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 대사관까지 “천개의 배를 지지하는 3만보의 걸음”

이스라엘 대사관까지 “천개의 배를 지지하는 3만보의 걸음”

해초의 안전과 팔레스타인 해방을 바라는 마음으로, 한예종 학생들이 학교에서 출발해 이스라엘 대사관까지 세 시간을 걸었다. 행진을 준비한 이들의 절실한 목소리를 전한다.

2025년 10월 15일

[읽을거리]반전평화팔레스타인, 반전평화, 이스라엘, 학생운동, 사회운동

해초 활동가의 석방에 기뻐하며 무사 귀환을 바라는 마음으로, 그리고 무엇보다 가자의 ‘휴전’이 평화협정이라는 명목 하에 미국과 이스라엘의 점령을 합법화 하는 일을 막아야 한다는 긴급함으로 우리는 ‘한예종에서 이스라엘 대사관까지’ 걸으며 행진했다. 각자 할 수 있는 만큼 걷고, 새로 합류하는 사람들과 서로의 걸음을 이어받는 일. 장장 3시간에 걸친 도보 행진의 의미는 무엇일까. 행진을 준비한 기획팀 세 명의 후기를 통해 행진의 시간을 기억하고, 앞으로의 행진들을 상기하고자 한다.

행진을 준비하며 직접 팻말을 만들고 있는 학생들
행진을 준비하며 직접 팻말을 만들고 있는 학생들

불안을 힘으로 만드는 걸음

시작은 아현씨(해초)였다. 함께 학교를 다니던 동기였다. 그는 종종 “제 소명은 학교 밖에 있는 것 같아요.”라고 했다고 한다. 나는 “아현씨한테 바다향이 난다”며 우스게 소리를 건네곤 했다. 그랬던 해초가 나포되었다. 나는 돌연 불안해졌다. “돌아오지 못하면 어떡하지?” “설마 그럴 리 없어.” “이제 휴전 얘기가 나오고 있으니 괜찮을 거야.” “그래도사고가 날 수도 있잖아.” 이런 생각들. 두려움이었던 것 같다. 아니, 걱정이었을까. 감당할 수 없는 것이라고 여겼던 걸까. 아무것도 하지 않았던 죄책감이었을까. 뭐라도 해야 했다. 움직여야 했다. 걷기로 했다.

평화든 무엇이든 단 한 번에 이루어지는 것은 없다. 모든 것들이 다방면에서 힘을 채우는 것이고 그것이 어느 순간 왈칵 흘러 넘쳐 변화하는 것이다. 마치 해초의 항해처럼. 그래서 걷기로 했다.

왈칵 넘친다는 것은 어떤 믿음이었다. 믿음은 곧잘 흔들린다. 피켓을 들고 노래를 부르며 걸었던 3시간 정도의 시간 동안 나는 저 밑바닥에 떨어졌다 가도 간신히 올라오기를 반복했다. 밑바닥을 볼 때면, 함께 하고 있는 동료들 마저도 지워진다. 나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내가 걷고 있다. 이스라엘 대사관 앞으로 가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스쳐 지나간다. 우리의 힘은 이러한 흔들림이 빈번하게 일어나는 동안 채워진다. 나는 스스로에게 되뇌인다. 한 걸음 한 걸음 꾹꾹 누르는 것이 분명 뭔가를 발생시킬 것이다. 그렇게 믿는다.

글 : 민철

기억에서 연대로

내가 코흘리개 초등학교 시절, 제일 좋아하던 시간은 학부모 회의가 열리는 날이었다. 마을 이모 삼촌들은 모두 학교로 갔고, 그날 나는 언니·오빠들과 늦게까지 놀 수 있었다. 아현이 언니도 그중 한 명이었다. 내가 초1 때 바라보던 6학년 언니들은 크고 멋지고 든든하고 재밌었다. 한예종에 와서 아현이언니를 다시 만나고 요즘 관심 가지고 있는 일들에 대해 이야기했다. 몇 년 동안 못 본 사이 언니는 선장이 되어 있었다. 배를 타고 어디에 가고 싶냐는 내 질문에 언니는 팔레스타인에 가고 싶다고 했다.

방학이 끝나고 언니를 만났을 때 팔레스타인에 가게 되었다고 말했고 나는 아무 일 없을 것이고, 없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전부터 팔레스타인 시위에 함께하기도 했지만, 이번엔 느낌이 달랐던 것 같다. ‘한국’은 가자와 그곳에서 일어나는 집단학살에 어떤 태도를 취할 것인가? 하는 큰 질문과 동시에 책임감을 느꼈다.

