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반도 두 국가 체제를 어떻게 볼 것인가
2026년 5월 2일
이 글에서는 대한민국을 ‘남한’으로, 휴전선 이북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북조선’으로 표기했다. 이런 표기는 두 체제에 대한 지지 혹은 반대 여부와는 무관하다. 이 글이 ‘두 국가 체제’를 둘러싼 논쟁을 다룰 뿐만 아니라, 남한-북한 표기가 갖는 모순성을 극복하고, 두 국가 체제를 객관적 실체로 인식하기 위함이 다.
80년에 가까운 시간동안 한반도에는 엄연히 다른 두 개의 체제가 존재해 왔다. 하지만 오랜 기간 남북 양측은 군사적으로든, 정치적으로든, 헌법상으로든 서로를 인정하지 않았다. 가령 남한은 1948년 정부 수립 이후 “한반도와 그 부속 도서”를 영토로 규정하고 38선 이북에 자리잡은 조선노동당이 통치하는 체제를 “반국가단체”로 명명해 왔다. 북조선 역시 남한을 국가로 인정하지 않고, ‘해방’의 대상으로 규정했다.
1991년 9월, 아이러니하게도 남북은 유엔에 동시 가입함으로써 적어도 국제 정치 구도 속에서는 ‘국가’로서 서로의 존재를 인정했다. 남북은 각각 경쟁적으로 국제 사회에서의 외교적 입지를 확장하려 노력했는데, 그런 노력의 결과 남한은 194개국, 북조선은 159개국과 수교를 맺고 있다. 이처럼 한반도에 존재하는 두 정치체제의 양립 상태는 지극히 현실적이고 모순적이다.
최근 ‘두 국가론’을 둘러싼 논쟁이 불거지고 있다. 이는 단순히 정치인들만의 논쟁으로 간주되어선 안 된다. 그것은 남한 사회를 넘어 한반도에서 살아가는 8천만 명의 사람들의 미래에 대한 것이며, 동아시아 권역 전체의 정세와도 무관하지 않다. 사회운동은 이러한 화두에 대해 사고하고, 자신의 실천을 펼쳐야 한다.
김정은의 민족·통일 지우기
2023년 12월 말 열린 조선노동당 제8기 제9차 전원회의에서 김정은 총비서(이하 ‘김정은’)는 남북관계를 "더 이상 동족관계가 아닌 적대적인 두 국가 관계, 교전국 관계"로 정의하고, '대남정책의 근본적 전환'을 공식 선포했다. 이는 단순한 엄포나 말뿐인 선언이 아니었다. 얼마 후인 이듬해 1월 15일(최고인민회의 제14기 제10차 회의), 김정은은 헌법상 '평화통일', '북반부', '삼천리' 등의 표현을 삭제하고, 대한민국을 '제1의 주적'으로 명기할 것을 지시했다. 이어서 1월 말에는 평양 관문인 '조국통일3대헌장기념탑'을 철거하며 남북 화해와 통일의 상징을 물리적으로 제거했고, 평양시내 지하철의 '통일역'을 '모란봉역'으로 개칭하는 등 '민족·통일' 지우기 작업을 전방위적으로 확대했다.
일련의 조치들은 오늘날 한반도 정세를 뒤흔들기에 충분했다. 그제서야 남한 사회는 김정은의 공포가 ‘진심’이라는 것을 어렵사리 받아들여야 하나 고심에 빠졌다. 2023년 10월에는 경의선 및 동해선 남북 연결 도로·철도를 폭파해 남북 간의 물리적 연결 고리를 완전히 차단했으며, 헌법 개정을 통해 대한민국을 공식적으로 '적대 국가'로 규정했음을 대내외에 공표했다. 이제 남한 사회는 이러한 물리적이고도 실체적인 변동을 언제 어떻게 제도적 혹은 사회적으로 받아들일 것이냐의 고민에 빠졌다.

