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도 미래도 진보도 없는 ‘제3지대’와 ‘위성정당’ 합종연횡
2024년 2월 7일
오는 4월 22대 총선을 앞두고 정치권에서는 '제3지대론'을 중심으로 이합집산이 계속되고 있다. 이런 이합집산이 새로운 현상은 아니다. 언제나 총선을 앞두고는 온갖 탈당과 결합 등 합종연횡이 반복되어왔다. 1992년 자본가 정주영은 14대 국회의원 선거가 치러지기 직전인 2월 여러 기성 정당 정치인들을 영입해 창당에 이르렀고, 31석의 원내 정당이 됐다. 당시에는 일시적 돌풍을 일으키는데 성공했지만, 그해 연말 대선에서 3위에 그치자 창당 1년여만에 소멸됐다. 2007년 창조한국당 역시 몇몇 정치권 인사들을 영입해 원내 정당이 되는데 성공했지만, 대표 얼굴인 문국현이 대선에서 초라한 성적표를 얻자 이내 공중분해됐다. 상기한 전례들과 최근 합종연횡 흐름 사이 유사성이 있다면, 상황 논리에 몰린 정치인들의 생존 경쟁이라는 점이다. 모두가 그럴 듯한 이유를 대지만, 이념적으로나 정책적으로 큰 차이를 보이지 않는 자들이 ‘적’과 ‘동지’를 구별지으며 이리저리 움직인다.
선거 전 합종연횡은 대개 의원직 유지와 자파의 패권에만 관심을 보이는 보수정당 정치인들의 전유물이었다. 엘리트 중심 정치는 보수정당들의 특징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한데 이번에는 진보정당 출신 인사들의 이합집산도 도드라진다. 2020년 총선에서 출현한 위성정당들도 다시 재현되고 있다. 일련의 파국적 양상을 어떻게 봐야 할까? 그리고 사회운동의 강화와 재구성을 통해 한국 사회의 모순에 맞서고, 진정한 변화를 만들고자 하는 사람들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
총선용 제3지대의 물결
이른바 ‘제3지대’의 첫 걸음은 금태섭과 양향자가 뗐다. 제21대 국회의원 선거 경선 패배 후 탈당한 금태섭은 서울시장 보궐선거 출마를 선언했다가 당시 국민의당 소속으로 출마한 안철수와 단일화했고, 나중에는 국민의힘 오세훈의 선거운동을 도왔다. 미투 운동에 대한 우호적 표현 등을 통해 안철수·오세훈과는 다른 ‘합리적 자유주의자’로 인식됐기 때문에 금태섭의 이런 행보는 그를 좋게 보던 이들을 당황케 했다. 심지어 2022년 대선 땐 윤석열 대선 캠프에 합류했다.
삼성그룹 임원 출신인 양향자는 2016년 초 문재인 전 대통령의 권유로 정계에 입문해 2020년 총선에서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입지전적인 성공 신화를 이룬 기업가답게 그는 임기 내내 친기업적 행보를 보여왔다. 민주당 정치인들은 반기업적 정서를 갖고 있다는 보수언론들의 선동과 달리, 민주당의 본질은 언제나 친자본이었다. 외환위기 직후 김대중 정부가 밀어붙인 정리해고제, 노무현 정부 시기 삼성맨 출신 인사들의 청와대 진입과 노동법 개악 등 민주당의 궤적은 대체로 자본가들에겐 우호적이고 노동자에겐 억압적이었다. 양향자의 정치 활동은 민주당의 이런 본질을 잘 반영한다. 민주당 최고위원으로 활동하던 2017년 그는 삼성전자 반도체공장 산업재해 피해 노동자 및 유가족들을 위해 농성하던 사회운동단체 반올림을 향해 “유가족을 위해 활동하는 것이라면 모르겠지만, 그것도 아니다. 전문 시위꾼처럼 귀족노조들이 자리를 차지하는 방식으로 (활동)한다”고 비난한 바 있는데, 피해자와 유가족, 반올림 활동가들의 오랜 투쟁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듯 이는 역겨운 악담에 불과하다. 삼성 반도체공장의 재해에 맞선 반올림의 요구는 본질을 벗어난 적 없으며, 삼성전자 공장 노동자들의 안전을 확대하는 지난하고도 헌신적인 여정이었다.
