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곤에서 만달레이까지, 미얀마 군부 쿠데타 이후 보름 동안 무슨 일이?
2021년 2월 18일
미얀마는 서쪽으로는 인도·방글라데시, 동쪽으로는 태국·라오스, 북쪽으로는 중국 윈난성과 접한 동남아시아 국가다. 면적 676,578 km²으로, 한국의 6.7배이고 한반도 전체 면적의 3배에 달하고, 인구는 5,480만 명으로 우리나라 인구보다 300만 명 가량 많다. 버마족이 ⅔ 이상의 인구를 차지하지만, 기독교와 이슬람교를 믿는 소수민족들이 지역별로 세력화되어 있다. 그러니 미얀마 사회를 둘러싼 쟁점은 매우 복잡하고 역사적일 수밖에 없다.50년에 가까운 시간동안 군부 독재 치하에 있었고, 2015년 처음으로 민선 정권이 수립됐다. 그러나 이 정권 역시 완전한 민주주의 체제를 이루지는 못했고, 통치 기간 여러 비판을 받기도 했다. 현재 벌어지고 있는 반쿠데타 시위만이 아니라, 역사적 모순, 대미·대중 관계와 얽힌 함수, 아세안과 미얀마, 현지 노동자운동의 상황 등에 대해 시리즈로 소개하고자 한다. 첫번째는 2월 1일 쿠데타 이후 미얀마 상황이 어떻게 흘러왔는지 스케치한 글이다.
1일차: 아마도 악마가
2월 1일 이른 아침. 일련의 장갑차가 의사당을 향해 진격했다. 행정수도 네피도의 의사당 앞 거리에서 매일 같이 에어로빅댄스를 추고 영상을 업로드하던 Khing Hnin Wai라는 여성의 뒤로 여러 대의 장갑차들이 지나갔다. 이날 미얀마 연방회의(상원)는 2020년 11월 치뤄진 총선거 이후 처음 개회될 예정이었다.
오후까지만 해도 미얀마 현지 상황은 고요한 것처럼 보였다. 쿠데타가 이루어진 뒤 몇 시간 후 단절됐던 전화 통신망과 방송 네트워크는 서서이 복구되었다. 로이터 통신 보도에 따르면 미얀마 전역의 금융 업무도 한동안 정지되었고, 이내 다시 복구됐다.
아웅산수치(Aung San Suu Kyi) 국가고문과 윈 민(Win Myint) 대통령 등 고위급 인사들이 잇따라 체포됐다. 체포 당시 군부는 구체적인 혐의를 밝히지 않았다. 그저 짐작할 뿐이었다. 민주주의민족동맹(NLD)은 곧바로 아웅산수치 명의의 성명을 발표해 군부의 행동을 수용하지 말고 항쟁할 것을 호소했다.
수치 여사를 비롯한 NLD 상층이 군부에 의해 체포되자 국제 사회의 관심이 집중됐다. 미국 바이든 행정부의 신임 국무장관 블링컨은 “미국은 미얀마 국민들과 민주주의에 대한 그들의 염원과 함께 한다”며, “미얀마 군은 반드시 즉각 쿠데타와 정치인사들에 대한 체포를 철회해야 한다”고 밝혔다.
중국과 인도, 호주 등 정부들도 사태를 주시하고 읽다고 밝혔다. 중국 외교부 대표는 “미얀마의 각 세력이 헌법과 법률의 틀 내에서 이견을 선처해주길 희망한다”고 밝혔다. 인도 외교부 역시 “법제와 민주적 프로세스는 반드시 유지되어야 한다”는 내용의 성명을 발표했다.
2일차: 세상은 끝나지 않을 거야
이번에는 조 바이든 미 대통령이 직접 성명을 냈다. 바이든은 “미얀마가 민주적 궤도로 돌아올 수 있도록 압박하기 위해 미얀마군 및 유관인사들에 대한 제재를 검토하고 있다”고 밝혔다. 또, “국제사회는 마땅히 함께 한 목소리를 내고, 미얀마군에 압력을 가함으로써, 그들이 즉시 권력 탈취를 포기하고 억류된 활동가들과 관리들을 석방하고, 통신에 대한 모든 통제를 철회하며, 민간인들에 대한 폭력을 중단토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휴먼라이츠워치를 비롯한 리버럴 성향의 NGO들도 바이든 행정부에 압력을 행사하라고 촉구했다.