그렇다면 김정은과 북조선 지배엘리트 집단은 왜 80년 가까이 이어져온 민족과 통일 이데올로기를 폐기하고, 일관되게 이러한 조치를 하는 걸까? 우선은 기존의 대남전략이 그리 현실적이지 않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미 사문화된 전략을 현실화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동시에 그것은 북조선 현 체제의 생존 전략이기도 하다. 남한을 ‘동포’가 아닌 ‘완전한 타국’으로 규정함으로써, 경제적으로나 군사적으로 압도적 우위에 있는 남한 주도의 흡수통일 논리를 봉쇄하고, “우리 방식대로 살겠다”는 독자적 생존 공간을 확보하려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남한의 주류적인 통일 담론은 보수주의 우파(국민의힘, PP)의 ‘반공통일’이건, 자유주의 거대정당(민주당)의 노선이건 시장주의적 통합 논리에 기대왔다. 어느 쪽의 통일 담론이든 자본 중심의 이해관계가 논거로 활용되며, 양대 정당 기득권 세력은 유불리에 따라 통일 담론을 활용한다. 이 때문에 남한 사회가 경기 침체에 빠지면 통일에 대한 의구심어린 시선도 높아지고, 경제 상황이 좋아지면 신자유주의적 흡수통일론이 득세한다. 이러한 논리로부터 통일운동 진영 내 일부도 완전히 자유롭지는 않다. 가령 몇몇 논자들은 러시아와 가까워져야 할 이유를 언급하며 ‘북극항로 개발’을 근거로 든다던지, 혹은 통일이 되면 북조선의 저렴한 인건비와 풍부한 자원을 활용할 수 있다는 등의 논리를 그대로 활용한다. 박근혜식의 ‘통일대박론’이 비단 반공주의 우파만의 전유물은 아닌 셈이다.
1990년대 후반~2000년대 초반 햇볕정책을 내세웠던 김대중 정부는 역사적 통일 담론을 신자유주의적 시장 담론으로 뒤바꿨다. 평화공존과 경제통합을 '사실상의 통일'로 규정하고, 장기적인 체제 통합 시나리오를 제시한 것이다. 그것은 남북 간 무역자유화를 통해 인건비가 저렴한 이북을 노동집약적 저부가가치 제조업 생산기지로 바꾸고, 점차적으로 남한 경제의 하위 파트너로 통합한다는 계획이었다. 정부와 자본은 북조선의 “풍부한 저임금 노동력”에 한껏 기대를 가졌다. 심지어 이들에겐 조직화와 파업의 가능성도 없어보였다. 김대중 정부는 한미 간의 역할 분담론과 정치-경제 분리정책을 제시했다. 군사안보 대응은 미국이 주도하고, 남한은 북조선과의 경제협력과 사회문화교류를 주도한다는 것이다.
이는 몇 번의 좌절을 겪은 후 문재인 정부 시절 드라마틱한 두 차례 북미 정상회담으로 실현되는 듯했다. 그러나 2019년 2월 ‘하노이 노딜’과 문재인 정부의 군비 증강 및 한미연합군사작전훈련 중단 등의 약속 불이행 이후 북조선은 더 이상 민주당이건 국민의힘이건 남한 정부가 하는 말을 믿지 않는다. 남한을 통해 미국과 협상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 이제 북조선 지배엘리트들의 지상과제는 급변하는 국제 정세에 능동적으로 대응하며 살 길을 도모하고, 내부의 체제 위협 요소에 대응하는 것이 됐다. 그런 위협에 맞서, 남한 체제가 ‘같은 민족’으로 존재하지 않는 조건을 만드는 것이 필수적이라 본 것이다.
북조선 지배엘리트 입장에선, 남한의 경제적·문화적 우위가 주민들에게 유입되어 체제 이탈이 일어나는 것을 경계해야 했다. 남한을 ‘괴뢰’가 아닌 아예 ‘적대국’으로 규정함으로써, 남한 문화와 이데올로기를 소비하는 행위를 단순한 일탈이 아닌 ‘이적행위’로 규정하고 처 벌할 명분을 구축할 수 있게 됐다.

시간이 필요한 남한 사회
아직 남한의 통치엘리트들에겐 시간이 필요한 듯하다. 2024년 8.15 경축사에서 당시 윤석열 대통령은 "자유민주주의에 기반한 통일"을 재확인하며, 북한 주민의 자유를 확장하는 것이 곧 통일이라는 '자유-북진'의 가치를 내세웠다. 이는 북한 정권의 존재를 적대화하고 주민을 직접 공략하는 방식으로, 북한의 '적대적 두 국가론'을 더욱 고착화시키고 군사적 긴장을 높이는 것이었다. 이듬해 가을, 윤석열이 무인 드론을 활용해 평양 하늘을 침범하는 도발을 감행하며 계엄의 명분을 축적하려 한 것도 이러한 기조(자유-북진)와 무관하지 않다.
얼마 후인 9월, 문재인 정권 시절 대통령 비서실장을 역임했던 임종석은 "통일하지 말고 두 개의 국가로 살자"며 헌법 3조(영토 조항) 삭제와 '통일 포기'를 제안했다. 한때의 ‘반미통일 학생운동 리더’의 발언이었기에 더욱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어쨌든 이는 "전쟁을 막고 평화적 공존을 우선하자"는 현실주의 외교노선에 기반한 주장으로 볼 수 있다.

