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치에우 산티아고 ① | 칠레에서 대중저항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던 이유
2023년 3월 20일
필자는 현재 칠레 산티아고에 체류 중이다. 이곳에서 다양한 사회운동가들을 만나며, 1년여 간의 체류기를 연재할 예정이다. "마리치에우"는 마푸체(Mapuche)어로 "백번 천번 이겨내리라"는 뜻이 다. 마푸체 투쟁과 칠레 사회운동에서 널리 사용되는 구호다.
- 📑마푸체 : 칠레 중남부, 아르헨티나, 파타고니아에 살고 있는 아메리카대륙 원주민
칠레에 온 지도 어느덧 2개월이 되어간다. 칠레에서 보내는 시간을 헛되이 보내고 싶지 않다. 부족하나마 산티아고에서의 경험과 상념, 교류하며 나눈 이야기들을 정리해 한국 사회운동과 공유하고자 한다.
한국에서 사회운동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 '칠레'에 대해 가장 먼저 떠올리는 이미지는 살바도르 아옌데(Salvador Allende)라는 인물과 2019년 대투쟁일 것이다. 하지만 정작 운동들이 일어난 칠레 사회의 현실이나, 기저의 다양한 사회운동 주체들에 대해서는 알려져 있지 않다. 이 글은 앞으로 필자가 1년간 칠레에 거주하면서 써내려갈 칠레 사회운동과 라틴아메리카 사회운동 탐방기이다. 산티아고에 도착해 생활하며 관찰한 것을 간단하게 풀어나가고자 한다.
칠레에 와서 가장 먼저 눈에 띄었던 것은 '물가'였다. 라틴아메리카에 대한 흔한 편견 중 하나라면, 경제 수준이 낮아 물가도 저렴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칠레의 물가는 코로나 이전의 한국과 그리 차이 나지 않을 정도로 높다. 산티아고에서 외식 한 번을 하려면 1인당 기본 1만5천원 이상이 들고, 전통시장이 아닌 대형마트에서 장을 보면 6만원 이상은 써야 한다.
주거비 문제도 심각하다. 서울 청년들이 원룸을 얻어 생활하듯, 산티아고 청년들은 주로 아파트를 빌 려 생활한다. 한데 임대료가 매우 높아 평균 평수가 서울보다 조금 크기만 해도 기본 50만원 이상의 월세를 지불해야 한다. 법정 최저임금이 60만원 정도인 상황에서 이 정도의 물가라니, 놀랍지 않을 수 없다.
칠레의 수출액은 전체 GDP의 30%를 차지한다. 36%를 차지하는 한국보다는 낮은 편이지만 수출의존도가 상당한 수준이다. 수출 품목을 살펴보면, 구리가 반절을 차지하고 그 뒤로 석유제품, 수산물, 과일 등이 뒤를 잇는다. 전자기기, 자동차, 선박 등의 중공업 및 첨단공업 제품이 주를 차지하는 한국과 달리 칠레는 1차산업인 광업·어업·농업 생산품이 주요 수출품이다. 역으로 수입품은 한국의 수출품에 해당하는 전자기기, 첨단기기, 기계, 자동차 등 공업 생산품이 주를 이룬다. 즉, 1차산업 생산물을 수출하고 공업품을 수입하는, 전형적인 저개발국 경제구조를 지니고 있다. 특히 광업은 2020년 기준 GDP의 10%(칠레중앙은행), 2016~20년 기준 전체 수출액의 50%, 2019년 기준 외국인직접투자의 32%(Santander)를 차지한다. 원자재 국제가격과 글로벌 경기변동 상황에 따라 경제성장이 좌우되는 구조인 셈이다. 따라서 칠레 경제가 좋을 때에는 자동차나 가전제품의 소비수요가 증가할 때이고, 원자재 국제가격이 하락하면 경제는 둔화된다. 이는 칠레 사회를 불안하게 만드는 핵심적인 원인이다.
물론 칠레 경제가 항상 이런 상황을 나타냈던 것은 아니다. 아우구스토 피노체트(Augusto Pinochet)가 군부독재를 시작한 1973년 쿠데타보다 1년 전인 1972년, 칠레의 국가총생산 대비 수출액 비중은 9.7%로 지금보다 훨씬 낮았다. 내수가 활발하고 내부 공업을 갖추고 있어 자급자족이 가능했다.
