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운동의 길과 동떨어진 학생행진·사회진보연대의 입장을 비판한다
2021년 11월 15일
대선을 앞두고 일부 좌파 조직의 입장이 사회운동의 혁신과 대중운동의 성장을 위해 분투하는 사람들을 경악케 했다. 특히 지난 11월 5일 학생운동그룹 학생행진이 낸 “20대 대선, 좌파의 선택은 정권 교체여야 한다”는 제목의 논평은 뭇 사람들을 놀라게 하기에 충분했다.
좌파 학생운동 조직이 두 보수 양당의 우위를 견주며, 역사적으로 한국 사회를 망가뜨려온 정치세력의 지지조차 “감수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어렵다. 현 정권과 민주당 세력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은 언제나 필요하지만, 한국의 민중운동은 항상 자신의 정치를 추구하고, 노동자·민중의 정치세력화라는 비전을 잃지 않음으로써, 대중운동의 급진화 과정에서 ‘다른 미래’를 제시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해당 논평에서 학생행진은 20대 대통령 선거의 최우선 과제가 “정권교체”라며, “민주당 재집권을 막기 위해서 윤석열 후보의 지지도 감수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윤석열 후보로의 선출을 “기념”하며 내놓은 학생행진의 입장 글이 논란을 불러일으키고, 심지어 조직 안팎에서도 심각한 이견에 부딪히자, 학생행진은 지난 11일 일종의 해명 글을 발표했다. 해당 글에서 학생행진은 “‘윤석열 후보의 지지도 감수할 수 있다’는 잘못된 표현으로 숱한 걱정과 우려를 끼친 점을 무겁게 생각한다”며, 이전의 지지 입장을 철회하는 듯한 뉘앙스의 입장을 밝혔다. 그러나 이전의 입장 글이 그대로 남아있는 데다, 해명 글 역시 유사한 논리를 반복하고 있기 때문에 강퍅한 궤변이 사라졌다고 볼 수 없다. 정치적 수사를 통해 의사결정 구조에서 발생한 문제를 회피하는 것은 운동조직으로서 무책임하다.
학생행진의 해명 글이 게시된 같은 날 사회진보연대 역시 해당 논란에 대한 입장을 발표했다. 사회진보연대는 학생행진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는 사회운동단체이기에 이번 논란에 대한 책임에서 자유롭지 않다. 역사적으로 “노동자 민중의 정치세력화”를 지지해 온 좌파운동조직이 왜 양당 구도에 갇혀 보수후보를 지지할 수 있다는 입장을 내게 되었는지, 학생행진의 입장글이 왜 문제인지 살펴보겠다. 덧붙여 이것이 사회운동에게 지시하는 바가 무엇인지 살펴볼 것이다.
해당 입장 글은 여러 차원에서 결함을 드러낸다. 첫째, 사회운동의 선택지를 거대 양당 중 하나로 좁혀버림으로써, ‘전부 아니면 전무(ALL OR NOTHING)’의 이분법으로 노동자민중의 정치세력화라는 쟁점을 뭉갠다. 둘째, 주장에 대한 근거가 거의 제시되고 있지 않거나 엉터리이다. 셋째, 사회적으로 거의 논증된 바 없는 특정 이론가의 말을 소제목 인용구로 삽입하는 등 개인에 대한 추종적 태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내며, 사실관계에 대한 파악 자체가 미비하다. 넷째, “진정한 좌파” 운운하며 선명성 과시에 사로잡혀 있다. 다섯째, 상기한 결함들로 인하여 사회운동적 관점이 빠져 있으며, ‘좌파’·‘운동’ 조직이 견지하기 어려운 입장을 드러낸다.
전도된 인과관계
해당 입장 글에서 학생행진은 문재인 정부를 “경제학적 문맹 내지 사기꾼”이라고 규정했던 윤소영(전 한신대 국제경제학과 교수)의 말을 인용하면서, 그 근거로 소득주도성장론, 비정규직의 정규직화와 같은 정권 초기에 내세웠던 몇 가지 아젠다를 근거로 든다.
학생행진은 2017년 대선 당시 촛불 분위기에 취한 사회운동이 민주당의 ‘적폐 청산’에 함께 한 결과, “민주당의 횡포에 저항하지도, 지지하지도 못하고 혼란만 겪었다”며, 정권 초기 소득주도성장론을 제대로 비판하지 못했다고 주장한다. 이로 인해, 공공부문 정규직화를 둘러싼 갈등, 최저임금 인상으로 인한 저임금 노동자의 일자리 감소를 야기했다고 진단한다. 나아가 검찰을 대통령에 종속시켜 민주당식 검찰개혁, 민주당식 언론개혁으로 귀결됐다고 평가한다. 해당 글은 각 쟁점들에 대한 평가가 정확하게 어떤 논리에 근거하는지에 대해 설명하고 있지 않다.
민주당식의 검찰개혁에 대한 비판은 사회운동 내에서도 상당히 제출된 바 있다. 그것이 주류적 견해라고 보긴 어렵지만 민주당에 실망한 상당수의 진보 지지층은 문재인 정부의 내로남불식 논리에 학을 뗀지 오래다. 오늘의 상황을 “적폐청산이라는 구호에 동조한 결과”라고 주장하는 것은 사실과도 맞지 않고, 논리적으로도 오류다.
‘적폐청산’은 누구보다 사회운동(좌파) 진영이 먼저 들고나온 구호였다. 가령 사회진보연대는 2016년 겨울 박근혜 퇴진 촛불이 촉발되기 시작한 이래 내내 ‘적폐청산’, ‘5대 체제 해체’ 등의 구호를 제시하며 촛불의 물결에 함께 했다. 촛불 초기 민주당 세력은 ‘퇴진’에 반대하고, 촛불로부터 거리를 두려는 듯한 제스처를 취해 비판받았다. 당시 민주당은 ‘퇴진’이 불가하다고 판단했고, 비판 여론의 힘을 받아 2017년 12월로 예정된 대선에서 승리하면 정권 교체는 따놓은 당상이라고 판단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퇴진 촛불이 100만 규모를 넘어 매주 대규모 촛불로 이어지 자, 이내 입장을 바꿔버렸다.
