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마르크스주의와 『마르크스의 주변부 연구』 ②

일본 마르크스주의와 『마르크스의 주변부 연구』 ②

이론적 작업을 할 수 있는 학자가 현대에서는 정말 적다는 것이 노동분야에서도 말할 수 있지만, 아카데미즘을 경시하지 않고 현실의 운동을 잘 분석해서 이론적 개념을 만들어 내는 사람들이 더 필요하다고 느껴지는 부분입니다.

2021년 7월 9일

[동아시아]일본동아시아, 일본, 마르크스주의, 국제주의

이 글은 일본에서 발간되는 노동ㆍ빈곤 문제 전문 잡지인 『POSSE』 28호 (2015/10)에 실린 케빈 B. 앤더슨의 『마르크스의 주변부 연구』 일본어판 출판 기념 좌담회 「마르크스 연구의 최전선에서 현대자본주의를 읽어낸다 – 케빈 B. 앤더슨 『마르크스의 주변부 연구』가 닦는 새로운 지평 : 고토 미치오 × 다이라코 도모나가 × 기노시타 다케오 × 사사키 류지」를 번역한 글이다. 이 좌담의 앞부분에서부터 읽기를 권한다. 일본 마르크스주의와 『마르크스의 주변부 연구』 ①

『마르크스의 주변부 연구』는 한국에서도 경상대학교 정성진ㆍ정구현 두 연구자에 의해 2020년 번역되어 출판되었다. 이 좌담회에서는 『마르크스의 주변부 연구』의 내용에 대해 일본 마르크스학계가 수용하고 있는 시각을 알 수 있다. 또한 근래 일본 마르크스연구자들이 주목하고 있는 말년의 마르크스의 연구노트를 기반으로 한 연구의 함의점들과, 최근 사이토 코헤이의 『인류세의 「자본론」』(『新人世の「資本論」』)이 30만부 넘게 팔리는 등 일본에서 마르크스가 주목받고 있는 맥락에 대해서도 엿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글의 분량을 고려하여 이 글은 1부와 2부로 나뉘어 실음을 밝힌다.

「개인적 소유의 재건」론과 후기 마르크스공동체론은 양립하는가

고토 : 가장 힘든 일들을 겪고 있는 사람들에게 눈을 돌린다는 마르크스의 관점과 관련이 있습니다만, 『요강』의 유명한 삼단계론 중 제2단계에서 물상화에 기반한 강제적인 개인의 발전이 있고, 그 위에 제3단계인 어소시에이션(연합)이 성립한다는 논의가 있습니다. 이 논의는 어쩌면 기본적으로는 서구에 한정된 이야기겠습니다만, 인간의 발전의 기초로서 물상화된 세계에 의한 강제적인 개인화 같은 계기를 일단 거쳐간다는 논의가 논리적 과정으로서는 분명히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도 마르크스는 『베라 자술리치에게 보낸 편지』 등을 통해 발달한 자본주의 국가의 프롤레타리아트 내지 그 생산력에서 도움을 받을 수 있다면 공동체로부터 바로 사회주의로 가는 것은 불가능하지는 않다고도 서술하고 있습니다. 그 경우 물상화된 세계를 거치지 않아도 개인의 능력 발전이 가능해진다는 이미지를 마르크스는 어느 정도로 혹은 어떤 방식으로 가지고 있었는지의 지점이 걸립니다. 흔히 이야기되는 ‘개인적 소유의 재건’론에 관한 문제지요. 앤더슨은 그러한 문제를 그다지 전개하고 있지 않아 보입니다만, 그렇다면 그는 물상화에 있어 강제된 자립성과 그것 없이 개인의 능력 발전을 잘 통일할 수 있는 인간관을 마르크스가 제기하고 있었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요.

