쩐득타오, 베트남의 위대한 마르크스주의 철학자
2024년 2월 10일
이 글의 필자 알렉상드르 페론은 쩐득타오의 철학적 여정에 대해 소개한 『Le Moment marxiste de la phénoménologie française: Sartre, Merleau-Ponty, Trần Đức Thảo』를 집필했다. 원문은 노르웨이의 저널 <Contretemps>에 프랑스어로 출판된 에세이를 저자 스스로 영어로 요약 번역한 것이며, 지난 2월 7일 <자코뱅>지에 실렸다.
베트남 철학자 쩐득타오(Trần Đức Thảo)는 마르크스주의와 실존주의를 함께 도입함으로써 언어에 대한 혁신적인 마르크스주의적 이론을 발달시켰다. 그러나 그의 이단적인 접근법은 종종 혁명 이후의 베트남 국가와 그를 대립하게 만들었다.
오늘날 쩐득타오(1917~93)의 이름을 기억하는 이들은 많지 않다. 그는 너무나 다양한 상반되는 입장들의 교차로에 서 있기에, 어느 한 입장에 그를 귀속시키는 일은 쉽지 않다.
현상학자라고 불리기엔 너무나 마르크스주의적이었으며, 마르크스주의자이기엔 너무나 현상학적이었던 그였다. 그의 마르크스주의는 스탈린주의자들이 보기엔 결코 정통적이지 못했으나, 스탈린주의에 대한 좌익 반대파들에겐 과도하게 정통적인 것으로 비쳤다. 강단의 철학자들에겐 너무나 전투적으로 비쳤던 반면, 정치적 투사들에겐 너무나 철학자인 사람으로 보였다.
그러나 이러한 복합성이야말로 그를 흥미롭게 만드는 지점이다. 쩐득타오의 인생사는 20세기의 수많은 긴장과 모순들을 보여주는데, 이를테면 식민주의와 독립, 자본주의 국가와 현실 사회주의 국가 모두에서 지식인이 지닌 역할, 마르크스주의와 다른 사상의 경향들이 맺는 관계, 냉전에서의 투쟁, 그리고 아시아 공산주의의 역사를 둘러싼 긴장과 모순 등이 그것이다.
쩐득타오의 삶은 이러한 모순들을 마주하고 극복하려는 시도로 일관되었다. 그는 끊임없이 그러한 모순들과 부딪히는 상황을 맞닥뜨렸으며, 그의 삶은 정치적이고 철학적인 실패로 인해 비극적 면모를 띄었다. 이러한 실패의 이야기를 재검토함으로써, 우리는 지난 세기를 관통한 보다 광범위한 비극들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분류되지 않은 지식인
쩐득타오의 삶이 출발한 곳은 프랑스 식민주의의 ‘긍정적’ 역할에 대한 이상적인 정당화처럼 보인다. 1917년 9월 26일 [베트남 북부 박닌성 투손(Từ Sơn)에서] 우체국 공무원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하노이에 위치한 알베르 사로 고등학교(the Lycée Albert Sarraut)에서 촉망받는 학생이었으며, 1935년에는 바칼로레아[프랑스의 중등과정 졸업시험]를 통과했다. 1936년에 그는 인도차이나 식민정부의 장학생이 되어 고등사범학교(ENS)를 준비하기 위한 프랑스 유학길에 올랐고 1939년 고등사범학교에 입학하기에 이른다.
1940년, 나치의 침공에 대한 프랑스의 군사적 저항이 붕괴하자 쩐득타오[‘쩐’은 베트남에서 가장 흔한 성씨 중 하나다.]는 클레르몽페랑으로 떠났고, 그곳에서 장 카바예[Jean Cavaillès; 나치 점령기 프랑스 해방운동의 군사 리더이자 철학자]를 만난다. 카바예는 현상학의 창시자라 불리우는 에드문드 후설(Edmund Husserl)의 작업들을 그에게 소개해주었다. 그는 「후설의 현상학적 방법론(Husserl ’s phenomenological method)」이라는 주목할 만한 소논문을 집필했고, 1943년에는 철학교수 논문자격시험(the philosophy agrégation)을 1등으로 통과했다. 이후 그는 후설에 대한 졸업 논문을 준비하며 벨기에 루벤(Leuven)에 위치한 후설 아카이브(Husserl Archives)에서 시간을 보냈다. 학술과 철학의 장에서 빛나는 경력을 향한 문이 이제 그의 앞에 활짝 열려 있었다.
