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낸시 프레이저가 발표한 이 글은 2019년 5월 8일 워싱턴 대학교에서 심슨 인문학 센터의 후원으로 진행된 2019 솔로몬 카츠(Solomon Katz) 강좌의 원고다. 최근 발간된 책 《카니발 자본주의》(Cannibal Capitalism)의 마지막 장에도 실렸다. 낸시 프레이저는 자본주의를 확장된 개념으로 파악할 때, 오늘날 세계가 직면한 복합적 위기를 제대로 분석하고 비판할 수 있다고 주장한 다. 나아가 그러한 관점에서 사회주의가 21세기에도 여전히 설득력 있는 대안이자 프로젝트로 재구성되어야 한다고 본다. 국내에 소개된 낸시 프레이저의 글 <자본과 돌봄의 모순>(《창작과비평》 통권 제175호), <‘식인 자본주의’의 부상: 낸시 프레이저와의 대담>(《창작과비평》 통권 제194호)을 함께 읽으면 이해에 도움이 된다. 또한 에릭 홉스봄이 쓴 <잿더미로부터>(《몰락 이후》에 실림)를 함께 읽기를 강력히 추천한다. 1991년 4월 발표된 글에서 홉스봄은 현실 사회주의권 붕괴 직후, 사회주의의 의미를 묻는다. 프레이저의 글을 보충해주는 30년 전의 글은, 지금도 음미할 만하며 프레이저의 글과 함께 읽을 때 현재성이 더 커진다.
‘사회주의’가 돌아왔다. 수십 년 동안 이 단어는 골칫거리로 여겨졌다. 멸시받는 실패와 지나간 시대의 유산이었다. 이젠 더 이상 그렇지 않다! 오늘날 버니 샌더스와 알렉산드리아 오카시오-코르테스 같은 정치인들은 이 단어를 자랑스럽게 내세워 지지 받고, 미국 민주사회주의자(Democratic Socialists of America) 같은 조직들은 새로운 회원을 대거 끌어들이고 있다. 그런데 그들이 말하는 ‘사회주의’는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가? ‘사회주의’라는 단어가 매우 환영받고 있다고 할지라도, 그 단어에 대한 열광이 자동적으로 그 내용에 대한 진지한 성찰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사회주의’란 현시대에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거나 의미해야 하는가?
이 강연에서, 나는 답을 찾기 위해 사전에 고려해야 하는 몇 가지 것들을 제시할 것이다. 자본주의에 대한 확장된 개념을 바탕으로 사회주의에 대한 확장된 개념이 필요하다고 제안할 것이다. 사회주의에 대한 확장된 개념은 일반적으로 인정되는 경제주의적 이해의 편협함을 극복한다. 나는 자본주의 경제가 자신의 ‘비경제적’ 전제 조건들과 맺고 있는 모순적이고 파괴적인 관계들을 드러냄으로써, 사회주의가 생산 영역을 변형하는 것 이상의 일을 해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한다. 내가 진심으로 지지하는 생산 영역의 변혁이라는 절실한 요구에 덧붙여, 사회주의는 그러한 생산 관계를 가능하게 만드는 근본적 조건들, 즉 사회적 재생산, 국가 권력, 자연, 그리고 자본의 공식적인 회로 외부에 있으면서도 자본의 힘이 미치는 곳에 있는 부의 형태들과 맺고 있는 생산 관계 또한 변혁해야만 한다. 달리 말하면, 앞으로 설명하겠지만 우리 시대의 사회주의는 자본의 임금 노동 착취뿐만 아니라, 무임금 돌봄 노동, 공공재, 그리고 인종화된 주체들과 자연으로부터 착취한 부에 대한 무임승차를 극복해야 한다.
내가 말했듯이 그 결과는 사회주의에 대한 확장된 개념이 될 것이다. 그러나 확장은 단순히 추가하는 것이 아니다. 요점은 사회주의의 대한 기존의 이해를 바꾸지 않은 채로, 더 많은 특징을 추가하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오히려 우리가 보통 부차적인 것으로 여긴 문제들, 무엇보다도 젠더/섹슈얼리티, 인종/에스니시티/민족/제국, 생태주의, 그리고 민주주의에 대한 구조적 설명을 통합함으로써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둘 다에 대한 우리의 관점을 수정하는 것이다. 그 효과는 사회주의 사상의 모든 고전적 주제들, 즉 지배와 해방, 계급과 위기, 소유, 시장과 계획, 필요 노동, 자유 시간과 사회적 잉여라는 주제에 새로운 서광을 비추는 것이다.
물론 나는 이 강연에서 이러한 문제들을 완전히 설명할 수 없다. 하지만 비록 예비적이긴 하지만 그 주제 중에서 세 가지, 즉 제도적인 경계, 사회적 잉여, 그리고 시장에 대해서는 예비적이긴 하지만 말할 것이 있다. 각각의 경우에서 나는 자본주의를 경제 이상의 어떤 것으로, 사회주의를 대안적인 경제 체제 이상의 어떤 것으로 보면 문제가 다른 모습을 띤다는 것으로 보여주려고 시도할 것이다. 이런 시도를 통해 얻은 사회주의에 대한 관점은 한편으로는 소비에트식 공산주의와 확연히 다르고, 다른 한편으로는 사회민주주의와도 확연하게 다르다.
