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시대에 무슨 책을 읽느냐에 따라서 독서라는 행위의 의미는 크게 달라질 수 있다. 날마다 불안정 노동에 시달리는 인구가 증가하고, 그중 수많은 사람들이 매우 열악한 환경 속에서 목숨 걸고 일하면서 생계를 유지하고 있는 이 시대에 산재 사망자들의 이야기를 다룬 책을 읽는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를 갖는가? 신다은 기자님과 함께 『오늘도 2명이 퇴근하지 못했다』(2023) 플랫폼c 책모임에 참석하면서 이 질문을 반복적으로 떠올릴 수밖에 없었는데, 이 짧은 글을 통해서 그 의미에 대해 반성해보고자 한다.
지난 7월 『황해문화』 창간 30주년 기념 심포지엄에서 김정희원 교수는 “노골적으로 왜곡된 의미의 ‘자유’와 ‘법치’를 내세우며 폭력을 정당화하는 윤석열 정부”를 분석하기 위한 하나의 이론적 틀로서 ‘신자유주의적 처벌 국가’라는 개념을 제안하였다. 그에 따르면, 신자유주의적 처벌 국가는“‘자유’와 ‘시장’의 이름으로 개인을 소외시키고 원자화하며, 동시에 다양한 처벌 기제와 공권력 수행을 통해 개인을 사회로부터 축출하고 범죄화”한다. 신자유주의가 필연적으로 양산하는 사회불안을 해결하기 위해 부를 재분배하거나 사회안전망을 확충하는 것이 아니라 공권력을 동원하여 “국민을 돌보지 않는 권력을 정당화하기 위해 각종 처벌 기제를 전시하고 활용”한다는 것이다. ‘신자유주의적 처벌 국가’라는 개념의 이론적 정합성 및 윤석열 정부에 대한 비판으로서의 적절성 등에 대해서는 별도의 논의가 필요하겠지만,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에서 ‘신자유주의’와 ‘처벌’이 서로 결합하는 방식을 드러내는 것은 한국사회의 주변부로 내몰린 이들의 삶과 죽음을 이해하고, 그들의 권리를 되찾기 위해 투쟁하는 과정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작업임이 분명하다.[1] 신자유주의적 처벌 국가에 관한 논의에서 다루는 ‘처벌’은 주로 신자유주의적 사회질서에 대항하거나 그 질서에서 이탈하는 이들에게 공권력이 직접적으로 가하는 (주로 법적인 형태의) 처벌을 의미하지만,[2] 그와 같은 처벌기제를 가능하게 하는 조건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더 넓은 의미에서의 ‘처벌’, 즉 특정 인구집단을 ‘죽게 내버려두는’(letting die) 구조와 그것을 용인하는 사회적 인식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3] 신자유주의 체제는 그 체제에 어쩔 수 없이 참여하다가 죽고 다치는 이들에 대해서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는다. 사람의 목숨보다 효율성을 중요시하는 무한경쟁의 체제에 내몰린 이들이 겪는 신체적×정신적 고통은 오로지 당사자의 ‘개인적 과실’로 환원되며, 이러한 체제의 유지를 가능하게 하는 것 중 하나는 ‘가난은 죄’이고 그러한 불행 속에서 살아남는 것은 오로지 개인의 몫이라는 사회적 인식이다. 이러한 인식은 현재 대한민국의 일종의 ‘시대정신’이라고 할 수 있는 능력주의적 공정담론과 깊이 연계되어 있다.[4]
신자유주의적 사회질서의 비인간성에 항의하는 목소리들이 능력주의 이데올로기에 의해 묵살되는 이 시대에 신다은 기자의 『오늘도 2명이 퇴근하지 못했다』(2023)를 읽는 것은 특수한 의미를 갖는다. (책 뒷표지의 소개문구 그대로) “‘자연스러운’ 일이 된 일터의 죽음을 ‘당연한’ 것으로 남겨두지 않으려는 이들을 위한 기록”인 이 책을 읽고 그 내용을 남들과 나누는 행위는 단적으로 말해 취약 노동 자들의 애도 가능성을 둘러싼 담론적 투쟁에 참여하는 한 가지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애도 가능성(grievability)이란 우리 사회에서 어떤 계급, 성별, 집단 등에 소속되어 있는 사람의 죽음은 마땅히 공적 애도의 대상으로 대우받는 반면, 사회로부터 배제된 이들의 죽음은 애도는 커녕 사회적 관심조차 제대로 받지 못하는 불평등한 상황을 비판하기 위해 미국의 철학자 주디스 버틀러(Judith Butler)가 사용하는 개념이다.[5]