하지만, 이토록 성공적 기록의 이면에 숨어 있는 비통함은 그저 짐작만 할 수 있을 뿐이다. 베트남인들이 프랑스 교육의 혜택을 누리는 것은 여전히 예외적으로만 허용되었을 뿐이었고, 학문적 행로에서의 한 걸음 한 걸음마다 쩐득타오는 자신의 피식민 지위를 끊임없이 상기해야 했다. 베트남인 최초로 철학과 그랑제콜에 합격했을 때 쩐득타오는 '미분류' 신분을 부여받았고, 이는 그를 프랑스의 고등교육 시스템에 지원할 수 없도록 배제했다.
쩐득타오의 말을 빌리자면, 이러한 경험들이야말로 식민지의 지적 엘리트를 구성하는 “괴물들”을 탄생시키는데 기여했다. 이 ‘괴물들’은 한편으로는 학교 교육과 자신이 속한 프랑스 문화에 대한 애정을 가졌고,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의 출신 민족에 대한 귀속감 사이에서 갈팡질팡했다.
아마도 쩐득타오는 프랑스와 베트남 독립을 위한 전쟁 사이에서 고민했을 것이다. 베트남에서 프랑스의 식민 통치에 맞선 저항은 크게 민족주의와 공산주의라는 다양한 형태를 띠었는데, 이때 그는 공산주의적 경향으로 기울었다. 투사로서의 삶을 시작한 이후 그는 베트남의 트로츠키주의자들과 가까워졌는데, 1930~40년대 당시 베트남 트로츠키주의자들은 상당한 영향을 발휘하고 있었다. 그는 프랑스의 인도차이나 출신 이주노동자들을 조직하는 운동에서 주요한 역할을 맡았다.
호치민이 베트남의 독립을 선포한 직후에 열린 1945년 9월의 기자회견에서, 쩐득타오는 자신의 나라가 프랑스 원정군을 어떻게 맞이할 것인지 질문받았다. 그는 답했다. “우리는 총으로 맞이할 것이다!”
프랑스 공권력으로부터 삼엄한 감시를 받고 있었던 그는 9월 21일 체포되었고, 12월까지 라 상테 교도소(La Santé Prison)에 투옥됐다. 출옥 이후에도 그는 정치적 활동을 이어나갔으며, 마르세유에서 부두 노동자들이 인도차이나로 향하는 전쟁물자 수송을 거부하는 운동을 조직했다고 의심받았다.
실존주의와 마르크스주의
프랑스 해방에 즈음한 시기, 정치적 개입과 철학적 성찰을 결합하고자 했던 이들은 “정통” 마르크스주의와 트로츠키주의 경향, 그리고 그 주요한 인사들이 마르크스주의와의 결합을 추구하고 있던 실존주의 사이에서의 선택을 고민했다. 쩐득타오의 첫 스승 중 하나인 모리스 메를로퐁티(Maurice Merleau-Ponty)야말로 후자의 시도를 전형적으로 보여줬다.
쩐득타오의 첫 번째 철학적 기획은 실존주의와 마르크스주의 사이에 종합을 주조하고자 한 시도였다. 그는 기존의 마르크스주의가 너무 기계적이고 ‘상부구조’의 일부로 간주되는 현상에 충분한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는 점에 문제의식을 느꼈고, 따라서 마르크스주의에 ‘급진적 수정’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또한 그는 마르크스주의가 탄탄한 인식론적 토대를 결여하고 있다고 여겼다. 쩐득타오는 실천‧역사‧계급, 그리고 혁명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의 이해에 현상학적 방법론을 적용함으로써 이러한 단점들을 해소될 수 있으리라고 봤다.
