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경화에 맞선 인도네시아 사회운동의 투쟁
2024년 8월 4일
지난 2월 14일 인도네시아에서는 대통령 선거와 국회의원 선거를 겸한 총선이 있었다. 인도와 미국에 이어 세계에서 세 번째로 많은 인구의 민주주의 국가의 선거기에 세계적으로도 많은 관심을 모았다. 위대한 인도네시아 운동당 소속 프라보워 수비안토가 58.8%로 당선이 되었다. 그는 1967년부터 1998년까지 인도네시아를 30년 넘게 철권통치하며 수백만 명의 희생자를 낳았던 군사독재자 수하르토의 사위로, 군사정권 치하에서 특수부대 사령관 지위로 민주화 운동을 탄압하고 동티모르와 서파푸아 독립운동을 잔혹하게 진압했던 인물이다. 민주화 이후에도 군부, 재벌, 이슬람주의 세력 등 인도네시아 기득권층과의 친분을 바탕으로 정재계 양쪽에서 막대한 권력을 누렸다. 흥미로운 점은 그가 현 대통령인 조코 위도도 치하에서 국방장관을 맡았으며, 그의 아들인 기브란 라카부밍 라카를 부통령 후보로 임명했다는 점이다(여당이자 한국으로 치면 민주당 정도의 포지션인 중도 자유주의 정당 민주항쟁당은 따로 후보를 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던 걸까? 인도네시아의 시민사회와 사회운동은 이러한 정치적 보수화에 어떻게 대응하고 있을까? 이에 대한 답을 얻기 위해서는 지난 인도네시아 현대사를 돌아봐야 한다.
반공주의 개발독재에 의해 지워진 사회운동 유산
사실 인도네시아는 지난 20세기에 각종 급진적 사회운동의 활동이 대단히 활발했던 지역이다. 네덜란드 식민지배 때부터 인도네시아인들은 여러 자발적 결사체를 결성해 자기만의 목소리를 내고 집단의 이익을 관철시키는 것은 물론, 인도네시아라는 새로운 공동의 국가정체성을 형성하는 데에 있어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해왔다. 초기에는 중동의 이슬람 개혁운동으로부터 영향을 받아 19세기 초에 결성된 빠드리운동이나 1912년 이슬람 가치에 입각한 교육과 사회복지의 현대화를 목표로 내걸고 형성된 무함마디야, 자바와 수마트라의 개혁주의자들이 주도한 민족주의적 계몽운동 프로젝트인 부디 우또모와 같이 상인계층이나 이슬람주의 세력, 지식인 세력과 같이 기존 인도네시아 사회에서 영향력 있는 집단을 중심으로 한 운동들이 대부분이었지만, 이후에 노동자와 도시빈민과 같은 기층 민중들이 합류하며 보다 포괄적인 성향으로 나아가게 된다.
이 과정에서 사회주의와 같이 보다 급진적인 성향의 정치운동 역시 성장하게 된다. 본격적인 인도네시아 사회주의 역사는 1914년 네덜란드 공산주의자인 헹크 스네이블리트(중국 근현대사를 공부한 사람이라면 익숙할 이름인, 1차 국공합작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마링’ 과 동일인물이다)가 수라바야에서 인도네시아사회민주연합(이하 ISDV)을 창설하면서 시작하게 된다. ISDV는 처음에는 인도네시아에 거주하는 네덜란드 노동자와 지식인들만을 회원으로 했지만, 이후 상대적으로 진보적 성향을 띄던 이슬람 정치단체인 이슬람연합(이하 SI)과 연대하며 조금씩 기반을 넓혀나가게 된다. 이 과정에서 급진적 성향의 언론인 하지 미스박(Hadji Mohamad Misbach), 공산주의와 이슬람이 본질적으로 같다고 주장하며 '붉은 하지'라는 별명으로 불리던 조직운동가 하지 미스바흐(Hadji Misbach), 노동운동가 스마운(Semaun) 등 많은 SI 출신 신진 활동가들이 ISDV에 합류하게 된다. 초기부터 유럽의 다른 제2차 인터내셔널 계열 사회주의 정치세력과 비교해도 급진적이고 전투적인 성격이 강하던 ISDV는 1920년 이름을 동인도공산주의자연합으로 바꾸며 본격적으로 코민테른식 공산주의 노선을 추종하는 정치세력으로 성장하게 되었는데, 이는 1922년 창당된 중국공산당과 비교해 봐도 2년이나 빠른 것이었다. 1924년 이들은 인도네시아 공산당(이하 PKI)로 이름을 바꾸며 인도네시아 현대사에서 가장 중요한 정치적 주체 중 하나로의 발걸음을 본격적으로 내딛었다.