다이라코 : 그것은 정말로 어려운 문제이고, 앤더슨 자신은 반드시 명료하게 답하고는 있지 않아 보입니다. 따라서 이 저작만으로는 지금 고토씨가 제기하신 의문에 답하기 힘듭니다. 하지만 앤더슨도 조금 다루고 있는 논점을 제가 나름 생각해 보면, 역시 ‘개인적 소유의 재건’의 출발점은 자본주의에 선행하는 사적 소유입니다. 사적 소유가 제1단계에서 그 부정으로서 부활하면 이것은 공동체적 관계의 부활은 아니겠죠. 공동체가 붕괴하고, 사적소유가 어느 정도 성립하고 있으므로 그 원리는 서양에 한정된다고 마르크스는 말했습니다. 이러한 ‘개인적 소유의 재건’의 비전과, 러시아를 포함한 공동체적 관계가 서양자본주의의 발전, 즉 노동운동과 과학기술의 제공 등과 결부된다면 사적소유의 단계를 거치지 않고 공산주의의 새로운 형태로 이행할 수 있다는 인식 사이에는 하나의 거대한 패러다임 변화가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실제로 러시아의 공동체에 대한 평가는 예를 들면 『공산당 선언』 러시아어판 서문에서 서술되어 있는 것처럼 가장 말년의 것입니다. 그래서 매우 어려운 지점은 『요강』 에서는 자본주의에 의해 전개된 생산력이 기초가 되어 있고 자본주의 속에서 소외된 관계일지라도, 보편적인 생산력에 대해 관계될 수 있는 힘을 강화시킨 주체라는 것이 전제가 되어서 비로소 제3단계에 이른다는 구성이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내용에는 어떠한 종류의 도야(陶冶)라고 하는 개성의 최대한의 발전, 그리고 생산력의 발전을 습득한 주체라고 하는 것이 전제라 되어 있어서 이는 하층이나 주변의 변혁의 힘을 발견해 내는 마르크스의 문제의식과는 본래는 조금 달라져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느 쪽이냐 하면 『요강』에서는 선진국노동자의 힘에 의해 자본주의가 극복될 수 있다는 인식과 친화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최종적으로 마르크스는 이러한 사고방식을 분명히 버린 것이 아닌 그것을 무언가의 형태로 상대화하면서 양자의 사고방식을 둘 다 이어간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합니다. 양자를 이론적으로 어떻게 정합적으로 만들 수 있을까 하는 것은 마르크스도 잘 보이지 않았던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합니다.

고토 : 앤더슨도 서술하고 있습니다만, 『61-63년 초고』에 「노동조건과 노동자의 본원적 통일의 두가지 형태」라고 하는 기술이 있어서 그 두 가지 형태 모두를 재건한다는 이미지가 마르크스에게 있습니다. 두가지 형태 중 한가지의 형태가 공동체 소유로서 또 한 가지의 형태가 개인적 소유입니다. 양자 모두 재건한다는 이야기가 되어 있지만, 그 두가지의 관계에 대해서는 그닥 논의가 전개되고 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다이라코씨가 말한 것처럼 마르크스는 양자 모두 생각하고 있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왼쪽부터 고토 미치오, 기노시타 다케오, 다이라코 도모나가, 사사키 류지