하지만 나는 자본주의로 [논의를] 시작할 것이다. 이것은 사회주의에 대한 논의에서 꼭 필요한 출발점이다. 사회주의는 ‘마땅히 해야 할 일’이나 유토피아적인 꿈이 아니다. 사회주의가 지금 논의할 가치가 있다면, 그것은 사회주의가 자본주의가 도달할 수 있는 범위 내로 가져왔지만 실현할 수 없는 인간의 자유, 복지, 그리고 행복을 이루기 위한 잠재력이라는 현실적이고 역사적으로 새로운 가능성들을 대표하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체제가 발생시킬 수밖에 없지만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과 자본주의에 내재되어 있지만 그 안에서는 극복될 수 없는 구조적 지배의 형태들이라는, 자본주의의 막다른 골목과 불평등에 대한 응답이 사회주의라는 것도 똑같이 중요하다. 보다 일반적으로 사회주의는 자본주의의 병폐를 치유한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우리는 바로 거기에서 시작해야 한다. 자본주의의 구성적인 역동성과 제도적인 구조들을 확인해야 우리가 변혁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다. 그리고 그런 기초 위에서 나아가야만 사회주의적인 대안의 긍정적인 윤곽을 그릴 수 있다.
그렇다면 자본주의란 정확히 무엇인가? 그리고 무엇이 문제인가?
자본주의란 무엇인가? 확장된 관점
흔히 자본주의는 사유 재산과 시장에서의 교환, 임금 노동과 상품 생산, 신용과 금융, 이윤, 이자 그리고 지대를 구성 요소로 정의되는 경제 체제로 이해된다. 모든 요소들은 화폐로 표시되고 경제 성장을 체제의 긴급한 과제로 제도화하도록 결합된다. 이 관점에 의하면 자본주의는 화폐화된, 즉 경제적 가치를 구현하고 생산하기 위해 유지되는 활동들, 관계들, 그리고 사물들의 범위와 일치한다. 이것을 자본주의에 대한 협소한 혹은 제한된 관점이라고 부르자. 대부분의 기업인과 주류 경제학자가 수용한 이 관점은 사회 전반에 걸쳐 별생각 없이 받아들여진 상식이기도 하다.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사람들의 사고까지 지배할 정도여서, 그들 역시 많은 경우 자본주의에 대한 협소한 관점에 동의한다.
내가 ‘전통 마르크스주의’라고 부를 것이 딱 들어맞는 사례다. 전통 마르크스주의는 자본주의를 생산 과정에서 맺는 자본가와 노동자의 관계에 중심을 둔 계급 착취 체제로 본다. 이 관점에서 핵심적인 관계는 생산 수단을 사유 재산으로 소유하고 있는 사람들과 노동할 수 있는 능력 외에는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못하여 생존하기 위해서 ‘특별한 상품’을 자본가에게 팔 수밖에 없는 사람들 사이의 관계다. 이 관계는 노동력이 임금과 교환되는 시장 거래에서 구체화되는데, 이 교환은 등가 교환이 아니다. 반대로 자본가는 노동자의 사회적 필요 노동 시간(노동자의 생계비에 해당하는 가치의 합계를 생산하는 데 필요한 시간)에 대해서만 대가를 지불하고 노동자의 나머지 노동 시간을 ‘잉여 가치’로 전유한다. 그래서 이 관계는 ‘착취’ 관계다. 전통 마르크스주의의 관점에서 착취가 바로 자본주의의 핵심이다. 그것은 잉여 가치의 비밀이고, 기술 혁신과 생산성 향상의 동인이지만, 동시에 빈곤과 계급 불평등의 근원이고, 엄청난 불합리성, 우연이 아닌 대량 실업과 주기적인 경제 위기의 원동력이다.
분명히 자본주의에 대한 전통 마르크스주의의 관점은 주류 자본주의 옹호론을 넘어선 큰 개선이다. 그러나 여전히 너무 협소하다. 이 관점은 생산의 ‘숨겨진 요소’에만 집중하고, 생산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들에 대해 따져 묻는 것을 게을리한다. 이 조건들은 다른 곳, 즉 훨씬 더 숨겨져 있는 ‘비경제적인’ 요소들에서 찾아져야만 한다. 전통 마르크스주의는 자본주의 사회의 표면에서 일어나는 일들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을 포착하는 데 반하여 뒤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서는 대충 얼버무리고 넘어간다. 전통 마르크스주의는 틀리지 않지만 불완전하다. 그림을 완성하여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완전한 이해에 이르려면, 자본주의에 대해 널리 받아들여지는 개념뿐만 아니라 전통 마르크스주의의 대안적인 개념도 넘어설 필요가 있다. 생산 아래 깊이 숨겨져 있는 부분들을 파헤치면서, 생산을 가능하게 하는 비경제적인 조건들을 드러낼 필요가 있다. 나는 자본주의 경제를 가능하게 하는 네 개의 비경제적인 조건들을 언급할 것이다.
첫 번째는 ‘사회적 재생산’에 투여되는 상당한 규모의 무임금 노동이다. 이 노동에는 가사, 자녀의 출산과 양육, 임금노동자, 노인, 그리고 실업자를 포함한 성인들을 돌보는 것이 포함되는데, 이 모두 인간을 만들고 유지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이런 ‘인간-만들기’ 활동은 ‘이윤-만들기’의 필수불가결한 전제 조건이다. 이런 활동이 없으면 ‘노동자’도, ‘노동력’도, 필요 노동 시간이나 잉여 노동 시간도, 착취도, 잉여 가치도, 자본 축적도 이윤도 있을 수 없다. 하지만 자본은 이런 활동들에 아무런 가치도 부여하지 않고, 이런 활동들을 보충하는 데 관심이 없으며, 가능하면 이런 활동에 비용을 지불하는 것을 피하려고 한다.