PKI는 코민테른을 포함한 국제 공산주의 운동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지만, 동시에 인도네시아인의, 인도네시아인에 의한, 인도네시아인을 위한 정당을 자임하며 인도네시아 특색에 맞는 사회주의 운동을 펼치기 위해 노력했다. 단순 마르크스와 레닌의 사상에 기반한 수사를 넘어 인도네시아의 문화와 역사에서 끌어온 다양한 은유와 사례들이 정치적 선전에 이용되었으며, 이슬람과 공산주의 이데올로기 간 결합 역시 적극 권장되었다. 이러한 노력에 힘입어 PKI는 조직 노동자와 지식인은 물론 소작농과 도시빈민을 아우르는 광범위한 연합전선을 형성할 수 있었다. 그들에게 PKI는 네덜란드 식민정부는 물론 지주나 이슬람 지역유지 등 토착 기득권 세력들과의 투쟁에 있어서도 든든한 뒷배로 여겨졌다. PKI는 파업부터 대중소요까지 다양한 방식으로 투쟁을 이어나갔으며, 1926년과 1948년 두 차례 각각 식민정부와 수카르노의 민족주의 독립운동세력의 전면적인 탄압에도 불구하고 인도네시아 민중 사이에서 자신의 기반을 다졌다.
독립과 정부수립 이후 PKI는 군부와 수카르노가 이끄는 민족주의 성향 인도네시아국민당(이하 PNI), 이슬람 세력과 함께 수만 개의 섬에 걸친 수백 개의 민족으로 이루어진 인도네시아에서 전국 단위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정치사회적 주체 중 하나로 성장하게 된다. PKI는 노조를 포함한 대중적 사회운동 내에서의 확고한 기반을 바탕으로 나머지 세 세력과 때로는 손을 잡고 때로는 경쟁하며 인도네시아 내 자신의 정치사회적 영향력을 넓혀 나갔다. 1955년 독립 후의 제1회 총선에서 PKI는 총 257석 가운데 39석을 획득하고 인도네시아 인구의 절반을 차지하는 자바 지역에서는 제1당의 위치에 오르며 완전한 정치적 주류세력으로 발돋움했으며, 수카르노 정부의 비동맹외교와 경제적 좌경화에도 많은 영향을 끼치게 된다. 당시 PKI의 당원 수는 300만 명에서 400만 명 가까이로 추산되었는데, 이는 공산당으로는 중국과 소련에 이은 세계 3위의 숫자로, 공산권 바깥에서는 유일무이한 수준이었다. PKI와 긴밀히 연계되어 있던 노동운동과 진보좌파 성향의 문화예술인 역시 인도네시아 시민사회 내에서 보폭을 넓혀 나가며 인도네시아 전반의 급진적 변화에 기여했다.