현실주의는 국제 정세를 도덕이나 법보다는 ‘힘’과 ‘국익’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주류적인 외교노선이다. 고전적 현실주의가 ‘인간에게 권력 추구 본성이 있다’는 인식에 기초해 국제정치를 이해하고, 이런 바탕 하에 지도자의 국익 중심 외교를 강조한다면, 오늘날 구조적 현실주의 관점은 국제사회의 ‘무정부적 구조’가 국가들을 서로 경쟁하게 만든다고 인식한다. 그렇기에 이는 상대의 위협에 대응하기 위한 군비 증강으로 귀결되며, 민주주의적 통제를 해체시킨다.
임종석의 발언 직후 남한 사회에선 "북한의 주장에 동조하는 것이냐"는 비판에 동조하는 견해들이 쏟아져 나왔다. 진보당을 비롯한 그룹들은 "경솔하고 무책임한 발언"(진보당)이라 비판하거나, “민족은 권력자의 의지로 지울 수 있는 인위적 집단이 아니”(평화와통일을여는사람들)라는 이유로 반박했다. 이런 반발이 기반으로 삼는 논리는 ‘1991년 남북기본합의서’와 ‘6.15 남북공동선언’에서 찾을 수 있다. 특히 1991합의서는 남북 관계를 “쌍방사이의 관계가 나라와 나라사이의 관계가 아닌 통일을 지향하는 과정에서 잠정적으로 형성되는 특수 관계”로 규정하고, “평화통일을 성취하기 위한 공동의 노력을 경주할 것”을 약속하고 있다.
그러나 북조선이 ‘통일’이나 ‘민족’ 같은 전통적 개념을 제거하고 남한 내 통일 지지 여론이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크게 낮아진 상황에서 과거의 ‘특수성’이 매우 위태로워졌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다. 이재명 정부의 통일부(정동영 장관)는 북조선의 “적대적 두 국가 관계”에 대응하며, “통일 지향의 평화적 두 국가 관계”를 내세우고 있는데, “평화와 공존을 추구하고, 적대와 대결을 화해와 협력으로 전환해야 한다”는 판단을 바탕으로 한다. 그러나 모순은 여전하다. “통일 지향”과 “두 국가 관계”의 병존은 여전히 극복되지 않은 남한 사회 내 남북관계에 대한 혼돈을 반영한다.
강화되는 군사 위기
이런 가운데 한반도의 군사적 긴장은 꾸준하게 점증하고 있다. 2025년 하반기 북조선은 휴전선 경계 요새화(군사분계선 일대 철책 설치 및 비무장지대 북방한계선 방벽 설치) 작업의 완료 단계에 진입하며 국경 개념을 강조했고, 서해에서 '중간계선해역' 등 해상 주권을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적대적 두 국가론’에 기댄 조치들의 결과, 2026년 1월 김정은은 조선노동당 제9차 대회에서 새로운 ‘5개년 계획’과 함께 ‘두 국가론’을 당의 항구적 전략 노선으로 규정하기에 이르렀고, 2026년 3월 22일 제15기 최고인민회의 출범과 함께 대남 기구들을 완전히 폐지하고 외무성 중심의 국가 대 국가 관계 대응 체제를 공고히 했다. 이로써 1991년 남북기본합의서 이후 유지된 "통일을 지향하는 잠정적 특수관계"라는 틀이 붕괴됐다.
가장 큰 변화는 남측을 '동족'이 아닌 '제1의 주적'이자 '외교적 타국'으로 규정한 데서 온다. 과거 '민족 내부 문제'라는 틀에서는 같은 민족을 향해 핵을 사용하는 데 대한 논리적·도덕적 부담이 존재했다. 그러나 이제 북조선에게 남한은 '교전 중인 적대 국가'로 규정되고 있으며, 이는 북조선이 유사시 망설임 없이 핵무력을 사용할 수 있는 심리적·법적 토대를 완성했음을 의미한다. 제9차 당대회에서 규정된 전략 노선은 핵무기를 단순 억제용이 아닌 '영토 완정'(領土完整; 자국의 영토를 완전히 보위하여 주권을 확고히 한다는 뜻)을 위한 실전 수단으로 공식화했다.
