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속마저 외주화할 것인가, 사회적 합의의 무게

약속마저 외주화할 것인가, 사회적 합의의 무게

김충현 사망 이후 어렵게 만들어진 사회적 합의조차 이행되지 않는 현실은, 현정부가 과연 ‘위험의 외주화’를 멈출 의지가 있는지 되묻게 한다

2026년 5월 26일

[읽을거리]노동노동안전, 비정규직, 화력발전소, 노동조합, 기후정의운동

오는 6월 2일은 고 김충현 노동자 사망 1주기다. 김충현은 발전소의 외주화 구조와 불안정한 하청노동 체계, 그리고 노동자 대책 없는 석탄발전소 전환 과정 속에서 목숨을 잃었다. 김용균 이후에도 발전소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위험은 여전히 반복되고 있다.

지난 1년 동안 114개 노동·시민사회단체가 김충현 대책위를 꾸리고 장례투쟁과 농성을 이어간 끝에, 발전소 하청노동자 직접고용과 고용·안전 대책 마련을 위한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냈다. 그러나 합의 이행을 위한 논의기구는 아직 제대로 출범하지 못했고, 정부와 원청의 책임 역시 멈춰 있다.

김충현 1주기를 맞아 태안화력 고 김충현 비정규직 노동자 사망사고 대책위원회는 함께 지난 1년의 투쟁과 변화, 그리고 여전히 남아 있는 과제를 돌아보는 기고 연재를 진행한다. 이 글은 해당 연재의 네번째 글로 <참세상>에 중복 게재되었다.

김충현이라는 이름을 우리는 또 얼마나 오래 기억하게 될까.

사람이 죽고 나서야 위험의 외주화를 이야기하고, 사회적 합의를 만들고, 재발방지를 약속하는 일은 한국 사회에서 이제 너무도 익숙한 풍경이 되었다. 김용균 이후에도 그랬고, 김충현 이후에도 우리는 같은 말을 반복하고 있다. 문제는 이제 단지 “또 한 명이 죽었다”는 데 있지 않다. 더 심각한 것은, 사람이 죽은 뒤 어렵게 만들어낸 사회적 약속조차 너무 쉽게 무력화되고 있다는 점이다.

지난 2월 10일, 정부와 <태안화력 고 김충현 비정규직 노동자 사망사고 대책위원회>(김충현 대책위)는 ‘고 김충현 사망사고 재발방지를 위한 발전산업 고용·안전 협의체’ 합의문을 도출했다. 이 합의는 단순한 권고나 선언이 아니었다. 발전 정비산업의 다단계 하도급 구조를 개선하고, 상시지속·생명안전업무에 대한 직접고용 원칙을 확인하며, 노동자의 안전과 고용을 보장하기 위한 사회적 약속이었다.

합의문은 분명했다. 화력 분야는 3월 31일까지 노사전(노동, 회사, 전문가)협의체 논의를 완료하고, 5월 31일까지 하청업체 소속 발전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정규직 직접고용을 완료하기로 했다. 직접고용이 완료되기 전까지는 하도급 계약을 연장하고, 노동자들에게 불리한 조건을 강요하지 않기로 했다. 하지만 5월 말이 한참 지난 지금까지도 노사전협의체조차 제대로 구성되지 못했다. 합의는 존재하지만, 이행은 멈춰 있다. 어렵게 만들어낸 사회적 약속이 또다시 종이 위 문장으로만 남겨지고 있는 것이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

정부는 정규직 노조와 일부 이해관계자들의 반발을 이유로 들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설명일 수는 있어도 면책이 될 수는 없다. 공공기관의 위험의 외주화와 다단계 하도급 구조를 수십 년 동안 방치해온 주체 역시 정부였기 때문이다. 정부는 계속하여 비용 절감과 인력 감축 중심의 효율화 논리를 공공기관에 강요하며 비정규직 확대를 유인했고, 그 결과 발생한 문제들을 사실상 방치해왔다.

이 문제는 갑자기 등장한 것이 아니다. 문재인 정부는 2017년 ‘공공부문 비정규직 정규직 전환 가이드라인’을 발표하며 상시지속업무의 정규직화를 약속했다. 한전KPS 역시 당시 정비업무 하청노동자들이 정규직 전환 계획에 포함되어야 했지만, 논의조차 제대로 진행되지 않은 채 방치되던 가운데, 2018년 12월 11일 태안화력발전소에서 발전 비정규직 노동자 김용균이 죽었다. “문재인 대통령, 비정규직 노동자와 만납시다”라는 피켓을 직접 들고 정부의 책임을 묻는 캠페인에 참여한 지 불과 열흘 만이었다. 외주화 되면서 사라진 2인 1조 근무규정만 지켜졌다면 벌어지지 않을 참사였다.