그러나 반공주의 성향이 강했던 군부와 이슬람 세력으로 대표되는 다른 인도네시아 주류집단은 이러한 변화를 반기지 않았다. 1965년 수하르토가 이끄는 군부세력은 PKI가 주측이 되었다고 주장하는 쿠데타 시도를 제압한 이후(해당 시도는 반미 반서방 성향을 듸던 수카르노 정부를 껄끄러워 한 미 CIA의 작품이라는 의혹이 있다), 1966년 협박을 통해 수카르노로부터 권력을 이양 받으며 정권을 완전히 장악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친 수카르노 인사와 PKI 당원 및 지지자, 그리고 노조와 같이 이들과 연계되었던 여러 사회운동집단을 포함하여 군부에 반대하거나 반대한다고 의심되는 수많은 이들이 재판 없이 살해되고 투옥되고 고문되었다. 군대와 주로 이슬람주의자로 이루어진 극우 민병대가 마을마다 돌아다니며 ‘공산주의자 목록’에 올라와 있는 사람들을 색출하고 학살했다. 강부터 바다까지 인도네시아 곳곳이 살해당한 사람들의 시체로 가득했다. 당시 수하르토 주도하에 학살당한 사람의 수는 최소 50만에서 최대 100만 명으로 추정되는데, 이는 한국전쟁 전후 이승만 정권의 학살과 베트남 전쟁 당시 남베트남과 미군의 학살과 함께 냉전기에 이루어진 가장 큰 규모의 반공주의 학살로 평가된다. 당시 공산주의가 아시아 전역에 퍼질 거라는 편집증적 환상에 빠져있던 미국은 이러한 살육극을 방조하는 것을 넘어 적극 지지했다. 이미 전국적으로 10만 명이 넘게 학살당했던 1965년 12월 21일, 주인도네시아 미국대사관은 국무부에 "불과 10주만에 환상적인 전환이 있었다"는 내용의 외교전문을 보냈다.
신자유주의에 맞선 투쟁의 부활
학살 이후에도 인도네시아 민중의 저항은 계속되었다. 대학생들은 불공정한 조건에서 진행되는 투표에서 기권표를 행사하자는 백지투표 캠페인을 벌였다. 1974년에는 다나카 가구에이 일본 총리의 방문에 반대하는 시위가 대규모로 벌여졌는데, 이는 일본 다국적기업의 자본이 수하르토의 개발독재 프로그램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차지했기에 특히 중요했다. 예술가들은 인도네시아 새예술동맹을 결성해 반정부 성향 예술가들의 활동을 지원했다. 작게나마 성소수자운동이 성장하기도 했다. 이 외에도 수많은 크고 작은 저항이 수하르토 집권기 내내 지속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지속적인 반정부 투쟁에도 불구하고, 수하르토 정권은 서방 자본의 지지를 뒤에 업은 개발독재 프로그램으로 인한 경제성장과 빈곤감소에 힘입어 30년이 넘는 세월동안 장기집권했다.
상황을 반전시킨 건 다름 아닌 1997년 동아시아 전체를 집어삼킨 IMF 위기였다. 1980년대 이후 수하르토 정권은 과거 수입대체 산업화 모델에서 수출 중심으로 경제모델을 전환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전통적으로 인도네시아 경제의 핵심이었던 쌀 농업은 쇠퇴하고 그 자리를 제조업이 차지하게 되는데, 이는 남한의 박정희, 대만의 장징궈, 싱가포르의 리콴유 등 다른 동아시아 반공 권위주의 독재자들의 정책을 모델로 한 것이었다. 이 과정에서 제조업 노동자의 수가 증가하며 수하르토 집권 이후 움츠러들었던 노동운동이 다시 성장하는 등의 긍정적인 면모도 있었지만, 이 과정에서 늘어난 외국인 직접투자는 이후 IMF 경제위기를 불러오는 뇌관이 되었다.
1997년 7월 태국 바트화의 가치가 폭락하며 시작된 동아시아 금융위기는 곧바로 인도네시아 경제를 강타했다. 인도네시아의 경우에는 경제의 대부분이 수하르토의 가족과 친척, 그리고 그들과 유착관계에 있던 정치관료 및 종교 엘리트들의 손아귀에 들어가 있는 기형적인 경제 시스템을 가지고 있었기에 그 여파가 더욱 심했다. IMF는 경제위기를 경험한 타 동아시아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인도네시아에도 구제금융에 대한 대가로 대규모 구조조정과 민영화, 긴축정책과 은행폐쇄 등으로 대표되는 가혹한 신자유주의적 경제개혁안이 요구했다. 한동안 이를 수용하기를 거부하던 수하르토는 1998년 1월 결국 IMF의 요구안에 백기투항하게 되고, 이는 대다수 인도네시아 민중의 삶을 벼랑 끝으로 몰아갔다. 인도네시아 인구의 15퍼센트가 일자리를 잃었고, 인구의 4분의 1인 4000만 명에서 5000만 명이 빈곤층으로 떨어졌다. 1인당 GDP는 1996년 1,155달러에서 1998년 449달러로 곤두박질쳤다. 이 와중에 해외자본은 민간시장에 매각된 국경기업과 민간기업의 지분을 싹쓸이했다.
