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누가 죽은 자를 구하는가? | 조세이 탄광에서 생각한 기억과 국가
2026년 6월 30일
이 글에 포함된 이미지는 노스웨스턴대학(Northwestern University) 디지털 아카이브 프로젝트 Imagination Without Borders로부터 가져왔다.
올해 1월 13일, 한일 정상회담에서 조세이 탄광에서 수습된 유골에 대한 DNA 감정 협력 합의가 이루어졌다. 1991년부터 35년 가까이 국제적 시민 연대로 이어져 온 민간 차원의 연대가 마침내 정부의 움직임으로 이어진 것이다. 분명 의미 있는 진전이지만, 길고 더딘 과정은 이제 시작에 불과하다. 무엇보다 수장된 183명의 희생자 가운데 이번에 DNA 감정을 받게 된 것은 수습된 유골 4~5구에 불과하다. 일본 정부 측이 나머지 유골 수습을 지원할 것인지, 이것이 강제노동을 둘러싼 한일 간 역사 인식의 접점으로 이어질 수 있을지는 여전히 모호하다. 폐쇄된 지 수십 년이 지난 해저 탄광에 다시 진입하는 일은 역사적·정치적 문제인 동시에 고도의 위험을 수반하는 기술적 과제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번 합의는 유족들에게 작은 희망을 남겼다. 수습된 유골의 신원이 확인된다면, 오랜 세월 이름 없이 남겨졌던 유골을 비로소 고향으로 모셔와 정식으로 장례를 치르고 추모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몇 가지 질문이 떠오른다. 80년이 지난 지금, 죽은 자를 돌보고 이들의 이름을 복원하는 것이 우리에게 왜 중요한가? 왜 누군가는 목숨을 걸고 바다 아래에 내려가 유골을 찾으려 하는가? 그리고 이러한 기억과 추모의 노력은 어떻게 지금까지 이어질 수 있었던 것일까?

죽은 사람을 구하는 자 들
일본 시민 야마구치 다케노부는 조세이 탄광 수몰 사고와 조선인 강제노동의 역사를 접한 뒤, 1991년 시민단체 ‘조세이 탄광 수몰사고를 역사에 새기는 모임’을 결성했다. 조세이 탄광 수몰사고는 1942년 해저 탄광 내부 갱도로 해수가 쏟아지면서 무너져 조선인과 일본인 광부 183명이 빠져나오지 못하고 숨진 사고다. 초기 목표는 사고를 기억하기 위한 추모비 건립이었다. 그러나 한국 유족들과의 만남이 이어지고 활동이 지속되면서, 단순히 기억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의식이 생겨났다. 결국 이들은 2013년경부터 활동의 중심을 추모에서 유골 수습으로 옮겼다. (자세한 내용은 시사인 기획기사 를 참조할 수 있다.)
하지만 이는 시민단체가 홀로 감당하기에는 어려운 과제였다. 해저 갱도 접근, 잠수 조사, 유골 수습과 신원 확인에는 전문 기술과 상당한 비용이 필요했다. 이들은 2018년부터 일본 정부의 협력을 요청했지만 별다른 진전을 얻지 못했다.
전환점은 전문 잠수사 이사지 요시타카가 조사에 합류하면서 찾아왔다. 이사지는 해저 갱도 탐사에 필요한 기술과 경험을 제공하면서 국가가 방치하던 일을 직접 해버렸다. 그를 중심으로 조사단은 수차례 잠수 작업 끝에 갱구 위치를 특정하고 2025년 첫 유골 수습에 성공했다. 이후 한국인 잠수사들을 포함한 여러 조사자들이 참여했고, 시민들의 후원과 모금을 통해 일본 정부에 DNA 감정 요구까지 추진하게 되었다. (이 과정에 대한 이사지의 기록은 여기에 있다.)
다이버 ‘빅터’의 죽음, 기다림의 시간
2025년 10월 첫 DNA 감정 요청이 제출되고, 한일 정상 간 협력 합의까지 이루어지면서 상황은 새로운 국면을 맞는 듯했다. 그러나 1개월도 안 되어, 올해 2월 진행된 2차 민간 조사 과정에서 대만 출신 잠수사 ‘빅터’ 웨이 수(Wei HSU) 가 고산소혈증으로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일본 뿐 아니라 핀란드, 태국, 대만 등 여러 나라의 잠수사들이 참여한 국제 조사단이 활동 규모를 확대하던 시점이었다.