금태섭과 양향자 둘이 휘두르던 ‘제3지대'라는 깃발에 난데 없이 정의당 한켠으로부터 화답이 들려왔다. 정의당 내 의견그룹이었던 ‘세번째권력’은 2022년 정의당 대 표 선거 당시 직무성과급제 등을 제기하면서 노동자계급 내 불평등이 노동조합의 경제투쟁 때문이었다고 주장했다. 이에 따라 '진보정당노선 폐기'를 선언하고 금태섭이나 이준석과의 친화성을 공공연하게 자랑하기도 했다. 지난 봄 조성주는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노동조합 구성원들의 소득 수준을 보면, 대부분 상위 20%에 들어가 있어요. 이 사람들의 소득이 계속 올라가는 게 정말 불평등을 완화하는 걸까요?”라고 말한 바 있다. 이는 노동조합의 비정규직 조직화 노력과, 노동조합을 통한 비정규직의 임금 상승이라는 엄연한 사실, 노조 조직률과 소득불평등 완화가 정의 관계에 있다는 연구 등은 무시하고 잘못된 통념에만 기댄 주장이지만, 민주노총 출신의 일부 인사들조차 이런 주장에 편승해 전략 없는 ‘양보론’과 도덕주의적 비난을 쏟아 냈다. 조성주는 “진보 타이틀도 버릴 수 있다”고 호기롭게 선언했는데, 비슷한 정서를 내재하던 기자들은 이를 떠들썩하게 보도해주었다. 언론의 호들갑과 달리 당내 호응이 크지는 않았지만, 차기 리더로 부각되던 인물들이 선로를 바꾸자 정의당 리더십의 공백이 도드라졌다. 정의당의 위기는 이를 반영한다.
제3지대의 이념
조성주와 함께 세번째권력을 만든 류호정 전 의원(버티기 논란 끝에 탈당을 선언했다)은 여러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정의당 실패 원인을 금태섭 및 양향자 같은 보수주의자들과 같이 당을 만들지 않기 때문이라고 호도했다. 정의당과 녹색당의 노선이 때로 불분명해 보이는 건 사실이지만, 금태섭-양향자와는 무시할 수 없는 차이가 있다. 금태섭-양향자는 ‘신자유주의적인 포용국가/복지국가 노선’에 가깝고, 노동권을 확장하는 것보다는 시장주의를 대세로 인정한 채로 노동권을 제한해 발전국가 모델을 갱신하는 산업정책을 추진하는 수준에 머무른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미래가 이미 종언을 고했다는 것을 안다. 대출 이자 간신히 내며 사는 평범한 사람들에게 신자유주의 포용국가 모델은 후쿠야마 신드롬을 소환하는 겁박일 뿐이다.
류호정 등은 일련의 비판들에 대해 응답하는 대신, 계속해서 사회적 통념과 보수언론을 활용해 자신이 하고 싶은 주장을 이어갔다. 이런 게으른 선동은 정치주의자들이 그토록 애정해마지 않는 ‘(제도)정치’를 후퇴시키고, 정치적 쟁점을 둘러싼 토론 문화를 붕괴시킨다.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기는 게임에서 권리를 상실하는 것은 말할 권리조차 주어지지 않은 평범한 사람들이다.
강서구청장 보궐선거 직후 정의당 박원석 전 의원을 비롯한 일부 인사들은 이정미 전 대표의 사퇴를 촉구하며 “정의당에는 다른 이념과 노선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들은 정작 자신들이 무슨 노선을 갖고 있는가에 대해서는 밝히지 않았다. 유일하게 드러낸 차이가 있다면 총선 시기 전술뿐이었다.
정의당의 위기는 특정 개인들의 위기이기보다는 정의당식 진보정당 이념·노선의 위기이자 조직의 유기적인 운영원리가 마비된 조직이 보이는 일반적인 특성을 드러낸다. 따라서 정의당의 위기를 질책하려면 각자의 성찰과 혁신을 동반하지 않으면 안 된다. 비판자들 자신도 모르는 ‘새로운 노선’을 당대표라고 한들 알 수 있을까? 비판자들은 자기 혁신 대신 전향을 택했다. ‘이 당에서는 국회의원 뱃지 못 달겠구나’라는 값싼 오욕이 성찰과 혁신의 책임감마저 뭉개버린 셈이다. 결과적으로 이탈자들이 택한 노선이 이낙연 신당에 불과하다는 점은 이를 방증한다.