민 아웅 훌라이 참모총장이 이끌고 있는 군부는 1년 동안 국가통수권을 유지하겠다고 비상사태를 선포했다. 비상사태가 끝난 후 선거를 치루어 새로 선출된 정당에 정권을 넘기겠다는 것이 군부가 밝힌 향후 플랜이다.
그날 밤 미얀마 군부는 중앙정부에 있던 24명의 장·차관을 해임하고, 국방부와 변경사무부, 계획부, 재정산업부, 투자및대외경제관계부, 국제협력부 등에서 11명의 관료들을 후임으로 임명했다.
시민들은 불복종 운동을 개시했다. 쿠데타 직후 저항이 군부의 강력 진압에 구실을 줄까 우려했던 시민들은 하나둘씩 거리로 나왔다. 둘째날 밤 양곤 시내 곳곳에서 벌어진 ‘소음 시위’는 이런 불복종 운동의 전초적 단계였다. 시민들은 테라스나 창문가, 혹은 거리로 나와 어떤 구호도 없이 냄비 등 물건을 들고 소리를 냈다. 거리를 지나가던 차량들도 경적 소리를 내며 이 행동에 동참했다. 이렇게 해서 시민들은 용기를 갖기 시작했고, 거리로 쏟아져나와 대규모 시위를 전개했다.
이와 같은 형태의 ‘소음 저항’은 매일 저녁 8시 정각에 시작된다. 첫날 집 안에서 소음 시위를 벌였던 시민들은 이제 집 밖으로 나서서 냄비와 그릇을 두드린다. 1988년 민주항쟁 이래 대중운동이 폭발할 때마다 불리곤 했던 민중가요 “세상은 끝나지 않을 거야”(ကမ္ဘာမကြေဘူး)를 부르기도 한다.
새로운 역사를 쓸거예요, 할아버지!
오~ 사랑할 줄 아는구려
100 피트 도로 위에 청춘들이
새로운 역사를 쓸거예요, 할아버지!
온 국민이 용감하게 나섰어요, 아버지!
100 피트 도로 위에 청춘들
절대 포기를 모르는 형제들이여
형제들이여
나라를 핍박하는 폭군들이 아직 남아있으니
망설이지 말자
민주화 운동에 앞장 선 ….우리의 영웅들 처럼
굳건히 맞서 싸우자꾸나!
형제들이여
나라를 핍박하는 폭군들이 아직 남아있으니
망설이지 말자
민주화 운동에 앞장 선… 우리의 영웅들 처럼
굳건히 맞서 싸우자꾸나!
3일차: 세 개의 손가락
시작은 병원이었다. 30여 개 도시 70여 개 병원에서 의료 노동자들이 파업했다. 의사와 간호사 등 노동자들은 빨간 리본을 달고 손가락 세 개를 들어 저항할 것을 표명했다. 영화 <헝거 게임>에서 저항자들의 표식으로 등장했던 ‘세 개의 손가락’은 2020년 태국 방콕 대중시위에서도 상징적 기표로 등장한 바 있다. 의료 노동자들의 저항은 확실히 전국 각지의 시민들을 자극했다. 하루이틀 시간이 지날수록 시민불복종에 참여하는 직종과 지역이 늘어났다.
군부는 의료 노동자들에게 강력한 압박을 가했다. 그러나 현지 언론 프론티어미얀마가 전한 현지 의료 노동자의 증언에 따르면 양곤에서 일을 멈추지 않은 의료 노동자는 거의 없었다.
같은 날 군부는 아웅산수치를 수출입법 위반 혐의로, 원 민 대통령을 코로나19 바이러스 대응 관련 자연재해관리법 위반으로 형사 고발했다. 아웅산수치의 자택에서 여러 대의 무전기가 발견됐다는 게 그 이유였다. 어떻게든 둘을 구속시키고, 쿠데타를 법적으로 정당화하겠다는 게 군부의 계산이었다. 하지만 그런 목표를 달성하기엔 빌미가 너무 협소해보이는 것도 사실이었다.
4일차: 세계에서 인터 넷이 가장 오랫동안 단절된 지역
여전히 60만 명 이상의 로힝야족 사람들이 살고 있는 라카인주에서 인터넷 복구에 대한 소식이 들렸다. 라카인주는 세계에서 인터넷이 가장 오랫동안 단절된 지역이었다. 2019년 가을부터 무려 19개월 동안 인터넷이 끊겨 있었다. 로힝야족에 대한 군부의 학살과 아웅산수치 정부의 방조 및 협조가 빚은 참극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군부와 친근한 아라칸민족당(The Arakan National Party)은 라카인주에 만연한 반NLD 정서를 바탕으로 로힝야 사람들을 우롱해왔다. 로힝야 학살에 대해선 침묵하고, 반NLD에 기반해 지역민족주의를 주창했다.
