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 다시보기 ② | 햇볕정책의 신자유주의적 성격과 사회운동의 새로운 도전

한반도 다시보기 ② | 햇볕정책의 신자유주의적 성격과 사회운동의 새로운 도전

남한 사회운동에서 ‘통일’이라는 틀은 민족주의 담론에 갇혀 있고, 발전주의적 대안 제시의 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2023년 12월 15일

[읽을거리]반전평화한반도 문제 다시보기, 반전평화, 대만, 홍콩, 사회운동, 문재인, 김대중, 노무현

다른 세계로 길을 내는 활동가 모임 주최로 열린 쟁점토론회 「국제질서 변동과 사회운동의 달라진 과제」의 두 발제 중 하나로 제출된 「사회운동, 한반도 문제를 직시하자: 한반도 군비 축소와 평화를 위한 체제전환 운동의 동아시아 정세 인식」을 두 편의 글로 나눴다.

지난 첫번째 글에서는 최근 북조선 통치세력의 대외정세 인식 변화를 비판적으로 짚으면서, 한반도와 동아시아 평화 체제를 구축하기 위해 사회운동의 시야가 어떻게 재구성되어야 할 것인가에 대해 고민했다. 나아가 기존 담론이 어떤 이데올로기로 작동해왔는지 돌아보고, 어떠한 한계로 인해 좌초된 것인지 개략적으로 평가했다.

이번 두번째 글에서는 햇볕정책의 신자유주의적 잠재성은 무엇이었는지 되짚어보고, 이상의 평가와 실천이 응당 남한 사회에 국한되어선 안 되며, 평화를 열망하는 동아시아 전체의 실천과 조응해야 함을 피력하고자 한다.

참고로 이 글에선 남한 사회에서 통상 ‘북한’으로 통칭하는 휴전선 이북의 사회 체제를 ‘조선’ 혹은 ‘북조선’으로 지칭하는데, 그 이유에 대해선 앞선 글에서 보다 자세히 설명했다.

햇볕정책의 신자유주의적 잠재성

기존의 통일 담론은 반공주의적이고 보수주의적인 위치에서건, 혹은 진보적 자유주의 위치에서건 신자유주의 세계화 원리에 의해 잠식됐다. 어느 쪽의 통일 담론이든 통일의 ‘경제성’ 원리가 논거로 활용되며, 양대 기득권 정치세력은 유불리에 따라 통일 담론을 활용한다. 따라서 경기의 변동에 따라 통일에 대한 지지와 반대는 요동칠 수밖에 없다. 이러한 논리는 심지어 통일운동 진영에게도 활용되었으며, 박근혜식의 ‘통일대박론’은 결코 반공 우파들의 전유물이 아니었다.

과거 햇볕정책을 주창한 김대중 정부는 통일 담론을 일종의 신자유주의적인 통합시장 담론으로 뒤바꿨다. 김대중 정부는 평화공존과 경제통합을 '사실상의 통일'로 규정하고, 장기적인 경제통합 시나리오를 제시했다. 첫 단계는 남북 간의 무역자유화로, 북조선을 노동집약적 저부가가치 제조업 생산기지(가공무역형 수출기지)로 전환하고, 남한 경제의 하위 파트너로 통합한다는 계획이었다. 정부와 자본은 언제나 “풍부한 저임 노동력”으로 표현되는 북조선의 조건에 한껏 기대를 가졌다. 이를 위해 김대중 정부는 한미 간의 역할 분담론과 정치-경제 분리정책을 제시했다. 즉 군사안보 대응은 미국이 주도하고, 남한은 북조선과의 경제협력과 사회문화교류를 주도한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 정치 변화와 무관하게 남한 자본이 북조선을 통해 교역하고 투자할 수 있도록 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구상은 남한의 자본주의 질서의 확장을 지지했고, 자본의 지지의 밑거름 삼을 수 있는 것이었다.

따라서 김대중 정부와 이후 노무현 정부까지 이어지는 신자유주의화된 통일 담론, 평화공존 해법을 평화적인 공존을 위한 구상이라고 지칭하기는 민망하다. ‘평화’라는 외피를 활용해 ‘2국가 1체제’라는 흡수통일 효과를 획득하려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영향으로 자민통 그룹에 속한 활동가들조차 통일이 “우리 민족”에게 매우 큰 경제적 이득을 가져다줄 것이라고 선전하며 지지자들을 설득하고 동원해오지 않았던가. 지금의 국제 정세에서 통일담론이 작동하는 방식에 있어서도 이는 간과할 수 없는 문제다.

『자본의 무의식: 자본주의의 꿈과 한민족 공동체를 향한 욕망』에서 박현옥은 이처럼 신자유주의 세계화 이데올로기에 잠식된 통일 담론의 양상을 ‘한인 디아스포라’를 다루는 여러 방식들을 통해 설명한다. 가령 조선족 이주민들이 1990년대 이후 남한으로 이주해 와 주민으로서의 권리를 요구하고 확장하는 과정에서 제기된 재외동포법 제정 등의 요구는 (박현옥에 따르자면) “자본주의적 무의식”이라고 할 수 있는 ‘배상의 정치학’이 활용되었다고 분석될 수 있다.

이를 탈북민들이 맞닥뜨린 현실에 비추어도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는데, 탈북민들은 남한에서 손 쉽게 ‘반공 프로파간다’와 ‘탈북 마케팅’에 활용되며, 동시에 노동시장의 가장 열악한 위치에서 착취 당하는 존재로 살아가고 있다. 기실 누군가에게 탈북은 사실상 “사업”이 됐으며, 탈북민은 소모품 취급을 당하고 있다. 탈북민들은 누군가의 필요에 따라 “먼저 온 통일”이 되기도 하고, ‘귀순용사’가 되기도 하며, ‘거래의 대상’이나 ‘간첩’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통일은 실로 권력자들에게는 위기 극복의 방안이, 당사자들에겐 비참한 비전이 됐다. 따라서 우리는 이와 같은 ‘관점의 한계’가 북핵 문제 해결의 총체적 실패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는 점을 살펴야 한다.

