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크 인도네시아 | 기득권에 맞선 청년들의 항쟁, 과거와 현재를 잇는 저항
2025년 7월 11일
다크 인도네시아
2025년 전반기, 세계 곳곳에서는 자국 정부에 대항하는 대중적인 투쟁들이 이어졌다. 한국에서는 지난 12월 3일 계엄 이후 윤석열 정권을 끌어내리기 위한 길거리 투쟁이 4월 4일 윤석열의 탄핵으로 결실을 맺었다. 미국에서는 미등록 이민자 강제추방을 포함한 트럼프 2기 행정부의 주요 정책들에 반대하는 시위가 전국 곳곳에서 열렸다. 이 외에도 몽골, 파키스탄, 케냐, 세르비아, 슬로바키아 등 세계 각국에서 자국 정부의 권위주의와 부정부패에 반대하는 민중들의 항쟁이 이어지고 있다.
그 중에서도 2월부터 인도네시아에서 진행중인 ‘다크 인도네시아’ 시위는 그 규모와 내용 모두에서 특히 주목할 만하다. 작년 10월부터 집권중인 프라보워 수비안토 정권의 재정정책에 대한 불만에서 시작된 시위는 이후 수비안토 정부의 정책 전반, 더 나아가 현재 인도네시아 사회의 다양한 모순을 지적하는 다원화된 항쟁으로 확장되었다. 이러한 인도네시아인들의 투쟁은 어떠한 맥락에서 진행되었으며, 이는 현 인도네시아 시민사회에 어떠한 의의를 가지고 있는가?
‘다크 인도네시아(Indonesia Gelap)’라는 시위 이름은 인도네시아 정부에서 내세우는 국가 선진화 프로젝트인 ‘황금 인도네시아(Indonesia Emas)’에 대한 대응으로 제시됐다. 사람들은 이와 같은 정부의 공식 선전이 불평등과 청년실업으로 대표되는 인도네시아의 현실과 부합하지 않는다며 비판했고, 이에 대항하여 트위터에서 사용된 해시태그가 바로 다크 인도네시아다. 하루만에 관련 트윗이 무려 1400만 개가 증가하는 등 폭발적인 관심을 모았다.
이처럼 다크 인도네시아는 정부가 제시하는 휘황찬란한 인도네시아상에 대비되는 부조리한 인도네시아의 현실을 지적한다. 온라인 청년층을 중심으로 일종의 밈처럼 적극 활용되었다. 말하자면 과거 박근혜 정권 당시 한국에서 ‘헬조선’이라는 표현이 한국 사회의 부조리함을 비판하는 유행어로 사용되었던 맥락과 비슷한 셈이다.

교육이 무너지면 희망도 사라진다
투쟁은 대학생들의 시위와 함께 본격화됐다. 2월, 수비안토 정부가 발표한 ‘예산 효율화 정책’이 교육, 건강 및 자연 재해 완화 등 민중의 삶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끼치는 부문에서 무려 306조 7천억 루피아(한화 28조원)의 예산을 삭감한다는 점이 드러났다. 특히 교육부문의 타격이 심했는데, 초등학교와 중고등학교 예산 약 7천억 원 정도가 삭감되고 대학생들의 장학금 지급에도 타격이 예상됐다.
이에 각 대학 학생회를 중심으로 자카르타, 반둥, 발리 등 인도네시아 전국적으로 “교육이 무너지면 희망도 사라진다”, “절약은 부의 뿌리이지만, 효율은 어리석음의 뿌리다”, “다크 인도네시아 교육 비상사태”와 같은 구호를 내걸고 시위가 벌어졌는데, 이것이 바로 다크 인도네시아 투쟁의 시작이다. 이후 노조와 농민단체, 여성단체, 성소수자 인권단체 등이 시위에 참가하며 투쟁은 재정문제나 교육문제를 넘어 빈공철폐나 과거사 청산 미비와 같은, 수비안토 정권의 광범위한 문제들을 규탄하는 방향으로 확산됐다.
이런 과정에서 다크 인도네시아 투쟁이 더욱 급진화되는 계기가 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바로 3월 인도네시아 정부가 현역 군인이 정부 부처와 공공기관은 물론 민간 기업에서 일하는 것을 허용하는 내용의 군법 개정안을 논의하고 있다는 이야기가 나온 것이다. 수하트로 치하에서 1968년부터 1998년까지 30년 간 군사독재를 경험했던 인도네시아인들에게 이는 과거 독재 시대로의 회귀나 다름없게 여겨졌고, 이에 시민들의 저항의 목소리는 더욱 거세졌다. 22일에는 국회를 포함한 주요 정부 기관 앞에서 시위대가 화염병을 던지며 경찰과 격렬히 충돌하기도 했는데, 이에 인도네시아 주식시장이 7% 폭락하는 등 사회 불안이 가속화됐다.