자본주의 경제의 두 번째 ‘비경제적인’ 전제 조건은 예속된 민중들, 특히 인종화된 민중들로부터 강탈한 막대한 양의 부이다. 이러한 부는 종속적이고 자유롭지 않고, 무임금이거나 저임금 노동을 포함할 뿐만 아니라, 강탈된 토지, 약탈된 광물과 에너지 자원, 신체와 신체 기관들, 어린이들과 생식 능력을 포함한다. 이것들은 모두 자본주의 생산에서 자본이 거의 또는 전혀 대가를 지불하지 않는 투입물로 이용된다. 마르크스가 주장했듯이 강탈된 부는 자본주의 역사의 초기에 자본 축적을 위한 필수불가결한 원천이었다. 하지만 강탈은 자본주의 체제가 성숙과 함께 멈추지 않았다. 도리어 자본주의 경제는 지금도 축적의 주요 원천으로 공짜거나 값싼 투입물들의 지속적인 흐름에 의존하고 있는데, 이 흐름은 강탈과 함께 이루어지거나 중첩되어 이루어진다. 예속된 민중들에 대한 이런 강탈이 없다면 ‘자유로운 노동자들’에 대한 착취는 수익을 내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자본은 이런 부에 대한 의존을 부인 하고 그것을 보충하기 위한 비용 지불을 거부한다.
자본주의 경제의 세 번째 ‘비경제적인’ 전제 조건은 자연으로부터 얻는 막대한 양의 ‘공짜 선물’ 그리고/또는 값싼 투입물들이다. 이것들은 노동이 변형하는 원자재, 기계에 동력을 공급하는 에너지와 신체를 움직이게 하는 식량, 그리고 경작할 수 있는 땅, 숨 쉴 수 있는 공기, 그리고 마실 수 있는 물과 지구 대기의 탄소 수용 능력 등, 자본주의 생산에 필수불가결한 물질적 토대를 제공한다. 이러한 자연-생태적인 조건들이 없다면 경제적 생산자들과 사회적 재생산자들, 강탈할 부와 착취할 자유로운 노동, 그리고 자본과 자본가들도 없다. 하지만 자본은 자연을 마음대로 쓰지만 보충하거나 회복시키는 것을 게을리하는, 공짜거나 매우 값싼 선물로 취급한다.
자본주의 경제의 네 번째이자 마지막 전제 조건은 국가와 다른 공권력이 공급하는 막대한 양의 공공재들이다. 여기에는 재산권, 계약, 그리고 자유로운 교환을 보장하는 법질서, 질서를 보장하고 반란을 진압하고 의견 충돌을 조정하며 영토의 안팎에서 수용/징발을 가능하게 하는 강제력, 가치를 저장하고 광범위한 시공간에 걸쳐 거래를 가능하게 하는 화폐 공급, 교통과 통신 기반 시설, 그리고 체제의 위기를 관리하기 위한 다양한 방법들이 포함된다. 이러한 공공재들이 없다면 사회 질서, 신용, 교환이 있을 수 없으며, 따라서 지속적인 축적도 불가능하다. 하지만 자본은 공권력을 싫어하는 경향이 있고 공권력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세금을 회피하려고 한다.
이 네 가지 조건 각각은 자본주의 경제의 필수불가결한 전제 조건을 나타낸다. 각각은 사회적 관계, 사회적 활동과 사회적 부의 형태를 가지고 있는데, 이것들은 함께 축적의 ‘필수 조건’을 형성한다. 자본주의의 공식 제도인 임금노동, 생산, 교환, 그리고 금융 뒤에는 이러한 제도들을 떠받치고 이러한 제도들이 작동할 수 있도록 하는 가족, 지역 사회, 자연, 영토 국가, 정치 조직 그리고 시민사회, 그리고 무엇보다도 막대한 양과 다양한 형태의 무임금 노동과 강탈된 노동이 있다. 자본주의 사회에 근본적으로 필수적이기에 이것들 역시 자본주의 구성 요소이다.
다시 말해서 자본주의는 단순히 경제가 아니라 더 큰 어떤 것이다. 자본주의는 경제적 활동과 관계의 활동 영역이 경제적이지 않은 영역들과 구별되고 분리되는 ‘제도화된 사회 질서’인데, 경제적 영역은 경제적이지 않은 영역들에 의존하지만 그 관계를 부인한다. 자본주의 사회는 ‘정치적 조직’이나 정치 질서와 구별되는 (그리고 의존하는) ‘경제’의 활동 영역, ‘사회적 재생산’의 영역과 구별되는 (그리고 의존하는) ‘경제적 생산’의 활동 영역, 배후에 있는 착취 관계들과 구별되는 (그리고 의존하는) 일련의 강탈 관계들, 그리고 몰역사적인 것으로 여겨지는 자연의 물질적 기반과 구별되는 (그리고 의존하는) 인간 활동의 사회-역사적 영역으로 구성된다.
사실상 여기에서 우리는 자본주의를 경제로 보는 협소한 관점을 넘어서고 있다. 오히려 자본주의를 제도화된 사회 질서라고 생각하면 우리는 확장된 관점을 가지게 된다. 자본주의 대한 이 새롭고 확장된 관점은 사회주의를 재구상하는 프로젝트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다. 그것은 자본주의의 무엇이 잘못되었고 그것을 변화시키기 위해 무엇을 해양 하는지에 대한 우리의 인식을 변화, 아니 확장시킨다.
자본주의는 무엇이 잘못되었는가? 확장된 관점
협소한 관점에서 보면 자본주의에는 세 가지 주요한 잘못된 점들이 내재되어 있다. 부정의, 비합리성, 그리고 비자유다. 각각에 대해 차례로 살펴보자.