소위 ‘진보·좌파’는 나름의 정치세력화, 대중운동을 좌파적으로 견인하는 것에 성공하지 못했다. 당시까지도 진보정당들은 여러 개로 분열되어 있었고, 정의당은 민주당에 대해 강력한 비판을 가하지 못했으며, 자유주의 세력과 대별되는 자신의 체제 전환 이념과 정책을 명확하게 제시하지 못했다. 나아가 과거 이명박 정권 시기에 형성된 ‘반MB전선’은 이른바 ‘진보좌파’와 민주당의 차이를 부각시키지 못하고, ‘같은 편’이라는 인상을 남기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우리는 촛불 이후 노동조합 조직화가 유의미한 수준에서 이뤄지고 있다는 점 역시 확인해야 한다. 2016년 이후 민주노총의 조합원수는 급증세다. 정권 초기 노동조합들은 촛불에서 확인된 대중적인 자신감이 일터에서의 노조 조직화로 이어지는 물결을 두 눈으로 똑똑히 확인한 바 있다. 이런 증가 추세는 과거에 비해 특히 비정규직, 여성, 청년 사업장에서 보다 두드러진다. 이는 민주노총 전략조직화 사업의 결과이지만, 촛불 속에서 형성된 대중의 자신감도 중요한 요소다. 노동자들이 아래로부터 조직화되는 추세를 간과한 채로, 촛불의 성과를 민주당이 죄다 가져갔다며 ‘전부 아니면 전무’식 논리에 함몰되어선 곤란하다.
분별정립의 실패에 대한 반성은 그것대로 하되, 존재하는 성취마저 완전히 부정해버리는 식의 태도는 경계해야 한다. 가령 시민사회운동이 신자유주의 정책을 공공연하게 밀어붙여온 민주 당에 유화적인 입장을 드러내거나, 지나친 기대를 갖거나, 단체 운영에 있어 정부 재정과 독립적이지 않은 채로 정부 입장에 끌려다니는 모습은 분명히 비판해야 한다. 사회운동은 이러한 구태와 거리를 두어야 한다. 한데 해당 글에서 학생행진은 퇴진 촛불을 전후로 한 사실 관계와 순서를 오인하고, 문제 진단을 뒤섞어 비판 지점과 반성할 지점을 정확하게 구분하지 못하고 있다. 또, 민주노조운동의 엄연한 성취, 그간의 전략 조직화 사업의 효과와 더불어 이룬 명시적인 전진에 대해서는 무시하는 태도를 보인다.
실제 문재인은 당선 직후 ‘적폐청산’이라는 사회운동의 요구를 민주당 방식으로 수렴했고, 상당 부분 이를 폐기처분했다. 당선 직후 인천국제공항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만나 공공부문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를 약속했지만, 이 약속은 완전히 폐기됐다. 뿐만 아니라, 최저임금을 임기 내 1만원으로 인상하겠다는 약속이나 다른 노동 공약들 역시 대부분 지켜지지 않았다. 그 때문에 우리는 사회운동의 시선으로, 노동자·민중의 시선으로 문재인 정부의 ‘적폐청산’은 민주당의 내로남불식 구호에 지나지 않았다고 진단해야 한다. 학생행진의 시선에는 이런 점들이 누락되어 있다.
행진식 소득주도성장론 비판의 공백
소득주도성장론자들은 최저임금 인상과 고용보장 등을 통해 임금분배율을 높이는 등 노동정책의 변화를 주장해왔다. 임금분배율이 높아져 국내 총수요가 되살아나면, 과거 우리를 금융위기로 내몬 부채와 수출에 의존하는 성장 구도에서 벗어나, 금융을 규제하고 구매력 있는 수요를 창출함으로써 경제성장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소득주도성장론의 논리는 일정한 한계에 부딪혔다. 최저임금 인상, 재분배 정책, 소비세 인하로 일시적인 소비 효과가 있었지만, 최저임금 인상을 둘러싼 사회적 갈등이 보수언론들에 의해 영세 자영업자와 노동자 간 갈등과 경쟁이 크게 일어난 것처럼 부각됐고, 산입 범위 확대를 둘러싼 논란이 이어지면서, 효과 자체도 반감됐다. 또, 소득 증가가 반드시 소비의 증대로 이어지지는 않는다는 딜레마 역시 확인됐다. 이처럼 소득 증가가 바로 소비 증가로 이어지지 않는 현상의 연유를 따져물으려면 2000년대 이래 한국 사회는 대중의 금융화에 의해 잠식되기 시작했다는 점을 상기해야 한다. 1997년 외환위기 이후 미래에 대한 불안과 노후 대비 등을 이유로 소비지출 증가율과 평균 소비성향이 장기적으로 감소 추세에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와 같은 소득주도성장론의 공백에 대해 논쟁해야 한다. 한데 학생행진의 비판에는 구조적 한계에 대한 지적 없이 특정 이론가가 남긴 수사와 주류경제학적 논거만 남아 있다. 우리는 이와 같은 소득주도성장론의 공백에 대해 논쟁해야 한다. 한데 학생행진의 비판에는 구조적 한계에 대한 지적 없이 특정 이론가가 남긴 수사와 주류경제학적 논거만 남아 있다.
최저임금 제도는 미조직 저임금 노동자의 최저생계를 보장하고, 사회양극화를 어느 정도 해소하는 데 기여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이를 대중운동 기획 속에서 촘촘하게 실천하면, 우리는 이 투쟁을 단순히 몇 푼 더 올려달라는 협상 테이블에 머물거나, 최저임금이 고작 1~2퍼센트 오르는 수준에서 결정되는 순간에 회의에서 퇴장하는 방식으로 종결하는 게 아니라, 저임금 미조직 노동자들의 불만과 요구를 대중적으로 조직하는 운동으로 격상시킬 수 있다. 그런 점에서 그간 민주노총의 최저임금 인상 운동이 부족한 점이 많았고, 보다 대중운동적인 지향 속에서 그것을 전개했어야 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이를 운동적인 시야 속에서 비판적으로 평가하고, 보다 진전된 전술전략을 도출하고자 하는 노력은 꾸준히 있어왔다. 한데 학생행진의 입장은 그러한 문제의식이 결여되어 있고, 조선일보식 최저임금 인상 비판 논리에 갇혀 있다.
