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0년대 형평사 운동과 부락민 해방이 우리에게 말해주는 것들
2023년 3월 2일
1920년대 형평사와 수평사
2022년 말 경남MBC가 제작한 ‘어른 김장하’가 입소문을 타고 ‘꼭 봐야할 다큐’로 알려지면서 많은 화제를 낳았다. 자신은 차 한 대, 새 옷 한 벌 사지 않으면서 수많은 학생에게 장학금을 지원하고, 시민운동단체와 지역언 론에는 기부하면서 정치권력을 멀리한 김장하의 행보이 놀랍고 신선했기 때문이다.
김장하는 평생 ‘형평운동’을 알리는 데는 적극적으로 앞장 서 왔다. 그가 사는 경상남도 진주는 ‘형평운동’이 탄생한 본고장인데, 이 운동은 올해 100주년을 맞는다.
철저한 신분제 사회였던 조선은 18세기 후반부터 급격한 사회변화와 민중의 각성으로 신분사회의 틀이 점차 해체되었다. 이런 변화로 인해 조선 왕조는 1801년 공노비를 해방하였고, 1894년 갑오개혁 때에는 신분 철폐를 공식 선포했다. 이는 동학농민혁명 당시 농민들이 정부에 요구한 ‘폐정 개혁안’*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당시 폐정 개혁안에는 노비 문서를 소각하고, 백정 차별을 철폐하며, 과부의 재혼을 허가하라는 내용이 들어있었다.
- 📑폐정 개혁안(弊政改革案) : 1894년 4월 말 농민군이 전주성에 입성하자, 얼마 후 청나라 군대가 아산만에 상륙했다. 일본군도 톈진조약을 근거로 제물포에 상륙했다. 사태 악화를 우려한 농민군은 정부에 폐정 개혁안을 내놓고, 이를 받아들인다면 농민군을 해산하겠다고 제안했다. 자세한 내용은 다음을 참고.
그러나 백정이 천민 신분에서 해방된 후에도 차별 관습이 크게 사라지지는 않았다. 백정을 양민과 차별하여 마을 교육기관에서 받아주지 않거나 함께 예배보는 것을 기피하는 교회들이 여전히 많았고, 개혁에 반발한 농민이 거리 에서 백정을 구타하거나 백정이 모여 사는 마을을 습격하는 일도 잦았다. 그러나 동학과 기독교의 평등 이념의 영향, 1919년 3.1운동을 거치면서 인권·평등·자주에 대한 인식이 높아지면서 백정들은 스스로 ‘형평’을 추구하는 세력으로써 발돋움하게 됐다.
1923년, 진주에서 최초로 백정 해방운동단체인 형평사가 창립됐다. 형평사 창립 후 가장 먼저 나온 「형평사 선언」은 발기인 총회에서 배포되었다. 이 선언문은 형평사 창립의 취지를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공평은 사회의 근본이고 애정은 인류의 근본 강령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계급을 타파하고 모욕적 칭호를 폐지하여 교육을 장려하며, 우리도 참다운 인간이 되는 것을 기대하는 것이 본사(本社)의 취지이다.
지금까지 우리 조선의 백정은 어떠한 지위와 어떠한 압박을 받아왔던가? 과거를 회상하면 종일토록 통곡과 피눈물을 금할 수 없다. 여기에 지위와 조건 문제 등을 제기할 여유도 없이 일전의 압박에 대해 절규하는 것이 우리의 실정이다 이 문제를 선결하는 것이야말로 우리의 급무이다.
비천하고 가난하고 열악하고 약하여 굴종한 사람은 누구였던가? 아아 그것은 우리의 백정이 아니었던가? 그런데 이러한 비극에 대한 이 사회의 태도는 어떠한가? 소위 지식계급에서는 압박과 멸시만 하였다. 이 사회에서 우리 백정의 내력을 아는가? 결단코 천대받을 우리가 아니다. 직업의 구별이 있다고 하면 짐승의 생명을 빼앗는 사람은 우리 백정밖에 없다. 본사는 시대의 요구보다도 사회의 실정에 따라 창립되었을 뿐 아니라 우리도 조선 민족 이천만의 일원이다. 애정으로써 서로 도우며 생명의 안정을 도모하고 공존을 바라고자 이에 40여 만의 단결로써 본사의 목적과 취지를 밝힌다.