쩐득타오는 이러한 ‘수정’이 사실 칼 마르크스 자신의 ‘원초적 영감’으로 돌아가는 길을 열 것이라고 여겼다. 그는 마르크스 『자본』의 ‘과학'을 헤겔적이었던 청년 마르크스의 분석들과 대립시켰으며, 청년 마르크스의 분석들이 현상학적 독해와 양립할 수 있다고 보았다.
이러한 철학적 지향은 그가 <국제 리뷰(Revue Internationale)>지에 기고한 “마르크스주의와 현상학”과 <현대(Les Temps modernes)>지에 기고한 “인도차이나에 대하여” 등 두 에세이에서 분명해졌다. 쩐득타오는 두 번째 글을 감옥에서 작성했는데, 독립 전쟁이 아직 실질적으로 시작되지 않았던 시기에 그가 처음으로 인도차이나의 정세에 대해 분석한 작업이었다.
1946년 7월 쩐득타오는 퐁텐블로(Fontainebleau) 회담에서 베트민[Việt Minh; 베트남 독립동맹회]의 리더 호치민를 만났고, 1946~47년 사이 호치민이 이끄는 독립운동에 결합했다. 이듬해 6월 쩐득타오는 <현대>지에 클로드 르포르(Claude Lefort)[프랑스의 철학자, 트로츠키 주의 활동가]의 글에 대한 비판 “인도차이나의 사건을 다룬 트로츠키주의적 해석에 대하여”를 기고하면서 트로츠키주의와 거리를 두게 되었다.
호치민이 이끈 친소련 경향의 공산당은 한때 <투쟁(La Lutte)>지를 공동으로 편집하면서 베트남의 트로츠키주의자들과 협력적 관계를 맺기도 했다. 그러나 이 시기(1940년대 중반)에 두 운동[베트남 독립운동과 프랑스 트로츠키주의]의 관계는 매우 적대적으로 변했으며, 베트민은 여러 트로츠키주의 지도자들을 암살하기까지 했다.
쩐득타오의 정치적인 변화와 철학적 변화 사이엔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 이 시기에 그는 실존주의로부터 거리를 두게 되면서 “변증법적 유물론”의 기치 아래의 공산주의적 철학 기획에 기울게 되었다. 1948년, 그는 평생 동안 추구하게 될 새로운 철학적 기획을 정립했다. 인간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의 이해를 확보하는 것, 혹은 마르크스주의적 심리학과 인류학을 정립하는 것이 바로 그 기획이었다.
쩐득타오는 이 기획을 1948년 <현대>지에 기고한 에세이 “정신 현상학의 실체적 내용”을 통해 정식화했다. 이는 알렉상드르 코제브[Alexandre Kojève; 러시아 출생의 프랑스 철학자이며, 헤겔 철학 개념을 대륙 철학과 통합하고자 시도했다]가 1933~39년 사이 헤겔에 대해 강의한 내용을 강의록으로 출간된 내용에 대한 비평이었다. 코제브 강의록은 2차 세계대전 이후 프랑스 실존주의 세대의 사상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베트남으로의 귀환
쩐득타오는 점차 프랑스 지식인으로서의 역할과 베트남 민족해방운동에 대한 지지 사이에서 더 큰 모순을 느끼게 됐다. 그가 <현상학과 변증법적 유물론>을 출간한 1951년, 그는 15년 동안 발을 담그며 살아온 프랑스 지성계를 떠나 베트남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했다.
고국으로 돌아온 1952년, 독립전쟁은 맹위를 떨치고 있었으며, 그는 투쟁에 기여하기 위해 다양한 임무를 배정받았다. 이는 여러 보고서를 작성하거나 호치민의 작업을 번역하는 작업을 포함하고 있었다. 한 관찰자는 그가 “나이브하고 열정적”이라고 묘사했는데, 쩐득타오는 서구의 복식이나 심지어 모기장까지도 거부했고, 이 때문에 말라리아에 걸리기까지 했다.