김대중-노무현의 평화공존론은 동아시아 권역의 질서를 신자유주의적으로 재편하려는 시도의 일부였고, 시민사회 전반은 이에 무비판적으로 호응했다는 점에서 한계를 노정했다. 이는 남한 사회운동이 해당 시기 동아시아 자본주의에 대한 분석, 혁신된 사회변혁 이념과 노선이 과소했던 것에서 기인한다.

지난 문재인 정부는 집권 초기 북조선 김정은 국무위원회 위원장과의 정상회담을 화려하게 시도하면서, 한반도 문제의 해결사이자 중재자를 자임한 바 있다. 하지만 이후 미국 매파들에 의해 하노이 회담이 노딜로 끝나고, 그해 여름 판문점 깜짝 만남에서의 약속이 모두 위반되면서 장밋빛 약속은 물거품처럼 사라져버렸다. 이런 결과를 보고 마냥 “미제의 음모”만을 탓할 수 있을까?

남한의 양대 정치세력은 북조선 문제를 여전히 자신들이 역사적으로 습득하고 유지해온 관성대로 접근한다. 반공주의 우파는 내내 흡수통일을 포기하지 않은 채 북조선 경제 상황이 악화될 때마다 공허한 희망회로를 돌리고, 자유주의 우파는 신자유주의적이고 민족주의적인 통일 담론을 그대로 유지한 채로 경제적으로 어려운 북조선을 도와주고 북조선의 군사적 위협(핵문제) 해결을 도모한다는 접근법을 추구한다. 표면적으로 양 세력은 현실 정치와 대외 정책에서 완전히 평행선을 달리며 대결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가난하고 굶주리는 북한’이라는 대상을 설정해 소비하고, 강력한 국방력과 한미동맹에 의한 안보를 추구한다는 점에서, 양자 모두 ‘과거의 북한’만 보려고 한다는 점에서 동일하다. 정욱식은 냉정하게 전자(이명박, 박근혜, 윤석열)를 맹목적 친미주의로, 후자(김대중, 노무현, 문재인)를 공미형 친미주의라고 비판하는데, 어느 쪽이든 지나친 대미 저자세와 친미주의를 유지한다는 점에서 대동소이하다는 것이다.

문재인 정권 이후 진보적 사회운동은 대체로 진보언론들과 정권이 함께 조형한 프레임을 벗어나지 않고, 이를 수용해왔다. 그 때문에 문재인 정권의 대북 정책이 완전히 좌초해버린 이후에도 독자적인 길을 찾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문재인 정권의 대북 정책을 철저하게 비판적으로 평가해야 하는 상황에서도 고별사는 충분히 이뤄지지 않았다.

'좌파단체(?)' 사회진보연대는 북조선의 연락사무소 폭파 등을 비판하는 입장을 개진하기도 했다. 그러나 대안적 입장과 좌파적 실천으로 나아가기 보다는 비판에 멈춰 버린다. 이원론적인 담론 안에서 반공우파 대북노선의 세부항목에 동조하는 등의 양상을 보인다. “남북관계를 감성적 코드로 접근하며 국내정치용 선전에만 치중했다”는 비판은 일리있지만, 북조선이 돌발 행동을 취할 위험성을 강조하고 “환상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외침만으로는 한반도 문제에 대한 “사회운동적 대안”이 무엇인지 알 수 없다.

더구나 이는 자신이 비판해 마지않는 통일운동 그룹의 편향적 노선과 마찬가지로 이원론적 구도에 스스로를 가둔다. 중국의 군비 증강이나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 대한 비판과 더불어, 미국이 아시아·태평양에서 전개하는 군사 전략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비판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통일운동 그룹의 노선을 비판하면서 후자에 대한 비판이 전무하다면 현실적으로 이런 비판은 설득력을 갖기 어려울 것이다.

연결된 위기? 新도미노 이론!