로힝야 학살은 미얀마가 지닌 이와 같은 역사적 모순과 대버마주의의 함정, 동시에 지역민족주의의 모순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투명한 창이었다. 아웅산수치는 모순적이게도 대버마주의를 기각하지 않으면서도 군부 세력을 통제하려 시도했다.
한편 군부가 지난 총선이 총체적으로 위법했다고 선언하고 쿠데타를 일으킨 상황에서도 NLD 소속 70여 명의 입법의원 당선자들이 국민을 위해 봉사하겠다고 선서했다. 이들은 민 아웅 흘링(Min Aung Hlaing) 참모총장이 불법적으로 권력을 장악했다고 비판했다.
5일차: 민주주의를 지키자
교사와 대학 교수들이 제1도시 양곤의 거리로 나와 쿠데타를 비판하는 불복종 시위를 펼쳤다. 사람들은 “군사 쿠데타를 저지하자”, “민주주의를 지키자” 등 슬로건이 적힌 피켓을 들고 거리 시위를 이어나갔다. 500여 명에 달하는 공무원들은 붉은 리본을 달고 출근 하는 용기를 보여주었다. 그들은 업무를 멈추고 쿠데타에 반대하는 인증샷을 촬영하고, 거리로 나가 시민들에게 연대의 목소리를 전하기도 했다.
한편 NLD는 군부 쿠데타에 맞서 파업했다가 해고된 모든 노동자들을 지원하겠다고 밝혔다.
군부는 미얀마 통신사업자들에게 페이스북을 일시적으로 차단하라고 요구했다. 군부는 이 조치가 토요일(2월 7일)까지 이어질 것이라고 밝혔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일본의 맥주회사 기린은 미얀마 군부와 관련된 기업과 도모하려 했던 합작 사업을 중단하겠다고 밝혔다.
6일차: 어느 쪽에 설 것입니까?
아침 9시. 시민불복종 운동이 거리를 점유하기 시작했다. 미얀마학생연합회 전 의장을 비롯한 청년 활동가 약 100명이 양곤 중심 거리에 모여 시위를 시작했다. 그러자 시위 행렬에 동참하는 시민들이 계속해서 늘어났다. 머리끈을 묶은 여성들도, 공장으로 출근 중이던 안전모를 쓴 남성 노동자들도 있었다. 시위 행렬의 선두에는 미얀마학생연합회 깃발과 카렌족 깃발이 보였다. 이 시위가 버마족만의 저항이 아니기 시작했음을 보여주는 방증이었다.
이 시위는 군부 쿠데타 이후 가장 큰 규모의 시위였다. 시민불복종 행동은 파업과 거리 시위로 확대됐고, “민주주의를 지키자”, “군사 쿠데타를 반대한다”, “독재정권 퇴진하라” 등의 구호들이 울려퍼졌다.
100명의 학생들이 양곤 시내 번화가 레단길에 도착했을 때 시위 행렬은 이미 5000여 명으로 불어나버렸다. 경찰은 레단길에 바리케이드를 설치하고 시민들을 가로막았다. 시민들은 항의 구호를 외치거나 혹은 경찰에게 음료수를 나누어주기도 했다. 경찰들에게 건네진 음료수에는 하나같이 “억압자와 피억압자, 어느 쪽에 설 것입니까?”라는 질문이 적힌 쪽지가 붙어있었다.
바리케이드 앞에서 양측이 대치하는 사이 미얀마 전역의 인터넷이 다시 중단됐다. 일부 현지 언론들만 국제전화 인터넷카드로 시위 상황을 업데이트할 수 있을 뿐이었다.
7일차: 용기있게 위대하게
인터넷 차단은 이튿날인 7일 오후 2시까지 이어졌다. 그러나 시민들은 전화통화와 문자메시지를 통해 동료 시민들을 조직했고, 이로 인해 시위 대오는 더 불어나있었다. 양곤을 넘어 파테인(ပုသိမ်), 타라와이(သာယာဝတီ), 프롬(ပြည်) 등 지방 도시로 시위가 확산됐다. 양곤에서는 10만 명 가량이 거리로 나왔다. 이날까지도 모든 시위는 평화로웠고, 시민들은 강력한 열기로 구호를 외치면서도 자신들을 가로막는 경찰들을 설득하려 했다.