이는 세계에 대한 그의 관계를 변화시키고자 했던 열망을, 서구의 교육을 거부하고 프랑스 식민주의 체계에서 교육받지 않았더라면 되었을지도 모를 존재가 되고자 하는 욕망을 방증한다. 그러나 필리프 파팽[Philippe Papin; 프랑스의 베트남 연구자]의 말을 빌리자면, 1953년 “취임식의 트라우마”가 쩐득타오에게 닥쳤다. 그가 사상 재교육 여단에 배치받게 된 것이다.
쩐득타오는 중국 혁명의 약동으로 마오주의가 영향력을 키워가는 시기 베 트남에 귀환했다. 프랑스에 맞서 범국가적인 통일이란 구호는 이미 과거의 것이 됐다. 마오주의로의 경도를 주도한 공산당 서기장 쯔엉친(Trường Chinh)에 따르면, 그 공공연한 목표는 “균열을 만들고 집단적인 감정적 충격을 초래하는 것”에 있었다. 우리는 이 시기 쩐득타오가 무엇을 했는지, 무엇을 목격했는지, 무엇을 경험했는지에 대해 알 길이 없다. 파팽은 그가 “최악의 시기에 최악의 장소에” 있었다고 말한다.
마침내 1954년 전쟁이 종식되면서 보다 차분하고 평화로운 시대가 열리고 있는 듯했다. 쩐득타오는 학자로 돌아온 쩐득타오는 처음에는 하노이대학교에서 고대사를 가르치다가, 1955년 철학사 교수가 되었고, 다음 해엔 역사학과 학장으로 취임했다.
이 기간 동안 그가 쓴 모든 글은 베트남어로 작성되었기 때문에 그의 지적 생산에 큰 변화는 프랑스어를 포기한 것과 함께 이루어졌다. 이 시기 작업들은 베트남 역사와 문학에 관한 5편의 글과 의식에 대한 유물론적 연구를 확장한 2편의 글 등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황혼부터 새벽까지
소련의 탈스탈린화와 중국에서의 백화제방 운동 등 공산주의 세계 전체가 개방의 과정을 겪으면서 베트남 지식인들의 상황 역시 격변에 놓였다. 전쟁 종식 이후 베트남 지식인들은 더이상 당의 정치 노선에 복종할 의무를 느끼지 않았기 때문에 그(탈스탈린화, 백화제방, 개방 등)에 대한 열정은 더욱 뜨거웠다. 그런 비판 운동의 과정에서 <인문학(Nhân Văn)>지와 <걸작(giai phẩm)>이라는 두 잡지가 탄생했으며, 이들은 비판 운동에서 전위적 역할을 담당했다. [원문에서는 두 잡지의 이름을 프랑스어로 소개했으나, 두 잡지는 모두 베트남어 잡지였다.]
쩐득타오 역시 이 운동의 한가운데에 있었다. 중국의 백화제방 운동이 베트남어로 소개될 수 있도록 번역자를 찾았던 이가 바로 그였다. 그는 1956년에 두 가지 글을 발표하기도 했다.
그 중 첫 번째 글인 “자유의 사회적 내용과 형태”는 사회주의하에서 개인적 자유와 집단적 자유 사이의 관계를 논한다. 쩐득타오에게 공산주의는 자유의 ‘부정’이 아니라, 오히려 그 실현이어야 했다. 두 번째 글인 “자유와 민주의 발달을 위해 힘쓰자”는 더욱 대담한데, 특히 베트남 정부의 관료화와 농업개혁 시기 자행된 ‘오류’들을 비판하고 있었다.
이 두 가지 글은 여생 동안 쩐득타오의 운명을 결정했다. 비판 운동에 대한 그의 제한적인 역할에도 불구하고, 그는 “수정주의”에 대항한다는 명분으로 당이 주도한 광범위한 캠페인에서 희생양으로 지목되고 말았다. 1956년 12월 그는 대학에서 해임되었고, 1957년 3~4월엔 재판에 넘겨졌다.
