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가포르 | 수십년만에 ‘전쟁기계 미국 규탄’ 집회가 열리다

싱가포르 | 수십년만에 ‘전쟁기계 미국 규탄’ 집회가 열리다

지난 4월 13일 싱가포르 홍림공원에서는 싱가포르 팔레스타인 학생들 주최로 미국의 제국주의에 ​​반대하는 시위 '전쟁 기계 미국을 저지하라!'가 열렸다. 이 집회는 미국의 제국주의 행태를 비판하는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는 이 도시에선 이례적인 일이었다.

2026년 5월 31일

[동아시아]싱가포르싱가포르, 반전평화, 집회시위권, 팔레스타인, 국제연대

지난 4월 13일 싱가포르 홍림공원에서는 싱가포르 팔레스타인 학생들(Students for Palestine Singapore) 주최로 미국의 제국주의에 ​​반대하는 시위 '전쟁 기계 미국을 저지하라!'가 열렸다. 싱가포르에 사는 수백여 명의 청년들이 참가했고, 참가자들은 대부분 검은색 옷에 케피예를 착용하라는 드레스코드를 지켰다.

출처: 黄毅聖 Ng Yi Sheng
출처: 黄毅聖 Ng Yi Sheng

시위 시작 몇 시간 전, 싱가포르 경찰과 국립공원관리청은 이스라엘이나 팔레스타인과 관련된 상징물을 조직적으로 전시하지 말라는 경고문을 발표했다. 하지만 시위 주최측은 이에 굴하지 않았고, 미국의 제국주의나 호전주의를 보여주는 다양한 사안들을 상징물과 손팻말 등으로 활용했다. 가령 "이것이 테러리스트의 모습이다"라고 적힌 현수막에는 빌 클린턴과 제프 베조스, 조지 W. 부시, 도널드 트럼프, 버락 오바마, 일론 머스크, 조 바이든의 얼굴들이 나열돼 있었다. 이날 집회가 겨누는 ‘제국주의 미국’의 얼굴이 전쟁을 일으킨 권력자들과 억만장자의 얼굴을 하고 있음을 폭로하고 있는 것이다.

경찰 당국의 압박이 있긴 했지만, 싱가포르에서는 이 정도의 정치적 표현만으로도 나름대로의 변화라고 할 수 있다. 이는 팔레스타인에 대한 광범위한 국제연대 흐름 이전에는 상상할 수 없었던 모습이다. 싱가포르에선 표현의 자유와 집회 결사에 대한 제약이 여전히 존재한다.

이날 집회에선 많은 이들의 발언들이 이어졌다. 활동가 ‘응이셩(Ng Yi-Sheng)의 후기에 따르면, 이번 전쟁 반대 시위는 싱가포르에서의 반전 집회라는 측면에선 적지 않은 사람들이 참가했다. 참가자 중 한 명은 “싱가포르에서 1970년대 이후 처음으로 열린 반제국주의 시위일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온라인과 오프라인에서 많은 사람들과 이 시위의 독특성에 대해 이야기했다. 더구나 싱가포르 경찰은 팔레스타인에 연대하는 학생 조직의 인스타그램 계정에 대해 "이스라엘-하마스 분쟁 관련 문제를 언급하지 말라"고 제재하는 메시지를 보냈다.

이는 매우 터무니없는 요구다. 대량 학살에 대해 이야기할 수 없다는 것도 문제지만, 전 세계 모든 국가에서 이스라엘이 자행하고 있는 집단학살과 전쟁에 대해 비판하고 있는 상황에서, 이스라엘을 비판의 예외로 두는 것은 아무 타당성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응이셩 활동가는 “바로 이 제약 덕분에 발언자들이 뻔한 논점을 넘어 더 깊이 있는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고 말했다.

출처: Students for Palestine Singapore
출처: Students for Palestine Singapore

‘스피커스코너’에 선 활동가 소비쿤 나하르(Sobikun Nahar)와 연극 제작자 A 야그냐(A Yagnya)는 미국의 제국주의를 규탄하는 내용의 발언을 했다. 자신들의 어린 시절 영웅 버락 오바마의 책임을 묻는 내용도 포함했다. 두 발언자는 미국이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의 권력 공백을 틈타 식민주의에 기반한 국제질서를 구축하고 전 세계에 패권을 행사해 왔으며, 싱가포르는 그 과정에 깊이 관여해 왔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탈달러화로 인해 그 지배력이 무너지고 있다는 점도 강조했다.

시각예술가이자 동화 작가 누샤 닥시니(Nusha Dakshyni)와 필리핀계 싱가포르인 앰버(Amber)는 싱가포르가 동남아시아 권역 내 국제 연대에 얼마나 서투른지 말하면서, "아세안 창립의 목적은 명백히 지역 안정이었지만, 그 안정은 서방의 이익에 우호적인 정부들에 의해, 그리고 서방을 위해 정의되고 유지되는 것이었다"고 비판했다. 그러면서 싱가포르 국가가 겉으로는 ‘중립’을 주장하지만, 자신의 영향력을 지렛대로 활용하기보다 억압자의 편에 서 있다고 지적했다. 누샤에 따르면 싱가포르는 “이주노동자들에 의해 건설된 나라”이며, 이 이주노동자들은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더 나은 일자리를 찾아 고국을 떠난 사람들”이다. 누샤는 “이 이주민들의 고국은 미 제국주의로 고통받고 있고, 이들은 바로 우리의 동남아시아 친구들”이라면서, “아세안은 동남아시아 국가들이 서로를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졌지만, 싱가포르는 이 동남아시아 친구들을 제대로 대우하지 않고 있다”고 비판했다.

