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백지 시위와 함께 한 사람들의 잊지 못할 밤

중국 백지 시위와 함께 한 사람들의 잊지 못할 밤

그날 밤 상하이 거리에서는 어떠한 법치의 존재도 찾아볼 수 없었다.

2022년 12월 31일

[동아시아]중국대륙동아시아, 백지시위, 상하이, 제로코로나, 중국

동동 : 이 글은 ‘白纸抗议被捕者:被警察扇耳光、扣留两天,出来后我被同事孤立了’’(경찰에게 뺨 맞고 이틀 간 억류된 후엔 동료로부터 따돌림을 당하다)’를 비롯하여, 인터넷 상에 게시된 체포자 소식들을 종합해 재구성한 것이다. 이번 시위에 참여한 수많은 청년들이 어떠한 생각을 갖고 있고, 어떠한 경험을 했는지 이해할 수 있다. 백지 시위의 연원과 과정에 대해서는 2022년 12월 2일 플랫폼C에 업로드된 「우루무치 화재 참사와 백지 시위」가 보다 상세하게 담고 있다.

상하이의 잊지 못할 밤

11월 27일 정오 경, 20대 초반 여성인 양건(羊艮)은 상하이시 구도심 우루무치중로를 찾았다. 전날 밤에도 많은 사람들이 거리에 섰지만, 그날은 토요일이라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거리로 나왔다. 멀찍이서 관망하는 사람도 있었고, 가까이서 구경하는 사람도 있었으며, 더 많은 이들의 참여를 호소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그녀는 한 손에는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시집, 다른 한 손에는 백지 몇 장과 피켓을 들고 있었다. 그녀는 피켓에 이렇게 적었다. “지붕 위 하늘을 영원히 기억하라. 용감하게 자유와 존엄을 지키는 모든 이들에게 고함”

그녀는 꽃을 안고 길을 걷고 있었다. 그러자 경찰 하나가 달려와 말했다. “선생님, 꽃을 땅에 놓지 마시고 도로 돌아가십시오.” 양건은 이어폰을 낀 채로 경찰관을 바라보았다.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그녀는 아랑곳 않고 그대로 걸어갔다. 그녀는 그 경찰관을 째려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오후 서너시경, 여학생 둘이 경찰과 말싸움을 했는데, 갑자기 경찰이 학생들을 체포해가려 했다. 그러자 주변에 있던 시민들이 두 학생을 구했다. 양건 역시 이에 함께 했다. 그렇게 몇 시간 동안 경찰과 시민들간 대립이 반복됐다. 경찰이 아주 많지는 않았고, 시민들이 밀집해 있어서 힘을 발휘할 수 있었다.

오후 5시, 경찰 병력이 눈에 띄게 늘어나더니 이내 인파를 몰아내기 시작했다. 경찰의 검거 작전도 점차 촘촘해졌다. 경찰은 사진을 찍거나 구호를 외치는 사람들, 그리고 남성들을 위주로 잡아들였다.

저녁 7시가 넘어 날이 어두워지자 경찰은 무차별적이고 폭력적으로 돌변했다. 양건은 우위안로(五原路)에서 화이하이로(淮海中路), 푸싱시로(复兴西路)로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경찰에 붙잡힌 사람들이 다시 인파 속으로 돌아오도록 하는데 힘썼고, 그러면서도 동시에 자신이 인파와 떨어져 혼자 있지 않도록 신경써야 했다. 경찰은 시위대가 있는 쪽으로 차량을 끌고 와 마구잡이로 폭행하기도 했다.

양건 곁에 있던 두 남성이 체포되었을 때, 그녀는 둘을 구해줄 수 없었다. 그 중 한 명이 붙잡히자 네다섯 명의 경찰들이 몰려들어 그를 땅바닥으로 짓눌렀다. 남자는 저항하면서 “숨이 막혀요!”라고 말했지만 그 경찰들은 계속해서 힘껏 짓눌렀다.

시민들은 경찰에게 “무슨 근거로 사람을 이렇게 잡아가느냐”고 따졌지만, 경찰은 아랑곳 않고 억지를 부렸다. 체포된 사람들은 모두 범죄자로 취급되었고, 경찰은 있는 힘껏 시민들을 구타했다.