탈당 이전에 금태섭류와 통합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은 문화적으로는 진보적이고 사회경제적으로는 보수적 대안을 혼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런 주장은 자못 영국 토니 블레어식의 ‘제3의 길’을 떠올리게 한다. 당시 영국 노동당을 심각하게 우경화하며 등장한 토니 블레어는 영국 사회를 신자유주의적으로 개혁한 장본인이었다. 그는 보수당의 유지를 이어 영국 경제를 금융, 문화 산업 중심으로 개편했고, 다양한 신자유주의 정책을 밀어붙였다. 그는 누구보다 금융자본과 착취의 든든한 지원자였다. 문화적으로는 진보적인 언사를 내뱉을 수 있지만 노동정책에 있어서는 반노조적이었고, 사회정책에 있어서도 대중을 (신자유주의적인) '일하는 복지'의 수렁으로 빠뜨렸다. 그런 점에서 보면 이들의 노선은 정의당을 먼저 탈당했던 이들이 추구했던 노선보다 더 오른쪽에 있다고 할 수 있다.
후안무치 厚顔無恥 인면수심 人面獸心
총선 시간표가 촌각을 다투기 시작하면서 제3지대 합종연횡도 혼잡세를 보이고 있다. 정의당 내에서 이탈의 불을 지피던 ‘세번째권력’ 측은 결국 금태섭 측과 창당을 선언하면서 진보정당과의 영원한 이별을 고했다. 자신의 그룹이 탈당했을 때 류호정 전 의원은 한 달 이상 버티기로 일관하며 의원직을 유지하고자 했다. 겉으로는 “당원들을 좀 더 설득할 것”이라고 했지만, 정의당을 내부적으로 흔들고 의원직 프리미엄을 유지하기 위한 목적이 훨씬 커보였다. 의원 뱃지를 잃게 되면 그만큼 주류언론의 시야에서도 사라지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류호정과 세번째권력에게 당면한 주요 목표는 얼마 후 탈당해 신당을 창당할 것처럼 보이는 이준석과 함께 세력화를 하는 것밖에 없어 보였다. 특히 류호정은 매우 비열한 방식으로 여성운동과 페미니즘을 향한 공격에 동참함으로서 이준석과의 공통분모를 드러내고 싶어했다. 가령 지난해 11월 게임제작사 넥슨의 인기 게임 ‘메이플스토리’의 홍보 영상 속 여성 캐릭터 엔버가 집게손가락 포즈를 취하고 있다는 남초 커뮤니티의 비난이 쏟아졌을 때(일부 남초 커뮤니티 유저들은 “페미들이 은밀하게 남성혐오를 숨겨놨다”며 반발했고, 넥슨 협력업체의 여성 애니메이터를 마녀사냥 대상으로 지목했다) 류호정은 아무 비판적 거리두기 없이 이 대열에 동참했다. 11월 29일 SBS라디오 프로그램에 출연한 그는 “남성 소비자가 많은 서비스에 남성을 조롱하는 의미를 담은 그런 표현을 하면 당연히 문제가 생기는 것”이라면서, “(집게손이) 의도를 갖고 한 행위가 맞는다면 문제”라고 발언했다. 하지만 이후 언론 보도와 내부 증언들에 의해 명백하게 확인되었듯, 논란이 된 ‘집게손가락’ 그림은 남성 직원이 그린 것이었고, 이미 여러 차례 영상을 검수한 바 있던 넥슨 측이 남초 커뮤니티로부터의 비난이 거세지자 아무 근거 없이 협력업체에 갑질을 가했다는 사실들이 확인됐다. 일련의 정황으로 볼 때 이 사건은 근거도 없이 벌어진 터무니 없는 논란이었다고 볼 수 있다. 이번 논란은 터무니 없는 마녀사냥에 의한 갑질과 해고가 뒤따른 사건이었다. “게임회사에서 해고 당했다”는 걸 선전하며 국회의원 뱃지까지 거머쥔 당사자가 보인 행보라고는 믿기지 않는 일이다.