사사키 : 이러한 논의는 후쿠토미 마사미(福富正実, 1930-1997)씨가 1989년에 『경제학과 자연철학 : 인류세대의 영속과 자연과 문화를 위한 마르크스주의 지대론의 구축을 목표로 経済学と自然哲学 人類世代の永続と自然と文化のためのマルクス主義地代論の構築をめざして』(世界書院)이라는 책에서 본격적으로 논의한 바가 있습니다. 요약하자면 개인적 소유라는 말이 전형적으로는 오오쓰까 히사오(大塚久雄, 1907-1996)씨와 같이 상품생산사회라고 하는 논의로 이어집니다만 마르크스 자신은 전혀 그렇게 보지 않았습니다. 즉 개인적 소유라는 것은 고전고대의 그리스-로마에도 존재했던 공동체적 형태의 부수물로서 사적 소유입니다. 이는 자본주의적인 타인노동의 취득에 기초한 사적 소유와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특히 아까 다이라코 선생의 논의에 연결된다고 생각합니다만 후쿠토미씨의 논의에서 뛰어난 점은 ‘개인적 소유의 재건’론을 물질대사론에 연결하고 있는 부분입니다. 이 시각은 앤더슨에게는 그다지 보이지 않습니다만, 후기 마르크스의 논의에 있어서도 역시 물질대사론이 축이 되어 있어서 『베라 자술리치에의 편지』나 그 초고 또한 농학과의 관계 속에서 읽어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마르크스는 농경공동체나 고전적인 공동체의 생명력이라고 이야기하고 있지만, 이 생명력이라는 것은 저의 해석으로는 물질대사를 지속적으로 행하는 힘을 의미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힘은 고전적인 공동체가 가장 강하게 가지고 있고, 그 물질대사를 지속가능한 형태로 행할 수 있는 힘을 계승한 것이 바로 농경공동체라는 것입니다. 마르크스는 이 생명력이 매우 강력해서 그 공동체가 붕괴하고 새로운 공동체로 이행한 이후에도 남아있다는 논의를 전개하고 있습니다. 특히 제가 최근 『베라 자술리치에의 편지』를 다시 읽고 발견한 것은 농경공동체라고 하는 것은 그리스-로마의 공동체나 이집트의 공동체와 비교해 압도적으로 강한 생명력을 가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더구나 자본주의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라고 적혀 있습니다. 이것이 무슨 말이냐고 하면 농경공동체가 자본주의보다 물질대사의 지속가능성이 있는 것은 물론이고 그리스-로마나 이집트보다도 그러하다는 것은 당시의 독일의 농학자 프라스(Karl Nikolas Fraas, 1810-1875) 의 논의의 영향을 받은 점입니다.

프라스는 그리스나 로마, 이집트의 공동체가 물질대사를 교란시켜서 멸망했다는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경작이나 삼림벌채를 무리해서 진행한 결과 비가 내리지 않게 되어서 사막화된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이에서 마르크스는 그에 비해 농경공동체라고 하는 것은 지속가능한 생활스타일을 계속 이어왔으므로 생명력이 높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 맥락 안에서 러시아의 농경공동체를 재평가 하고있는 것이 『베라 자술리치에의 편지』의 최종부분으로서 요약하자면 농경공동체는 사적 소유가 도입되어 있지 않으므로 물질대사의 최신의 제어방법, 즉 농학에 의한 과학적 지식을 더욱 잘 도입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서술되고 있습니다. 마르크스는 낭만주의적인 농경공동체를 평가하고 있는 것이 아닌, 지대론 연구에 관련되어 있고 농학에 의해 명확해진 본래의 합리적인 농업을 지향하는 것에 역점이 있습니다. 즉 러시아공동체는 농학을 활성화시키는 것이 가능한 사회형태인 농경공동체를 계승하고 있는데 그로 인해 최신의 과학이나 기술을 용이하게 도입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르크스는 오히려 옛 것들 중에서 새로운 것과 결합할 수 있는 계기를 발견하고 있는 것입니다.