협소한 관점에서 보면 자본주의의 핵심적인 부정의는 자본이 재산이 없는 자유로운 노동자 계급을 착취하는 것이다. 노동자들은 많은 시간을 공짜로 일하며 그들이 나누어 가질 수 없는 막대한 양의 부를 생산한다. 이익은 자본가 계급에게 흘러가는데, 자본가 계급은 노동자들의 잉여 노동과 잉여 노동에 의해 생산된 잉여 가치를 전유하고, 더 많이 축적하려는 자신의 목적을 위해 잉여 가치를 재투자한다. 이로 인해 자본을 생산하는 바로 그 노동자들을 지배하는 적대적인 힘인 자본이 가차 없이 기하급수적으로 성장하는 결과가 생겨난다. 이것이 이 관점에서 볼 때 핵심적인 부정의다. 생산 지점에서 임금 노동에 대한 계급 착취. 착취의 장소는 자본주의 경제, 특히 경제적 생산의 영역이다.
마찬가지로 협소한 관점에서 보면 자본주의의 주요 비합리성은 경제 위기를 초래하는 내재된 경향이다. 이윤의 형태로 사적으로 전유된 잉여 가치의 무한 축적을 지향하는 경제 체제는 본질적으로 자신을 불안정하게 만든다. 기술 발전을 통해 생산성을 증가시켜 이윤을 증가시키려는 충동은 상품의 과잉 생산과 자본의 과잉 축적을 통해 주기적인 이윤율 하락을 초래한다. 금융화 같은 ‘해결책’은 심판의 날을 늦출 뿐이며, 그날이 왔을 때 상황이 더욱 심각해지도록 할 뿐이다. 일반적으로 자본주의의 발전 과정은 호황과 불황의 순환, 주식 시장의 붕괴, 금융 공황, 연쇄적인 파산, 가치의 대량 매각, 그리고 대량 실업이라는 주기적인 경제 위기에 의해 중단된다.
마지막으로 협소한 관점에 의하면 자본주의는 근본적으로 매우 비민주적이다. 물론 자본주의는 종종 정치 영역에서 민주주의를 약속한다. 그러나 그 약속은 한편으로는 사회적 부정의에 의해, 다른 한편으로는 계급 권력에 의해 체계적으로 그 효력이 약화된다. 게다가 자본주의 일터에서는 민주적 자치의 어떠한 요구도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그곳은 자본이 명령하고 노동자들이 복종하는 영역이다.
따라서 협소한 관점에서 보면 자본주의가 세 가지 주요 잘못된 점들을 고착화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첫째, 이 체제는 임금 노동자들을 착취하고 지배함으로써 계속된다. 둘째, 자본주의는 주기적 경제 위기를 일으키도록 구조적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자본주의는 본질적으로 비민주적이다. 모든 경우 문제는 자본주의 경제의 내재된 역동성에서 발생한다. 체제의 DNA에 내재되어 있기에 협소한 관점에서 보면 자본주의의 주요 잘못된 점들은 경제적 구조에 의해 야기된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이런 설명은 틀렸다기보다는 불완전한 것이다. 자본주의에 내재된 ‘경제적 병폐’를 정확하게 폭로하지만, 사회의 조직화 양식에 똑같이 근본적인 일련의 ‘비경제적인’ 부정의, 위기 경향, 그리고 비자유의 형태들을 인식하지 못한다. 이런 것들 은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확장된 개념을 받아들이면 뚜렷하게 드러난다.
먼저 자본주의에 대한 확장된 관점이 체계적인 부정의의 확장된 목록을 드러낸다는 점을 고려하자. 그중 많은 것들이 자본주의 경제 ‘내’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본주의 경제와 자본주의를 가능하게 하는 비경제적인 조건들 ‘사이’의 구분에 기반을 두고 있다. 노동에 대해 현금으로 임금을 지급하는 자본주의 생산과, 흔히 임금이 지급되지 않고 감상적으로 다루어지며 ‘사랑’으로 보상받는 사회적 재생산 사이의 구분이 대표적인 사례다. 이러한 구분은 역사적으로 성별화되어, 자본주의 사회의 핵심부에 있는 근본적인 젠더 비대칭을 공고히 하고, 여성의 종속, 젠더이분법, 이성애 규범에 토대를 만든다
마찬가지로 자본주의 사회는 자신의 노동력을 자신의 재생산 비용과 교환할 수 있는 자유로운 ‘노동자’와 종속적인 ‘타자’ 사이의 구조적인 구분을 설정하고 이들의 신체와 자산을 쉽게 강탈한다. 자신의 재생산에 필요한 충분한 비용과 권리, 보호에 접근할 수 없는 사람들은 자본의 이윤 확대를 위한 공짜거나 값싼 투입물을 제공한다. ‘단지’ 착취할 수 있는 사람들과 철저하게 강탈할 수 있는 사람들의 지위를 구분하는 것은 자본주의 사회의 기초다. 이는 전 지구적인 인종 차이와 대략이지만 확실히 일치하고, 인종 억압, (오래되고 새로운) 제국주의, 선주민 강탈, 그리고 집단 학살을 포함한 다양한 구조적 부정의를 뒷받침한다.
그리고 자본주의 사회는 인간과 자연 사이에 뚜렷한 구분을 설정하는데, 이 둘은 동일한 존재론적 세계에 속하기를 멈춘다. 수도꼭지와 싱크대로 축소된 자연은 무자비한 채굴주의와 도구화에 열려 있다. 만약 이것이 ‘자연’(또는 동물)에 대한 불평등이 아니라면, 적어도 점점 더 살 수 없게 된 행성에 남겨진 현존하는 세대와 미래 세대에 대한 불평등이다.
마지막으로 자본주의는 ‘경제적인 것들’과 ‘정치적인 것들’ 사이에 구조적인 구분을 설정한다. 한쪽에는 생산을 조직하는 자본의 사적 권력이 있는데, 굶주림과 궁핍이라는 채찍‘만’을 이용한다. 다른 한쪽에는 국가의 공권력이 있는데, 합법적인 폭력을 독점하고 법을 대표한다. 이런 구분의 효과는 정치적인 것들의 여지를 줄이는 것이다. 내가 설명한 것처럼 공적인 의제에서 다양한 삶과 죽음의 문제들을 배제한다. 이 문제들을 자본에 맡기는데, 자본주의 사회는 민주주의의 빈약하고 축소된 복제물만을 제공할 뿐이다. 스스로 통치한다고 생각하는 시민들을 자본의 자의적인 통치에 종속시키기에, 자본주의 사회는 정치적 부정의의 진정한 도가니다.