한반도 문제 해법을 둘러싼 하나의 논쟁 사이클이 종료된 것처럼 보이지만, ‘낡은 것은 가고 새것은 아직 오지 않은’ 상태는 지속되고 있다. 이런 가운데 사회학자 백승욱은 『연결된 위기』에서 현재 국제 질서를 “얄타체제 해체”라는 틀로 분석하고,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동아시아 정세를 비관적으로 진단하면서, 오늘날 우리에게 ‘서구적 자유주의’와 ‘중국식·러시아식 권위주의’라는 두 가지 선택지 밖에 남지 않았다고 단정하기도 한다. 2014년 홍콩 우산운동(雨傘運動)이나 대만 해바라기운동(太陽花運動) 등의 사건들이, 같은 해 우크라이나에서 벌어진 유로마이단(Євромайдан)이 그러했던 것처럼, ‘시진핑의 길’에 대당한 ‘서구적 자유주의 권리 지향’으로 기울었음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하지만 해바라기운동은 신자유주의적인 자유무역협정에 대한 반대이기도 했다. 또한 2019년 6월 홍콩에서 폭발한 범죄인 송환조례 반대운동이 내재한 사회적 모순을 위와 같이 규정하는 것은 지나친 단순화로 보인다. 당시의 대중 여론의 다양한 분기를 ‘중국식이냐, 서구식이냐’로 대당시키는 것은 사태의 복잡성과 대만·홍콩 사회에 잠복한 정치경제적 모순을 감추는 효과를 발휘한다. ‘중국식이냐, 서구식이냐’라는 이원론적 선택지에 갇힌 사회운동 내의 한 분파가 대안체제를 지향하지 못함으로써 스스로 함정에 빠졌다고 비판할 수는 있을지 몰라도, 홍콩과 대만 시민사회에겐 오직 두 가지 선택지 밖에 존재하지 않고, 그 너머가 존재할 수 없다고 암묵적으로 단정하는 것은 “이론적 비관주의”보다는 냉소주의적 언설일 뿐이다. 대만에는 (한국 사회운동이 그렇듯이) 노동당식의 친중좌파 노선도, 민진당식의 서구 자유주의 노선도 아닌 보다 급진적이고 사회운동적이며, 이민자들에게 열려있는 대안 사회를 지향하는 노선 역시 존재한다. 이는 2019년 홍콩 역시 마찬가지였다. 당시 홍콩에서는 홍콩민족주의에 기댄 급진적인 반중 항쟁 노선이 아니라, 전 도시적인 노동자 조직화를 바탕으로 민주적이고 평등한 도시를 만들고자 하는 트랜스내셔널리즘(transnationalism)적이고 좌파적인 경향도 존재했다. 일국양제의 불안정한 조건은 더 이상 이를 지탱하기 힘들게 만들었지만, 홍콩 항쟁을 이끌던 민간인권진선의 사회민주연선과 공당, 직공맹(香港職工會聯盟) 등 핵심적인 활동가 집단이 이런 지향을 갖고 양대 패권 전략 혹은 그것들에 기댄 정치적 경향에 공히 비판적이었음을 망각해서는 안 된다. 그렇게 보지 않을 경우 모종의 ‘도미노 이론’처럼 한국 사회의 선택지 역시 ‘친중’과 ‘친미’ 밖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정치적 겁박을 강화하는 효과만 발휘할 수밖에 없다. 물론 오늘날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위기 현상들은 모두 국제적인 정세과 무관하지 않기 때문에 어떤 위기도 상호간 연결되어 있지 않은 위기는 없다. 하지만 대중봉기에 대한 진단을 단순화시키면, 향후 정세에 대한 진단 역시 단순화시키고 정치적 선택지를 좁힐 수밖에 없다. 위기의 시대에 사회운동의 선택이 ‘어떤 야만이 좀 더 낫냐’를 두고 선택해야 한다는 것은 사회운동과 대안에 대한 총체적 부정과 이데올로기적 기각을 드러낼 뿐이다.

하지만 이런 평가는 지나치게 단편적인데다, 임의적으로 내린 결론에 논거를 끼워맞추었다는 인상을 지우기 어렵다. 대만의 해바라기운동은 '자유주의냐 사회주의냐'의 갈림길보다는 역사적으로 중첩된 중국 정체성에 대한 포기이자, 신자유주의적인 자유무역협정에 대한 저항의 성격을 크게 가졌다는 점을 간과해선 안 된다. 나아가 백승욱이 2019년 6월 홍콩에서 폭발한 범죄인 송환조례 반대운동이 내재한 사회적 모순을 위와 같이 규정하는 것 역시 지나친 단순화로 보인다. 당시의 대중 여론의 다양한 분기를 ‘중국식이냐, 서구식이냐’로 대당시키는 것은 사태의 복잡성과 대만·홍콩 사회에 잠복한 정치경제적 모순을 감추는 효과를 발휘한다. ‘중국식이냐, 서구식이냐’라는 이원론적 선택지에 갇힌 사회운동 내의 한 분파가 대안체제를 지향하지 못함으로써 스스로 함정에 빠졌다고 비판할 수는 있을지 몰라도, 홍콩과 대만 시민사회에겐 오직 두 가지 선택지 밖에 존재하지 않고, 그 너머가 존재할 수 없다고 암묵적으로 단정하는 것은 “이론적 비관주의”보다는 냉소주의적 언설일 뿐이다. 대만에는 (한국 사회운동이 그렇듯이) 노동당식의 친중좌파 노선도, 민진당식의 서구 자유주의 노선도 아닌 보다 급진적이고 사회운동적이며, 이민자들에게 열려있는 대안 사회를 지향하는 노선 역시 존재한다. 이는 2019년 홍콩 역시 마찬가지였다. 당시 홍콩에서는 홍콩민족주의에 기댄 급진적인 반중 항쟁 노선이 아니라, 전 도시적인 노동자 조직화를 바탕으로 민주적이고 평등한 도시를 만들고자 하는 트랜스내셔널리즘(transnationalism)적이고 좌파적인 경향도 존재했다. 일국양제의 불안정한 조건은 더 이상 이를 지탱하기 힘들게 만들었지만, 홍콩 항쟁을 이끌던 민간인권진선의 사회민주연선과 공당, 직공맹(香港職工會聯盟) 등 핵심적인 활동가 집단이 이런 지향을 갖고 양대 패권 전략 혹은 그것들에 기댄 정치적 경향에 공히 비판적이었음을 망각해서는 안 된다. 그렇게 보지 않을 경우 모종의 ‘도미노 이론’처럼 한국 사회의 선택지 역시 ‘친중’과 ‘친미’ 밖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정치적 겁박을 강화하는 효과만 발휘할 수밖에 없다. 물론 오늘날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위기 현상들은 모두 국제적인 정세과 무관하지 않기 때문에 어떤 위기도 상호간 연결되어 있지 않은 위기는 없다. 하지만 대중봉기에 대한 진단을 단순화시키면, 향후 정세에 대한 진단 역시 단순화시키고 정치적 선택지를 좁힐 수밖에 없다. 위기의 시대에 사회운동의 선택이 ‘어떤 야만이 좀 더 낫냐’를 두고 선택해야 한다는 것은 사회운동과 대안에 대한 총체적 부정과 이데올로기적 기각을 드러낼 뿐이다.

과거 백승욱은 "상대에 대한 과소평가가 과대평가보다 훨씬 더 위험한 것이기 때문에", 현실을 밀고 가는 운동은 대중의 낙관주의를 지녀도 좋지만, 현실을 분석하는 이론은 비관주의인 편이 좋다고 말한 바 있다. 이는 충분히 납득할 수 있는 태도이다. 실재하는 현실의 위험성은 비관주의라고 할 만큼 냉철한 인식을 통해서만 포착될 수 있다. 하지만 몇 년 사이 그는 비관주의적이고 냉철한 인식을 넘어서 무리한 정치적 해석을 감행하는 편으로 기울어진 듯하다.