학생행진은 소득주도성장론을 비판하는 논거를 “경제성장의 요인인 자본축적과 기술 진보의 중요성을 부정하는 사이비이론”이라고 정리하고, “최저임금 인상으로 인해 자영업자 소득이 하락하고 자영업 관련 일자리가 감소했다”고 섣부르게 주장한다. 이것의 문제는 엄밀하지 못한 비판과 더불어, 그러한 비판이 사회적으로 갖는 의미 효과를 간과한다는 데 있다. 학생행진이 무비판적으로 인용하고 있는 바, 자본가들은 최저임금이 인상되면 중소기업과 소상공인들이 노동자들을 해고할 수밖에 없게 되고, 이에 따라 고용도 줄어들 것이라고 저항한다. 자본가들의 이익단체인 전국경제인연합의 싱크탱크 한국경제연구원이 지난해 발표한 「2018년 최저임금 인상이 고용에 미치는 영향」 보고서에 따르면, 2018년 최저임금 인상으로 인한 최저임금 적용 대상자의 취업률은 약 4.1%~4.6%포인트 감소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에 반해 최저임금 인상이 고용에 별 영향을 미치지 않았거나 오히려 긍정적 영향이 있었다는 연구 결과도 여럿 존재한다. 2013~2017년은 물론 2018년의 최저임금 16.4% 인상도 전체 고용에 영향을 미치지 않았고, 업종별로 볼 땐 도·소매업에서만 유의미하게 고용이 감소했다는 연구 결과가 도출된 바 있으며, 2018년과 2019년 경제활동인구조사를 분석한 결과 전 산업 수준에서든 주요 산업별로든 2018년 최저임금 인상이 고용률에 통계적으로 유의한 영향을 미쳤다는 실증적 근거가 발견되지 않았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학생행진은 엇갈린 연구 결과를 편향적으로 취사 선택하고 있다. 이런 자신감이 어디서 나오는 지 의문이다.
- 오상봉, 「최저임금 인상 및 관련정책의 고용효과」, 한국경제발전학회, 2019.
- 황선웅, 「2018년 최저임금 인상이 고용감소를 초래했는가?: 비판적 재검토」, 경제발전연구 제25권 제2호, 한국경제발전학회, 2019.
최저임금 제도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저임금과 빈곤을 해소한다는 것이고, 자영업자들의 문제는 임금 정책이 아니라 산업 정책을 통해 해소해야 한다. 두 문제를 인과관계로 상정하고 자본가들이 노동시간을 늘리고 임금 인상을 억제함으로써 잉여가치를 늘린다는 사실을 간과하는 순간, 다른 모든 영역에서도 자본가들의 이해관계를 대변하는 논리에 함몰될 수밖에 없다. 학생행진은 이에 대해서 아무 말도 하고 있지 않음으로써, 찬동하는 효과를 낳고 있다.
소득주도성장론이 초라하게 꼬리를 내리게 된 것은 한국 경제의 구조적 모순과 무관하지 않고, 대중이 부채를 통해 자산을 불리는 등 요인과도 연결되어 있다. 문재인 정부 집권기 부동산 시장의 팽창과 가계부채의 증가로 인해, 소득 증가가 소비로 이어지지 않는 구조를 유예시켰기 때문에, 부동산 제도와 양적완화와 같은 금융환경의 변화에 대한 기민한 대응이 없는 상태에서의 소득주도성장은 성공할 수 없었다. 심지어 문재인 정부는 「임대사업자 활성화 대책」 등 잘못된 대책을 내놓는가 하면, 부동산 시장 과열을 조기 차단하는 데 실패함으로써 아파트값의 폭등을 방기했다. 결과적으로 이는 부채를 통해 성장을 도모하는 기존의 모순을 반복하는 것과 다름없다.
사회재생산의 위기가 만연한 시대에 사회운동은 계속해서 파괴되는 삶을 지키고, 공공의 자원을 불평등하고 불균형적인 지배체제로부터 떼어내, 대안적 체제를 재구축하기 위해 사회화 전략을 고민하고 실천해야 한다. 한데 문재인 정부와 보수 야당들을 위시한 지배계급은 공공인프라를 설계하고 투자하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사회 불안 요소를 억제하는 것에만 초점을 맞추고, 재정균형론에 근거한 재정억제 정책만 일관되게 펴고 있다. 지배계급의 이와 같은 논거에 수동적으로 찬동하면서 사회적 요구에 기반한 해결책들을 ‘포퓰리즘’이라는 깔때기로 재단하는 것은 좌파의 역할과는 거리가 멀다. 현 정세에서 사회운동이 ‘무엇을 할 것인가’를 기준으로 삼는 게 필요하다.
어긋난 과녁
학생행진은 검찰 개혁 이슈에 대해서도 문재인 정부 비판의 칼날을 세웠다. 학생행진이 내세우는 논리는 2020년 출간된 윤소영의 저서 『한국사회성격 논쟁 세미나』에 실린 내용 그대로를 복사한 것이다. 저자의 모든 논거에 동의하기는 어렵지만, 검찰개혁이 결과적으로 경찰사법의 부활로 귀결될 수 있다는 우려는 어느 정도 타당해보인다. 그러나 학생행진의 입장 글은 여기서도 ‘전부 아니면 전무’의 몽매한 태도를 드러낸다. 검찰과 경찰 등 억압적 국가기구에 대한 민주적 통제는 어느 한쪽에 대한 편향적인 제도 개혁을 통해 이뤄진다기보다는 궁극적으로 아래로부터의 조직된 힘이 있어야 가능하다. 민주당식 검찰개혁의 궁극적 문제는 검찰에 대한 ‘민주적 통제’가 아니라, 검찰에 대한 ‘민주당식 통제’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는 데 있다. 학생행진은 이런 점에 대해 적실하게 논증하는데 실패한다. 고작해야 “제왕적 대통령제”를 문제의 원인으로 돌리고, “민주당은 보수주의자들도 인정하는 자유주의의 가치를 부정한다”는 비판에 머물 뿐이다. ‘제왕적 대통령제’는 아서 슐레진저 주니어(Arthur Schlesinger Jr.)가 『제왕적 대통령제(The Imperial Presidency)』(1973)에서 처음 제시한 개념인데, 한국 사회에서는 이명박-박근혜 정부를 거치면서 특히 불거져나왔다. 2012년 대선 당시 문재인 후보는 상대 박근혜 후보에게 “우리 정치가 안고 있는 모든 문제의 출발은 제왕적 대통령”이라고 말한 바 있기도 하다. 학생행진은 이명박-박근혜 시기에 두 대통령이 휘두른 제왕적 권한보다 문재인 정권 시기의 패악이 더 크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제왕적 대통령제’라는 수사를 끌어온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 개념이 케네디 정부의 “어용 역사가(court historian)”로 불린 슐레진저의 왜곡된 성찰이 빚어낸 결과물이라고 비판하는 견해에 따르면, 그것은 “한 당파적 지식인이 고안한 정치적 무기”였다. 권력 비판을 위해 도입됐지만, 동시에 “권력에 대한 깊은 사랑에서 배태됐”기에 중요한 만큼 위험하다.