이 사고 이후 조사는 급격히 축소되었고 추가 발굴 역시 불확실한 상태에 놓였다. 유골 수습이라는 목적을 위해 또 다른 생명이 위험에 노출되는 것이 정당한가를 둘러싼 고민도 제기되었다. 이미 수습된 유골 다섯 구는 DNA 감정을 받게 되겠지만, 그것이 실제 신원 확인과 송환으로 이어질지, 혹은 상징적인 절차에 머무를지는 아직 알 수 없다.
조세이 탄광의 이야기는 초국적 시민 연대의 성취로 볼 수도 있지만, 실제로는 긴 기다림과 불확실성의 역사이기도 하다. 유골이 발견되었다고 해서 곧바로 신원이 확인되는 것도 아니고, DNA 감정이 이루어진다고 해서 즉시 유족의 품으로 돌아오는 것도 아니다. 끝난 것도, 해결되지 않은 것도 아닌 상태, 포기할 수도 없지만 언제 끝날지 알 수도 없는 상태가 계속 이어진다.
그렇다면 이러한 기다림 속에서 우리는 무엇을 기준으로 행동하고 판단하는 것일까?
서로 다른 사회질서들이 만나는 곳
인류학자 일라나 거숀(Ilana Gershon)은 사회를 하나의 일정한 질서가 지배하는 공간이 아니라, 서로 다른 가치와 규범이 공존하는 여러 ‘사회 질서(social orders)’ 간의 중첩으로 이해한다. 가족, 국가, 과학, 종교, 법과 같은 사회질서는 각기 무엇이 중요하고 정당한지에 대한 나름의 기준을 갖고 있으며, 사람들은 이러한 상이한 질서들을 가로지르며 살아간다. 중요한 점은 이러한 질서들이 완전히 분리되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거숀은 이를 ‘다공성의(porous)’, 즉 서로 스며들고 통하는 속성이라 표현한다. 각 사회질서는 견고한 경계선을 가졌지만, 서로의 경계를 통과하면서 영향을 주고받는다.
조세이 탄광을 둘러싼 조사의 잠정 중단과 유골 송환을 둘러싼 딜레마는 이러한 사회질서들의 교차를 보여주는 사례다. 유골을 둘러싼 ‘바람직한’ 행동과 판단의 기준들은 다양하다. 유족들에게 유해는 잃어버린 가족이며, DNA 감정은 제대로 된 장례를 치르기 위한 마지막 기회다. 과학자들에게는 안전하고 정확한 발굴과 신원 확인, 그리고 유골을 통해 사고 당시의 정황을 복원하는 것이 중요한 과제다.
한국과 일본 정부에게는 외교적 고려와 국민 여론, 역사 문제를 둘러싼 복잡한 계산이 존재한다. 한국 사회에서는 강제 노동의 진상 규명을 위해 일본 정부의 보다 적극적인 협력과 책임 있는 발굴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적지 않다. 반면 일본 언론은 이 사안을 역사 문제가 아닌 인도주의적 협력의 문제로 서술하는 경향을 보인다. 여기에 전후 배상과 법적 책임을 둘러싼 법적 질서, 망자의 안식과 장례를 둘러싼 종교적 질서, 그리고 재일코리안 공동체가 제기하는 ‘누구의 역사가 기억될 가치가 있는가’라는 정치적 질문까지 더해진다. 또한 잠수사 빅터의 죽음은 유골 수습이라는 목표 자체를 다시 윤리적 논쟁의 대상으로 만들었다.
가족, 국가, 과학, 종교, 법, 정치, 윤리의 질서들은 서로 중첩된 채 순환하듯 (거숀은 “circulating”(순환)이라는 표현을 자주 사용한다) 작동한다. 유족들의 요구는 지역 주민들과 시민사회의 조직화를 이끌고, 시민사회의 성과는 언론과 대중의 관심을 모으고, 그 관심은 다시 국가 정책과 외교적 협상의 조건을 바꾼다. 조세이 탄광의 유골은 강제 노동의 비극을 보여주는 역사적 증거인 동시에, 여러 행위자들이 서로 다른 사회적 질서를 연결해 관계를 맺는 과정이 모인 매개체이기도 하다.

