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장 | 후기 임신중지 여성 ‘살인죄’ 무죄, 당연한 판결

입장 | 후기 임신중지 여성 ‘살인죄’ 무죄, 당연한 판결

항소심 재판부는 '작태죄' 폐지 이후의 법적 판단 기준을 명확하게 세웠다. 임신중지에 대한 제약과 사회경제적 불평등을 없애고 후기 임신중지를 줄어나갈 책임은 정부에 있다.

2026년 7월 24일

[읽을거리]페미니즘임신중지권, 여성, 페미니즘, 사회운동

지난 7월 23일, 서울고등법원 형사5부는 후기 임신중지를 이유로 1심 재판에서 ‘살인죄’로 징역 3년 집행유예 5년을 선고받았던 권00 씨에 대해 원심의 판결을 뒤집고 ‘무죄’를 선고했다. 1심 재판부는 피고인 권00 씨가 사건 당시 병원에서 태아의 사산 조치 여부를 적극적으로 의료인에게 질문하지 않았다는 것을 이유로 살인의 ‘미필적 고의’가 있었다고 판단했으나, 항소심 재판부는 사건 당시의 피고인의 상황을 구체적으로 짚으며 살인을 적극적으로 공모할 만한 ‘미필적 고의’를 인정할 수 없다고 본 것이다. 우리는 사건 당시 임신중지 당사자의 상황과 현재의 보건의료, 법·제도적 공백을 구체적인 판단의 근거로 삼아 명확하고 정당한 판단을 내린 항소심 재판부의 무죄 판결을 진심으로 환영한다.

항소심 재판부는 ‘낙태죄’ 폐지 이후의 법적 판단 기준을 명확하게 세웠다

헌법재판소의 결정 이전에도 형법상 살인죄는 ‘낙태죄’와 구분하여 태아가 모체 밖으로 살아서 태어난 이후 적극적인 살해 행위가 이루어진 사건에 대하여 적용되었다. 따라서 ‘낙태죄’가 폐지된 지금 살인죄로 임신중지에 대한 처벌을 대신하려 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원심 재판부는 임신중지를 하고자 했던 권00 씨에 대해 계속해서 살인의 의도를 추정하고 임신중지에 대한 책임을 살인죄 처벌로서 묻고자 했다. 항소심 재판부는 이러한 원심의 판단이 임신중지를 하고자 했던 산모의 의도에 대하여 사실을 오인하거나, 살인죄에 관한 공모관계 및 미필적 고의에 관한 법률을 오해하여 판결에 영향을 미친 것이라는 점을 분명히 짚었다. 또한 임신 당사자의 자기결정권이 ‘헌법상 보장되는 일반적 인격권에서 파생되는 권리’이기에, 의료인들의 행위 또한 이러한 당사자의 권리에 기반한 임신 종결 의사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을 참작하여 양형을 조정하였다.

이러한 항소심 재판부의 판결은 ‘낙태죄’ 헌법불합치 결정 이후 임신중지에 관한 권리는 그 자체로서 보장되어야 하며, 다른 형사 처벌 조항이 무리하게 적용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을 법리로서 명확하게 확인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다.

무엇보다, 이번 판결은 비단 이 사건의 당사자 권00 씨만이 아닌, 같은 현실에 처해 있는 수많은 이들에게 미칠 영향이 매우 크다는 점에서도 중요하다. 후기 임신중지의 상황에 이르게 되는 이들은 대부분 권00 씨와 같이 사회경제적 불평등으로 의료기관에 대한 접근성에 제약이 있고, 여전히 비공식적인 관행에 맡겨진 보건의료 현실 속에서 임신중지 시기가 지연되고 있기 때문이다. 원심의 판단대로라면 이러한 현실로 인해 가장 열악한 선택지로 내몰리고 있는 이들이 오히려 ‘살인죄’로 처벌을 받게 될 수 있었다. 항소심 재판부의 판결은 이와 같은 현실을 분명히 인식한 판단이며, 임신중지 비범죄화 이후에도 아무런 변화를 만들지 않은 채 여전히 임신 당사자만을 처벌하고자 한 정부의 책임을 확인한 것이다.