- 김일년, 「제왕적 대통령제란 무엇인가? – 그 기원에 대한 성찰」, 『역사비평』, 2020
지난 8월 27일 학생행진은 정치학자 박상훈을 초대해 「한국 정치, 어디서부터 변화해야 할까? : 제왕적 대통령제의 문제점 파헤치기」라는 제목의 강연회를 개최한 바 있다. (이 강연의 원래 제목은 ‘좋은 정부란 무엇인가’였고, 문제제기가 있자 주최 측인 학생행진이 곧바로 수정한 바 있다. ‘무엇이 좋은 정부인가’라는 프레임은 “사회운동이 민주화의 성공을 가져왔지만, 운동에 의한 민주화가 민주주의의 실패를 야기했다”는 최장집-박상훈식 논리와 분리할 수 없다.) 박상훈은 한국이 3권 분립이 제대로 되지 않는다고 보고, “행정부가 지나치게 강하기 때문에 대통령이 헌법상 의회의 권한을 초과해 권력을 발휘한다”(청와대정부론)고 논증한다. 그는 “청와대가 중심이 돼 국정을 밀고 나가는 건 협의를 통해 문제를 해결해야할 민주정치와 거리가 멀다”고 비판하면서, “국무회의를 중심으로 한 국정운영”과 의회 정치의 강화를 대안으로 내세운다. 최장집·박상훈 등의 이와 같은 논의는 사회운동에 대해서는 비판적인 거리를 두고, ‘민주주의’를 자유주의적 대의민주주의로 한정한다. 정치를 정치가의 고도의 기예가 필요한 영역이자 정당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으로 보기 때문에, 좋은 진보정당 만들기와 좋은 정치인 되기를 강조한다. 그런 점에서 사회운동이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급진 사상의 전망이 희미해진 오늘날, 자유주의 정치의 야심가들에게 일정한 호소력을 갖는다.
특히 이들은 오늘날 한국 정치가 위기에 빠진 것에 ‘운동권’ 책임론을 지적한다. ‘운동권’, 즉 사회운동 전반을 사상적·실천적 차이가 없는 단일한 집단으로 묘사하면서, 이들이 정치를 피아 구분의 권력투쟁으로 인식함으로써, 문제 해결의 주체가 아닌 문제 그 자체가 됐다는 것이다. 문제의 핵심을 “사회운동의 변형과 무능력”으로 보는 이런 입장은 20년째 일관된 것으로, 여기서 변형은 “운동세력이 이념과 대의를 상실한 채 기존 정당체제에 개별적으로 흡수되는 현상”을 지칭하고, 무능력은 “국가의 구조·작동원리를 이해하고 민주주의를 제도로서 운용하는 능력의 부족”을 가리킨다. 이러한 논리하에서 최장집이 운동의 재활성화에서 답을 찾는 것은 ‘후퇴’라고 여기듯, 학생행진은 사회운동의 재활성화에 대한 구체적인 실천을 기각해버린 듯하다. 최장집은 그러한 변형과 무능력의 결과를 보수독점 정당체제의 재생산이라고 보지만, 최장집이 2006년 <민주주의의 민주화>를 집필했을 때보다 더욱 후퇴한 정치적 조건하에서 학생행진이 내린 실천적 결론은 보수독점 정당체제를 앞장 서서 재생산하는 일에 스스로를 가두었다.
민주당으로 흡수된 86세대 정치엘리트들의 몰계급적·몰사상적 정치 실천은 비판받아 마땅하다. 나아가 좌파는 ‘현실주의’라는 이름으로 민주주의를 선거를 중심에 두는 정당 간 경쟁 규칙의 제도화로 협소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자유와 평등에 대한 권리를 보편적인 시민권으로 정립할 수 있는 정치·사회적 실천을 감행해 나가야 한다. 사회운동적 노조주의, 민주노조 운동의 갱신과 혁신은 이런 실천과 무관하지 않다. 한데 학생행진은 이러한 정치적으로 타락한 86세대 정치엘리트들의 ‘실패한 민주화’에 맞선 자신의 실천을 그것을 좌파의 관점에서 비판하고 사회운동적으로 실천하는 것이 아니라, 우익적으로 비판하고 보수독점 양당 정치에 스스로 함몰되는 결론을 내고 말았다. 이는 학생행진의 지난 역사에서 드러낸 입장과도 완전히 상이하고, 아무런 연결성도 없다.
정당정치 혹은 정당으로의 정치세력화 프로젝트의 실패는 민주주의를 위한 정치적 주체를 새롭게 구성하지 못한 것에서 기인한다. 즉, 오늘날의 실패는 ‘대중운동의 급진화’의 미완에서 기인하지, 대중운동 자체에서 기인하지 않는다. 과오에 대한 어긋난 평가와 냉소는 선거를 앞둔 시기에 섣부르게 대중을 주권을 행사하는 유권자 정도로만 호명할 뿐이며, 정치 주체화와는 거리가 멀다. 오늘날 정치 현실에 실망한 대다수 민중의 기대는 학생행진이 잘못 상정하듯 ‘정권 교체’ 여부에 가둬져 있지 않으며, 체제 자체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관통한다. 학생행진이 상기한 이론가들의 논의를 무매개적으로 흡수해 내릴 수 있는 결론은 사회운동에 대한 기각밖에 없다.
정권교체가 낳은 실망스러운 결과에 반복적으로 실망한 대중은 냉소적 허무주의에 사로잡힐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이것에 맞선 좌파의 과제는 대중에 의한 아래로부터의 정치를 복원하고, 대중운동의 급진화를 통해 그것이 제도정치의 소용돌이 안에 함몰되지 않도록 지속적으로 운동을 지켜내는 것에 있다. 세상이 2022년 3월 직후에 끝날 게 아닐진데, 학생행진이 왜 사회운동을 기각하고 일도양단(一刀兩斷)의 손쉬운 결론에 갇혀버렸는지 의아하다. 최근 밑바닥 노동자들의 저항에 대한 혐오 정서가 매스미디어와 국가 권력을 통해 추동되는 현상을 통해 확인할 수 있듯, 저임금 노동자·비정규직·여성·성소수자·이주민 등이 주체로 선 새로운 사회운동은 기득권 세력에 의해 종종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억압된다. 민주적인 ‘절차’를 지켜야 한다는 지배적인 윤리가 더 많은 민주주의를 쟁취하기 위한 정치적 행위와 대립한다는 논리야말로 문제적이다. 우리는 사회운동에 대한 짓밟기 태도로 일관하는 민주당 이재명 후보와 국민의힘 윤석열 후보에 공히 비판적이어야 한다.