따라서 일반적으로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확장된 관점은 구조적 부정의의 확대된 목록을 볼 수 있게 한다. 계급 착취처럼 뿌리 깊고 우연이 아니기에 이러한 불정의는 실제로 구조적‘이다’.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사회주의적 대안은 이러한 부정의를 바로잡아야만 한다. 경제적 생산의 구조를 ‘단순히’ 변혁하는 것이 아니라, 경제적 생산과 사회적 재생산의 관계 역시 변혁해야 하고, 이와 동시에 젠더와 성적 질서 역시 변혁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사회주의적 대안은 자연의 ‘공짜(혹은 값싼) 선물’에 대한 자본의 무임승차와 인종화된 민중의 부에 대한 자 본의 강탈을 끝내야 한다. 마지막으로 사회주의적 대안은 현재의 보잘것없는 한계를 넘어 민주적 자치의 범위를 확장해야 한다. 요컨대 사회주의가 자본주의의 부정의를 바로잡으려 한다면, ‘단지’ 자본주의 경제를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제도화된 사회 질서 전체, 즉 자본주의 사회를 변화시켜야 한다.
하지만 이게 다가 아니다. 자본주의에 대한 확대된 관점은 자본주의의 위기로 간주되는 것에 대한 관점 역시 확대한다. 이 관점은 ‘경제’ 내부의 것들 이외의 몇몇 내재된, 스스로를 불안정하게 만드는 경향들을 드러낸다. 첫째, 사회적 재생산을 위기에 처하게 하는 구조적 경향을 드러낸다. 자본이 자신이 의존하고 있는 무임금 돌봄 노동에 대해 비용을 지불하는 것을 회피하면, 자본은 주기적으로 돌봄 노동의 주요 제공자인 가족, 지역 사회, 그리고 무엇보다도 여성에게 엄청난 압력을 가하게 된다. 현재의 금융화된 형태의 자본주의 사회는 바로 그러한 위기를 일으키고 있는데, 사회적 서비스의 공적 제공 축소와 함께 가구당 임금 노동 시간의 확대와 여성의 임금 노동 시간 확대를 모두 요구하기 때문이다.
확장된 관점은 또한 생태 위기를 일으키는 자본주의의 내재된 경향을 드러낸다. 생태 위기는 자본이 자연으로부터 가져오는 투입물의 대체 비용을 거의 지불하지 않으려고 많은 노력을 하기 때문에 발생한다. 토양을 고갈시키고 바다를 오염시키는 이 체제는 탄소를 흡수하는 삼림 지대를 물에 잠기게 하고 지구의 탄소 처리 능력을 넘어서고 있다. 수리 및 대체 비용을 지불해야 할 책임을 부정하면서 이 모든 것들을 마음대로 이용함으로써 자본은 인간과 자연의 구성 요소들 사이의 물질대사 작용을 불안정하게 만든다. 현재의 생태 위기가 얼마나 심각한지 자세히 설명할 필요는 없다.
생태적 및 사회적-재생산의 위기를 일으키는 자본주의의 경향은 인종화된 민중으로부터 강탈한 부에 대한 본질적인 의존과 분리할 수 없다. 즉 도난당한 토지, 강제 노동 및 약탈된 광물에 대한 의존과 인종화된 지역에 대한 의존과 분리할 수 없다. 이 지역들은 독성 폐기물을 버리는 장소와 전 세계적인 돌봄 연쇄에 점점 더 조직적으로 포함되고 있는 저임금 돌봄 노동의 공급처 취급을 받고 있다. 그 결과로 경제적, 생태적, 사회적 위기가 제국주의와 인종-민족 적대와 얽히게 된다. 신자유주의는 이 지역들에서도 이익을 늘려 왔다.
마지막으로 자본주의에 대한 확장된 관점은 정치적 위기를 일으키는 뿌리 깊은 경향을 드러낸다. 여기서도 자본은 양다리를 걸치려고 하는데, 비용을 지불하지 않으면서 공공재를 이용한다. 세금을 회피하고 국가의 규제 능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자신이 의존하고 있는 바로 그 공권력을 공허하게 만드는 경향이 있다. 현재의 금융화된 자본주의의 형태는 이 게임을 완전히 새로운 수준으로 끌어올린다. 거대 기업들은 영토에 묶인 공권력을 능가하고, 글로벌화된 금융은 국가를 규율하여, (그리스에서처럼) 선거 결과를 조롱하고 국가가 원하더라도 대중의 주장을 다루지 못하게 한다. 그 결과 전 세계의 많은 사람들이 기존의 정당들을 떠나고 상식을 버림에 따라 헤게모니의 위기에 반영된 심각한 통치의 위기가 발생한다.
따라서 일반적으로, 자본주의에 대한 확장된 관점은 자본 주의가 ‘경제적인’ 것들 외에 복합적인 위기들을 일으키는 경향들을 가지고 있음을 드러낸다. 폴라니(그리고 제임스 오코너)에 따라, 나는 복합적인 위기들을 일으키는 경향들을 ‘영역 간’ 모순들로 이해한다. 이 모순들은 자본주의 경제와 자본주의를 가능하게 하는 비경제적인 조건들을 분리하고 연결하는 연결 부위들에 자리잡고 있다. 간단히 말해 자본은 자신의 전제 조건들을 침식하거나 파괴하거나 고갈시키는 (어떤 경우에도 불안정하게 만드는), 즉 자신의 꼬리까지 먹어 치우는 내재된 경향을 가지고 있다. 이것 역시 자본주의 사회의 잘못된 점들의 본질적인 부분이자 사회주의가 극복해야 할 본질적인 부분이다.