“누구의 삶이 공적 애도의 대상이 될 수 있고 누구의 삶은 그렇지 않은가”라는 질문을 던지며 버틀러는 우리 사회가 애도 가능한 이들, 즉 “그들이 죽었을 때 그들이 애도될 것이라고” 인식되는 이들의 삶을 유지하고, 그들의 미래를 보장해주는 방식으로 조직되어 있음을 지적한다.[6] 사회적 불평등은 애도 가능성이 불평등하게 할당되는 방식을 고려하지 않고서는 이해될 수 없고, “사회적 불평등에 대한 투쟁은 차별적인 애도 가능성에 대한 투쟁이어야만”[7] 한다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애도 가능성에 대한 투쟁은 폭력적 제도, 정치, 국가들에 저항하는 비폭력 정치의 필수요소다.[8] 이 투쟁이 모든 생명의 평등한 지속가치와 애도가치를 부각시킴으로써 특정 인구를 보호×애도할 가치가 없고 따라서 폐기가능한 것으로 취급하는 죽음의 정치(necro-politics)에 대항하기 때문이다. 매일같이 일터에서 노동자가 사고로 사망하고, 이에 대한 유가족들과 시민단체들의 처절한 항의에도 불구하고 똑같은 사태가 끊임없이 반복되는 한국사회에서 하청노동자들의 삶은 애도 불가능한 것이 되어버렸다. 앞서 언급한 신자유주의적 처벌 국가의 맥락에서 본다면, 한국사회가 취약 노동자들에게 가하는 ‘처벌’은 어떤 특정 형태의 법적 형벌이기 이전에 그들의 애도 가능성을 차단하고 박탈하는 처벌, 즉 그들의 죽음을 누구도 애도하지 않을 폐기 가능한 존재로 만들어버리는 존재론적 폭력이라고 할 수 있다. 노동자들의 죽음에 대한 애도를 차단하는 사회정치적 프레임에 저항하기 위해 일반 시민들이 할 수 있는 최소한의 노력은 바로 그 프레임이 불가능하게 만들고자 하는 애도를 적극적으로 실천하는 것이다.[9] 여기서 ‘애도’는 사망자와 그의 유가족들의 고통을 “온몸을 쭈뼛 세워 받아들이고 아파하는”(294) 정서적 측면 뿐만 아니라 철저한 조사를 통해서 사건의 진상을 파악하는 인지적 측면 또한 포함한다. 신다은 기자는 “개별 산재사고의 재해조사를 기관들이 심도 있게 수행하는 것만으로도 최소한의 진상규명이 가능하다”(60)는 점을 강조하며, 이미 잊혀져버린 사망사고들에 대해서도 철저한 조사와 애도가 수행될 것을 요청한다. 철저한 진상조사야말로 사회가 취약 노동자들에게서 애도 가능성을 박탈함으로써 그들에게 가하는 존재론적 폭력이 얼마나 부당한 것인지 밝혀내고, 신자유주의적 처벌 국가가 작동하는 비인간적 원리를 드러내는 작업의 첫 단계가 될 것이다.
노동자들의 죽음에 대한 애도를 차단하는 사회정치적 프레임에 저항하기 위해 일반 시민들이 할 수 있는 최소한의 노력은 바로 그 프레임이 불가능하게 만들고자 하는 애도를 적극적으로 실천하는 것이다.[9] 여기서 ‘애도’는 사망자와 그의 유가족들의 고통을 “온몸을 쭈뼛 세워 받아들이고 아파하는”(294) 정서적 측면 뿐만 아니라 철저한 조사를 통해서 사건의 진상을 파악하는 인지적 측면 또한 포함한다. 신다은 기자는 “개별 산재사고의 재해조사를 기관들이 심도 있게 수행하는 것만으로도 최소한의 진상규명이 가능하다”(60)는 점을 강조하며, 이미 잊혀져버린 사망사고들에 대해서도 철저한 조사와 애도가 수행될 것을 요청한다. 철저한 진상조사야말로 사회가 취약 노동자들에게서 애도 가능성을 박탈함으로써 그들에게 가하는 존재론적 폭력이 얼마나 부당한 것인지 밝혀내고, 신자유주의적 처벌 국가가 작동하는 비인간적 원리를 드러내는 작업의 첫 단계가 될 것이다.