시민들은 《의용군진행곡 义勇军进行曲》의 작곡가이자 혁명가인 니에얼(聂耳) 동상 근처로 물러났다. 동상 앞에는 인터내셔널가를 부르는 시민이 서 있었고, 촛불과 무지개 깃발이 놓여 있었다. 니에얼의 생애가 적혀 있는 동상 비석엔 “일어나라, 노예가 되길 원치 않는 이들이여!”(起来,不愿做奴隶的人们)라고 적혀 있었다.

니에얼 동상 앞에 있던 많은 시민들이 체포됐다. 양건은 다른 한 청년과 함께, 경찰에 맞서던 외국인 유학생을 구출했다. 이 두 명이 아니었다면 그 외국인은 체포됐을 것이다.

그 다음에는 언젠가 어느 영화 상영회에서 만났던 친구와 마주치기도 했다. 당시 그는 경찰에 항의하며 소리치고 있었는데, 양건은 그 친구마저 끌려갈까봐 다른 이들과 함께 그를 구해주었다.

이런 식의 구출 행동이 몇 시간 내내 이어졌다. 그날 밤 상하이 거리에서는 어떠한 법치의 존재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저 양건이 3년 전 홍콩 도심에서 목격했던 국가폭력과 이에 쓰러지는 시민들의 재현을 목격할 수 있을 뿐이었다. 눈앞에서 동료 시민들이 끌려가는 모습을 볼 때 양건이 할 수 있는 일은 단 한 사람이라도 더 구하기 위해 몸부림을 치는 것 밖에 없었다.

미니버스

밤이 어둑어둑해지자 인파는 점차 뜸해졌고, 경찰들이 사람들을 체포하기도 더 쉬워졌다. 길 건너편에서 여학생 A가 “살려주세요!”라고 소리치는 소리가 들렸고, 경찰관 4명이 그 여학생의 팔다리를 잡아당기고 있었다. 마치 춘절 연휴 때 도살될 돼지와 양처럼 미니버스 근처로 끌려갔다.

양건은 A를 구하기 위해 경찰 속으로 뛰어들었다. 그날 밤에만 그렇게 동료 시민을 구하기 위해 뛰어든 게 예닐곱 차례였다. 양건이 소리를 지르며 경찰을 부르자, 경찰 한 명이 그녀의 머리카락을 잡아당겼고, 다른 경찰은 팔을 붙잡고 미니버스로 끌고 갔다. 그렇게 양건은 시위 현장 한복판에서 체포됐다.

이후 양건과 A는 승합차에 태워졌다. 발버둥을 치며 버스 안에 태워진 둘은 심하게 두들겨 맞았다. 경찰들은 그저 체포자들을 버스 안에 쑤셔넣기만 하면 되는 것처럼 아무렇게나 짓밟고 밀어버렸다. 심지어 양건의 목을 짓누르고 머리를 구타하고 걷어차는 바람에 안경테가 부러지고 렌즈가 깨지고 말았다. 자리에 억지로 앉혀놓자마자 경찰은 양건의 뺨을 때리고 핸드폰을 빼앗았다. 그리곤 잠금해제를 하고 핸드폰을 제출하라고 으름장을 내놓았다. 그 모든 과정이 어지럽고 폭력적이었다.

함께 끌려온 사람들 중에는 20대 초반의 남학생 B도 있었다. 그는 버스에 태워질 때 심하게 맞은 나머지 머리엔 큰 혹이 생겼고 계속 피를 흘렸다. B는 “머리가 어지럽고 아프다”며 병원에 가고 싶다고 했다. 하지만 경찰은 이 말을 들어주기는커녕 “말대꾸하지 마”라며 뺨을 후려갈길 뿐이었다.

얼마 후 경찰들은 더 이상 때리진 않고, 그저 “입닥쳐”라고 했다. 체포자들은 우선 대형 파출소로 이송되었고 그곳에서 핸드폰을 제출해야 했다. 그리고 이름과 주민등록번호, 휴대전화번호, 휴대전화 비밀번호를 양식에 적은 다음, 핸드폰에 번호를 붙이고 손등에 그 숫자를 적었다. 이는 다음주 금요일에 경찰서에서 휴대폰을 찾아갈 수 있도록 한 조치였다.