― 「진주에 형평사 발기, 계급타파를 절규하는 백정 사회」, 『조선일보』, 1923년 4월 30일
형평운동이 본격적으로 활동하기 바로 한 해 전인 1922년 3월, 일본에서는 「수평사 선언(水平社宣言)」이 발표됐다. 수평운동은 백정과 마찬가지로 일본에서 차별받던 ‘에타’**가 주축이 되어, "신분에서 해방된 수평 세상"을 만들자는 기치로 일어났다.
- 📑에타 : 에도시대부터 천민으로 고착화된 계급. 도축과 피혁업, 간수(교도관) 와 같은 일을 담당했다.
당시 일본은 서양 문물의 도입으로 육식 문화와 도축에 대한 거부감이 줄어들고 있었다. 또, 여러 인권선언과 기독교 사상의 영향으로 신분해방에 대한 욕구가 높아져 있었다. 1871년, 천민을 해방한다는 내용의 ‘해방령’이 공포됐지만, 기존 평민들은 에타 출신을 사회구성원으로 받아들이지 못했다. 봉기를 일으켜 에타의 부락을 습격하기도 했다. 또한 ‘평민’과 다르다는 뜻에서 에타 출신에게 굳이 ‘신평민’이라는 이름을 붙여 차별을 지속하는 경우도 많았다.
그러던 와중인 1918년, 쌀 공급이 부족해져 농민들의 저항이 크게 일어났다. 당시 일본 경 찰은 소요의 진원지를 에타 출신 부락민으로 지목하기도 했다. 이처럼 부락민에 대한 불합리한 차별이 여전히 지속되자 에타들은 자신의 조직을 세워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1922년 '부락민 해방'을 내세운 수평사가 창립된 것에는 이러한 배경이 있다.
수평사 선언 번역의 의의
수평사 창립 시 제창한 「수평사 선언」과 강령은 세계 8개 국어와 아이누어(홋카이도 아이누족의 언어)로 번역됐다. 2022년에는 이를 류큐어(오키나와의 옛 언어)로도 번역했다. 지난 2023년 1월 20일자 『週刊金曜日(주간금요일)』에 자유기고가 히라노 지로(平野次郎)가 이를 소개했다. 아래는 이 글을 번역한 것이다.
2022년은 부락해방운동의 출발점이 된 전국수평사 창립 100년, 오키나와 일본 복귀 50년이 된 해였다. 오키나와에서 반전 반차별 운동을 지속해온 조각가 긴죠 미노루 씨(84세)가 「전국 수평사 창립 선언」(이하 '수평사 선언')의 류큐어 번역을 완성해 2022년 12월 3일, 수평사 발상지인 나라현 고세시의 사이코지(寺)에서 류큐어 번역선언문을 발표했다.여기에는 모든 피차별 소수자의 해방을 위해 차별의 문제를 다시 세 상에 드러내겠다는 그의 의지가 담겨 있다.
고세시 농촌마을의 수평사박물관엔 당시 운동에 관한 사진과 편지, 일기, 기관지 등이 전시되어 있고, 박물관 앞 광장 맞은편에는 「수평사 선언」을 중심으로 기초한 사이코 만키치의 생가 사이코절이 있다. 광장에는 「고마이 기사쿠 자택(수평사 사무소의 터)」을 알리는 입간판이 있고, 마찬가지로 창립 멤버인 사카모토 세이이치로의 생가터도 가깝다." 필자는 이처럼 상세한 현장 묘사를 통해 이 운동의 정신이 여전히 살아있음을 알리려 한다.
“세상에 열정 있으라, 인간에게 빛이 있으라“는 구절로 알려진 「수평사 선언」은 1922년 3월 교토시 오카자키 공회당에서 강령과 함께 채택됐다. 당시 제1차 세계대전 후 파리강화회의에서 인종평등과 민족자결이 주창되면서 일본내에서는 노동운동과 농민운동이 한창이었다. 이러한 시대 배경 때문에 수평사 선언은 피차별 소수자 운동에 큰 영향을 미쳤다. 같은 해 12월 간사이조선인연맹, 1924년 간사이오키나와현인회, 1926년 아이누민족조직 해평사가 설립됐고, 일본식민지하 조선에서는 1923년 피차별민인 ‘백정’의 조직 형평사가 발족해 이듬해 수평사와 교류를 시작했다.