20세기 초 러시아 농민들
20세기 초 러시아 농민들

고토 : 또 다른 한편, 공업에 관련해서는 거대한 공동체적 노동수단을 사용한다는 논의가 보입니다. 사회수준에서 공동점유는 실제 성립하고 있지만, 사적 소유가 그대로 남아있어서 공동점유가 개인의 점유가 되어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소유를 사회적으로 만들어서 동시에 점유를 개인에게 있어서 현실적인 것으로 변경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개인이 자각해서 자신의 노동력을 어소시에이션의 작업으로서 자각적ㆍ의식적으로 지출한다는 논의에 대해서 개인의 발달, 개인으로서의 자립성, 즉 개인으로서의 노동과정에 관련한 통제가 어소시에이션의 노동과정에 관한 통제와 충돌하지 않는 구조를 어떻게 해서 앞으로 시간을 들여서 만들어갈 것인가 라는 이미지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도 기본적으로는 이 이미지에서 서술된 ‘개인적 소유의 재건’의 논리와, 사사키씨가 말씀하신 농경공동체 아래에서 살아온 인간이 어소시에이션에 있어 개인으로서 자립능력을 어떻게 몸에 익힐 것인가 라고 하는 것의 관계가 마르크스의 논의에 있어 과제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사사키 : 그렇네요. 그 점은 해결되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마르크스는 『베라 자술리치에의 편지』에서 고전적인 공동체와 농경공동체의 차이는 개인성의 발달에 있다고 적고 있습니다. 즉 후자에 있어서는 소유는 공동체소유이지만, 분할경작을 행해서 사적인 생산물을 취득하므로 여기에 개인성이 비약하는 순간이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요약하자면 고전적인 공동체는 완전히 혈연관계로 완전혀 얽혀있으므로 개인성이 발달할 수 있는 요소가 전혀 없지만, 농경공동체라고 하는 것은 상당히 강한 공동체규범제도가 있으면서도 개인으로서 경작하고 개인으로서 성과를 소유하는 것이므로 이곳에서 개인이 발달하는 순간이 있다는 논의입니다. 그러한 일저정의 개인성을 가진 농민들이 일상적으로 주체적임은 물론 구체적인 공동작업을 스스로 자각적으로 운영할 수 있으므로, 그러한 의미에서도 어소시에이션 사회를 운영할 수 있는 능력은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논의가 성립되어 있습니다. 이 점은 다이라코 선생이 전공인 마르크스의 마우러(Georg Ludwig von Maurer, 1790-1872)에 대한 평가에 관계됩니다만 어떠합니까.

다이라코 : 조금 논의를 앞으로 돌려보자면 『요강』에 있는 공동체 3형태 중에서 게르만적 공동체라고 불리는 것은 토지의 개인적 소유가 확립되고, 상당히 공동체규범제도가 희박화되어 있고, 공동체의 내실은 가끔 전체 모임에 의해 실현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러한 인식은 『베라 자술리치에의 편지』에 이르는 과정에서 수정되어 갑니다. 즉 전체의 논의 결을 보면 카이사르나 타키투스가 기록한 것과 같은 게르만공동체는 그보다 한참 오래된 형태를 유지하고 있고 이이렇게 판단하게 된 근거는 토지의 정기적 분할분배(割替)입니다. 즉 토지의 사적소유는 인정하지 않고, 1년이나 2년 단위로 토지가 반드시 다시 분할되어 분배된다는 것입니다. 개인적 소유의 개인성도 그 한계 안에서의 개인성으로 수정되고 그 결과 이 공동체는 게르만적 공동체라기보다는 보다 넓은 세계사적 관점 속에 놓여서 고전적 공동체의 최후의 형태로 위치지어지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토지의 정기적 분할분배 등이 사라지고 개인적 소유가 확정됩니다. 최종적으로는 토지가 농가의 것이 된 단계가 농경공동체의 파생적 형태로 위치지어집니다. 내용적으로는 이것이 『요강』의 게르만적 소유에 해당합니다. 이 게르만적 소유는 본래의 농경공동체가 말하자면 변질되어서 사적소유로 향해 크게 한걸음을 내딛은 직후의 단계로서 위치지어지고 있습니다. 공동체의 토지규제가 매우 강한 경우에는 토지가 개개의 가족에게 나뉘어 주어지는 것이 인정되지 않고 부족을 단위로 하는 집단경작ㆍ집단수확이 기본형태가 됩니다만, 이것이 고전적인 소유의 제1단계입니다. 카이사르가 『갈리아 전기』에서 묘사한 게르만인들의 경작형태가 이것에 해당합니다. 그에서부터 토지의 공동소유는 유지되지만, 경작이 각 개별적 가족의 재량에 맡겨지고 그 결과로서 수확물도 각 가족의 개체적 소유가 되어 그렇게 생산에 있어서 개성의 비약적 발전이 초래되는 단계가 자생적으로 발전해갑니다. 이것이 고전적 공동체의 제2단계인 농경공동체입니다. 타키투스가 『게르마니아』에서 묘사한 게르만인들의 경작형태가 이 단계에 해당합니다. 이에 이어서 『요강』에 묘사되고 있는 게르만적 소유가 공동체소유로부터 사적소유에 이행형태로서 위치지어집니다. 이와 같이 공동체의 역사적 발전에 관한 마르크스의 시야는 보다 복잡하고 또한 다 정치화(精緻化)되어 갑니다.