2021년 평택항에서 발생한 이선호 씨 압사사고의 전후 상황에 대한 구체적 묘사로 시작하는(1장) 『오늘도 2명이 퇴근하지 못했다』는 산재사고가 발생하는 주요 유형 다섯 가지를 분석하고(2장), 산재가 은폐되는 과정을 기업, 정부 기관, 노조, 언론의 차원에서 조명한 뒤(3장), 산재사고조사를 더 깊이 있게 수행하기 위한 제언들(4장)로 마무리된다. 24건의 산재사고들을 언급하고, 산재사망자 유가족들의 의견서 두 편을 요약해서 수록한 이 책은 끝까지 “떠나간 이들의 죽음을 가벼이 여기지 않고 마음 깊이 추모”하는 자세를 유지한다(293).[10] 누군가의 죽음을 가벼이 여기지 않는다는 것은 사망사고의 정황을 평면화시키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는데, 이 책의 장점 중 하나는 특정 정치적 논점을 진전시키기 위해 산재사망사례들을 ‘활용’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안전한 일터를 만들 것인가”라는 장기적인 과제에 진지하고 일관된 태도로 집중한다는 점이다. 정부관료와 기업간부들을 악마화하고 무조건적으로 규탄하는 것으로는 결코 안전한 일터를 만들 수 없고, 직접 노동에 참여하는 노동자의 관점에서 현장을 바라보려고 노력해야 하는데, 이 책에서 소개하는 안전 공학자 제임스 리즌(James Reason)의 연구는 이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11] 산재사고가 노동자 개인의 과실로 축소되고 은폐되는 주요 계기 중 하나가 바로 ‘노동자 본인이 안전수칙을 철저히 준수하지 않았다’는 지적인데, 리즌에 의하면 안전수칙과 생산수칙은 본질적으로 상충할 수밖에 없으며, 생산수칙은 생산력 극대화를 위해 설계되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안전수칙 준수의 책임은 오로지 노동자와 일선 안전관리자에게 떨어지게 된다. 이런 상황 속에서 “노동자는 생산량을 맞추기 위해 안전수칙을 위반하고픈 유혹에 맞닥뜨린다”(185)는 리즌의 지적은 생산성의 압박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자신의 안전을 ‘자발적으로’ 희생하게 되는 노동자의 상황을 현실적으로 드러낸다.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양주에 있는 군부대에서 지뢰제거작전에 투입되어 있었던 나 자신도 이 부분에 대해서는 강하게 공감할 수밖에 없었다. 밟으면 발목까지 제거된다고 해서 ‘발목지뢰’라고 불리는 M14지뢰들을 찾기 위해 파주의 산지에 있는 지뢰매설지역을 돌아다니며 탐지하는 것이 나를 비롯한 수많은 병사들의 임무였다. 지뢰제거작전에 투입되기 전에 배부 받는 ‘표준운영절차’(SOP)에는 안전장구류와 안전수칙에 대한 교과서적 설명이 제시되어 있다. 하지만 전문적 훈련을 받지 않은 징집병들이 매일 안전장구류를 전부 착용하고 안전수칙을 철저히 지키며 지뢰제거작전을 수행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지면상 자세히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장구류를 ‘적당히’ 착용하고 안전수칙도 ‘적당히’ 준수하는 것이 간부와 병사 모두의 암묵적 합의로 자리잡았으며, 이에 대해서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모두를 더 피곤하게 만들기만 하는 일이었다. 물론 지뢰제거작전은 공장노동보다 생산성의 압박에서 비교적 자유롭다는 차이가 있지만, 두 노동 사이에는 자신의 몸을 담보로 임무수행의 효율성 또는 개인의 최소한의 편의를 추구하게 된다는 공통점이 있다. 안전과 생산 사이에서 수많은 노동자들이 각자 독특한 방식으로 마주하게 되는 딜레마를 고려하지 않고 오로지 안전수칙의 강화만을 외치는 논의는 진정 노동자들을 위한 안전한 일터를 만들기 위한 논의라고 보기 어렵다.
