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평 | 『프라하의 소녀시대』를 통해 만날 수 있는 우리가 바라는 사회에 대한 질문
2026년 3월 22일
커버 이미지 출처: noouchi
사회주의 체제 동구권 사람들의 삶은 어떤 것이었을까? 그 사람들은 어떤 꿈을 꾸고,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취미를 즐겼을까? 서구권 선진국에서의 삶은 각종 미디어를 통해 끊임없이 전해지기에, 직접 경험해보는 것과는 많이 다르겠지만 적어도 상상은 해볼 수 있다. 반면 동구권 국가에서의 삶이 어떠했을지는 상상하기조차 쉽지 않다. 심지어 90년대에 사회주의 체제가 무너지기 이전의 삶이 어떠했을지는 더더욱 그렇다. 떠오르는 이미지라고는 독재 정권과 서구권에 비해 낙후된 경제, 문화에 대한 검열과 억압적인 사회 분위기 같은 것들이다. 하지만 이런 이미지가 당시 사람들의 구체적인 삶을 얼마나 잘 보여줄까?
이 책은 러시아어 동시통역사로 일한 일본인 작가 요네하라 마리가 어린 시절 체코 프라하에서 보낸 학창 시절을 회상하고, 중년이 되어 그때의 친구들을 다시 찾아간 이야기를 담은 에세이이다. 저자가 다닌 프라하 소비에트 학교는 여러 나라의 공산당 간부와 외교관, 혁명가들의 자녀가 다닌 일종의 국제학교로, 다양한 문화적 배경을 가진 학생들이 한데 모여 생활하던 곳이었다. 이 책은 그 시절의 기억과 수십 년 뒤의 재회를 교차시키고, 저자의 경험을 생생하게 묘사함으로써 우리가 쉽게 떠올리지 못했던 동구권 사회의 한 측면을 보여준다.
물론 저자가 체코에서 학교를 다녔다고 해서, 체코를 비롯한 동구권 사회의 면면을 정확히 전달해줄 수는 없을 것이다. 동구권에서도 나라마다 사회상이 달랐을 것이고, 저자도 어디까지나 일본인 유학생으로서 체코 사회 전체가 아니라 프라하의 특수한 교육 기관을 경험했을 뿐이다. 게다가 저자 자신도 깨닫게 되듯, 그 지역 주민들의 눈에는 소비에트 학교가 “있는 집” 자녀들이 다니던 특권층 학교로 비쳐지고 있었다. 또한 주변 인물들에 대해서나 역사적으로 중요한 사 건에 대해서나 저자는 솔직하게, 때로는 거침없이 논평하는데, 과연 복잡한 맥락이 그렇게 단순하게 정리될 수 있을지 의문이 들기도 한다. 이런 점에서 이 책이 당시 동구권 사람들의 삶을 충실하고 총체적으로 보여준다고 하기는 어렵다.
그럼에도 이 책이 흥미로운 이유는, 바로 그러한 위치성과 한계를 숨기지 않기 때문이다. 저자는 학창 시절의 기억을 생생하게 묘사하는 한편, 중년이 된 현재 시점에서 친구들을 방문하고 그 시절을 되돌아본다. 게다가 과거와 현재 수많은 사람들과 나눈 풍부한 대화에도 사건을 보는 다양한 관점들이 얽혀 있다. 그 과정에서 자신이 그 전에는 보지 못했던 것들과 오해했던 것들, 나중에야 이해하게 된 것들을 함께 보여준다. 그래서 서로 다른 두 시점의 저자, 그리고 때로는 충돌하기도 하는 타인들의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이 책은 깔끔하게 정리해 낸 참고서는 아닐지라도 여러 사람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그린 풍경화를 모아놓은 화보집 같이 느껴지기도 한다.

공산주의 사회의 평등과 다양성
책에 담긴 흥미로운 일화들은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공산주의 국가의 억압적인 일상”이라는 이미지를 흔들어놓는다. 공산주의 국가에서는 교육부터 획일적일 것 이라는 생각과 달리, 책의 초반부터 숙제가 있으면 방학이 아니라는 말로 신선한 충격을 준다. 소비에트 학교에서는 방학이나 휴일을 앞두고도 숙제는 전혀 없으며, 쉴 때는 쉬어야 한다는 원칙이 철저히 지켜졌다고 한다. 어떻게 보면 숙제가 있으면 방학이 아닌게 너무도 자연스러운 생각인데도, 이 대목은 지금의 한국 사회를 돌아보게 만든다. 한국에서는 왜 초중고의 방학을 “학기 중에 못 한 공부를 보충하는 기간”으로 인식하고, 그것을 당연하게 여겨왔을까? 저자는 일본에 돌아와서 시험이 선택지에서 답을 고르는 필기시험뿐이고, 구술시험도 논술 문제도 거의 없다는 점에도 놀란다. 수업에서는 선생님만 일방적으로 말하고, 학생들은 선생님의 말씀을 받아 적기만 한다는 점에도 놀란다. 이는 경쟁과 선발을 중심으로 조직된 동아시아 교육 풍경을 갑자기 낯설게 느껴지게 한다. 적어도 저자가 경험한 소비에트 학교의 교육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처럼 경직된 것만은 아니었다.