검찰개혁을 둘러싼 논의에 적실하게 비판하고 제대로 된 방향을 제시하는 문제 역시 민주당식 검찰개혁 프로세스가 결여하고 있는 바에 대해 있는 그대로 비판하고, 그것이 빚어낼 우려에 대해 지적하되, 동시에 과거 엄연하게 존재했던 검찰 내 엘리트들의 정치 개입과 자본과의 유착(삼성장학생 등) 문제, 지극히 주관적인 판단에 의거해 기소권을 남발하거나 행사하지 않는 등 고질적 병폐를 어떻게 민주적으로 통제할 것인가에 대해 논하면 된다. 그것이 운동단체가 할 수 있는 보다 중요한 책무이기 때문이다. 학생행진은 이에 대해서는 아예 방기하고, 특정 이론가의 논리를 앵무새처럼 읊을 뿐이다.
뇌피셜과 가짜뉴스
학생행진은 한반도 문제에 대한 관점을 늘어놓는다. 문제는 일종의 ‘뇌피셜’로 상황을 완벽하게 이해하고 있다고 착각한다는 데 있다. “북한에는 미국이 북한의 ‘핵동결’을 용인하고 경제 제재 완화를 해줄 거라는 헛된 믿음을 심어주었”고, “미국에는 북한이 일괄타결식의 완전한 비핵화를 합의할 거라는 믿음을 주었”다는 것을 어떻게 확신할 수 있는가? 불행히도 학생행진은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할만한 근거를 제시하고 있지 않다.
나아가 윤석열은 사드 배치에 대해 찬성에 가까운 입장을 밝히고 있다. 그는 ‘사드 추가 배치에 찬성하는가’라는 언론의 질문에 대해 “사드를 포함한 미사일 방어 시스템을 얼마나 더 강화하고, 또 한미일 간에 공조할 것인지는 안보 상황에 따라 얼마든지 업그레이드할 수 있는 우리 정부의 주권 사항이다. 거기에 입각해 판단하겠다”라고 말한 바 있다. 이는 지금까지 학생행진이 펼쳐온 ‘사드 배치 반대’ 등 평화권 주장과는 정면으로 배치된다. 이에 대해 학생행진은 아무런 언급이 없다. 한반도 평화 쟁점에 대한 이런 아전인수식 해석은 학생행진의 주장에 대한 신뢰도를 현저히 떨어뜨린다.
오늘날 남북관계에서 남한 정부는 실제 ‘운전자’ 역할을 하기 어려운 처지에 놓여 있다. 북한은 남한 정부가 미국의 입장을 견인해 올 주체적 역량을 갖고 있다고 판단하지 않으며, 미국 역시 남한 정부가 자 신이 원하는 방향대로 북한의 최고지도자를 설득할 수 있다고 믿지 않는다. 하노이 회담이 노딜로 끝난 것을 거론하며 문재인 정부의 기대가 너무 순진했다고 평할 순 있지만, 하노이 노딜의 책임까지 문재인 정부에게 돌리는 것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지난해 여름 발간된 볼튼 회고록에 따르면, 당시 하노이 정상회담의 극적 타결 가능성도 상당히 있었으나, 미 행정부 내부의 대북 강경파 참모들의 집요한 반대 노력과 이른바 ‘스몰딜 프레임’(북한 영변 핵시설 폐기와 대북 제재 일부 해제 교환을 스몰딜, 즉 나쁜 거래로 규정하는 미국 강경파 프레임)으로 당시 대통령이었던 트럼프가 결국 결렬을 결심했다고 한다. 이와 같은 평가는 매파와 비둘기파, 한국과 미국, 중국의 전문가를 막론하고 중론이다. 학생행진은 갱신되지 않은 정보를 바탕으로 무리하게 자신의 주장을 늘어놓고 있다. 학생행진은 스스로 “진정한 좌파”라고 자임하기 전에 ‘조사 없이 발언 없다’(没有调查,就没有发言权)는 경구부터 떠올릴 필요가 있다.
문재인 정부의 외교 전략에 대한 비판은 보다 정교해야 하며, 미국이 새롭게 재편하고 있는 아시아-태평양-인도양 질서에 어떠한 방식으로 조응할지, 그것에 반발한다면 어떻게 반발하는 것이 맞으며 그것에 조응한다면 어떻게 조응해야 하는지에 대한 전반적인 입장 없이는 불가능하다. 학생행진은 단순히 그것을 ‘북핵’과 ‘독재’라는 이슈에 가둬놓을 뿐, 이를 넘어서는 질서 재편에 대한 좌파의 입장이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아무 언급이 없다. 단순히 “한국의 국제적 입지가 모호해지”고, “군사 위기가 강화될 것”이라는 이유라면, 굳이 좌파이거나 사회운동이어야 할 이유도 없지 않은가?
학생행진은 가짜뉴스 논리마저 끌어온다. 코로나 방역에 대해 학생행진은 현 정부의 방역을 ‘실패’라고 규정하면서, 초기에 그것이 실패한 이유로 “중국발 입국 통제를 실시하지 않은 것”을 든다. 그러나 당시 중국발 입국 통제를 실시하지 않음으로써 빚어진 신천지발 1차 유행은 단기간에 통제된 바 있다. 무엇보다 중국발 입국 통제 주장은 방역에도 유의미하지 않았다. 2020년 2월 코로나 발병 초기 가장 앞장서 중국발 입국을 막은 나라는 미국이었는데, 통제조치에도 미국의 코로나 확진자 수는 급격히 늘었다. 중국 이외의 국가에서 입국하는 외국인에 대해선 통제조치를 취하지 않아 봉쇄의 실효성도 없었다. 특정 국가 출신자의 입국을 막는 조치가 방역에 효과적이라는 주장의 근거는 빈약하다. 대만과 뉴질랜드의 경우 입국 금지 대상을 모든 외국인으로 확대했기 때문에 실효성이 있었지만, 두 나라의 경우에는 한국이나 미국과 정치·사회적인 조건이 너무나도 달랐다.* 중국발 입국자를 조기에 차단했다면 초기 방역에 성공했을 것이라는 학생행진의 가정은 일부 극우 언론들의 입장과 일치하는데, 이는 전혀 과학적이지도 않고, 결과적으로 맹목적인 중국인 혐오만 불러올 뿐이다. 학생행진이 이렇게 무리한 논리로 방역 정책을 비판한 것의 연유는 무엇인가? ‘적의 적은 우리편’이라는 몽매한 태도를 답습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 📌「'중국 봉쇄'로 코로나19 막을 수 있었다?」, 서울대학교 언론정보연구소
- 📌강정규, 「[팩트와이] 빅데이터로 본 코로나 1년...'모기장론' 효과는?」, YTN, 2021. 1. 20.