필리핀에서 온 한 익명의 이주노동자도 나섰다. 그는 '우탕 나 로웁(utang na loob)'이라는 타갈로그어 단어를 상기했다. ‘우탕 나 로웁’은 쉽게 수치화할 수 없는, 사회적 연대와 상호 관계를 증진시키는 돌봄을 가리킨다. 익명의 이주노동자는 ‘부채의식’이 아닌 깊은 연대의 의미로 이 단어를 되찾음으로써, 이주민과 고향 공동체를 묶어주는 역사, 투쟁, 동지애를 회복하자고 말했다. 오랜 시간 필리핀 사회는 민중의 삶보다 자본의 이윤을 중시하는 마르코스 시니어의 독재 체제를 경험했다. 많은 시민들이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더 나은 일자리를 찾아 조국을 떠나야 했다.

다음 발언자는 싱가포르 폴리테크닉 학생회 활동가이자 사형제 폐지운동가 일라이자(Elijah)였다. 그는 학생들이 노동자운동과 함께 정부 기관에 맞서 싸워온 역사를 강조했다. 1971년 싱가포르 폴리텍대학 학생들은 인종차별 정책을 펼치는 남아프리카공화국에 대한 무기 판매에 항의하는 투쟁을 펼친 바 있다. 일라이자는 “학생운동의 역사는 국경을 넘어 정의를 위해 투쟁하고 굳건히 버티는 것”이었다며, “이는 학생들이 집단적 투쟁으로 뭉쳐 노동자들과 함께 인류를 위해 싸울 때 얼마나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지 보여준다”고 말했다.

출처: Students for Palestine Singapore
출처: Students for Palestine Singapore

또 다른 발언자 교사 수케시(Sukesy)는 ‘싱가포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작은 나라일 뿐’이라는 주장에 의문을 제기하며, “우리는 보호라는 명목으로 무기와 국방에 적극적으로 자금을 지원해왔다”고 지적했다. 특히, “1967년 우리 국민 소득의 15%는 미국의 전쟁 물자 조달에서 나왔다”는 사실을 상기하고, “우리는 그 이후로 줄곧 미국과 결탁해 왔다”고 말했다. 그에 따르면, “이것이 바로 제국주의의 본질이며, 우리가 반제국주의 운동에 나서는 이유”이며, “이 불편한 진실을 직시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수케시는 싱가포르 곳곳에 있는 미국과의 협력 관계를 보여주는 장소들을 언급하면서, 이런 곳들을 돌아다니는 투어 프로그램을 제안했다. 가령 베트남 전쟁 참전 미군에게 휴식을 제공했던 ‘셸퍼드 하우스’, ‘창이 해군 기지’, 더반 로드(Durban Road)의 미군 기지 등이 그것이다.

싱가포르는 부유하고 효율적인 도시국가로 꼽히지만, ‘집회와 시위의 자유가 극도로 위축’된 국가이기도 하다. 이 나라를 일당독재 체제 하 통치해온 인민행동당(PAP)은 정치적 자유가 허용될 경우 다인종 국가 싱가포르 사회에 내재한 인종과 종교, 계급 간 갈등을 촉발할 것이라고 두려워한다. 그 경우 초국적 자본이 싱가포르를 무역과 금융을 위한 허브로 활용할 매력을 잃게 된다고 여기는 것이다.

싱가포르의 치안 법령 중 상당수는 영국 식민 정부가 노동자운동과 반식민주의 운동을 통제하기 위해 도입한 제도를 계승하고 있다. 1965년 말레이시아 연방으로부터의 독립 이후, 싱가포르 정부는 식민지 시절의 비상사태 법령을 모태로 내부보안법(Internal Security Act)을 적극 활용했는데, 이 보안법 하에서는 재판 없이도 시민을 무기한 구금할 수 있었다. 초기 싱가포르 정부는 이를 바탕으로 정부에 비판적인 노동운동가, 학생운동가, 야당 정치인들을 탄압하고 이들의 목소리를 봉쇄했다. 지난 4월 11일 집회가 열린 홍림공원은 2009년 제정된 공공질서법이 유일하게 보장하는 ‘집회 허용 장소’다. 단 1명이 시위를 하더라도 반드시 경찰의 ‘허가’를 받아야 하며, 그마저도 영주권자와 시민에 한정된다. 싱가포르 총인구 611만 명 중 이주민은 191명에 달하는데, 이들이 자신의 정치적 견해를 말하는 것은 원천 봉쇄돼 있는 셈이다.

싱가포르에서 유일하게 집회가 허용된 홍림공원 '스피커스코너'
싱가포르에서 유일하게 집회가 허용된 홍림공원 '스피커스코너'
이번 집회의 구호가 적힌 리플렛
이번 집회의 구호가 적힌 리플렛

정리 : 홍명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