긴죠 미노루 씨는 오키나와현 하마히가시마(현 우루마시)에서 태어나 소학교에서 류큐어를 사용하면 '사투리'라고 쓰인 패를 목에 거는 벌을 받았다. 교토의 대학에 진학할 당시에는 일본어를 익히느라 고생했지만 (아직도) 긴죠씨가 생각하고 표현할 때 바탕이 되는 말은 류큐어다.
그러던 그가 「수평사 선언」과 만난 것은 1970년대 후반 오사카시에서 야간중학교 교사로 있을 무렵이다. 오키나와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언어와 문화를 차별받고 인간의 존엄성마저 빼앗긴 피차별 부락과 재일동포들을 접하면서 부락해방운동에 관여하게 됐다.
1990년대 초 긴죠 씨는 오키나와현 요미타니촌(村)에 작업실을 열어 작품 활동을 하면서, 야스쿠니 합사 소송과 오사카 고등법원에서 심리중인 류큐 유골 반환 소송의 원고로서 재판에 참가했다. 염원이었던 「수평사 선언」 류큐어 번역을 완성한 후, 양대 소송을 함께 한 원고 대리인 니와 마사오 변호사 등이 사이코지 본당에서 「전국 수평사 창립 선언의 류큐어 번역을 선보이는 모임」을 열었다.
수평사 선언이 말하고자 했던 것
”전국에 산재하는 우리 특수부락민이여 단결하라.“
- 全国に散在する吾が特殊部落民よ団結せよ。시마지마 쿠니구니 카이 치라바타루 시킨, 나웃찰마지리무 라 누 히토비토요 히야미카치 우키리.
수평사 선언 첫머리의 이 문장은 공산당 선언의 만국의 프롤레타리아여 단결하라에서 따온 것이다. 문제는 차별용어인 ‘특수부락민’을 어떻게 번역하는가였다. 긴죠 씨는 “비하 표현 그대로 선언의 첫머리에 사용함으로써 보편적 의미를 담았다”며, 류큐어에는 차별의 뜻이 없는 ‘마지리무라 누 히토비토요(부락 사람들)’라고 번역하고, 그 앞에 안 좋은 의미의 ‘나웃찰(이름이 알려졌다)’을 덧붙였다. ‘히야미카치 우키리(단결하라)’는 현재 헤노코 기지 신설 반대 투쟁의 구호로 사용하고 있다.
“이렇게 인간을 동정하는 듯한* 운동이 오히려 많은 형제를 추락시켰음을 생각하면”
- これ等の人間をいたわるかの如き運動は、かへつて多くの兄弟を墜落させた事を想えば、아바사쿠사북아 지라시 안다구치니 다마삿티챵 시와자야 다, 아바! 케이테 왓타쵸데타누미풀 바삿타루 쿠투미레
긴죠 씨는 선언 첫 단락 후반에 나오는 ‘동정하다’이라는 말이 갖는 의미가 수평사 선언 사상의 핵심이라고 지적한다. 선언에 나온 ‘いたわる이타와루= 동정하다’는 겉으로는 이해하는 척하면서 속으로는 모욕한다는 뜻을 나타내고 있으며 ‘불쌍히 여기다’에 가까운 의미다. 러시아 작가 막심 고리키의 희곡 『밑바닥에서』의 한 번역본에 나온 ‘인간은 동정할 것이 아니라 존경해야 할 것’이라는 대사에서 이‘동정’이란 단어를 빌려왔고, 사이코 만키치가 수평사 선언 작성 시 (같은 뜻으로) 사용했다고 한다. 긴죠 씨는 ‘いたわる이타와루= 동정하다’를 하마히가섬 어부들이 쓰는 말을 사용해 번역했다. ‘아바사’는 만지면 몸을 크게 부풀리는‘가시복과’물고기를 말하고,‘쿠사북아’는 해초를 먹고 배부분이 까매진 작은 물고기를 뜻하는 말로 여기에 ‘지라시(얼굴)’을 합치면 ‘상대를 업신여기는 얼굴(태도)’이 된다. '안다구치'(달변)는 말솜씨가 훌륭하여 술술 말한다는 뜻이므로 이들 말을 합하여 '(속으론 업신여기면서)동정하다'의 뜻을 표현하였다. 그 다음 문장은 '시와자야'(짓), '왓타 쵸데타누'(우리형제), '미풀 바삿타루'(망가졌다)로 직역했다.