동시에 언론에선 그에게 오점을 남기기 위한 캠페인이 진행되고 있었다. 특히 그는 자신의 과거 경력 때문에 “트로츠키주의자”로 비난받았다. 1957년 6월, 당 중앙위원회의 사상과 문화 위원회는 그를 “조국과 사회주의의 적”으로 선언했다. 그는 베트남 민중과의 접점을 잃어버린 “고립된 개인”이라고 비난받기도 했다.
1958년 5월, 쩐득타오는 공개적인 자기비판을 수행했으나, 그럼에도 이는 충분하다고 여겨지지 않았다. 긴 시기 동안의 국내 유배가 시작되었다.
국내 유배
우리는 쩐득타오의 이 시기 삶에 대해 아주 적은 정보만을 갖고 있다. 1958년에서 61년 사이, 그는 재교육을 위해 농장으로 보내졌다. 하노이에 돌아온 이후 그는 대학에서 일하지도 거주하지도 못하도록 제한받았다. 그는 국립진실출판원[1945년 베트남 공산당이 설립한 기관으로 마르크스-레닌주의 세계관과 호치민 이념을 담은 출판물을 생산]에서 ‘원외 협력자’ 지위를 얻어 번역 작업에 종사하게 된다.
베트남의 사회주의적 건설을 위해 자신의 지적 능력을 발휘하고 싶어했던 쩐득타오는 자신이 소외되고 쓸모없어졌다고 느꼈다. 그럼에도 반체제적인 역할을 맡고자 하진 않았다. 오히려 그는 ‘복권’을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고립 속에서도 쩐득타오는 해외로부터 약간의 출판물을 받을 수 있도록 허용받았다. 비록 유럽 지성계의 발달을 따라잡기엔 부족했지만 말이다. 올리비에 토드[Olivier Todd; 프랑스의 저널리스트]는 베트남을 여행하는 동안 쩐득타오와 접촉해보란 장 폴 사르트르의 부탁을 받았지만, 그 시도는 실패로 끝났다.
쩐득타오는 언제나 새로운 대화 상대를 찾고 싶어했다. 프랑스의 공산주의 저널 <사유(La Pensée)>에 그가 논설을 붙여 보낸 편지가 이를 보여준다.
“여러분도 알다시피 우리는 프랑스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거의 아무것도 알 수 없습니다. 제게 제기될만한 비판 지점들에 대해 알려주실 수 있겠습니까? 저의 탐구를 지속해나가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쩐득타오는 이 시기 베트남에서 어떤 글도 출판하지 않았지만, <사유>와 <신비평(Nouvelle critique)> 등 공산주의 저널들에 몇 편의 글을 기고할 수 있도록 허용됐다.
이러한 모든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쩐득타오에게 1960년대는 창조적인 철학적 활동에 있어서 재생의 시기였다. 1980년대까지 그의 작업은 크게 두 영역으로 나뉜다. 첫 영역은 변증법에 대한 분석, 특히 헤겔과 마르크스의 관계에 대한 분석이다. 두 번째 영역은 그의 연구에서 주요한 부분을 차지하는데, 바로 언어의 영역을 재평가하면서 의식에 대한 그의 유물론적 분석을 복원하려는 시도였다.
쩐득타오는 언어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적이고 유물론적인 개념화에 중요한 기 여를 했는데, 언어가 단지 자기 자신을 지칭할 뿐이라고 보는 구조주의적 관점들을 비판하고, 언어를 지시적인 목적이란 관점에서 이해해야 할 필요성을 강조했다. 그가 이 작업에 소개한 중요한 마르크스주의적 개념은 “실생활에서의 언어”였는데, 이는 인간의 물질적 활동 속에서 의식과는 독립적으로 구성되는 객관적 의미들의 묶음을 지칭하는 것이었다.