‘새로운선택’ 측은 이후로도 계속 이준석을 향해 민망한 러브콜 공세를 보냈다. 12월 11일 금태섭 새로운선택 대표와 류호정 세번째 권력 공동운영위원장은 기자회견을 열고 “‘병역에서부터 가사까지 성평등’을 추진하겠다”며 “병역 성평등과 관련한 사회적 논의를 시작할 것과 남성 육아휴직 전면화를 제안한다”고 선언했다. 상비병력 규모 축소 등 군축 논의나, 군사주의 문제 등은 완전히 배제한 채 남초 커뮤니티의 마음에 들어야 한다는 일념하에서 제출된 수준 이하의 정책이었다. 한국 사회를 통째로 병영국가로 만들고, 남녀 모두가 전시 태세를 갖추면 성평등이 이뤄진다는 주장은 망상일 뿐이다. 새로운선택 측의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이준석은 “대단한 입장 전환이라고 보지 않는다”며 냉담한 반응을 보였다.
류호정이 보인 인면수심의 ‘끝판왕’은 반년 넘게 반조직적인 행보를 지속하고 탈당을 예고하면서 의원직 유지를 위해 정의당에 서 탈당하지 않고 버틴 것이었다. 그는 실제로는 새로운선택 일정이나 입장에 함께 하면서, 여러 미디어에 등장해 진보정당 노선을 조롱하는 언사를 멈추지 않았다. 그러나 이런 행보는 오히려 역효과를 불러왔다. 정의당 내에서 류호정의 견해에 동의하는 당원은 거의 없었고, 판단을 유보하던 사람들조차 류호정의 행보를 비판했다. 당 밖에서도 류호정의 행보는 새로운 지지세력을 끌어안기보다는 부정적 인식만 높였을 것으로 보인다. 연초 국민의힘에서 탈당한 뒤 이준석 전 대표의 개혁신당에 합류한 허은아 전 의원은 1월 10일 라디오 방송에 출연해 “저 개인적으로는 직에 연연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배지 던지는 것 자체가 큰일은 아니었다”며, “먼저 제가 예의를 지키면서 당에 대한 도리나 보좌진에 대한 의리, 이런 것들에 대한 큰 걱정거리가 더 있었다”고 말했다. 보수정치인 허은아의 행보에 ‘새로운선택’의 지저분한 버티기 전략은 더 우스꽝스러워졌고, 결국 류호정은 며칠 후 정의당 탈당을 선언해야 했다.
위성정당 재방송
이른바 ‘제3지대’의 스펙트럼에 비윤 반민주 신자유주의 정치세력들만 포진해 있는 것은 아니다. 세번째권력 탈당보다 앞선 지난해 7월 정의당에서 이탈한 40여 명은 “민주당보다 노무현답게, 정의당보다 노회찬답게”라는 기이한 슬로건을 채택한 ‘사회민주당' 창당을 선언하고 창준위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이들은 금태섭이나 조성주류와는 다르게 기본소득당이나 열린민주당이라는 민주당 위성정당들과 함께 움직이고 있다. 정의당 내 의견그룹으로 활동할 때에도 이미 민주당에 대해 비판적 포지션을 이어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민주당과 친화성을 높여야 한다고 주장해온 그룹다운 선택이다. 유일한 차이가 있다면 페미니즘의 다양한 실천태들에 대해 비난해왔다는 점에 있다.