차별어를 오히려 긍지로 삼다
짐승의 가죽을 벗기는 보수로 우리 인간의 생가죽은 벗겨지고
- ケモノの皮剥ぐ報酬として、生々しき人間の皮を剥取られ、안시가 이치무시누 가하가챠루 가와이나카 츄 닌진누 나마가 하지토우랏티,
'안시가(그럼에도)'는 목숨을 걸고 일해 왔음에도 라는 뜻이고, 그 다음 '이치무시누(짐승)', '가하가챠루(가죽을 벗기다)', '가와이나카(대신해서)로 직역했다. ‘닌진누(인간)’와‘나마가(생가죽)’를 ‘하지토우랏티 (칼로 벗겨낸다)’한다는 말이 (도축의) 이미지를 생생하게 드러낸다. 일본 사 회에는 생물을 죽이는 것이나, 피처럼 죽음에 연결되는 것을 꺼리고 싫어하는 문화가 있다. 하지만 킨죠씨는 어린시절 오키나와의 광장과 해안에서 돼지와 염소를 손질해 모두 함께 먹었다. 짐승가죽을 벗기는 일을 차별하지 않았고 피가 더럽다는 생각이나 문화도 없었다고 한다.
우리가 에타라는 사실에 긍지를 느낄 수 있는 때가 온 것이다.
- 吾々がエタである事を誇り得る時が来たのだ。왓타가 에타, 은디누쿠투야 후크라사니우무이루 투치가 천.
류큐어에는 없는 차별어인 '에타'를 그대로 사용하여 '은디누쿠투야'(라는 것), '후크라사니우무이루'(자랑스럽게 여기다), '투치가 천'(때가 왔다)의 순서대로 번역하고 있다. 오키나와에서는 2016년 미군의 헬기장 건설에 반대하는 시민에게 오사카부 소속 경찰 기동대원이 '도진(원주민을 낮춰 부르는 말)'이라고 발언했다. 이 발언에 항의해, 긴죠 씨는 스스로를 「도진」이라고 선언한다. 차별어를 반전시켜 자긍심으로까지 높이려면 치열하게 고민하고 차별사회에 대항해 계속 싸우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일본 최초의 인권선언
인간 세상에 열정(온정, 따뜻함) 있으라, 인간에게 빛이 있으라.
- 人 の世に熱あれ、人間に光あれ。츄 닌진누 이치민카이, 니치, 우타비미소리. 츄 닌진니, 히카리, 우타비미소리요!
선언은 마지막으로 '이치민카이'(세상), '우타비미소리'(절절히 부탁한다) 라고 호소한다.
수평사 선언은 일본 최초의 인권선언으로 피차별 당사자가 만든 선언으로는 세계 최초로 알려져있으며 부락해방인권연구소는 영어 한국어 아이누어 등 8개 언어로 번역하여 홈페이지에 게시하고 있다. 긴죠씨가 스스로를 「도진」이라고 선언하듯이 모든 피차별 소수자가 ‘긍지를 느낄 때가 되었다’고 선언함으로써 수평사 선언은 보편적 해방을 외치게 되었다.