기노시타 : 실제로 토지의 분할분배라는 문제는 후기의 인도공동체론에 있어서도 등장했지요. 마르크스는 이후의 베버의 논의에 연결되는 시점도 이미 제시하고 있습니다.

다이라코 : 그렇네요. 그러니까 토지의 정기적 분할분배를 동반하는 공동체는 게르만적 형태가 아닌 보다 넓은 세계사적 시점에서 파악하는 것이 되는 것이 되네요. 그 중에서 재밌는 점은 아시아적 형태가 『자본론』까지는 가장 오래된 공동체형태로서 위치지어지지만 『베라 자술리치에의 편지』 시점이 되면 철회되고, 오히려 고대적 형태의 최신형태로서 러시아의 공동체와 개념적으로 같은 위치를 부여받습니다. 그러므로 그 아시아적 형태가 변화해서 로마적 형태나 게르만적 형태가 도출된다는 오오츠카 히사오씨의 논의와는 다르고, 양자는 아시아적 형태보다 고대적인 형태가 변형된 형태로서 존재하는 것이 됩니다. 즉 역사적발전의 가능성을 아시아적 형태의 속에서도 인정한다는 것이 마르크스의 가장 후기의 구상으로서 이것이 저작으로까지 발전했다면 마르크스주의의 역사를 상당히 바꾸었을 테지요.

현대사회에 있어 ‘자본의 문명화 작용’

고토 : 추가적으로 제가 문제제기를 하자면 현대의 우리에게 있어서 큰 논점이 되는 것은 ‘자본의 문명화 작용’에 대해 마르크스가 점점 회의적이 되어간다는 것입니다. 인도나 중국, 아일랜드에 대해서도 기본적으로 그저 고통을 받기만 했지 결국 문명화되지 못했지 않냐는 논의가 되어간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미 19세기 말 이후에는 더블린에 대한 묘사에서도 보이는 것처럼 도시의 양상이 달라져 왔고 현재에도 인도나 아일랜드의 자본주의적 발전은 100년 단위의 규모로 볼 때 상당히 대규모로 변화했습니다. 마르크스가 붙잡고 있던 자본주의 비판 즉 문명화작용의 부정에 입각해서 이 발전양상들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수준에서 현대에 맞추어 문제를 제기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현상과 역사의 위상이 어긋나 버리고 그대로면 이 이론을 사용하지 못하게 될 지도 모릅니다. 단지 그 경우에는 1848년의 논의에서 크게 변화해서 마르크스가 60년대, 70년대에 붙잡고 있던 자본주의 이해를 어떻게 현상분석의 속에 살릴 것인가에 있어 상당 부분 크게 매개가 될 수 있는 내용을 넣는 것이 필요할 것이라는 생각이 됩니다.