하지만 냉정하게 말해 어떤 학자의 비관주의가 그리 나쁘기만 한 일은 아니다. 문제는 어떤 활동가들이 이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데 그치는 경향을 보인다는 점이다. 이는 사회운동이나 좌파적 노선에 대한 총체적 부정으로 귀결될 뿐이다. 현실을 냉철하고 비관주의적으로 진단할지라도, 대안과 운동을 조직하는 이들의 대응책은 언제나 지금 보이지 않는 것을 믿을 수 있는 낙관주의를 통해서만 현실화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백승욱이 무리하게 비관주의적이고 자유주의적인 이원론으로 진단하는 것에 그쳤던 대만과 홍콩의 급진적이고 대안적인 노선을 상기해야 한다. 대만에는 (한국 사회운동이 그렇듯이) 노동당식의 친중좌파 노선도, 민진당식의 서구 자유주의 노선도 아닌 보다 급진적이고 사회운동적이며, 이민자들에게 열려있는 대안 사회를 지향하는 노선 역시 존재한다. 이는 2019년 홍콩 역시 마찬가지였다. 당시 홍콩에서는 홍콩민족주의에 기댄 급진적인 반중 항쟁 노선이 아니라, 전 도시적인 노동자 조직화를 바탕으로 민주적이고 평등한 도시를 만들고자 하는 트랜스내셔널리즘(transnationalism)적이고 좌파적인 경향도 존재했다. 일국양제의 불안정한 조건은 더 이상 이를 지탱하기 힘들게 만들었지만, 홍콩 항쟁을 이끌던 민간인권진선의 사회민주연선과 공당, 직공맹(香港職工會聯盟) 등 핵심적인 활동가 집단이 이런 지향을 갖고 양대 패권 전략 혹은 그것들에 기댄 정치적 경향에 공히 비판적이었음을 망각해서는 안 된다. 그렇게 보지 않을 경우 모종의 ‘도미노 이론’처럼 한국 사회의 선택지 역시 ‘친중’과 ‘친미’ 밖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정치적 겁박을 강화하는 효과만 발휘할 수밖에 없다. '연결된 위기'라는 제목에서 '도미노 이론'의 재판이라는 인상을 지울 수 없는 이유는 이 때문이다.

  • 💾 도미노 이론(domino theory)은 한 국가의 민주주의가 증가하거나 감소하면 도미노 효과로 주변 국가로 확산되는 경향이 있다는, 냉전 시기 미국에서 유행했던 지정학적 견해다. 도미노 이론을 제기한 냉전주의자들은 한 지역이 공산주의의 영향을 받으면 주변 국가가 그 뒤를 따를 것이라고 우려하면서 동아시아나 라틴아메리카에서의 사회운동을 강하게 탄압하려는 군부 등의 방침을 지지했다. 미국이 베트남에 무리하게 개입해 침공한 것 역시 이것에 기반한 것이었다.

실현 의지 없는 내부용 구호

오늘날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위기 현상들은 모두 국제적인 정세과 무관하지 않기 때문에 어떤 위기도 상호간 연결되어 있지 않은 위기는 없다. 하지만 대중봉기에 대한 진단을 단순화시키면, 향후 정세에 대한 진단 역시 단순화시키고 사회운동 혹은 좌파의 정치적 선택지를 좁힐 수밖에 없다. 위기의 시대에 사회운동의 선택이 ‘어떤 야만이 좀 더 낫냐’를 두고 선택해야 한다는 것은 사회운동과 대안에 대한 총체적 부정과 이데올로기적 기각을 드러낼 뿐이다.

윤석열 정부는 2022년 8월 광복절 축사를 통해 ‘담대한 구상’을 내놓으면서 “북한의 비핵화에서 의미 있는 진전이 이루어질 경우, 북한 경제의 재건을 위한 종합적 지원을 병행하겠다”고 제안했다. 하지만 내용은 전혀 담대하지 않았다. 이전 정부들과 전혀 다를 바 없는 전제(비핵화)와 경제적 실익이라는 떡고물을 제안하는 내용의 재탕일 뿐이었고, 북조선 입장에선 전혀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다. 나아가 윤석열 대통령은 비핵화를 얘기하면서 뜬금없이 “자유는 평화를 만들어 내고 평화는 자유를 지켜줍니다. 한반도와 동북아의 평화는 세계 평화의 중요한 전제이고 우리와 세계시민의 자유를 지키고 확대하는 기초가 됩니다”라며, 자신이 주창하는 ‘자유민주주의’라는 피아구분법을 한반도 문제 해법과 연결지으려 시도했다. 한국적 맥락에서 보수 정치인들이 이야기하는 ‘자유민주주의’는 정치적 자유와 민주적 절차를 보장하는 정치 체제라는 의미와 더불어 반독재와 반공을 지칭한다. 그런 점에서 ‘담대한 구상’은 실현 의지 없는 내부용 구호에 불과해보인다. 실제 김여정 부부장은 담화문에서 ‘담대한 구상’이 “‘비핵⋅개방⋅3000’의 복사판에 불과”하며, “‘비핵화를 취한다면’이라는 가정부터 잘못되었다”고 비판하고, 원색적인 비난을 쏟아냈다. 그러면서 이후 지속적으로 미사일 개발과 시험발사 도발을 이어가고 있다. 지난 시기 여러 시도의 실패로부터의 학습이 없는 정책의 빤한 귀결인 셈이다. 일각에서 대북제재 해제라는 과감한 조치가 병행됐어야 했다고 비판하는 이유는 이 때문이다. 결국 북조선은 “각자 갈 길 가자”는 식으로 남북관계를 정리한 듯하다. ‘담대한 구상’은 레토릭만 화려한 잿더미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실제 김여정 부부장은 담화문에서 ‘담대한 구상’이 “‘비핵⋅개방⋅3000’의 복사판에 불과”하며, “‘비핵화를 취한다면’이라는 가정부터 잘못되었다”고 비판하고, 원색적인 비난을 쏟아냈다. 그러면서 이후 지속적으로 미사일 개발과 시험발사 도발을 이어가고 있다. 지난 시기 여러 시도의 실패로부터의 학습이 없는 정책의 빤한 귀결인 셈이다. 일각에서 대북제재 해제라는 과감한 조치가 병행됐어야 했다고 비판하는 이유는 이 때문이다. 결국 북조선은 “각자 갈 길 가자”는 식으로 남북관계를 정리한 듯하다. ‘담대한 구상’은 레토릭만 화려한 잿더미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 💾 2006년 이명박 정부가 내놓은 대북정책 구상. 정치안보적 상황으로 인해 핵 폐기는 이명박 정부 대북정책의 최우선 명제가 되었고, ‘비핵·개방·3000’은 북한의 핵 포기 결단을 유도하기위해 제시됐다.