수십 년 간 진행된 독재정권의 탄압에 부글부글 끓던 민중의 분노는 임계치에 다다랐다. 시작은 대학생들의 시위였다. 1998년 3월 수백 개 대학 캠퍼스에서 수하르토 정권에 반대하는 시위가 벌어졌다. 많은 이들은 해당 시위를 12년 전 필리핀의 독재자 마르코스를 몰아냈던 ‘피플파워’ 혁명을 모티브로 해, 수하르토 정권을 몰아내기 위한 광범위한 투쟁으로 발전시키고자 했다. 노동자와 농민, 도시 빈민이 투쟁에 합세했다. 자카르타와 반둥, 수아비야를 포함한 인도네시아 전역에서 학생단체와 노조 간 연대투쟁이 벌어졌다. 메단에서는 2,000명이 넘는 농민이 정부와 재벌들로부터 강탈된 토지의 반환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였다. 전국의 대도시에서 생활조건 개선을 요구하는 도시 빈민의 소요가 이어졌다. 투쟁은 경찰에 의해 1만 명이 넘는 시위대가 강제해산되고 그 와중에 4명이 사망한 5월 12일 절정에 이르게 된다. 18일에는 수천 명의 학생과 노동자들이 국회의사당을 점거했으며, 20일에는 자카르타에 20만 명이 넘는 시위대가 자카르타에 집결했다. 결국 5월 21일 수하르토가 대통령직에서 사임하며 수십 년 간의 군사독재가 막을 내리고 2004년 최초의 직선제 대통령 선출이 이루어지며 인도네시아는 형식적인 주주의로 전환된다.
수하르토의 사임으로 이어진 광범위한 대중운동은 인도네시아 사회에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민주화 이후 1년 동안의 기간에만 수백여 개의 노동조합과 수천여 개의 시민단체들이 결성되었다. 1975년 침공 이후 인도네시아에 강제병합당했던 동티모르 역시 주민투표를 통해 1999년 독립을 이루었다. 하지만 민주화 이후에도 대부분의 권력은 여전히 수하르토 체제에서 성장한 기성 정치인과 군부, 재벌, 종교 엘리트들의 소유였다. 이에 인도네시아 사회운동은 한국의 낙선운동으로부터 영감을 받은 반군부 선거캠페인을 포함한 다양한 방식으로 기득권에 대한 투쟁을 이어나갔다. 노동운동의 경우 광범위한 조직 및 투쟁활동으로 최저임금 인상과 복지확대 등 노동자들에게 유리한 정책통과에 기여했다. 여성운동, 성소수자운동, 빈민운동, 장애인운동 등 다양한 부문의 사회운동 역시 고르게 성장하게 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을 대변해 줄 주요 정치세력의 존재 없이 과거 기득권 체제 출신 일부 ‘리버럴’ 정치세력과 주류사회에 편입한 일부 사회운동 출신 정치인들과의 접촉을 통해서만 정치사회적 변화를 가져오려는 시도는 다소 제한적인 성과만을 가져왔다. 독재로부터 자유로워진 동아시아 많은 곳들과 마찬가지로 인도네시아의 민주주의가 미완성으로 평가되었던 이유다.