1890년대 아일랜드 더블린 전경
1890년대 아일랜드 더블린 전경

지금가지의 저는 대중사회나 대중사회의 고차단계에 있어 문화문명스톡이라는 언어를 사용해왔습니다. 그리고 결국 그 문화문명스톡이 현존사회주의국가의 사람들도 빨아들여서 경쟁하는 처지로 만들어 자기파괴를 하고 있다는 큰 그림을 90년대에 그렸습니다. 제3세계에서도 선진자본주의국가가 가진 문화문명스톡, 즉 고도의 대중사회의 생활스타일은 매우 대단한 흡인력을 가지고 있어서 아무래도 그에 저항하지 못하는 것이 실태입니다. 그러므로 이는 문화문명작용의 현대적인 형태의 하나라고 생각합니다만, 그것이 정말로 강렬해서 이에 제대로 저항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그런데 다른 곳에서 문화문명스톡을 실현시키려고 하는 경제의 움직임은 현대에 있어서 세계화를 심화시키고 금융을 실물경제에서 강하게 분리시켰습니다. 그리고 크게 보면 네이션들의 격차는 무서운 속도로 확대되어 갑니다. 또한 네이션마다 사람들이 분단되어 있는 것 자체가 환상이랄 수 있을 정도로 실제로는 국민국가로서 책임을 질 수 없는 지역이 수도 없이 존재합니다. 즉 문화문명작용의 마이너스의 측면이 터무니없는 모습으로 드러나 왔다고 하는 비판은 결코 특이한 것이 아니고, 마르크스주의자가 보통 하는 비판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현대에 있어서는 이 문명화작용이 문명화시키지 않고 방치해 오는 상태라기보다는 문명화는 시키지만, 상당히 피해를 주고 있다는 모습이 되어 있습니다. 즉 20세기 초에 이미 아일랜드, 인도, 아메리카는 마르크스가 본 세계와는 상당히 달라진 것으로 문명화하지 않고 무너뜨린다는 비판은, 거칠게 말하자면 그 정도 비판의 수준으로는 유효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비판의 방식을 정식화하면 좋을까 라는 질문은 어렵지만, 우리에게 남겨진 과제라고 생각합니다.

사사키 : ‘문명화작용’에 대해 마르크스가 가장 본질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까 나온 물질대사론에 관련해서 말하자면 광의의 의미에서 생산력의 발전이라고 생각합니다. 단순히 시간단위의 생산량이 증가한다는 것이 아닌, 물질대사의 매개력ㆍ억제력이라고 하는 것이 증대해 가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과학의 발전이라고 생각합니다만, 『요강』의 ‘문명화작용’론에 대해 논의된 자유시간의 증대도 관계되어진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실제로는 물상화의 힘이 침투해서 사람들의 욕망의 존재 방식이나 생활스타일이 점점 변화해서 그렇게 물상화된 사회 속에서 사람들이 포섭되어간다는 것이 고토 선생이 말씀하신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른바 사회학적인 소비사회비판이라고 하는 문제의식이 후기도 포함한 마르크스의 내용 속에서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일까요? 물론 추상적으로는 그렇게 말할 수 있고 예를 들어 『자본론』의 상품ㆍ화폐 장은 이러한 논의가 이루어질 수 있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만, 후에 대중사회론에서 문제가 되는 것을 마르크스 자신이 어디까지 말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여러 시각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마르크스의 자본주의비판과 그 연구방법을 실천에 어떻게 살릴 것인가

사사키 : 마지막으로, 후기 마르크스연구의 범위와 관련해서 일본사회를 변혁해 가는 과정에서의 현대적 의식에 대해 이야기해 보고 싶습니다.

기노시타 : 마르크스는 사회를 구성적으로 파악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아일랜드론에서는 귀족적 지주계급의 거점이 아일랜드에 있으니까 영국의 지배계급이 매우 강하다고 하는 논의, 혹은 미국 남부에 대해서도 노예제를 합중국 전체에 확장시키는 것으로서 노예제를 기초로 자본주의를 재편한다는 것과 같이 말입니다. 그리고 단순히 분석하는 것만이 아닌 문제의 근본을 구조적으로 건물과 같이 파악하는 이론력이 있습니다. 그에 비해 우리들은 일본의 기업사회나 개발주의를, 아직 완전히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고 느낍니다만, 마르크스는 구조적으로 분석하는 것을 어느 나라의 사례에 대해서라도 잘 해내고 있습니다. 지구상의 모든 것을 분석해 버리겠다는 무서움과 더불어 제대로 변혁전망을 파악하고자 하는 자세는 우리들이 배워야만 할 지점입니다.