학교에서 있었던 학생들과 선생님들의 일상에도 이들이 어떤 사회를 꿈꾸고 있었고 어떤 가치를 소중히 여기고 있었는지가 잘 드러난다. 예컨대 학생들 사이에서 육체적 특징이나 약점을 가지고 별명을 짓는 일이 거의 없었다는 대목은 인상적이다. 누군가의 취약함을 웃음거리로 삼는 일이 자연스럽게 용인되지 않는 분위기였던 것이다. 또 학생의 재능을 발견하면 교사고 다른 학생이고 할 것 없이 진심으로 기뻐하며 축하해준다는 점도 그렇다. 누군가가 특별한 재능을 가졌다는 사실은, 경쟁에서 앞서나갈 무기라기보다 사회 전체에 좋은 일로 인식되었다고 한다.
1부의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친구 리차의 이야기는 평등의 이념이 당시 사람들에게 어떻게 공유되고 있었는지를 잘 보여준다, 그는 저자와 재회하는 시점에서 독일에서 의사로 일하고 있는데, 독일에서 의사라는 직업에 부여되는 특권적 위상을 오히려 당황스러워한다. 리차는 사회주의 체제의 체코에서는 적어도 직업에 따른 차별이 거의 없었다고 회상한다. 게다가 교육을 받는 일 역시 특정 계층만의 사다리가 아니라 비교적 평등하게 보장되는 것으로 여겨졌다고 한다. 그는 또한 모든 사람이 일상적으로 다양한 문화생활을 즐기던 체코 사회와, 돈의 가치가 모든 것을 압도하는 독일 사회를 대비해 말한다. 이러한 대비는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도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직업 위계와 경제 중심적 사고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한다.

애국심과 민족주의에 대하여
애국심에 대한 대목도 흥미롭다. 50여 개국에서 온 학생들이 모여 있는 소비에트 학교에서, 학생들은 각자의 출신 국가에 대한 남다른 애정을 보여줬다고 한다. 심지어 망명자의 자식으로 태어나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부모의 고국에 대해 자랑스럽게 이야기하는 아이들도 있다. 고국이 정치적으로 어렵거나 억압적인 상황에 놓여 있을수록 그 애틋한 감정은 더욱 커지기도 한다. 2부의 주인공인 친구 아냐는 학창 시절에는 누구보다 애국심이 넘쳐 보였는데도, 성인이 되어 재회했을 때는 21세기에 국적은 아무 의미도 없어질 것이라고 말한다. 이에 대해 저자는 모든 사람은 어떤 민족의 일원으로 태어나고, 각자에게 그 문화와 언어, 조국의 역사가 얽혀 있다고 대답한다. 그것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일은 불가능하며, 설령 가능하다 해도 그 사람은 몹시 얄팍한 인간이 될 것이라고 말한다.
국적과 민족이 한 사람의 정체성을 이룬다는 점은 긍정하면서도, 애국심과 민족주의가 차별과 배제로 이어지지 않는 게 가능할까? 여기서 어쩌면 바람직한 애국심과 민족주의는 국가에 대한 충성과 자기 민족의 우월성에 대한 믿음이라기보다는, 자신이 뿌리박고 있는 구체적인 삶의 방식에 대한 애정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 타인 역시 자기만의 삶의 방식 속에서 형성된 존재라는 점을 인정하고 그 삶에 대한 애정을 존중할 수 있다면 차별과 배제로 이어지지 않을지도 모른다. 책에서도 이런 차이가 드러나는 부분이 있다. 소비에트 학교에서도 친구들이 별것 아닌 것 가지고 조국 자랑을 늘어놓아도 그 심정을 이해해주는 분위기가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새로운 교장으로 소련 민족주의적인 성향을 띠는 사람이 부임한 후로는 사정이 달라진다. 그는 비소련 출신 학생들을 마치 속국 백성 다루듯 다뤘다. 이 책 3부의 주인공인 야스나는 소련과 마찰을 일으킨 유고슬라비아 출신이라는 이유로 교장에게 괴롭힘을 당하다 못해 자퇴하고 만다. 각자의 조국 자랑에 공감해주는 모습과, 특정 국가 출신이라는 이유만으로 차별하는 모습의 바탕에는 완전히 다른 종류의 애국심과 민족주의가 자리잡고 있었을 것이다.