그러나 그 죽음 이후에도 발전 정비 노동자들의 구조는 근본적으로 바뀌지 않았다. 오히려 하청노동자들은 여전히 위험한 현장에 남겨졌고, 1년 단위 계약과 반복되는 업체 교체 속에서 불안정한 삶을 이어가야 했다. 태안화력만 보더라도 2010년 이후 13번이나 업체가 바뀌었다. 노동자들은 형식적인 면접을 반복했고, 원청 관리자에게 “눈 밖에 났다”는 비합리적인 이유로 재계약 과정에서 탈락하기도 했다.

그렇게도 바뀌지 않는 발전소에서, 김용균의 죽음 이후 6년 6개월이 흐른 2025년 6월 2일, 우리는 또다시 홀로 일하다 죽음을 맞은 비정규직 노동자 김충현을 떠나보냈다.

발전소 노동은 상시지속업무이며 생명안전업무다.

정부 연구보고서 역시 발전 운전·정비·관리 업무를 비정규직 사용 제한이 필요한 생명안전업무로 규정해왔다. 그런데도 공공기관은 이 핵심 업무를 다단계 하도급 구조 속에 방치했다. 숙련은 노동자 개인에게만 남았고, 책임은 누구의 것도 아니게 되었다. 그렇게 가장 위험한 일은 가장 불안정한 노동자들의 몫으로 밀려났다.

결국 법원도, 노동부도 이 구조의 문제를 인정했다. 서울중앙지방법원은 2025년 8월 한전KPS 하청노동자들이 사실상 한전KPS의 지휘·통제를 받으며 일해왔다고 판단했고, 노동부 역시 태안화력 협력업체 노동자들에 대해 불법파견 판정을 내리며 직접고용 시정명령을 내렸다.

즉, “직접고용을 할 것인가 말 것인가”는 더는 논쟁의 여지가 있는 사안이 아니다. 이미 법적·사회적 책임은 충분히 확인되었다. 문제는 그 책임을 계속해서 회피하고 있는 정부와 한전KPS 사측이다. 더 심각한 것은, 이번 합의는 단지 한 사업장의 문제가 아니라는 점이다. 그것은 앞으로 한국 사회가 이야기하게 될 ‘정의로운 전환’ 전체를 흔드는 나쁜 선례가 될 수 있다.

기후위기 시대에 석탄화력발전소 폐쇄는 불가피하다. 그러나 전환의 비용을 가장 약한 노동자들에게 떠넘기는 방식은 결코 정의로운 전환일 수 없다. 실제로 한전KPS는 폐쇄 예정 발전소에서 하청업체 계약을 줄이고, 일부 노동자들만 선별적으로 단기 계약직으로 채용하며 손쉽게 인력을 조정하려 하고 있다. 정규직 노동자의 고용안정은 유지하면서, 하청노동자들이 가장 먼저 해고되는 구조가 만들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앞으로의 전환 과정에서 하나의 기준이 되어버린다면 어떻게 될까. 산업전환이 시작될 때마다 가장 먼저 하청노동자가 해고되고, 위험한 업무는 계속 외주화되며, 사회적 합의는 정권과 기관장의 의지에 따라 언제든 후퇴할 수 있다는 신호를 남기게 된다. 결국 “정의로운 전환”이라는 말은 공허한 구호로 남게 될 것이다.

그래서 이번 합의는 단지 한전KPS 한 현장의 협상 문서가 아니다. 한국 사회가 과연 사회적 약속을 지킬 수 있는 사회인지 묻는 시험대에 가깝다. 특히 민주당 정부의 책임은 무겁다. 김용균의 죽음 이후 위험의 외주화를 멈추겠다던 문재인 정부의 약속은 끝내 지켜지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 ‘노동 존중‘을 외치는 이재명 정부도, 김충현의 죽음 이후 어렵게 만들어진 사회적 합의를 이행하지 않고 있다.

사람이 죽을 때마다 약속을 만들고, 시간이 지나면 그 약속이 흐지부지 잊혀지는 사회는 결국 더 많은 죽음을 반복하게 된다. 합의의 무게는 문서 자체에 있지 않다. 그것을 끝까지 이행하는 사회적 책임감에 있다. 위험의 외주화를 멈추겠다는 말은 이미 수없이 반복되었다. 필요한 것은 또 다른 선언이 아니다. 약속을 실제로 지키는 일이다.

직접고용과 사회적 논의기구 구성이라는 최소한의 합의조차 이행하지 못한다면, 앞으로 어떤 전환의 약속도 노동자들에게 신뢰를 얻을 수 없을 것이다. 김용균과 김충현의 반복된 비극 앞에, 위험의 외주화를 멈추겠다는 약속을 하고도 결국 그 이행마저 방관하고 있는 정부와 한전KPS는 이제라도 그 책임을 다해야 한다.

글 : 민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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