사망자들의 죽음을 가벼이 여기지 않는 태도는 도의적인 차원을 넘어서 첨예한 정치적 쟁점이 될 수 있는데, 이는 산재의 문제가 저자의 표현대로 “체제 유지를 위해 사고의 의미를 축소하려는 유혹”, 즉 ‘개인적 실수’로 ‘구조적 원인’을 은폐하려는 경향이 지배하는 “서사의 싸움”이자 “기억의 전쟁터”이기 때문이다(258). 산재의 의미가 축소되고 은폐되는 것을 거부하는 시민들의 목소리가 거세지면 주류 언론은 그것을 일종의 ‘위기’로 명명하고, 정부와 기업은 곧이어 ‘위기관리’에 들어가기 마련이다. 그러나 우리가 드러내고자 하는 것은 “치안이 명명하는 ‘복합위기’가 아니라 그것이 은폐하고 배제하는 다중적 재난들”이다.[12] 우리는 ‘위기’로 명명되고 ‘관리’받기를 거부해야 하며, 사회에서 배제당한 이들에게 지속적으로 재난을 부과하는 폭력적 구조를 해체하는 반폭력/돌봄의 연대를 구축해야 한다.[13] 억울하게 죽은 이들에 대한 애도를 치안이 차단하고 통제하는 이유는 결국 그것이 통치의 문제와 직결되기 때문이다. “어떠한 산재사고도 쉽게 단정 짓고 흘려보내서는 안 된다”(262)고 다짐하는, 국가와 기업에게 속지 않고 철저한 진상규명을 통해서 이들의 죽음을 제대로 애도하겠다고 결의하는 시민들이 집결할 때 통치에 균열이 발생한다. 2018년 태안화력발전소에서 사망한 고 김용균 씨의 어머니 김미숙 씨가 “처참히 죽게 만든 것도 모자라 아들에게 사고 책임까지 뒤집어 씌우는”(163)기업의 행태에 표한 분노와 “우리 아들 탓이 아니라고 말해주어 고맙다”[14]고 말하며 흘린 눈물에는 한두 마디로 요약할 수 없는 애도의 윤리가 함축되어 있다. 억울하게 죽어간 사람들에 대한 애도의 윤리를 우리 살아있는/살아남은 사람들이 어떻게 실천할 것인가의 문제는 이 사회의 인간다움을 판가름하는 시금석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신자유주의적 처벌 국가에서 산재 사망자들을 애도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일단 철저한 조사를 통해서 그들의 죽음이 결코 그들의 개인적 과실로 환원될 수 없음을 입증하는 것이다. 그것은 노동자들을 애도 불가능하고 처분 가능한 존재로 취급하는 치안의 프레임에 구멍을 뚫는 것이고, 장기적으로 우리 모두에게 재난을 부과하는 자본주의 체제에 대항할 반폭력/돌봄의 연대를 구축하는 것이다.
버틀러는 감응과 행동의 관계의 활성화, 즉 “증오와 분노를 공동체의 가능성과 혁명의 약속으로 바꾸어내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한다.[15] 현 체제에 대해서 우리 각자가 느끼는 증오와 분노를 다른 체제를 건설하기 위한 힘으로 전환시킬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인데, 이 점에서 사회비판적 저서들을 다루는 책읽기 모임을 꾸준히 유지하는 것은 특히 의미 있는 일상적 실천이라고 생각한다. 책이라는 매개체를 통해서 우리 각자의 내면에 쌓인 불만과 분노의 정념을 (소모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정제된 형태로 주고받고, 그 과정에서 새로운 사회를 향한 실천의 역량을 기를 수 있기 때문이다. 신자유주의적 처벌 국가에서 산재 사망자들을 애도하는 책을 읽는 것은 특별히 정치적인 독서의 경험이었고, 책에 대한 생각을 나누는 자리에서 저자 신다은 기자님과 함께할 수 있어서 더욱 뜻깊었다.