마지막으로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확장된 관점은 민주주의의 부족에 대한 확대된 관점을을 제공한다. 경제적 불평등과 계급 권력이 정치 영역에서 평등한 민주적 목소리가 나올 가능성을 좌절시키는 것이 ‘유일한’ 문제가 아니다. 또 상사가 현장에서 명령하는 것 역시 ‘유일한’ 문제가 아니다. 마찬가지로 민주적 의사 결정의 영역에서 가장 중요한 사안들을 선제적으로 제거하는 것도 중요한 문제다. 필요를 충족시키는 재화, 즉 사용 가치의 생산을 어떻게 조직해야 하는가? 어떤 에너지 기반에서 어떤 종류의 사회적 관계를 통해야 하는가? 어떻게 재화의 생산을 한편으로는 인간의 재생산과, 다른 한편으로 자연의 재생산과 관련시켜야 하는가? 그리고 아마도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가 집합적으로 생산하는 사회적 잉여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사실상 자본주의 사회에서 우리는 이런 사안들에 대한 발언권이 없다. 최대한의 축적을 추구하는 투자자들이 우리 몰래 뒤에서 이런 사안들을 결정한다.
따라서 일반적으로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확장된 관점은 체제의 병폐에 대한 확장된 관점을 드러낸다. 사회주의가 자본주의의 잘못된 점을 바로잡는 것을 목표로 한다면, 사회주의는 매우 큰 과제에 직면해 있다. 계급 지배‘뿐’ 아니라 경계를 넘나드는 젠더와 성의 비대칭성, 인종/에스닉/제국주의적 억압, 정치적 지배를 넘어서는 새로운 사회 질서를 고안해내야 한다. 그리고 경제적이고 금융적인 것‘뿐’만 아니라 생태적, 사회적 재생산과 정치적인, 복합적인 위기를 일으키는 경향들을 탈제도화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21세기 사회주의는 미리 정의된 ‘정치적’ 영역 내에서의 의사 결정만을 포함하는 민주주의의 영역을 크게 확장할 뿐만 아니라, 보다 근본적으로 정치적인 것들의 정의와 경계를 민주화해야 하는데, 이것들은 ‘정치적인 것들’을 구성하는 틀이다.
사회주의란 무엇인가? 확장된 관점
21세기 사회주의를 다시 사고하는 프로젝트는 그 자체로 매우 큰 작업임이 분명하다. 이론화에 종사하는 한 사람이나 한 집단이 맡긴 너무 버거운 일이다. 만일 그 작업이 완료되면 (매우 큰 ‘만약’이다), 그것은 활동가와 이론가의 공동 노력으로 이루어질 것이다. 사회 투쟁을 통해 얻은 통찰력은 체계적인 사고 및 정치적 조직과 시너지 효과를 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이미 말한 것에서 논리적으로 연결되는 것으로 보이는 세 가지의 짧은 성찰을 제안하고 싶다. 이것들은 제도적 경계, 사회적 잉여, 그리고 시장의 역할과 관계가 있다.
경계 문제는 적어도 주어진 것으로 여겨지는 ‘영역’(‘경제적인 것들’과 ‘정치적인 것들’ 같은)의 내부 구조에 대한 문제만큼이나 중요하다. 사회주의자들은 ‘경제적인 것들’의 구조에 배타적으로 혹은 일방적으로 초점을 맞추는 대신에 ‘경제적인 것들’과 사회적 재생산, 자연, 자본화되지 않은 형태의 부와 공권력 같은, 경제적인 것들을 가능하게 하는 배경 조건들의 관계에 대해 생각할 필요가 있다. 만일 사회주의가 자본주의의 비합리성, 부정의, 그리고 비자유의 ‘모든’ 제도화된 형식들을 극복하려 한다면, 생산과 재생산, 사회와 자연, 그리고 사회적인 것들과 정치적인 것들 사이의 관계에 대해 다시 상상해야 한다.
나는 사회주의가 단순히 이런 구분들을 청산하는 것을 목표로 해야 한다고 제안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정치적인 것들’과 ‘경제적인 것들’의 구분을 폐지하려 했던 소련의 노력은 청산에 대한 일반적인 경고로 유효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자본주의 사회를 구성하는 제도적 구분들을 다시 구상할 수 있고 그래야만 한다. 예를 들어, 한때 경제적인 것으로 여겨졌던 사안들이 이제는 정치적이거나 사회적인 것이 되도록 제도적 구분들을 재배치하는 것을 고려할 수 있다. 우리는 또한 제도적 경계를 완화하여 다양한 영역들이 서로에 대해 더 민감하게, 다시 말해 덜 적대적이 되도록 만드는 것을 고려할 수 있다. 확실히 사회주의 사회는 생산에 필요한 것을 자연과 사회적 재생산으로부터 빼앗는 방식의 제로섬 게임을 실행하는 자본주의의 경향을 극복해야 한다.