곧이어 소지하고 있던 개인 물품을 제출하면 경찰들은 이를 샅샅이 조사했고, 어떤 사람에게는 물품을 돌려주기도 했다. 이때에는 소곤거리는 목소리로 대화를 나눌 수 있을 정도로 감시가 소홀해져서그 중에는 니에얼 동상에 “일어나라! 노예가 되고 싶지 않은 인민이여”라는 가사를 적은 포스트잇을 붙이던 여성 C도 있었다. 체포자들은 앞으로 닥칠 자신들의 운명이 어떻게 될지 알지 못한 채, 잠시나마 소소한 대화를 통해 온정을 나누었다. 그나마 그런 시간이 그곳에 있던 사람들에게 위로가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20분쯤 후, 사람들은 차례로 자신의 번호에 따라 정해진 파출소로 이송됐다.

체포된 사람들

체포자들이 연행된 이유는 제각각이었다. 자기 차로 경찰 버스를 막아 체포된 사람, 핸드폰으로 시위 상황을 촬영하다가 연행된 사람, 다른 시민들이 체포되는 걸 보고 돕다가 체포된 사람 등 전국 각지로 시야를 넓히면, 보다 다양한 사람들이 있다. 난징전매학원(南京传媒学院)에서 가장 먼저 백지를 들고 침묵 시위를 벌인 리캉멍(李康夢)은 널리 알려진 체포자 중 하나다. 그녀는 ‘백지 시위’라는 상징적 현상의 발명자다. 10월 중순 중국공산당 당대회가 개막되기 전, 베이징 도심 쓰통차오 고가대로 위에서 현수막 시위를 벌인 펑리파(彭立发) 역시 이미 전국적 유명 인사가 됐다. 사람들은 아직 그의 안위 여부를 알 수 없다.

11월 25일 상하이 우루무치중로에서 ‘헌화’ 행위를 했던 웨이하이(魏海)는 양건이 참여한 시위를 처음으로 시작한 사람이었다. 그는 말없이 우루무치중로를 찾아 추모 행동을 했고, 이 소식은 삽시간에 퍼져 수천 명이 참여한 시위로 이어졌다. ‘작은 불씨가 들판을 태운다(星星之火 可以燎原)’는 경구를 떠올리게 한다.

한 화가는 소셜미디어 상에 펑리파의 초상화를 그려 게시했다가 ‘사회질서 교란(寻衅滋事)’ 혐의로 경찰 조사를 받기도 했다.

친차오(秦超)는 27일 밤 상하이 우루무치중로에서 연행된 여러 사람들 중 하나다. 징쉐친(景雪琴)은 월요일(11월 28일)까지 지속된 우한 시내에서의 시위 중 체포된 사람들 중 하나다. 29일에도 시위는 곳곳에서 있었는데, 푸젠성 푸저우(福州)에 위치한 푸젠농림대학(福建农林大学) 캠퍼스 안에서 한 설명불상의 학생이 백지 시위를 벌이다가 체포됐다. 같은 날 상하이에서도 천자린(陈佳林)이라는 20대 여성이 추모 행동 후 귀가해 언론과 인터뷰를 하던 중 체포됐다.

천따리(陈大栗) 역시 체포된 청년들 중 하나로, 3주가 넘도록 풀려나지 않고 있다. 1994년생으로 베이징과 광저우 등지에서 생활해온 그는 베이징 피촌에서 다큐멘터리 촬영을 한 바 있다. 11월 말, 광저우 하이주광장(海珠广场)에서 격렬한 시위가 벌어졌을 때 그 역시 함께 했는데, 12월 4일 오후 광저우경찰은 갑자기 들이닥쳐 그를 체포하고 베이징으로 보냈다. 구명운동을 펼치고 있는 그의 친구들에 따르면, 그는 최근 건강 상태가 매우 좋지 않다고 한다. 홍콩 《明报(명보)》 보도에 따르면, 이번 백지 시위 과정에서 광저우에서 체포된 사람만 수십 명에 이른다. 대부분 석방됐지만 천따리 외에 다른 한 명은 여전히 구속 상태다.