수평사 선언을 아이누어와 류큐어로 번역한 것은 조금 특별한 의미가 있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이 언어의 사용자들 역시 ‘에타’와 같은 취급을 받았기 때문이다. 1869년 메이지 정부는 홋카이도에 가이타쿠시라는 정부 기구를 설치한 후 본토 일본인의 홋카이도 정착을 장려했다. 1899년에는 ‘아이누족’을 보호하고 토지를 할당하는 법’을 제정했는데 이는 미국의 도스법***처럼 아이누민족의 토지를 빼앗고 일본 주류 사회에 동화될 것을 강제하는 역할을 했으며 아이누 족을 ‘열등한 인종’취급하여 아이누족의 원래 삶의 방식인 수렵과 낚시를 금했다. 당시 일본인은 아이누 족을 일본 내의 유일한 다른 인종이라하여 아이누 족과 와징(和人-아이누 족이 아닌 일본인 모두)으로 구분해 부르기도 했다.
- 📑도스법 : 아메리카 원주민에게 토지를 할당하여 백인 사회에 편입시킨다는 명목으로 제정되었다. 아메리카 원주민에게 일정한 토지를 분배하고 나머지를 백인 이주민에게 분배한다고 했지만 원주민은 농사짓기에 불리한 땅을 받았고 경작할 도구도 마땅치 않았기에 결국 자신의 터전을 백인 이주민에게 빼앗기는 형편이 되었다.
남쪽 끝에 있는 류큐는 오랫동안 중국과 일본사이에서 평화 무역을 하던 섬이었다. 1874년 군대를 끌고 내려온 일본에 병합되었고, 1920년까지 제대로 된 선거도 치르지 못했다. 2차 세계대전 당시엔 일본 본토의 육지전을 차단하는 전쟁 최전선의 역할을 맡기도 했다. 전쟁 직후 미국의 지배 하에 놓였으며, 일본에 반환된 후에도 오키나와는 여전히 본토를 위한 ‘기지’로써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식민지 지배하에 있던 재일조선인도 피차별부락민과 비슷한 처지였다. 일제 치하에서 농토를 빼았겼고, 제주 4.3사건 당시 이승만 정부의 학살을 피해 수많은 사람들이 일본으로 이주해 차별 속에서도 고된 노동을 하며 살았다. 심지어 이들은 ‘부락민’의 기원으로 취급되 기도 했다. 예를 들어, 기후현의 피차별부락에서 태어나 부락해방운동을 한 기타하라 다이스케가 소년 시절에 들었던 말을 회상한 대목을 보면 잘 드러나 있다.
“너 따위는 일본인이 아니잖아. 너희 조상은 진구 황후가 삼한 정벌을 했을 때 데려온 조선 포로라고!”
― 구로가와 미도리(黒川みどり)의 『재생산되는 차별의 낙인(つくりかえられる徴)』, 解放出版社, 2004년
청일전쟁 전후 널리 퍼져있던 피차별부락의 '조선 기원설'은 피차별부락민에 대한 차별을 공고히 하기 위한 수단으로 ‘민족’을 사용했음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수평사 선언」이 발표된 당시 차별받는 민족(아이누, 류큐, 조선)이 직접 언급되지는 않았지만, 수평사 운동은 인간 존중(“인간을 모독해서는 안 된다”)을 내세웠던 운동이었다. 피차별 민중을 배제하지 않는다는 것을 기조로 삼았으리라 추정할 수 있다.