문제는 1991년 체제(남북기본합의서)의 붕괴는 위기관리 시스템의 실종을 의미한다는 점이다. 군사적 위기 발생 시 즉각적으로 가동할 수 있는 핫라인이나 군사 당국 간 채널이 사실상 사라졌다. 지금 상황에선 남한의 '힘에 의한 억제' 기조와 북조선의 노선이 정면 충돌하며, 양측 모두 군비 경쟁을 멈추지 않는 ‘안보 딜레마’가 심화될 수 있다.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 참전과 민족관계의 종식 선포 이후 북조선은 러시아와의 관계를 국가 간 혈맹으로 격상시켰다. 이 역시 매우 공고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한반도 유사시 러시아의 군사적 개입 가능성은 높아졌다. 2026년부터 개시된 새로운 ‘5개년 계획’은 러시아로부터 전수받은 군사 기술을 바탕으로 정찰 위성, 고체 연료 ICBM, 전술핵 잠수함 등의 실전 배치도 가속화하고 있다.
나아가 북조선은 남한을 ‘제1의 주적’으로 명기한 이후, 남측 주요 시설을 정밀 타격할 수 있는 초대형 방사포와 단거리 탄도미사일에 전술핵을 탑재하여 실전 배치하는 데 집중하고 있고, 남북 분쟁 시 외부 개입을 차단하기 위한 고체연료 기반 대륙간탄도미사일(ICBM)과 한반도를 상시 감시하는 군사 정찰위성 체계를 고도화하고 있기도 하다. 과거 억제 중심에서 유사시 무력 점령을 위한 선제 공격을 포함하는 공격적 핵 교리로 완전히 전환된 것이다. 국가안보전략연구원 보고서(2025.06)에 따르면, 북조선은 ‘두 국가론’을 통해 남한을 배제하고 러시아·중국 등과의 블록 외교에 집중함으로써 핵 보유국의 지위를 기정사실화하려는 전략적 의도를 보이고 있다.
‘통일’과 ‘관리’의 임계를 넘어
2023년 말 북한의 ‘적대적 두 국가론’ 선포와 이어진 대결 구도(오물 풍선, 확성기 재가동 등)는 남북 간 심리적·제도적 단절을 심화했다. 통일연구원(KINU)이 실시한 ‘2025 통일의식조사’ 결과에 따르면, 통일이 필요하다고 답한 비율은 49.0%로, 조사가 시작된 2014년 이래 최저치를 기록했다. 이는 2018년 남북정상회담 당시의 70.7%와 비교해 급격히 하락한 수치다. 나아가, “전쟁 없이 평화적으로 공존할 수 있다면 통일은 필요 없다”는 응답이 63.2%로 사상 최고치를 경신했고, “정치적 통합이 아니더라도 왕래와 경제 협력이 가능하다면 그것도 통일이다”라는 진술에 63.8%가 동의했다는 점도 인상적이다. 적대적 분단 현실을 인정하면서도 갈등을 관리하려는 복합적 사고가 확산되어, 응답자의 41%는 ‘평화적 공존’과 ‘적대적 현실 수용’에 모두 동의하는 경향을 보인 것이다.

진짜 문제는 무관심이다. 북의 통일 포기 선언에 대해 국민의 57%는 모르거나 관심이 없다고 응답했다. 북을 ‘하나의 국가’로 보는 견해가 61.5%에 달해, 전통적인 ‘특수 관계’보다 ‘국가 대 국가’의 틀로 북한을 바라보는 인식이 높아졌다. “남북은 같은 민족이다”라는 인식은 68.5%로 여전히 높지만, 조사가 시작된 2016년(76.1%) 대비 하락하며 ‘다른 민족’으로 보는 비율이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이러한 ‘기능적 통일관’은 진보(65.6%), 보수(65.2%)를 막론하고 보편적으로 나타나며, 전쟁을 겪은 세대에서도 62.1%가 동의하는 등 현실주의 인식이 확산됐다.
이처럼 오랫동안 우리 사회를 지배해온 '당위로서의 통일'과 이를 실현하기 위한 '민족주의적 열망', 그리고 이에 대항하며 안정을 우선시해온 '분단 관리의 현실주의'는 이제 그 한계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이러한 모순은 본질적으로 국가 엘리트 중심의 하향식 기획에 기반하고 있으며, 그 속에서 개별 시민의 구체적인 삶과 평화의 감각은 실종되어 왔다. 특히 최근 북조선이 선포한 '적대적 두 국가론'과 그에 따른 '민족 지우기'는 기존의 민족 담론이 더 이상 한반도 평화의 실효적인 안전장치가 될 수 없음을 역설적으로 증명한다. 더구나 남한 사회의 이주민 인구 비중이 점차 증가하는 상황에서 기존의 ‘단일민족’ 서사는 유효하지도 지지할만 하지도 않다. 그런 점에서 ‘두 국가론’에 맞서 ‘민족통일’ 담론을 옹호하는 것은 반전평화운동의 대응법이 될 수 없다.