보건의료 체계 구축의 책임은 뒷전에 둔 채 당사자 수사 의뢰에 나섰던 보건복지부의 ‘고의’가 유죄다

한편 우리는 주무부처로서의 책임은 철저하게 외면하고 방기한 채, 도리어 임신중지의 당사자에 대한 수사를 먼저 나서서 경찰에 의뢰했던 보건복지부의 ‘고의’를 강력히 규탄한다. 보건복지부는 7년 전 헌법재판소의 결정으로 임신중지 비범죄화가 이루어진 즉시, 오랜 시간 동안 방치되어 온 보건의료 체계부터 새롭게 구축해야 했다. ‘낙태죄’가 존속해 온 66년 동안, 국가는 인구정책과 처벌 책임의 모순 사이에서 임신중지 관련 보건의료 현장을 철저하게 방치해왔기 때문이다. 해외에서 80년대부터 사용해 온 유산유도제는 소개되지도 않았고, 안전한 시술 방법에 대한 가이드도 부재한 상태에서 의료인들은 임신중지를 결정한 이들에게 더 안전한 최신의 의료 행위를 적용할 수 없었음은 물론, 법적 책임을 피하기 위한 비공식적 관행만을 강화해 왔다. 사정이 절박한 임산부의 상황을 이용해 브로커로 환자를 모으고, 높은 비용을 현금으로 요구하며, 이후 행해질 의료 행위와 사후 조치, 후속 진료에 대한 설명조차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이번 사건의 과정 안에 ‘낙태죄’ 처벌 의료현장에 미쳐 온 역사적 영향의 결과가 그대로 반영되어 있는 것이다. 만약 보건복지부가 임신중지 비범죄화 직후부터 이러한 현실을 제대로 분석하고 안전한 임신중지를 위한 보건의료 체계 구축에 나섰더라면 이번 사건은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한편, ‘낙태죄’를 존속시키면서도 장애인과 빈곤한 이들에 대한 임신중지를 강제하고 격리해왔던 결과 모자보건법 상 임신중지 허용사유에는 우생학적 사유가 잔존하였고, 헌법불합치 결정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장애여성 정책, 피해자 지원 정책 등에 대한 기준으로 작동하고 있다.

이번 판결은 비단 당사자인 권00 씨의 무죄만이 아니라, 이와 같은 정부의 유죄를 확인한 것이기도 하다. 보건복지부는 이에 대한 책임을 무겁게 느끼고 즉각 안전한 임신중지를 위한 보건의료 시스템 구축과 공식 의료 가이드 마련, 차별 없는 임신·출산과 임신중지를 위한 권리 보장 실현에 나서야 한다.

임신중지에 대한 제약과 사회경제적 불평등을 없애고 후기 임신중지를 줄여나갈 책임은 정부에 있다

사회경제적 고립과 불평등 속에서 후기 임신중지의 상황에 이르게 되는 이들은 여전히 매우 많다. 임신으로 인한 신체적 변화나 건강 상태에 관한 교육과 정보가 부족하고, 불평등한 성적 관계로 상대와 피임, 임신중지에 관해 협상하기 어려우며, 의료기관으로부터 파트너나 부모 등 제3자 동의를 요구해 진료 거부가 반복되기도 한다. 임신 기간이 늘어날수록 커지는 의료비 부담, 서울과 수도권에 집중된 의료 인프라 등의 접근성 제약으로 초기에 임신중지 시기를 놓치면 임신 2분기 이후에는 이러한 부담과 제약이 점점 더 커지고, 후기 임신중지의 상황으로 가게 된다.

이번 사건에서와 같이 매우 늦은 시기에 임신중지를 해야 하는 상황에 이르러 홀로 모든 상황을 감당하는 일이 반복되지 않으려면 정부는 빠르게 이와 같은 접근성 제약부터 없애 나가야 한다. 임신중지 비범죄화 6년만에 정부가 겨우 적극적인 논의를 시작한 유산유도제의 도입 또한 그중 하나이다. 유산유도제의 도입은 의료비 부담을 줄이고, 임신중지에 대한 접근성을 낮춰 임신 초기 안전한 임신중지를 위한 보건의료 환경의 변화를 앞당기게 될 것이다. 아울러, 모든 임신중지에 대한 건강보험 적용과 공식적이고 포괄적인 임신중지 관련 정보 제공, 전국의 가까운 의료기관 안내가 가능한 핫라인 구축으로 누구든 빠르게 관련 정보와 의료기관에 접근할 수 있게 해야 한다.