참고 자료
- [1] 사회학자 김동춘은 윤석열 정부의 형벌국가적 양상을 나타내는 대표적인 사례들로 ‘수능 킬러문항 사태’, 10.29 이태원 참사 등을 제시한다.
- [2] 가령 이 주제에 관한 대표적 저서들 중 하나이자 김정희원이 언급하는 로익 바캉(Loïc J. D. Wacquant)의 『가난을 엄벌하다』(Punishing the Poor: The Neoliberal Government of Social Insecurity, Duke University Press, 2009)는 20세기에 미국을 중심으로 서구 국가들에서 신자유주의의 부상과 함께 감옥이 팽창하고 형벌 정책이 강경화되는 양상, 즉 노골적인 형태의 처벌이 확산되는 현상을 분석한다.
- [3] ‘죽게 내버려둠’은 철학자 미셸 푸코(Michel Foucault)가 생명권력(biopower)의 특징을 집약한 정식으로서 제시한 “살게 만들기와 죽게 내버려두기”(making live and letting die)에서 사용한 표현이다.(미셸 푸코,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 11강 참조) 여기서는 생명정치적 맥락보다는 취약 노동자들의 죽음에 대한 애도가 사회적으로 차단된다는 점을 부각하고자 ‘죽게 내버려둔다’는 표현을 다소 축소된 의미로 사용하였다. 푸코와 바캉의 견해 사이에도 몇 가지 중요한 차이점들이 존재하는데, 이에 대해서는 “Crafting the Neoliberal State: Workfare, Prisonfare, and Social Insecurity” in Sociological Forum, Vol.25, No.2, 2010, 204-206쪽 참조.
- [4] 김정희원, 『공정 이후의 세계』 참조.
- [5] 애도 가능성에 대한 논의는 『위태로운 삶』(Precarious Life: The Powers of Mourning and Violence, Verso Books,2004)부터 버틀러의 정치철학적 사유의 중요한 한 축을 이루고 있다.
- [6] 주디스 버틀러, 『지금은 대체 어떤 세계인가』, 156쪽.
- [7] 주디스 버틀러, 『지금은 대체 어떤 세계인가』, 159쪽.
- [8] 여기서 비폭력 정치는 단순히 폭력에 대한 우려로 인해 그 어떤 적극적인 행동도 취하길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불안정하고 위태로운 삶을 살아가는 이들이 권력 앞에서 발화, 행동 등을 통해 자신들이 처해 있는 상황을 내보임으로써 애도가치를 공적으로 인정받기 위해 투쟁하는 정치를 말한다. 주디스 버틀러, 『비폭력의 힘』, 11-41쪽 참조.
- [9] 신다은 기자가 강조하듯, “이들과 유가족에게 사회가 해야 할 최소한의 의무는 각 사람의 죽음의 이유를 충분히 조사해 밝히는 일일 테다.”(294쪽) 애도 가능성과 프레임의 관계에 대한 논의는 Butler, Judith, Frames of War, Verso Books, 2016,특히 2-12쪽 참조.
- [10] 여기서부터 신다은,『오늘도 2명이 퇴근하지 못했다』의 직접인용은 쪽수만 표기하였다.
- [11] 신다은, 154-155쪽, 184-186쪽 참조. 한국에도 『인재는 이제 그만』(2014)이라는 제목의 번역본으로 소개된 바 있는 리즌의 연구를 계기로 재해 예방 이론은 ‘썩은 사과 찾기’에서 재해에 대한 구조적이고 시스템적인 접근으로 나아갔다고 한다. (154쪽)
- [12] 진태원, 「다중재난 시대에 정의로운 전환을 모색하며」, 『황해문화』 120호, 7쪽.
- [13] 김정희원, 「반폭력으로서 돌봄 정치」, 『황해문화』 120호, 130-153쪽.
- [14] 신다은, 161쪽. “현직 직원들이 자신의 실명을 걸고 ‘고인의 과실이 아니다’라고 증언한 것은 엄청난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다.”(226쪽)
- [15] 주디스 버틀러, 『지금은 대체 어떤 세계인가』, 156쪽.
글 : 양진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