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네시아 | 청년들은 왜 전국적이고 대규모의 항쟁에 나섰을까

인도네시아 | 청년들은 왜 전국적이고 대규모의 항쟁에 나섰을까

지난 몇 달 인도네시아 전역을 뒤흔든 민중의 저항은 단순 일시적인 소요사태가 아닌, 갈수록 심화되는 인도네시아 사회의 모순에 대한 아래로부터의 전면적 저항운동이었다.

2025년 11월 14일

[동아시아]인도네시아불평등, 동아시아, 대중시위, 인도네시아, 자카르타, 대중운동, 독재

지난 8월 25일,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서 시작된 반정부 시위가 전국적으로 확산되며 일주일 넘게 이어졌다. 해당 시위는 네팔, 방글라데시, 동티모르 등 아시아 다른 국가들에서 있던 다른 여러 저항운동과 맞물려 많은 주목을 받았다. 특히 X(구 트위터)를 위시한 SNS에서는 시위 참여자들에 배달음식을 기부하기 위한 모금을 진행하는 등 많은 화제를 불러모았다. 그로부터 한 달이 지난 지금, 우리는 이 운동을 되돌아 보며 그 의미를 묻고자 한다. 인도네시아 민중은 무엇 때문에 거리로 나섰으며, 그들의 요구는 과연 이루어졌을까?

부패와 불평등에 맞서 목소리를 내다

항쟁의 시작은 인도네시아 국회의원들이 주택수당 명목으로 매월 5,000만 루피아(약 430만원)를 지급받는다는 사실이 현지 언론을 통해 보도되면서였다. 이는 최저임금 기준으로 환산한 자카르타 시민의 월 최저소득 540만 루피아의 10배 가까이 되는 금액이다. 여기에 식사수당과 교통수당 등 추가적으로 지급되는 수당을 모두 더하면 인도네시아 국회의원들은 한달에 1억 루피아 가까이 되는 돈을 지불받게 된다. 여기에 국회가 해당 수당 인상안을 통과시키자, 대다수 평범한 인도네시아 시민들은 이에 분노할 수밖에 없던 것이다. [📢인도네시아 | 군부 권력에 맞선 다크 인도네시아 운동의 도전]

인도네시아 민중들이 해당 수당 인상안에 이토록 격하게 반응했던 것은, 국회의원들의 풍요로운 삶과는 대조되게 자신들의 생계문제가 계속 악화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취임 이후 ‘황금 인도네시아’라는 구호 아래 인도네시아의 경제적 번영을 약속한 프라보워 수비안토 정권의 호언장담과는 다르게, 평범한 인도네시아인들의 삶은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공식 빈곤율이 소폭 감소하고 명목임금 역시 소폭 상승했지만, 물가인상과 주거 불안정 심화, 재정삭감으로 인한 공공서비스 질 악화 때문에 삶의 질은 오히려 더 낮아졌다.

고용 문제와 연관된 노동자들의 고충 역시 심각했다. 2025년 상반기에만 제조업과 소매업 등 인도네시아 경제의 핵심을 차지하는 부문에서 무려 4만여 명의 노동자가 해고되었다. 여기에 재산세 인상 등이 더해지며 평범한 인도네시아 서민들의 삶이 더욱 힘들어지고 있다는 불만이 가중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국회의원들이 이미 심화된 불평등을 더 벌리는 결정을 내렸으니, 분노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이상한 일이었을 것이다. 멜버른 대학교 아시아연구소의 베디 하디스 소장은 경제악화와 공공지출 삭감 등과 관련한 인도네시아인들의 분노에 국회가 국민과 동떨어져 있다는 불만이 폭발한 게 이번 시위의 원인이었다고 지적한다.

노동자와 학생이 만나다

이후 시위는 첫 발원지였던 자카르타를 넘어 전국적으로 확산됐다. 노동자 계급의 합류로 학생 중심이던 시위의 인적 구성 역시 확대됐다. 시위대의 요구사항 역시 단순 국회의원 수당 철폐를 넘어 최저임금 인상과 해고 중단 등 친노동 의제들이 추가되며 다변화했다. 시위대는 정부청사를 포위하고 주요 도로를 점거하며 도심 기능을 마비시켰고, 운동의 열기는 갈수록 고조됐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시위대를 더욱 격앙시킨 사건이 8월 28일 발생했다. 경찰 장갑차가 시위대로 돌진해 오토바이 배달기사 아판 쿠르니아완을 들이받고 깔아뭉갠 것이다. 현장에서 크게 다친 쿠르니아완은 이후 병원으로 이송되었지만 머지 않아 숨졌다.