그러나 피노체트 집권 이후 전면적인 신자유주의 정책이 시행됐다. 피노체트는 아옌데가 시행했던 구리 국영화 정책을 뒤집고 민영화를 감행했으며, 의료와 전기, 수도 민영화를 시행했다. 서구 선진국 자본이 몰려들어오면서 칠레의 공업이 무너졌고 지금처럼 저개발국으로 전락해버렸다. 그 여파로 농업과 어업의 생산규모가 매우 큼에도 불구하고 수출이 우선되어 물가가 올라간 것이다. 당시 임금이 낮았음에도 불구하고, 국내 자본과 외국 자본은 폭리를 취하는 행태를 보였는데, 이 또한 물가 상승의 원인이 됐다. 리데르(Lider), 유니마르크(Unimarc), 산타 이사벨(Santa Isabel) 등의 대형 유통사에서 물건을 구매할 때의 가격은 전통시장인 페리아(Feria)에서 구매할 때보다 거의 2-3배, 심하게는 5배까지 비싸다.
신자유주의의 폐해는 이에 그치지 않는다. 세계 경제에 연결되어 제3세계로서 당하는 착취에 더불어, 매판 자본의 착취가 더해지니 양극화는 더욱 더 심화됐다. 가령 한국의 강남에 해당하는 산티아고의 라스 꼰데스(Las Condes)와 삼청동이나 성북동에 가까운 뻬냘롤렌(Peñalolen) 등의 지역은 생활 물가 뿐만 아니라 풍경도 닮아있다. 칠레의 가난한 민중들은 이 지역 주민들을 "꾸이꼬(Cuico; 타지 사람)"라고 불리는데, 적극적으로 미국식 생활양식을 따라한다. 첨단 가전제품의 혜택을 누리고, 휴양지에도 그들만의 구역이 있을 정도로 유복한 삶을 누린다. 꾸이꼬의 구역은 항상 정비되어있고 깔끔하다. 사설 경비를 고용해 자기만의 안전을 지킨다.
반면 ‘게이티드 커뮤니티(gated community; 외부인 출입통제 주거단지)’의 경계 바깥에서 사는 서민들은 더럽고 위험한 곳에서 살아간다. 팬데믹을 거치면서 칠레의 치안 상황은 베네수엘라발 마약상과 소규모 갱들의 출현으로 총격전이나 총기 협박 강도 등이 자주 일어나고 있다. 서민들은 이런 위험을 항상 안고 살아야 한다.
휴양지 상황도 대조적이다. 서민들이 지나다니는 곳에는 개똥이 여기저기 방치되어 더럽고 불편하다. 자연스레 생활양식도 분리되어 있다. 서민과 ‘Cuico’는 서로 행동방식과 옷차림, 어투만으로도 구분할 수 있다고 한다.
이런 계급사회는 보건의료서비스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서민들은 그나마 저렴한 공공의료에 의존하는데, 의사와 간호사 등 의료진이 부족하기 때문에 진료를 받으려면 오랜 시간 대기해야 한다. 결과적으로 질이 낮은 의료서비스를 받을 수밖에 없다. 필자 역시 독감으로 응급실에 간 적이 있는데, 2시간 이상 대기한 끝에 주사 한 대를 간신히 맞을 수 있었다.
사립학교는 굉장히 비싸고, 대학 등록금도 높다. 이 때문에 칠레의 의대생들은 대부분 중산층 이상이다. 따라서 의대를 졸업하고 기회만 있으면 미국으로 가거나 사립영리병원을 개업하려고 하지, 공공의료시설을 기피한다. 따라서 공공의료시설에 가면 베네수엘라, 아르헨티나, 쿠바 등 해외출신의 의사들이 일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한편, ‘Cuico’들은 사립영리병원에서 주치의를 두고 있으며, 수준급의 의료 서비스를 누린다. 심각한 상황에 다다르면 미국까지 원정 가서 수술을 받는 등 한국과 크게 다르지 않은 의료수준의 혜택을 누린다.
그렇기에 우리가 접했던 칠레의 2019년 투쟁은 '이제는 정말 못살겠다'는 절규였고, 부자들의 세상을 무너뜨리고 싶다는 열망의 표현이었다. 아옌데가 꿈 꾸었던, 칠레에 사는 평범한 사람들을 위한 '자주적인 칠레'라는 꿈은 여전히 칠레인들이 자신들의 삶을 바꾸기 위한 희망이다.
칠레의 수출품은 주로 중국, 미국, 일본, 한 국 등으로 수출된다. 더 이상 한국은 세계에 영향력이 없는 힘 없는 개발도상국이 아니다. 한국은 착취당하기보다는 착취하는 입장이 된 지 오래다. 반면 한국에서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의 삶은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따라서 더 나은 삶을 위한 칠레인들의 열망과 투쟁은 한국의 노동자들을 착취하는 대자본에 맞선 투쟁이기도 하다. 앞으로 이들의 눈물과 땀이 담긴 투쟁 이야기를 전하고자 한다. ✊
글 : 이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