발전주의와 현실주의에 기초한 '두 국가론'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 것 역시 위험하기는 마찬가지다. 이는 군사적 대치와 안보 딜레마를 상수로 고착화하며, 평화를 단지 '전쟁이 없는 상태'라는 소극적 범주로 축소시킨다. 국가 이익과 체제 생존만을 따지는 냉혹한 계산법 아래서 평범한 시민들의 안전과 존엄, 즉 '인간 안보'는 늘 뒷전으로 밀려나기 마련이다. 동아시아의 군사적 긴장은 한반도뿐 아니라 대만 해협, 남중국해와 연결되어 있으며, 군비 증강을 중단하고 정상 관계로 접어들 수 있는 전초단계가 된다는 보장도 없다. 긴장을 완화하기 위한 노력은 꾸준하게 지속되어야 하지만, 일본의 재무장이나 중국의 해상 팽창 등 지역적 위협, 북조선의 핵무기 개발, 남한의 ‘K-국방’ 군산복합체의 성장 구조는 해결되지 않는다. 국가가 평화의 이름으로 시민의 희생을 강요하는 모순된 상황을 끝내기 위해서는 ‘국가’ 프레임을 넘어선 시각이 필요하다.
남북 관계를 '우리민족끼리'나 '주권 국가 간 외교'로 해결하려는 시도는 동아시아의 군비 증강 흐름에 압도당하기 쉽다. '두 국가' 인정이 각자의 군사력을 전제로 한 '무장된 평화'라면, 평화체제를 위한 권역적 사고는 동아시아 전반의 군비 감축을 지향한다. 북한의 핵 문제만을 떼어내 논의하기보다, 미국과 중국의 핵 우산 및 지역 내 모든 핵 위협을 포괄하는 '동아시아 비핵지대' 논의로 확장해야 한다. 그래야 북핵 문제 해결도, 군비 감축도 가능하며, 무엇보다 무한 군비 경쟁은 각국 시민들의 복지와 생존권을 파괴한다. 물론 동아시아 비핵화는 미국을 비롯한 '강대국'들이 한반도, 특히 북한에 대한 안전보장이 전제되지 않을 경우에는 핵보유국 비확산을 위한 수단에 불과할 뿐이다.
평화는 엘리트 간의 협상 테이블이 아니라, 시민 사회의 연대와 국가 권력에 대한 민주적 통제를 통해 벼려져야 한다. 그렇기에 먼 미래에 도달해야 할 어떤 고정된 목표가 아니라, 부단하게 지속해야 할 여정으로 여겨야 한다. 막대한 군비 증강의 비용을 시민 복지와 기후 위기 대응으로 전환하라는 요구는 그 자체로 분단체제에 도전하는 강력한 민주주의 운동이자 평화 실천이다.
따라서 우리는 당장 ‘통일이냐 분단이냐’라는 결론에 집착하기보다, 서로 다른 체제와 가치관을 가진 정치체들, 특히 그곳에서 살아가는 대다수의 민중들이 어떻게 공존할 수 있을지를 고민하는 '과정으로서의 평화'를 긍정해야 한다. 사회운동의 과제는 지배 담론이 그어놓은 경계에 갇히지 않고, 그 경계를 넘나드는 새로운 평화의 언어를 발굴하고 끊임없이 억압과 착취를 지양하는 데 있다. 아래로부터의 민주주의와 민족과 국경을 넘어선 연대를 통해 동아시아의 평화를 재구성할 때, 비로소 우리는 상시적인 평화체제를 구축할 수 있다.

참고 자료
- 「2026 통일 문제의 이해」, 국립평화통일민주교육원
- 윤보영, 「북한이탈주민의 탈경계적 실천에 대한 연구」, 북한연구학회, 2016. 11.
- 「북측이 통일을 부정한 상황에서 현실적 대안은 '두 국가 평화공존'아닐까요?」, 평화누리 통일누리, 233호, 2024년 4월호
- 신석진, 「남북수교론 비판」, 정세브리프 vol.2, 진보당 진보정책연구원, 2025.09.01.
- 이의엽, 「새로운 남북 관계는 '정명'에서 시작」, 민중교육연구소, 2025.08.04.
- 한반도 다시보기 ① | 점증하는 동아시아 전쟁 위기, 통일 담론이 마주한 한계
- 한반도 다시보기 ② | 햇볕정책의 신자유주의적 성격과 사회운동의 새로운 도전
글 : 홍명교 | 플랫폼c 활동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