또한 정말로 마르크스가 이론가라고 생각했던 것은, 아까 사회학자라고 이야기했지만, 현대의 사회학은 대부분 실증연구뿐이라서 이론연구는 없다는 점입니다. 요약하자면 마르크스는 아카데믹한 실증연구도 빠뜨리지 않고 자신의 것으로 만들면서 그것을 현실이나 운동을 위해 이론화시켜갑니다. 이러한 이론적 작업을 할 수 있는 학자가 현대에서는 정말 적다는 것이 노동분야에서도 말할 수 있지만, 아카데미즘을 경시하지 않고 현실의 운동을 잘 분석해서 이론적 개념을 만들어 내는 사람들이 더 필요하다고 느껴지는 부분입니다.

사사키 : 그렇네요, 마르크스 그 자체를 해석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를 활용해서 현실을 분석하는 틀을 발전시켜나갈 필요가 있습니다. 특히 젠더론에 대해 그렇게 말할 수 있겠지요.

다이라코 : 크게 말해서 후기 마르크스의 젠더론을 소개해 보자면 엥겔스의 「여성의 세계사적 패배」에 대한 안티테제로서 앤더슨의 연구가 있고, 여기에서의 역점은 마르크스가 사유재산도입 이전의 씨족사회에 대한 남녀관계에 대해서는 엥겔스가 묘사하고 있는 것보다 더욱 복잡하게 생각했다고 하는 점입니다. 즉 씨족사회에 대해서도 이미 남성의 여성에 대한 억압이라고 생각되는 현상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유재산도입 후에도 단순한 여성의 패배가 아닌, 확실히 그리스시대에 한번에 여성의 억압이 강해졌지만, 그것이 로마시대가 되어서 이완된다는 것과 같이 매우 복잡한 전개를 거쳐왔다고 서술되고 있습니다. 다만, 이러한 후기 마르크스의 시각을 현대의 젠더나 섹슈얼리티문제에 어떻게 살릴것인가는 이후의 연구과제입니다.

기노시타 : 일본의 여성운동에 대해서는, 한편으로, 노동운동에 있어서 엥겔스적인 계급환원론이 뿌리깊이 남은 결과, 남성중심의 노동운동에 깊이 편입되어버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노동운동과 완전히 단절된 곳에서 여성학과 그에 기초한 페미니즘운동이 존재해서, 서로 분단된 것이 일본의 사회운동상의 비극이 아닐까 합니다.

다이라코 : 미국의 경우는 인종이나 에스니시티의 문제가 매우 가시적인 형태로 존재하고 있고, 명백히 가시적으로 근본적인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미국의 경우는 젠더론에서 여성의 억압이나 차별을 논의하는 경우, 가부장제를 기초로 여성이 차별당하는 사실을 그 자체만으로 말하기 어려운 환경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무언가의 형태로, 예를 들어 에스닉 마이너리티의 여성차별의 문제라던가 그런 모양으로 더욱 분절화ㆍ상대화해서 젠더 이슈를 파악하지 않으면 안되는 현실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일본의 경우는 물론 주의깊에 보면 예를 들어 재일조선인(자이니치)이나 일본계 브라질인 등 에스닉 마이너리티의 문제가 존재합니다만, 흔히 말하는 젠더를 대상으로 분석하는 사람들은 가부장적 가족이나, 구조적으로 여성이 억압되는 어떠한 상황 속에서 여성을 어떤 의미로는 일의적 혹은 독점적으로 하층계급으로서 설정하고 말 수 있다는 환경이 있습니다. 이 점을 더욱 반성적으로 타개하지 않으면 적어도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논의까지 발전되기 힘들지 않을까 합니다. 프랑스에서도 독일에서도 에스닉 마이너리티의 존재가 더욱 크게 다가오고 지금은 그 유입이 점점 가속되는 상황 속에서 젠더의 문제를 파악하고 있습니다. 일본만이 그러한 흐름에서 남겨져 있는 인상이 있습니다. 그것은 아마도 노동의 문제도 젠더의 문제도 일본적으로 게토화된 관계 속에서 파악되기 쉬운 배경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틀을 넘어 있는 것은 아마도 자본일지도 모릅니다. 자본은 점점 국민국가의 틀을 넘어가고 있지만 젠더와 계급의 문제는 더욱 잘못하면 일본적인 관계만으로 설명될 수 있는 위험성이 있습니다. 저 자신도 전문적인 부분이 아니라서 틀릴 수도 있지만, 마르크스의 입장에서는 그러한 비판과 반성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기노시타 : 그렇네요. 역시 일본사회는 아직 리버럴 페미니즘 단계라고 말할 수도 있겠습니다. 지금도 ‘마타하라(maternity harassment, 임신ㆍ출산을 매개로 한 차별)’ 문제가 발생하고 있는 것에서도 볼 수 있듯이 페미니즘과 노동운동이 서로 결속될 필요가 있지만, 지금까지는 그렇지 못한 현실이 있습니다.