쿠르니아완의 사망 소식은 SNS를 중심으로 인도네시아 전역으로 퍼져나가며 사람들을 분노케 했다. 노동자들의 비중이 갈수록 커지던 시위대 내에서 동료 배달 노동자들의 역할 역시 더욱 커졌다. 다음 날 자카르타에서 진행된 쿠르니아완을 위한 시민 추모제에는 수천여 명의 배달 노동자들이 오토바이를 몰고 참석해 동료의 마지막 가는 길을 지켰다. 경찰은 공식 사과성명을 발표했지만 시위대의 분노를 잠재우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인도네시아 전국에서 경찰서와 관공서를 대상으로 한 폭력사태가 발생했다. 남술라웨시주 마카사르시에서는 시위대가 시의회에 방화해 직원 넷이 숨졌고, 자바섬 수라바야시에서는 시위대가 경찰 저지선을 뚫고 시정부청사 건물에 난입하고 공무원들의 차량을 불태웠다. [📢다크 인도네시아 | 기득권에 맞선 청년들의 항쟁, 과거와 현재를 잇는 저항]

상황이 심각하게 돌아가자, 정치인들은 저자세로 나오기 시작했다. 사태의 원인제공을 한 국회는 대국민 사과성명과 함께 국회의원 수당 철회계획을 발표했다. 수비안토 대통령 역시 대통령궁에 여야 인사들을 결집해 면담을 가진 후 정책개선과 경찰폭력 방지, 학생 및 시위대 구성원들과의 대화를 약속했다.

동시에 시위대의 “폭력행위”를 “테러와 반역”이라 부르며 고압적인 태도를 유지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이에 시위대의 핵심 축이었던 학생조직 전인도네시아학생집행위원회가 추가적인 시위를 예고하기도 했지만, 이후 시위는 전반적으로 빠른 속도로 사그라들며 진정국면에 다다랐다. 수비안토 역시 시위대 대응 때문에 취소했던 중국 열병식 참석일정을 계획대로 수행하며 상황이 안정화되었다는 정치적 신호를 보냈다. 그러나 불평등과 부정부패, 권위주의 등 시위에 불을 지폈던 인도네시아 사회의 핵심모순들은 여전하기 때문에, 언제 어떤 정세적 변화가 찾아올지는 알 수 없다.

옛 투쟁의 계승

인도네시아 민중의 항쟁은 일시적으로 튀어나온 것이 아니다. 이전 인도네시아 사회운동 전통의 맥락 위에서 발생했다. 과거 인도네시아는 네덜란드 식민지 시절부터 여러 사회운동이 매우 활발했고, 독립 이후에는 공산당계 사회운동 세력의 정국주도가 매우 뚜렷했다. 그러나 1965년 수하르토가 이끄는 극우반공 군부세력이 쿠데타로 집권하며 이들은 대거 학살됐다. 최대 100만여 명의 인원이 이 당시 인도네시아에서 공산주의자로 몰려 학살당한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는 한국전쟁 전후 이승만 정권의 학살과 베트남 전쟁 당시 남베트남과 미군의 학살과 함께 냉전기에 이루어진 가장 큰 규모의 반공주의 학살로 평가된다.

끔찍한 비극이 사회적인 트라우마를 낳았지만, 수하르토 정권 출범 후에도 인도네시아 민중의 저항은 멈추지 않았다. 대학생들은 허울뿐인 선거에 맞서 백지투표 캠페인을 벌였고, 정권의 최대 후원자 중 하나였던 일본의 다나카 가구에이 총리의 방문에 반대시위를 벌였다. 예술가들은 인도네시아 새예술동맹을 결성해 반정부 성향 예술가들의 활동을 지원했고, 작게나마 성소수자운동의 성장도 경험했다.

아래로부터의 운동의 지속은 1998년 아시아 경제금융위기의 여파에 따른 대규모 대중시위에 의해 수하르토가 사임하고 제도적 민주화가 이루어지며 소기의 성과를 이뤘다. 민주화 이후 1년 동안의 기간에만 수백여 개의 노동조합과 수천여 개의 시민단체들이 결성됐으며, 이들은 각자의 위치에서 인도네시아 사회가 보다 민주적이고 평등한 방향으로 발전하는 데에 기여했다. 그러나 동시에 자신들을 대변해 줄 주요 정치세력의 존재 없이 과거 기득권 체제 출신 일부 ‘리버럴’ 정치세력과 주류사회에 편입한 일부 사회운동 출신 정치인들과의 접촉을 통해서만 정치사회적 변화를 가져오려는 한계 역시 존재했다.

