외침이 멈추지 않는 이유

2022년 9월 마흐사 아미니의 비극적인 죽음에 분노하여 시작된 시위가 정권 교체를 요구하는 투쟁으로 확산되자, 다양한 요구가 분출했다. 5개월이 넘도록 지속되는 이란 민중의 투쟁을 주목하고 연대해야 할 이유를 짚어본다.

2023년 3월 8일

[읽을거리]페미니즘, 국제국제, 페미니즘, 이란, 서아시아, 대중시위

2022년 9월 13일 테헤란에서 22살 여성 마흐사 아미니(Mahsa Amini)가 ‘도덕경찰(گشت ارشاد)’에 의해 체포됐다. 히잡을 제대로 착용하지 않았다는 이유였다. 한데 아미니는 체포 몇 시간만에 갑작스럽게 병원으로 이송됐고, 이틀동안 무의식 상태에 있다가 결국 숨을 거두었다.

이란 당국은 아미니가 고문으로 인해 사망했다는 것을 부인했다. 하지만 아미니와 함께 체포됐던 사람들의 증언과 부검 결과를 통해 '고문사'가 확인됐다. 사망 당일, 테헤란 도심의 경찰서 앞에서 여성들의 시위가 전개됐다. 이는 순식간에 전국으로 확산됐다. 시위에 참여한 여성들은 현장에서 히잡을 불태우고 삭발하며 항의했다. 이는 ‘혁명수비대’의 폭력적인 탄압으로 돌아왔다.

탄압에도 불구하고 노동자와 학생, 시민들이 저항에 동참하면서, 시위 대열은 더 커졌다. 북서부 쿠르디스탄에서 수도 테헤란, 남동부 발로치스탄에 이르기 까지 전국 150여개 도시에서 1천건 이상의 시위가 이어졌다.

당국은 더 강경하게 대응했다. 2023년 3월 현재까지 최소 527명이 넘는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고, 2만 여명이 체포됐다. 구속된 사람들 일부에 대한 사형 집행은 정확한 수치조차 알기 어려울 정도로 심각한 상황이다.

마흐사 아미니
마흐사 아미니

멈추지 않는 투쟁

이제 투쟁 요구는 히잡 착용 의무 등 젠더 차별 반대를 넘어서고 있다. 사람들은 “여성, 삶, 자유!”를 외치면서 이란 독재 정권을 규탄하고, 정권 교체를 요구한다. 시위대의 동참 호소에 따라 수도 테헤란을 비롯해 이스파한 등 주요 도시에서 여러 기업과 의료기관, 상점, 시장이 문을 닫고 파업을 벌였다.

현재 이란의 최고지도자 알리 후세인 하메네이(Ali Hussein Khamenei)의 여동생 바드리 호세이니 하메네이도 작년 10월, 오빠를 공개적으로 ‘독재자’라고 부르며 강력하게 비난했다.

최고지도자 알리 후세인 하메네이
최고지도자 알리 후세인 하메네이
"이슬람 정권 설립자 아야톨라 루홀라 호메이니 시대부터 현재까지, 이란 정권이 저지른 범죄를 애도하는 모든 엄마에게 조의를 표한다. 나는 오빠의 행동에 반대한다. (…) 인간의 의무로 수십년 전부터 오빠인 하메네이에게 국민의 목소리를 여러 차례 전했지만, 그는 듣지 않는다. 호메이니 방식대로 계속 무고한 국민을 억압하고 죽이는 것을 보고 그와 관계를 끊었다. (…) 이란 국민은 자유와 번영을 누릴 자격이 있고, 그들의 봉기는 합법적이며, 자신들의 권리를 위해 필요하다. (…) 국민이 승리하고 현 폭압 통치가 타도되는 것을 빨리 보고싶다. (‘혁명수비대’는) 가능한 한 빨리 무기를 내려놓고, 너무 늦기 전에 정권 퇴진을 요구하는 국민 편에 합류하라.“

바드리의 딸 파리데흐 모라드카니는 인권운동가로 활동하며 SNS에 정권을 비판하는 내용의 영상을 올렸다가 지난해 11월 23일 체포되기도 했다.

최고지도자가 친동생과 조카에게 지지받지 못하고 있을 정도로 현 정권에 대한 이란 민중의 분노는 매우 크다. 많은 이란 국민들은 2022년 월드컵에서 이란 국가대표팀 응원마저 거부했다. 이란 대표팀이 이란 정권을 대변한다고 봤기 때문이다.