달을 넘긴 이후에도 인도네시아 시민사회의 저항은 계속됐다. 특히 두 차례에 걸쳐 진행된 ‘피크닉 멜라완(Piknik Melawan)’에 주목할 만하다. 4월 7일 시위대는 국회 앞에 텐트를 치고 마치 ‘피크닉’을 온 것과 같은 우호적인 분위기에서 정치문제에 대해 토론을 하며 비폭력적인 방식의 저항을 이어 나갔는데, 이는 이틀 만에 경찰의 강제진압으로 종료됐다. 시위대는 일주일 후인 14일 다시 텐트를 치고 시위를 이어 나가고자 했지만 얼마 안 가 다시 경찰에게 진압됐다. 이들 중 일부는 제대로 된 심문절차 없이 경찰들에게 임의로 구금되어 논란을 빚기도 했다.
비록 오래 가지 못하고 경찰에 의해 빠른 속도로 진압됐지만, 피크닉 멜라완은 ‘캠핑형 시위’라는 새로운 대중적 투쟁방식을 도입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특히 시위 현장에서 여성 활동가들의 활발한 참여가 인상적이었다.

팔레스타인과의 연결
저항의 목소리는 국내문제를 넘어 국제문제로까지 이어졌다. 4월 20일 미 대사관 앞에서 벌어진 팔레스타인 연대집회가 대표적이다. 인도네시아청년연맹(Indonesian Youth Alliance for Palestine)과 이슬람학생연맹(AMMI)이 주도한 이 시위에는 다크 인도네시아 운동에 참여한 청년학생 활동가들도 여럿 참여했는데, 이들은 미대사관을 시작으로 “팔레스타인에 해방을” “집단학살을 중단하라”와 같은 전통적인 팔레스타인 연대운동의 구호를 외치며 자카르타 전역을 행진했다.
이슬람교도가 대부분인 인도네시아에서 팔레스타인 지지 목소리 자체가 그리 놀라울 건 없지만, 이는 다크 인도네시아 투쟁이 한참 진행중인 당시 정치사회적 맥락과 맞물려 더욱 주목받았다. 수비안토 정권의 탄압을 경험 중이던 인도네시아 청년학생들은 이스라엘에 억압당하고 있는 팔레스타인에 공감하며, 이들의 투쟁에 공감하고 지지하는 방식으로 국제연대의 정신을 실천한 것이다.
5월 1일 노동절 집회는 다크 인도네시아 운동의 절정이었다. 인도네시아 주요 4대 노총이 함께 진행한 이날 자카르타 국가기념탑 광장에서 열린 집회에는 20만 여 명의 노동자와 시민들이 참가했는데, 이는 민주화 이후 가장 큰 규모였다.
이들 전국 최저임금 도입, 노동법 개선, 민영화 반대 등 전통적인 노동운동 의제들은 물론, 교육예산삭감 반대와 군법개정 반대 등 기존 다크 인도네시아 운동의 요구 역시 함께 주장했는데, 이는 전통적 노동운동과 신생 청년학생운동의 만남이라는 측면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다만 노총 지도부가 수비안토 집행부를 집회에 공식 초청한 일이 논란이 되기도 했는데, 인도네시아 좌파 일각에서는 이를 기성 노동운동이 여전히 타협주의적인 면모를 떨쳐내지 못한 결과라고 비판했다.

과거가 현재를 구할 수 있는가
앞서 살펴보았듯, ‘다크 인도네시아’ 투쟁의 밑바탕에는 인도네시아 현대사, 특히 수하르토 군사독재 시기에 대한 집단적 기억이 깊게 자리메김하고 있다. 사람들은 수비안토 정부의 국가정책이 1998년 수하르토 실각 이후 위태롭게나마 유지되던 민주적 합의를 되돌리는 시도로 인식하고 있으며, 나아가 민주화 이후에도 기득권을 유지해 온 정·재계 엘리트들의 권력을 더욱 공고히 할 것이라는 점에서 깊은 우려를 표하고 있다. 여기에는 민주화 이후 인도네시아 사회운동의 성공과 실패라는 또 다른 맥락이 자리매김하고 있다.