2014년 조코 위도도 정부의 출범은 인도네시아 사회운동의 역사에 있어 새로운 이정표가 됐다. 민주화 이후 군부나 기성 정치 엘리트 출신이 아닌 첫 순수 민간인 대통령이었던 그는, 사회운동 진영을 포함한 많은 인도네시아 사람들의 기대를 받으며 출범했다. 그러나 이후 그는 감세와 규제완화로 대표되는 대기업과 해외자본 친화적 경제정책을 추진했다. 여기에 군부와 이슬람주의 세력 등 인도네시아 기득권과 손을 잡고 타협적인 정치를 펼치며 원래의 친서민 개혁적인 면모를 대부분 포기했다. 이러한 우경화는 2019년 두 번째 임기 시작 직후 더욱 가속화되었는데, 보수 이슬람 신학자 출신 부통령의 주도하에 ‘신성모독’을 빌미로 시민권을 침해하고 공적 장소에서 임신중절 및 피임 홍보를 제한하며 혼전성교를 금지하는 수구반동적인 법안들을 통과시켜 논란이 되었다. 여기에 2020년 통과된, ‘해외투자 촉진’을 통한 ‘일자리 창출’을 명분으로 근로시간 연장, 최저임금 지급 의무화 폐지, 계약직 고용 기간 연장, 파견노동 사용 범위 확대, 해고 제한 요건 완화, 퇴직금 삭감 등 각종 반노동 정치들을 정당화하는 ‘옴니버스 법’ 역시 논란이 됐는데, 이러한 우경화 내지 극우화는 학생과 노동자를 포함한 많은 이들의 격렬한 저항을 불러왔다. 해당 법률들에 저항하는 과정에서 수백여 명의 사상자가 나오고 수천여 명이 체포됐다. 📢[우경화에 맞선 인도네시아 사회운동의 투쟁]

인도네시아 민중의 저항은 2024년 위도도 정부의 후임인 수비안토 정권의 출범 이후 더욱 가속화됐다. 사실 수비안토는 과거 군부 독재자 수하르토의 사위로, 군사정권 치하에서 특수부대 사령관 지위에 올라 민주화 운동을 탄압하고 동티모르와 서파푸아 독립운동을 잔혹하게 진압한 장본인이다. 그는 민주화 이후에도 군부, 재벌, 이슬람주의 세력 등 인도네시아 기득권층과의 친분을 바탕으로 정재계 양쪽에서 막대한 권력을 누렸으며, 2014년 대선에서는 위도도에 이어 2위를 차지했다. 이랬던 그가 위도도 2기 내각에서는 정권의 우경화 드라이브에 힘입어 국방부 장관에 임명되고, 이후 위도도 대통령의 아들을 러닝메이트로 해 대통령에 당선됐다.

예상대로 수비안토 정권은 교육을 포함한 공공서비스 예산을 삭감하고 현역 군인의 공직과 기업임원 겸임을 허용하는 등 권위적이고 기득권 친화적인 정책을 펼첬고, 이는 학생과 노동자 중심의 대중적 저항운동인 ‘다크 인도네시아’ 운동의 씨앗이 됐다.

민중의 의지 이을 정치세력화가 필요하다

지난 몇 달 인도네시아 전역을 뒤흔든 민중의 저항은 단순 일시적인 소요사태가 아닌, 갈수록 심화되는 인도네시아 사회의 모순에 대한 아래로부터의 전면적 저항운동이라는 관점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저항의 목소리가 단순 특정 사안에 대한 권력층의 일시적 양보를 이끌어내는 수준에 머문다면, 이것이 진정한 변화라고 말하긴 어려울 것이다. 민중의 의지를 이어받아 제도적으로 구체화해 기성세력에 대한 변혁적 대안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정치세력화가 중요한 이유이다.

안타깝게도 현재 인도네시아 사회에서 이러한 정치세력화의 성과는 다소 미비한 상황이다. 전통적으로 사회운동 내에서 다양한 목소리를 하나로 잇는 역할을 맡았던 노동운동의 경우, 민주노총이라는 강력한 구심점이 존재하는 한국과는 다르게 수십여 개의 노총으로 분리되어 단일한 하나의 목소리를 내기 어렵다. 올해 노동절 행사에서 주요 노총 지도부가 수비안토 정부 인사들을 공식 초청한 사례에서 알 수 있듯, 노조 중앙간부들이 정부에 타협적인 태도를 유지하는 것 역시 장애물이다. 정치 영역에서는 노동당 등 정당들이 나름의 목소리를 내고 있지만, 아직은 대중의 신임을 얻기에는 그 세력이 미약하다. 변화를 요구하는 아래로부터의 분명한 목소리와는 별개로, 인도네시아 사회운동 세력이 인도네시아 전체의 변화를 견인하는 원동력이 되려면 아직 갈 길이 먼 이유이다.

글 : 김원 (동아시아 사회운동 뉴스레터 편집위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