파리데흐 모라드카니와 알리 후세인 하메네이
파리데흐 모라드카니와 알리 후세인 하메네이

국가(國歌)가 연주될 때 이란 국가대표팀 선수들은 침묵을 택해 시위에 대한 지지를 간접적으로 표현하기도 했다. 하지만 축구대표팀의 승리가 정권 선전용으로 활용되는 것을 경계한 많은 사람들은 승리가 아니라 패배를 응원했다. 이란 대표팀이 16강 진출에 실패하자, 거리에서는 이를 축하하는 시민들의 환호성과 차량 경적 소리가 넘쳤다.

당시 혁명수비대는 환호하던 시민들에게 총격을 가하기도 했다. 북부 도시 반다르 안잘리 거리에선 메흐란 사막이란 이름의 27세 시민이 군대가 쏜 총에 맞아 사망했다. 테헤란에서 열린 그의 장례식에서 추모객들은 “독재자에게 죽음을!”이라는 구호를 외치며 항의했다.

우리가 염두해야 할 것

올해도 저항은 이어지고 있다. 지난 2월 16일, 이란 전역의 시민들은 ”하메네이에게 죽음을!“이라는 구호를 외치며 밤새 행진했다.

일부 외신은 “사형 집행 이후 시위가 상당히 둔화됐다”고 보도했다. 2월 5일 이란 정부는 "일부 단순 가담자들을 포함한 대규모 사면을 단행한다“고 보도했다. 이러한 유화 국면에도 불구하고, 열흘 뒤 시위대의 잠재력은 여전하다는 것이 드러났다.

특히 많은 젊은 여성들은 앞장 서서 자신들의 권리를 위해 투쟁하고 있다. 여론과 집회의 통제로 인해 국제연대가 쉽지만은 않은 상황이지만, 많은 나라들에서 지지와 연대를 보여주고 있다. 한국에서도 세계여성의 날을 맞아 16개의 단체가 함께 하는 <이란 시위를 지지하는 한국시민모임>은 ”끝나지 않은 투쟁, 이란의 여성해방 투쟁에 연대합니다“라는 공개선언을 했다.

또, 2022년 12월 17일(토) 오후4시 녹사평 역에선 이란시위를 지지하는 한국 시민모임과 재한이란인모임의 주최로, 이란 내 반정부 시위를 지지하고, 계속되는 이란 정부 강경 진압을 규탄하는 집회도 열렸다.

당시 이 집회에서는 이슬람교와 이란 독재정권을 구별해야 한다는 중요한 지적도 있었다. 최근 대구시 대현동의 이슬람사원 건설이 주민 반발로 완공되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염두해야 할 문제다.

문제는 '히잡'이 아닌 '독재'

무슬림 중에선 종교적 신념을 갖고 자발적으로 히잡을 착용하는 여성들이 많다. 그러므로 히잡을 쓰는 여성들 모두가 강제로 착용하고 억압당하고 있다고 보는 것은 사실과 거리가 멀다.

문제는 여성들이 히잡 착용을 스스로 선택하는 게 아니라, 강제로 착용하게 할 때 생긴다. 이슬람교 국가들이 모든 여성에게 히잡 착용을 강제하리라는 편견과 다르게, 히잡 의무 착용 규정을 둔 국가는 세계 57개 이슬람교 국가 중 이란과 사우디아라비아 뿐이다.

이란은 1983년부터 히잡 착용을 의무화하는 법을 제정했다. 특히 지난해 8월 취임한 이슬람 강경파 판사 출신인 세예드 에브라힘 라이시 대통령은 여성이 히잡을 착용하지 않을 경우 관공서, 은행 등 공공기관을 이용할 수 없게 했고, 대중교통도 사용하지 못하게 했다. 심지어 CCTV와 안면인식 프로그램을 통해 히잡을 제대로 쓰지 않은 여성을 단속하라는 지시까지 내렸다. 이것이 마흐사 아미니의 비극적인 죽음을 부른 것이다.

테헤란 지하철역 플랫폼
테헤란 지하철역 플랫폼

이란 독재 정권은 이슬람 율법을 강화한다는 핑계로 통제를 강화해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는 데 이용한다. 이란에서 히잡 착용을 포함한 이슬람 율법 강화는 이슬람 종교의 문제가 아니라 이란 지배자들의 억압적 통치 이데올로기와 민주주의의 문제다. 그러므로 이슬람 종교 자체에 대한 비판과 혐오는 아무런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한다.