많이 알려지진 않았지만, 청두 시위 과정에서는 4명의 티베트인 여성들도 체포됐다. 26세의 잔가, 28세의 산초마, 더칭, 다라 등 4명이 그들이다. 이들은 티벳 출신으로서 청두 시내에서 생계를 이어가고 있던 약 20만 명의 티베트인들 중 하나다.

취조 과정

상하이 체포자들은 파출소 안 깊숙한 곳에 위치한 취조실로 옮겨졌다. 취조실은 밀폐되어 있기 때문에 출입 시 카메라를 통해 경찰 업무증과 얼굴을 인식 해야 한다. 소환 과정에서 체포자들은 모든 소지품을 제출해야 하며, 용의자가 자해하거나 자살하는 것을 막기 위해 신발끈도 풀어야 한다. 이름과 신분증, 얼굴, 성문(voice print)을 입력하고나면, 신체 검사가 이뤄진다. 처음에는 보안 검색대를 통과해야 하고, 그 다음엔 방에 가서 완전히 알몸으로 탈의한 후 기계 앞에 서서 사진을 찍는다. 혹시나 몸 속에 뭔가 숨기고 있는지 스캔하는 것이다.

목소리를 녹음한 후에 체포자들은 기록실 옆 한쪽 벽에 서서 기록을 기다려야 한다. 각 방에는 취조하는 경찰과 체포자가 한 명씩 들어가는데, 그날 밤처럼 체포자가 많아 일손이 부족하면 경찰 신분이 아닌 사람들이 대신 취조하기도 한다.

양건은 버스 안에서부터 경찰의 취조에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침착하게 생각했다. 기록실 앞에서 들었을 때, 대다수 체포자들은 웨이보(중국의 트위터와 유사한 소셜미디어)에서 소식을 봤다고 하기도 했고, 누군가는 월드컵 축구 경기 시청 이후 놀기 위해 밖에 나왔다고 둘러대기도 했다. 중국에서 금지된 트위터나 텔레그램에서 봤다고 말해서는 안 되었다. 조화를 가져왔다거나, 백지를 들고 구호를 외쳤다거나, 혹은 추모하러 왔다고 말할 수도 없었다. 그저 우연히 그 근방에 왔다가 경찰 봉쇄에 길이 막혀 어떻게 현장을 떠나야 할지 몰랐다고 답해야 했다.

기록 당시 양건은 이름을 작성하는 것 말고는 아무 이야기도 하지 않았다. 그녀를 취조하는 경찰은 거칠게 욕을 내뱉고 협박했다. 실제 폭력을 쓰진 않았지만 팔을 자꾸 휘둘러대는 바람에 자신을 때릴 것만 같은 위협을 느꼈다. 경찰들은 계속해서 무슨 구호를 외쳤는지, 각종 반동적 구호를 듣지 못했는지 물었지만, 가장 현명한 대처는 묵비권을 행사하는 것이었다. 1차 심문 이후에도 2차, 3차 심문이 이어졌다.

함께 있던 A가 공포에 질려 계속 울자, 경찰은 그녀의 뺨을 때리고 머리를 잡아당기며 “울지 말라”고 했다. 양건이 “때리지 마세요”라고 말하며 A를 감싸 안았는데, 그렇게 하면 경찰이 더 이상 구타를 하지 않을 거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하지만 경찰들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양건에게서 A를 강제로 떼어놓은 후 양건을 마구 때렸다. 자신들을 향한 구타를 막으려는 행위 자체가 경찰에 대한 ‘반항’이었기 때문이다. 한편 경찰들마다 태도가 상이했다. 어떤 사람은 매우 폭력적인 취조를 받았고, 다른 누군가는 아무런 물리적 폭력을 겪지 않기도 했다.