실제 국내 방역에서 발생한 첫 문제는 당시 대구의 요양병원의 ‘코호트 격리’에서 불거진 오류에서 더욱 부각됐으며, 의료 인력의 현저한 부족이 낳은 의료 노동자들의 고강도 노동이라는 문제는 코로나19 발발 직후부터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또, 노숙인과 도시빈민 등 취약계층에게 재난의 피해마저 불평등하게 분배되고 있다는 점과 공공의료 부족을 방치하면서 불거지는 문제들 등 비판할 근거는 많다. 학생행진은 보수언론의 논거를 베껴 K-방역의 실패를 주장하는데, 구조적인 문제가 무엇이었는지 제대로 파악도 못한 게 아닌지 의심스럽다.
- 정성철, 「홈리스 대상 차별적 방역」, 플랫폼c
- 박경득, 「병상이 있어도 환자를 살리지 못하는 이유」, 플랫폼c
- 전진한, 「코로나19바이러스와 자본주의, 의료공공성」, 플랫폼c
사회진보연대 소책자의 문제
학생행진과 연관 관계를 맺고 있는 사회진보연대는 대선 쟁점에 대해 학생행진과 비슷한 논조의 글들을 발표한 바 있다. 지난 11월 4일 사회진보연대는 소책자를 통해 이재명 후보의 노선에 대한 비판 작업을 표면화했다. 이 소책자에서 사회진보연대는 이재명이 내세운 정책들을 비판하면서, “노동자들의 문제를 해결하기보다 나라 경제 전체를 위기와 혼 란에 빠뜨릴 가능성이 농후”하다고 밝히고 있다. 또, 앞서 이야기했듯 11월 11일 학생행진의 투박한 입장을 대신 해설해주는 듯한 글을 발표했는데, 본질적으로는 이 글 역시 학생행진과 비슷한 문제를 드러낸다. 이러한 입장은 사회진보연대 내 회원 활동가들의 여러 비판에 의해 조정된 것이지만, 마찬가지의 한계를 드러낸다. 사회진보연대가 주장하듯 “이재명 후보라는 ‘오답’을 택하는 것은 노동운동의 나아갈 방향이 될 수 없다”는 것은 이견의 여지가 없다. 나아가 사회진보연대가 주장하듯 “문재인 정부 시기 민주노총이 요구했던 노동정책의 내용과 결과에 대해 평가”하고, “문재인 정부 노동정책의 실패를 정직하게 평가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이 소책자의 논거는 심각한 결함을 갖고 있다. (학생행진의 입장문과 사회진보연대의 소책자 논조는 크게 다르지 않다.) 첫째, “잠재성장률이 지속적으로 하락하는 조건에서 단기적인 정책으로 경제를 빠르게 성장시키기는 어렵다는 점, 여기에 더해 낮은 출산율과 빠른 고령화라는 제약조건을 고려하면 과감한 확장 재정정책으로 국가채무를 무분별하게 증가시키는 것 또한 위험”이라는 사회진보연대의 주장은 고개를 갸웃하게 한다. 윤석열이 이재명보다 나은 이유는 ‘현실을 객관적으로 인식’하고 있고 ‘소득주도성장과 같은 공상적 정책을 펼치지 않는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이것을 노동정책에 대한 평가로 보기는 어려워 보인다. 또, 윤석열은 빈번하게 반노동적 입장을 표명해왔는데, 정작 사회진보연대는 이에 대해 아무 언급이 없다. ‘아전인수’라는 지적을 벗어나기 어려워보인다.
둘째, 이 소책자에서 사회진보연대는 윤석열이 “반노조주의자도 아니고 극단적 노동유연화론자도 아니”라고 섣부르게 주장한다. 또, “윤석열 후보는 친노동자적이라고 할 수는 없어도, 국가 경제와 사회적 상황에 대한 객관적 인식을 바탕으로 정책을 제시하고 있다”고 평가한다. “최소한 이재명 후보보다는 현실을 객관적으로 인식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국민의힘의 역사적 경향을 너무나 쉽게 무시할 뿐만 아니라, 단순한 반정립에 지나지 않아 보인다. 이재명에 대해서는 자기 나름의 시각을 갖고 분석적으로 검토하는 데 반해, 윤석열에 대해서는 자신들이 보기에 합리적이라고 여겨지는 발언 몇 개만 인용해 손쉽게 이재명의 비합리적인 발언들과 비교한다. 이런 아전인수 논리로 따지면, 이명박이나 박근혜, 문재인에게서도 그 나름대로 의미 있는 발언과 원칙을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사회진보연대는 자의적으로 윤석열의 좋은 요소와 이재명의 나쁜 요소를 편취해 몇 가지 단순한 프레임으로 평가해버린다. 유일한 지지 근거로 (직무급과 임금 양보를 통한) 임금격차 완화를 거론하고 있는데, 이는 기실 이재명과 윤석열 모두 다르지 않은 입장이기도 하다. (물론 노동자운동과 반하는 입장이지만 말이다.) 그런 점에서 기초적인 논리 관계도 상실하고 있다. 이 모든 것이 ‘윤석열 지지’를 위한 밑밥 깔기라고 보지 않을 수 없다.