이슬람에 대한 혐오는 오히려 이란 민중들의 시위에 지지와 연대를 표현하는 데 저해요인이 될 것이다. 또한 미국 등 서구권 국가들에서 여성인권을 명분으로 이란에게 가하는 군사적, 경제적 제재심화도 적절하다고 볼 수 없다. 이러한 제재들은 이란 정권의 독재, 핵무기 개발, 여성 차별 등에 대한 제재라는 그럴 듯한 명분으로 진행되지만, 실제 제재의 피해는 이란 지배자들이 아니라, 독재의 피해자들인 이란 민중들이 고스란히 떠안아 왔다. 이란 독재와 아무 관련이 없는 평범한 이란인들은 경제 제재 때문에 생활필수품과 의약품 부족으로 빈곤과 불안정한 건강상태로 고통받고 있다. 한국 우리은행도 대이란 제재를 이유로, 코로나19 감염 초기였던 2020년 4월, 한국 의료 업체가 이란에 코로나 진단키트 수출하고 받을 대금 53여억원의 결제 절차를 중단시켜 이란인들의 감염병 대처를 어렵게 만들었다. 뿐만 아니라, 이런 제재가 이란 내 대중 운동을 탄압하는 명분을 주어, 이란 시민들의 민주화 운동에 도움이 되기보다는 약화시키는 데 이용될 수도 있다.

지난 몇 년 이란 민중은 민주주의를 향한 투쟁을 굽히지 않고 이어오고 있다. 이러한 흐름은 대통령 선거부정 의혹에 따른 항의 시위로 72명이 사망한 2009년 녹색 운동*부터 두드러졌다. 경제난이 심화될 무렵인 2017년에도 최고지도자 등 기득권세력의 무능과 부패를 비판하며 저항하다가 24명이 목숨을 잃었다. 2019년 휘발유 가격 인상 조치로 촉발된 파업 시위 때에도 정부의 무차별 진압으로 최소 218명의 시민들이 군·경이 발포한 총에 맞아 사망했다. 그리고 2022년 9월, 마흐사 아미니의 비극적인 죽음이 현재 시위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지금 이란의 상황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20세기 중반으로 거슬러 올라갈 필요가 있다.

  • 📑녹색운동 : 2009년 이란 선거 후 부정선거 의혹에 맞선 항의 운동. 당시 개혁파 후보인 무사비를 지지하며 그의 상징색인 ‘녹색’을 상징색으로 사용하면서 붙은 이름이다.
2009년 녹색운동
2009년 녹색운동

개혁운동의 흥망

1953년에 미국 중앙정보국(CIA)과 영국 비밀정보부(SIS)가 지원한 쿠데타로 권력을 쟁취한 샤 팔레비(팔레비 왕조의 왕)는 이란 권력의 상징이였다. 민주세력과 좌파세력을 탄압하는 가운데, 서구화를 꿈꾸었던 팔레비 왕조는 “백색 혁명”이란 이름으로 다양한 "개혁"들을 추진했다. 그 중에는 보편적인 여성 인권의 보장 같은 진보적인 개혁들도 일부 있었다 하지만 민주주의는 파괴되었고, 경제적 양극화가 심해져 권력층에게로 엄청난 부가 쏠렸다.

대중들의 불만이 누적되는 상황에서 예상하지 못한 세력이 재야세력을 결집시키기 시작한다. 바로 아야톨라 루홀라 호메이니가 중심이 된 이슬람주의자들의 부흥이 찾아온 것이다.

1978년에 친(親)호메이니 경향의 학생 시위가 보안대에 의해 폭력적으로 진압된 것을 시작으로, 전국적으로 반(反)팔레비 시위가 전개가 됐다. 이슬람주의와 사회주의, 공산주의 세력간 흔치않은 연합은 샤의 퇴출로 이어졌다.

호메이니의 귀국
호메이니의 귀국

1979년, 이란 혁명은 최정점에 달했다. 혁명 이전 다양한 세력들의 공동행동을 유지하기 위해 다양한 개혁들을 약속했던 호메이니는 집권 이후 하나 둘씩 반발세력 숙청을 단행한다. 이슬람주의에 기반해 히잡 착용을 의무화하는 등 극단적인 이슬람주의를 건국이념으로 삼았고, 권위주의 통치가 공고해지자, 수많은 여성들과 좌파들, 자결권을 요구하는 쿠르드족 세력이 반발했다. 이에 맞서 호메이니는 샤 시절 못지않게 혹독하게 탄압을 가했고, 자신의 권력을 굳혀나갔다.

