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태령을 기억하며
2024년 12월 26일
올겨울 들어 가장 추운 밤이었습니다. 트랙터를 몰고 서울로 향하던 전봉준투쟁단이 경찰에 의해 남태령 고개에서 가로막힌 한파가 몰아치는 밤이었습니다. 경찰은 트랙터 유리창을 깨고 농민들에게 폭력을 행사했습니다. 그들은 부끄러움 없이 농민들을 탄압했습니다.
모여달라는 글을 봤 습니다. 광화문 집회를 끝마친 시민들이 남태령으로 모이자 경찰의 태도가 달라졌다고요. 그러니 더 많은 시민이 이곳에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새벽 1시 30분, 경찰은 물러서는 듯했지만 사당 IC에 더 두터운 차 벽을 세웠습니다. 트랙터를 유인해 고립시키고 농민들과 시민들을 분리하려는 속셈으로 보였습니다. 더 큰 화가 치밀었습니다.
저는 이 대치의 끝이 어디일지 꼭 보고 싶어졌습니다. 그리고 경찰들에게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그런 얕은 수로는 절대 당신들이 이길 수 없다고. 우리는 이렇게 다른 사람들과 연대하며 서로를 지켜낼 것이라고요. 라이브를 켜놓고 슬픔과 분노 속에 밤을 지새우다 이른 아침 집을 나섰습니다.
남태령으로 향하며 저는 12월 3일 계엄령이 내려지던 밤을 떠올렸습니다. 군홧발이 국회를 짓밟으려 들이닥치는 것을 보며 느꼈던 공포가 저를 다시 엄습했습니다. 그러나 남태령에서 또 한 번 배웠습니다. 서로가 서로를 보호하며 부당한 공권력에 지지 않고 맞서는 밤도 있을 수 있다는 것을요. 그건 전적으로 동료 시민들이 제게 가르쳐준 것이었습니다.
남태령에서 농민은 시민들에게 ‘형제들’을 ‘우리들’로 바꾼 농민가를 가르쳐주셨습니다. 젊은 여성으로서, 성소수자로서, 특성화고를 나온 고졸 노동자로서, 이태원 참사로 후배를 잃은 여성으로서, 수많은 사람들이 발언대에 올라 무수한 이야기를 쏟아냈습니다. 많이 듣고 많이 배웠습니다.
저는 농촌에서 나고 자란 농촌의 딸입니다. 조부모는 벼농사를, 이웃들은 과일 농사를 지어 먹고 살았습니다. 봄이 되면 어머니는 저를 차에 태워 벚꽃 대신 사과꽃과 배꽃, 복숭아꽃 구경을 시켜주셨습니다. 서울로 떠나온 후 고향에 있는 부모의 돈으로 서울의 집주인에게 매달 월세를 내며 대학 생활을 했습니다. 지방에서는 열리지 않는 집회에 참여하며 해방감을 느꼈던 적도 있었지만, 실은 5평 남짓의 방 안에서 숨죽여 보냈던 시간이 더 많았습니다. 아마 저는 트랙터가 서울로 진입해 한남동으로 들어오던 순간을 살면서 절대 잊지 못할 것입니다.
지금 저는 콘텐츠를 만드는 일로 돈을 벌고 있습니다. 프리랜서라는 허울 좋은 이름 대신 특수고용 노동자라는 이름으로 더 불리고 싶습니다. 각자의 위치에서 일상을 살아가며 무기력을 느낄 때가 참 많습니다. 기후 위기 앞에서, 약자를 배척하는 정치 앞에서, 지금 이 시각 세계에서 일어나는 전쟁과 학살 앞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몰라 자주 길을 잃습니다.
그러나 저는 궁금합니다. 농민의 권리가 보장받는 세상이, 빈곤한 자가 없는 세상이, 장애인이 시민으로 함께 지하철에 오르는 세상이, 팔레스타인 학살이 멈추고 해방이 오는 세상이, 일하다 죽는 노동자가 없는 세상이, 트랜스젠더가 숨지 않아도 되는 세상이 궁금합니다. 서로가 서로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도록 우리 더 함께합시다. 윤석열 탄핵을 넘어 더 나은 세상을 만듭 시다. 누구도 소외되지 않는 세상을 만듭시다. 투쟁에 나중은 없습니다. 투쟁!
글 : 이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