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 10주기 | 열 번의 4월 이후, 다시 배우기 위하여

세월호 10주기 | 열 번의 4월 이후, 다시 배우기 위하여

세월호 특조위 안전사회과 조사관 시절, 담당 과제 중 가장 힘 기울여 낸 보고서의 제목은 “재난에서 배우지 않기”였다. “배우지 않기”라는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보고서는 한국 사회가 지금까지 재난학습에 실패했다고 진단했다. 무엇이 재난을 만들어 냈는지를 제대로 분석하고 돌아보지 못했기에 재난이 반복되고 있었다. 그러나 “배우지 않기”라는 제목은 동시에 이제는 달라져 보자는 제안과 의지의 표현이기도 했다.

2024년 4월 30일

[읽을거리]사회운동대형참사, 재난, 사회운동

세월호 특조위 안전사회과 조사관 시절, 담당 과제 중 가장 힘 기울여 낸 보고서의 제목은 “재난에서 배우지 않기”였다. “배우지 않기”라는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보고서는 한국 사회가 지금까지 재난학습에 실패했다고 진단했다. 무엇이 재난을 만들어 냈는지를 제대로 분석하고 돌아보지 못했기에 재난이 반복되고 있었다. 그러나 “배우지 않기”라는 제목은 동시에 이제는 달라져 보자는 제안과 의지의 표현이기도 했다. 배우지 않은 과거를 처절히 반성함으로써, 우리는 달라질 수 있을 것이라는 제안. 이것은 비극을 비극으로, 슬픔을 슬픔으로 끝내지 않으려는 몸부림이었다.

법의 틀에 갇히다

재난을 통해 배운다는 것은 어려운 과제였다. 조사위원회만 구성되면 금방이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던 ‘진상규명’이 난항에 빠졌다. 정부의 방해도 있었지만, 조사위원회 자체의 한계도 적지 않았다. 특히 종합적인 원인 규명이 법적 처벌을 위한 증거수집 뒤로 밀리는 일이 반복되었다. 구조 실패의 책임자들이 법정에 서지조차 않은 현실이 법적 책임을 제대로 물으라는 요구로 이어지는 것은 필연이었다. 그러나 불의를 모두 불법으로 판정받으려는 시도는 우리의 질문을 왜곡했다. ‘법’이라는 도구의 한계 때문이다.재난은 수년 간 쌓여온 의사결정에 의해 발생했지만, 법은 참사 당일에만 주목했다. 세월호의 증개축을 주도한 전 청해진 해운 이사는 세월호 참사가 발생했을 때 회사를 관둔 상태였고, 세월호의 인가와 증개축에 깊이 개입했던 다른 임원은 인사발령으로 참사 당시 다른 지역에서 일하고 있어 책임을 물을 수 없었다. 대신 주요한 결정을 한 적은 없지만 이제 막 직책을 부여받은 이가 처벌을 받았다.

법은 ‘무능’을 처벌하는 데는 무능했다. 현장에 직접 출동한 해경 123정만 처벌받고, 해경지휘부는 무죄를 선고받은 것이 대표적이다. 법원은 승객이 선내에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없었고, 세월호가 빨리 침몰하는 것을 예상할 수 없었다는 등의 이유로 이들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책임 있는 이들이 마땅히 알고 예상했었어야 하는 일을 몰랐다는 것은 상식적으로는 용서받지 못할 무능이다. 하지만 ‘알 수 없었다’는 변명은 법정에서는 무죄의 근거가 되었다. 불법을 판정하는 재판은 불의를 처벌하지 못했을뿐더러, 그 자체로 불의를 재생산했다. 법원에 진실의 최종판정자 역할을 넘기지 않을 방법, 법을 통해 인정받지 못한 불의를 바로잡을 방법을 우리는 여전히 알지 못한다.

채우지 못한 ‘안전사회’의 내용

종합적인 원인 규명의 부재는 대안으로 향하는 걸음도 더디게 했다. 세월호 참사 1주기 즈음까지 시민사회운동은 원인을 폭넓게 파악하고, 정부의 섣부른 안전대책에 대해 비판했다. 그러나 조사위원회가 원인 규명과 안전사회 과제를 모두 떠안게 되자, 사회운동의 요구는 ‘조사위원회 지키기’로 좁아졌다. 세월호 참사가 제기한 과제를 구체화하려는 노력을 사회운동이 멈춘 동안, ‘안전사회’는 점차 텅 빈 기표가 되었다.