조코 위도도 정부의 배신
2014년 조코 위도도(이하 조코위)의 대통령 당선은 인도네시아를 넘어 전 세계적으로 큰 관심을 불러모았다. 민주화 이후 인도네시아에서 처음으로 군부나 기성 정치 엘리트 출신이 아닌 순수 민간인 신분으로 대통령에 당선된 사례였기 때문이다. 슬럼에서 나고 자란 서민 출신이라는 점 역시 인도네시아 유권자들에게 호감으로 작용했다. 실제로 조코위는 자신의 고향인 수라카르타의 시장으로 재직할 당시 의료와 교육 등 공공서비스 예산을 대폭 인상하고 환경규제를 강화하는 등 여러 개혁조치들로 인기가 높았으며, 대선 당시에도 부정부패 청산과 국민의료보험 도입 등 여러 친서민 개혁정책들을 공약으로 제시했다. 당시 조코위의 상대 후보가 군부와 이슬람주의 세력의 지지를 등에 업은, 수하르토 정권 당시 민주화 운동과 동티모르 독립운동을 폭력 진압했던 특수부대 사령관 출신 극우 정치인 프라보워 수비안토였기에 그의 이러한 상대적으로 개혁적인 면모는 더욱 도드라져 보였다. 노동운동과 환경운동을 포함한 인도네시아의 진보적 사회운동 진영이 그의 당선을 환영했던 이유다. 많은 인도네시아인들과 마찬가지로 활동가들에게도 조코위 정부의 출범은 미완상태로 여겨지던 인도네시아 민주주의의 완성으로 여겨졌던 것이다.
그러나 이런 기대가 실망으로 바뀌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조코위는 감세와 규제완화를 통해 노동자들이 아닌 대기업과 해외자본에 친화적인 경제정책으로 일관했다. 군부와 이슬람주의 세력의 기득권을 건드리지 않은 채 그들과 타협적인 정치를 펼쳤다. 각종 토건개발로 인해 환경이 크게 파괴되었으며, 여성과 성소수자 인권 향상에도 미온적이었다(조코위 재임기간 여성과 성 소수자에 대한 폭력의 빈도는 오히려 증가했다). 분리독립을 요구하는 서파푸아 주민들에 대한 폭력진압 역시 여전히 이어졌다. 복지정책을 통해 빈부격차를 완화하겠다는 약속 역시 지켜지지 못했다. 옥스팜에 따르면 인도네시아는 여전히 세계에서 여섯 번째로 불평등한 국가로 남아있다. 조코위 정부의 첫 번째 임기의 마지막 주요 정치적 업적(?)은 인도네시아 민주화의 최고 성과로 여겨졌던 부패방지위원회에서 정부의 역할을 강화하여 이를 사실상 무력화하는 일이었다.
조코위의 이러한 우경화는 2019년에 시작된 두 번째 임기에 이르러 더욱 가속화되었다. 두 차례 자신과 대선에서 경쟁했던 수비안토를 국방부 장관에 앉힌 것을 포함, 군부와 재벌 출신 인사들로 자신의 내각을 채운 것부터가 좋지 못한 신호였다. 특히 보수적인 이슬람 정치세력과의 야합이 두드려졌다. 강경보수 성향의 이슬람 성직자 출신인 부통령 나흐다뚤 울라마의 주도 하에 ‘신성모독’을 빌미로 표현의 자유와 언론의 자유, 집회결사의 자유를 제한하고, 공적 장소에서 임신중절과 피임의 홍보를 제한하고 혼전성교를 금지하는 등 여성과 성소수자의 권리를 탄압하는 여러 반동적인 정책들이 실시되었다. 특히 혼전성교 금지법의 경우 청년층은 물론 성소수자들로부터 거센 비판을 받았는데, 인도네시아는 동성결혼이 합법화되지 않아 이는 사실상 성소수자들의 성적 자결권을 무시하는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해당 법안에 대한 반대는 이후 조코위 정부의 권위주의적 통치 전반에 대한 저항의 움직임으로 격화되었다. 수도 자카르타를 중심으로 국토 전역에서 수천 명이 넘는 시위대가 부패방지위원회 개악 철회부터 보르네오섬 환경파괴기업 처벌 등 다양한 요구들을 내걸고 투쟁에 나섰다. 전국적으로 수백여 명의 사상자가 나왔으며, 실종자의 수도 수십여 명에 이르렀다.