대북 문제는 비단 정부 정책에 국한되지 않는다. 그것은 대중조직과 지역사회가 한반도 질서를 인식하는 시각을 관통하며, 우리 사회 전체의 주요 쟁점이다. 따라서 한반도 평화가 위협되고 남북 관계가 수렁에 빠져들수록 사회운동은 보다 명민하고 성찰적으로 자신의 비전과 입장을 갖고 대응해야 한다. 그러려면 우리는 ‘친북이냐 반북이냐’ 혹은 ‘친중이냐 친미냐’의 선택지 안에 우리의 정치를 가둬선 안 된다. 기존의 민족주의적이고 신자유주의적인 통일 담론을 비판적으로 평가하고, 한반도 및 동아시아의 평화 체제 구축을 위해 대안 체제의 상을 제시하고 실천해야 한다.

사회운동은 무엇을 할 것인가

오늘날 한반도 평화는 점차 심각한 위기에 직면해 있고, 이는 동아시아 전역의 전쟁위기 국면을 놓고도 마찬가지다. 사회운동은 다시 자신의 지향을 정립해야 한다. 이를 위해 본고는 통일 담론의 종언에 대한 인식, 반전평화운동의 재점화, 한반도를 넘어 권역적 사고와 실천, 북조선 사회에 대한 이해와 연대가 필요하다고 본다.

지금까지의 통일 담론은 민족주의적이거나 신자유주의적인 담론에 머물렀고, 보편가치를 지향하는 담론은 자신의 정합성을 충분히 증명하지 못했다. 상술했다시피 과거 경협 프로젝트는 비일관적이었고, 그 한계도 명확했다. 기본적으로 경협은 경공업 저임금 노동력을 동원해 남한 자본의 비용을 감축해 이윤율 제고하는 것을 지향했다. 그런 점에서 남북 경협은 동아시아의 글로벌 가치사슬 네트워크에 딸린 갈래에 지나지 않는다. 자본에 의한 흡수통일을 지향하는 발전주의적이거나 신자유주의적인 통일 담론의 열망은 이미 시효가 만료됐다. 즉, 통일 담론은 보수파적 논리에서든, 진보파적 논리에서든 모두 파국을 고했고, 지난 정권 하에서도 2020년 6월 16일 개성 남북공동연락사무소 폭파와 함께 파국적으로 종결됐다.

통일 담론이 종언을 고한 지금, 우리는 ‘더 많은 민주주의’와 평화를 위해 ‘지금 가장 필요한 운동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에서 다시 시작해야 한다. 동아시아 전쟁위기를 넘어 평화를 구축하는 일의 출발점이 ‘통일’은 아닐 수 있다는 사실, 통일 담론이 오히려 평화공존의 전망을 은폐하는 효과를 인식해야 한다. 본고에서 ‘북한’을 하나의 국가로서 인정하는 의미에서 ‘북조선’이라고 호명한 것, 역사적 통일 담론을 비판적으로 살펴본 것은 이런 문제의식에서 비롯한다.

두번째 과제는 반전평화운동의 재점화이다. 전쟁위기가 지속적으로 심화되는 양상이 불가역적으로 보이는 현 상황에서 사회운동은 어떤 입장을 취하고 실천해야 할까? 우선 핵무기 반대와 전쟁 위기에 맞선 대중적 반전평화운동의 필요성은 사회운동이 견지해야 하는 원칙이다. 정욱식에 따르면 2019년 이후 북조선 통치세력의 대외 인식은 상당히 달라졌는데, 북조선 지배세력은 이제 남북관계와 북미관계 개선에 대한 미련을 접었고, 더 이상 핵 협상을 평화협정 체결 및 경제 제재 해소의 지렛대로 삼으려 하지 않는다. 핵무력을 자신의 ‘국체’로 삼게 됐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처럼 ‘새로운 북한’은 대북정책을 원점에서부터 재검토해야 할 과제를 우리에게 안겨주고 있으며, 잠시 뜨거웠던 남북관계의 추억을 점고, 한반도를 위협하는 군사적 긴장을 진정시킬 방법을 찾는 것이 시급한 과제라고 할 수 있다.

최근 한반도 비핵화 실패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현실이 됐다는 사실을 두고 한국 사회에서 가장 힘을 얻고 있는 주장은 “우리(남한)도 핵무장을 하자”는 국가주의적 논리다. 이러한 논리는 역설적으로 미국의 불허로 인해 실현되기 어렵지만, 동시에 한반도 인근에 핵무기의 긴장을 고조시킬 위험이 있다. 미국은 지난 2023년 4월 26일 워싱턴에서 열린 한미 정상회담에서 “핵 전략 무기를 한반도에 주재시키지는 않을 것”이지만, “가까운 곳으로 핵잠수함은 확인할 수 있을 것”이라고 공언한 바 있다. 즉, 한반도에 자신의 핵전략잠수함(SSBN)을 자주 보내겠다는 것이다. 이는 동북아시아 군비경쟁을 고조시킬 수밖에 없고, 자해적 조치가 될 공산이 크다.