지난 1월 15일 기본소득당 용혜인 의원은 열린민주당, 사회민주당 창준위와 함께 ‘개혁연합신당'을 제안했다. 민주당을 모종의 둥지로 삼아 정의당, 녹색당, 진보당 등까지 포괄하는 비례용 위성정당을 만들자는 것이었다. 지난 21대 총선의 위성정당이 각각 거대 보수 양당의 주도로 만들어진 것이라면, 겉으로 보기에 민주당 바깥의 소수정당들이 비례연합정당을 제안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여의도 안팎의 다수가 이미 알고 있다시피 이는 기본소득당의 주체적인 기획이 아니다. 이미 한두달 전부터 노회한 거간꾼들이 민주당과 진보정당들을 들락날락거리며 이러한 구상을 제안해왔고, 묵묵부답이던 민주당으로부터 다소 긍정적인 신호가 들리자 기본소득당 등이 제안하는 모양새를 취하며 위성정당 시즌2의 포문을 연 것이다. 시즌1에서 이들은 자유한국당(현 국민의힘)이 먼저 미래한국당이라는 비례용 위성정당을 만들었기 때문에 피할 수 없지 않느냐는 핑계를 댔다. 이제는 적당히 둘러대면 그런 핑계조차 불필요하다고 느끼는 모양이다. 이쯤이면 여의도 최고의 철면피라는 칭호가 과하지 않다.
일주일 뒤인 1월 23일에는 시민사회운동의 이른바 ‘원로들'이 모여 '정치개혁과 연합정치 실현 시민회의' 발족 기자회견을 개최했다. 이들은 “현행 준연동형 비례대표 방식의 선거제도를 22대 총선에서 유지하고 주장하는 이유는 이 제도가 완벽해서가 아니”라며 “미완의 개혁이라고 포기하거나 과거로 회귀하지 말고 표의 등가성을 더 강화하는 제도로 발전시켜 나가기 위해 22대 총선과 이어질 22대 국회에서 정치개혁대연합을 형성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 “민주당이 먼저 연동형 선거제도 유지 발전, 민주개혁진보 대연합을 결단하고 진보정당이 적극 협력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이에 진보정당들 중 진보당이 호응하고 나섰다. 2월 2일 진보당은 기자회견을 열어 “22대 총선에서 윤석열 정권 심판을 위한 민주·진보개혁 대연합 실현에 최선의 노력을 다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가치연대, 정책연대를 실현해야 한다"고 밝혔는데, 진보정당과는 전혀 다른 경로를 밟아온 민주당과 대체 무슨 가치연대를 펼칠 수 있는지 설득력있게 밝히지 못했다. 더구나 최근 급변하는 한반도 정세에서 진보당은 어느 정치세력보다 과거 민주당의 대북 정책에 대해 비판적이어야 한다. 모든 것을 파국으로 귀결시켰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역사적 맥락과는 무관하게 모든 주장이 비논리적으로 ‘반윤석열' 논리로 수렴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민주당 위성정당으로의 합류가 진보당에게 몇 석을 더 안겨줄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이는 사회변혁운동 혹은 체제전환운동의 진전과는 거리가 멀다. 민주노총의 정치세력화 원칙과도 한참 거리가 멀다.
결국 2월 5일 민주당 이재명 대표는 기자회견을 열어 오는 4월 총선에서 “현행 준연동형 비례대표제를 유지하되 ‘통합형 비례정당’을 추진하겠다"고 발표했다. 지난해 11월 “멋지게 지면 무슨 소용이냐”고 발언하면서 ‘병립형 비례제 회귀’를 택할 것으로 전망됐던 것에 비하면 완전히 상반된 결론이다. 민주당 내 100여 명의 국회의원들의 병립형 회귀 반대 입장, 시민사회의 비판 등이 압력으로 작용했으리라는 것이 전반적 평가다. 냉정하게 따져보자. 병립형으로 회귀할 경우 민주당에게 정말 유리하다고 볼 수 있을까? 연초에 자기 지역구를 순회하며 여론 동향을 살핀 출마자들은 상대 후보(국민의힘)와의 지지율 간격이 매우 좁다는 것을 간파했을 것이다. 병립형으로 회귀할 경우 복수의 군소정당 후보들이 곳곳에서 출마하는데 이럴 경우 석패가 줄을 이을 것이라고 감지한 셈이다. 이런 이해타산을 생각했을 때 현직으로서 지역구 재선을 노리는 민주당 정치인들로서는 병립형 회귀보다는 준연동형 유지가 오히려 실리적 선택이다.