불가피하게 임신 후기에 임신중지를 결정해야 할 때도 브로커나 허위 신고된 의료기관이 아닌, 국공립 병원 등 3차 의료기관에서 의료진과의 상담 및 지원 연계 체계를 통해 출산, 양육, 임신중지에 관한 충분한 정보와 연계 지원을 받을 수 있어야 하고, 임신중지를 결정할 경우 안전하게 임신중지를 할 수 있어야 한다. 의료인들 또한 임신 기간에 따른 명확한 임상가이드를 가지고 의료행위를 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우리는 ‘낙태죄’ 대신 무엇으로 처벌할지를 고민하는 수준의 정부와 국회를 그만 보고 싶다

이번 사건 당사자의 무죄를 탄원하며 1심 재판부에는 모두의 안전한 임신중지를 위한 권리 보장 네트워크 외 127개 단체와 개인 4,792명이, 항소심 재판부에는 두 차례에 걸쳐 총 37개 단체와 개인 3,803명이 참여한 탄원서가 제출되었다. 오정원 산부인과 전문의는 증인으로 참석하여 현재의 상황을 명확하게 알렸고, 여러 산부인과 전문의와 법학 연구자, 교수 등 전문인들 또한 항소심 재판부에 별도의 의견서를 제출하였다. 1심부터 항소심까지 이어진 수차례의 재판에 많은 시민들이 방청연대로 함께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임신중지가 이루어지는 사회경제적 상황과 보건의료 현실에 대해 함께 알렸기에, 이 사건에 대한 수사와 초기 재판 과정에서는 인식되지 못했던 현재의 구조적 문제와 정부의 책임을 재판부 또한 보다 명확하게 판단할 수 있었던 것이다. 검찰은 상고심을 고려하지 말고, 보건복지부 및 정부, 국회와 함께 이 판결이 지니는 무거운 의미를 받아들여야 한다.

나아가 우리는 이번 무죄 판결이 변화를 촉발하는 시발점이 되기를 바란다. 임신중지의 비범죄화는 단지 처벌의 중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범죄화로 인해 방치되어 왔던 사회 구조적 변화에 대한 책임을 정부와 사회의 몫으로 전환하는 데에 있다. 이제 정부는 임신중지가 하나의 단절된 사건이 아니라 우리의 삶을 둘러싼 사회의 변화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일이며, 사회의 구조적 불평등이 변화할 때 다른 선택 또한 가능해진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지금의 불평등하고 부정의한 현실을 구체적으로 파악하고, 실질적으로 필요한 새로운 시스템을 구축해 나갈 것을 촉구한다.

우리는 이번 사건의 당사자인 권00 씨를 포함하여, 임신중지를 경험하는 모든 이들이 초기에 안전하고 고통 없이 임신중지를 마치고, 자신의 삶과 건강을 회복하여 또 다른 삶의 토대를 만들어갈 수 있는 사회가 될 수 있도록 계속해서 요구하고 함께 싸워나갈 것이다.

2026년 7월 24일

모두의 안전한 임신중지를 위한 권리 보장 네트워크

건강권실현을위한보건의료단체연합(건강권실현을위한행동하는간호사회, 건강사회를위한약사회, 건강사회를위한치과의사회, 노동건강연대,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 참의료실현청년한의사회), 간호사 페미니스트 네트워크 널싱 페미, 건강권실현을위한행동하는간호사회, 건강사회를위한약사회, 국제앰네스티 한국지부, 노동당, 녹색당, 변화된미래를만드는미혼모협회 인트리, 반성매매인권행동 이룸, 성노동자해방행동 주홍빛연대 차차, 성적권리와 재생산정의를 위한 센터 셰어 SHARE, 시민건강연구소, 여성환경연대, 인권운동네트워크 바람,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 장애여성공감, 전국민주노총 공공운수노조 의료연대본부, 탁틴내일, 트랜스젠더인권단체 조각보, 플랫폼C, 한국여성단체연합, 한국여성민우회, 한국여성의전화, 한국성폭력상담소, Women Help Wome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