사실 인도네시아는 오랫동안 여러 급진적 사회운동이 굉장히 활발히 이루어졌던 곳이다. 특히 인도네시아 공산당과 그 유관 사회운동조직의 경우 마르크스주의를 기반으로 인도네시아 민중의 눈높 이에 맞춘 여러 선전 및 조직활동으로 많은 대중들의 지지를 받았다. 이들은 독립 후의 제1회 총선에서 PKI는 총 257석 가운데 39석을 획득하고 인도네시아 인구의 절반을 차지하는 자바 지역에서는 제1당의 위치에 오르며 완전한 정치적 주류세력으로 자리매김했고, 수카르노가 이끄는 민족주의 성향 인도네시아국민당이나 이슬람 세력과 같은 타 정치세력들과 때로는 협력하고 때로는 경쟁하며 자신들의 확고한 사회적 기반을 유지했다. 그러나 1966년 수하르토가 이끄는 극우반공 군부세력이 쿠데타로 집권해 최소 50만에서 최대 100만 명을 학살한 이후, 이들을 포함한 인도네시아 사회운동의 세력은 급속히 악화되었다. 이는 이후 수십 년 동안 인도네시아에서 좌파 세력이 공개적으로 활동할 수 없는 기나긴 침묵의 시기를 열었다.
1997년 IMF 경제위기로 인한 수하르토 정부의 실각과 2004년 최초의 직선제 대통령 선출 이후, 인도네시아 사회운동은 수십 년 만에 반등의 기회를 갖게 되었다. 민주화 이후 1년 동안의 기간에만 수백여 개의 노동조합과 수천여 개의 시민단체들이 결성되었다. 군부 출신 대정치인 낙선운동과 같은 정치적 활동부터 최저임금 인상과 복지확대를 내세운 노동운동, 여성운동, 성소수자운동, 빈민운동, 장애인운동과 같은 부문운동 등 여러 사회운동 조직들이 고르게 성장했다. 하지만 동시에 자신들을 대변해 줄 주요 정치세력의 존재 없이 과거 기득권 체제 출신 일부 ‘리버럴’ 정치세력과 주류사회에 편입한 일부 사회운동 출신 정치인들과의 접촉을 통해서만 정치사회적 변화를 가져오려 시도하는 등 그 한계 역시 명확했다.

이처럼 성과와 한계를 모두 안고 있던 민주화 이후 인도네시아 사회운동은 2014년 조코 위도도 정부 출범 이후로 새로운 도전을 맞이하게 된다. 위도도는 민주화 이후 인도네시아 최초로 군부나 기존 정치 엘리트 출신이 아닌 민간인 신분으로 대통령에 당선되어 국내외의 주목을 받았지만, 집권 이후 군부 및 이슬람 보수세력과의 타협을 거듭하며 급속히 우경화되었다. 이에 인도네시아 사회운동은 위도도 정부에 대한 투쟁을 이어 나갔는데, 시민권과 여성 및 성소수자의 권리를 억압하는 법안들에 반대해 벌어진 2019년 신성모독법 반대투쟁, 경제활성화를 빌미로 2020년 옴니버스법(노동유연화) 반대투쟁이 대표적이다.
이처럼 다크 인도네시아 운동은 특정 사안에 대한 산발적 반응으로서 갑자기 등장한 것이 아닌, 기득권화된 옛 리버럴 세력, 그리고 재기를 꿈꾸는 수구 정치세력에 맞선 인도네시아 사회운동의 투쟁이라는 맥락에서 성장했다. 다만 지금까지의 성과는 예산 삭감이나 군법 개정과 관련해 정부로부터 일부 양보를 이끌어낸 수준에 머물고 있으며, 인도네시아 사회운동 전체의 혁신이나 도약으로까지 이어지지는 못하고 있다.
다크 인도네시아 운동에겐 지난 몇 달간의 투쟁 기간 동안 쌓인 연대의 경험을 보다 구체적인 형태로 만드는 일, 이를 지역 기반 대중운동 으로 심화시키는 일, 그리고 이를 정치적 운동으로 확장시키는 일 등의 과제가 남아있다. 정세와 조건은 다를지언정 내란 정국 이후 새로운 전환점을 모색해야 하는 한국 사회운동 역시, 과거와의 대화를 통한 인도네시아 사회운동의 혁신 시도에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 이유이다.
글 : 김원 (동아시아 사회운동 뉴스레터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