일본 수평사와 조선 형평사의 관계를 살펴보자. 우선 성립시기가 1년여 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다. 형평사 창립을 주도한 진주 지역 언론인 신현수의 증언을 통해 수평사의 영향을 간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일본에서도 신평민의 해방운동으로서 수평사 운동이 맹렬하다. 우리는 수평보다 더 뜻이 깊은 저울(형)같이 공정한 평등을 주장하자는 뜻에서 형평이라 한 것” (김중섭, 2015, 391p 재인용)
또한 두 단체 모두 차별과 억압의 원인을 ‘제도’에 있다고 보았다. 형평사는 “소위 지식 계급의 압박과 멸시”를, 수평사는 “비열한 계급 정책”을 문제 삼았다. (김중섭, 2015,173p 20~23) 선언 이후 수평사와 형평사는 서로 축전을 보내는 등 교류가 있었지만 일본제국주의 치하에서 식민지 단체인 형평사나 사회주의의 영향을 크게 받은 수평사의 특성상 활발한 연대가 어려웠고, 나중에는 두 단체 모두 일본의 침략전쟁에 협력하거나 군국주의화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현재 수평사는 다시 본연의 인권 운동의 자리로 돌아가는 중이다. 나라시에는 수평사박물관이 있고 인터넷으로도 자료를 볼 수 있다. 부락해방인권연구소에서는 인권관련 세미나를 개최하고 지역별 부락해방동맹연합회를 총괄하며 각종 차별 문제에 대응하고 있다. 형평사의 정신을 이어가려는 형평운동기념사업회는 주로 진주를 중심으로 활동한다. 1996년 진주에 형평운동 기념탑을 건립했으며 올해 4월 형평운동 100주년을 맞아 홍보에 주력한다. 진주지역민들과 활동가들은 형평 운동의 발원지로써의 긍지를 가지고 진주를 ‘인권도시’로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부락민 여성
수평사의 부락민은 ‘에타’ 뿐만 아니라 그 보다 더 천대받았던 ‘히닌(非人, 주로 '홈리스'였다)’, 아이누족, 류큐민족, 조선민족, 그리고 제도권 교육에서 제외되어 차별의 기록조차 거의 남기지 못한 부락 여성들도 중요한 구성원이었다. 부락 여성의 삶을 구술로 정리한 자료에 따르면, 당시 부락 여성들은 6세 이전부터 동생을 돌보거나 가사나 조리 노동을 분담했다. 또한 당시에는 7~14세의 여자아이들이 다른 지역에 일을 하도록 보내졌다. 이렇게 노동력을 착취당하고 결혼해서도 농사일과 가사일까지 감당했지만, 감히 불만을 말하지 못했다.
1923년 2차 전국 수평사대회에서 ‘부인수평사’가 설립된 이유는 이 때문이다. 비록 일제의 탄압으로 수평사의 활동은 1920년대 말에 멈췄으나, 수평사 여성회원들은 ‘수평신문’에 자신들이 겪는 이중·삼중 굴레의 부당함을 알리고, "하루라도 빨리 새로운 부락 건설을 위해 힘쓰자"고 당당하게 외쳤다. 그럼에도 최초의 「수평사 선언문」에 여성이나 이민자 출신의 부락민 이야기가 나오지 않는 점은 아쉽다. 영어 번역본에서도 여성 주어는 전혀 사용되지 않았다.****
- 📑수평선언은 진보적 이념의 영향을 받았지만 주어가 남성으로만 한정된 시대적 한계를 볼 수 있다. ‘학대받은 형제들이여’, ’남자다운 선업적 순교자’등이다. (평등사회를 향하여, 김중섭, 지식산업사, 2015, 171p) 더 네이션 지에 실린 영역본의 경우 Brothers and sisters로 표기되었지만 이후 수정본에서는 오히려 퇴보하여 brothers 로 바뀌었다.
한국은 이제 ‘백정’이라는 계급이 없어졌다. 하지만 김장하는 『어른 김장하김장하』 속 인터뷰에서, “(100년이 지난 지금도) 차별은 없어지지 않고 그대로 유지되는 것 같아 안타깝다”고 말했다.
우리는 ‘개인의 호불호’라는 이름아래 공공연히 ‘혐오’를 드러내지만, 사실은 이 ‘호불호’가 사회제도가 만들고 유지하는 ‘차별’이라는 것을 모른다. 이러한 ‘차별 구조’를 자각하지 못하고 각자도생에 매몰되면, '돈을 쌓아둘 자유'를 지키는 일에만 열중하는 국가권력을 묵인하고, 세상을 바꾸는 일과는 멀어질 것이다.
형평사운동과 수평사운동을 기념하고, 배제되었던 목소리(류큐어)로 번역해 알리는 일은 한국의 백정과 일본의 피차별부락민이 주장해 온 사회와 인류의 근본이 ‘돈 버는 자유’가 아니라 ‘공평과 애정’이 사회와 인류의 근본이라는 점을 잊 지 않는 것과 같다. 이를 잊지 않고, 열정(따뜻함)과 빛이 있는 인간 사회를 만드는 여정이 지속되길 희망한다.
빛이 있으라
아래는 「수평사 선언」을 번역한 것이다. 굵은 글씨는 류큐어 번역본을 중역한 부분에 해당한다.