스탈린주의에 대한 성찰
쩐득타오의 상황은 1980년대가 되면 훨씬 나아졌다. 소련에서 글라스노스트(glasnost; 개방)와 페레스트로이카(Perestroika; 개혁)가 시작되면서 국제 정세가 변한 결과였다. 80년대 후반에 그는 다시 한번 정치적으로 중요한 인사로 떠올랐다. 이는 그가 철학적 활동을 재개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그의 일부 작업은 스탈린주의와 마오주의에 대한 비판적 평가를 정식화하고자 하는 시도였다. 그의 1986년 저술인 “스탈린의 철학”에서, 쩐득타오는 스탈린의 팸플릿 “변증법적 유물론과 사적 유물론”에서 표현된 비변증법적 세계관을 분석했다. 그는 스탈린주의와 마오주의에 대항하여 “마르크스주의적 휴머니즘”의 사상을 옹호하고자 했다.
소련이 주도한 동구권이 붕괴되고 소련의 붕괴로까지 이어지면서, 베트남 상황은 다시금 경직됐다. 쩐득타오를 포함한 글라스노스트와 페레스트로이카의 지지자들은 다시금 어려운 상황에 처하게 됐다. 1991년 베트남을 떠나 40년 동안 한 번도 가보지 못한 프랑스로 떠난 것도 이런 배경에서였다.
이 여행 이유에 대해서는 다양한 해석 들이 존재한다. 쩐득타오 자신은 “프랑스 공산당이 실시한 정치적 재판을 받기 위해 프랑스로 보내진 것”이라고 말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우리는 말년에 이르러 박해에 대한 그의 콤플렉스가 노골적인 편집증에 이르렀다는 사실을 고려해야 한다.
실제로 파팽은 베트남 당 중앙위원회에서 공식 서한을 발견했는데, 이 서한은 쩐득타오를 “당의 지출”을 받아 행해지는 “공식적 정치적 임무”에 지명했다고 적시하고 있다. 그는 파리의 베트남 대사관이 소유한 안가에 수용됐다.
파리에서 쩐득타오는 루이 알튀세르의 제자들과는 거리를 두면서 오랜 철학적 지인들과 다시 연결하려고 노력했다. 그는 여러 강연을 하고 또 다른 철학 저서 작업을 시작했다.
그는 또한 1948년 시작한 프로젝트를 계속 진행하기 위해 생물학과 인류학 분야의 최신 연구 성과를 파악하고 싶어 했다. 하지만 낙상 사고를 입어 정신적‧육체적으로 매우 좋지 않은 상태였던 그는 1993년 4월 24일 브루세 병원에서 사망했다.
미지의 영역
쩐득타오의 운명은 부정할 수 없는 비극적 차원을 갖고 있다. 첫째로, 그리고 무엇보다 정치적인 실패가 그것이다. 20세기의 다른 수많은 이들처럼, 그는 몸과 마음을 모두 바쳐 공산주의의 건설을 위해 헌신했지만, 스탈린주의와 관료주의적 체제의 경직성을 마주할 수밖에 없었다.
그의 철학적 작업들을 살펴볼 때, 평가를 내리는 일은 더욱 어렵다. 그의 작업 중 일부는 정치적 검열이나 자기검열 하에서 쓰였지만, 쩐득타오는 마르크스주의가 여전히 충분히 탐험하지 못한 영역들에 대한 연구를 이어나가고자 애썼으며, 언어학과 인간 종의 기원에 대한 연구를 진행했다. 그의 철학적 실패는 생전에 대담자가 부족했고, 그의 저서가 거의 연구되거나 읽히지 않았다는 사실에서 기인한다.
그러나 그의 사후적 운명은 아직 결정되지 않았다. 베트남에서는 2001년 사후 호치민상을 수상하는 등 일종의 명예회복을 누리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게다가 그가 1960년대에 수행한 대량의 이론 생산물들은 여전히 출판을 기다리고 있다.
그의 아카이브에는 8천 페이지가 넘는 미공개 원고, 초안, 메모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어쩌면 쩐득타오 사상의 중요한 부분이 아직 발견되지 않은 것은 아닐까?
원문 : 알렉상드르 페론(Alexandre Feron)
번역 : 이재현
교열 : 홍명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