우리는 지금 여기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생각했고 친구의 아이디어로 한예종에서 이스라엘 대사관까지 함께 걷기로 했다. 한예종에서 이스라엘 대사관까지의 길은 멀기도 했고 가깝기도 했다. 많은 사람이 가자지구로 향했던 길에 대해 생각했다. 이틀 전에 기획한 작은 행진에 20여 명의 친구들이 함께했고, 좁은 길을 헤쳐 나가며 열심히 걸었다. 함께해준 사람들 덕에 힘을 내어 “팔레스타인 해방”을 외치면서 걸어갈 수 있었다.

글 : 지혜

도심을 행진 중인 학생들
도심을 행진 중인 학생들

바람으로 이어지다

해초의 배가 나포되자마자 사람들이 모였다. 우리가 있는 한예종에서부터 이스라엘 대사관까지 걷자고 했다. 가자로 향하는 배들의 움직임처럼, 먼 거리를 천천히 걸어보자고 했다. 배들을 생각하며 걸어가는 우리의 발걸음에서 바람이 인다면, 그것이 다시 배들을 밀어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게 가자로 향하는 흐름을 땅에서도 이어 나가고 싶었다.

걷기 전에는 우리가 3시간을 정말로 걷게 될 줄 몰랐다. 먼 길을 걷게 될 거라고 예상했지만, 막상 걷는 동안에는 멀거나 가깝다는 거리감이 사라지고 오직 걷고 있는 그 움직임만을 느꼈다. 신기한 일이었다. 한 시간 반 정도 걸었을 때 신설동에서 잠깐 멈춰 화장실을 다녀오고 물과 간식을 나눠 먹었다. 걸을만 하다고, 거뜬하다고 말하는 동안 사람들이 행진이 어디만큼 왔는지 물어보았다. 우리의 동선에 맞춰 새로 합류하겠다는 연락이 왔다. 다시 짐을 챙겨 사람들과 느슨하게 열을 맞춰 걷기 시작했다. 우리는 걷는 내내 ‘리베 팔레스타인’과 소스윗이 부른 ‘해방의 땅에서 만나’ 라는 두 노래를 배웠는데, 팔레스타인 구호는 어떤 때에 노래 같고, 노래는 어떤 때에 구호 같았다. 구호와 노래 모두 거리에서 일어나지 않는 일이므로 다같이 목소리를 모으는 순간에 홀로 잠시 놀랐다. 일어나는 일들 중에서 예측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알지 못했고 믿지도 않았던 일들이 벌어진다. 사람들의 목소리 사이로 도시가 찢어지는 것 같았다. 그 틈으로 다른 것들, 다른 믿음들이 불쑥 솟구친다고 생각했다.

동대문 평화 시장을 따라 쭉 걷는데 오토바이를 타고 달리던 이주노동자가 손을 흔들었다. 우리가 “프리 팔레스타인!” 을 외치자 그는 다시 손을 흔들었다. 오토바이는 붕 하고 앞서 나갔고, 그 모습이 마치 행진의 선두 같았다. 오토바이가 달리면서 다른 행진의 경로를 내고 있다. 우리의 행진은 아주 길어진다. 앞으로 뒤로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다. 우리가 처음 지도에 그어낸 파란색 선을 한참이나 초과하는 행진의 동선을 생각하며 구호를 외쳤다. 이때에 여기와 저기의 땅은 얼마나 가까운가.

청계천 부근에 다다르자 또다시 사람들이 합류했다. 대사관이 가까워질 즈음 우리는 구호를 부러 더 크게 외쳤다. 신호등 앞을 가로막은 경찰의 뒤로 대사관 건물이 보였다. 그 앞으로 경찰들이 빼곡했다. 저 멀리에서 사복 경찰이 헐레벌떡 뛰어오는 것이 보였다. 여기서 이러시면 안된다고. 구호를 외치지 말라고 만류했다. 우리는 “우리가 왜 길에서 하고 싶은 말을 못해요? 저희는 저희가 하고 싶은 말을 하겠습니다”라고 답하고 구호를 다시 외쳤다. 대사관 맞은 편 청계 광장에 빙 둘러서서 10월 11일 제주 집회에서 발표된 성명문을 함께 읽었다. 문득 바람이 크게 불었다. 도착해야 하는 곳에 잘 도착했다고 느꼈다. 혼자였으면 엄두가 나지 않았을 거라고. 이만큼이나 걷지 못했을 거라는 말에 끄덕거리며, 우리가 어디까지 더 걸을 수 있을지 생각했다. 무엇으로도 멈출 수 없는 목소리들에 대해 생각했다.