‘비핵화’는 표면적으로 누구나 지지한다고 말하는 원칙이다. 문제는 약속과 수순이다. 실제 지난 2021년 11월 북미 간에 이뤄지던 종전선언 협상에서도 ‘비핵화’ 문구는 막판까지 전개되던 이 협상을 파토낸 가장 중대한 쟁점이었다. 궁극적으로 “‘비핵화’는 물건너갔다”고 보는 게 냉정한 현실인데, 그렇다면 우리는 ‘한반도 비핵화’라는 과제를 포기해야 할까? 사회운동은 “여전히 그래선 안 된다”고 이야기해야 한다. 그것을 포기한 순간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은 영원히 불가능할 수밖에 없다. 북의 핵무장 완성이 어떤 사람들에게는 자부심을 심어주는 일이 될진 몰라도, 한반도에서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에겐 크나큰 불행일 것이다. 따라서 보다 장기적으로 내다보면서, 군비 감축을 도모해야 한다. 이때 정욱식은 ‘비핵화’ 개념 대신 ‘비핵무기 지대’(Nuclear Weapon Free Zone) 개념을 제시한다. 그에 따르면 ‘비핵화’란 한 번도 제대로 정의된 바 없는 개념이기 때문에 논의의 주체들에게 많은 혼동을 주며, 기존의 논의에서 그것은 완전히 해결 불가능한 난제가 됐기 때문이다. 여기서 얘기하는 ‘비핵무기 지대’란, 특정 지역내에서 국가간 조약에 의해 핵무기의 생산·보유·배치·실험 등을 포괄적으로 금지하고, NPT상의 5개 핵 보유국들이 비핵지대 조약 당사국에게 핵무기 사용 및 위협금지를 내용으로 하는 소극적 안전보장(NSA : Negative Security Assurance)을 제공하는 핵 군축 방식을 지칭한다. 이때 목표는 해당 지역내에서 핵무기를 배제함으로써 핵전쟁 연루 가능성을 축소하는 것이다. 상기한 목표를 성공적으로 달성하기 위해선 핵 보유국의 NSA 제공과 검증체제 구비가 중요할 것이다. 이를 한반도로 좁혀서 보면, 1992년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에 따라 우라늄 농축 및 재처리 시설을 보유하지 않는다는 점을 확인하고, 그밖에 한반도 밖 핵보유국들이 남북에 “핵무기 사용 및 사용 위협을 가하지 않고 핵무기 및 그 투발수단을 배치하지 않는다”는 것을 법적 구속력을 갖춘 형태로 보장하는 것을 지칭했었다. 물론 이런 합의 역시 단기적으로는 불가능하다. 길게 봐도 지금으로서는 거의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고 말하는 게 타당할 것이다. 정욱식은 “전쟁 방지나 긴장 완화·상호간 위협 감소 조치 등 여건을 하나씩 만들고, 군축이나 제재 해결 등 과제들을 시야에 넣은 채로 추진해나가면 희망의 근거를 찾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어쨌든 핵심은 협상 과정에서 지나치게 꼬여버린 기존 ‘비핵화’ 담론 대신, 보다 이완된 목표를 추구하고 이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군축과 평화체제를 구축하는 것에 있을 것이다. 따라서 사회운동은 ‘비핵화’라는 오래되고 실패한 프레임 안에서 악무한의 논전을 지속하기 보다는, 군축과 평화협정이라는 비전을 위해 단계적인 로드맵을 대중적으로 제시하고, 이를 바탕으로 삼아 군축과 평화 운동의 담론을 구축해야 한다.‘비핵무기 지대’(Nuclear Weapon Free Zone) 개념을 제시한다. 그에 따르면 ‘비핵화’란 한 번도 제대로 정의된 바 없는 개념이기 때문에 논의의 주체들에게 많은 혼동을 주며, 기존의 논의에서 그것은 완전히 해결 불가능한 난제가 됐기 때문이다. 여기서 얘기하는 ‘비핵무기 지대’란, 특정 지역내에서 국가간 조약에 의해 핵무기의 생산·보유·배치·실험 등을 포괄적으로 금지하고, NPT상의 5개 핵 보유국들이 비핵지대 조약 당사국에게 핵무기 사용 및 위협금지를 내용으로 하는 소극적 안전보장(NSA : Negative Security Assurance)을 제공하는 핵 군축 방식을 지칭한다. 이때 목표는 해당 지역내에서 핵무기를 배제함으로써 핵전쟁 연루 가능성을 축소하는 것이다. 상기한 목표를 성공적으로 달성하기 위해선 핵 보유국의 NSA 제공과 검증체제 구비가 중요할 것이다. 이를 한반도로 좁혀서 보면, 1992년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에 따라 우라늄 농축 및 재처리 시설을 보유하지 않는다는 점을 확인하고, 그밖에 한반도 밖 핵보유국들이 남북에 “핵무기 사용 및 사용 위협을 가하지 않고 핵무기 및 그 투발수단을 배치하지 않는다”는 것을 법적 구속력을 갖춘 형태로 보장하는 것을 지칭했었다. 물론 이런 합의 역시 단기적으로는 불가능하다. 길게 봐도 지금으로서는 거의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고 말하는 게 타당할 것이다. 정욱식은 “전쟁 방지나 긴장 완화·상호간 위협 감소 조치 등 여건을 하나씩 만들고, 군축이나 제재 해결 등 과제들을 시야에 넣은 채로 추진해나가면 희망의 근거를 찾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어쨌든 핵심은 협상 과정에서 지나치게 꼬여버린 기존 ‘비핵화’ 담론 대신, 보다 이완된 목표를 추구하고 이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군축과 평화체제를 구축하는 것에 있을 것이다. 따라서 사회운동은 ‘비핵화’라는 오래되고 실패한 프레임 안에서 악무한의 논전을 지속하기 보다는, 군축과 평화협정이라는 비전을 위해 단계적인 로드맵을 대중적으로 제시하고, 이를 바탕으로 삼아 군축과 평화 운동의 담론을 구축해야 한다.