윤석열은 이미 무수히 많은 망언을 쏟아낸 바 있다. 전두환의 공적을 무시해선 안 된다는 발언이 구설에 오르고 사과 요구가 빗발치자, 사과는 개나 주라는 식의 조롱을 SNS 전시하였는데, 설사 이것이 실무자의 실수에 의한 것이라 할지라도, 윤석열이라고 하여 이재명에 대한 엄격함과는 다른 너그러움을 가져야 할 이유라도 있는가? “주120 시간 노동”, “집 없어서 청약통장 못 만들었다”, “가난한 사람은 불량식품이라도 먹게 해줘야”, ”손발 노동은 인도도 안 하고 아프리카나 하는 것” 등의 발언은 윤석열이 반노동적일뿐만 아니라, 국가 정책의 기초적 상식마저 결여되어 있을 만큼 준비되어 있지 않은 후보라는 것을 드러낸다. 학생행진과 사회진보연대는 이런 점들에 대해 아무 언급 없이 그를 너무나 너그럽게 ‘자유주의자’라고 격상시킨다. 또, 학생행진이 “윤석열 지지도 감수해야 한다”는 결론을 표명하기 위해 국민의힘이 민주자유당 → 신한국당 → 한나라당 → 새누리당 → 자유한국당 → 미래통합당으로 이어져온 현대사의 대표적 반노동·반민주 정치세력의 후신이라는 점을 가뿐하게 무시하는 것 또한 부적절하다.
셋째, 사회진보연대는 정치의 사법화에 대해 비판적인 견해를 여러 차례 밝혀왔다. 그런데 윤석열 후보는 누구보다 정치의 사법화를 앞장 서서 추동해온 행위자 중 하나다. 이러한 현상에 대한 그의 인식 역시 우리는 들어본 바가 없다. 오히려 최근 불거진 고발 사주 의혹은 검찰총장 시기 윤석열이 자신의 권한을 남용하였고, 정치적으로 활용하려 했다는 점을 연상시키기에 충분하다. 조국의 ‘검찰개혁론’이 내로남불의 끝판왕이었다는 것은 사실이다. 한데 그렇다면 윤석열은 대체 뭐가 다르다고 할 수 있을까? 작금의 정세에서 좌파는 민주당과 국힘의 이전투구와 아전인수를 공히 비판해야 하지만, 양자택일 논리에 수몰된 학생행진과 사회진보연대는 이에 대해 아무런 질문이 없다.
누구의 포퓰리즘인가?
학생행진 입장문으로 돌아가보자. 학생행진은 문재인 정부의 ‘소득주도성장론’과 이재명 캠프의 ‘기본소득론(기본자산, 기본주택 등)’, 정부와 여당 인사들의 특권을 이용한 자기이익추구 행위를 근거로 들며 민주당은 곧 ‘포퓰리즘 집단’이라고 결론내린다. 하지만 이를 제대로 된 분석이라고 할 수 있을까? 엄밀하지 않게 프레임 씌우기를 위한 레토릭에 지나지 않아 보인다. 오히려 이런 식의 프레이밍은 오늘날의 모든 사태를 ‘포퓰리즘’이라는 기준으로 바라보게 하고, 포퓰리즘이냐 아니냐로 모든 것을 구획짓는 오류를 유발한다. 누군가는 양적완화나 재정 확장론을 ‘포퓰리즘’이라 칭하고, 누군가는 도널드 트럼프처럼 인종주의적인 혐오 선동을 ‘포퓰리즘’이라 부른다. 또 어떤 사람은 노사모나 문파식의 팬덤 정치를 ‘포퓰리즘’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야당은 여당을 포퓰리즘이라고 비난하고, 야당도 여당을 포퓰리즘이라고 비난한다. 이렇게 모두가 포퓰리즘에 반대한다고 주장하지만, 그 기준에 대한 보편적이고 정확한 합의는 존재하지 않는다.
“포퓰리즘보다 법치주의가 낫다”라고 단언하는 것 역시 안일하다. 법에 근거해 통치하겠다는 법치주의는 현대 사회에서 그 자체로 큰 의미를 갖지 않는다. 그보다는 무엇을, 누구를 위해, 그리고 어떤 원리를 구현하기 위해 법을 만들고, 해석하고, 집행하는지가 훨씬 더 중요한 쟁점이다. 그러므로 법치주의 또는 자유민주주의18·19를 근거로 한국 사회 여러 정치세력과 계급 간 권력관계에 큰 영향을 주는 대통령 선출에 대한 입장을 정하는 건 어불성설이다.
- 학생행진이 ‘자유민주주의’를 기준으로 내세워 “포퓰리즘보다 자유민주주의가 낫다”고 선언하는 것의 의미효과는 포퓰리즘 비판이라는 자신의 정치적 목표를 엉뚱한 방향으로 유도한다. 역사적으로 한국의 군부독재나 보수정권, 심지어 민주당 세력조차, 사회운동을 반공주의 논리로 폄훼하고 탄압할 때 종종 ‘자유민주주의’를 강조해왔다는 것은 너무나도 잘 알려진 사실이다. 1971년 박정희는 유신헌법 전문에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라는 표현을 처음으로 삽입했다. 이는 지극히 한국적인 현상으로, 민주주의의 진의와는 거리가 멀다. 한국에서 ‘자유민주주의’는 반공과 반북, 개발독재라는 이데올로기를 가리는 허울로 작동해왔다.
- 프랑스 혁명의 원리로 천명된 ‘인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에 대해 칼 마르크스는 그것이 정치적 해방을 선언하고 있지만 이때 정치적으로 해방된 시민 대다수는 아무런 소유도 없이 자본의 굴레에 예속된 무산계급이라는 점을 지적한다. 소위 ‘자유민주주의’를 신봉하는 자들은 평등과 자유가 대립되는 개념이라고 강요한다. 이들은 시민의 평등 없이는 시민의 자유도 없고, 시민의 자유 없이는 평등도 없기에 프롤레타리아트의 연대와 단결만이 평등-자유를 가능하게 한다는 사실을 기각하며, 자본주의 체제에서의 착취를 정당화한다.