글: 나민

행진을 준비하던 때에, “걷는 일이 무슨 소용이 있냐”는 질문을 받았다. 여기서 행진을 한다고 거기의 전쟁이 멈춰지는 것이 아닌데, 너네가 뭘 수 있냐고. 이 질문이 가정하고 기대하는 세계란, 이미 모든 것이 정해져 있고, 미세한 것과 거대한 것이 분할되어 있으며, 바꿀 수 있는 것과 바꿀 수 없는 것이 구분된 곳이다. 힘의 역학은 이미 지정되고 고정된 질서가 확립된 그곳에서, 한 사람의 존재는 그저 가소로운 것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세계에 대한 이런 직관이 여전히 유효한가? 비아냥거리는 이들의 의도처럼, 세계와 사람이 맞닿는 순간 우리가 알게 되는 것은 그런 종류의 ‘명징함’ 뿐일까? 그래서 우리는 끝내 가소로운 것이 되어, 당면하는 모든 위기와 폭력의 광경에 아무런 책임도 질 수 없는 목숨으로 남을 뿐일까? 세계의 한 귀퉁이에 구겨져서 현상을 유지하기 위한 방편에 골몰하면 되는 일일까?


뭘 할 수 있냐고, 우리야말로 궁금하다. 이 질문이 어디까지 갈 수 있고 얼마나 넓어질 수 있는지 묻고 싶다. 질문을 던지며 우리가 깨닫는 것은 세계와 사람을 분리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당연한 사실이다. 사람이 사람에게 연루되는 방식이 곧 세계의 형상이라는 점에서, 뭘 할 수 있겠냐는 질문은 세계의 행방을 걸고 던져진다. 사람들의 움직임 속에서 세계가 달라지지 않을 도리가 없음을 인정해야 한다. 뭘 할 수 있냐고, 이것은 윽박지르는 이들의 기대와 달리 우리의 입을 틀어막을 수 없는 질문이다.


사람들이 배를 타고 가자로 향한다. 이는 국가 간의 안보를 협상하기 위해서도 아니고, 압제와 침탈을 야기하는 체제에 기여하기 위해서도 아니다. 다국적 기업의 이윤을 위한 과적된 상품 따위도 없다. 전쟁도 자본도 아닌 것이 국경에 개입한다. 사람들이 사람들에게 모여든다. 국가를 기준으로 배치되고 분할되온 관계는 재편되기 시작한다. 서로 전혀 몰랐던 이들이 만난다. 우리가 맺는 것은 권력을 보호하기 위한 협정이 아니라 권력을 지탱하는 체제를 거부하고 초과하는 관계. 새로운 종류의 우정이다. 이 우정이 질문한다. 우리가 뭘 할 수 있겠냐고.

대학가 곳곳에 부착된 10월 18일<이스라엘의 가자 집단학살 2년 규탄 공동행동> 포스터
대학가 곳곳에 부착된 10월 18일<이스라엘의 가자 집단학살 2년 규탄 공동행동> 포스터


이번 주 토요일인 10/18일,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집단학살을 규탄하기 위한 전국 행동이 서울 보신각, 전주 풍남문광장, 울산 롯데호텔 앞에서 열린다. 모여서 함께 걷자. 휴전 협정은 결코 팔레스타인의 해방을 의미하지 않는다. 팔레스타인의 평화는 미국과 이스라엘에 의한 점령을 단호하게 거부할 때에 가능해진다. 해상 경로를 통해 가자로 향하는 배들이 일러주었듯이, 바다는 장벽이 아니라 길이다. 이때에 여기의 땅과 저기의 땅은 단단히 연결되어 있다. 학살을 자행하는 자본주의와 군사 산업의 체제에 연루되지 않은 나라는 없다. 배들이 돛을 펼치며 바람으로 나아갈 때, 우리의 걸음이 바람을 일으켜 배들을 민다. 그러니 자본이 아니라 바람으로 국경이 재편되는 시간에 합류하자. 휴전을 빌미로 점령을 정당화하려는 제국주의에 맞서 진정한 해방과 평화로 나아가자. 세계를 유지하던 기존의 질서가 빠그라지는 소리가 들린다. 우리는 우리를 죄짓게 하고 죽게 만드는 그 어떤 질서에도 수긍하지 않을 것이다. 유보하지도, 받아들이지도, 패배하지도 않을 것이다.

정리 : 나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