한반도 비핵화가 국제 정세와 무관한 이슈로 만들어졌다는 점을 보면 전 세계적에서 편향적으로 핵무기 개발하는 한쪽의 문제가 동반된 현 상황을 반영하는 것은 안 될 것이다. 한반도 비핵화를 국제적 비핵 질서와 연동시켜 평가해야 한다는 점에 대해선 동일한 과제를 안고 있기도 하다. 따라서 당장 핵무기를 갖냐 아니냐라는 목표가 아니라, 단계적인 군축을 제시해야 한다는 주장을 좀 더 상세하게 설명할 필요도 있다. 이는 단순히 한반도만 국한된 문제가 아니고, 세계 곳곳에서 발생하고 있는 문제이다. 군축과 평화체제 구축의 중요성과 맥락에 대한 설명 역시 필요하다. 물론 이러한 요구는 결코 기존의 발전주의적이거나 신자유주의적인 통일 담론으로는 보편성을 담보할 수 없고, 이는 다시 국제적이고 권역적인 모순에 대한 일국적인 대응으로 반복된다.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범주를 한반도가 아닌 동아시아 전체로 확대하고, 동아시아 민중운동 전반의 지향으로 제시해야 설득력을 갖출 수 있다. 일본 자위대가 난세이 제도에 무제한적으로 미사일 기지를 확장하고, 중국 인민해방군이 남중국해와 동중국해에서 군비를 증강하고 핵무기를 1천 개까지 늘리려고 하는 상황에서는 군축이나 남한 내 시야에 머문 평화운동 수사가 설득력을 갖추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할 때 우리는 중기적으로 동아시아 평화공존 체제를 확립하는 것만이 ‘민족통일’이라는 비전과는 동떨어진 새로운 논의 틀을 통해서 전개될 수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물론 한반도 평화협정 체결이라는 단계는 두 국가로의 완전한 정착 혹은 복합국가로의 전화 등으로 열린 결말을 갖고 있다. 우리는 이를 ‘단일민족국가 수립’이라는 오래된 몽상에 가두지 않아야 한다. 그래야 핵이라는 극단적 수단을 통해 자위권을 행사하려 하는 대결구도를 절대적으로 평화적인 정세로 바꿀 수 있다. 한반도 핵문제를 단순히 동북아시아나 한반도만의 문제가 아니라, 세계 정세 차원에서 군사적 긴장이 고조되는 상황에 대한 지양을 위한 관문으로 여긴다면 말이다.

세번째 과제는 한반도를 넘어 한반도 평화 문제의 시야를 획득하는 것이다. 북조선 체제를 직접적이고 단기적인 통일의 대상으로 인식하는 것과 그렇지 않고 하나의 국가로 인정하는 것의 차이는 명확하다. 전자는 과거의 통일담론이 노정한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다. 아무리 진보적인 지향을 갖는다고 하더라도, 자본주의 현실의 권력구조가 그대로 존재하는 상황에서 두 개의 국가 체제를 하나로 합친다는 것은 전혀 쉽지 않다. 통일 담론이 남한의 자본 침략 논리로 확대된 것이 이미 예견될 수밖에 없는 것은 이 때문이다.

왜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을 둘러싼 논의가 최소한 권역적 사고틀로 확장되어야 하는가? 백영서 등 연구자들은 2010년대에 실천 과제에 대한 질문을 재차 제기하며 “동아시아의 핵심현장”으로 “중화제국-일본제국-미제국으로 이어지는 중심축 이동에 의해 위계지어진 동아시아 질서의 역사적 모순이 응축됐고, 식민과 냉전이 포개진 영향 아래 공간적으로 크게 분열되어 갈등이 응축된 장소”들을 제기한 바 있다. 오키나와(沖縄)와 진먼(金門), 개성 등을 통해 ‘이중적 주변의 시각’을 갖고 국민국가의 틀을 넘어서자는 것이다. 이 세 곳 중 오키나와는 20세기 역사 내내 동아시아 질서의 얼룩처럼 존재해왔고, 이는 진먼도 역시 마찬가지다. 또 2000년대 이래 제주 해군항이 건설된 강정마을은 동아시아 평화운동의 주요한 장소로 부상한 바 있다. 이런 장소들은 한반도 문제를 둘러싼 실천 거점으로 여전히 유의미한 질문을 남기고 있다.

남한 사회운동에서 ‘통일’이라는 틀은 민족주의 담론에 갇혀 있고, 발전주의적 대안 제시의 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담론의 주체를 ‘민족 번영’이라는 지향에 가두어놓고 비전을 설정하기 때문이다. 이제 사회운동은 ‘통일 담론’에 갇혀 있지 말고, 동아시아 평화공존체제 담론으로 이동하고, 창고에서 지난 시기 평화 체제 수립을 위해 나눈 무수히 많은 담론을 상기해야 한다. 남북 평화를 위해 전개되는 기존의 모든 실천이 통일 담론에 흡수된다고 간주할 수는 없다. 사드배치 반대운동이나 한반도 종전 평화 캠페인 등의 실천들이 과거의 통일 담론이 아니라, 다른 지평 위에 놓이도록 이동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때 ‘복합국가론’은 중장기적 전망이 필요한 우리에게 중요한 시야를 제시한다. 복합국가는 단일국가 성립 이전에 남과 북이 각자의 체제를 유지하면서도 일정 한도 내 한 민족이 한 덩어리로 얽히는 국가 형태를 지칭한다. 즉, 국민국가와 대당되는 개념으로, 자민족중심주의와 국가주의의 폐해를 경계하면서도 섣부른 반국가주의의 편향을 범하지 않도록 창안한 것이다. 이러한 복합국가론의 문제의식을 지역 차원에 확대 적용하면 한반도 변혁을 동아시아의 변화를 추동하는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국제정치 연구자인 하바 구미코(羽場久美子)는 2022년 5월 『주간금요일(週刊金曜日)』 기고 칼럼을 통해 “오키나와나 대만을 축으로, 비정부 기구 차원에서 환경·안전보장·평화의 문제를 고민하는 조직을 만들자”고 제안한 바 있다. 그는 냉전 한복판이던 1975년 유럽의 사회단체들과 지방도시들이 선도적으로 「헬싱키 선언」을 천명하고 CSCE(유럽안전협력회의)를 설립했던 것을 사례로 들면서, 동북아시아 시민사회 역시 오키나와를 평화의 허브로 삼아 아시아 국가들과 안보 네트워크를 구축할 수 있다고 역설했다. 우리는 이런 제안을 보다 적극적으로 사유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지금 우리는 한반도 문제에 대한 사회운동의 새로운 태세를 다지고, 오키나와든 강정이든 진먼이든 국경을 넘어선 아래로부터의 반전평화 네트워크를 건설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남한과 일본, 대만 시민사회 간 네트워크는 양국의 군비 경쟁 논리가 잠식하는 시민사회 내 논리를 비판하고, 오키나와와 대만 시민사회의 연대는 난세이 제도 일대의 군비 증강에 브레이크를 걸 수 있다.