민주당 이재명 대표는 “정권 심판과 역사의 전진에 동의하는 모든 세력과 함께 준연동제의 취지를 살리는 통합형 비례정당을 추진하겠다”며 ‘민주개혁선거대연합’ 구축을 선언했다. 지난 총선 때처럼 다시 위성정당을 만들겠다는 것이다. 준연동형 비례제에 반대하면서 마찬가지로 위성정당을 만들었던 국민의힘은 겉으로는 이 결정을 비난하면서 이 미 위성정당을 빠르게 추진하고 있다. 결과적으로 이번 4월 총선은 지난 총선과 유사한 구도 속에서 여야만 바뀐 모양새로 치러질 것으로 보인다. ‘개혁'도, ‘미래'도, ‘진보'도 없는 지루한 재방송을 볼 시간이 남아있다.
22대 총선을 맞이하는 사회운동의 자세
오늘날 전 세계 어느 나라를 보아도, 경기침체가 만성화되는 국면에서 대중의 역량과 무관한 ‘사소한 개혁’조차도 일어나지 않는다. 금융 권력은 그런 상황을 원하지 않고, 보수적인 정치권력도 마찬가지다. 진보정당의 노선을 버려야 한다고 섣부르게 주장하는 사람들은 그런 세계를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한다. 반면 사회운동은 그런 세계의 문법을 인정하지 말고, 대중운동의 역량을 키워 다른 대안을 현실화해야 한다고 여긴다. 정의당이나 녹색당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영 불안하고 판단이 서지 않는 진보적인 시민들이나 활동가들에게 이 쟁점이 중요한 이유는 여기에 있다. 저 악다구니는 사회운동이 대안이 아니라고 여기는 사람들이 아주 희미하고 불안하게 남아있는 전통을 무너뜨리는 시도와 무관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회변혁 노선과 멀어지지 않고자 하는 진보정당들이 사회운동과 멀어 지지 않으려면, 설령 6석짜리 원내정당에서 2~3석짜리 정당으로 추락하더라도 최소한 위성정당에 동참하라는 썩은 동아줄만큼은 거부해야 한다. 그것으로의 동참은 ‘위성정당이 옳았다’거나 ‘제3지대로의 이탈이 옳았다’는 암묵적인 신호나 다름 없다. 당장 이번 선거에서 국회의원수가 줄어들지라도, 대중운동과 자신의 이념/노선(혹은 ‘가치')이라는 기준을 져버려선 안 된다. 이번 총선에서 진보정당이 취할 수 있는 길은 ‘잘 버티는 것'에 있다. 이것은단지 수세적이고 소극적인 대응이 아니다. 오히려 공세적으로 진보정당 노선의 이념과 가치를 알리고 이 길을 지지해온 민중들에 대한 신뢰를 저버리지 않는 길이다. 지금은 잘 버티는 것이 미래에 승리하는 길이다. 한국 사회에는 어떤 일이 있어도 진보정당의 길에 지지를 보내온 10퍼센트의 사람들이 있으며, 다른 군소정당들이 위성정당 물결에 합류할 때조차도 그 길을 지켜야 할 가치가 있다.
기억상실증에 걸린 환자들로 가득한 제도정치판의 혼세에 맞설 가장 좋은 태도는 우리 자신의 자리를 지키며, 보다 먼 미래를 내다보며 밭을 가는 것에 있다. 엘리트주의자들은 거들떠도 보지 않겠지만, 그들이 뭐라고 생각하건 사회운동 혁신과 재구성을 통해 기반을 강화하고, 이를 준거 삼아 진보정당운동을 새롭게 시작하는 것이 필요하다. 제도 바깥의 사회운동은 오랫동안 제도정치와 무관한 흐름을 경과해왔는데, 이는 '정치'를 진보정당에 외주화한 후과였다. 하지만 제도정치가 추락한 국면에서 더 이상 '정치'가 진보정당에 외주화할 문제는 아니라는 점은 명약관화하다. 이는 노동조합을 포함한 노동자운동을 비롯한 사 회운동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정치세력화'라는 테제의 핵심은 정치의 ‘(진보정당으로의) 외주화’가 아니라, 민주노조 정치사업의 대중화, 사회운동 자신이 정치를 하는 것 그 자체에 있다. 우리가 사랑할 수 있는, 유의미한 정치운동은 이러한 토대 속에서만 만들어질 것이다. 이제 그런 정치운동을 본격화해야 한다.
글 : 홍명교
교열 : 박상은 류민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