‘안전’은 중립적인 말이 아니며, 다양한 패러다임의 각축장이다. 안전은 오랫동안 자유나 평등보다는 통제나 위계와 가까운 개념이었기에 이를 뒤바꿀 구체적 요구나 구호, 패러다임 없는 ‘안전사회’ 요구는 공허할뿐더러 지배 담론에 포섭되기 쉽다. 안전을 이유로 경찰의 통제를 강화하고 질서를 위해 자유를 희생시키기 쉬운 것이다. 세월호 참사 이후 주로 노동안전의 영역에서 몇몇 대안적 패러다임을 상징하는 구호나 요구가 떠오르기는 했다. ‘노동자가 안전해야 시민이 안전하다’는 구호나 ‘생명안전업무의 정규직화’ 등이다. 그러나 이 요구들은 세월호 운동 안에서 온전히 자리잡지 못했다. 이윤을 최우선하는 기업의 행태가 안전을 희생시킨다고 생각한 이들은 이 구호를 쉽게 받아들였지만, 세월호의 선장‧선원이 승객을 버린 채 탈출했다는 충격적인 사실은 노동안전과 시민안전의 골을 만들었다. 연안여객선의 공영화 등 공공성을 강화하는 요구도 제출되었지만, 세월호 참사가 한낱 여객선 사고는 아니며 ‘안전사회 종합대책’을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은 이 요구를 ‘일부 부문의’ ‘작은 것’으로 여기게 했다. 현재 ‘생명안전기본법’ 제정이 세월호 참사 이후 안전사회 요구를 대표하고는 있지만 ‘안전도 권리’라는 선언적 의미에 머무르고 있다. 이를 넘어 어떤 구체적인 권리 목록을 통해 진보적인 안전 패러다임을 형성해나갈 수 있을지는 여전히 과제로 남아있다.

다시, 배울 수 있다는 희망

위 진단에서 별다른 진전 없이 8주기, 9주기가 흘러갔다. 참사의 주기가 반복될수록 사람들은 세월호 참사를 잊어가는 것처럼 보였다. 다행히 세월호 참사 10주기가 작은 전환점이 된 것처럼 보인다.

먼저 10주기를 그냥 보낼 수는 없었던 이들이 다시 자료를 들춰보고 “죽음 그 자체가 아니라 죽음의 이유”를 기억하기 위해 사실들을 길어 올렸다. 세월호는 평형수는 빼고 짐은 가득 실은 위험한 상태로 출항한 결과, 본래는 별문제 없이 넘어갈 수 있었어야 할 조타기 고장으로 인해 옆으로 넘어졌다. 루버 통풍구로 최초 침수가 시작되고 열려있던 수밀문으로 바닷물이 빠르게 들어차면서 세월호는 매우 빨리 침몰했다. 완전히 침몰하기까지 100여 분의 시간이 있었으나, 선장‧선원도, 진도VTS도, 해경 지휘부도 승객 탈출의 책임을 서로에게 떠넘기면서 희생을 키웠다. 조타기 고장, 최초 침수지점, 열린 수밀문은 조사를 통해 밝혀낸 사실이며, 우리는 2014년보다 세월호라는 배가 어떤 상태였고 어떻게 침몰했는지를 훨씬 자세히 안다. ‘아직도 결론을 못 냈다’는 말 뒤에 숨어있던 사실들이 책과 기사를 통해 전달되었다.

그동안 주목받지 못했던 선박안전에 관한 문제도 다시 제기되었다. 세월호 참사 이후에 발생한 선박사고를 분석해 ‘위험 감수 경영’과 기업의 수직적 위계 구조를 지적하고, 최소 인력으로 유지되고 있는 여객선과 지하철의 문제를 톺아본 언론기사가 등장했다. 그동안 잊고 있던 안전을 희생시키는 사회적 관행의 문제가 10주기를 계기로 다시 드러났다.

세월호 참사를 마지막으로 조사한 사회적참사특별조사위원회는 2022년 9월에 종료되었다. 해경지휘부가 대법원에서 무죄를 선고받은 것은 2023년 11월이다. 조사위원회의 활동을 더 이상 기대할 수 없고, 법정에서 정의를 찾을 수 없게 되었을 때, 사람들은 절망하기보다 스스로 원인과 대안을 찾아 나섰다. 다른 이들에 힘입어 나도 세월호 참사를 다시 붙잡는다. 세월호 참사에서 배우기는 이제 시작일지도 모르겠다.

글 : 박상은 (플랫폼c 활동가 · 재난사회학 연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