끝으로 사회운동은 북조선 사회에 대한 이해를 심화하고 가능한한 연대를 도모해야 한다. 북조선 사회에 접근하고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는 모든 여정이 금기시되는 분위기 속에서 사회운동이 경계를 맞대고 있는 한 사회를 이해하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지금까지 남한 사회 지형에서 그것은 강력한 친밀감 내지는 대상화시키는 어떤 것으로 취급됐는데, 이런 상태에서 이해와 연대란 불가능하다. 따라서 우리는 장기적 전망과 비판적 시야 속에서 북조선 사회를 이해하기 위한 다각도의 노력을 개진해야 하며, 반공주의나 민족주의로 수렵되지 않고, 대안 체제를 지향하는 논거를 확인 및 제시해야 한다.

아마도 이것들 중 가장 인접한 과제는 탈북민 주체와의 만남일 것이다. 그간 남한 사회가 탈북민을 받아들이는 방식은 반공주의 프로파간다의 도구나, 혹은 가장 밑바닥의 저렴한 노동을 담당하는 부품 쯤으로만 취급하곤 했다. 때로 탈북민들은 인종주의화된 차별의 벼랑 끝에 서기도 했다.

“고난의 행군”이 한창이던 시기 함흥에서 자라 열일곱 살 때부터 군 생활을 했던 탈북민 당사자 주승현에 따르면, 남한 주류 사회는 탈북민을 끔찍하게 도구화한다. 주류 언론들은 탈북민들을 상품화하고 반공주의적 모델로 연출해왔고, 노동시장은 극심한 경쟁주의로 얼룩져 있다. 그는 자신을 비롯한 여타의 탈북민들, 남한의 경쟁 사회에서 상처받은 사람들, 남쪽도 북쪽도 선택할 수 없어 제3국으로 가 난민이 된 사람들, 또 분단 문제에 대해 치열하게 사고하다 북한에 갔다가 고통받은 무수히 많은 사람들을 ”조난자들“이라고 일컫는다. 사회운동은 이 조난자들과 만나야 한다. 남한 사회가 탈북민과 관계를 맺는 새롭고, 평등하며, 모범적인 방식을 가시화해야 한다. 이는 미래에 남한 사회와 북조선 사회가 서로를 인정하고 교류할 수 있는 준거틀이 될 수 있다.

고통이 예견되는 미래는 막연하게 현재를 부정하는 게 아니라, 과거를 새롭게 기억함으로써만 변화시킬 수 있다. 매우 요원해보이는 한반도와 동아시아 평화도 마찬가지다. 그 과정은 매우 지난하고, 국내에서 무수히 많은 논쟁을 감수해야 한다. 따라서 이런 과정에서 사회운동은 한반도 문제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분명히 견지해야 한다. 이제 체제전환운동은 다양한 주체들과 실천의 재구성을 필요로 하는데, 한반도 문제 해법에 대한 남한 시민사회 및 대중조직에서의 복합적인 ‘재인식’은 이런 재구성을 위한 기반이 될 것이다. 민중의 평화는 아래로부터의 반전평화 대중운동을 통해서만 가능하며, 국가주의적 프레임이 민중의 안위를 위협할 때조차 마찬가지다. 한반도 문제를 있는 그대로 직시하고, 남북이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은 그 출발이다. ‘민족’이라는 이름 안에 묶이지 않는 보다 다양한 주체들이 포괄되고, 노동권과 평등, 민주주의가 약속될 수 있는 ‘어떤 통일’의 미래는 평화공존 체제가 수립되고 양국 시민들에 의한 상호교류가 완전히 가능해질 때, 완전히 해체된 통일 담론의 붕괴된 폐허 위에서 제로부터 생각해도 늦지 않다.

참고 자료

  • 문영심, 『탈북 마케팅 : 누가 그들을 도구로 만드는가』, 오월의봄, 2021
  • 정욱식,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새로운 북한이 온다』, 2023, 서해문집
  • 사회진보연대, 「북한 정권이 문제다. 남한 사회운동은 정세를 직시해야 한다!: 남북공동연락사무소 폭파한 북한 정권을 규탄한다.」, 『사회운동포커스』, 2020. 6. 18.
  • 백승욱, 『연결된 위기 :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한반도 핵위기까지, 얄타체제의 해체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생각의힘, 2023
  • 羽場久美子, 「‘中国の封じ込め’ではなく共同を 沖縄を平和のハブとしてアジアと結ぶ」, 『週刊金曜日』, 2022年5/13号
  • 주승현, 『조난자들 : 남과 북,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이들에 관하여』, 생각의힘, 2018

글 : 홍명교