훨씬 더 중 요한 것은 우리가 그러한 영역들 사이에 있는 현재의 우선순위를 뒤집어야 한다는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는 사회적, 생태적 재생산의 요청을 축적을 위한 상품 생산의 요청에 종속시킨다. 사회주의자는 상황을 바로잡을 필요가 있다. 사람을 보살피는 것, 자연 보호, 그리고 민주적 자치를 효율성과 성장보다 사회의 최우선 사항으로 설정할 필요가 있다. 사실상 자본이 그 책임을 부정하는 이면으로 밀어내는 이런 사안들을 단호하게 전면에 위치하게 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21세기 사회주의는 제도적 경계들을 설정하고 수정하는 바로 그 과정을 민주화해야 한다. 이제부터 ‘재영역화(redomaining)’라는 ‘메타 정치적’ 작업은 그 자체로 집단적이고 민주적인 의사 결정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민주적인 대중들과 민중(demoi)은 어떤 사안들이 정치적 참여의 1차 영역 내에서 다루어질 것인지를 스스로 결정해야 한다. 한 가지 함의는, 역사적으로 침전된 영토 단위(‘민족’ 국가)는 단순히 폐지될 필요는 없지만(그리고 그렇게 되어서도 안 되겠지만), 기능적으로 새롭게 경계 지워진 정치적 단위들과 유기적으로 연결될 필요가 있고, 이 단위들은 다양한 규모에서 작동하고 참가의 근거를 ‘모두가 따르는 원칙’에 둔다. 일반적으로 사회주의적인 재영역화는 비지배 원칙에 의해 제한되어야 한다. 이 비지배 원칙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확립된 모든 주요한 축들뿐 아니라 미래에 발견하거나 만들어낼 수 있는 모든 지배의 축들을 따라서도 적용되어야 한다.
게다가 재영역화는 가능한 한 ‘원천 징수’ 원칙에 따라 진행되어야 한다. 무임승차와 ‘시초 축적’을 피함으로써 사회주 의는 자본주의가 무감각하게 파괴한 모든 생산 조건들의 지속가능성을 보장해야 한다. 다시 말해 사회주의 사회는 생산과 재생산에 사용하는 모든 자원을 보충하거나 원상회복하거나 또는 대체해야 한다. 사회주의 사회는 사용 가치나 상품을 생산하는 일뿐만 아니라 사람을 돌보거나 키우는 일을 보충해야 한다. 사회주의 사회는 ‘외부’로부터, 즉 주변 사람들과 사회, 그리고 자연으로부터 취하는 모든 자원을 대체해야 한다. 다른 필요를 충족시키는 과정에서 이용하는 정치적 자원과 공공재를 보충해야 한다. 다시 말해서 자본이 책임을 부정하는 이면으로 밀려난 사안들에 무임승차해서는 안 된다. 이 조건은 자본주의 사회에 만연한 세대 간 불평등을 극복하기 위한 ‘필수불가결한 조건’이다. 이 조건을 준수함으로써만 21세기 사회주의는 자본주의의 비합리성을 극복하고 자본주의에 내재된 위기 성향을 탈제도화할 수 있다.
이것은 고전적 사회주의의 잉여 문제에 대한, 두 번째 일련의 성찰들로 나를 이끈다. 잉여는 사회를 현재 수준과 현재 형태로 재생산하는 데 필요한 것 이상으로 생산된 많은 양의 부이다. 이미 언급했듯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잉여는 자본가 계급의 사유 재산으로 취급되고 소유자가 적절하다고 생각하는 대로 처분되는데, 일반적으로는 계속해서 제한 없이 더 많은 잉여를 생산할 목적으로 재투자된다. 이것은 우리가 이전에 보았듯이 부당하고 체제를 스스로 불안정하게 만드는 것이다.
사회주의 사회는 사회적 잉여에 대한 통제를 민주화해야 한다. 사회주의 사회는 잉여를 민주적으로 할당해야 하며, 집단적 의사 결정을 통해 현재의 초과 생산 능력과 자원으로 정확히 무엇을 할 것인지뿐만 아니라 미래에 얼마나 많은 초과 생산 능력을 생산하기 원하는지, 즉 잉여를 생산하기 원하는지 여부도 결정해야 한다. 다시 말해 사회주의 사회는 자본주의 사회에 뿌리내린 성장에 대한 강제를 탈제도화해야 한다. 이것은 우리가 ‘탈성장’을 사회주의 고유의 원칙으로 제도화해야만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성장’의 문제(가능하다면 얼마나 많이 생산할 것인지, 또 어떤 것을, 어떻게, 어디에서 생산할 것인지)를 정치적인 문제로 만들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실상 21세기 사회주의는 내가 앞에서 언급한 ‘모든’ 문제들, 즉 무엇을 얼마나 많이 생산할 것인가, 현재 수준에서 사회를 재생산하는 데 필요한 것 이상으로 잉여를 생산하는 데 얼마나 많은 시간을 투여할 것인가 하는 것들을, 민주적 해결을 전제로 하는 정치적 문제로 다루어야 한다.
잉여는 또한 시간으로, 우리의 필요를 충족시키고 우리가 사용하는 것을 보충하는 데 필요한 노동 후에 남은 시간, 따라서 자유 시간이 될 수 있는 시간이다. 자유 시간에 대한 전망은 마르크스의 설명을 포함하여 사회주의적 자유에 대한 모든 고전적 설명의 중심이었다. 그러나 사회주의의 초기 단계에서 자유 시간이 크게 늘어날 것인지는 의심스럽다. 사회주의 사회가 자본주의로부터 물려받게 될 막대한 양의 지급되지 않은 청구서 때문이다. 자본주의가 생산성을 자랑하고, 마르크스도 생산성을 잉여를 생산하는 진정한 원동력으로 여겼지만, 나는 의심이 든다. 문제는, 마르크스는 잉여가 거의 전적으로 임금 노동자가 자신의 생활비를 충당하기에 충분한 가치를 생산한 후, 자본이 노동자로부터 가져가는 노동 시간 안에 있는 것으로 여겼다는 것이다. 반면 그는 자본이 강탈하고 전유하는 다양한 ‘공짜 선물들’과 ‘값싼 것들’에 거의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고, 자본이 ‘노동자들의’ 재생산 비용을 보장하지 못하는 것에도 거의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이런’ 비용을 계산에 포함하면 어떻게 될까? 자본이 비용을 지불하지 않은 재생산 노동, 생태적 회복 및 보충, 인종화된 민중에게 강탈한 부, 그리고 공공재에 비용을 지불하면 어떻게 될까? 얼마나 많은 잉여를 실제로 생산할 수 있을까? 이것은 물론 사고를 위한 질문이다. 나는 어떻게 답변을 시작할지조차 모를 것이다. 그러나 나는 사회주의 사회가 수세기 동안 지불되지 않은 비용에 대한 두둑한 청구서를 상속받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사회주의 사회는 또한 의료, 주택, 영양가 있는 (그리고 맛있는) 음식, 교육, 교통 등 전 세계에 걸쳐 충족되지 않은 막대한 양의 인간적인 필요에 대한 두둑한 청구서를 물려받게 될 것이다. 이런 필요들 역시 잉여를 위한 투자가 아니라 절대적인 필요의 문제로 간주되어야 한다. 세계 경제를 탈화석화하는 긴급하고 어마어마하게 큰 작업에 대한 비용도 마찬가지이다. 일반적으로 무엇이 필요한 것이고 무엇이 잉여인가 하는 문제는 자본주의에 대한 확장된 관점에서 볼 때 다른 모습을 취한다.