가두 시위 현장에서 학생들은 금색 공작새 한 마리와 동그라미가 그려진 붉은 깃발을 들고 서 있었다. 붉은색은 학생들의 용기를, 금색은 위대함을, 동그라미는 독재권력을 압박하기 위한 덫을 상징한다.
이날 저녁 8시 동부의 한 도시에서는 100명이 넘는 시민들이 자전거를 타고 거리로 나와 도시 전체를 누비며 사이렌을 울렸다.
8일차: 중요한 건 색깔이 아니다
쿠데타 이후 한 주가 지났고, 새로운 한 주가 시작됐다. 전국적인 ‘총궐기’가 제안됐고, 전국 각지의 많은 사람들이 거리로 나왔다.
양곤에서는 수천 명의 시위 대오가 “양곤의 명동거리”와 같은 레단 거리로 진출했다. 평소 이곳은 청년들이 춤 연습을 하거나 빈민 어린이들이 지나가는 시민들에게 재스민꽃을 파는 모습이 보이는 곳이다. 미얀마학생연합회 등 급진주의 조직들의 청년활동가들은 연단에 서서 “총궐기”를 위한 5대 목표를 되새겼다. ① 민주주의 실현, ② 독재에 저항, ③ 헌법 폐지, ④ 정치범 석방, ⑤ 연방제 민주주의 수립이 그것이다. 양곤의 또 다른 집결지 시청 광장에도 수천 명의 시민들이 모여 제각각의 모습으로 시위를 벌였다.
시위는 양곤에서만 벌어지지 않았다. 가령 카친주 밀지나에서도 처음으로 쿠데타에 항의하는 대규모 시위가 벌어졌다. 샨주 라시오에서도 1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거리로 쏟아져나왔다. 시민들은 라시오대학 정문 앞에서 행진을 시작해 2시간 동안 행진했다. 샨족만이 아니라 버마족, 화인 등 가리지 않고 서로 뒤섞여 함께 싸웠다.
몽유와에서도 이른 아침부터 수천 명의 시민들이 플래카드와 미얀마 국기를 들고 비가 막 그친 거리로 쏟아져나왔다. 도심 한복판 시계탑으로 모인 시민들은 “군사독재에 맞서자”, “2008년 헌법을 폐지하자”, “민주연방을 건설하자”, “불법 구속자를 석방하라” 등 구호를 외쳤다.
수도 네피도에서도 수천 명이 시위에 참가했다. 오토바이 행렬은 미얀마의 건국영웅이자 아웅산수치의 친부인 아웅산 장군 동상 앞으로 모여 군부 쿠데타에 항의했다. 군경과의 대치가 길어지자 경찰은 물대포를 쏴 시위대 해산을 시도했다.
만달레이에서는 검은색 직업복을 입은 변호사들이 “군사 독재에 항의한다”는 슬로건이 종이를 들고 법원으로 향했다. 도로 양옆에서 변호사들을 기다리던 시위대는 박수와 환호를 보냈고, 지나가던 오토바이와 자동차들은 경적을 연발했다.
미얀마 전역의 병원·로펌·대학·은행·전력공기업·소방서 등에서 광범위한 파업이 벌어졌다. 그러나 이때까지만 해도 사상자는 발생하지 않았다.
미얀마의 반군부 쿠데타 시위에서도 Z세대는 새로운 상징으로 등장했다. 일반적으로 미얀마의 Z세대는 1988년 이후 태어난 청년들을 지칭하는데 온라인-오프라인을 아우르는 전국적 규모의 시위를 ‘Z세대의 전투’라 부른다. 스마트폰과 같은 디지털 도구에 익숙하고, 해외 미디어의 정보에 대한 접근성이 높다는 게 특징이다. 또, 각양각색의 시위 전술을 지향하는 모습에서 2019년 홍콩이나 2020년 방콕을 떠올릴 수도 있다.
8일 밤, 미얀마군은 오후 8시부터 오전 4시까지 야간통행금지를 선포했다. 특히 시위가 빈발하는 양곤과 만달레이에서는 5명 이상만 모여도 ‘불법’이라며 엄금했다. 아이러니하게도 TV 채널에서는 조용하고 밝은 거리에서 사람들이 편안하게 살고 있는 풍경만 나왔다. 문 밖의 거리와는 판이하게 다른 모습만 방영되고 있었다. 군이 묘와디 방송국을 장악하고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