1979년 혁명 후 1년도 채 지나지 않은 1980년,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은 이란을 침공한다. 호메이니는 이를 혁명의 정당성을 찾아줄 기회라고 보며 이라크를 상대로 장기전을 펼치게 된다. 무려 7년의 기간 동안 수만 명의 사람들이 죽었고, 양국 경제는 초토화됐다. 7년 전쟁에서도 양국이 물러설 기미가 보이지 않자, 결국 UN이 주도하는 정전 협정이 체결되면서 전쟁은 끝난다. 그리고 협정이 체결되고 얼마 후, 호메이니가 사망한다.

이란에서 조금의 변화가 찾아왔다. 전쟁으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고, 전쟁의 결과는 너무나 초라하고 처참했다. 여기에 호메이니까지 죽으면서 이란 정치의 주류는 이제 개혁주의 세력이 되었다.

1997년 당시 여성들과 학생들이 주도한 대중운동의 기세로 대선에서 승리한 모하마드 하타미와 개혁주의자들은 아래로부터의 염원을 청취해 제도권 내의 억압적 정책들을 하나둘씩 해소하는 듯했다. 하지만 개혁 성과가 나타나던 1999년, 당시 하타미 정부는 언론자유를 요구하던 대학생 집회를 폭력적으로 진압했다. 이렇게 다시 주류 정치는 민중들을 배신했고, 개혁운동은 정체 국면에 접어들었다.

이후 2009년 대선에서는 개혁파 후보인 무사비가 패배했다. 당시 부정선거 의혹이 제기되자, 중산층 중심으로 선거 결과 무효화를 요구하는 전국적 시위가 발발했다. 그것이 바로 앞서 언급한 “녹색운동”이다. 하지만 녹색운동 역시 결국 공권력에 굴복하였고, 개혁운동의 실질적 영향은 좌절을 맛본다.

2009년 선거부정 항의 시위
2009년 선거부정 항의 시위

서구의 헛발질, 운동의 급진화

이 모든 것이 전개되는 동안, 미국을 비롯한 서방의 이란 경제 재제 조치는 격화 일로를 걸었다. 그러던 2015년, 미국의 오바마 행정부 주도로 이란과의 핵협정(이란은 핵무기 개발을 제한하고 서구 국가들의 경제적 제재 완화 한다는 내용)으로 경제 상황이 나아지는 듯 보였다. 하지만 바로 이듬해, 트럼프가 당선되면서 이 협정은 일방적으로 파기되었다. 이는 미국 외교의 뼈아픈 오판으로 기록될 것이다.

계속되는 경제 재제로 인해, 2017년경 노동운동 주도의 평화적 시위들과는 달리, 전투적인 양상을 보이는 운동이 등장했다. 이전 개혁운동의 실패와 좌절을 경험함으로써, 내부 개혁보다는 정권 교체를 요구하는 구호들이 거리를 매우기 시작했다.

2020년, 코로나19라는 불청객이 상황을 더 악화시키자, 2020년 대통령 선거는 개혁파를 완전히 배제시켰고, 이는 기존 세력의 권력을 굳히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이로 인해 대중의 불만은 점차 쌓이는 상황을 낳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역사적 맥락 속에서 2022년 9월의 비극이 벌어졌다. 이후 현재까지 투쟁은 전국적으로 확대되었고, 여성 차별에 반대할 뿐만 아니라 모두의 자유를 찾기 위한 싸움으로 발전하고 있다. 가혹한 탄압 아래 여성들의 저항과 해방, 노동자 파업, 소수민족 자결권, 대학생들의 동맹휴학 등 목소리들이 결합해 시너지를 내고 있는 것이 시위의 현재 모습이다. 모두의 요구가 '정권 교체'로 결집한 것이다.

현 상황에서 이란 민중의 저항이 어떠한 결과를 맞이하게 될지는 누구도 알 수 없다. 다만 1979년 혁명 이후 가장 오래 지속되고 있는 시위라는 점은 잊지 않아야 한다. 이란 민중과의 국제연대를 중요하게 여기는 사회운동은 이 시위가 지닐 잠재력을 주목하고, 연대해야 한다.

글 : 최연우 & 민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