2020년에 추진된 일명 ‘옴니버스 법’ 은 조코위 정부 보수화의 완성과도 같았다. ‘해외투자 촉진’을 통한 ‘일자리 창출’을 명분으로 제정된 이 법은 근로시간 연장, 최저임금 지급 의무화 폐지, 계약직 고용 기간 연장, 파견노동 사용 범위 확대, 해고 제한 요건 완화, 퇴직금 삭감 등 노동권을 약화시키는 광범위한 개악안이 담겨 있었다. 뿐만 아니라 정부가 산업인프라 건설을 위해 개별 농민들의 토지를 사실상 강제수용하는 것을 합법화하고 열대우림 방화에 대한 처벌을 완화하는 등 소농의 권리를 침해할 뿐만 아니라 환경파괴의 위험 역시 안고 있었다. 국민들에게 오직 법안의 일부만이 공개된 채로 통과되었다는 사실 역시 많은 이들의 분노를 불러일으켰다. 많은 이들은 조코위 정부의 옴니버스법 통과시도를 1998년 이후 인도네시아의 점진적 민주화 과정을 의미하는 “개혁시대”의 종결로 이해했다. 이에 민주화 이후 가장 거대한 규모의 범국가적 저항이 전국적으로 벌어졌다. 코로나 19 판데믹으로 인해 집회시위의 자유가 크게 제한된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학생운동과 노동운동, 환경운동 간 광범위한 연대가 이루어지며 수만 명의 사람들이 길거리로 나섰다. 2021년 인도네시아 헌법재판소가 옴니버스 법에 위헌판결을 내리며 투쟁은 잠시 가라앉았지만, 조코위 정부가 ‘경제상의 긴급한 필요’ 에 의해 옴니버스 법보다 오히려 더 노동권을 개악하는 내용의 행정명령을 통과시키며 다시금 저항을 불러일으켰다. 현재까지 옴니버스 법 반대투쟁에서 발생한 사상자는 최소 200여 명으로 추산되며, 체포된 사람도 6,000명 가까이 되는 것으로 파악된다.
조코위 정부의 이러한 권위주의적 친자본 행보는 신냉전 시대 세계경제에서 인도네시아의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시도와 맞닿아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게 중요하다. 미중대립으로 대표되는 신냉전 시대를 맞아, 위도도 정부는 중국이 주도하는 일대일로와 미국이 주도하는 인도-태평양 경제프레임워크에 모두 가입하는 등 ‘구냉전’ 시대 자국의 비동맹 제3세계 외교노선의 친자본 버전이라 할 수 있는 중도적 외교노선을 걷고 있다. 이 과정에서 니켈 등 풍부한 천연자원을 무기로 ‘디커플링’을 위해 중국에서 빠져나가는 서방 자본은 물론, 자국 내 과잉생산된 자본의 해외투자처를 찾는 중국을 포함한 ‘브릭스’ 신흥 개발도상국들의 자본 모두에게 안전한 투자 유치국이 되고자 하는 게 위도도를 포함한 인도네시아 엘리트들의 계획인 것이다.
이는 ‘신남방정책’ 이나 ‘인도-태평양 전략’ 과 같은 이유로 동남아시아 지역과 경제적 유착관계를 넓혀나가는 한국도 예외는 아니다. 실제로 집권 당시 신남방정책을 처음으로 추진했던 문재인 전 대통령은 그의 외교안보 회고록 『변방에서 중심으로』에서 조코위를 “서양의 어느 지도자보다 국민 들 속에서 서민들과 함께하는” 모습을 보여준 친민중 정치인이자 “어느 쪽도 추종하지 않”은 채 “다자외교 석상에서도 중립적이고 독자적인 목소리를 내”는 지도자라 극찬하며, 인도네시아가 “세계 10위 내 경제대국이 되는 것은 시간문제”라는 평가를 남겼다.
프라보워 당선이 인도네시아 사회운동에게 말하는 것
이러한 여러 저항의 목소리에도 불구하고, 조코위는 70퍼센트센트에서 80퍼센트에 육박하는 압도적인 지지율과 국제무대에서 인도네시아의 위상 강화를 무기로 자신의 권력기반을 강화해 나갔다. 2022년에는 조코위가 3선을 금지하는 헌법을 개정해 3선에 나서거나 심지어 개헌을 위한 시간을 벌기 위해 총선을 연기한다는 소문이 퍼지며, 물가상승과 경찰폭력에 대한 비판적 인식과 맞물려 대학생과 노조 중심으로 또 한 번 수 만여 명이 참가하는 규모의 전국적 반정부 시위가 발생하기도 했다. 이후 조코위는 자신의 재출마가 아닌 자신의 내각에서 장관을 맡고 있던 옛 경쟁자 프라보위를 대통령 후보로 암묵적으로 지원하는 쪽을 택했다. 위와 같은 조치는 조코위 정부에 비판적인 목소리를 이어가던 사회운동 진영은 물론 여당인 민주항쟁당 내부에서도 강한 비판의 목소리를 가져왔는데, 결 국 대통령의 지지를 받으며 내각 출신 후보와 여당 후보가 따로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는 촌극이 벌어지게 된다.