사회주의 사회에서 시장의 역할에 대한 문제도 마찬가지다. 여기에서 내가 지금까지 말한 것들에서 알 수 있는 대답은 간단한 공식으로 요약될 수 있다. 꼭대기에 시장이 없고 바닥에도 시장이 없지만, 그 사이 어딘가에 약간의 시장이 있을 수 있다. 설명해 보겠다.
‘꼭대기’가 의미하는 것은 사회적 잉여의 할당이다. 할당되어야 할 사회적 잉여가 있다고 가정하면, 그것은 사회 전체의 공동의 부로 간주해야 한다. 개인, 기업 또는 국가는 사회적 잉여를 소유하거나 처분할 권리를 가질 수 없다. 참으로 공동의 소유물이기에, 잉여는 공동의 의사 결정과 민주적으로 체계화될 수 있고 체계화되어야만 하는 계획을 통해 할당되어야 한다. 시장 메커니즘은 이 수준에서 어떤 역할을 해서는 안 된다. 시장과 사유 재산 역시 위에서는 어떤 역할도 해서는 안 된다.
주거, 의복, 음식, 교육, 의료, 교통, 통신, 에너지, 여가와 같은 기본적인 필요의 수준을 의미하는 바닥도 마찬가지다. 나는 기본적 필요로 간주되는 것과 그것을 충 족시키는 데 필요한 것을 충족시키는 데 요구되는 것이 정확히 무엇인지 최종적으로 명확하게 말할 수 있다는 환상을 갖고 있지 않다. 그것 역시 민주적 토론, 논쟁, 의사 결정의 주제여야 한다. 그러나 결정된 것이 무엇이든 권리라는 측면에서 제공되어야지 지불 능력에 기초해서 제공되어서는 안 된다. 이는 이러한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생산한 사용 가치가 상품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들은 공공재여야만 한다. 이것이 내가 보편적 (또는 무조건적) 기본소득을 지지하지 않는 이유이다. 그 프로젝트는 사람들에게 기본적인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한 현금을 지불하는 것을 포함하므로, 기본적인 필요를 충족시켜 주는 것들을 상품으로 취급한다. 사회주의 사회는 그것들을 공공재로 취급해야 한다. 그러므로 실제로 바닥에는 시장이 없다.
따라서 바닥이나 꼭대기에는 시장이 없다. 그러나 그 둘의 사이는 어떤가? 나는 이 질문에 대해 제대로 된 관점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러나 나는 그 공간을 다양한 가능성들이 혼합된 실험 공간으로 상상한다. 그곳은 협동조합들, 공동 식당들, 스스로 조직한 단체들, 스스로 관리하는 프로젝트들과 함께 ‘시장 사회주의’가 자리를 찾을 수 있는 공간일 수 있다. 나는 시장에 대한 많은 전통 사회주의적인 반대가 내가 이곳에서 그리는 맥락에서 해소되거나 줄어들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시장의 작동은 자본 축적을 추동하는 메커니즘과 사회적 잉여의 사적 전유에 영향을 주지도 않고, 이것들에 의해 왜곡되지도 않을 것이다. 일단 꼭대기와 바닥이 사회화되고 탈상품화되면, 중간에 있는 시장의 기능과 역할이 변형될 것이다. 이 제안이 정확히 어떻게 될 것인지 말할 수는 없지만, 내게는 충분히 명확해 보인다.
사실 나는 여기서 내가 그리고 있는 사회주의에 대한 관점이 전체적으로 얼마나 빈약하고 초보적인지 알고 있다. 내가 제안한 것은 관련된 문제들의 아주 작은 부분에 대한 최소한의 개요일 뿐이다. 하지만 이런 빈약한 시작이라도 약간의 가치가 있기를 바란다. 특히 내가 당신에게 사회주의 프로젝트가 21세기에 추구할 가치가 있다는 것을, ‘사회주의’가 단순한 유행어가 아니라 현재 지구를 파괴하고 우리가 자유롭고 민주적이면서 잘 살 수 있는 기회를 좌절시키는 체제에 대한 진정한 대안의 이름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확신시켰기를 바란다. 또한 당신에게 오늘날 사회주의가 예전 방식으로는 이해될 수 없다는 것을 확신시켰기를 바란다. 자본주의에 대한 확장된 관점에서 시작해야만 21세기에 우리의 모든 필요와 희망에 대해 말할 수 있는, 사회주의에 대한 확장된 관점을 계속해서 발전시킬 수 있다.
글 : 낸시 프레이저 Nancy Fraser
번역 : 최재혁 에너지노동사회네트워크 정책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