전국에 산재하는 우리 특수부락민이여, 단결하라
오랜 세월 학대받은 형제들이여, 과거 반세기 동안 우리를 위해 많은 사람들이 온갖 방법으로 전개한 운동이 이렇다 할 성과를 조금도 거두지 못한 것은 우리와 사람들이 그 모든 운동을 통해 언제나 인간을 모독했기 때문에 내려진 벌이다. 그리고 인간을 망치는 것(勦る)*과도 같았던 이들 운동이 도리어 많은 형제들을 타락시켰음을 상기한다면 지금 우리 가운데서 인간에 대한 존경을 바탕으로 스스로를 해방시키기 위한 집단운동이 일어나게 된 것은 오히려 필연적이다.
형제여, 우리의 선조는 자유와 평등을 갈망하고 실행하는 사람들이었다. 비열한 계급정책의 희생자이자 남자다운 산업적 순교자였다. 짐승의 가죽을 벗기는 보수로 우리 인간의 생가죽은 벗겨지고, 짐승의 심장을 가르는 대가로 인간의 따뜻한 심장이 찢기며, 하찮게 뱉어내는 조소의 침으로 얼룩져야 했던 저주의 밤 그 악몽 가운데서도 당당할 수 있는 인간의 피는 마르지 않았다. 그렇다, 우리는 그 피를 이어받아 인간이 신을 대신하는 시대를 만난 것이다. 희생자가 스스로의 낙인을 떨쳐낼 때가 왔다. 순교자가 스스로의 가시관을 축복할 때가 왔다. 우리가 에타라는 사실에 긍지를 느낄 수 있는 때가 온 것이다. 우리는 결코 비굴한 말과 겁먹은 행위로 선조를 욕되게 하거나 인간을 모독해서는 안 된다. 인간 세상이 냉혹할 때 그것이 얼마나 차가운 지, 인간을 망치는 일이 무엇인지 잘 아는 우리는 여기 인생의 뜨거운 힘과 빛을 진심으로 갈구하고 예찬하는 바이다.
그리하여 이 자리에 수평사는 탄생했다.
인간 세상에 열정 있으라**, 인간에게 빛이 있으라.
1922년 3월 3일, 「수평사 선언」의 한글 번역
- 📑인간을 망치는 것(勦る) : 수평사 선언 일본어 원문에는 勦る라고 쓰고 옆에 ‘이타와루’라는 음을 따로 표기하고 있다. ‘이타와루’는 동정하다, 위로하다는 뜻을 지니는데 실제로는 ‘勦’가 아닌 ‘労’을 사용한다. ‘勦’는 ‘죽이다, 망치다’라는 뜻이므로 잘못된 표기이지만, 수평사 선언에서 ‘(인간을)위로하는 것 같지만 실은 망치고 있다’는 뜻을 나타내기 위해 일부러 동정하다가 아닌 ‘망치다’는 뜻의 한자(勦)를 사용한 것이다. 그러므로 수평사 홈페이지에 실린 한국어 역의 ‘망치는 것’이라는 단어는 (은유의 표현을 직역으로 바꾸는 바람에) 문장 해석이 왜곡될 우려가 있으므로 이 글의 본문에는 ‘위로하는’으로 한국어 역을 바꿨다.
- 📑인간 세상에 열정 있으라(人間の世に熱あれ!) : 1923년 더 네이션 기사에 실린 수평사 선언의 번역 마지막줄은 Let there be heat and light!이었다. (원문은 ‘人間の世に熱あれ!’ ) 그러나 고마이 타다유키(駒井 忠之)가 heat 대신 warmth로 바꿔야한다고 주장하여 warmth로 바뀌었다. 고마이는 수평사 창립자들이 추구한 ‘얼음장 같은 차별’을 없애는 ‘열熱’이란 물리적인 에너지를 뜻하는 ‘열heat’이 아니라 우호적으로 사람의 마음을 편하게 하고 긴장을 풀어 닫힌 사람의 마음을 부드럽게 하는 따뜻함=warmth라고 해석했다. 이 해석이 맞다면 한국어 버전의 ‘열정’도 ‘따뜻함이나 온정’으로 바꾸는 것이 더 나을 것으로 보인다.
글 : 박근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