포퓰리즘과 법치주의를 대당시키는 논리도 넌센스다. 포퓰리즘인지 아닌지의 여부는 차치하더라도, 포퓰리즘과 법치주의는 동일한 위상을 갖는 개념이 아니다. 포퓰리즘은 엘리트주의에 대당되고, 법치주의는 인치주의에 대당되는 것으로, 매우 포괄적이고 추상적인 개념이다. 더 큰 문제는 저 두 개념으로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작동하는 정치를 섣부르게 분석하려 시도한다는 것이다. ‘포퓰리즘 대 법치주의’로 자본주의 사회의 제도 정치를 분석하고 계급적 혹은 사회운동적 입장을 정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포퓰리즘이라는 개념은 그 포괄성과 추상성 때문에 분석적이지 않다. ‘대안이 무엇이냐’라는 질문에 ‘반대’ 이상의 답을 내놓기도 어렵다. 그 때문에 학생행진 또는 사회진보연대는 내내 그에 대한 ‘차선’ 또는 ‘차악’으로 “~~~가 포퓰리즘보다는 낫다”는 식의 수세적인 수사를 반복할 뿐이다. 무리한 논리에 갇혀 막다른 골목에 갇힌 셈이다. 그런 의미에서 학생행진·사회진보연대의 포퓰리즘 비판은 감히 ‘비판’을 시도했다기보다는 ‘반대’에 머무르고, 손쉬운 정치적 프레이밍에 스스로를 봉쇄할 수밖에 없다. 문제는 이러한 프레이밍이 자신들이 그토록 비판해 마지않는 ‘반보수주의 전선’, ‘반MB전선’과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반보수주의 전선의 사상적 취약성을 ‘반포퓰리즘’이라는 또 다른 취약성으로 대체할 뿐이다.
위기의 시대, 사회운동의 태세
스스로를 ‘급진좌파’라 여기는 한 운동조직이 다른 조직이나 흐름을 비판할 때 종종 쓰는 말이 있다. “사회주의에 미달한다”는 식의 수사, 학생행진이 서슴없이 구사 한 “진정한 좌파” 수사가 그것이다. 이와 같은 수사법은 자조직에 대해서는 지나치게 너그럽고, 타 조직에 대해서는 한없이 엄격한 사고 구조를 낳는다. 학생행진-사회진보연대는 자조직을 유난히 똑똑해서 상황을 간파하고 있는데 반해, 다른 사회운동 단체들이나 활동가들은 뭘 모른다는 식의 태도를 버리지 못한다. 이는 운동의 질적 성장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 뿌리 깊은 계몽주의와 선명성 경쟁에 다름 아니다.
계급은 한편으로는 직종이나 직업 같은 소집단을 초월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국민’ 같은 통일적인 집단을 분할하는 갈등적 집단이다. 따라서 ‘계급’ 그 자체가 아니라 계급의 형성과 동학에 대해 포착하려면, 초계층적인 집단화 과정이 있는지, 그 집단화 과정이 국민적인 통일성에 균열을 내는 갈등적 과정인지 면밀하게 살펴야 한다. 다시 말해, 누구누구가 ‘계급의식’을 견지하고 있는지 검증하고 자신의 입장을 일방적으로 계몽하는 식이어서는 곤란하다. 계급형성이라는 개념을 ‘초계층적 집단화 과정’으로 사고하면, “진정한 좌파”의 기준 따위는 설정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자의성에 근거해 타 세력이나 대중, 노동자들의 운동을 재단하는 것은 오히려 ‘반계급적’이라 할 수 있다. 자기 기준에 도달한 이들은 영원히 자기 정파밖에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 학생행진과 사회진보연대가 벌이고 있는 행위야말로, 끊임없이 폐쇄적인 방식으로 자신의 잣대를 설파하고, 사회운동 내 다른 견해를 가진 개인들 또는 조직들과의 소통을 방기한 채로, 자신을 제외한 세상 모두를 왕따시키는 것이다. 이는 좌파가 대중운동에서 견지해야 하는 태도, 과거 학생행 진의 역사적 궤적이 가리키는 대중운동론과는 무관하며, 그런 점에서 오늘날 학생행진은 자신의 역사를 스스로 부정하는 것과 다름없다.
거대 양당의 이전투구와 역겨운 내로남불 논리로 가득한 선거 정국이다. 역대 어느 선거보다 ‘지지 후보 없음’이 많다. 누군들 이런 선거에 대해 보이콧하고 싶지 않겠는가. 그런데 이런 정세에서 좌파 혹은 사회운동이 취야 하는 태도가 양자택일의 함정에 갇혀 보수언론의 논리에 기대고, 동시에 설익은 주장으로 ‘진정한 좌파’ 경쟁에 몰두하는 것일까? 차라리 최근 진보 5당(노동당, 녹색당, 사회변혁노동자당, 정의당, 진보당 – 이상 가나다순)의 민중경선을 주장하는 흐름을 주목하는 것, 진보정당을 혁신·재조직하고 연합을 도모하는 것, 민주노총의 정치 방침에 개입하려 노력하는 것, 대선 시기 보다 급진적인 정책 의제를 발굴하고 관철시키는 운동이 사회운동적 태도에 가깝다. 얄팍한 현실주의가 운동의 길을 집어삼키도록 내버려두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대안 세력을 대중적으로 부각시키고, 어떠한 대안이 필요한지에 대해 진지하게 고찰하는 노정이다. 반노동·반민주적 행태를 보이는 데 우열을 가리기 힘든 거대 양당이 아닌, 좌파적 대안을 보다 급진화·대중화 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설령 그 결과가 실패로 귀결하더라도, 그 실패 자체가 지배정치의 논리에 포섭되어야 할 근거가 될 순 없다.
우리는 흩어진 사회운동들간의 연대가 절실하게 요구되는 시기를 살고 있다. 작금의 상황을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사회운동(좌파) 자신을 두텁게 다져야 한다. 그래야만 거대 양당 중 어느 세력이 차기 정권 을 수권하든, 그들이 공히 민중운동 전반에 가할 탄압과 포섭의 시도에 능동적으로 대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정치의 위기 상황에서 사회운동이 자신의 비판 능력을 상실하고 정치적 전망을 기성정치의 논리에 의탁하는 것은 무엇보다 사회운동 자신의 총체적 위기를 가리킨다. 이를 극복하는 길은 주체 형성의 실천과 사회운동들 간의 교통 속에서 양질의 발전을 도모하는 것뿐이다. 보다 개방적이고 갈등적인 장소에서 다른 사회운동들을 만나야 한다. 학생행진이 자신의 치명적 오류와 반운동적 태도를 돌아보고, 사회운동들에 대해 ‘거들고 보태기도 하지만 다툴 수 있는 동료되기’의 지혜를 갖추길 희망한다. [끝]
※ 이 글은 플랫폼C 기획팀에 의해 작성되었으며, 플랫폼C 회원들의 의견 수렴을 거쳐 수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