파출소 안에는 연행된 이틀 동안 수감될 두 개의 유리방이 있었다. 하나는 남성방, 다른 하나는 여성방이었는데, 3면이 벽으로 되어 있고, 정면에만 투명한 유리벽이 세워져 있었다. 벽 안쪽엔 기다란 목재 걸상이 있었는데, 여성 체포자들은 모두 그 걸상에 앉아 있었다. 늦은 밤 감시하는 인력이 적을 때 연행자들은 조용히 대화를 나눌 수도 있었다. 체포자들은 26일 오후 6~7시쯤 체포된 사람들과 늦은 밤에 체포된 사람들로 나뉘었는데, 경찰 버스 안에서의 폭력 강도는 늦어질수록 심해졌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늦게 체포된 이들은 모두 심하게 발길질을 당했다고 고백했다.

‘불량 시민’

잠도 잘 수 없는 상황에서 이틀을 꼬박 보낸 후, 반성문을 쓰고 나서야 29일에 풀려날 수 있었다. 반성문에는 각자의 잘못을 인정하며 다시는 시위 현장에 가지 않을 것 등으로 A4용지 앞뒷면을 가득 채워 넣어야 했다.

이후 양건은 병원 진료에서 가벼운 뇌진탕 진단을 받았다. 2019년 당시 홍콩에 체류 중이던 그녀는 범죄인 송환조례 반대 시위의 물결에 휩싸인 바 있다. 당시 그녀는 거리 한복판에서 경찰에 끌려가던 홍콩 청년들을 구하려 했는데, 그때마다 경찰이 쏜 최루액에 맞아 심각한 알러지 증상을 겪어야 했다.

20대 초반의 양건은 시와 음악, 영화를 좋아한다. 그녀가 연행되던 당시 소지하고 있던 쪽지에는 가수 리쯔(李志)와 홍콩의 락밴드 마이 리틀 에어포트(my little airport)의 가사가 적혀 있었다. 그녀는 긴즈버그 같은 사람이 되고 싶었고, 사법과 법률 아젠다에 관심을 가져왔다.

인터넷상의 소식들에 따르면 광저우의 청년활동가 양즈칭(杨紫荆)과 천따리(陈大栗), 청두에서 일하는 4명의 티베트인 등이 여전히 구속돼 있다. 베이징과 상하이, 청두, 광저우 등 대규모 시위가 발생했던 도시의 공안당국은 여전히 이 시위에 참여했던 이들에 대한 조사와 탐문 수사를 이어가고 있다.

최근 중국 대륙의 제로코로나 방역 봉쇄 조치가 완화되었다. 소셜미디어 상의 많은 이들은 “용감하게 투쟁한 청년들에게 감사해야 한다”는 식의 글들이 많이 올라오고 있다. 하지만 이런 정서에 대한 양건의 생각은 복잡하다. 그녀는 방역 정책이란 의학과 과학을 바탕으로 이뤄져야 하는데, 중국 내 방역 정책이 민심의 변화와 집단적 시위에 의해서 오락가락해왔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중국 경찰은 여전히 백지 시위에 가담한 사람들에 대한 조사를 지속하고 있다. 양건 역시 11월 29일 풀려난 후에도 계속해서 사이버 공안이나 거주지의 관할 파출소와 면담을 해야 했고, 요주의 인물이 됐다. 이런 취조에선 시위 장소에 뭘 하러 갔는지, 얼마나 오래 머물렀는지, 왜 체포됐는지 등 진술을 반복해야 했다.

27일 저녁 체포될 때 그녀는 3년 전 홍콩에서 겪은 경찰 폭력의 공포를 떠올려야 했다. 국가폭력이 야기한 상흔은 앞으로도 그녀를 계속 괴롭힐 것이다. 한데 양건을 더 우울하게 만드는 것은 일상의 질서가 완전히 무너졌다는 데 있다. 그녀는 불면증에 시달리면서도 친구로부터 버림받는 꿈을 꾸는 등 고통을 겪고 있다. 아르바이트로 일하던 직장에서는 동료 직원들로부터 기피의 대상이 됐고, 이로 인해 마치 “불순분자”가 되어버린 것 같다고 느낀다. 🔈

글 : 홍명교
교열 : 박근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