대선 기간 프라보위는 조코위 지지기반의 흡수와 군부와 재벌, 이슬람주의 세력으로 대표되는 기득권층의 지원은 물론, 과거 수하르토 시절의 ‘스트롱맨’ 이 아닌 친근하고 소탈한 ‘할아버지’ 로 자신의 이미지를 재해석한 SNS 캠페인에 힘입은 인도네시아 인구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30대 이하 청년들로부터 지지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았다. 안타깝게도 이 과정에서 사회운동은 물론, 민주화 이후 독자세력화에 있어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하다가 반옴니버스 시위를 통해 소폭 재기에 성공한 진보정치진영 역시 별다른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했다. 이는 그동안의 투쟁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지속 가능한 대중기반 마련에 성공적이지 못했음을 보여준다.
프라보워는 대선 기간 옴니버스 법을 포함한 조코위 정부의 경제사회 정책 대부분을 계승할 것을 천명했다. 이는 인도네시아 사회운동이 마주해야 할 고난이 여전히 현재진행형임을 보여준다. 앞서 살펴보았듯, 현재 이들이 마주한 상황은 녹록치 않다. 오는 10월 취임예정인 프라보워 정부가 과거 수하르토 정권 수준으로 독재적으로 권력을 행사할 가능성은 많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코위 정부의 권위주의적 통치를 보다 심화시키리라는 건 이미 예견된 수순이다. 과거의 공산주의 대학살에 대한 어두운 기억이 여전히 사회 곳곳에 암암리에 존재하기에, 계급투쟁과 같이 사회주의를 연상시키는 보다 급진적인 구호를 사용하기 힘들다. 전통적으로 민주화 이후 그 빈틈을 매워온 건 ‘시민사회’ 나 ‘도덕적 주체’ 와 같이 보다 모호한 정치적 구호들이었으나, 이 중 상당수는 이를 중점적으로 활용하던 정치세력의 화신과도 같은 조코위 정부의 우경화로 소구력을 잃었다. 2016~17년 촛불항쟁과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한국 사회운동의 경험과 마찬가지로, 인도네시아 사회운동 역시 독자적인 세계관과 대중기반 없이는 과거 권위주의 세력의 청산도 신흥 ‘리버럴’ 기득권층의 견제도 불가하다는 사실을 어렵게 배우고 있는 중이다.
물론 그렇다고 인도네시아 사회운동에 희망의 여지가 보이지 않는 건 아니다. 예컨대 올해 노동절에는 자카르타에서만 5만 명이 넘는 노동자들이 집결했는데, 이는 민주화 이후 가장 큰 규모의 노동절 집회였다. 참가자들은 옴니버스법 폐지 등의 의제를 달고 조코위 정부와 오는 프라보위 정부 모두를 향해 비판의 목소리를 높였는데, 여기에는 지난 몇 년간 새로이 운동에 입문한 젊은 활동가들의 역할이 결정적이었다고 여겨진다. 민주화 이후 몇 차례 건설을 시도했다가 중단되었던 노동당 등 진보정당들, 서로 다른 산별조직들로 분화되어 통일된 목소리를 내지 못하던 노조들도 새로이 투쟁할 준비를 맞췄다. 이들이 과거 인도네시아 사회운동의 유산을 새로운 시대의 수요에 걸맞게 창조적으로 재조합할 수 있는지에, 인도네시아 보수화에 재동을 거는 걸 넘어 보다 급진적인 사회변혁의 마중물로서 인도네시아 사회운동의 미래가 달려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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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김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