국가를 필요로 하는 풀뿌리 기억
많은 기억 연구가 ‘국가는 망각을 요구하고, 민중은 기억으로 저항한다’는 명제를 암묵적으로 전제한다. 조세이 탄광을 둘러싼 활동들 역시 그런 이야기처럼 보인다. 실제로 발굴과 추모, 진상 규명의 대부분은 오랫동안 한일 민중의 헌신에 의존해 왔다.
그러나 조세이 탄광의 사례는 이보다 더 복잡한 현실을 보여준다. 오랫동안 국 가의 부재를 메워 왔던 기억의 주체들은 어느 순간 국가를 필요로 하게 된다. 국가가 방치했던 일을 시작한 것은 시민들이지만, 이를 한 단계 더 실현하기 위해서는 결국 국가의 자원과 제도를 필요로 했다. 전문적인 DNA 분석, 유족 찾기, 그리고 국경을 넘는 송환 절차를 위한 외교적 조율은 시민단체가 대신할 수 없는 영역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계는 새로운 긴장을 만들어 낸다. 기억, 추모, 그리고 윤리적 실천이 국가적 의제가 될수록 더 많은 행위자들이 관여하게 되고, 유족과 활동가들이 중요하게 여겨 온 세부적인 현장의 이야기들은 외교와 행정의 언어 속에서 단순화되거나 뒤로 밀려날 수 있다. 추모와 애도의 문제는 협상과 절차의 문제가 되고, 풀뿌리 기억에 국가가 개입하면 기존 활동들은 국가 간 관계라는 더 큰 틀 안에서 다뤄진다.
실제로 최근 웨이 수를 추모하는 자리에서도 일부 정치인은 조세이 탄광의 북한 출신 희생자 문제와 남북 협력의 필요성을 언급했다(기사). 이러한 발언의 타당성과 별개로, 이는 특정한 희생과 추모의 이야기를 국가적·외교적 의제 속에서 일반화하고, 재배치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이 역시 ‘다공성 사회 질서들’로 인해 한 사람의 죽음이 다중적 의미를 갖게 된 상황이다. 풀뿌리 기억이 제도권으로 편입되는 과정에서 일부 의미가 생략되거나, 때로는 다른 정치적 관심사에 의해 재구성되는 일은 어쩌면 피하기 어려운 현실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조세이 탄광의 사례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시민사회와 국가 중 어느 쪽이 주도권을 가져가야 하느냐는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오히려 서로를 필요로 하면서도 일치할 수는 없는 관계에 대한 사유를 하기 위함에 가깝다. 시민들은 국가가 방치하는 일을 기꺼이 시작하지만, 일정 시점에서 국가의 자원과 기관을 필요로 한다. 국가는 시민들이 만들어낸 문제의식과 압력 없이는 움직이지 않지만, 한 번 개입한 이후에는 그 문제를 자신만의 언어와 절차 속으로 끌어들인다. 조세이 탄광 뿐 아니라, 역사를 둘러싼 동아시아의 기억 실천은 늘 이러한 긴장 위에서 지속되어 왔다.
그래서 조세이 탄광에 대한 이야기는 단지 역사적 진상 규명이나 국가 책임을 둘러싼 논쟁에서 그치는 이야기가 아니다. 이는 기억이 어떻게 만들어지고 지속되는가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우리는 종종 기억을 개인이나 공동체의 의지에서 비롯된 것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이름 모를 희생자를 기억하려는 인도주의적 의지만으로는 이러한 기억이 지속되는 과정을 다 설명할 수 없다. 실제로 기억은 훨씬 복잡한 사회적 과정을 거쳐 형성된다. 그 이면에는 사람들 사이의 연대와 갈등, 제도와 협상, 그리고 때로는 국가(들)와의 불편한 협력이 존재한다.
앞으로 유골을 둘러싼 다음 결정을 기다려야만 하는 현 상황에서, 앞으로 유골이 누구의 품으로 돌아갈지, 어떤 이야기로 기억될지, 어떤 역사적 의미를 갖게 될지에 대한 협력은 여전히 열려 있다. 기억은 저절로 보존되는 것이 아니므로, 앞으로 조세이 탄광의 이야기는 과거에 대한 이야기인 동시에 앞으로 어떤 기억을 만들 것인가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참고 자료
- GERSHON, I. (2019), Porous social orders. American Ethnologist, 46: 404-416. https://doi-org.virtual.anu.edu.au/10.1111/amet.12829
글 : 양정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