고토 : 그 의미로는, 역시 일본형 고용의 영향력이 크다고 생각합니다. 현재로서도 예를 들어 비정규직에까지 사회보험의 범위를 확대하는, 즉 가족공제ㆍ부양공제를 폐지하자는 논의에 대해 상당수의 노동조합이 저항하는 현실이 있습니다. 그것도 비정규직 중심의 노동조합이 저항하는 것 뿐만이 아닌 생협운동 등의 부문이 상당부분을 점하고 있는 조합에 있어서도 조합원의 저항감이 있습니다. 결국 개인의 부담이 많아지는 것에 대한 우려가 아닐까요. 이 문제는 이 문제대로 두더라도 연봉 100만엔 이하로 일하고 있는 여성의 입장에서 봐도 단순한 부담증가입니다. 아마도 배우자공제폐지를 지금의 아베정권은 밀어붙일 모양입니다만, 그 목적은 여성들을 사회보험에 편입시켜서 사회보험료 부담을 그들에게 전가하려는 것입니다. 게다가 대안적인 논의로서 제대로 된 곳에서 일해서 혼자 세금도 내고 혼자로도 생계를 꾸릴 수 있는 여성들의 환경을 조성하자는 주장이 주류가 되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역시 남편의 벌이에 의존해서 생계를 꾸려갈 수 있다고 많은 수의 사람이 아직 생각하고 있는 탓이 아닐까 하고 생각합니다.

기노시타 : 기업사회에 대한 강렬한 흡인력은 가족도 기업사회로 통합시킵니다. 노동자가 통합되는 것만이 아닌, 가족전체가 통합되는 강력한 메커니즘입니다. 일본형 고용도 그렇습니다만, 일본의 특수성이라고 칭해지는 촌락공동체나 가족제도 등도 마르크스가 살아있었다면 분명히 구조분석의 대상이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다시, 후기 마르크스의 공동체론에 관련시킨다면 현대일본의 농촌도 다시 공동체성이 완전히 해체되었다고는 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다만 TPP(역주 :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으로 인한 농촌붕괴 문제를 말하는 것인 듯)나 농촌 후계자 문제 등에 있어서 어떻게 촌락공동체를 재건할 것인가 혹은 해체시킬 것인가의 기로에 서 있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요.

사사키 : 최전선의 마르크스연구에 있어서 본서의 의의에 멈추지 않고 현대자본주의 분석에 대한 의의에 이르기까지 매우 넓은 범위에서 농밀한 논의가 이루어진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합니다. 오늘은 매우 감사했습니다.

[일본 마르크스주의와 『마르크스의 주변부 연구』 [上]에서 이어짐]

번역 : 임현창 (플랫폼c 활동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