공산주의 사회 안의 모순
이 교장 의 사례에서 나타나듯, 이 책이 사회주의 체제에 대한 마냥 긍정적인 묘사만으로 차 있는 것은 아니다. 평등을 지향하는 사회에서도 실질적인 불평등과 모순은 분명히 존재했음을 보여주기도 한다. 소비에트 학교에서는 레닌의 삶을 다루는 선전영화를 틀어주곤 했는데, 저자는 거기서 레닌의 생활 수준이 일반 시민과는 전혀 다르다는 점을 발견한다. 게다가 노동자와 농민의 해방을 역설한 레닌 자신이 정작 노동으로 생계를 꾸린 적은 없다는 사실도 깨닫는다. 이상과 현실의 간극, 혁명의 언어와 특권 사이의 간극이 학창 시절에도 눈에 띄었던 것이다.
이러한 모순은 도처에서 나타나는데, 아냐의 이야기는 그러한 모순을 집약적으로 보여준다. 아냐는 주변 사람들이 부담스러워할 만큼 혁명적 용어를 즐겨 사용했다. 체코 일반적인 존칭인 “판”은 남의 노동을 착취하며 살아가는 지배계급 인간을 뜻한다며, 스쿨버스 운전사에게조차 “동지”를 뜻하는 “소돌프”라고 부를 정도이다. 그러나 이렇게 공산주의 이념에 누구보다 충실한 듯 보이는 아냐는 사실 루마니아의 특권층 중의 특권층이었다. 저자가 아냐의 집을 방문했다가 그 규모에 입이 떡 벌어질 정도로 놀랄 정도이다. 그런데 아냐는 자신의 부모는 노동자들을 위한 일을 하고 있으며, 그들의 화려한 생활 역시 그에 필요해서라며 아무런 모순을 느끼지 못한다.
사실 저자 스스로도 학창 시절에는 깨닫지 못했지만, 중년이 되어 친구들을 찾으러 프라하를 다시 방문했을 때에야 소비에트 학교가 그 지역 주민들 사이에서는 특권층을 위한 학교로 받아들여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깜짝 놀란다. 지역 주민들은 그 학교를 “있는 집 자식들이 다니고 세련된 교사들이 근무하던 러시아 학교”로 기억한다. 여기서 “러시아 학교”라는 표현에는 불평등의 또 다른 층위가 겹쳐 있다. 사회주의 동맹 내에서도 종주국인 소련과 체코를 비롯한 다른 국가들 사이에는 분명한 위계가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평등과 국제주의를 표방하면서도, 민족적 위계는 여전히 살아 있었던 셈이다.

우리가 바라는 사회에 대한 희망을 엿보다
그럼에도 이 책은 희망을 준다. 여러 나라에서 모인 사람들이 서로의 처지와 삶의 방식에 대한 애정을 존중하면서 공존하는 사회, 직업에 따른 차별 자체를 부자연스럽게 여기는 사회, 누구나 일상에서 문화 생활을 누릴 수 있는 사회, 획일적인 교육이 아니라 학생 개개인의 가능성을 존중하는 교육을 제공하는 사회가 존재한 적이 있었다는 점을 보여줌으로써 말이다. 물론 그 사회는 완벽과는 거리가 멀었고, 온갖 모순과 위선도 함께 품고 있었다. 그러나 적어도 평등과 상호 존중이 옳다는 믿음, 사람을 재산과 직업으로 가르지 않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감각은 널리 공유되고 있었다.
국가적으로는 경제 성장만이, 개인에게는 돈을 벌어 부자가 되는 것만이 성공이라고 여겨지는 지금, 이 책은 다른 질문을 던지게 만든다. 어떤 사회가 좋은 사회인가, 무엇이 사람을 더 자유롭게 만드는가, 어떤 삶이 인간다운 삶인가. 이 책을 읽고 나면, 적어도 지금 우리가 추구하는 가치들을 너무 쉽게 자명한 것으로 받아들일 수는 없게 된다. 현대 한국에서의 삶은 어떤 것일까? 또 어떠해야 할까?
글: 강규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